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제색도라 할까
내일이면 사월이 가는 스무아흐레다.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예년보다 봄꽃들은 일찍 피고 저물었다. 삼월 말부터 사월 초에 주말마다 연속 세 차례 비가 내렸다. 골프를 치러가거나 텃밭을 가꾸지 않음에도 주말 일정에 차질이 왔다. 비가 잦으니 즐겨 가는 산행을 나서는데 불편을 겪었다. 적은 양이긴 해도 대기에 떠도는 먼지를 재워주고 초목에 생기를 불어넣은 고마운 비였다.
우리 지역 잦았던 봄비는 산불 예방에는 도움 되어 산림 관계자들이 마음 놓을 수 있었을 테다. 지난번 잦은 비로 근무지 배움터 지킴이 양반은 흙이 질어 농사에 지장을 받을 정도라 투덜댔다. 그분은 댁에서 가까운 지인이 묵혀둔 밭에다 채소를 심어 키우는데 이랑을 짓지 못한다고 했다. 그 이후 스무날가량 비다운 비가 오지 않아 대기가 건조하고 농사는 가뭄을 탈 정도다.
내가 노트북에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는 뉴스 가운데 날씨 정보가 빠지지 않는다. 와실에서 뉴스 전문 채널을 가끔 보기는 하나 날씨 정보는 노트북에 의존한다. 휴대폰에서도 날씨를 검색하는 방법이 있다고 하나 나는 익숙하지 않다. 노트북에는 오늘과 내일의 날씨가 시간대별로 해나 구름이나 비가 그려져 판별이 쉬웠다. 주간 예보도 요일별 수시로 확인해 둠이 습관이 되었다.
날씨 정보에 민감함은 기온 변화보다 다른 두 가지 이유에서다. 차를 운전하지 않기에 이동은 대부분 걸어 다닌다. 강수가 예보되면 비가 오지 않고 아침 하늘에 구름이 끼기만 해도 우산을 챙겨 나선다. 미세먼지가 심하다고 하면 가급적 동선을 줄인다. 특히 주말이 다가오면 날씨 정보를 유심히 살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날씨로 인해 바깥 활동에 지장을 받는가 여부 때문이다.
주중 일기예보는 그제 남녘 해안으로 비가 스칠 것이라 했다. 일과 후 대금산 산행 후 귀로에 비를 만날 수 있겠다 싶었으나 참아주어 다행이었다. 초저녁 잠들어 새벽녘 일어났다. 와실 베란다 우수관으로 빗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날이 밝아와 출근 채비를 하고 와실을 나섰다. 간밤 비가 오지 않아 골목은 젖어 있지 않았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연사 들녘으로 나갔다.
가을걷이 이후 깊이갈이 해둔 일모작 지대는 농사가 시작되었다. 들녘 한 켠 다려놓은 무논에 볍씨 상자를 가지런히 펼쳐 깔아 보온 덮개를 씌워 놓았다. 며칠 전부터 농로에는 논두렁을 만드느라 트랙터가 지나간 자국이 보였다. 아직 모를 내는 무논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전이라 들녘은 독새풀만 무성하게 자랐다. 독새풀은 한갓 잡초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녹비로도 훌륭할 듯했다.
들녘 복판 바둑판처럼 그어진 농로 따라 걸었다. 들판은 낮은 구릉이고 주변은 산으로 에워싼 지형이었다. 농사꾼도 아니면서 아침마다 들녘을 빙글 둘러 교정으로 들어감을 반복한다. 학교 반대 방향 수월지구 아파트와 고현을 둘러친 계룡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난밤 온다던 비는 오지 않아도 대기는 약간의 습기를 머금은 듯했다. 살짝 비치는 일출 기운과 함께 구름이 걸쳐졌다.
비가 그친 뒤라면 운무가 산허리까지 휘감았을 텐데 정상부만 걸쳐져 있었다. 계룡산 산등성은 바위가 뭉쳐진 봉우리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운무는 살짝 비친 햇살로 더욱 신비로웠다. 이른 아침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문득 국보 진경산수화 인왕제색도가 떠올랐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소장하다 작고하자 고인 뜻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기증한 겸제의 그림 아니던가.
계룡산에 걸쳐진 황홀한 운무를 바라보다 방향을 틀어 연초천 둑으로 올랐다. 효촌마을 앞 조정지 댐에 채워진 냇물은 수면이 잔잔했다. 냇가 가장자리 묵은 갈대는 야위어져 삭으면서 새로운 잎줄기가 시퍼렇게 솟아났다. 텃새로 머무는 흰뺨검둥오리들이 먹잇감을 찾아 푸드덕거렸다. 둑길 산책로를 따라 걸어 연효교를 건너니 송정고개 아침 햇살은 맞은편 석름봉 산기슭으로 비쳤다. 21.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