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의 재산증식(財産增殖)
1998년 당시 새 대법관으로 임명 제청된
조무제(趙武濟 : 1941~) 전 부산지법원장은,
30년간의 공직생활을 통해 그가 여태껏 모은 재산이
25평짜리 아파트 1채와 부인이름으로 예금 된 1천만 원이 고작이래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청빈(淸貧)했던 그는, 지난 93년도에도 공직자 재산등록 때
사법부 공개대상 103명 중, 6천만 원을 신고하여 꼴찌를 했대서
그 때도 화제가 된 적이 있었던 인물입니다.
가족들에겐 오히려「무능」으로 비쳐질 수 있는 청빈(淸貧)이,
그렇게 새삼 돋보였다는 것은 아마 모르긴 해도
잇달아 터지는 공직사회의 부정부패와 대비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선비의 청빈을 미덕으로 떠받들었던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부터 청렴한 관리를 뽑아 표창하는 청백리(淸白吏) 제도가 있었습니다.
태조(太祖) 때부터 순조(純祖) 때까지(1392~1800),
217명을 청백리로 뽑았던 조선조 때는,
예조에서 후보자 명단을 올려 의정부 대신들이 참석한 묘당(廟堂)회의에서
최종 선발하는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청백리로 뽑히는 것을 대대손손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던 것도,
이처럼 까다로운 절차에다 1년에 1명꼴도 안되는 희소가치 때문입니다.
외국에 예를 들어 보자면,
중국의 포청천(包靑天 : 999~1062)이 청백리 표상이 될 것이고
태국의 방콕 시장(市長)을 지냈던 잠롱 스리무앙(Chamlong Srimuang : 1935~)도
당시 가난하게 살며 선정(善政)을 폈다하여 화제가 됐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왕조에서 재상(宰相)을 지낸
황희(黃喜 : 1363~1452) 정승과
유성룡(柳成龍 : 1542~1607)같은 분이
참으로 청렴결백한 인물로 꼽을 수 있습니다.
황희 정승은 비가 새는 집에서 딸 일곱과 함께 살았는데
나들이용 치마라고는 한 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
그와 동문수학(同門修學)을 한 친구가 방문했을 때
부인부터 막내딸에 이르기까지 치마 한 벌을 번갈아 입고
인사를 올렸다는 이야기는 아주 유명한 일화로 전해 내려옵니다.
또한, 유성룡 재상은 육척장신으로 키가 컸지만
삼간두옥(三間斗屋)에서 쪼그리고 살다가 생(生)을 마감했는데,
그분이 돌아가시자 염(殮)을 하는 방이 너무 작아서
시신(屍身)의 발목이 문밖으로 뻗게 되여 방에서 입관(入棺)을 할 수 없게 되자
그것을 본 문하생들이 대성통곡을 했다는 얘기도
아주 가슴을 미여지게 하는 좋은 예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근래의 청렴했던 인물을 살펴보면,
초대대통령 이승만(李承晩 : 1875~1965) 부부가
얼마나 청렴하게 사셨는가를 직접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가 기거했던 이화장(梨花莊)에 가보면,
종이를 아끼려고 낡은 잡지에 신문스크랩을 한 것이
서재에 수백 권이 놓여 있다든지,
또 여러 차례 기워 입어서 누더기와 진배없는 다 헤진 내복이
옷장 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외무부 장관을 지낸 변영태(卞榮泰 : 1892~1969)는,
유엔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한 후, 아껴 쓰고 남은 출장비 백 여 달러를 반납하고
말년에 칠순이 되어서도 영어 개인교수로 생계를 꾸리셨다는 일화는,
아직도 훈훈한 이야기로 우리들 가슴에 계속 전해져 내려옵니다.
자유당 시절, 법조계의 결벽주의자(潔癖主義者)
김홍섭(金洪燮 : 1915~1965) 판사는,
병 든 아내를 입원시키면서 자신은 관용차를 타고 가고
부인은 시내버스를 타고 가게 했다 해서 큰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민간인이니 관용차를 타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정당한 보수 이외에는 어떤 이득도 탐하지 않고
언제나 자리가 바뀔 각오로 일하는 것을 법관의 좌우명으로 실천 해 온 그는,
물들인 작업복에 운동화 차림으로도 유명했습니다.
또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 1887~1964)선생도
청빈과 원칙주의로 아주 유명했습니다.
대법원장 시절 그는,
며느리 부탁으로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른 손자의 합격여부를
알아보려고 학교에 갔다 온 비서관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근무시간에 사사로운 일을 한「죄」를 나무란 것입니다.
그는 담배 한 개비를 두 토막으로 나눠서 피웠고,
집에서는 신문지를 잘라 화장지로 썼습니다.
몸에 밴 절약정신의 실천을 그대로 한 것입니다.
일찍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선생은
그의 아시(雅詩)에서 「위공무사몽역한(爲公無私夢亦閑)
여인부경심상정(與人不競心常靜)」이라고 읊조린 바 있습니다.
「공무(公務)를 보는데 사심(私心)을 버리면 꿈속에서도 마음이 편안하고,
사람과 더불어 경쟁하는 마음을 버리면 항상 마음이 고요 해 진다.」라는
공직자들의 경각심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카페 가족 여러분!
공직자들이 누구나 이 말씀대로만 살아간다면야
그 누가 청백리 표상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일생동안 부귀영화라는 허황된 생각을 버리고
그때그때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이행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도 누구나 청백리가 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물론 청빈한 채 하며 축재한 관리도 있을 것이고,
또 부자이면서도 청빈한 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나라는 정권(政權)이 바뀔 때마다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고위공직자들이 줄줄이 부정부패를 저지른 것이 판명되어
쇠고랑을 차거나 탐관오리로 낙인 찍혀 감옥에 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여러분께서도 다 아시는 얘기지만,
청백리란 청렴하고 결백한 관리를 일컫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청백리는 공사간(公私間)에 근검절약하고
모든 공적(公的)인 업무를 투명하게 처리하는 사람을 말 합니다.
차를 탈 때나 승강기를 이용할 때 줄을 잘 서지 않는 사람일수록
출세하기 위해서는 줄(소위 빽)을 잘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고 합니다.
줄을 대기 위해서는 요로에 뇌물을 많이 바쳐야 하고
뇌물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부정한 방법을 도모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거들먹거리며 호의호식(好衣好食) 하려면
더 적극적으로 일반 국민들에게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꾀하고
착취수탈(搾取收奪)을 감행해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개인사업자들이 왜 봉급 근로자들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올리면서도
대체로 세금은 적게 내는지 그 이유도 어렴풋이나마 짐작케 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관리는 원초적으로 타락의 소지를 가지고 있다고...
또 한국 공무원들의 부정부패(不正腐敗)는 가히 세계 3위권 안에 든다고...
그래서 한국은 세계적으로 악평(惡評)이 자자합니다.
요즘 새 정부 장관후보자들의 국회 청문회가 한창입니다만,
후보자 15명 모두 주거 이외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고
그것이 재산 증식을 위해 투기를 했다 해서
연일 언론의 질타를 받고 있습니다.
누구는 후보자에 올랐다가 일찌감치 낙마한 사람도 있고
누구는 단독주택이 다섯 채, 또 누구는 배우자와 함께 모두 네 채,
또 누구는 아들 명의로 서울, 부산, 경기, 제주, 경북 등 전국 5개 지역에
아파트, 오피스텔, 단독주택, 공장, 점포, 임야, 대지 등,
무려 40건의 부동산을 신고했다 해서 난리입니다.
또 누구는 부동산을 누락시켜 신고하기도 했고
또 누구는 논문 표절로 도마위에 올라와 있기도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누구는 60억원이 넘는 예금을 신고했고
유가증권이나 콘도, 골프 회원권도 모두 3~4개씩 있다고 합니다.
카페 가족 여러분!
돈이 많다는 것은 본인에게나 그 집안이나 주위가 모두 좋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이 많다면야 누가 손가락질을 하겠습니까.
문제는 부동산이다 뭐다 해서 투기를 했다는 데에서 문제가 있는 거지요.
그래서 지난 세월에 청렴했던 인물들을 들춰 내 봤습니다.
2008년 2월28일 목요일 오전 8:50
첫댓글 돈이 인생의 다가 아니라고 하지만 돈때문에 웃고 울지요 돈이 최고지요
지금도 방한깐없어서 힘들게 천막을 치고 사시는분들이 계시지요 그런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아픈 뉴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