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4.연중 제4주간 목요일 강론>
<마르6,7-13>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인생에 있어서 목적이 있는 삶인지 아닌지는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관계없는 것은 다 비우라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비우는 것일까요?
구약의 12부족을 잇는 신약은 12제자입니다.
구약은 십계명과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이라면, 신약은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의 계명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서로 사랑하는 계명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비워야할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홀로 설 수도 있어야 하지만, 이기심을 비우고 둘씩 즉,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둘째, 외적인 준비인 채움을 비우고, 내적인 준비인 비움이 필요합니다.
셋째, 자신과 사물에 대한 집착을 비우고, 복음 삼덕인 가난 정결 순명의 덕을 채움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가난은 마음의 탐욕을 비워내서 이집저집 다니지 말고 한 집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
정결은 내적인 마음의 분심과 육신의 정욕을 비우고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위한 거룩함으로 채우라는 것.
순명은 에고에 뿌리를 둔 교만한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의 영에 뿌리를 둔 겸손한 마음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준비를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기도와 정화로 이루어집니다.
성서를 2번~10번 읽고 묵상(기도: 의식)
의식마저 내려놓고 30초~1분 침묵(기도: 무의식)
30초~1분 침묵중에 올라오는 것 봉헌(정화)
생활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함(정화)
생활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나를 바라봄(기도)
생활 안에서 지금 현재에 머무르기 위해 순간순간 봉헌(정화)
생활 안에서 봉헌 후 때때로 예수성심 안에 머무름(기도)
결과적으로 내 안에 마귀를 쫒아낼 수 있고, 사람들도 자유로울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으며(묵주기도, 미카엘 대천사 기도, 성서의 구마내용 읽기, 예수성심께 성모성심께 바치는 기도 하기)
많은 병자들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고 사제를 도와 성사의 은총에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병자성사 및 치유기도 참여)
우리는 이 곳을 가톨릭 교회라 부릅니다.
성당에 다닌다고 말합니다.
<Mark6,7-13>
7 He summoned the Twelve and began to send them out two by two and gave them authority over unclean spirits.
8 He instructed them to take nothing for the journey but a walking stick - no food, no sack, no money in their belts.
9 They were, however, to wear sandals but not a second tunic.
10 He said to them, "Wherever you enter a house, stay there until you leave from there.
11 Whatever place does not welcome you or listen to you, leave there and shake the dust off your feet in testimony against them."
12 So they went off and preached repentance.
13 They drove out many demons, and they anointed with oil many who were sick and cured them.
—-//—-
<책 소개>,
목적을 알아야 하는 까닭
나폴레온 힐은 여러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조사해서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확고한 목표와 목적을 이루려는 집요함을 가지고 있었다.
인생에 목적이 없으면 성공은 불가능하다. 가야 할 곳을 알아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목적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삶으 ㄹ살게 되는지 살펴 보자.
첫째,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된다.
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주변의 사물도 목표와 관련지어 새롭게 인식하게 되고, 필요한 정보들이 눈에 띄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된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속담처럼 우리의 대뇌에는 흥미를 느끼는 정보에만 선택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필터가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선택적 주의(Selective Attention)’ 현상이라고 한다.
둘째, 역경 속에서도 인내하게 된다.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서에서’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장 건강한 사람도, 가장 영양 상태가 좋은 사람도, 가장 지능이 우수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들은 살아야 한다는 절실한 이유와 살아남아서 해야 할 구체적인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목표가 강한 의욕과 원동력을 지속적으로 제공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
목적을 이룬 사람은 삶의 보람을 느낀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하버드 대학에는 목표가 사람의 인생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조사한 유명한 자료가 있다. IQ와 학력, 자라온 환경 등이 서로 비슷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단지 3%의 사람만이 명확하면서도 장기적인 목우리는 한정된 시간에 선택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 목적이 있으면 가치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내면 깊숙이 ‘이것을 하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있을 때 ‘저것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중요하고 필요한 것에만 집중하여 선택적으로 살게 되기 때문에 모든 것이 효율적(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270)
표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25년 동안 끈질기게 연구한 결과, 목표가 뚜렷하였던 10%의 사람들과 3%의 사람들은 그 목표를 성취하여 삶의 보람을 느끼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271)
—//—
40.하느님은 전능하시며, 모든 일을 할 수 있으신가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268-278]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십니다.”(겟세마니 동산에서 바친 예수님의 기도, 마르14,30)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지혜11,24)
어려움에 처해서 하느님을 부르는 사람은 그분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무無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역사의 주인이시고 모든 일을 주재하시며, 모든 일을 할 수 있으십니다. 그분이 자신의 전능을 어떻게 자유롭게 사용하시는 지는 신비에 해당합니다. 때때로 “하느님은 어디에 계셨던 거야?”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55,8). 하느님의 전능은 종종 사람들이 더 이상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 순간에 드러납니다. 성금요일의 무력함이 부활의 전제조건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51, 478, 506-507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56)/
—//—
제3단락 전능하신 하느님
->268 하느님의 모든 속성 가운데 하느님의 전능만이 신경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이 우주적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33)/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창세1,1; 요한1,3 참조),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기(마태6,9 참조) 때문에 그 전능은 곧 사랑으로 충만한 전능이라고 믿는다. 이 전능이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날”(2코린12,9)(1코린1,18 참조) 때 신앙만이 이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신비로운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뜻대로 모든 것을 만드셨나이다”(시편113[115],3)
->269 성서는 하느님의 우주적 전능에 대해서 여러 번 고백한다. 하느님을 “야곱의 강하신 이”(창세49,24; 이사1,24 등), “만군의 주님”, “굳세고 능하신 주님”(시편23[24],8-10)이라고 일컫는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므로 그분은 “하늘과 땅”(시편134[135],6)에서 전능을 떨치신다. 그러므로 그분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고(예레32,17; 루카1,37 참조), 그분께서 만드신 것은 그분의 처분에 맡겨져 있다(예레27,5 참조). 하느님께서는 온 우주의 주님이시고,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셨으며, 이 우주는 그분께 완전히 복종하고, 그분의 처분에 달려 있다. 하느님께서는 역사의 주인이시다. 그분께서는 모든 마음과 사건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신다(에스13,9; 잠언21,1; 토빗13,2 참조). “주님은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 큰 힘을 발휘하실 수 있다. 주님의 팔 힘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지혜11,21)(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34)/
“주님은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만인에게 자비로우시다”(지혜11,23)
->270 하느님게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다. 그분의 부성애와 전능은 서로를 밝혀 준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마태6,32 참조),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 주심으로써(“나는 너희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2코린6,18), 그리고 무한한 자비를 통하여 아버지로서 전능을 보여 주신다. 당신 자비로 죄인들을 자유로이 용서하심으로써 그 권능의 극치를 드러내신다.
->271 하느님의 전능은 결코 독단적이지 않다. “하느님 안에서 능력과 본질, 의지와 이해, 지혜와 정의는 하나이며 동일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그분의 정의로운 의지와 지혜로운 이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1, q. 25, a. 5, ad 1: Ed Leon. 4, 297).
무능하게 보이는 하느님의 신비
->272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악이나 고통의 체험을 통해서 시련에 놓일 수도 있다. 때때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처럼, 하느님께서 악을 막을 수 없으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의 자기 낮춤과 부활 안에서 당신의 전능을 신비하게 드러내시고, 그 낮춤과 부활을 통해 악을 이기셨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이시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코린1,25). 성부께서는 그리스도(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35)/
의 부활과 영광을 통해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당신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에페1,19) 알게 하셨다.
->273 오직 신앙으로만 전능하신 하느님의 신비한 길을 따를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무르게하려고 그 약함을 영광스럽게 여긴다(2코린12,9; 필립4,13 참조). 동정 마리아께서는 이와 같은 신앙의 가장 뛰어난 모범이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믿었으며(루카1,37),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루카1,49) 하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274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우리 영혼에 깊이 새겨진 이 확신보다 우리의 신앙과 희망을 더 굳게 해 주는 것은 없다. 신경이 그 다음으로 우리에게 믿도록 제시하는 모든 것, 가장 위대하고 가장 불가해하며 자연의 일반적 법칙을 초월하는 가장 높은 것까지도, 하느님의 전능이라는 개념만 가진다면 주저 없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로마 교리서’, 1, 2, 13: P. Rodriguez 편(바티칸-팜플로나), 31면)
간추림
->275 우리는 의로운 욥과 함께 고백한다.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욥42,2).
->276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루카1,37)고(창세18,14; 마태19,26 참조) 확고하게 믿는 교회는, 성서의 증언에 따라 충실하게,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께 자주 기도드린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36)/
->277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돌아서게 하시고 은총을 통하여 당신과 맺은 우정을 회복하심으로써 당신의 전능을 드러내신다. “주 하느님, 용서와 자비로 전능을 크게 드러내시니....”(‘로마 미사 전례서’, 연중 제26주일 본기도, 표준판(바티칸 1970), 365면)
->278 하느님의 사랑이 전능하다는 것을 믿지 않고서, 어떻게 성부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성자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37)/
—//—-
제1절 하느님의 계시
I.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운 계획’을 알려 주신다.
->51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성(善性)과 지혜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당신 뜻의 신비를 기꺼이 알려 주시려 하셨으며, 이로써 사람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 하셨다.”(계시 헌장, 2항).(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59)/
강생하신 말씀의 성심
->478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생, 고뇌와 수난 동안 우리들 모두와 각자를 알고 사랑하셨으며, 우리 하나하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다. 하느님의 아들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하여 당신의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갈라2,20). 그분은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으로 우리 모두를 사랑하셨다. 이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의 죄 때문에 찔리신 예수님의 성심은(요한19,34 참조)(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209)/
“구세주께서 영원하신 아버지와 모든 사람을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탁월한 표지와 상징으로 여겨진다.”(비오 12세, 회칙 Haurietis aquas: DS 3924, 회칙 Mystici corporis: DS 3812 참조)(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210)/
->506 마리아는 동정녀이다. 그 동정성은 “어떠한 의혹도 섞이지 않은”(교회 헌장, 63항) 그 믿음의 표지이며 하느님의 의지에 대한 흐트러짐 없는 헌신의 표지이기 때문이다(1코린7,34-35 참조).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게 한 것은 자신의 신앙이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육신을 잉태하셨다는 사실보다, 그리스도의 믿음을 받으셨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복되십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거룩한 동정 생활’, 3, 3: CSEL 41, 237(PL 40, 398))
->507 마리아는 교회의 전형이며, 어머니로서 또 동정녀로서 모범을 보여 주신다(교회 헌장, 63항). “교회는 하느님의 마씀을 충실히 받아들여 그 자신도 어머니가 된다. 실제로 교회는 복음 선포와 세례로써, 성령으로 잉태하여 하느님에게서 난 자녀들을 불멸의 새 생명으로 낳는다. 교회는 또한 신랑에게 바친 믿음을 온전하고 깨끗하게 지키는 동정녀이다.”(교회 헌장, 64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