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추억 속 고향집, 그리운 어머니
/ 이 병 준
태어나서 서당글 한문을 배우고 그 당시 국민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환희의 기억보다는 슬픈 기억이 훨씬 더 많이 뇌리에 각인되어
수시로 과거의 기억에서 파노라마 처럼 떠오르곤 하는 그런 고향이다.
집 방안을 들어와 보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폐가로 보일 수 있는 건 마당은 물론이고 텃밭에 무지막지하게 자란 잡풀들이다. 2개월 전에 왔을 때 마당에 풀만큼은 솜털같이 뽑아 놓았는데 그 바빴던 손길 흔적은 간곳 없이
무정한 잡풀 제멋대로 키자랑 하듯 무도하게 자랐다. 기거해서 산다면 어찌 저 지경까지 자라도록 보고만 있었겠는가.
목장갑을 끼고 낫도 거머쥐고 전쟁 연습에
적군이라도 무찌르는 듯한 태도로 잡풀 제거
작업에 돌입했다. 마당에 자란 잡풀은 장갑 낀 손으로 뽑기도 하고 뜯기도하고 어지간히
정리하는 데도 시간이 제법 걸린다. 밀린 빨래는 아침 먹기 전에 세탁기 돌려 아침 식사후에 일찌감치 건조대와 빨래줄을 이용해서 널어 놓고, 중방의 옷걸이의 옷도 끄집어 내어 빨래줄에 일광 소독 시키려고 널었다. 도마에 곰팡이가 피어 밖앝에 일광 소독시키려고 아주 땡볕 잘드는 자리에 내다 놓았다. 햇살이 어찌나 강열하지 소독이 아니고 세균인들 이 뙤약볕을 견딜 수 있으랴. 쾌재다.
한창 마당 풀 제거하는 중에 부추 한포기가
마당 한복판에 세멘트 갈라진 틈새를 비집고
나와 꽃을 피웠다. 곧 씨를 맺고 내년에는 지금 보다 몇십 배 많은 씨앗을 퍼트려 새끼를 치겠지. 금년 정월 초이튿날 소천하신 어머니 생각이 난다. 늘그막에 앞마당 출입이 거북하실 적에도 내가 마당 풀뽑기 작업을 시작하면 안방 창문 밖에 나와 앉으셔서 내 동작을 유심히 보다가 "야야, 네 뒷발굼치에 금잔화 한 포기 있다. 조심해라."
이건 뽑지 말고 보호하라는 지시 사항이다.
"야야, 고 옆에 부추도 뽑지 말거라." 나는 일부러 "엄마, 마당 복판인데 뽑아야지요?" "꽃이나 풀이 제 날자리 가려가며 싹 트는 거
봤나. 사람이 보호해 줘야지." "알았어요. 엄마" 엄마 생전에 마당에는 금잔화, 채송화,
가끔 부추와 참나물이 엉뚱하게도 세멘트 갈
라진 사이로 포기군을 이루어 솟아난다. 엄마
는 그 어느 한 포기도 텃밭에 지천으로 많은데
도 불구하고 절대로 함부로 뽑으시지도 않았
지만 자식인 내게도 신신당부 부탁하듯이 무
심으로 당부하시곤 했다.
"아들아, 저 무심한 꽃의 생명력을 찬찬히 살
펴봐라. 사람사는 것과 이치가 똑 같애. 주인
을 잘못 만나면 즉시 뽑혀나가 생명이 끝나지
만 주인 잘 만나면 꽃 피우고 가을 씨 맺을 때 까지 함께 동고동락 한다 아이가." 이게 인간
이 지닌 자비심 측은지심이요. 생명 경외심에 대한 표상이시다.
그런데 금년에 금잔화는 한 포기도 못 보고
처마 밑에 채송화 꽃이 앙증맞고 화사하게
서너 포기 꽃을 피웠다. 어머니 얼굴처럼 환하게 인자하게 웃고 있다. 흡사 어머니가 꽃으로 환생한 듯 착각에 빠진다. 가녀린 몸매 그 질긴 생명력은 엄마의 꽃이다. 고향집 기거하신지 30여 년, 봄철이 되면 어디 숨어 있었는지도 모르게 채송화, 금잔화는 반드시 얼굴을 내밀고 어머니는 그 억센 잡풀 속에서 용하게도 구분해서 보호해 주고 피는 꽃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위로하며 무언으로 주고 받았을 대화가 이 고향집 공간에 그대로 살아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엄마의 잡풀 뽑기는 그들에게 보내는 자비의 손길이요. 어쩌면 자신을 온전히 지켜가려는 엄중한 수행의 한 방편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풀뽑기에는 몸서리나실만도 한데, 어머니는 고들빼기나 참나물, 부추가 씨를 맺기 시작하면 내 생각엔 저놈의 씨가 익어 내년엔 몇십 배로 싹이 틀텐데 미리 뽑아버리자고
말씀드리면 어머니는 "야야, 기왕 씨 맺힌 건
그냥 둬야지. 우째 버리겠노?" 집 앞,뒤 마당과 텃밭에 봄이면 지천으로 난리법석으로
솟아나는 식물인데도 허수히 여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자신이 아흔아홉까지 장수 하신 것 같
기도 하다. 어머니는 평생 봄부터 늦여름까지
는 그야말로 청정 자연산 돌나물, 참나물, 부추, 취나물로 반찬 조리를 해 잡수셨다. 봄철 부추에 태양초 고추 숭숭 썰어넣고 붙여주신 지짐 부침개는 그 맛이 일품이었다. 참나물도 아주 얇게 지짐(부침개) 을 만들어 주셨는데 이제는 그만한 맛은 어디가서도 즐길 수 없으니 슬픈 생각에 잠긴다.
어머니, 계시는 그곳은 근심도 걱정도 없으시지요? 남여, 성(性)도 구분이 없어 애증도 갈등도 없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한지요? 열일곱 살에 시집와서 서른한 살에 모질게도 먼저 떠나신 아부지는 만나 보셨는지요? 엄마는 비록 아부지를 못 알아
봐도 아부지는 엄마를 못알아 보시지는 않으시겠지만 알아도 염치도 없고 미안해서 아는 척 못 하실거예요. 기왕 가신 그 곳, 아부지 알뜰히 찾을 생각은 아얘 접으시고 알뜰살뜰 이해해주고 위해 주시는 분 계시거든 그 분에게 의지하고 이승에서의 모든 고통과 쓰라림은 부디 다 잊으시고 타고나신 품성, 자비롭고 온유한 대보살의 심성으로 천국의 열락 환희심으로 누리시옵소서. 행여나 자식 남매 눈시울에 아롱거리시면 밤하늘 별빛으로 꿈속에라도 나투시어 상면하게 하소서. 일찍 앞질러 가신 그 길, 저 역시 곧 뒤따라 갈 것이옵니다. 어머니, 이승을 떠나실 때, 그 때 고운 모습
그대로 유지하셔서 제가 알아볼 수 있게 더 이상 늙지는 마시옵소서. 어머니 살아 생전에
못다한 불효 막심한 소자는 아직도 이승에선 용서받을 곳이 없기에 애달픈 마음으로 견디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승을 떠나기 전에는 결코 불효한
죄를 사함 받지 못할 것 같사옵기에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입니다. 차라리 먼저 앞질러 그 곳에 갔으면 이 고통 이 괴로움은 차마 겪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아직도 수시로 들곤 합니다. 어머니, 아직도 그리움에 몸살을 앓습니다. 부디 천주님의 품안에서 편안한 안식을 누리소서! (202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