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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에세이스트 원문보기 글쓴이: 이민혜
(1) 단원 김홍도 :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김홍도(호랑이) 강세황?(소나무) :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비단에 채색 / 90.4X43.8cm / 호암미술관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는 호랑이 그림 중 단연 백미(白眉)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런 작품을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단원 뿐이다. 그가 그린 호랑이는, 모습은 물론 생명력까지 고스란히 화폭에 옮겨졌다. 더구나 잔바늘보다도 가는 붓으로 수천 번 반복 표현한 세부를 들여다 보노라면 경악과 찬탄을 금할 수없다.
단원은 바늘처럼 가늘고 빳빳한 붓으로 터럭 한 올 한 올을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반복해서 정교하게 그려내었다. 대단한 극사실 묘법(極寫實 描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랑이의 육중한 양감(量感)이 느껴짐과 동시에 민첩함도 표현되어 있다.그것은 바로 긴장해서 휘어 올라간 허리에서 전해오는 느낌이다. 곤두 선 터럭, 당당하고 의젓한 몸집, 하늘을 향해 흔드는 듯한 꼬리의 여유로움 등이 그림폭에 꽉 찼다.
화면 아래 위 좌우가 호랑이로 가득하다. 이토록 꽉 들어찬 구도임에도 여백 또한 치밀하게 분할하고 있다. 윗부분은 굵은 노송을 두면서도 오른쪽 위에는 여백을 두고, 바로 밑에는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점 가늘어지는 가지를 그렸는데, 나무 가지와는 대칭으로, 나무가지 보다는 굵은 호랑이 꼬리와의 사이에 적절한 공간을 절묘하게 안배했다. 꽉 찼으면서도 여유로워보이는 단원 특유의 공간 활용이 돋보인다.
지금까지 '송하맹호도'는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1745~1806?)가 스승인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1712~1791)과 합작으로 그린 작품, 즉 호랑이는 김홍도가 그리고, 소나무는 스승이 그린 것으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근년에 발표된 몇몇 연구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단원과 막역한 사이였던 이인문(李寅文:1745~1821)이 그린 것이라고 한다.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그림 오른쪽 위에 쓰인 '표암화송(豹菴畵松)'은 '강세황이 소나무를 그렸다'는 뜻이다. 단원의 재능을 무척 아끼고 후원했던 강세황. 그는 나이와 신분을 무시하여 단원과 친구가 되었고, 이러 점에서 '송하맹호도'는 강세황과 김홍도의 합작품으로 보인다. 그러나 표암(豹菴)과 그 아래 화송(畵松)은 확연하게 다른 필체다. '화송'은 씩씩한 필체인데 표암은 졸필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소나무를 그린 이는 누구인가? 김홍도와 절친했던 고송 이인문(古松 李寅文)의 작품 '벽라송월도(碧羅松月圖)'에 단서가 있다. '벽라송월도' 속 잔가지의 형태가 '송하맹호도'와 완연히 닮아있다. 고송(古松)이란 호가 말해주듯 이인문은 당시 소나무 그림의 대가였다. 이인문은 맹호의 위엄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여, 잔가지와 꼬리 주변의 여백의 미를 잘 살렸다. 일설에 의하면, '표암화송'이란 글씨는 뒷사람들이 표구하는 과정에서 단원과 표암의 합작품으로 조작한 것이라는데... 제자의 그림에 스승이 손수 "내가 소나무를 그렸다"고 써 넣었을까?
소나무 아래 호랑이가 갑자기 무언가를 의식한 듯 정면을 향했다. 순간 정지한 자세에서 긴장으로 휘어져 올라간 허리의 정점은 정확히 화폭의 정중앙을 눌렀다. 가마솥 같은 대가리를 위압적으로 내리깔고 앞발은 천근같은 무게로 엇걸었는데, 허리와 뒷다리 쪽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금방이라도 보는 이의 머리 위로 펄쩍 뛰어 달려들 것만 같다. 그러나 당당하고 으젓한 몸집에서 우러나는 위엄과 침칙성이 굵고 긴 꼬리로 여유롭게 이어지면서 부드럽게 하늘을 향해 굽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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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몸에 짧은 다리, 소담스럽게 큼직한 발과 당차 보이는 작은 귀, 넓고 선명한 아름다운 줄무늬와 천지를 휘두를 듯 기개 넘치는 꼬리, 세계에서 가장 크고 씩씩하다는 조선 범이다. -오주석의 '한국의 미美 특강'에서 발췌-
(2) 단원 김홍도 : 죽하맹호도(竹下猛虎圖)
김홍도:<죽하맹호도> 김홍도 : <송하맹호도>
김홍도(호랑이) 임희지(대나무) : 죽하맹호도(竹下猛虎圖)
비단에 채색. 91.0 X34.0cm. 개인 소장
「죽하맹호도(竹下猛虎圖)」는 대나무 아래 선 호랑이를 그린 작품이다. 오른쪽 위에 세필(細筆)로 쓴 능산(菱山) 황기천(黃基天,1760-1821)의 제발(題跋)이 적혀 있다. 2행(行) 17자(字)의 제발 끝에 ‘조선의 서호산인이 호랑이를 그리고 수월옹이 대나무를 그리다(朝鮮西湖散人畵虎 水月翁畵竹)’라고 부기(附記)하여 두 사람의 합작품임을 알려준다. 서호산인은 김홍도(金弘道,1745-1806)의 젊은 시절 호이고, 수월옹은 임희지(林熙之,1765-1820)의 호다. 화가명(畵家名) 앞에 ‘조선(朝鮮)’이라는 국명(國名)을 적고 있는데, 이는 통신사를 통해 일본에 전래(傳來)된 그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죽하맹호도」는 「송하맹호도」와 자세가 정반대다. 얼굴은 정면인데 고개를 좌측으로 살짝 돌렸다. 다리는 짧아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다. 긴 등은 높게 둥글리고 있어 언제라도 먹잇감을 향해 뛰어오를 수 있는 응축된 힘이 저장되어 있다. 꼬리는 굽이치며 하늘로 향했다. 온 몸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흐른다. 몸 전체는 연한 황색으로 바탕색을 칠한 후 털은 가느다란 붓으로 세밀하게 그렸다. 배와 엉덩이 꼬리에는 흰 선을 더해 호피의 질감을 능숙하게 처리했다. 눈두덩이에 나비처럼 그려 넣은 흰 선과, 치켜 올라간 눈동자가 불을 뿜듯 형형하다. 먹색의 미묘한 변화와 탁월한 양감, 사실력이 극대화된 붓질은 가히 조선 최고의 작가만이 그릴 수 있는 솜씨다. 김홍도가 아니면 그릴 수 없는 신운(神韻)의 경지다.
「죽하맹호도」는 「송하맹호도」에 비해 맹호의 비중이 축소되었다. 대나무에게 화면을 많이 내어준 탓이다. 대나무를 그린 임희지는 호가 수월당(水月堂), 수월헌(水月軒), 수월도인(水月道人)이다. 그림을 그린 후 ‘水月’이란 두 글자를 초서체로 특이하게 흘려 써 마치 부적 글씨 같았다고 한다. 「죽하맹호도」는 합작품이어서인지 낙관을 생략했다.
조희룡의 "호산외기(壺山外記)"에 의하면, 임희지는 키가 8척이나 되고 깨끗한 풍모를 지녔던 일세의 기인으로 생황(笙簧)을 잘 불었다고 한다. 그림은 대나무와 난초를 특히 잘 그렸는데 묵란은 매우 높은 수준을 보여줘 추사 김정희 이전으로는 최고라는 평을 얻었다
(3) 작자 미상 : 맹호도(猛虎圖)
작자 미상 :맹호도(猛虎圖)
18세기 / 지본담채 / 96.0 X55.1cm / 국립중앙박물관
호랑이는 소나무나 대나무 또는 까치와 함께 그려지지만, 이 그림에서는 오직 호랑이만을 화면 가득히 그렸다. 안으로 야무지게 향한 꼬리, 매서운 눈썹과 표정, 묵직해 보이는 발에서 전해오는 긴장감은 이 그림을 그린 이의 빼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면, 호랑이 그림은 벽사(辟邪)의 목적으로 그려지는 일이 많아진다. 최근에 민화(民畵)가 재평가되면서 까치와 호랑이 그림이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런 탓으로 많은 사람들은 호랑이 그림이 민화의 주류인양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호랑이 그림은 도화원의 화가에 의해 조선 초부터 그려진 영모화(翎毛畵)의 한 소재였다. 또한 악귀를 물리치는 그림으로 용과 함께 매년 새해 벽두에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맹호도(猛虎圖)'는 그림 오른쪽 위에 7언 절구의 발문(跋文)과 '갑오남지일(甲午南至日)'이란 간기(干紀)가 있어 그림을 그린 연대를 추정케 했고, 그 아래에 찍힌 현재(玄齋)라는 낙관이 누구의 그림인지를 알게했다. 그러나 현재(玄齋)라는 낙관 때문에 오랫동안 심사정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지만 제발(題跋)의 글씨체가 심사정의 것과는 확연히 달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갑오년(1714년, 혹은 1774년)이란 연대는 심사정(1707~1769)이 10세 미만이거나 세상을 떠난 후가 되므로 그의 작품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그의 작품에 후세 사람이 화제를 쓰고 낙관을 찍었을 가능성은 열어두었다. 그림 오른쪽 위 제발(題跋)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獰猛磨牙孰敢逢 영맹마아숙감봉 용맹스럽게 이를 가니 감히 누가 맞설 수 있겠는가
愁生東海老黃公 수생동해노황공 동해의 늙은 황공은 시름이 이니
于今跋扈橫行者 우금발호횡행자 요즈음 드세게 횡포스런 자는
1946년 미군정 시절, 서대문에 있는 골동상 엄창익의 가게에 상사 계급장을 단 미군 헌병이 들어오더니 손짓 발짓으로 '골동품이 산처럼 가득히 쌓여 있으니 자기와 함께 가 보자.'고 했다. 엄창익은 호기심에 미군을 따라 남대문 시장 건너편에 있는 5층짜리 건물의 지하실로 들어갔다. 그 건물은 일본인 사이토쿠 타로가 경영하던 요리 집, 금천대회관이었다. 이곳은 해방 후 사이토쿠가 일본으로 떠나버리자 미군들이 창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지하실로 들어간 엄창익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쫓겨가는 일본인의 짐에서 미군이 압수한 고미술품들이 지하실 가득히 쌓여 있었다. 미군은 잘 포장된 고리짝 하나를 풀어헤치더니 설명을 청했다. 엄창익은 내용물을 열심히 설명해 주었고 그 댓가로 족자하나를 받았다. 조심스럽게 족자를 펼치자, 안에서는 호랑이 한 마리가 의기 등등한 모습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에는 벽창호나 다름없던 엄창익이었다. 그림 위 부분에 해서로 써 놓은 발문조차 읽어 볼 관심이 없었다.
일본 그림으로 단정 내린 엄창익은 맹호도 아래에 '삼천 원'이란 가격표를 매달아 골동품 가게 한복판에 걸어 두었다. 미군들이 호랑이 그림을 좋아하니 그들에게 팔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고서화를 잘 알고 있는 최병한이 가게에 들어서다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 족자가 영조 때의 대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정 못 믿겠으면 '고적도감'을 펴 보구려. 저 그림은 일제 때 후암동에 살던 모리 게이스케가 소장했던 물건이요. 삼천 원이 아니라 삼만 원에도 누가 살지 모르는 물건이란 말이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일제 때 남산에 있던 민속박물관의 관장을 지냈던 아사카와 노리다카가 엄창익의 가게에 들렸다. 그는 아우인 아사카와 다쿠미와 더불어 이 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던 일본인이다. 그는 시간만 나면 등산 모자에 운동화를 신고 전국에 있는 도요지를 찾아 다녔고, 인부를 사 흙을 파내며 도자기 파편을 수집했다. 그는 파편들을 정리하여 우리 도자사 연구에 공헌하고, 해방 후에 국립박물관의 고문을 지내면서 수천 점의 파편 자료를 기증한 뒤에 귀국했다.
엄창익이 아사카와 노리다카에게 호랑이 그림을 보여주자 그는 가급적이면 이런 훌륭한 그림은 박물관에 팔아서 여러 사람이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문화재에 대한 애정어린 충고를 했다. 아사카와 노리다카가 가게를 다녀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창익은 덕수궁 박물관을 찾아가 일만오천 원을 받고 이 천하의 명품을 팔았다. 당시 싯가로는 3만 원을 훨씬 상회했으나, 아사카와 노리디카의 말에 감동을 받아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그 후 이 그림은 1970년 대 초 '한국명화 근대 5백년 전'에 출품되어 많은 사람으로부터 찬사를 받고, 국립중앙박물관 도록의 표지를 장식했다.
18세기에 그려진 '맹호도'는 오랫동안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의 그림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제발(題跋)의 글씨체와 연대(年代)에 대한 논란은 잠재워지지 않았다. 만약 이 '맹호도'가 심사정의 그림이라면 낙관과 발문은 후대에 찍고 쓴 것이라 추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심사정의 그림으로 추정하거나 또는 필자 미상의 작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근에는 18세기경의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간주하는 경향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호랑이의 동작 포착과 묘사력, 그리고 화면 구성에서 흠잡을 데 없는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어 기량있는 화가의 작품인 것만은 확실하다.
대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 걸까?
김홍도:<송하맹호도> 작자 미상: <맹호도>
유명한 호랑이 그림이 두 개 있다. 김홍도의 '송하맹호도'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오랫동안 심사정 작품으로 여기다가 이제는 작자 미상으로 된 '맹호도'이다. 두 그림의 호랑이는 언뜻 보면 매우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그림을 볼 때에는 공통점뿐 아니라 작은 차이점까지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대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 걸까?
[같은 점]-일단 두 그림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자세가 거의 같다. 무엇인가를 지켜보면서 살금살금 다가서는 모습은 모두 비슷하다. 앞발을 나란히 하고 있는 것도 꼭 같다. 다리 뒤쪽의 털을 표현한 점도 매우 비슷하다.
[다른 점]- 하지만 다른 점도 꽤 있다. 무엇보다 '맹호도'에는 배경이 되는 그림이 없다. 호랑이의 눈매도 조금 더 부드러워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김홍도가 그린 호랑이의 눈꼬리가 좀 더 올라갔기 때문일 것이다. 뒷발을 모은 것과 벌리고 있는 것도 차이다. 더 큰 차이는 '맹호도'의 호랑이가 등을 더 곧추 세웠고, 등뼈가 보일 될 정도로 등의 곡선이 울퉁불퉁하다는 것이다. 배 쪽의 흰 털을 그린 모양새도 두 호랑이가 크게 다르다. 그리고 꼬리를 보면, '송하맹호도'의 호랑이는 S자로 구부러지면서 하늘을 향하고 있다. 반면에 '맹호도'의 호랑이는 S자 형태이기는 하지만 마치 우산 손잡이처럼 끝이 바짝 말려서 아래를 향하고 있다. 조금 더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종합해 보면] '맹호도'의 호랑이가 어딘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 모습이라면 '송하맹호도'의 호랑이는 보다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두 그림이 그려진 시기를 살펴보면 이런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다. 결론을 발하자면, '맹호도'가 '송하맹호도'보다 먼저 그려졌다. 따라서 김홍도가 호랑이를 그리면서 '맹호도'를 직접 보고 참고하면서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 앞서 그려진 호랑이에 보이는 어색한 점을 고쳐서 조금 더 잘 그릴 수 있었다는.......
호랑이 가족 : 작자 미상
우리나라 토종 호랑이 - KBS 제공
첫댓글 辛丑年을 맞이하여 '소(牛)'에 대한 것을 조사하던 때가 몇 달 전의 일인 것 같은데,
壬寅年 '검은 호랑이의 해;가 바싹 다가오네요.
요즘 시력이 많이 약해져서 호랑이에 대한 새 작품을 정리하는 것이 주저되어
2017년 2월에 올렸던 작품을 옮겨왔습니다.
선생님~
한번 뵙는다하면서 왜 이리 어려운지..
세월이 쏜살처럼 흘러갑니다~
11월 27일 산골집을 떠나왔습니다.
조만간 한번 뵈어야겠습니다~
한국호랑이!
한국산 호랑이는 일정시대 마구잡이로 사라졌습니다.
일본은 호랑이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호랑이를 보면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구잡이를 했습니다.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호랑이가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한국호랑이는 단군 신화에도 나오고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 ‘호순이’도 있어
우리나라를 상징합니다.
제가 호랑이를 본 것은 어렸을 때 작은어머니댁 마루에 걸려있는 시집올 때
수놓은 호랑이 액자를 본 것이고(6.25때 포격으로 집이 다 타버렸음)
실제로 실물을 본 것은 창경원동물원에서 구경한 것입니다.
또 청량리 전차 종점에 담배 문 호랑이 그림이 크게 세워져 있어 본 것이 유일합니다.
그 이후 과천 서울대공원동물원에서 두세 번 봤습니다.
2022년은 임인년(壬寅年) 호랑이띠 해입니다.
내년엔 ‘에세이스트’ 여러분, 좋은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민혜선생님 건강하십시요.
선생님 뵌지가 참 오래되었습니다.
호랑이 그림과 글을 꼼꼼이 읽으며 선생님을 떠올렸습니다.
여전히 애정과 열정으로 좋은 자료를 올려주신 선생님께 존경의 박수를 드립니다.
늘 강건하셔서 일신이 편안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