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에서 3년, 나의 중학 시절의 뒤안길
개암 김동출
나는 중학교 시절, 고향 거제를 떠나 낯선 통영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유학을 갈 형편도, 준비도 없던 초등학교 6학년 추석 무렵, 내 인생을 바꾼 일이 일어났다. 큰고모님이 친정에 오신 것이 그 시작이었다. 처녀 시절에 가톨릭 신자가 된 수산나 큰고모님은 불행히도 20대 초반에 6·25 전쟁으로 미망인이 되었고, 친정으로 돌아왔을 때는 ‘주마담(走馬痰)’이라는 병을 앓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고모님을 나의 외가 곳인 연초면 수강병원에 입원시키고, 그 병시중을 며느리인 내 어머니에게 맡기셨다. 당시 어머니는 나를 뱃속에 품은 몸이었지만 정성껏 간호하여 1년여 만에 고모님을 병상에서 일으켜 세우셨다. 그러나 그 힘겨운 과정을 견뎌내기 위해 어머니는 담배를 입에 대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치명적인 습관이 되어버렸다.
고모님은 어머니의 헌신에 깊이 감사하며, 친정의 장조카인 나를 데려다 공부시키겠다고 다짐하셨다. 그 약속은 내 인생의 길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나는 통영에서 학업을 이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간병하며 배운 담배는 훗날 우리 모자의 운명을 바꾸었다. 나는 겉으로는 알 수 없는 심장의 좌심실이 기형인 아이로 태어나 평생 심장판막증세로 남모르게 고생했고, 결국 2020년 교직에서 정년퇴직한 후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다. 내 어머니는 쉰둘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필자가 통영중학교에 입학한 1967년에는 거제대교(1971년 준공)가 놓이지 않았던 시절, 내 고향 거제도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에 불과하였다. 6·25 전쟁 중 신현면 계룡산 자락에는 ‘제76 포로수용소’가 있었고, 미군의 흥남철수작전 때 화물선을 타고 내려온 피난민들이 머물기도 했다. 전쟁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가난한 농어촌 사회 속에서 산업화의 씨앗이 겨우 움트던 시기였다. 훗날 대우조선해양으로 이어질 조선업의 태동이 이 무렵 시작되었지만, 당시 거제는 여전히 농업과 어업에 의존하는 섬이었다.
반면 내가 발을 디딘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역사와 한려수도의 풍광을 품은 아름다운 항구도시였다. 멸치와 굴, 해삼과 전복을 내다 팔던 수산업, 나전칠기 공예가 활발했고, 항구를 통해 외래 물품이 밀려들며 개방적이고 활기찬 분위기를 풍겼다. 김춘수와 유치환 같은 시인들이 자라난 예향의 기운은 곳곳에 배어 있었다.
입학하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통영 고모님 댁으로 갔다. 아버지는 나를 고모님 댁에 떨궈 놓고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그 이튿날 고모님은 나를 동호동 학생복 가게로 데려가 촌티 나는 헐렁한 검정 동복을 입혀주셨다. 거울을 보니 허수아비 같았다. 부끄러웠다. 입학식 날 친구들을 보니, 나와 달리 하나같이 세련된 모습이었다. 몇몇 친구들은 윤이 나는 일제 사지 학생복을 입은 부잣집 도련님도 있었고, 나를 제외한 모든 친구가 몸에 맞는 맞춤복을 입고 있었다.
1학년 4반 40여 명 급우 중에는 통영 시내 ‘통영’, ‘충렬’, ‘유영’, ‘두룡’, ‘도남’초등학교 출신과 산양면 등 면 지역, 욕지도·한산도·비진도·매물도·사량도 등 섬에서 온 친구들, 그리고 거제·고성·사천에서 유학 온 친구도 있었다. 나는 도천동 고모님 댁에서 일제강점기 때 만든 해저터널을 지나 봉평동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미륵도 쪽 입구 위에는 ‘龍門達陽(용문달양)’이라는 한자 글씨가 새겨져 있는 해저터널(483m)을 친구들과 함께 지나다녔다. 한여름 장마철 해저터널 바닥에 물이 고이면 장화를 신고 다니기도 했다. 맑은 날에는 하굣길에 해저터널을 들어서며 엉덩이춤을 추어 친구들을 웃겼다.
어린 나의 눈으로 본 ‘통영’은 어부들이 많아, 밤이면 서피랑의 산비탈에 빨간 등불이 피어나던 곳이기도 하였다. 1967~1969년 당시 고모님 댁이 있던 도천동 거리에도 작은 구둣방과 양복점, 양장점 많았다. 등하굣길에 나전칠기 공방을 지나치다 그곳에서 일하는 내 또래 소년들을 보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중학교 2학년 3월 어느 날, 바닷가에 떠밀려 온 비닐 뭉치를 풀었더니 성인용 일제 시계가 들어 있었다. 너나 나나 하나씩 차고 학교로 갔다가 밀수품으로 드러나 모두 압수당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친구가 많아졌다. 일요일이면 통영에서 자란 친구들과 남망산에 올라 놀았다. 멸치 어장주 아들 진욱이는 미제 초콜릿을 가져와 나눠 먹었다. 친구 엄재민의 외삼촌은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으나 실직 후 사량도에서 비단조개를 잡아 일본으로 수출하여 부자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처음으로 무역의 개념을 깨쳤다. 이웃에 살던 김용주네는 머구리배를 두 척이나 가진 부자였지만 검소하게 살았다. 용주 덕분에 멍게와 해삼, 전복 등 진귀한 어패류를 실컷 맛볼 수 있었다.
공부에 자신이 붙어 열심히 했지만, 고모님 댁은 공부방이 비좁아 시험 때면 친구 집을 찾곤 했다. 2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앞두고 최문석이 집에서 함께 공부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귀가하며‘근본도 모르는 놈을 내 집에…’라며 역정 내는 소리를 들었다. 친구 어머니가 나를 달래주었지만, 모멸감을 견딜 수 없어 공부 거리를 챙겨 집을 빠져나왔다. 해방 다리를 건너며 눈물이 났다. 그때 할아버지 말씀을 되새겼다. ‘출이 너는 김해김씨 수로왕의 후손이고, 판도판서공파 김관의 계보를 잇는 자손이다.’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일요일, 따분한 마음에 원불교 교당을 찾았지만, 문밖에서 기웃거리는 나를 신발 도둑쯤으로 여겨 쫓겨났다. 그때 내 차림새가 사실 좀도둑처럼 초라하고 궁색하게 보였던 게다.
통영중학교는 축구 국가대표 김호·고재욱 등을 배출한 축구 명문교였다. 학교 대항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1~2학년 700여 명이 관중석에 앉아 교가와 응원가를 목청껏 불렀다. 그즈음 나의 향학열은 장작불 같아, 2학년 1학기 중간고사에서 6개 반 360여 명 중 상위 5% 안에 들었다. 그러나 여름방학 중에 가뭄으로 고생하는 가족들을 보고 와서 심한 향수병에 걸려 공부에 차츰 흥미를 잃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결국 청운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특별반에 배치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으나, 3학년 때는 향수병과 우울증으로 진학 준비에 전념하지 못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짐을 싸서 통영 강구항에서 거제 성포행 여객선을 타고 귀향했다.
음악 시간은 두려웠다. 음악당은 본관과 떨어진 교문 통에 있었는데, ‘하’ 모 음악 선생님은 시창 공부를 시키며 제대로 부르지 못하면 상앗빛 지휘봉으로 머리를 때렸다. 이런 나와 달리 통영 시내 출신들은 음악 기능이 우수했다. 우리는 음악당을 ‘지옥당’이라 불렀다. 국어 시간에는 혀가 짧은 선생님의 발음을 흉내 내다 들켜 구두 슬리퍼로 얻어맞기도 했다. 또 자전거를 배우다 시내버스에 부딪혀 병원에서 꿰매는 사고를 당해 고모님을 속상하게 만들었다.
중학교 2학년 봄, 친구들은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 나는 부모님과 고모님께도 알리지 못해 그 기간 중 하루, 이웃에 사는 용주와 함께 유람선을 타고 한산도 제승당을 찾았다. 초록빛 바닷속에 풍덩 잠긴 섬 풍경은 환상적으로 아름다웠고, 이순신 장군의 기운이 서린 제승당 앞에 서며 역사의 무게와 바다의 장엄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성장통의 우여곡절을 겪고 30년 후, 어릴 적 꿈이었던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통영을 찾았을 때 통영은 그 시절의 흔적도 친구도 찾을 수 없었다. 나와 함께 공부한 통영의 인재는 서울로 떠났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섬 지역 출신들이 메웠다. 학교 급식을 상상할 수 없던 그 시절, 점심시간 부잣집 자식들은 교문 앞 매점에서 라면을 사 먹었지만, 직사각형의 양은 도시락통에 김치와 멸치볶음을 싸 다니던 나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그 시절이 내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고향 집과 가까운 중학교에 다니며 동생들을 돌보았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후회가 남는다.
좁은 방에서 불편함을 감내하며 함께 공부한 학생들은 모두 4명이었다. 여고 2학년 누나는 학교 대표로 개천 예술제에 나갈 정도로 그림을 잘 그렸고, 여중 2학년인 둘째 누나는 육상선수였다. 초등학교 2학년 남동생은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현재 대구에서 살고 있는 화가가 될 줄 믿었던 큰 누님은 지방 무대 가수로 활동하며, 간호대학을 나온 작은 누님은 아들을 의사로 키워낸 뒤 종합병원 간호과장으로 근무하다 은퇴하여 지금은 요양원에서 일하고 있다. 막내 권 아우구스티노 동생은 안타깝게도 고인이 되었으나, 그의 큰딸은 중등학교 특수교사가 되어 장애 학생을 가르치며 성당에서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낙도의 KT 중계소에서 일하며 때때로 나를 시험 들게 했던 고인이 되신 형님께도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때 형님께서 책장에 모아둔 세계 문학전집을 꺼내 읽으며 문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모두 형님 덕택이다.
중학교를 타지에서 다녔기에, 다시 찾은 고향에서 다닌 고등학교 시절도 텃세가 심해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또 남중학교를 다니다 남녀공학인 고등학교의 진학으로 정서가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곳에서 초등학교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수많은 후회와 시행착오로 얼룩진 60여 년 전, 모든 면이 부족했던 나의 성장기 시절의 이야기다. 친정 조카인 나를 친자식처럼 길러주신 고인이 되신 수산나 큰고모님과 인자하셨던 안동 권씨 고모부님, 그리고 장사에 바쁜 시모님을 대신하여 3년 동안 정성껏 도시락을 싸주며 나를 친동생같이 돌봐주신 통영 ‘간섬(해간도)’ 출신 밀양 박씨 형수님의 모습도 떠오른다. 나는 큰고모님 댁에서 분명히 불편한 존재였지만, 그 시절은 내 인생의 밑거름이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철없던 나를 사랑으로 감싸며 돌봐주신 고모님 가족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작가 노트> 돌아보면 통영에서의 3년은 눈물과 웃음이 뒤섞인 내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부족한 속에서도 나를 키워낸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다. 봄날, 한산도가 바라다보이는 뒷동산에 올라 뱃고동 울리며 부산과 여수를 오가는 여객선을 보면 불현듯 고향 생각이 났다. 아름다운 나폴리 해변과 어둠 속의 해저터널, 친구들과의 우정과 갈등, 향수병과 좌절, 그리고 제승당 앞에서 마주한 역사의 숨결까지… 그 모든 순간은 내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설렘과 서러움이 교차하던 날들은 결국 나를 단련시키며 성장의 기록이 되었다. 어쩌면 내가 가톨릭 신자가 된 것도 큰고모님의 간절한 소망이 내 삶에 스며든 결과일 것이다.
2026-01-30 가고파 바닷가 소담헌(笑談軒)에서 김동출
첫댓글 존경하는 시인님.
이렇게 하나하나 모으면 귀한 자서전이 될 듯합니다.
꾸준히 지난날을 회상하며 올리셔서 귀한 자서전으로 엮으시기 바랍니다.
한하운 시인도 <희망>이란 잡지에 20회에 걸쳐 <나의 슬픈 반생기>를 연재 하셨지요.
그 <희망>지 두 권이 한하운문학관에 찾아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나중에는 챕터 127편으로 구성한 지금의 <나의 슬픈 반생기>가 되었지요.
꼭 그날을 희망합니다.
존경하는 관장님!
내 인생의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나 혼자 감내하기 힘든 시절이었어요. 격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