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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士觀樹錄> 1.회화나무
1)창덕궁 회화나무 8그루 (천연기념물 제 472호)
2014.7.24일,저녁 TV뉴스 화면 아래에 얼핏 보이는 "창덕궁 느티나무―"가 눈에 띄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실시간 뉴스검색창을 여니 창덕궁 금호문 안 왼쪽의 그 느티나무가 비와 바람에 의해 쓰러졌다는 비보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안 그래도 2012. 9월 태풍 <콘파스>로 구 선원전 가까이 있던 그 장엄하고 신묘한 향나무가 12M높이에서 위쪽 4.5M가 폭탄 맞은 것처럼 잘려나간 모습을 볼 때마다 미안하고 안타깝고 울화가 치밀어 오고 있는 중이다.
생로병사가 자연의 이치지만 좀 더 세심한 배려와 사랑이 있었더라면 또 그런 변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 거푸 난다.
2014년 현제 한국에는 약 250여 곳에 320그루의 해묵고 큰 나무가 소위 경로우대를 받고 있으며, 창덕궁 권역 내에는 천연기념물이 4종, 11그루가 국가적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 (향나무 1, 다래나무 1, 뽕나무 1, 그리고 돈화문 안 회화나무 8 그루-천연기념물 제 472호).
회화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여기 8그루와 전국의 4그루 모두 12그루이다. 어쩌면 “죽은 조상은 나무를 살렸는
데, 산 후손이 그 나무 하나도 못 살렸다”는 옛사람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그저 죄스럽기만 하다.
2) 회화나무- 그 이름의 뿌리
회화나무? 영어, 중국어, 외국어의 그 회화(會話)나무? 이 나무가 입시와 삶의 경쟁시대, 소위 글로벌 시대에 성공의 필수 외국어 회화와 어떤 인연이 있는가? 라고 묻는 이도 있었다.
지금 우리 세상에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수포는 대포이고 영포는 생포”다. 즉 수학 포기는 대학 가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영어 포기는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뜻이란다. 그러니 지구촌 시대에 영어가, 영어 회화가 사업이나 여행이나 학술 연구 회의에서나 필수다. 하여 오늘도 새벽부터 학원가에는 어학학원 앞 수강생들이 장사진을 치고 목숨 걸고 혀 굳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회화나무에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엄밀히 말해서 회화나무는 중국나무이다. 회화나무를 나타내는 한자는 괴(槐)자 이다. 이 괴(槐)는 옛날 분류학이 확립되지 않았을 당시는 느티나무를 뜻하기도 했으니 주의해야 한다.
상형문자로서의 괴(槐)자는 나무줄기나 가지가 상하여 결이 맺혀 옹두리가 뭉쳐 나온 모양을 형상한 글자라 한다. 그래서 귀 鬼자가 붙어 잡귀신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벽사의 뜻도 생긴 것이다.
회화나무 본고향 중국에서는 그냥 괴(槐) 외에 괴목(槐木), 괴화(槐花), 괴화목(槐花木), 괴수(槐樹)로 불렸는데 우리나라에 건너와서 이 괴화목이 회화나무로 바뀐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회나무 또는 홰나무라고도 한다. 별명도 많다. 학문과 관계되는 서원 향교 문묘 등지에 많이 심었으니 학자수 (Scholar Tree) 또는 선비나무. 일본에서는 절집에 많이 있어 부처나무(pagoda tree), 돈 많은 서울 강남 압구정동 가로수로 많이 있으니 부자나무 등등으로 불린다.
3) 대궐의 회화나무 - 회화나무 심은 뜻은
고대 중국 주례에 보면 면삼삼괴 삼공위언(面三三槐 三公位焉)이라고 하여 대궐 초입 외조(外朝)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어 삼정승의 자리를 표하였다. 하여 궁궐 자체를 괴신(槐宸) 또는 괴정(槐鼎)이라고도 했었다. 같은 맥락에서 삼괴구극(三槐九棘)을 삼공구경(三公九卿)의 같은 뜻으로 봤다. 따라서 궐 안으로 들어가서 국사를 논하는 벼슬하기는 가시밭길과 같이 험하고 어려워서 이를 괴문극로(槐門棘路)라 하였으니 괴는 고귀한 나무이다.
나는 소위 궁궐지킴이로서 궁궐을 14년을 꾸준히 드나들었다. 그 세월동안 올해처럼 저렇게 회화나무 꽃이 풍성하게 핀 것을 본 해는 없었다. 날씨 탓이라고 생각한다. 내 이 말이 의심스러우면 당장 창경궁 선인문 안 동궐도에도 나오는 그 속 썩어 주저앉은 회화나무를 보시라. 아마 고목으로서 손으로 꽃을 만질 수 있는 유일한 곳일거다. 아니면 바로 그 앞 옥류천 건너 우람하게 자리 잡고 있는 노거수 회화나무를 바라보라. 철늦은 아까시나무 같은 꽃이 흐드러지다 못해 설명 안 되는 아우라가 보일 것이다. 주로 음력 7월에 꽃이 피는데, 이때를 옛사람들은 괴추(槐秋)라고 했고. 나라에서는 과거 중 진사시를 시행하는 때이다. 그래서 생긴 말이 괴화황 거자망(槐花黃 擧子忙) 즉 회화나무 꽃이 피니 과거보는 선비들이 바빠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과거시험장으로 가는 길을 괴로(槐路) 혹은 답괴(踏槐)라고 한다. 때문에 과거 보려 갈 때나 과거에 합격하고 난 후 기념으로 이 나무를 고향이나 그가 공부한 곳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기왕 槐 타령하는 김에 괴시(槐市)도 들러보자. 회화나무가 늘어선 시장거리란 뜻인데, 마치 회화나무 가로수길. 그러나 보통 시장거리와는 크게 다른 장터거리이다. 옛날 선비들은 자기가 쓰고 남거나 필요 없는 책이나 지필묵 등 문방구들을 매달 초하루 보름에 서는 선비들만의 시장에 가지고 나가서 파는 시장이 게시(槐市)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 물물교환이나 매매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선비들 간의 이념과 사상과 진리를 토론하는 장으로 바로,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AGORA)나 아크로폴리스(ACROPOLIS)같은 곳이 괴시(槐市)라니 문명에는 동서가 그 뿌리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것도 회화나무를 통해 알게 된다.
4) 한국의 회화나무와 외국의 회화나무
역사도시 한양 서울 안에는 곳곳에 회화나무 노거수가 당시대의 정황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봤다”는 듯 굳건히 서있는 곳이 많다. 입궐했을 때 전각보다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회화나무인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왕조와 왕가와 관계되는 지역 또는 옛터나 문묘, 사당 등엔 틀림없이 회화나무가 있다. 아니 계신다. 지금은 정독도서관이지만 조선 초 성삼문의 집이 있던 그곳 입구에도. 그 말 많았던 옛 경기여고 자리에도. 조계사 대웅전 앞에도, 좀 멀리는 오는 8월, 교황님께서 친림하신다는 저 해미읍성 안에도 “호야나무”란 별명을 가지고 민초와 함께 질곡과 풍상을 견뎌오고 있는 회화나무가 있다. 대원군 집권 시절 천주교 배교를 종용 받고도 “여호와” 즉 호야를 외치면서 순교하던 자의 목이 달린 그 나무를 교황님은 어떤 심경으로 보실까? 교인이 아닌 나도 기대된다.
한문 문화권인 한 중 일 그리고 동남아 몇 나라는 어딜 가도 회화나무가 있기는 하다. 자주는 못 갔지만 일본이나 중국에도 분명 회화나무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처럼 대경목(덩치 큰 나무)을 본 기억이 없다. 과문한 탓이라 치자. 내가 처음 북경을 간 때는 막 2008북경 올림픽이 확정되던 해, 즉 1998년, 당시 올림픽 실사단의 점수를 잘 받기위해 북경시는 온통 화장실 개조와 도로 확장에 난리치고 있던 중이다. 새 길을 만드는 가로수가 대걸레자루크기의 회화나무가 전부였다. 그들은 그 나무가 지기들 특유의 나무라서 좋아한단다. 물론 공해에도 강하고-
거듭 내가 본 북경이나 대만 몇 곳에서는 회화나무 거목을 본적이 없다. 오히려 지난 3월 중순 5박 7일로 동유럽 몇 나라를 휙 돌아보고 오는 여정에서 체코 프라하에서. 헝가리 구시가지 언덕과 공원에서, 오스트리아 고성에서, 슬로베니아 성당 뜰에서 여러 줄기의 큰 회화나무를 보고 나는 반갑고도 의아한 마음을 품었다. 이곳 동유럽 위도와 기후가 우리와 비슷한가? 풍토에 잘 맞는가? 등등. 동유럽 등지에 해묵은 회화나무가 그리도 버젓이 여러 그루 있음을 나중 돌아와서 한참만에야 그 이유를 일수 있었다. 13세기 원 태조 징키스칸(成吉思汗)은 중앙아시아와 유럽 일부를 정복, 사해를 자기 것으로 할 때 그냥 영토만 넓힌 게 아니라 자기 군대가 간 땅에 중국의 회화나무 묘목을 반드시 심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 후손 나무들이 오늘 동유럽과 발칸반도 등지에 그렇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5)자명괴(自鳴槐)는 총명탕(聰明湯)?
시험이 두려운 학생이나, 입사 승진 시험을 앞둔 사람들에게는 절실히 생각나는 것이 총명탕일 것이다. 그저 몇 모금 마시기만 해도 두뇌가 좋아져서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척척 해결 할 수 있는 그런 신통한 약. 그런 약이 효과는 몰라도 시중 유명 한방약국에서 버젓이 조제 판매 된단다. 그도 비싼 가격으로 -
예로부터 회화나무 한 그루에 핀 꽃 중에 스스로 소리(鳴)내는 한 송이가 반드시 있단다. 나무에 붙어서 울 때면 동작 빠른 까마귀가 먼저 따먹지만 꽃들이 자연 낙화되기 전 사람이 손수 하나하나를 손으로 따서 여러 자루에 나눠 넣고 보관한다. 밤이 고요하면 그 우는 꽃송이 든 자루를 찾아 또 나눠 넣고 밤을 새운다. 이렇게 하여 끝내 바로 그 우는 회화나무 꽃을 찾아 이 우는 회화나무 꽃을 심키면 영통(靈通)하여 천상과 인간사를 모르는 일이 없으며, 못 푸는 문제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오늘날 돈 자랑, 과도한 자식 사랑하는 열성으로 구입하는 명약 총명탕과 다름없는 게 바로 자명괴(自鳴槐)가 아닌가 한다. 필요한자 지금 괴화 한창이니 궁으로 입궐하시라.
회화나무는 길상수(吉祥樹)로 지금 청계천변을 비롯하여 여러 곳 가로수로 선택받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 주나라 때는 묘지에 심는 관인수종(官認樹種)이 정해 있는 데, 군주의 능에는 <소나무 松>를, 왕족의 묘지에는 <측백(側柏)>를 고급관리나 사士 묘지에는 <회화나무>를, 학자의 묘지에는 <모감주나무>를, 서민 무덤에는 <사시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우리가 배워서 아는 고사,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유래에서 오 왕 합려의 아들 부차가 월 왕 구천에게 원수를 갚고 오만해서 서시(西施)라는 여인에 빠져 정사를 흐트러지게 보자 충신 오자서(伍子胥)가 간함에 오자서는 괘씸죄에 걸려 자결을 명받는다. 이때 오자서는 “내 죽으면 내 무덤에 회화나무 한 그루를 심어 그 나무 크거든 오 왕의 관으로 쓰고, 내 눈을 빼서 고소성 동문 위에 걸어둬서 오나라가 망하는 꼴을 내 눈으로 보게 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미 이때 무덤에 회화나무를 심었다는 증거이고 충신은 주군을 잘 만나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6) 회화나무의 쓰임새
회화나무는 콩과의 깃털모양 잎의 낙엽(우상낙엽)지는 키 큰 나무(喬木)로 공해에 비교적 강하며 장수목(長壽木)으로 예부터 널리 사랑 받아온 나무이다. 목제로서는 고급 가구나 불상 조각재로 쓰이고, 정원수나 정자목, 동신목 등으로 환영을 받는다. 특히 음력 7월경에 피는 연 노란색의 꽃은 괴황(괴황)이라 하는 데. <루신>이란 약성이 있어 종이 황색 물감으로 많이 쓰이고 .모세관 강화로 뇌출혈 예방에 효가 있고 고혈압 약 원료로 쓰인다. 또 이 꽃을 말려 치질, 혈변, 대하증을 다스리는데 유익하다 한다.
지금은 어림없는 일이지만 그 옛날 서당에서 농땡이 치는 학동들을 다그칠 때 쓰는 나뭇가지 매는 이 회화나무 줄기로 만들었기 때문에 회나무 초리 즉 <회초리>라고 불렀다. 맞아 정신 차려 근학 하여 학자가 되라는 뜻에서 ―
7) 다시 쓰러졌던 창덕궁 저 회화나무를 걱정하며-
산림청이나 문화재청 조사 보고에 따르면 한국의 보호수는 거의가 노령목(老齡木)으로 잔재수명이 그리 넉넉하지 않고 환경의 위협을 받고 있는 중이라 한다. 더구나 후계목(後繼木)은 극소수로 관리되고 있는 중이란다.
우리 주위의 노거수는 사람처럼 천명을 다하여 자연사하는 현상은 어떻게 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 대접 관리는 우리의 노부모처럼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나무의사, 나무 전문가 그리고 대형 크레인의 도움으로 이번의 저 창덕궁 회하나무는 겨우 일어나서 굵은 쇠지팡이에 의지하여 다시 일어 선 모습을 보였으나 앞날이 걱정이다. 사람이나 나무나 한번 쓰러진 뒤에는 여간한 정성 없이 전일의 제 기력을 찾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상식이다. 최선의 정성과 관리로 다시 전같이 뿌리내리고 잎줄기에 기력이 돌아오기 기도한다. 차제에 앞에서 말한 이런 좋은 뜻을 가진 회화나무를 지금 지자체등에서 광기어린 벚나무 심기의 경쟁에 반의반만의 정성으로 동네 가운데나 입구. 학교 교정, 관청 앞 공원에 심었으면 한다.
이 글의 첫 시도는 목관악기(木管樂器)가 아닌 목관악기(木觀樂記) 즉 나무 본, 짧고 즐거운 글을 쓸 목적 이였으나. 욕심과 내 필력의 부족으로 지루한 장문이 되고 말았다. 그저 이 글 읽는 것도 피서의 한 방법이라 상각하시고 도움이 됐으면 하는 작은 바람만 있다.
“나는 숲을 이루는 나무를 경배한다. 그 중에서도 홀로 서있는 나무를 더 경배한다. 홀로선 나무는 고난과 시련을 겪어서 경배하는 게 아니라. 위대하기 때문이다”한 헤르만 헷세의 말을 다시 생각한다.
고사관수록(古士觀樹錄)은 이미 눈치체신 분이 있겠지만 조선 초기 세종과 이종사촌이면서 우리 역사상 최초의 화훼서(花卉書) 양화소록(養花小錄)을 남긴 선비요. 화가인 강희안(姜希顔)의 명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에서 패러디(PARODY)한 것임을 밝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