|
고흥 팔영산
2024년 04월 21일(일요일)
산행코스 : 팔영산탐방센터(09:30) - 유영봉(1봉)(10:35) - 사자봉(4봉)(10:55) - 적취봉(8봉)(11:40) - 깃대봉(11;50) - 탑재(12:25) - 능가사(13:15)
산행거리 : 9.4km
팔영산탐방지원센터
탐방로 입구 0.7km, 팔영산야영장 0.6km, 능가사 0.1km, 고흥분소 0.1km, 주차장 0.1km
능가사
좌측 유영봉 , 우측 적취봉 들머리
예전 팔영산 1봉~8봉 정상석을 모아 놓았습니다.
팔영소망탑
팔영 47-01 이정목 해발221m
흔들바위
팔영 47-02 이정목 해발289m
유영봉 0.6km, 주차장 2.0km
주차장 2.2km, 유영봉 0.4km
주차장 2.4km, 유영봉 0.2km
유영봉이 가까워질수록 가파르고 험해집니다.
유영봉사거리
주차장 2.6km, 팔영산자연휴양림 1.4km, 성주봉 0.3km, 유영봉 0.1km
팔영 47-03 이정목 484m
유영봉(제1봉)
유달은 아니지만 공맹의 도 선비례라
유건은 썼지만 선비풍채 당당하여
선비의 그림자 닮아 유영봉 되었노라.
뒤돌아본 유영봉(제1봉)
가야할 성주봉(제2봉)
성주봉삼거리
유영봉 0.2km, 성주봉 0.1km, 팔영산자연휴양림 1.4km
팔영 47-04 이정목 해발511m
성주봉(제2봉)
성스런 명산주인 산을 지킨 군주 봉아
팔봉 지켜주는 부처 같은 성인바위
팔영산 주인되신 성주봉이 여기로세...
가야할 생황봉(제3봉)
뒤돌아본 성주봉(제2봉)
생황봉(제3봉)
열아홉 대나무통 관악기 모양새로
소리는 없지만 바위모양 생황이라
바람결 들어보세 아름다운 생황소리...
가야할 사자봉(제4봉)
뒤돌아본 생황봉(제3봉)
사자봉(제4봉)
동물의 왕자처럼 사자바위 군림하여
으르엉 소리치면 백수들이 엎드리듯
기묘한 절경속에 사자모양 갖췄구려
가야할 오로봉(제5봉)
뒤돌아본 사자봉(제4봉)
오로봉(제5봉)
다섯명 늙은 신선 별유천지 비인간이
도원이 어디메뇨 무릉이 여기로세
5신선 놀이터가 5로봉 아니더냐
가야할 두류봉(제6봉)
팔영 47-05 이정목 해발546m
뒤돌아본 오로봉(제5봉)
두류봉(제6봉)
건곤이 맞닿는 곳 하늘문이 열렸으니
하늘에 어디메뇨 퉁천문이 여기로다
두류봉 오르면 천국으로 통하노라
두류봉사거리
칠성봉 0.17km, 휴양림 1.0km, 두류봉 0.05km, 주차장 3.3km
팔영 47-06 이정목 해발564m
통천문
칠성봉(제7봉)이 보입니다.
적취봉 0.4km, 두류봉(6봉) 0.2km
칠성봉(제7봉)
북극성 축을 삼아 하루도 열두때를
북두칠성 자루들아 천만년을 하루같이
일곱개 별자리 돌고도는 칠성바위
가야할 적취봉(제8봉)
적취봉(제8봉)
물총새 파란색 병풍처럼 첩첩하며
초록의 그림자 푸르름이 겹쳐쌓여
꽃나무 가지엮어 산봉우리 푸르구나
적취봉삼거리
팔영산자연휴양림 1.0km, 깃대봉 0.5km, 주차장 3.6km, 탑재 1.1km
팔영 47-07 이정목 해발578m
헬기장
팔영 47-08 이정목 헤리포트
헬기장삼거리
적취봉 0.3km, 팔영산자연휴양림 0.7km, 깃대봉 0.2km
팔영산야영장 3.3km, 적취봉 0.5km, 남포미술관 3.0km
팔영 47-08 이정목 해발 599m
깃대봉(팔영산)
적취봉삼거리로 다시 되돌아갑니다.
다시돌아온 적취봉삼거리
편백나무숲
적취봉 1.0km, 주차장 2.6km, 탑재 0.1km
탑재
탑재
팔영 48-01 이정목 해발376m
주차장 2.5km, 야영장 1.7km
팔영 48-02 이정목 해발266m
주차장 2.0km, 팔영산야영장 1.2km, 탑재 0.5km
팔영 48-03 이정목 해발103m
주차장 1.2km, 팔영산야영장 0.4km, 탑재 1.3km
적취봉입구
부도밭
두 승탑이 있는 아랫단과 다수의 승탑들이 모인 윗단으로 2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고흥 능가사 추계당 및 사영당 부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64호)
고흥 능가사 추계당 및 사영당 부도는 조선시대 후기 승려로 사제간인 추계당과 사영당의 부도입니다. 능가사에는 경내에 팔각원당형 부도1기, 능가사 외곽의 계곡 곁에 9기 등 10기의 부도가 있는데, 9기 가운데 추계당 부도와 사영당 부도는 원 위치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승 추계당(秋溪堂)의 승탑
탑신이 돌로 만든 종과 같아서 석종형(石鐘形)으로 기단부는 방형의 하대석 위로 8각의 복련을 새겼습니다. 16엽의 연화문으로 화려한 문양이 없어 오히려 소박한 편입니다. 그 위에 원형의 홈을 파고 탑십부를 얹혔습니다. 탑신부 하대에는 돌아가면서 물고기, 게 등이 조각되었습니다. 북쪽인 두개의 유곽 사이에 방향의 위패도 새기고 그 안에 '추계당'이라는 당호를 새겼습니다..
제자 사영당(泗影堂)
사영당 부도는 복련과 방형의 하대석이 한돌로 되면서 그 위에 바로 중석이 이어지고 앙련이 생략된 것입니다. 방형의 큼직한 하대석을 앉히고 귀퉁이에 각기4방을 향하고 있는 용두를 조각하였고, 그 위로는 한돌로 연결된 복련이 이어지고 있는데, 각 면이 2엽씩 모두 8엽의 연화문이 장식되었습니다.
다시 복련 위로는 8각의 중석이 연결되었고 탑신은 중앙 몸통부분이 배가 부른 편구형입니다.
북쪽에는 직사각형의 위패모양을 새기고 그 안에 '사영당'이라는 당호를 새겼습니다. 옥개석은 방향인데 상당에 팔작지붕형의 합각을 나타냈으며 상륜부는 옥개석과 한 돌로 하여 연결되는데 노반없이 복발과 보주가 이이지고 있습니다.
8각중석
팔영교
오층석탑
응진당(應眞堂)
처마는, 서까래 위에 짧고 각진 서까래를 덧대 달아낸 겹처마이고 처마 아래 공포는, 지붕선이 일자로 반듯한 맞배지붕과 조합을 이루는 주심포식으로 기둥 위에만 공포를 꾸미는 방식입니다.
가운데 어칸에는 빗살문을, 양쪽 협칸에는 여염집같이 소박한 격자살문을 달았지만 대웅전처럼 유리를 덧대 아쉽습니다.
응진은 나한을 가리키는 또 다른 호칭이어서 나한전 대신 응진전이라고도 하는데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이어선지 전각의 전(殿)자 대신 집 당(堂)자를 붙였습니다.
응진당(應眞堂)편액 글씨는 대웅전 편액을 쓴 염재 송태회의 솜씨입니다.
정면 불단에 석가여래 삼존상을, 좌우로 벽을 따라 이어진 단 위에는 나한상을 모셨습니다.
목조 석가여래 삼존좌상은 걸출한 조각승 색난이 대웅전 석가상보다 22년 앞선 1685년에 조성한 작품입니다.
삼존상 뿐 아니라 응진당 안 모든 존상들까지 색난이 제자들을 지휘해 만들었습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좌협시)에는 미륵보살이 왼쪽(우협시)은 제화갈라보살이 연꽃가지를 대칭되게 들고 있습니다.
미륵보살은 미래불인 미륵불로 성불하기 전 단계의 보살이고, 제화갈라보살은 과거 석가가 수행자이던 시절 장래 부처가 될 것이라고 알려준 과거 보살입니다.
능가사 사적비(전남유형문화재 제70호)
능가사 사적비는 영조 26년(1750)에 능가사의 창건과 중수 과정 등을 기록한 비석입니다. 사적비란 장소나 인물 등과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비석을 말합니다.
이 사적비는 등에 팔괘(八卦)를 새긴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두 마리의 용과 구름으로 창식한 사각형의 머릿돌로 이루어진 완전한 형태의 비석입니다.비석 앞면에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 3년(419)에 '보현사'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사찰을 지었다는 내용과 정현대사 벽천(正玄大師 碧川)이 중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현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졌는데, 지리산에서 수행하던 벽천이 꿈에서 보았던 남쪽의 옛절터를 발견한 후 인조22년(1644)에 사찰을 다시 짓고 '능가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합니다. 비문은 오수채(1692~1759)가 지었으며, 조명교(1687~1753)가 글씨를 썻습니다.
비석 뒷면에는 이 비석을 세우게 된 이유와 과정 등을 적었는데, 비문은 능가사에서 출가한 승려 약탄(1668~1754)이 짓고, 김사국이 글씨를 썻습니다.
울타리 사이로 보이는 귀부(龜趺) 위에 세워진 높이 5.1m의 사적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가 천장에 닿을 듯 큽니다.
전체 높이가 3.6m에 이르고 비 몸돌(비신)만 높이 2.9m에 너비 133㎝, 두께 42㎝입니다.
절 사적비는 크게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비를 꽂아 세우는 대좌로 거북모양 귀부를 쓰게 된 것은 거북이 장수를 상징하는 신령스러운 동물이어서 비문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려는 염원을 담기에 적절했기 때문입니다.
용을 새겨 장식한 머릿돌 이수(螭首)를 올려다봅니다.
이(螭)는 뿔이 없는 교룡(蛟龍), 이무기를 가리키는데 이름과 양식이 중국 한나라 때부터 유래한다고 합니다. 용 여러 마리가 구름 속에 어우러진 채 앞면 중앙과 좌우에만 용머리 셋이 내밀고 있습니다.
능가사 대웅전 (보물 1307호)
18세기 중엽에 중건된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전각입니다. 처마를 받치는 부재인 공포와 건물 내외부에 연꽃봉오리를 본뜬 장식 등으로 전체적으로 장엄하고 화려합니다.
기둥은 중간이 굻고 위아래가 가는 배홀림 양식입니다.
건물이 입구에 맞춰 북향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조선 중, 후기 호남지역 사찰 건축의 면모를 보여 주는 건물로 학술적, 미술사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보물인 영광 불갑사 대웅전, 부안 개암사 대웅전과 맥을 같이합니다.
능가사는 419년 아도 화상이 창건하면서 보현사라 불렀다고 전하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44년 벽천 정현 대사가 다시 짓고 이름을 능가사로 바꾸었습니다.
절에 가면 대개 법당 전면의 가운데 칸, 어칸의 양쪽 기둥머리에 하나씩 용머리, 용두가 내밀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중생을 싣고 극락정토로 가는 배를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고 하는데 진리(반야)를 향해 가는 뱃머리가 용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법당 전면에 용머리가 내밀고 있는 것은 바로 법당이 극락으로 가는 배라는 의미가 됩니다.
법당을 바라보고 서서 왼쪽에 좌 황룡, 오른쪽에 우청룡을 배치하는 두 용두 중에 대웅전 전면에는 웬일로? 청룡이 하나 더 있다. 위 청룡은 보주(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아래 청룡은 입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1982년 10월 15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2월 23일 보물로 승격되었습니다.
대웅전(大雄殿)편액 글씨는 구한말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염재 송태회(1872~1942)의 작품입니다.
아홉 살에 '녹괴서실'이라는 큰 글씨를 써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군대와 함께 머물던 원세계가 극찬했고 그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 데려갔다고 합니다.
염재는 청나라에서 새 문물을 배우고 돌아와 평생 제자를 키우며 많은 작품을 남겨 1922년 조선 전람회 1회부터 여덟 차례나 입선했습니다.
구례 천은사 수홍루와 설선당, 순천 선암사 장경각에서 그의 편액 글씨가 있습니다.
대웅전은 넓이가 58평에 이르러 조선 후기 불전으로는 꽤 큰 편이라고 합니다.
뒤쪽으로 두 칸쯤에 일렬로 실내기둥 고주(高柱) 넷을 일렬로 세워 벽을 만들고 불단을 꾸몄습니다.
대웅전인 만큼 당연히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주존으로 모시고 불단 바라보고 서서 오른쪽(부처의 시선으로 보면 왼쪽)에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까지 삼불좌상을 봉안했고 세 불상마다 위에 각기 하나씩 닫집을 얹었습니다.
각기 뒤에 걸린 후불탱은 모두 석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우협시)과 오른쪽(좌협시) 중간의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 입상이 협시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불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능가사에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걸출한 조각승 색난(色難/ 1640년경~1730년 이후)이 주석(거주)하면서 호남을 비롯한 전국에 걸쳐 수백 점의 불상, 존상을 만들었습니다.
색난은 솜씨가 어찌나 좋았던지 솜씨가 교묘한 장인이라는 뜻으로 '교장'(巧匠)' '조묘공'(彫妙工)으로 문헌에 기록돼 전해 옵니다.
불단 중앙, 목조 석가여래좌상이 바로 1707년 색난이 남긴 작품입니다.
그런데 양쪽에 있는 불상은 크기도 훨씬 작고 수법도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 아이타불과 왼쪽 약사불은 색난보다 한 세대 앞선 1639년부터 1661년까지 20여년 동안 20여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활동하면서 독특한 수법으로 일파를 이뤘던 조각승 희장(熙藏)이 1653년에 조성한 작품입니다.
신중탱
지장탱
대웅전 앞의 괘불대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새긴 석비가 서 있습니다.
8세기 당나라 선승 마조(馬祖) 조사가 남긴 선(禪) 화두인데 글자 그대로는 '마음이 곧 부처' 라는 뜻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떠나 따로 부처를 구할 수 없고 마음을 찾아 깨우치면 곧 부처가 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범종각
능가사 동종(보물 제1557호)
능가사 동종은 절에서 시각을 알리거나 의식을 치를때 사용합니다. 장엄하게 울리는 종소리는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 종소리를 듣는 사람은 자신의 깊이 뉘우치고 깨달음을 얻도록 인도한다고 합니다. 또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듯 부처민의 가르침을 널리 펼친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능가사 동종은 장인 김애립이 숙종 24년(1698)에 만들었습니다, 김애립은 17세기 후반 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장인이며, 능가사 동종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동종의 꼭대기에 용 모양으로 장식한 부분을 용뉴라 하는데, 이곳에 쇠줄을 연결하여 종을 매답니다. 꼭대기 중앙에는 소리를 울리게 하는 음통을 대신하기 위해 구멍을 뚫었고, 구멍 주위에는 연꽃을 새겨 장식했습니다. 몸통 윗부분에는 4구의 보살입상과 국왕의 안녕을 기원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몸통 아랫부분에는 덩굴과 국화, 연꽃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몸통 중앙에는 팔괘를 새겨 넣었는데, 이러한 장식은 조선시대에 제작된 동종에서는 보기 드문 예입니다.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는 따로 없습니다.
높이 157cm, 입술지름 101.5cm, 아담한 동종이 걸려 있다.
조선 후기 주종장(鑄鐘匠)인 종 명장 김애립(金愛立)이 1698년 숙종 때 만든 김애립의 마지막 현존 작품이자 최고의 역량을 발휘한 대표작이며 17세기를 대표하는 범종으로 평가됩니다.
종신에 새긴 제작 연대를 딴 정식 명칭은 '고흥 능가사 강희 37년 명 동종 (高興 楞伽寺 康熙 三十七年 銘銅鍾)'입니다.
김애립이 33년 앞서 만든 흥국사 강희4년명 동종과 함께 2008년 보물로 지정됐습니다.
대루
뒷면 릉(능)엄루(楞嚴褸)편액
대루(大褸) 편액
일주문도 없이 곧바로 천왕문이 방문객을 맞습니다.
능가사 천왕문은 1995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서 절 중건 22년 뒤인 1666년 처음 세웠고 1824년과 1931년에 다시 지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밝혀졌습니다.
팔영산능가사(八影山楞伽寺) 편액
천왕문(天王門) 편액
고흥 능가사 목조사천왕상(보물 2023년 10월 지정)
사천왕상은 원래 인도 재래의 바우이신인데 불교에 흡수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천왕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는 대략 6세기말이나 7세기초로 보고 있습니다.
감은사지 사적기에 사천왕상이 조각된 것으로 보면 7세기말에 사천왕상이 많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8세기가 되면 사천왕상은 인왕상과 함께 만들어지다가 9세기 이후부터는 주로 석탑이나 부도의 기단부에 활발하게 조각됩니다.
1995년 천왕문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초창 연대는 조선 현종7년(1666)이며, 중창은 조선 순조 24년(1824), 3창은 일제 감점기인 1931년으로 세번에 걸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를 뒷받침해주는 자료로 조선 숙종 16년(1690)에 세운 "능가사 사적비"에 천왕문과 사천왕상에 대한 시주자 명단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왕문의 상량문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초장 연대가 1666년이므로 천왕상 역시 이때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능가사 목조사천왕상은 17세기에 제작된 가장 이른 시기의 목조사천왕상으로 사천왕상의 조성 재료가 흙에서 나무로 변환되는 전환점의 작풍으로써 의미가 있습니다. 정면항을 취하고 있으며 의자에 걸터앉은 모습인데, 전체적으로 길쭊하고 늘씬한 독특한 비율이 특징입니다. 이는 사천왕상 조성 재료가 흙에서 나무로 전환되며 신체 표현의 방식이 바뀌었기 떄문이기도 하면 대기근을 즈음한 당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비교적 표현이 자유롭운 사천왕상의 조형에 담은 것으로 이해돼 사회사적 관점에서도 연구 가치가 큽니다.
능가사 사천왕상은 여러모로 독특하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특징이 머리에 쓴 보관입니다.
사찰 불교장식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섬세하게 새긴 것이 사천왕 보관이지만 능가사 것은 종이를 말아놓은 듯한 원통형 관에 그림으로만 그려놓아 매우 평면적입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제224호)로 2000년 6월에 지정돼 관리됐던 목조사천왕상은 2023년 10월 26일 자로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천왕상의 배치는 천왕문의 실제 좌향과는 무관하게 천왕문이 남향하고 있을 때의 상황에 준하여 배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능가사는 실제의 좌향을 의식하여 사천왕상을 배치하였습니다. 즉, 동방지국천왕과 북방다문천왕의 순서를 바꾸고, 남방증장천왕과 서방광목천왕의 순서를 바꾸어 배치하였는데, 방위 개념에 대한 의식을 연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으며 보물로 지정해 연구하고 보존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천왕상은 동(지국천왕), 서(광목천왕), 남(증장천왕), 북(다문천왕) 네 방위에서 맡은 바를 수행하는데 각기 보검(寶劍), 보당(寶幢, 깃발 달린 창), 보탑(寶塔), 용과 여의주, 비파 등을 손에 잡고 있으며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사천왕상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동방 지국천왕, 북방 다문천왕
서방 광목천왕, 남방 증장천왕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입니다. 417년(눌지왕 1)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하였다 하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창건자의 신빙성은 없습니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탄 뒤 1644년(인조 22)에 벽천(碧川)이 중창하고 능가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벽천은 원래 90세의 나이로 지리산에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절을 지어 중생을 제도하라는 계시를 받고 이곳에 능가사를 신축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1768년 (영조 44) 과 1863년 (철종 14) 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1993년에 응진전을, 1995년에 사천왕문을 각각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팔영산탐방지원센터 주차장
고흥군 괴역면 조가비공원
수련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팔영산 함산해서 즐거웠구요
담아주신 멋진사진 잘보았습니다
우중에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