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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수건
고후 3:12-18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2-18 / 우리는 이 새로운 영광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므로 아주 대담하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13) 그리고 ㄱ) 모세가 영광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감추려고 얼굴에 수건을 쓴 것 같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ㄱ. 출34:33-35) 14) 수건으로 가리운 것은 모세의 얼굴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도 수건으로 가리워졌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의 마음과 생각에는 두꺼운 수건이 씌워져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 참뜻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수건은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벗겨질 수 있습니다. 15) 그렇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 마음이 꽉 닫혀 있어 십계명을 지키는 것만이 구원받는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16) 그러나 ㄴ) 누구든지 주께 나아올 때 그 수건은 벗겨집니다. (ㄴ. 출34:34) 17) 주님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시며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18) 우리 그리스도인은 얼굴을 가리는 수건이 없습니다.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환하게 비출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우리 속에서 일하시므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영광 속에서 더욱더 주님을 닮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수건으로 눈이 가려진 것처럼 가려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임하여 그 수건은 벗겨지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수건으로 덮힌 이스라엘(12-16) 바울은 새 언약의 사도로서의 확신과 긍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고후 3:4-11). 이어지는 본 단락에서 바울은 출애굽기 34장 29-35절의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율법을 받고 내려올 때 얼굴에서 광채가 나서 모세가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내려오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옛 언약이고, 모세는 옛 언약의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즉, 옛 언약인 율법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으로 얼굴에 가린 것처럼 일시적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13).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은 완고하여서 옛 언약인 율법을 절대시하는 어리석음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이 왔음에도 수건을 벗지 않고 그리스도의 광채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14). 그러나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면 그 수건은 곧 벗겨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5).
수건을 벗은 얼굴로 그리스도를 만날 이스라엘(17-18) 누구라도 그리스도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수건을 벗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질 것입니다(16). “돌아가다”는 곧 회개입니다. 그리스도께 돌아가면 우리를 가리던 그 수건은 벗겨질 것입니다. 그렇게 수건이 벗겨져 예수께로 돌이가면, 나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17절 말씀대로 자유가 주어집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이 자유는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는 참된 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배우자가 없어도, 외모가 출중하지 않아도, 가방 끈이 짧아도, 집의 형편이 보잘것없어도, 그것의 유무가 내가 되지 않고, 그것 때문에 주눅 들지 않는, 그것과 상관없이, 참 나로 자유하게 살 수 있는 이유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영, 수건을 벗은 얼굴, 그 영광에 참여하는 것, 그 생명으로 사는 이유가 바로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적용: 당신을 가리고 있는 수건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정말 예수를 만났고, 당신을 가리고 있던 수건을 벗었습니까? 당신은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는 참 자유인입니까? 참 당신이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삶의 변화가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했으며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었고... 그리스도가 자원해서 우리 대신 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면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때의 벌을 즉결재판소의 ‘처벌’로 생각하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빚’으로 생각하면, 돈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의 빚을 대신 갚아 주는 경우에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는 ‘죗값을 치른다’는 말을 처벌의 의미로 보는 대신 ‘계산을 치른다’ 나 ‘비용을 부담한다’는 좀 더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더욱 실감나게 믿을 수 있겠습니다.
< 설 교 >
너울을 벗고 보라
고후 3:12-4:2 / 김기석목사
[우리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주 대담하게 처신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얼굴의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 얼굴에 너울을 썼지만, 그와 같은 일은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은 완고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서면, 그 너울은 벗겨집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변모주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머무시기를 빕니다. 지난 주간 전 세계의 이목은 베트남의 하노이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북미 정상회담이 큰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우리는 무너졌던 평화와 신뢰의 길을 복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 한 번 실감하고 있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때 선물처럼 이 땅에 훈풍이 불어오기를 기다리던 모든 이들의 마음에 찬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의 길, 평화의 길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척박한 역사의 대지를 갈아엎고, 그 속에 씨를 뿌리고, 싹이 나지 않으면 움씨를 또 뿌리면서 끈질기게 버텨야 합니다. 이 민족의 가슴에 심어진 평화의 꿈이 한 여름 밤의 꿈처럼 허망하게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꿈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 튼튼하게 자라게 할 책임은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을 앞둔 주일인 오늘은 ‘변모주일’입니다. 수난의 시간을 앞두신 예수님이 제자 셋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영광과 수난은 모순된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둘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날 제자들은 잘 안다고 여기던 스승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살다보면 잘 안다고 생각하던 이들의 낯선 모습을 보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늘 교회에서 만 이야기를 나누던 분들을 다른 곳에서 만났을 때, 특히 그들이 전문성을 발휘하는 삶의 현장에서 만났을 때 깜짝 놀라곤 합니다. 서 있는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 사람의 모습은 달라 보입니다.
별일이 없을 때는 굳게 선 것처럼 보이던 이들도 곤고한 일을 만나면 속절없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반대로 별로 눈에 띄지 않던 사람인데 어려움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견결(堅決)한 인품을 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내면에 축적된 빛과 힘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가들은 성인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 후광(後光)을 그렸습니다. 후광은 고양된 영혼을 나타낸 것인 동시에 그를 감싸고 있는 초월적인 힘을 가시화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늘 병자들, 귀신들린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 곁에 머무시던 주님의 모습에 익숙했던 제자들은 빛에 감싸인 채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때서야 그들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미 수난을 예고하셨던 주님은 곤고하고 괴로운 날을 견뎌야 할 제자들에게 그런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영적인 힘을 공급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은 미구에 벌어질 우주적 파국 이야기를 전하기 전에 하늘에서 벌어지는 천상 예배 장면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분과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을 보았습니다. 그 주위에 있던 금 면류관을 쓴 장로 스물네 명과 앞 뒤에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명, 그리고 천군 천사들은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에게 찬양을 드렸습니다. 하늘과 땅과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도 하나님과 그 찬양에 동참했습니다. 우주적 대합창입니다. 그 놀라운 비전을 공유한 이들은 이후에 닥쳐올 시련의 시간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비전의 사람들에게도 시련은 쓰리지만 그것이 곧 절망으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변모 사건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빛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 하늘 예배에 동참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마5:16) 하고 명하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빛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둠의 옷을 먼저 벗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권고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롬13:12)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엡5:8)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우리도 어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빛의 자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서술(indicative)인 동시에 명령(imperative)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 사도께서는 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라고 말합니다. 발신인이 ‘그리스도’라면 수신인은 누구일까요? ‘세상’입니다. 너무 추상적으로 들리나요? 세상에는 ‘이웃’은 물론이고 ‘피조물’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혹은 피조물에게 어떤 사람입니까? 그들은 우리를 기쁨과 설렘으로 맞이합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빚을 갚으라는 독촉장 혹은 경고장처럼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세상에는 그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밝아지고 맑아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어두워지고, 시름이 깊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피를 잉크 삼아 영으로 쓰신 편지가 바로 우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편지에 적힌 내용은 무엇일까요? 구원 이야기 혹은 변화 이야기입니다. 어둠의 자식이 빛의 자녀로 바뀐 이야기, 이기적이던 사람이 이타적으로 변한 이야기, 절망의 심연에 갇힌 채 우울하게 살던 사람이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으로 변한 이야기, 적개심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대하던 이들이 이웃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환대하는 사람으로 변한 이야기 말입니다. 교회사는 온통 그런 이야기들의 향연입니다. 우리는 흔히 남을 변화시키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속상해 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은 변화되려 하지 않습니다. 굳어짐의 표징입니다.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빛의 자녀로 삼아주신 까닭은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언약의 일꾼들은 땅만 바라보고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늘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합니다(골3:1). 성경은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는 이들을 일러 ‘새 사람’이라 합니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골3:10) 끊임없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자기 속에 고착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겸손하게 배우려 하고, 자기의 부족함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라야 새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변화의 목표 혹은 방향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증언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우리가 품어야 할 영원한 소망입니다.
∙대담한 처신
바울 사도는 이런 소망을 품고 사는 이들의 당당함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주 대담하게 처신합니다.”(고후3:12) 믿음의 사람들은 괜히 남의 눈치나 보며 지레 주눅이 들거나, 어정쩡하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갑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대담한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롬1:16)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롬8:31)
이 당당함을 담대한 희망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3장 12절에 나오는 ‘대담하게 처신한다’는 구절은 4장 1절의 ‘낙심하지 않습니다’라는 구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당당함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요? 4장 2절이 그 대답입니다. “우리는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남에게 숨겨야 할 일이 없을 때 우리는 당당해집니다. 부끄러움이 없을 때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죄는 올가미가 되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듭니다. 죄를 짓는 순간 온 세상이 들고 일어나 우리를 고발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간교하게 행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이들은 진리를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스가랴서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 대제사장과 그의 동료들을 향해 “너희는 모두 앞으로 나타날 일의 표가 되는 사람들”(슥3:8)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계는 아직 당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세계를 앞서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근거는 지금 가시적인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4:18)
∙너울 말고 실상을 보라
바울 사도는 이런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모세의 너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과 만난 후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은 빛났습니다. 하지만 그 빛은 지속성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고 사라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모세가 자기 얼굴에서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얼굴에 너울을 썼다고 말합니다. 너울은 우리로 하여금 실상을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도 그 너울을 벗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보아야 하는 것은 ‘빛’이건만 그들은 너울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고 말했습니다. 율법 조문은 알지만 그 속에 담긴 정신을 보지 못할 때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너울이 벗겨져야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눈을 덮고 있는 비늘이 벗겨져야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선입견, 특권 의식, 자기 의의 너울에 갇히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오래 전 제가 다른 교회에서 잠깐 목회를 할 때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어느 주일 아침 허름한 옷차림의 젊은 사내 하나가 교회에 왔습니다. 교인들과는 예전부터 잘 아는 사이인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는 지성적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댕돌처럼 단단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제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그는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교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제 귀에 들려왔습니다. 명문대학을 나와 공장에 들어가서 노동자들의 벗이 된 어떤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거칠지 않았고, 정말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듣고 있던 저는 그 사람에 대해 부쩍 궁금증이 생겨서 그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은 아까 왔던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주 그가 다시 교회에 왔을 때 내 눈에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목회의 초창기에 겪었던 아주 부끄러운 기억입니다. 이러다간 지금 이 땅에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참담해졌습니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아,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말자. 내 눈에 씌워진 너울을 통해 바라보면 하나님조차 왜곡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너울이 벗겨질까요?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서면, 그 너울은 벗겨집니다”(3:16).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할 때 그 너울이 벗겨진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우리 운명이 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우리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는 것 말입니다. 경칩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자아의 동굴 속에 유폐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숨결을 받고 깨어나 새 생명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분단의 질곡 속에 있는 이 나라가 참 가엾습니다. 하나님의 각별하신 도움과 보호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롭게 열린 3월,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생명의 씨, 평화의 씨를 뿌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수건을 벗고 성경을 보라
박덕기목사 / 고린도후서 3:12~18
여러분, 수건돌리기라는 놀이를 한 번쯤은 다 해보셨지요? 영상을 통해서 한 번 보실까요? 또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하는 장님 놀이도 있지요? 재미있는 영상을 하나 더 보도록 하시지요. 수건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입니다. 결혼식이나 갖가지 행사의 답례품으로, 수건만큼 많이 애용되는 물건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우리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손발을 닦고, 몸을 닦습니다. 구술 같은 땀을 흘리며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는, 수건이 얼마나 고맙고 요긴한 물품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수건이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수건이라는 말을 통해서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는지, 이 시간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구약 시대 곧 율법의 직분과, 신약 시대 복음의 직분을 아주 대조적으로 묘사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사도 바울은 율법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율법을 죽이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율법의 소극적인 기능 곧 율법은 모든 인간의 입을 막고 정죄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시대의 직분까지도 정죄의 직분이요, 죽게 하는 직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정죄의 직분이요 죽게 하는 직분도 얼마나 영광스러웠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채 나는 모세의 얼굴을 감히 주목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백성들 앞에 나아갈 때는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었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막에 들어갈 때에는 수건을 벗고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 곧 신약 시대의 직분은, 의의 직분이요 살리는 직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힘주어 역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롬 11:13절에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직분의 영광스러움을 알면 알수록, 사도 바울이 지녔던 심정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1)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 2)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3)모든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 4)죄인 중의 내가 괴수니라고 했습니다. 이같이 부족한 자신에게 사도의 직분을 맡겨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황송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구역장, 교사, 성가 대원, 방송부원, 차량부원, 예배당 청소, 식당 봉사하는 일 등....이 모두가 천사도 흠모하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직분인 것을 아시고, 그리고 이토록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직분을 나 같은 허물 많은 죄인에게 맡겨주시니, 그저 황송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 단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수건의 용도를 아주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옛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를 수건으로 가려서, 백성들이 그 영광의 광채에 주목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속사의 비밀을 깨달은 모세가 율법의 상징인 얼굴의 광채를 가림으로써, 백성들이 율법을 영원한 것으로 여겨 절대시하는 것을 막고, 율법이 일시적이고 장차 없어질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시적이고 불완전한 율법을 절대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이 예표 하는 실체로서의 복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세의 얼굴에 수건이 가리어 광채를 볼 수 없었던 것처럼, 그 마음이 완고하고 율법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하여, 율법이 예시하는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구원의 복음을 받은 고린도 교인들조차, 유대에서 온 거짓 사도들의 미혹에 넘어가, 사도 바울이 전한 영원한 복음진리를 버리고, 율법주의적 신앙을 갖는 것은 물론, 사도 바울에게 천거서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사도직을 의심하며, 바울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는 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출 34:29-35의 사건을 재해석하여 줌으로써, 구원은 오직 자신이 전한 복음으로써만 가능함을 확실하게 증거 하는 말씀이 오늘의 본문인 것입니다.
먼저 12절에 보면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자신을 비난하던 사람들에게 하는 당당한 외침입니다. 사도 바울의 당당함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말씀에 비추어보면 그에게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 전도자인 자신이 의의 직분자임을 확신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욱 넘치는 영광을 허락하실 것이란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가진 소망입니다. 즉 육체는 세상에서 오해와 핍박과 고난을 받고 있지만, 장차 하늘나라에서는 주님께서 그를 크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소망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어디에서, 어느 누구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칠배나 뜨거운 풀무불 앞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담대함, 사자 굴에 들어가는 상황에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은 다니엘의 담대함, 산헤드린의 위협 앞에서도 복음 전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사도들의 담대함이 어디서 비롯되었습니까? 그들 모두 하늘에 소망을 둔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소망은 험난한 고난 앞에서도, 성도들로 하여금 당당하게 해줍니다. 그것은 장차 우리가 하늘에서 누리게 될 영광이,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겪고 있는 고난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복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 성도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조그마한 시련만 닥쳐도 담대함을 보이기는커녕 한숨부터 쉽니다. 고개를 땅에 떨어뜨리고 문제를 확대시켜 죽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의 정상적인 모습이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설령 죽음의 위기가 닥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 영광에 대한 소망으로 인해 강해집니다. 실제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신앙을 지키다가 핍박을 받을 때, 오히려 기뻐하는 가운데 죽어갔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당당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찬란한 하늘의 소망이 있다면, 또한 그 소망이 진실하다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우리도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바울같이, 사도들 같이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13절에 보면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목하지 못하도록 수건으로 그 얼굴을 가리었다고 말합니다. 왜 모세가 수건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렸을까요? 그 이유는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라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광채 나는 얼굴에 수건을 쓴 이유는 그가 구속사의 비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즉 모세는 자기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이 일시적이며 없어질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손에 들고 있는 율법의 영광이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율법을 절대시하고 숭배하지 않도록 하고, 더 나은 복음 진리를 기다리도록 하기 위해서 얼굴을 가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놀라운 진리입니다. 율법의 영광은 사라졌습니다. 케브넬이 말한 대로 “죄를 드러냄으로써 은총의 길을 준비하게 하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빛을 잃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그리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자신의 육체로 폐하셨습니다. 이는 율법이 악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율법의 기능이 더 이상 필요 없는 복음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 율법이 가졌던 구속력은 그리스도로 인해 사라지고, 그리고 복음의 영광은 율법처럼 일시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자만이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영원히 우리를 자유케 하는 이 진리를 믿어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14절에 보면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자기의 얼굴에 나타나는 광채를 수건으로 가린 진정한 의미를 몰랐습니다. 곧 율법의 영광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율법이 마치 구원의 방편인 양 그것을 절대시함으로써, 율법이 예표 하는 실체로서의 복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세의 얼굴에 수건이 거리어져 그 얼굴의 광채를 볼 수 없었던 것처럼, 율법이 주어진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함으로 복음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율법주적 편견’이라는 수건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도 영접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원인을 그들의 완고한 마음에서 찾았습니다. 즉 유대인들의 마음이 율법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혀 굳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이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보다, 자신의 신념이 더 중요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하나님보다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가 더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영적 무지 가운데 빠졌던 그들의 마음을 다른 말로 한다면, 교만한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호 동등한 인간 사이에서도 교만은 결코 유용한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창조주 앞에서 우리가 콧대를 높이고, 창조주보다 내 신념이 옳다고 주장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습니까?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내 생각이 옳고 하나님이 틀렸다는데 말 다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교만은 우리가 진리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커다란 장애물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겸손히 주님께 엎드려, 주님께서 친히 자신의 뜻을 밝히 깨닫게 해주시도록 간구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와 편견의 수건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만, 율법의 참뜻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뜻 즉 진리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완전한 하나이시며, 진리의 영광도 하나이십니다. 그에게는 거짓도 없으며, 속임도 없습니다. 오직 진리이시며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몽학 선생인 율법으로 희미하게 진리를 보았던 사람들 앞에, 진리가 온전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온전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확연하고 명백하고 분명하게 진리를 밝 드러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진리를 그리스도 밖에서 찾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구원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찾고 있습니다. 금욕적 수행을 합니다. 종교를 만듭니다. 과학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의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진리에서 더욱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하여, 절대자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하신, 복음만이 진리인 줄 믿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16절을 보면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돌아가면’이란 원어는 ‘회심하다’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회개하고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면, 마음을 가린 편견과 오해의 수건이 벗겨져, 구약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 분 앞에 서게 될 때, 구약의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 구약이 무엇입니까?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예언이란 것은 그 실체가 나타나기까지, 그 의미가 모호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지 그 의미가 모호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지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부활 승천을 오묘하게 예언하고 있는 창 3:15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제하지 않고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치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어서 사물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바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정말 눈으로 본 듯 생생하게 예언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제하면, 과연 그것이 예언인지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개인적 고난을 적어 놓은 것인지,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예언해 놓은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없이 구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늘날의 유대인이나 동일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 구약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이 불쌍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가 구약 이해의 열쇠인 줄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을 대할 때도 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구약의 심오한 뜻을 깨닫고 더욱 진리 안에 굳게 서게 될 것입니다.
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의 결론에 해당됩니다. 즉 율법과 비교된 복음의 우월성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율법보다 우월함을 나타내는 핵심적 단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의 영으로 인한 자유”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즉 진리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율법은 정죄하고 죽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있는 곳에는 억압과 속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임한 자유는 율법 의 정죄에서의 해방입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18절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얼굴을 가린 수건을 벗듯 마음의 완고함을 버리고, 구약의 주님을 밝히 본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거울처럼 비춰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약 당시의 어떤 사람들보다, 또 율법을 줄줄 외우는 사람들보다 구약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명백히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초점이 그리스도인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복음이 오면 사라지게 될 율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예표 하는 율법만으로도,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에게 비췄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마음에 간직한 우리가 어찌 주님의 영광을 발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길, 즉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세우신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소중한 사명을 힘 있게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그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라는 말씀은 성화에 관한 교훈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것은 성도의 최종적인 목적이기도 합니다. 미래의 완전한 변화를 소망하면서, 이 세상에서 주님을 닮으려는 것이 성도의 본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챔비스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이나 건강이 아니라, 거룩해지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마틴 루터는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거룩해지려고 몸부림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했던 사도 바울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데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율법에 대한 오해와 편견의 수건을 쓰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배척했던 유대인처럼 되지 말고, 자신의 이성이나 지식이나 경험이라는 수건을 다 벗어 버리고,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보고 알고 믿어서, 참 진리를 깨닫고 구원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고후 3:12~18 / 김광일목사
에드워드 모트(Edward Mote)는 1797년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한 모트는 열등감에 빠져 반항과 원망으로 지냈습니다. 목공소에서 종일 캐비닛을 만들며 망치질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분노로 가득 찬 삶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습니다. 삶은 무의미하였고 소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매일 밤 술에 취해 방황하던 어느 날, 길가에 있는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존 하이야트 목사가 요한복음 3장을 본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 누구나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모트의 마음속에 있던 모든 분노를 씻어냈습니다. 모트는 ‘그렇다, 나는 거듭나야 한다’고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성령께서 모트의 마음을 열어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모트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내 망치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속에 생수가 솟는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났다.” 그는 행복한 목공이 되었습니다. 인생이 풍요로워졌습니다. 일하던 목공소는 그의 소유가 되었고 목공소가 점차 확장되어 갔습니다.
성공적인 사업가가 된 모트는 50세가 되던 해, 전 재산을 바쳐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어느 날 자신을 거듭나게 해주었던 교회 옆에 있는 언덕에 올라갔습니다. 바위 위에 앉아 자신이 간직한 하늘의 소망을 기억하며 시를 지었습니다. 찬송가 488장입니다. 함께 부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후렴)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앞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바로 서리라.” 이같은 소망이 있습니까?
본문은 바울이 소유한 사도로서의 확신과 긍지에 대하여 설명한 내용입니다. 특히 사도의 사역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소망을 언급하였습니다. 이 소망은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와 관계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 가운데 참여하는 바램을 가리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여기의 ‘소망이 있으므로’는 ‘에콘테스 엘피다’인데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의미합니다. 이 소망이 있기에 바울은 담대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담대함은 이같은 소망에서 왔습니다. 바로 하늘의 소망입니다. 이같은 소망이 있으면 어떠한 역사가 나타난다고 바율은 증거합니까?
첫째로 수건이 벗겨지리라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애틀랜타 근처 산악 지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북군의 젊은 장교가 중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위생병은 그가 죽은 줄 알고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젊은 장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했지만 아들은 성격이 과격하여 무신론자로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젊은 장교는 누운 채 의식을 회복하고 양친의 믿음을 생각하였습니다. 절망의 순간에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만일에 나를 살게 해주신다면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봉사하겠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인생의 위기가 닥쳐서야 비로서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위생병이 그곳을 지나다가 살아있는 장교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젊은 장교는 군목을 불러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도한 대로 하나님께 봉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 계층에 혜택을 주기 위하여 필라델피아에 템플 대학교와 세 개의 종합병원을 설립했습니다. 또한 필라델피아 침례교회도 그의 헌신에서 나왔습니다. 20여권의 저서를 내었고 수천명의 영혼을 구원시켰습니다. 그는 미국이 배출한 가장 기적적 인물 중 한 사람인 러셀 콘웰(Russell Herman Conwell)입니다. 하늘의 소망이 그에게 임하였을 때 마음을 가리고 있던 자만과 아집들이 벗겨졌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여기의 ‘수건이 벗겨지리라’는 원어로 ‘페리아이레이타이 토 칼륌마’인데 ‘영적 지각을 가리는 어두움이 제거되다’라는 의미입니다. 수건은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없어집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순간 수건을 벗겨집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영적 시야를 가리던 수건이 벗겨져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영적 시야를 가로막는 수건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기심과 교만입니다. 육체의 눈은 성경을 읽고 있지만 영적인 눈은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아집입니다.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는 교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덮는 수건의 두께가 점점 두꺼워집니다. 얼굴만이 아니라 온몸을 가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앞세우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마음을 가리우는 교만의 수건이 벗겨지며 소망의 사람이 됩니다.
둘째로 자유가 있으리라
에티오피아 김태훈 선교사의 간증입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학병원 외과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겠는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선교사로 가기를 명령하셨습니다. 2013년 7월, 히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아내와 아이 세 명과 에티오피아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에티오피아에 도착하고 1년 3개월이 지난 후 파킨슨병에 걸렸습니다. 왼쪽 다리와 손에 마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지만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에티오피아 보건부에서 5년간 일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일을 하지 못하자 월급도 받지 않고 자비량으로 복지부 자문을 청하고 일하였습니다. 그는 간증을 하면서 “하는 일이 없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안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예수께서 주신 자유가 가득하였습니다. 비록 고난 속에 있었지만 오히려 고난 위에 당당히 서 있는 자유함을 보이는 소망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주시는 자유는 세상을 초월하는 자유입니다. 세상의 고난을 초월하는 자유입니다. 세상의 질병을 초월하는 자유입니다. 세상의 물질을 초월하는 자유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초월하는 자유입니다.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그 자유로 세상을 이기는 소망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여기의 ‘자유가 있느니라’는 원어로 ‘엘류데리아’인데 ‘거리킴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다’라는 의미입니다. 주는 영이시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주는 빛과 생명의 원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향할 때 죽음에서 생명으로 돌아서는 소망이 임합니다.
주의 영은 살리는 영입니다. 주의 영이 임하면 자유롭게 되어 소망을 얻게 됩니다. 바울은 주의 영을 통해 죄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곧 가장 복된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소망을 간직하여 모든 속박으로 부터 자유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영광에 이르리라
복음 전도자 무디 (D.L.Moody)가 죽음이 임박한 것을 예감하고 친구들에게 “어느 날 신문에서 무디가 죽었다고 하는 기사를 읽거든 그 사실을 믿지 마시오. 그때는 지금의 나보다 더 확실하게 살아있을 것이다. 흙으로 지은 옛 집에서 나와 더 높고 영원한 집, 죄악이 접근하지 못하고 더럽힐 수 없는 영광스런 몸을 입고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이다. 육신은 1837년에 태어났고 영혼은 1856년에 태어났다. 육신은 죽을 것이나 성령으로 난 것은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무디는 임종하기 전에 천국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환상에서 깨어나 “나는 세상에서 떠나지만 천국이 내 앞에 열린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 나는 가야 한다. 예수께서 그 옆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자녀들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버지, 꿈을 꾸고 계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무디는 “아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 문에 들어서고 있다. 너희들의 얼굴을 보고 있다”라고 말한 후에 “이것이 나의 승리요, 오늘이 나의 대관식 날이다. 아!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라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소망으로 천국 영광에 이른 거룩한 모습입니다. 구원으로 하늘 소망을 회복한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이 알지 못하는 천국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의 ‘영광에 이르니’는 원어로 ‘에이스 독산’인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변화는 오직 주의 영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늘의 소망은 죄로 인해 희미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여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가진 자는 하나님께서 영광에 이르게 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비록 육체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다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 영광에 대한 소망이 있을 때 담대해집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기뻐하며 죽어간 것은 하늘 영광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영광은 이 땅에서 겪고 있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조그마한 시련만 닥쳐도 담대함을 보이기는커녕 한숨부터 내쉬고 있지 않습니까? 고개를 떨구고 문제를 키우며 죽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늘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세상적 문제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위기가 닥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늘의 소망으로 더욱 담대해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시절에는 목회자와 성경이 무척 귀했습니다. 선교사가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마저도 안 되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교인을 조사로 임명하여 예배를 인도하게 했습니다. 경상북도 어느 산골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 교인들이 모이고 조사가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봉독 순서가 되어 시편 23편을 읽었습니다. 산골에 전깃불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조사는 어두침침한 등잔불 아래에서 겨우겨우 읽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구절에서 '르'자를 넣어 잘못 읽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 자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성경 봉독을 끝내고 조사의 얼굴이 심각해졌습니다. 교인들도 심각해졌습니다. 조사가 설교를 해야 하는데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여호와가 내 목을 자르셔도, 저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자 교인들도 손을 들고 “아멘! 나도요, 나도요” 라고 외쳤습니다. “여호와가 내 목을 자르셔도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나는 그래도 좋습니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렇듯 하나님께 대한 소망으로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칠 배나 뜨거운 풀무불 앞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담대함, 사자굴에 들어가는 상황에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은 다니엘의 담대함, 산헤드린의 위협 앞에서도 복음 전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사도들의 담대함은 어디서 비롯되었습니까? 그들에게는 하늘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떠한 소망이 있습니까? 부디 세상의 썩어질 소망이 아니라 하늘의 소망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교만의 수건이 벗겨지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소망으로 죄에서 자유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늘의 소망으로 영광에 이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유 주심에 감사하자
고후03장 12~18절 / 서정호목사
광복 60년 격동 60년
오늘은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60년 전 우리 민족에게 다가온 광복은 두 팔로 맞이한 감격의 소리였습니다. 잃었던 주권을 다시 찾은 지 60년. 감히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제 36년, 각기 다른 삶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일본의 패망은 하나님이 이 민족에게 주신 엄청난 기적과도 같은 기쁨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기쁨뿐이었겠습니까? 38선을 까맣게 태워버린 남침의 대포소리에 손에 잡힐 듯했던 희망은 여지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6·25 전쟁이 남긴 폐허 위에서 우리는 다시 희망의 씨앗을 뿌렸던 것입니다. 1950년대, GNP 30달러는 반세기가 지난 2000년대 초반에 1만 달러를 넘어섰지만 이후 저성장의 늪에 빠져 경제는 허우적거리고 사회의 이념적 갈등은 날로 고조되는 등 위기국면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 어른들의 입장은 한결같이“자유민주주의의 뿌리를 굳건히 다짐으로써 진정한 광복을 맞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연세대 박준서 교수는 말합니다.“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토대 위에서의 다양한 의견과 갈등은 조직을 건강하게 만들지만 증오와 분노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갈등은 국가 정체성의 뿌리를 흔들어 놓는다.” 광복절은‘얽매이는 것’에서 완전히 풀려나와‘자유’를 선언하는 날, 광복 60주년을 맞아 이 나라의 사회구조가 ‘증오, 분열, 구속’의 어둠에서‘사랑 ,화합, 해방’의 밝음으로 변화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광복 60년의 귀는 다시 역사의 맥박을 들어야 합니다. 광복의 감격은 아직도 거룩한 것입니다. 60년 전 이념에 따라 생기던 갈등현상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이제 우리 사회가 성숙하면서 이념갈등이 깊어지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접점을 찾는 분위기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광복절 두 음악회에 비친 한국 정치 모습
정부와 서울시가 광복절 저녁 불과 600m 떨어진 서울 남대문 광장과 시청광장에서 각기 갖기로 한 두 기념음악회는 한 치 타협과 양보도 없이 그대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저녁 7시에 열리는 숭례문 대중음악 공연의 요란한 마이크 소리와 30분 뒤 시작하는 시청의 서울시향 클래식 연주는 어지럽게 뒤섞이며 서로를 망치게 되었습니다. 정부와 지자체가 정책이나 제도를 놓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나라의 생일이나 다름없는 광복절 축제까지 서로 경쟁하고 버티는 모습에 국민이 느끼는 것은 답답함뿐일 것입니다. 아무리 경쟁자 사이라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법이고 해선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인데 어찌해서 이렇게 격이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두 종류의 자녀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종류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한 자녀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 땅에 온 이삭이고 한 자녀는 사람이 노력해서 만든 이스마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노력으로 애쓰고 수고해서 만든 이스마엘을 그 집에서 쫓아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너의 모습 중 어디에도 종의 형태는 갖지 않았으니, 온전한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서 자유를 누려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누구도 내 주인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셨으면 형제, 자매로 만나면서 이 자유를 누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 함께 있을 수 있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손님입니다. 우리가 그 손님을 환대합니다. 음식도 대접하고 잠자리도 마련해줍니다. 그렇지만 손님은 자유롭게 냉장고 문을 열지 못합니다. 우리 집에 들어오면 자유가 없고 규칙 속에 살게 됩니다. 또 다른 한 종류가 있을 수 있는데 집에 와서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같이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에게는 자유가 없고 규칙 속에 매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부하러 갔다 돌아온 아들은 오자마자 혼자 난장판을 피웁니다. 신발을 제 마음대로 내던지고, 들어오고 나가는 것도 제 마음대로이고 그리고 냉장고 문 여는 것도 제 마음대로입니다.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엄청난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므로 다시 하지 말아야 될 것 있는데 종의 멍에를 매면 안 됩니다. 우리들이 과거에는 죄의 종노릇할 수밖에 없었고 죄가 시키는 대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던 우리에게서 그 죄의 사슬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규정하는 율법의 그 얽매임에서 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그 죄로 정하는 율법이 다시는 나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봅 바틀렛이라는 탐험가가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외국을 여행하는 중에 아주 희귀한 새 몇 마리를 얻어 이것을 새장에 가두어 가지고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중에 그 중에 한 마리가 유난히도 시끄럽게 굴면서 새장에 갇혀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새장을 발톱으로 할퀴고 머리를 찧는 등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새장에서 계속 푸덕 푸덕거리며 몸부림을 치고 열광을 하다가 결국 문이 열려서 새는 망망한 대해 한 가운데로 도망하는데 성공을 해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새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창공을 높이 높이 날아올랐고 새장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후에 그렇게 날아올랐던 새들이 다시 배로 돌아와서 날개의 힘이 지쳐있는 상태로 그 갑판 위에 그냥 툭 떨어지는 것입니다. 저들은 자유를 얻었다고 날아올랐는데 망망대해에 발붙일 곳이 없었고 물론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온 힘을 다해서 이 배를 향해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 새들을 주어 담아 다시 새장에 집어넣었습니다. 더 이상 이 새장은 그들에게 감옥이 아니었고 그들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끝없는 바다를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이 새장에 있었습니다. 굶주린 배를 채울 수도 있고 편안하게 거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이 새장 안에 있었습니다. 새장은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선이었습니다.
참 자유가 무엇입니까? 알면 자유이지만 모르면 필연이고, 알면 은총이지만 모르면 숙명입니다. 내가 처한 처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에 이것이 무슨 뜻이 있는지를 알면 그 어느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고 거기에 행복도 있습니다. 푸른 창공을 향해 날아간다고 해서 그 것이 진정한 자유인 것만은 아닙니다. 참 자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토마스 H. 그룸(Thomas H. Groome)이라는 미국의 교육학자는 그가 쓴 책에서 세 가지 자유를 말합니다.
첫째 생각하는 자유입니다.
가장 중심적이고 가장 핵심적인 자유는 생각의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생각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자신의 과거가 계속 자기를 어지럽히고 뒤따라 다니는 것은 아닙니까? 지난날의 자신이 경험했던 악몽이나 억울했던 한이 있고 또 지금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 동안 그 생각은 그 어디에 있든지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많은 근심과 걱정에 매일 때가 있지만 세상에 걱정처럼 불필요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걱정하고 나면 잠도 못 자고, 몸도 해롭고, 결국엔 감성이 약해져서 짜증도 나고, 백해무익한 것이 걱정인데 그 걱정으로 인해 생각의 자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잊어버려야 될 것을 잊지 못하면 내 생각이 자유롭지를 못합니다. 생각 자체가 지금 무엇인가에 꽉 붙들려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생각이 문제인데 은총을 알면 자유로울 수 있고,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으면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곳에 있는 줄 알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택의 자유를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 자유 의지로 선택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깨끗한 양심을 따라, 신앙을 따라, 하나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선택하느냐? 아니면 이권을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고 다음 일을 생각하고, 잡스러운 생각이 우리 마음을 붙들고 거기서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결혼문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순수하게 신앙과 그 인격을 보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간혹 보면 이 분과 사돈 맺으면 내 환경이나 처지가 잘 풀려나가고 유리하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 출세에 도움이 되는 등등의 순수하지 못한 생각들 때문에 판단이 흐려지고 선택이 빗나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은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행동의지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 무엇엔가 또 끌리면서 자유롭지를 못할 때가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많은 책임, 또 나의 나약함, 의롭지 못한 도덕성, 이런 것들 때문에 행동이 깨끗하질 못하고 과감하거나 담대하지 못합니다. 행동의지의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은 자유하지 못합니다. 물질, 환경,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영혼이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수건이 쓰여져 있어서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또 자기 자신을 바로 볼 수도 없고, 이성과 감성의지가 다 병들었기 때문에 결코 자유하지 못하는데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 영이 자유해질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주는 곧 영이시다는 말씀이 있는데 주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는 육체적 시간 공간의 제한을 받았지만 지금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계십니다. 그 영적 존재에 대한 속성을 설명해주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합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 이 자유문제는 몸의 문제나 정치 문제가 아니고 정신 문제, 가치의 문제, 영적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에 보면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방종은 자유가 아닙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습니다. 집을 나가 사는 모든 생활은 자유가 아닙니다. 아버지 집에 돌아올 때까지는 절대로 자유인이 아닙니다. 32절에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오직 진리가 진리를 떠날 때 거기에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36절에 보면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아들이 자유케 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증해 주실 때,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될 때 성령은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증하십니다. 로마서 8장에서. 그런고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그 사랑을 확증 받을 때 거기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유명한 에밀 부르너(Emil Brunner)는 "인간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는 하나님께 얽매일 때 비로소 자유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의 노예가 될 때 자유롭고, 진리의 노예가 될 때 자유롭고, 하나님의 은총에 사로잡힐 때 거기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도, 물질도, 지위도, 건강도 아닙니다.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사랑이요, 용서요, 희생이요, 겸손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고 그 영이 있는 곳에 오로지 자유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참 자유를 알고, 참 자유를 지키고, 그 자유 안에서 참으로 주의 은혜를 감사할 때 생명력이 넘치고, 소망이 넘치고, 창조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함을 누릴 사람
고후03장 12~18절 / 피종진목사
사람이 태어나서 자유를 속박당하고, 또 자유를 누리지 못한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국가가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그 주권을 빼앗기게 되면 개인의 이름도 나라의 모든 물자까지도 빼앗겨버리고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가 상실됩니다. 또 사람이 질병으로 인하여 병석에 누워있을 때에 얼마나 부자유스럽습겠습니까? 부자유스럽다는 것은 자유를 잃었다는 말입니다. 또 자기의 영이 어두움의 영에 사로잡혀서 시달리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귀신이 지저귀는 대로 따라서 입술이 같이 움직여집니다. 그리고 갈 곳과 안갈 곳을 분간하지 못하고 귀신이 이끄는대로 돌아다니고 길거리에 방황하는 그런 사람들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이러한 모든 것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죄악에 포로가 되어서 항상 죄를 범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죄로 인해서 기쁨을 상실합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통이 단절되면 심령의 기갈과 생활의 빈곤이 오게 되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축복을 상실해버립니다.
스페인의 한 극작가는 ‘자유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유’란 히브리어에 보면 ‘붙들어맨데서 풀어준다, ‘구속되어 갇힌데서 석방을 받는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어딘가에 결박되어 있습니다. 기쁨이 결박되어 있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마저도 결박되어 다른 사람에게 베풀 줄도 모르고 누릴 줄도 모르는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딘가에 갇혀있습니다. 이 넓고 넓은 우주 공간에 살면서도 어딘가에 갇혀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넓고 넓은 우주 공간의 무대를 멋진 연기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각본으로 하여 천군천사와 함께 잘 연출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자유함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17절) 하나님은 영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안보이는 것 같아도 항상 우리 곁에 능력과 권세로 역사해주시고, 사랑과 은총과 긍휼과 자비로 역사해주시며, 한없는 축복으로 우리 곁에서 역사해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16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에서 해방의 길을 열어주셨지만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고, 또 육신의 인성과 혈기와 그리고 육신의 욕망 속에서 욕망의 늪을 헤매다가 지쳐 쓰러져 탄식하고 후회하며, 낙심하고 슬퍼하면서 좌절과 절망 속에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얼마나 자기 삶이 괴로우면 스스로 자기 삶을 포기하는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얼마나 분노와 혈기가 강하면 스스로 자폭 테러범이 되겠습니까? 오늘 이 땅에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어딘가에 매여서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를 상실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기본적인 축복마저 상실해버리고 어려움 가운데 사는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사시기 바랍니다. 물질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질병으로 인하여 속박되지 말며, 악한 사람들이 가슴에 상처 준다고 그 일 때문에 잠 못 이루는 그런 불행의 밤이 되지 말고, 악한 자들의 꾀임에 빠져서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며,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성령의 능력 안에서 늘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자유함을 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다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교회에 다녀도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로마서 8:9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 안에 참 자유가 있고, 성령 안에 참 기쁨이 있습니다. 성령 안에 새생명의 역사가 함께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함께 하면 악한 자는 선하게 되고, 강퍅한 자는 부드러워집니다.
인간의 노력과 수단과 방법으로 안돼도 하나님의 성령은 되게 하시기 때문에(슥 4:6) 이 세상에서 제일 성공자는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제일 지혜로운 사람은 성령님을 앞세우는 사람입니다. 가장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언제나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기쁨을 줄 뿐만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몽테스키는 ‘자유란 법이 허용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권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 허락한 것은 다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했는데, 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삽니까? 기쁨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평안하라고 했는데, 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삽니까? 평안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복된 자가 되라고 했는데 왜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한 생활을 합니까? 복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의 성령이 함께 함으로 모든 빼앗긴 것을 회복하고 참 자유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율법에서 벗어나 주의 은혜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15,16절) 여기에서 말하는 수건은 ‘율법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율법이 가장 강조한 것은 바로 메시야입니다. 율법의 수건이 벗겨졌을 때 은혜의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율법적인 사람보다도 은혜적인 사람이 더 좋습니다. 무슨 잘못한 것을 지적해서 책망하려고 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남을 책망만 하다가 죽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가 책망하면서도 자기를 모릅니다. 남을 칭찬하다 보면 자기의 좋은 점을 계발시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도 기쁨이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율법의 잣대로 재면 흠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다 죄인이고,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 그러나 주님께서는 죽을 사람을 살게 해주시고, 망할 사람을 성공하게 해주십니다. 살인 강도와 창녀도 다 주의 나라에 임할 수 있도록 축복의 길과 영생의 길을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세계에 거할 때에 강 같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셋째,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사람입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사람, 이 사람이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다 죄의 종이었습니다. 이 죄를 누가 해결해줄 수 있을까요? 예수의 피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요일 1:7). 요한일서 1:9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로마서 8:2에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해방’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이제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입니다. 우리는 신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요한복음 5:24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이미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롬 8:15).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요한복음 3:16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됨으로 주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행동한다고 자유가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질서 안에서 우리에게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에 하나님은 저들로 하여금 각 지파별로 족장과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우고 항오를 지어서 전진하게 하셨습니다. 통신수단도 발달되지 못한 시대에 얼마나 통솔하기가 어려웠겠습니까? 그래도 질서있게 전진했을 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신약시대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도 모두 50명씩 질서있게 앉게 한 후 축사하고 나누어주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4:33). 귀신들은 어지럽고 복잡한 것을 좋아합니다.
잠언 5:22에 보면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악인은 죄의 줄에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믿는 자에게는 죄의 사슬에서 풀어주셨습니다. 이사야 53:5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직분이 부여된 자입니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후 3:9) 의의 직분이란 복음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직분입니다. 이 직분은 영광의 직분입니다. 하나님의 직분이 부여된 자에게 하나님께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도록 축복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여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좀 부족해도 채워주십니다. 여러분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일할 수 있도록 배후에서 역사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아멘’으로 순종하고 나서기만 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충성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고후 4:1-2에 보면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이 직분을 감당할 때에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후회하면 안됩니다. 가나안을 향해 여호수아와 갈렙이 전진한 것처럼 직분의 길에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4:18,19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의 성령이 임한 여러분이 복음을 전함으로 죄의 포로된 자가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저주 받을 자가 축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성령 충만하여 성령과 함께 하며, 율법에서 벗어나 주의 은혜에 거하고,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며, 하나님이 주신 직분이 부여되었을 때 ‘아멘’으로 순종하고 열심히 충성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참 자유를 영원토록 누리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께로 돌아오면
고후 3장 12~18절 / 지용수목사
우리가 날마다 읽는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은 한 마디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처녀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고, 베들레헴에 나시고, 애굽으로 피난가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고, 다시 살아나실 것이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즉 구약 성경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인 것입니다. 몽학선생은 주인의 아들을 학교에 갈 때까지 잘 가르치는 학식과 인격을 겸비한 노예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 27절에 보면, 바울이 성령으로 이렇게 가르칩니다.
“구약의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축복하시지만 우리가 아무리 순종해도 그 말씀에 완벽하게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고도 가슴을 치고 또 살고도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의롭게 살려 해도 율법을 다 행하여 의롭게 되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의롭게 살려고 애쓰다가도 ‘아이구, 또 실수했네. 또 실패했네.’ 하며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는 율법의 행함으로 의롭다 하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감으로 우리가 몽학선생에게서 벗어나 주님의 품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진리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도 주님께 돌아온 사람만 깨닫게 되지,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사람은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들, 예수님 당시의 모든 학자들이 그렇게 성경을 읽어도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눈앞의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합니다. 구약에서 그렇게 예언했던 분이 오셨는데 그분을 눈으로 보고도 알지 못한 것은 ‘그 얼굴이 모세 얼굴의 수건처럼 가리워져 있었다.’라고 바울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를 보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돌판을 빚으셔서 손가락으로 친히 십계명을 쓰시어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모세가 그것을 갖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먹고 마시며 춤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너무 화가 나서 돌판을 던져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한 것이지, 십계명 돌판이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빚어서 써 주신 십계명 돌판을 던진 것입니다. 그래서 돌판이 깨졌습니다. 모세가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화를 내면 실수하게 된다.”
분을 내면, 화를 내면 실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축복을 잃어버리고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니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화를 잘 피하고 차분하게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어디에서 화를 낼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래도 화를 내지 말고 차분해야 됩니다.
출애굽기 3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돌판을 깨뜨린 모세에게 “네가 깨뜨린 것과 같은 돌판을 만들어 가지고 올라오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모세가 십계명 돌판 두 개를 다듬어 가지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냥 산에 올라가기도 힘드는데 돌판을 가지고 올라가자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끙끙거리며 올라갔습니다. 화를 내면 고생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가지고 간 돌판에 하나님께서 다시 친히 십계명을 쓰셨습니다. 모세가 40일간 하나님 앞에 있다가 그 돌판을 갖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 꺼풀에 빛이 환하게 났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가까이하기를 무서워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모세가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는 수건을 벗었습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비유로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눈을 떴으나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것 같아 구약을 읽고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보고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수건을 제거해 주신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그의 앞으로 걸어오실 때 금방 깨닫고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분이 바로 이분이다. 나도 이분에 대해서 몰랐지만 나에게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와 누구 위에든지 머물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라고 하셨기에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증거하노라.” 할렐루야!
같은 눈이라도 하나님께서 수건을 벗겨 주시면, 예수님이 보이고 성경을 읽으면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수건으로 가리워 있으면 보아도 모르고 읽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6절에 바울이 말씀하기를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본문 14절에도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사는 사람 같습니다. 별을 보아도 누가 만드신 것인지, 밥을 먹으면서도 누가 주신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로 돌아오면 모세의 수건 같은 것을 제거해 주시기 때문에 환히 보여서 하늘의 별을 보며 ‘하나님께서 지으셨구나.’ 사과를 먹으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사과를 만들어 주셨구나.’ 꽃을 보며 ‘하나님께서 만드셨구나.’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건을 벗은 얼굴이 되어서 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 깨달음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깨닫고 말씀의 축복을 받는 것은 주님께서 수건을 제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주님께 돌아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구경 오신 분이라도 주님께 진정으로 돌아오면 주님께서 수건을 제거해 주심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이 교회 옆을 다니면서도 교회에 다니지 않고, 전도 받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수건으로 가려져 있어서입니다. 수건이 제거되면 성경을 읽지 않을 사람이 없고 예수님을 믿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수건이 벗겨지면 천국이 얼마나 아름답고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가도 알게 됩니다.
어제 제 아내가 전화로 전도를 하면서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이야기했습니다. 미꾸라지를 잡아놓고 해감을 빼기 위해 소금을 뿌리면 미꾸라지가 따가워서 팔딱팔딱 뛰는데, 거기에 불을 때면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그 고통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그 미꾸라지는 나중에 죽지만 지옥에서는 죽지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의 사람은 불에 소금 치듯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다 지옥에 갑니다. 그리고 지옥에서는 죽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운 사람은 지옥으로 가면서도 지옥을 모릅니다. 떨어져 죽을 절벽으로 가면서도 장님은 그것을 모르듯이 세상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면서도 그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건이 벗겨져서 죄의 결국을 압니다. 죄의 결국은 무서운 사망임을 압니다. 불신의 결국이 무엇이고 믿음의 결국이 무엇임을 압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로 돌아온 우리는 수건이 벗겨졌습니다. 할렐루야! 감사하며 성경을 읽고, 감사하며 주님을 바라보고, 감사하면서 믿음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수건이 벗겨져 내 눈이 열리면 공무원인 나에게 누가 돈을 줄 때 ‘아! 이것은 나를 감옥가게 할 돈이구나.’라고 깨달아 “감사합니다만 나는 이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하며 돌려줍니다. 선물로 받은 사과 상자에 지폐가 들어 있다면, 수건으로 얼굴이 가려진 사람은 그것을 덥석 받았다가 나중에 감옥에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건이 벗겨진 사람은 ‘이것은 마귀가 주는 것이구나. 이것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갈 수 있겠구나.’라고 깨달아 그것을 다시 돌려 보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축복으로 주시는 것은 ‘아, 이것은 주님께서 축복으로 주시는 것이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잠언 10장 22절에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시는 재물은 복이 되고 근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주는 악한 재물은 그물에 물고기가 걸리듯이 그것 때문에 우리의 영광과 명예가 떨어지고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수건이 벗겨지면 실패할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과 제 수건은 하나님께서 이미 벗겨 주셨습니다. 앞으로도 수건을 벗은 환한 얼굴로, 환한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본문 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자유함이 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유함이 없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좋은 날을 잡아서 결혼식을 하느라 야단입니다. 그래서 어떤 날은 결혼식장이 텅텅 비어 있고, 좋다는 날은 예식장이 미어터지는 것입니다. 의사도, 검사도, 판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날 결혼식을 하면 혹 불행해질까 봐 좋은 날을 잡아서 결혼식을 하는 것입니다. 바보들입니다. 좋은 날이 있다면, 그렇게 날을 잡아 결혼한 사람들이 왜 이혼을 합니까? 이사를 할 때도 마음대로 못하고 날을 잡아서 합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묘터를 보아서 산소를 정합니다. 그러나 묘터을 봐 주는 사람 치고 잘 사는 사람이 없고 자식이 잘 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못 귀신에게 화를 당할까 봐 방에 못 하나도 마음대로 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어떤 사람은 와이셔츠 상자에 바퀴벌레를 길러 그것을 물에 타서 아침 저녁으로 마셨습니다. 그래야 잘 살게 된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그분의 공장에 불이 나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화상을 입었습니다.
똑똑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인데도 어리석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데 모든 사람들이 죽을까 봐 덜덜 떨며 삽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모든 미신으로부터 자유함이 있습니다. 언제 결혼해도 좋고 언제 이사해도 좋습니다. 바퀴벌레를 보면 잡아 죽이고 마음대로 못을 칩니다.
우리에게는 심판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도 의롭게만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무리 의롭게 살려 해도 때때로 실수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잘못 살면 하나님께 꾸중을 듣고 받은 복을 빼앗기지, 지옥에는 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심판은 없고 상만 있습니다. 사망이 없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25-26)
사실 우리가 죽는 날은 영원히 사는 천국의 현관문으로 들어가는 날입니다.
저도 솔직히 오래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미국에 다녀와서 제 신앙 간증을 했듯이 죽는 그날이 제 생애 최고 기쁨의 날인 것입니다. 제가 죽는 그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을 뵙고 면류관을 받아 쓰게 되니 얼마나 감사하고 좋습니까?
우리는 사망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오늘 죽어도 죽음이 아니라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매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귀의 쇠사슬이 끊겼습니다. 예수님께서 결박을 푸셨습니다. 모든 결박을 푸셨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결박이 풀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도 이기는 것입니다.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얼마나 감사합니까?
13세기 초, 덴마크가 에스토니아와 전쟁을 치렀습니다. 밀고 밀리는 전투를 벌이다 전세가 기운 덴마크가 벼랑 끝에 서게 되었습니다.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는 ‘아, 이제 우리나라는 끝이구나.’ 하며 낙심했습니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그의 머리에 무언가가 떨어졌습니다. 신비롭게도 빨간 바탕에 하얀 십자가 마크가 있는 깃발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의 깃발로 믿고 그것을 몸에 지니고 용기를 얻어 다시 전쟁을 해서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219년, 발데마르 2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머리에 내려 주신 선물인 빨간 바탕에 흰 십자가 마크가 있는 깃발을 덴마크 국기로 삼았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덴마크 국기가 전쟁에 승리를 안겨준 바로 그 십자가의 깃발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로 돌아오면 십자가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주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의로운 손으로 지켜주십니다. 모든 것에서 자유와 승리를 누리게 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본문 18절에는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로 돌아오면, 수건을 벗은 얼굴로 보는 것같이 주님을 봅니다. 그리고 달이 발광체가 아니지만 태양을 보면 빛을 발하는 것처럼, 진흙 덩이에 불과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보면 주님의 형상을 닮아 주님의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시면 영광 중에 나아가리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여러분과 저 모두는 흙으로 지어진 질그릇 같은 사람입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서 몸에 때가 끼고 생각이 추하고 정말 희망이 없는 우리인데,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우리 과거의 죄가 사함을 받고 소경 같은 우리의 눈이 밝아져 주님을 바라보고 천국을 바라보고 성경을 보면 깨닫습니다. 마귀, 심판, 죄악, 미신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그리고 예수 이름을 믿어서 요한복음 1장 12절대로 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또 주님과 함께 면류관을 쓰고 천국에서 왕 노릇을 하게 됩니다.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모세 얼굴의 영광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뵙고 내려온 한동안은 영광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없어져서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돌아온 여러분과 저의 영광은 갈수록 커지는 것입니다.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조금 더 영광스러워 보입니다. 장관이 되면 조금 더 명예로워 보입니다. 고등학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명예로워 보입니다. 가게의 점원이 회사의 회장이 되면 명예로워 보입니다. 변호사보다는 대통령이 더 명예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있다가 없어질, 사라질 풀의 꽃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얻어지는 영광은 갈수록 더 찬란하게 됩니다. 영원히 영원히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누구든지 주님께로 돌아오면 이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께 돌아온 우리는 감사함으로 이 복을 누립시다. 그리고 아직도 이것을 모르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어리석게 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도와 드립시다. 그 한 분 한 분이 주님께 돌아와 그들도 수건이 없어져 이 신비로운 축복을 누리도록 우리 모두가 도와 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인간, 참인간
고후03장 12~18절 / 김경호목사
오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인간이라고 고백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르네쌍스 이후 인류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는 '인간'입니다. 인간을 재발견하고 모든 학문과 문화의 중심적 화두로 인간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세계사에 휴머니즘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는데 휴머니즘이 '인간' '인간' 하지만 그 인간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 인가는 매우 모호합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오는 때의 한 문학 작품입니다. 어느날 신들이 모여서 연극 감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막이 열리고 제1막의 주인공으로 천사들이 등장했습니다. 신들은 그 아름다움에 홀딱 반하고 말았지만, 너무 고운 말, 잔잔한 미소.... 격정없는 부드러움, 상냥함이 계속 되자 얼마 안돼서 신들은 모두 잠들어 버렸습니다. 연극은 제2막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제2막에는 짐승들이 등장했고 신들은 잠이 번쩍 깼는데 계속 되는 살육, 약육강식, 피흘림.... 이런 것들에 고상한 신들은 마침내 고개를 돌려 외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다음 막이 시작되었습니다. 제3막에 등장한 주인공은 천사와 같이 부드러움을 갖기도 하는가하면.... 짐승과 같이 포효하는 무서움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짐승과 천사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고 신들은 막이 계속되는 동안 계속 흥미진진 해서 손에 땀을 쥐고 관람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3막의 주인공들이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천사와 짐승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입니다. 그는 자유를 가진 존재이나 일정한 기준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인간적이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말이 아주 높은 가치를 가르키는 것이냐 아니면 아주 저급한 기준을 나타내는가 하는 혼동이 있습니다.
초대 신조에 따르면 예수에 대한 고백으로 '그는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참인간이다'고 할 때 우리는 아주 분명한 인간에 대한 기준을 갖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고백에 따르면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이 되셨고 그 분 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기준이 모호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나타나신 그분 예수에게 인간다움의 기준이 있습니다.
저는 한 때 혼란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일반 사회에서 그리고 철학에서 이야기 되는 "인간적이다"고 하는 것은 높은 가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흔히 교회에서 이야기 되는 "인간적이다"는 말은 아주 속되고 용서받아야 할 것.... 아주 낮고 죄된 가치로 인간이란 것을 말하는데 매우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참 인간이시다..."는 고백을 대하고 뛸 듯이 기뻤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이다고 하는 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예수 답다면 인간적인 것이요.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인간적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분명한 기준은 어느 철학에도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이제 참인간의 길을 가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에게 완성형은 아직 아니지만 완전한 인간, 우리에게 나타내 주셨던 참인간을 향하여 달려 나가고 있는 인간입니다. 여기까지가 서구신학적 사고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될 때 논리적으로는 모순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질곡이 없고 완전히 자유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해방시키시는 그분을 묘사하기에는 부적당한 면이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지난번 성육신에 관해서 "참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였습니다. 예수가 참하나님이라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지만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인간의 모습으로, 그중에도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성육신, 참 하나님"의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참인간과 거짓인간, 비인간, 덜된 인간하고 나누게 되면 가장 낮은 것은 가장 천하고 속된 것을 품에 안으시는 "참 하나님"과 모순이 됩니다. 참인간과 참하나님이 싸우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나누는 그 구분 자체가 인간에게 질곡이 되고, 강요된 체계가 되고, 인간을 억압하는 구조이며 그것이 구체적 조직과 체계로 나타날 때 매우 독선적이고 비타협적인 독재로 전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인간"이라고 하면 스스로 그 '참' 자를 뗄 수 있어야 합니다. 여전히 참 자를 붙이는 사람은 참인간의 위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최고의 정점을 맛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어야합니다. 그 자리에서 여전히 참과 거짓을 구별하고 차별짓게 된다면 또 하나의 억압과 독재를 낳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수식없는 평범한 인간을 앞에 두고 "인간. 참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자기 얼굴에 광채가 사라지는 것을 보이기가 두려워 얼굴에 너울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기 시대의 이야기로 끌어들입니다. "오늘날도 그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 마음이 완고해 져서 그 마음의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세의 너울은 마음의 너울로 비약됩니다. 모세의 너울은 자기의 영광을 지키려는 허세입니다. 그런데 그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일고 그 말씀으로 법을 삼는 사람들도 말씀을 읽고 깨닫지만 사실은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이것은 흔히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 자신도 포함하는 누구나 해당되는 보편적 인간에 대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알게 되었다는 깨달았다는 사실에 도취되어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울에게 이것은 모세의 얼굴에 남아있는 너울과 같은 여전한 허세입니다. 그냥 그런 양하고 사는 껍데기, 너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너울을 뒤집어 쓰고 자기를 가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께로 돌아갈 때,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너울은 완전히 제거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행위가 무엇을 말하는가? 너울을 사이에 두고 누리는 허세, 모든 차별과 모든 정죄함을 벗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정죄함을 벗어버리는 것이 "영"이고 그 영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함"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고 이 길은 우리를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됩니다(18절).
우리가 사는 천체는 수만, 수억년간 정해진 괘도를 돌면서 안정된 길을 간다고 하지만 그 하나하나를 볼 때는 안으로 끌어당기는 구심력과 그것에 반발해서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부지런히 달아나는 원심력의 힘이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맹렬한 속도로 끌어다니고 맹렬한 속도로 달아나는 힘이 조화를 이루며 수 만 수억년을 정해진 괘도를 도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정, 조화, 평화라고 하는 것들도 자세히보면 여러 가지 대립되고 모순되는 힘의 각축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 어느 한쪽의 지나치게 세어져 균형이 상실되면 긴장과 각축도 사라지지만 따라서 안정과 평화도 끝장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위선의 너울을 쓰고 있을 때 참과 거짓의 구분이 분명하고, 정-바른 것과 비-아닌 것의 구분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너울을 벗어 던질 때, 우리의 진실한 모습 안에 서게 될 때, 참은 거짓을 포용하고, 거짓은 참 속에 녹아 들어가는 큰 어울림이 있게 됩니다.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참인간의 길을 가십시오. 그러나 참 안에 머물지 마십시오. 참으로 거짓을 포용하고 바름으로 바르지 못한 것을 녹여 품에 안으십시오.
마음을 덮은 베일
고후03장 13~18절 / 이규왕목사
지난 추석 오랜만에 아이들이 다 모였습니다. 평소 둘이서 지내던 식구가 갑자기 열두 명이 되니까 사람 사는 맛이 났습니다. 아이들이 마당에 있는 나무에 붙어 있던 매미 껍질을 주워가지고 왔습니다. 영락없는 매미 모습이었으나 속이 텅 비었고, 울지도, 날지도 못하는 빈 껍질이었습니다.
물론 매미가 그 속에서 자라서 허물을 벗고 나왔기 때문에 빈 껍질이 된 것입니다. 만일 그 껍질이 없었다면 매미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또한 지난여름에 시끄럽게 울어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자주 듣는 말 가운데 하나는 육신의 생존과 건강을 위해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영혼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양식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물론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은 성경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생명의 양식인 성경을 읽으면 여러 유익을 얻게 된다고 성경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시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시 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그런데 문제는 막상 그와 같은 기대감을 갖고 성경을 읽어 보면 오히려 지루하기만 하고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현실성이 없는 것 같고, 심지어 잠이 와서 성경을 읽지 못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과연 성경이 잘못된 것입니까? 내가 잘 못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성경은 마치 매미와 매미의 허물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구조가 어떻게 되었으며, 어떻게 하면 성경을 통해서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을 얻고, 성령의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서 그 답을 찾고자 합니다.
1. 구약의 율법
구약 성경은 이집트 제국에서 사백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해방을 시키신 후 시내 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언약을 세우시고 그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을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에게 돌비에 기록하여 주신 십계명과 율례와 법도로 오늘 우리들이 읽고 있는 구약 성경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그 구약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세계 만민 가운데 택하신 백성들과 새롭게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가르치신 신약을 가리켜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중심으로 하여 맺은 언약으로 주된 핵심이 택하심을 받지 못한 이방인과 구별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와 같이 행동을 제안하는 법을 기록한 구약을 가리켜 율법이라고 하며 그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대까지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반면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삼사 대까지 저주를 받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출 34: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불공평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왜 천대요 왜 삼사 대인가?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난다고 생각이 될 것입니다.
추측컨대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본심은 인간이 저주를 받는 것보다는 복을 받기를 더 원하시며 될 수 있는 대로 더 많은 사람에게 그와 같은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물론 그와 같은 목적도 있으시겠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지킬 능력이 전무한 존재임을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이 지키라고 명하신 율법을 도저히 지킬 수 있는 힘이 아주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 앞에서는 누구나 다 죄인이요 율법을 법한 죄에 대한 형벌과 저주를 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에서 그와 같은 율법을 가리켜서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고후 3: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교회들을 유대인들이 들어가서 마치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잘못 가르침으로 인해 사람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율법의 정죄를 받게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며, 연약한 나의 의지로는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신 율법주의를 조심해야 합니다.
구약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은 돌판에 새겨졌고 먹으로 양피지에 기록되어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전하여졌습니다.
(고후 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그렇다면 구약 시대 사람들은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하였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율법을 어긴 인간이 죄값으로 마땅히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죄 없는 짐승이 대신 제물이 되어 죽어 주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그와 같은 제사 제도가 바로 매미의 허물처럼 신약의 복음을 낳는 껍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미의 껍질과 같은 구약 시대 제사를 드리는 일에 수종을 드는 제사장들을 존귀히 여겼다고 오늘 성경 본문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와 같이 번거로운 제사는 일회용 주사기처럼 지은 죄를 한번 속죄하는 일에만 효력이 미칠 뿐 영원토록, 모든 사람들을 속죄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단번에 제사를 드림으로 많은 사람이 영원히 구원을 얻는 효력이 있는 새로운 제사가 요구되었습니다.
2. 신약의 복음
구약의 옛 언약인 율법이 요구하는 ‘하라’와 ‘하지 말라’는 명령은 인간이 자력으로 율법을 행할 수 없는 자임을 깨닫게 하는 역할로 그 기능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계명은 어느 한 가지만 지키지 못해도 그 사람은 계명을 범한 죄인이기 때문에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거짓말 하지 말라는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똑같은 십계명입니다. 살인하지 않은 사람은 많지만 거짓말 하지 않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그러한 죄인임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인간의 자력으로 계명과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억지일 뿐 아니라 종교적인 사기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율법 앞에서 선할 수 없고 또한 계명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세우신 새 언약입니다.
그 언약은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지금까지 지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이 되심으로 속죄를 해주셨습니다.
또한 인간의 힘으로 지킬 수 없는 율법과 계명을 대신하여 다 지키심으로 의를 이루시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인간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시겠다는 새 언약을 약속하셨습니다.
(겔 11: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 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에 율법과 대조가 되는 구약의 죽이는 율법과 대조가 되는 살리는 영으로 세운 새 언약인 것입니다.
(고후 3: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옛 언약을 세우실 때 돌 판과 양피지에 기록하게 하셨고,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리게 하셨다면, 새 언약은 돌판이 아니라 마음판에 새기게 하시고 독생자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더불어 최후의 만찬이라고 일컫는 성찬을 나누시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의미가 새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 이유는 그래야만 계명과 율법을 지키지 못하므로 정죄를 받아온 인간이 속죄를 받게 되고, 약속하신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에스겔을 통해 약속하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옛 언약은 매미의 허물과 같은 것이고, 신약의 새 언약은 그 허물을 벗고 태어난 매미와도 같은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볼 때 매미가 벗은 허물이 영락없이 매미처럼 보이지만 그 매미는 울지도 못하고 날지도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붙잡아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허물이 없으면 매미가 태어나지 못하기 떄문에 매미의 허물은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옛 언약이 나름대로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가 매미와 매미 허물과 같은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은 옛 언약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새 언약을 오히려 잘못된 것처럼 오해하고 새 언약인 복음을 거부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이요 유대인들입니다.
한 예를 들면 옛 언약 시대는 그 증거로 남자들은 반드시 육체의 할례를 받아야만 언약 백성이라는 증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시대는 새 언약을 믿는 자에게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세례를 받아 마음에 성령으로 인침을 받아 새 언약 백성으로 보증하여 주셨습니다.
(고후 1: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고후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보증에는 반드시 증인이 있어야 한다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새 언약 백성이라는 증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구주로 모심으로 영원한 보증이 되게 하셨습니다.
(히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그러므로 새 언약 백성은 구약 시대처럼 짐승을 제물로 바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짐승의 피보다 더 고귀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새 언약 백성은 율법에 대해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새 언약 백성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제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 백성은 율법 앞에서 자유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율법은 죽이는 법이 아니라 과연 무엇이 죄인지를 깨닫고 그 죄를 멀리하여 보다 더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유익한 법이 되었습니다.
새 언약의 보증이신 성령은 그 율법의 핵심이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의지를 북돋아 주심으로 미움의 삶을 버리고 사랑의 삶을 살도록 늘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3. 베일을 벗자
오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마음의 수건을 벗어야 한다는 말은 과거 유대주의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복음을 해석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1) 모세의 얼굴과 베일
구약의 출애굽의 역사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와 시내 산에서 사십일 밤낮을 함께 하시고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세우신 후 십계명을 돌비에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백성들이 보고 두려워하였으나 모세는 미처 그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모세는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백성들 앞에 서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이 그 이유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후 3: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점차 사그라질 자신의 얼굴의 광채를 주목하지 말고, 영원한 광채이신 하나님의 영광만을 주목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모세의 얼굴을 덮은 베일처럼 마음에 불신앙의 베일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율법만을 고집하였습니다.
2) 마음을 덮고 있는 베일
구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찬란한 빛으로 세상에 오셨으나 모세의 얼굴을 덮은 베일처럼 불신앙과 죄악의 베일이 마음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배척하였습니다.
(마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참 빛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참 빛으로 오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행하신 일들을 기록한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하고 배척하거나, 예수를 믿지만 성경 말씀을 읽지 않고, 성경을 읽지만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나름대로 베일이 마음을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종교적인 열심과 충성보다 더 선행되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죄라는 베일을 벗어 버리는 일입니다.
3) 마음의 베일을 벗으려면
구약의 율법은 마치 모세의 얼굴을 덮은 베일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희미하게 예언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만으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한 시각으로 복음을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가 아니라 목수의 아들로만 보이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고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시게 되었는가를 옛 언약인 구약의 예언을 살펴보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마치 매미의 허물과 같은 옛 언약인 구약에 약속된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의 강림으로 다 성취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고, 할례가 아니라 세례이며,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며, 내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새 시대가 왔음을 깨닫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인 열심 이전에 마음을 덮고 있는 편견이나 선입견이라는 수건을 벗어 버리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입니다.
(고후 3: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이방인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을 열심히 읽고 외우고 연구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가 세상에 오실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약속된 메시아이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였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훼방하고 핍박한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죄와 불신앙의 베일로 덮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과거에는 그 중에 한 사람이었으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마음의 베일을 벗고 영안이 열려지면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변화를 경험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잘못된 믿음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베일을 걷어내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오늘 성경 본문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후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여기서 ‘돌아가면’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불신하는 부정적인 언행심사에서 방향을 돌이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리스도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죄라는 베일인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을 덮은 베일을 벗어 버리는 신앙이 어떤 신앙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성경을 볼 때 신앙 생활을 할 때 율법주의 적인 사고로 보지 말고 복음의 눈으로 성경을 보고 그리스도 예수 중심으로 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성경이 하나 하나 깨달아지고 은혜가 될 것이며,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마음을 덮은 베일을 벗고 매사를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내가 최고요 내가 옳고 다른 사람은 잘못되었다는 아집과 이기주의가 이웃과의 소통을 가로막고 갈등과 대립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한 예를 들면 촛불 시위입니다. 진보를 추구하던 옛 시대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이 신보수를 추구하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갈등과 대립이라는 성장 통을 심하게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문제가 없었다면 다른 문제를 들고 나왔을 것입니다.
이제 무한 경쟁의 세계 속에서 우리 민족이 우뚝 서려면 내 생각만 제일이라는 아집의 베일을 덮은 채 상대방을 보고 비판하고 정죄하고 갈등하고 대립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와 협력으로 상생의 차원보다 더 복된 사회로 성숙해지고, 발전해 나가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인 성경 말씀을 붙잡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해서 유일신 신앙을 포기하고, 우상숭배나 다신론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존재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만을 최고라고 고집하고 다른 종교를 거부하고 비판하고 공격한다면 힌두교나 이슬람 사람들처럼 타 종교와 종교전쟁을 벌려야 합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면서 까지 원수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조상 대대로 타종교를 믿어오던 우리의 조상과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변하는 시대 속에서 교회는 굴복이나 타협이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대화하면서 그 상대보다 더 관용과 사랑으로 대하는 보다 더 성숙한 신앙과 삶을 보여야만 승리할 수 있는 힘든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갈수록 교회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변하는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공격하고 입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보다 더 많이 사랑해야 하고, 더 성실해야 하고, 더 진실된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정복이 아니라 감동시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만일 그와 같이 마음의 베일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을 잃어버리게 될 때, 기독교는 타 종교보다 못한 저질 종교로 오해하게 되고 마치 맛을 잃은 소금처럼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의 베일을 벗어 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사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가르치시고, 치료하시고, 도우시고,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지만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고자 할 때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 붙잡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령의 도우심이 더욱 필요하기에 더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삶에 적용해야만 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딤후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래서 나만 잘나고, 내 생각이 옳고, 내 믿음이 최고라는 자만이라는 베일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마음과 눈으로 성경을 보고, 세상을 보고, 남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내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때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요구되는 시대가 바로 지금 이 시대인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이 먼저 나를 붙잡으시고, 만나 주시고, 힘주시고 이기게 하시고, 갈등하던 내 마음에 자유와 평안이 가득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자유함이 있는 곳
고후03장 17~18절 / 피종진목사
인류 역사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어딘가에 얽매이고 구속을 당하여 거기에서 이탈하고 벗어나고 탈출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생명을 바치기도 하고, 또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또 뭔가 얽매여 있는데서 벗어나고 탈출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과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자기가 추구하는대로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평생을 질병 속에 결박되어 살다가 불행하게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고, 어떤 분은 가난에 결박되어 생활고로 인하여 인간답게 기를 펴지 못하고 남의 도움이나 신세를 지고 살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악령에게 사로잡혀서 평생을 사탄의 노예가 되어 고통을 당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받은 우리 인생이 자유를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레위기 25:10에 보면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자유를 갈망하고 추구하기 때문에 세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조약을 맺기도 하고, 심지어 미국에서는 자유의 여신상을 세워서 자유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외치기도 합니다. ‘자유’란 헬라어(아네시스)에 보면 ‘사슬에서 풀린다, 얽매인데서 벗어난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무엇인가에 얽매여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결박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과 함께 주님의 이름으로 자유를 주셔서 창공을 나는 독수리처럼 신앙의 행보가 진행되어지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곳에 자유함이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주의 영이 계신 곳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17절)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주의 영이 없는 곳에는 자유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주의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우리 눈에 안보이고 어떤 색깔로도 나타나지지 않지만 분명히 계십니다. 창세기 1:2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은 곧 성령입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은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어떠한 것에 결박되어 있을지라도 그것을 풀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상에는 보고 만져서 느끼는 실체보다도 보이지 않는 실체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공기나 바람, 우주 공간에 꽉차있는 전파, 성도들간에 서로 나누는 주의 사랑 등등 말입니다. 선이 없어도 리모콘을 가지고 비행기를 띄우기도 합니다. 지난번 이라크 전쟁 때는 무인정찰기가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또 사람이 타지 않고 수색하는 소형전차가 왔다 갔다 했을 때 이라크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8:2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성령을 생명이라고 했을까요? 성령은 죽은 영혼을 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곧 실패와 좌절, 절망과 고통 속에 있는 자라도 온전히 일으켜 세우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강퍅한 사람이 자기 마음을 고치려고 아무리 애써도 고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면 그 강퍅한 마음이 변하여 새사람이 되어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곧 살리는 영입니다. 에베소서 2:1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이사야 61:1에 보면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역에 대해서 미리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 보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 죄인들을 모두 심판해서 그 죄값으로 고통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그리고 모든 죄인들을 부르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여기에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은 죄와 사망, 거짓과 저주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함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인생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씻음 받기 전에는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있는 곳에 바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생명이 부여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좀 부족하고 미련하고 어리석고 둔해도 그리고 뭔가 사람이 좀 모자란 듯해도 정말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 사람이라면 결과는 좋아집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어도 예수님을 잃지 않았으면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입니다.
100년 전에 시카고에 화재가 났을 때 D. L. 무디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는 19C에 시카고를 거점으로 전 세계의 복음 선교지로 삼았는데, 이 시카고는 나무가 아주 많은 곳이라 바람이 불면 나무끼리 서로 부딪혀서 산불이 자주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화재가 나서 기자들이 뭐 잃은 것 없느냐고 질문하는데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제일 중요한 것은 안 탔습니다.” 그러자 “그것이 무엇입니까? 옷입니까? 책입니까? 가구입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것은 다 탔습니다.” “그럼 안 탄 것이 무엇입니까?” “제일 소중한 예수님은 안 탔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있다가도 한순간에 없어질 수 있지만 정말 예수를 잃지 않고 산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119:142에 보면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법이 곧 진리입니다. 또 요한복음 17:17에도 보면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에베소서 1:13에도 보면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사유(赦宥)하심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 죄를 담당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1:4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말씀했고, 이사야 53:5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은 자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여 영원히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KAL기 폭파범 김현희씨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예수 믿는 좋은 간수를 만났습니다. 그 간수는 그에게 로마서 5장 8절 말씀을 계속해서 전해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 주님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계속 전하는 중에 그가 이 말씀에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특별사면조치로 죄에서 사유함을 받아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저희 교회에 와서 간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영이 계신 곳,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 그리스도의 사유하심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삶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영원토록 누리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설교를 주시옵소서.
고후 3:18~4:6 / 김형익목사(벧샬롬교회)
이 주제는 어느 목사의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설교자와 목사로 부름을 받은 저 자신의 기도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말하였습니다(8:11). 실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그런 시대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풍성한 영의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누리는 성도들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면 그것처럼 복되고 즐거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기 위하여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직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혹은 교회생활을해오면서, 이중에는 모태신앙도 있을 수 있고 그 후에 이민오셔서 교회로 인도되어 오늘까지 오신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마는,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만나셨습니까? 그리고 그분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그분을 만나면서 살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분처럼 여러분의 삶은 변해왔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참 성도들은 다 변화되기를 갈망합니다. 만일 이런 갈망이 없다면 우리가 거듭났다고 하는 증거를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님이 더욱 매력적이고 그 아름다우심에 우리의 마음이 점점 더 끌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의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이야기는 생소할만큼 우리는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분이요, 가장 사귀기를 원하는 분이요, 가장 흠모할만 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그분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며, 분명히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특이한 말씀으로 이런 영적 변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3:18을 보십시오. 여기 본문에서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결코 후일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새언약의 새로운 시대에 적용하는 말씀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사도 요한은 여기서 ‘주의 영광을 본다’는 표현을 이렇게 썼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성경은 매일 하나씩 적용을 열심히 하다보면 우리가 어느 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나 자기 개발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방법일 것입니다. 복음은 또 하나의 종교도 아니며, 자기개발 프로그램은 더더욱 아닙니다. 의지를 발동하여 일사각오로 살면 변화할 것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바울 사도는 우리의 성화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봄으로써입니다!
주의 영광을 볼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율법주의적 태도로는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 그 얼굴에 그 영광을 반사하는 빛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얼굴에 수건을 쓰도록 하셨는데 왜 그랬습니까? 3:13의 설명을 보면 그 영광은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는 빛이었기 때문에 그 영광이 사라지는 결국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얼굴에 수건을 쓰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영광의 빛은 결코 쇠하지 아니하며 없어지지 아니할 영광의 빛이라고 성경은 말해줍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은 그 영광을 나타내기를 기뻐하십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은 도대체 ‘그 영광이 뭐냐’고 질문하시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이란 시리즈로 벌써 8번째 설교를 하고 있는데 여전히 그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내게는 와닿지 않는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에 대해서 알거나 모르거나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영광을 보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살 수는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영광에 대하여 알지 못하거나 보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삶을 살다가 그분의 영원한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온전하심의 광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온 세상에 알리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영광이 알려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도 바로 그 영광과 그 이름을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제국에서 망하게 하시고 다시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것도 바로 그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드려지게 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재림하시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영광을 드러내시려 하심입니다. 마침내 역사의 끝에는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하박국 선지자는 예언했습니다(합 2:14).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고 바울 사도는 말씀했습니다(고전 10:31). 우리는 그 영광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알고 계시고 그러기에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완벽하게 나타나시는 성자 하나님안에서 자신을 완벽하게 아시며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고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와 동일한 지식과 기쁨을 우리 안에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요한일서 4:8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에 대한 완벽한 지식과 무한한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쁨과 만족을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희생시키는 대가를 지불하시더라도 우리 죄인들과 나누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본질로서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봅니다.
말을 정리하면 하나님은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고 그 근거 위에서 우리는 그 영광을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라는 표현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바울 사도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4:2에서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라고 했습니다. 많은 거짓 교사들은 언제나 말씀을 혼잡케 하였습니다. 말씀에 다른 것을 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자신은 언제나 ‘오직 진리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A.W.Tozer는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교회가 기독교의 진리에 물을 타버렸다. 그리하여 그것이 독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죽일 수 없게 되었고, 약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고칠 수 없게 되었다.”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4:4을 보십시오. /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리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오직 유일하게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거나 설교되지 않는 곳에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장 분명하게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설교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설교(preaching)는 그저 대화가 아닙니다. 설교는 강연이나 강의 혹은 그저 가르침도 아닙니다. 토론도 물론 아닙니다. 복음은 메시지입니다. 설교는 이 메시지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엄위로우심의 감각을 가지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선포(heralding)는 왕이 무엇인가를 백성들에게 포고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복음은 설교라는 방법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설교자의 입술을 통해서 나오는 복음을 들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허락된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무도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들음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복음을 들음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3:21을 보십시오.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분을 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
(NIV?he revealed himself to Samuel through his word)
말씀을 통해서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무엘은 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이 사건?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은 나머지 사무엘의 삶 전체를 설명하는 열쇠입니다. 사무엘게만이 아니라 이것이 모든 성도들을 변화시키는 열쇠라고 본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의 주요임무는 설교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는 일입니다.
여기에 목사의 임무가 있습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목사는 설교자입니다. 목사의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그 복음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해야 하며 그 영광을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이 영광스러운 직무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살고, 이것을 위하여 무릎을 꿇으며, 이것을 위하여 어떤 댓가도 지불하겠다는 자세가 바로 목사가 가져야 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단지 여러분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죠이선교교회의 목사요, 설교자로 부름받은 저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저에게는 가장 무서운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그 어떤 것과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선포되는 복음의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마귀의 주요임무는 설교를 막아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교회를 훼방하기 위해서 무엇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하는 수많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도록 모이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학교마다 목사를 하겠다는 학생들로 넘쳐나는 것도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마다 어마어마한 예산으로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들을 짓게 만드는 일도 막지 않습니다. 선교비도 올리고 선교를 열심히 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마귀의 주요임무는 오직 유일하게 설교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멋진 건물에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그리고 아무리 많은 프로그램들을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마귀는 하나만 방해하면 자기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교활하고도 똑똑한 존재입니다. 마귀는 오직 설교 하나만을 방해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합니다. 4장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복음과 복음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설교는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없습니다. 이것이 중세말 마귀가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도록 설교자들을 일으키셨습니다.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이었습니다. 그들은 신학자들이기 이전에 설교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만드셨습니다. 복음이 회복된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말입니까? 바로 설교를 통해서 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멸망할 자들에게는 가리워져 있어서 그들은 결코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죠이선교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는 동안에 우리가 가장 힘써 지켜야하고 기도해야 하며 싸워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설교를 통해서 복음이 선포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복음을 듣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며 그럼으로써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설교가 아니면 어디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기를 기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을 봄으로써 우리가 누리게 되는 기쁨과 만족이야말로 우리의 사명선언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라는 말에서 표현하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가 보통 알고 누리는 기쁨이라는 것은 정말 너무나 가볍고 너무나 얄팍한 것이란 사실입니다. 또한 더욱 슬픈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원하는 설교는 성경에서 오늘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보다 유머러스하고 보다 재미있으며 좀 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그리고 짧은 설교를 원합니다. 그들은 잠시 괜찮은 이야기를 즐기다가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일주일을 열심히 고단하게 지내고 나서 주일에 교회에 와서 그렇게 심각해지고 싶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약간의 기분전환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목사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설교에서 복음의 요소를 제거시키려고 하는 마귀에게 동조하거나 복종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다면 그리스도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과 영원에서 가진 최고의 보화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7절에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우리는 이 보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던 우리의 보배들을 더 이상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사는 삶을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참 보배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온 세상에 그리고 복음을 듣지 못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아낌없이 우리의 옛 보화들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애써서 헌신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참 보배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사람들의 삶 안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한 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는 죠이선교교회의 목사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이 영광스러운 복음의 사역을 설교라는수단을 통하여 감당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설교를 통하여 복음을 들으며 복음을 들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을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저의 삶을 드리려고 합니다. 결코 목사로서 저에게 이것보다 더 크고 고상하며 영광스러운 소원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설교입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설교입니다. 설교는 본질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세웁니다. 이것이 교회를 교회로서 지탱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복음은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다 넓은 의미에서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사상이나 유행하는 철학이 아니라 성경본문을 설교할 것이고, 복음을 설교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복음이 가진 메시지를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첫째로 복음은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받고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둘째로 복음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과 부활이 성취한 것들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가령, 그리스도의 피흘림심으로 죄가 다 갚아졌다는 속죄의 교리와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순종의 삶을 완전하게 사심으로써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교리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제거되었다는 것과 같은 교리들입니다. 세째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일들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전가되었다는 메시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이 전가됩니까? 이것은 선한 행위나 업적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네째로 복음은 그 성취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써 우리가 얻게 된 것들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었으며 우리는 칭의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 결과로 성화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것 등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은 우리의 가장 최종적이고 완전하며 최고로 만족이 되는 보배이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복음이십니다.
저는 바로 이런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설교는 논리적 설명을 가져야 합니다.
설교는 기본적으로 설명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설교학의 용어로는 ‘강해설교(expository preaching)’라고 합니다. 강해(exposition)라는 말은 설명하고 해설하는 것인데 무엇을 설명하고 해설합니까? 바로 복음이며 성경의 본문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그의 설교에 대한 정의에서 이것을 논리(logic)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설교는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입니다. 논리라는 영어단어는 헬라어 logos에서 온 단어입니다. 헬라어 logos는 바로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장을 시작할 때 예수님을 묘사하기 위해 붙인 호칭이었습니다.
“태초에 말씀(logos)이 계시니라”(요 1:1)
예수님은 말씀이십니다. 그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오셨기에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설교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미련해보이는 방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설교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설교는 설명이거나 논리만은 아닙니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론을 최대한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그것이 불과 함께 전달될 때에 온전한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는 열과 빛을 함께 가져야 한다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강조했던 적이 있습니다. 빛 만으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할 수 없습니다. 열 또는 불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는 온전한 설교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설교자 자신의 영역을 현저하게 벗어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십니다. 그러나 설교자 자신과 설교를 듣는 모든 성도들이 간절히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구해야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여기 ‘말’과 ‘전도’란 단어는 바로 오늘날의 설교와 동일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의 설교가 단순히 지혜로운 말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설교는 이성으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이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설교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달되고 사람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 안에 담겨진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계속해서 이렇게 씁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하느니라”(고전 2:14)
브레이너드가 뉴저지의 크로스윅성(Crossweeksung)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의 일입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할 때 그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나는 무서운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공로가 완전하고 부족함이 전혀 없으며 그분은 자신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기꺼이 구원하신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강하게 선포된 몇 마디에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그 때문에 영혼의 고통 가운데서 소리 내어 울었다. 그들은 지체 없이 하나님께 나왔다.
이것이 설교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이며,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 전해질 때 나타날 수 있는 일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기계적이기 보다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우리 중에 행하시기를 바라고 갈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주셨던 그런 많은 은혜들을 이 시대에, 그리고 우리들에게 회복시켜 주시기를 구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참 설교를 회복시켜주옵소서!
여러분, 만일 설교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함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주는 가장 영광스러운 수단이라면, 그리고 설교가 정말 교회를 교회되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 요소라면, 우리가 설교를 위해서 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죠이선교교회의 강단을 통하여 전해지는 설교를 통해서 복음의 메시지만이 선포되도록, 그리고 논리적 설명으로만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불로 우리의 영혼에 쏟아부어지도록 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하나님께서 그 영광스러운 수단으로 세우신 설교를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세대에 회복시켜주시기만을 간절히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18세기에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를, 19세기에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을 그리고 20세기에는 로이드 존스(Lloyd-Jones)를 일으켜주사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로서 지켜주셨듯이 그와 같은 설교자들을 이 시대 21세기에도 일으켜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세대를 복주시는 열쇠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종들이야말로 여러분들의 삶을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여러분을 쇠하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게 하는 하나님의 진정한 도구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막중하고도 두려운 소임을 저의 인생을 통하여 잘 감당할 수 있도록도 기도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