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세월 산책[26] 희방사 가는 길 어떤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그것이 현실이냐 비현실이냐를 따지기보다는 먼저 그 일이 바른 길이냐 어긋난 길이냐를 따져서 결정하라. - 김구 희방사에서 본 희방사 가는길, 여기서 희방삼거리까지 1.8km이다 희방사 가는 길은 풍기소방서에서 죽령로를 따라 풍기에서 죽령으로 향해 가다가 창락리를 지나, 희방삼거리에서 죽령로 1720번길로 접어들면 된다. 버스를 이용할 때는 풍기역 앞에서 희방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서 희방삼거리에서 내리면 된다. 우리들의 첫 여행지 어릴 적 ‘희방사 가는 길’은 희방사역에서부터였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에 한 번 쯤은 희방사로 소풍을 갔다. 영주역에서 희방사행 기차를 탔다. 희방사역에서 희방사까지 오르는 길로 만만치가 않았다. 계곡을 따라 십 리 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희방삼거리에 있었던 검문소 옆 옹달샘에서 물을 마시면서 숨을 돌릴 수 있었고, 희방폭포 소리가 들릴 즈음이면 벌써 온몸에 냉기가 올라와 그 힘듦을 이겨낼 수 있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희방삼거리까지 시내버스 정기노선이 만들어지면서 희방계곡은 영주사람들에게 최고의 여름 휴양지가 되었다. 일요일이 되면 희방계곡엔 몰려든 인파로 늘 빽빽했다. 그 땐 계곡에서 삼겹살 구이가 성행을 했다. 여인숙이 있던 자리에서 보이는 폭포 무쇠다리 공원의 선정비 어떤 이는 계곡 주변의 납작한 돌들은 거의 불에 그슬려 있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집에서 석면 슬레이트 조각을 가지고 와서 자랑스럽게 불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철거하는데도 아무나 하면 안된다는 그 발암 물질에 불을 지펴 고기를 구어 먹었다. 희방사매표소에서 희방폭포까지엔 주점과 구멍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희방폭포 앞엔 숙박을 할 수 있는 여인숙이 있었는데, 허름한 곳이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꿈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텐트를 칠만한 곳에 일찍 터를 잡아야 했다. 그리고 밤이 늦도록 파티를 벌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폭포 아래 큰 바위가 있었다. 거기서 밤이 새도록 폭포수를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다. 그 여인숙에서 됫병 소주를 살 수가 있어서 참 좋았다. 희방 삼거리 폭포에서 바라본 여인숙 옛터 많은 것을 바꾼 국립공원 하지만 1987년 소백산국립공원이 지정되면서 그 모든 일은 사라졌다. 많은 곳이 정비되기 시작했다. 희방폭포 아래의 주점과 점포들은 철거가 되었고, 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들어서면서 계곡에서의 삼겹살 파티는 끝나버렸다. 이제 계곡은 조용하기만 하다. 그 대신 희방계곡 자연관찰로가 만들어졌다. 이 길은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길로 잘 정비되어 있다. ‘국립공원은 이런 곳입니다.’ ‘소백산의 사계’ ‘역사 문화의 보고 소백산’ ‘숲의 기능’ 등 입간판은 입구에서부터 친절하게 등반객을 맞으며, 소백산과 자연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또 희방계곡의 또다른 변화는 희방폭포였다. 희방폭포는 영남8경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예전에 희방사로 가는 길은 희방폭포 옆으로 만든 돌계단이 유일했다. 계단 옆의 철제 난간을 잡지 않고는 오르기가 녹록하지 않은 곳이었다. 희방계곡 자연관찰로 입구 하지만 지금은 예전 여인숙 자리에 공터를 만들고, 그 옆으로 든든한 계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희방폭포 위를 통과해서 희방사로 갈 수 있는 하늘다리를 건넌다. 아찔하다. 아래로 내려다보면 폭포 옆에 있었던 옛 계단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무궁화호가 섰던 희방사역 희방사역은 조그만 역이었다. 그런데 무궁화 우등열차가 섰다. 영주 사람들은 시내버스를 타고 희방계곡을 갔지만, 많은 외지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이곳으로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지 사람들의 목적지는 계곡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소백산이었다. 희방사는 연화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불과했다. 그래서 ‘희방사역’을 ‘소백산역’으로 바꾸려고 한 적이 있었다. 더 쉽게 찾아오라는 배려였다. 그런데 단양에서 난리가 났다. 단양군민들이 영주시청사 앞에서 반대 집회를 할 정도였다. 그래서 점잖게 철회를 했다. 하지만 그 희방사역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새 중앙선이 만들어지면서 창락리에서 기찻길이 땅속으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희방사역은 호젓하다 못해 적막하기만 하다. 열차가 도착할 시간이면 역전에 즐비했던 택시들이 그리운 과거가 되어버렸다. 희방사 매표소 애틋한 희방사 연기설화(緣起說話) 희방사는 643년(신라 선덕여왕)에 만든 사찰이다. 희방사 내력에 대한 설화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두운대사가 희방폭포 위에서 도를 닦고 있는데, 목에 가시가 갈린 호랑이가 나타나 구해주게 된다. 그런데 이 호랑이가 은혜에 보답한답시고 서라벌에 사는 유호장의 외동딸을 납치하여 두운대사에게 바치고, 대사는 이 여인을 다시 서라벌로 데려 간다. 이에 은혜를 갚고자 희방사를 세워 준다. 그 때 유호장은 두 개의 다리를 만든다. 하나는 풍기소방서 앞의 ‘유다리’이고, 또다른 하나는 수철리의 ‘무쇠다리’이다. 희방사로 가는 길부터 제대로 만들면서 절을 지은 셈이다. 1940년대 희방폭포, 희방사 등정후(좌), 하계훈련중인 군청 직원(우) ‘유다리’는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고, ‘무쇠다리’는 1941년 중앙선을 만들면서 없어지고, 마을이름으로 남아있다. 바로 ‘수철리(水鐵里)’이다. 그런데 얼마전 ‘무쇠달’이란 새로운 이름이 만들어졌다. 억지스럽다. 이를 만든 사람이나 허락한 사람이나 분별력이 없어 보인다. 희방사역에서 중앙선 아래로 난 굴다리를 지나면 ‘무쇠다리 공원’이 있다. 이 어디쯤에 ‘무쇠다리’가 있었을 것 같다. 참 조용하다. 공원 한켠에 선정비가 있다. 하나는 비각으로 세워져 있고 다른 하나는 바위에 새겨져 있다. 아마도 이 길이 죽령으로 오르는 옛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앞을 흐르는 내를 따라 500m쯤 가면 ‘창락역지’가 있다. 어쩌면 신라시대에도 ‘유다리’에서 ‘창락역지’ 쪽을 지나 이곳으로 오고, 또 여기에 ‘무쇠다리’를 만들고, 희방폭포 위로 오르지 않았을까? 현재 희방폭포 보물을 지켜준 희방폭포 희방사는 ‘훈민정음 원인석보 목판본’을 보관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지금 간송미술관에 보관하고 있는 국보 70호는 종이 인쇄물이다. 그렇게 보면 이 목판본은 그 원본이 아닐까? 진짜 보물은 이 목판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해 절에 있는 스님들을 내려오게 하고 이 절을 폭격했다고 한다. 그 때 보물이 사라졌다. 희방사를 오를 때마다 희방폭포 옆을 지나며 ‘예전에는 어떻게 절로 오을 수 있었지?’ 하며 늘 스스로 물어 보았었다. 자연 자체가 그 보물을 400여년 지켜준 셈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걸 지켜내지 못한 것이고…. 잘 보존된 희방계곡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엔 우리가 잘 놀던 곳을 빼앗긴 느낌도 자꾸 든다. 유다리 창락역지 다리아래로 보이는 옛 계단 1940년대의 희방사 현재의 희방사 |
첫댓글 그리운 곳이네요; 가보고 싶은 곳
나의 많은
추억이 서려잇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