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 후 자살' 5년간 269명…심리부검 해보니 생활고 뚜렷
'살해 후 자살' 사망자, 5년 간 269명
심리 부검 결과, 관계·경제 문제 뚜렷
정신건강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원 필요
전남 완도에서 실종됐다가 숨진 채 발견된 일가족은 '가족 살해 후 자살' 사건으로 수사가 마무리될 것으로 보입니다. 광주 남부경찰서는 12일 바다에서 인양한 실종 일가족의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분석한 결과, 차량을 끌고 바다로 돌진하는 장면을 확인했고 외부 개입의 흔적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살해와 자살이 동시에 일어나는 '살해 후 자살'은 극단적인 폭력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범죄입니다.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존재하지 않고 공식 통계가 생산되지 않아 그동안 실태 파악이 쉽지 않았습니다.
가톨릭대 심리학과 최진화(박사 수료)와 박기환 교수가 지난 3월 한국심리학회지(임상심리 연구와 실제)에 발표한 논문 '국내 살해 후 자살의 현황과 특성'은 국내 '살해 후 자살' 실태를 경찰 수사기록으로 파악한 첫 연구입니다.
연구진이 자살사망자에 대한 경찰 수사기록을 분석한 결과, 2013년부터 5년간 발생한 살해 후 자살 사망자는 269명이었습니다. 또 국내 자살자의 주원인이 정신건강 문제인 것과는 달리, 경제적 요인이 두드러진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 살해 후 자살사망자, 5년간 269명
연구진은 전국 경찰서에서 자살로 분류된 변사기록을 심리 부검 기준에 맞춰 데이터로 만든 보건복지부의 자료를 분석 대상으로 했습니다. 심리 부검이란 자살사망자의 행동과 성격, 직업과 경제상태, 대인관계 등을 유족이나 지인을 심층 면접해 사망에 이른 요인을 분석하는 것으로, 정부가 자살예방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시행하고 있습니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자살사망자를 전수조사한 결과, 5년간 살해 후 자살사망자는 269명이었습니다. 같은 기간 자살사망자 가운데 살해 후 자살사망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0.44%로 집계됐습니다. 인구 10만 명 당 0.11명꼴입니다.
살해 후 자살사망자는 공식 통계를 생산하는 경우가 드물어 국제 비교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공식 통계를 집계하는 네덜란드는 인구 10만 명 당 살해 후 자살사망률은 0.05명입니다. 이와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살해 후 자살사망률이 꽤 높은 편이라고 연구진은 진단했습니다.
■ 자녀 살해는 전업주부, 가족 살해는 무직 상태에서 발생
살해 후 자살 사건은 살해된 대상자를 기준으로 네 유형으로 나뉩니다. 배우자나 애인이 대상인 '동반자 살해', 자녀가 대상인 '자녀 살해', 배우자와 자녀·다른 가족 구성원을 동시에 살해한 경우 '가족 살해', 피해자가 가족이 아닌 경우 '가족 외 살해'로 나뉩니다.
5년간 발생한 사건에서 가장 많은 유형은 동반자 살해로 113명이었습니다. 이어 자녀 살해가 82명, 가족 살해가 47명, 가족 외 살해가 27명이었습니다.
살해 후 자살사망자의 성별은 남성 203명, 여성 66명었습니다. 모든 유형에서 가해자가 남성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다만 자녀 살해 유형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더 높았습니다. 어머니에 의한 자녀 살해 후 사망 사건이 많았다는 겁니다.
연령별로는 동반자 살해 유형은 60대 이상의 고연령대에서 비율이 높았고, 자녀 살해 유형은 상대적으로 낮은 연령대에서 발생했습니다.
사망 당시 가해자의 고용 상태는 무직인 경우가 가장 많았습니다. 다만 자녀 살해 유형은 기타의 비율이 다른 유형에 비해 높게 나타났는데, 전업주부가 기타로 분류됐기 때문입니다. 자녀 살해 유형에서 기타로 분류된 가해자는 모두 사망 당시 전업주부로, 앞서 자녀 살해 유형에서 가해자의 성별이 여성이 많은 결과와 맥락을 같이했습니다.
자살의 주원인은 네 유형에서 모두 가족 관계와 대인 관계 등 관계문제 비율이 가장 높았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자 집단에서 주원인이 정신건강 문제인 것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세부적으로 보면, 자녀 살해 유형의 관계문제는 '배우자의 관계 문제', '가족의 질병과 사망'이 스트레스의 요인이었던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정신건강 문제 역시 높았는데, 상당수가 우울과 수면장애를 겪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정신건강 문제가 있었던 사례 가운데 치료를 받은 이력은 절반에 그쳤습니다.
가족 살해 유형에서는 관계문제와 함께 경제 문제가 자살의 주원인이었다는 비율이 두드러졌습니다. 세부적으로 이들은 부채와 파산을 겪은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연구진은 일가족 자살은 주로 생계형이 많다면서, 국가 전체가 경제적 위기에 있을 때 아버지에 의한 일가족 자살이 증가했다는 선행 연구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정신건강 문제가 있었던 사례에서 치료를 받은 이력은 21%에 불과했습니다. 자살을 미리 암시하는 경고 신호는 모든 유형에서 70% 넘게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 전체 자살자 집단과 특성과 달라…맞춤형 예방책 필요
연구진은 이 같은 특성을 고려해, 살해 후 자살을 예방하려면 맞춤형 대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습니다. 살해 후 자살의 주원인으로 관계문제가 높은 만큼, 극단적 선택이 발생하기 전에 전문가의 개입이 유의미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정신건강에 대한 진단이 없더라도, 가까운 사이에서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있다면 상담치료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에 대한 국가나 지방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일본은 부채 문제가 있는 이들에게 법률 지원과 함께 사회적 지원을 하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경제적 원인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이 18.5% 감소했다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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