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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1)
고후 4:1-15
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5 / [질그릇에 담긴 보물] 복음을 전하는 이 아름다운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자비에 힘입어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2) 우리는 사람들을 믿게 하려고 간교한 행동을 하거나 사람을 속이는 일에는 아무 흥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씌어 있지 않은 것을 성경의 가르침인 양 믿게 하려는 따위의 수치스러운 방법은 사용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였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모든 사람에게 떳떳이 내세울 수 있습니다. 3) 만일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이 가리워졌다면 그것은 영원한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에게나 가리워진 것입니다. 4) 이 세상의 신인 사단이 그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의 위에 비치는 하나님의 모습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5)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것을 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다만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여러분을 섬기는 종이 되었음을 알릴 뿐입니다. 6) `어둠 속에서 빛이 있으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광채를 깨닫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7) 그러나 이 귀한 보물, 지금 우리들 속에 빛나고 있는 이 빛과 힘은 깨지기 쉬운 그릇, 곧 우리의 연약한 육체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영광스러운 힘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8) 우리는 사면에서 닥치는 고통에 짓눌리지만 움츠러들지도 쓰러지지도 않습니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일에 당황할 때도 있지만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습니다. 9)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얻어맞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달려 나갑니다. 10) 우리 몸은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부단히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11)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위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오히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몸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나타내 보일 기회가 언제나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12)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이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13) 시편 기자가 ㄱ)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을 믿고, 그 믿는 것을 담대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ㄱ. 시116:10) 14)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도 예수와 함께 다시 살리셔서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해주실 것을 압니다. 15) 우리의 이러한 고난은 모두 여러분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리스도에게 인도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분의 크신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도 더해져서 주께서 더욱더 큰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사도직에 대해 공격받는 어려움이 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복음만을 하나님이 비춰주신 빛의 인도에 따라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찾아온 어려움에 대해서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진리가 믿지 않는 이들에 의해 손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질그릇처럼 사역했던 자세였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전하는 바울(1-6) 바울은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하면서 어려움을 겪어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흔들림이 없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우리 마음에 비추는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였습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어떠한 공격을 해온다 하여도 진리가 손상되지 않고 그들의 악행에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자신을 나타내며 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주 되심과 예수를 위해 자신의 종 됨을 전하였습니다. 복음은 진리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는 것입니다.
고난을 무릅쓴 사역(7-15) 바울은 질그릇과 보배의 비유를 통해 고난 가운데서도 오직 예수의 복음만을 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광을 입는 것은 우리가 어떤 가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진흙으로 만들어진 질그릇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찬란하게 빛나는 예수가 계셔서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고난은 받지만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런 질그릇의 고난을 예수의 대속적 고난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고난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을 가져왔듯이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짐으로써 이후에 그와 함께 일으킴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부활의 소망은 고난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얻은 사람들과 함께 이루어지는 영광입니다.
적용: 오늘 하루 당신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탄에 맞서 어떤 말씀이 당신에게 힘이 되었으며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었는지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성경처럼 지속적으로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어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진리의 근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은 다른 모든 원천의 기준이자 견고한 기초입니다. 성경은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자 무한한 신뢰를 받으실 만한 하나님을 그려 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딤후 3:16). 이는 우리의 확신이나 완전한 이해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를 향해 진리를 드러내실 뿐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통역해 주시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부요하심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 설 교 >
아름다운 마음가짐
고후 04장 15절 / 지용수목사
세계 어느 곳에 가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없는 나라가 없습니다. 또 어느 나라에서도 우리 한국 사람은 거지로 살지 않습니다.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그리고 세계의 유명한 학교에 가도 우리나라 학생들이 많고 공부를 잘 합니다. 미국에서도 우수한 학생들은 한국 학생이라 할 정도로 우리 학생들이 공부를 잘 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미래를 한국 사람들이 이끌 수 있다고 예측할 정도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각계 각 분야에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도 강수진이라는 우리 한국의 딸이 깃발을 날리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라는 칭찬을 듣는 그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그 강수진이 쓴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느냐는 질문에, “연습이지요. 노력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매일 열 시간 이상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연이 있으면 밤 11시까지 연습을 한답니다. 먹는 시간과 자는 시간 외에는 연습만 한답니다.
세상이 힘들다 해도, 아닙니다. 노력하면 반드시 그 열매가 오는 것입니다. 노력은 쓰나 그 열매는 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만 벌려 하니 돈이 벌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일에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돈은 따라 오는 것입니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성공하면 돈 걱정은 하지 않게 됩니다. 돈 때문에 일하는 사람은 참 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이 좋아 그 일을 열심히 하면 돈은 따라 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박사의 회고록을 쓴 의학자 부키는 아인슈타인의 일생을 살핀 후에 '아인슈타인은 돈을 모르는 사람, 돈을 갖고 다니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연구에 바빠서 돈 쓸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일하지 않고 노는 사람은 돈 쓸 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록펠러 재단에서 아인슈타인에게 연구비로 1500불을 주었답니다. 그때 1500불은 큰돈입니다. 그런데 그는 1500불짜리 수표를 받아서 책상 위에 던져 놓았습니다. 하루는 책을 읽다가 그 수표를 책갈피에 끼워 놓고 산책을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도둑이 들어와서 그 책과 수표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때 아인슈타인이 "돈이 좋긴 좋구먼. 돈 따라 책도 가버렸네."라고 했답니다. 이렇게 일생 돈을 몰랐지만 그는 자기 일에 몰두하니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오늘날 대학의 훌륭한 교수들 중에서도 돈 문제로 나래를 접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열심히 일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따라 합시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악한 것과 게으른 것은 같은 것입니다. 학생이 공부하지 않으면 악한 것입니다. 회사원이 일하지 않으면 악한 사람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착하고 선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살아야 됩니다.
디모데전서 4장 15절 말씀, 이 말씀을 저는 무척 좋아합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희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노력하면 진보해서, 사람들이 “당신, 언제 그것을 했어요?”하며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그렇게 진보하여 잘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이 경영하는 병원이 진보해야 됩니다. 여러분의 사업장이 진보해야 됩니다. 학생은 학교 성적이 진보해야 됩니다. 안 되는 것 같아도 노력하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유행가가 있습니다.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 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
열심히 노력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삽시다. 열심히 살면 절대로 헛수고가 되지 않습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편 128:2) 할렐루야!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 손이 수고한 대로 먹게 되고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살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성공케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열심히 살아서 나 하나 잘 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잘되면 물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내가 열심히 살고 잘되면서 이웃을 돌보는 마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자연적으로 마음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이 말씀합니다.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성도들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 바울이 말씀합니다. 바울의 삶이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살려고 일부러 노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고 나니 그것이 이웃과 성도를 위한 삶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외에는 하지 않고 사십니까? 여러분 중에 숨은 부끄러운 일을 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아내가 아는 남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 숨은 부끄러운 일을 벗어 버려야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숨은 부끄러운 일을 벗어버리게 되니 아내에게 떳떳한 남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에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하신 그 일이 곧 우리를 위한 일이 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 돌아가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일이 바로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곧 우리를 위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또 이웃의 사랑이 함께 나옵니다.
마태복음 22장 36절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합니다.
“예수님, 계명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37절에서 40절에 보면 예수님의 대답이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함께 나가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하면 이웃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항상 이웃을 배려해서, 바울의 모든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모든 삶도 하나님을 위한 삶인 동시에 나 아닌 이웃을 생각하는 아름다운 삶으로 꽃피고 열매 맺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 지용수 목사가 공부를 해도 저의 발전을 위해서, 설교를 해도 저를 위해서 한다면 저는 주의 종이 아닙니다. 10만 명을 구원해도 제가 유명해지려고 한다면 저는 나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귀한 말씀을 바로 전해야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야지.’하는 마음으로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일하는 것이 곧 여러분을 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삶이 여러분을 위해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참 신비롭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웃을 생각하며 살면 그 삶이 아름답습니다.
어느 날 간디가 여행을 가려고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출발하는 순간에 간디의 신발 한 짝이 플랫폼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간디가 나머지 신발 한 짝을 급히 벗어서 창 밖으로 던졌습니다. 옆에 있던 수행원들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니, 어찌하여 한 짝의 신발마저 밖으로 던지셨습니까?”
미소를 머금고 간디가 대답했습니다.
“생각해 보게나. 가난한 사람이 신발 한 짝만 주웠을 때 얼마나 안타까워하겠나? 내가 나머지 신발도 던져 주어야 그 사람이 신발을 신을 것이 아닌가?”
간디가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던진 것은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도, 하나님을 모르고도 그렇게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여러분과 저이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하는 동시에 이웃을 생각하는 아름다운 마음가짐으로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아름다운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면 많은 사람이 감사하게 됩니다.
값진 사람, 매력 있는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에 감사를 불러일으킵니다.
우선 가족끼리도 그렇습니다.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사는데,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속을 썩이며 한숨을 뽑아내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어떤 자녀는 부모의 가슴에 감사를 불러일으킵니다. 부모가 아들딸, 며느리를 생각하면 그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찌 저렇게 귀한 아들딸, 며느리를 제게 주셨습니까?”하는 감사의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부모의 가슴에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마땅히 되어야 합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의 가슴에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밤낮으로 술이나 마시며 나쁜 짓을 하고 다니면 자식이 상처를 받습니다. 부부 싸움을 하면 자식이 상처를 받습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근실하게 살면 아들딸이 “하나님, 아빠 때문에 감사해요. 엄마 때문에 감사해요.” 하며 행복해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로 살면 그 자녀들이 부모 때문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생 때문에 고민하고 형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반듯하고 귀하게 살면, 요셉 때문에 열한 형제가 감사하듯이, 나 때문에 형이, 동생이, 누이가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성령을 따라 사는 아내는 남편의 마음에 ‘하나님, 내게 이렇게 귀한 아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운 내 아내!’ 하는 감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잘못 사는 아내는 남편의 근심 덩어리가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보면 ‘어쩌다 저런 여자를 만나서 이렇게 사는고?’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부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우리 일생은 끝나게 되는데, 왜 남에게 아픔을 주고 미움을 받으면서 삽니까? 그리스도인답게 마음을 써서 가족과 형제, 이웃을 돌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룻기를 읽다가 향기를 맡았습니다.
룻기 2장 4절에 보면, 보아스가 자기 밭을 주욱 둘러보고는 거기서 일하는 종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복을 빕니다. 그러니 종들도 보아스에게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합니다. 보아스는 요즘으로 하면 경영주, 주인입니다. 경영주는 사원들을 축복하고 사원들은 경영주를 축복하고,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나라의 모든 회사가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경영주는 ‘어떻게 해야 우리 사원들이 우리 회사 때문에 좀 더 잘 살게 되고 사원들의 가정이 복될까?’를 생각하며 사원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또 사원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 회장님, 우리 사장님이 기쁘게 사업할 수 있을까?’하며 경영주를 위해서 기도하고 축복하며 회사를 위해 밀알이 되면 천국 같은 회사가 될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경제가 이렇게 어렵게 된 것은 노사 분규 때문입니다. 노사 분규가 없었다면 우리 경제가 얼마나 더 앞서 갔을지 모릅니다. 노사 분규가 없었다면 각 기업들이 더 많은 회사와 공장을 세워서 졸업한 우리 청년들에게 일자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노사 분규를 하는 것은 서로의 욕심 때문입니다. 사원들은 경영주와 회사를 위해 밀알이 되고 경영주는 사원을 위해 희생하면, 또 국가를 생각하며 모두가 크리스천의 마음으로 일하면 우리나라의 산업이 얼마나 일어나겠습니까?
덴마크의 국부적인 존재 그룬투비 목사님과 달가스는 자기 가족만 위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황폐하게 된 땅, 못 쓰게 된 땅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나라를 사랑합시다. 땅을 사랑합시다. 무기로 잃은 땅을 호미로 되찾읍시다. 밖에서 잃은 땅을 안에서 되찾읍시다.”라고 호소하며 사비를 털어 덴마크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마침내 덴마크 땅에 맞는 전나무를 심어 땅을 옥토로 만들었습니다.
어차피 흘러가는 세월인데, 나라를 위해 사니 그 은혜가 넘쳐 많은 사람이 감사하게 되고 그 감사가 넘쳐 또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15)
따라 합시다.
“은혜도 넘치고 감사도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간단합니다. 내가 나만 위해 살면 감사도 없고, 은혜도 없고, 하나님께 영광도 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 감사도 넘치고 은혜도 넘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나 때문에 은혜를 받고 감사하며 살고 기쁘게 살고 잘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귀하게 살아왔고 열심히 살아왔지만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조금 더 바르게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저는 링컨을 아주 좋아합니다. 링컨을 생각하면 향기가 나고 참 기쁩니다. 링컨은 자신만 위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도 생각하고 이웃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가 점원으로 일할 때의 일입니다. 한 손님이 차 500g을 달라고 해서 500g을 달아서 팔았습니다. 손님이 다 가고 난 후에 가게 문을 닫으면서 저울을 보니 저울의 눈금이 50g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손님에게 차를 450g밖에 주지 않은 것입니다. 링컨은 소스라치게 놀라 차 50g을 달아서 그 손님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저울을 확인하지 않아서 바늘이 50g 더 나가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여기 50g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링컨! 이 늦은 밤에 50g 때문에 이 먼 길을 오다니…….”
“오늘 잘못한 일은 오늘 바로 잡아야지요. 죄송합니다.” 향기가 나지 않습니까?
그는 변호사 시절에도 아주 귀하게 일했습니다. 한 의뢰인은 재판에서 이기자 링컨에게 사례비로 25불을 주었습니다. 그 당시 25불은 큰돈이었습니다. 그런데 링컨은 “제가 일한 대가는 15불이면 충분합니다.”라고 하면서 10불을 돌려주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매사에 그렇게 사니 링컨을 그리스도의 축소판이라 합니다. 우리도 링컨이 될 수 있습니다. 링컨 한 사람 때문에 세계가 은혜를 받고 세계가 감사하며 세계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살면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교회에 전도를 아주 많이 하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전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침에 일어나시면 동네 앞길을 다 쓰셨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의 일을 다 도와주고, 이사 오는 집이 있으면 감자도 삶아 가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할머니의 삶이 귀하고 인격이 귀하니 사람들이 할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마을을 위해, 남을 위해 사니 전도 열매가 그냥 맺힌 것입니다.
인생은 쉽습니다. 공부도 쉽습니다. 공부가 보이는 사람에게는 공부가 쉽습니다. 은혜를 받고 공부하면 공부가 머리에 잘 들어와 공부가 잘 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분별이 잘 됩니다. 은혜를 받고 사업하면 사업이 잘 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아이디어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자세가 아름다우면 우리가 무엇을 해도 잘 되도록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위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사니 최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약의 최고 인물은 사도 바울이고, 구약의 최고 인물은 모세인데,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나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미국 마리브 해변에 20톤이 넘는 큰 바위 하나가 솟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변 쪽의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볼 때마다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저 바위가 넘어지면 우리 마을은 큰일 난다.”
특별히 이사 온 사람들은 그 바위 때문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바위 때문에 불안하니 바위를 없애 달라.’라는 진정서를 주 당국에 냈습니다. 주 당국에서 그들의 청을 들어주어 헬리콥터와 불도저를 동원하여 그 큰 바위를 마을 반대편 고속도로로 넘어뜨렸습니다. 그 바위는 이제 아무 쓸모없는 돌덩어리였습니다. 그런데 한 조각가가 그것을 백 불에 사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미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 배우 존 웨인의 상을 조각했습니다. 그것이 몇 백만 불에 팔렸습니다. 쓸모없는 돌이지만 조각가가 조각하니 값진 물건이 된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나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미완성 작품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천당에 갈 때까지 우리를 자꾸 다듬으십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이 말씀으로 여러분과 저, 우리를 다듬고 계십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다듬어 주시는 대로 살면 우리에게도 아름다운 주님의 모습이 조각됩니다. 그래서 우리 때문에 주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고, 이웃도 은혜를 받고 감사하게 되고, 우리도 생애를 마칠 때 값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값진 사람이 되려고 그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나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 본문 말씀처럼 많은 사람을 위해 사는 아름다운 마음가짐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내일도 또 주님 오실 때까지 남을 위해 살고 은혜와 감사가 넘치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사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름다운 힘
고후04장 13~16절 / 서정호목사
시간을 정복했다는 의미
어느 집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형이 집 앞에 나와 있는데, 거지가 와서 구걸을 하였습니다. 형은 난처했습니다. 거절하자니 자기 이미지가 구길 것이고, 무엇을 주자니 아까운 생각이 들어 조금 고민을 하다가, 결국 “내일 오시오.”이렇게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거지는 가버렸습니다. 그 때 집 안에 있던 동생이 크게 웃으며 뛰어나오니 형이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내가 동네에 가서 사람들에게 자랑할 테요. 우리 형이 시간을 정복했다고 말이요.”그 말을 들은 형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쫓아가서 거지에게 먹을 것을 건네주었습니다.
시간을 정복했다고 하는 동생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겁니까?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거나 죽는데 그 사람들 중에 자기가 그런 일을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밖에도 내일이 되기까지, 하루 동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수없이 만나게 되는데 형은 내일 만나자고 한 그것을 동생은 시간을 정복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거절을 하든지, 아니면 먹을 것을 주든지 실은 형이 지금 이 순간에 결정을 해야 했던 것인데 지금 이 순간을 회피하고 막연히 내일 오라고 한 형의 그러한 속내를 동생이 꼬집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순간에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일로 미루는 약속을 하는 것, 어떤 일을 만날지 모르는 미래에, 지금 이 순간을 떠넘기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거절을 했다고 하여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아까운 마음으로 거절하는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혹은 아까운 마음은 없지만, 거절하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주기 싫은데도 체면 때문에 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내면에 억압이 쌓이게 됩니다. 타인을 의식하는 선행, 그것의 가치는 작은 것이고 아까운 마음 없이, 진정 가여운 마음으로 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어떠한 선택이든, 그 선택을 지금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 그것은 존재의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존재의 힘이 없는 사람은 뒤로 미루게 됩니다. 모든 약속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개중에는 회피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약속이 있는데 이는 나약한 모습입니다. 이런 나약한 모습으로 이어지는 인생은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힘이 있는 인생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의 힘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했을 때, 그들은 모든 정보를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지구상에 왜 태어났는지, 존재의 이유와 살아가야 할 이유와 목적, 심지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진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삶의 목표와 기반이 진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조금의 허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단이 찾아와 거짓 정보를 흘립니다.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보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거짓된 정보는 인간 내면에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자극하면서 어떤 목표를 만들게 됩니다. 이제 진리의 말씀 경청하기를 그만두고, 사단의 새로운 정보 앞에 귀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돈이나 명예, 건강이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살아보니 어느 정도 행복도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반복되면 무엇을 목표로 세워야 하는지 모른 채 언젠가는 허무함을 느끼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시편 39편 6절“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결국‘헛된 일에 분요’하는 것입니다. 의미도 알고 목적도 있어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도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에 관해서 볼 때는 생명력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요한 일서 2:15-17에“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말씀합니다.
사단이 주는 거짓정보는 우리 자신을 기쁘고 즐겁게 할 만한 것이기에 솔깃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속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응답 받았다고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목표와 계획을 정해두고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돕기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정해둔 목표를 이루게 해주셔야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능력과 도움을 달라고 기도해서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응답이라 하고 기뻐하며 뜻을 이루었다 합니다. 동기를 살펴보십시오. 육신의 정욕이 있고, 안목의 정욕(보기에 좋은 것)이 있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오지 않은 삶의 목적은 잠시 좋을 수 있지만 마지막은 허망함뿐입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과 존재의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
에리히 프롬은“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 사람의 삶의 방식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런 사람은‘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에 의해서 사람을 평가합니다. 즉 어떤 경력과 능력을 '갖고 있는지', 어떤 배경과 성장 환경을 '갖고 있는지', 자동차는 어떤 것을 타고 다니는지, 집은 몇 평에서 사는지, 이렇게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삶을 말합니다. 현대인들 가운데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또 하나는‘존재의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즉 존재의 의미를 둔다는 말은‘어떤 것을 소유하려고 애쓰지 않고 존재 자체를 즐거워하고 자기의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소유에 집착한 사람’은 먹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요, ‘존재에 집착한 사람’은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정해진 목적지를 향하여서 끊임없이 나아가는데 그곳은 죽음이라는 이 세상 삶의 종착역입니다. 목적지를 향하여 진행하는 속도가 나이와 비례합니다. 다섯 살 아이는 시속 5마일의 속도로 진행하기 때문에 구경할 것 다하면서 가는 데도 여전히 제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종착역이 영원히 이르지 않을 곳으로 여겨집니다. 스무 살의 청년은 시속 20마일의 속도로 달립니다. 시속 20마일 이래봤자 그렇게 속도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아직도 창밖을 통하여서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한눈을 좀 팔더라도 인생이란 차를 운전하는 데 큰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마흔 살 장년의 나이에 이른 사람은 40마일의 속도로 달려가기에 이제는 제법 속도감을 느끼며 자기가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음을 느끼나 아직은 여유가 있는 듯이 주위를 둘러봅니다. 예순 살이 넘어 60마일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사람은 이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딴전을 피우며 운전하다가는 사고가 날수밖에 없습니다. 전에는 이 것 저 것 다 둘러보아도 아직 여유가 있었는데 이제 모든 사물이 휙휙 지나가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습니다. 종착역에 이를 것이 점점 가시화됨에 따라 조금은 초조하고 불안하여집니다. 이제 조금 더 나이 들어 팔십이 지나면 이제는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90편 10절에서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고 했습니다.
속도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생에 대한 후회감과 종착역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고 있을 세상에 대한 불확실함과 두려움이 엄습해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떠나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이생의 종착역 뒤에는 분명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으련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생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많아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16절에"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말씀합니다.
존재의 힘이 강한 사람은, 결코 뒤로 미루는 약속을 하지 않고 지금 선택을 결정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어떤 부탁이나 제안을 받았을 때, 욕을 먹더라도 거절할 것은 거절합니다. 반대로 힘이 들어도 승낙할 것은 승낙합니다. 그리고는 최선을 다해 임합니다. 또한 외부의 찬사에 그저 담담할 뿐만 아니라 외부의 비판이나 조롱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시련을 맞아도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물론 잠시 흔들릴 수 있지만, 금방 제자리를 찾습니다. 마치 오뚜기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힘이 날로 자라나야 합니다.
존재의 힘을 기를 수 있는 길은 여러 길이 있겠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인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은 하늘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갖고 늘 하늘에 잇닿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감싸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 2:20)
그리스도가 나를 사는 삶
자기 자신이 자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자기를 사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사신다는 것이 사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개념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다시 표현하였습니다.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살면, 그리스도가 나를 사시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작은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는 삶과, 작은 그리스도가 나를 사는 삶은 분명히 차이를 가지게 되는데, 그리스도가 나를 사는 삶은 훨씬 힘이 있고 고귀한 삶이 되는데 그런 삶을 위한 전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삶이란, 그리스도의 빛에 감싸인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13절, 14절에서 바울은 말했습니다.“우리는 그러한 믿음을 일으킨 같은 영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고 있고, 또한 우리는 말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 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갑니다.”겉 사람이 낡아 간다는 것은 늙어 간다는 뜻입니다. 늙어 가니 얼굴에는 주름살이 늘어가고, 머리는 희어지고, 또한 힘은 쇠약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간다고 합니다. 속사람이란 무얼 의미할까요? 그 사람의 의식이나 내면이나,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 속사람이 나날이 새로워 간다는 것은 의식의 성장이요, 내면의 풍성함이요, 존재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빛에 감싸여 살아갈 때, 우리 존재의 힘이 나날이 자라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힘이 허약한 사람은 외풍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스런 일을 당하면 낙망에 빠지고, 누군가 자신을 조롱하면 뒤집어지고 타인의 찬사를 갈망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지금 행동의 결정을 하지 못하고, 뒤로 미루는 약속으로 회피합니다. 이 과정에서 추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며, 좋은 것으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철따라 바뀌고 유행 따라 바뀌는 것은 상대적인 가치는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영원한 가치는 없습니다. 애인의 가치는 나이에 따라 바뀌어도 어머니의 가치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 그것은 영원한 것으로서 참된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가치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바라고 우리들의 시선을 하나님에게 두어서 우리 삶을 풍요롭고 가치가 있으며, 기쁨이 있는 인생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적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힘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힘 가운데 가장 큰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이 믿음의 큰 힘은 과학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인간의 내부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과학의 힘은 외부세계를 변화시켰고 우주공간을 정복했지만 인간의 내부세계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힘만이 이룩할 수 있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 있는 이 믿음의 힘은 아름다운 힘입니다. 우리를 뒤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고 우리를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이 되게 하고, 우리를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인 힘이 있게 합니다.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 낙심하지 말고, 좌절되지 말고, 믿음의 힘으로 이 어려움을 디디고 일어서야 합니다. 좀 더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절망적인 자리에서 희망적인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패배적인 위치에서 승리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데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려움을 직면할 때 후퇴하는 자세가 아니라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진하는 생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힘이 강한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갑니다. 우둔한 듯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저 혼이 이끄는 대로, 가슴이 출렁이는 대로 흘러갑니다. 그 와중에서 우주의 신비를 많이 보게 됩니다. 육체의 힘이 강함은 자칫 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의 힘이 강함은 다만 아름다움으로 나타납니다. 존재의 힘은 아름다운 힘입니다. 앞으로 살아가는 날 동안 여러분의 존재의 힘이 나날이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날로 아름다운 존재의 빛을 발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빛에 감싸이는 사람마다, 마음이 맑아지고 밝아지고 따뜻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을 마감할 때, 여러분 존재의 근육이 많이 커진 모습을 보면서, 대견스러움과 감사한 마음으로 하늘의 은혜를 찬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수고
고후04장 12~14절 / 지용수목사
죠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 무서운 식인 상어가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해칩니다. 해수욕장의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떱니다. 그런데 용기 있는 한 선장이 경찰서장과 함께 그 식인 상어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그는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식인 상어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무전기까지 부수어 버렸습니다. 바다에서 상어를 만난 그들은 부지런히 총을 쏘고 작살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상어는 날렵하게 이리저리 피하더니 나중에는 역으로 배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어에게 공격을 당해 배가 부서지고 선장과 경찰서장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본부에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무전기도 부수어 버렸고,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참혹하게 상어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는 무신론자들은 이 선장과 경찰서장 같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아도 나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나는 살 수 있다. 예수, 하나님, 나는 다 필요 없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큰 소리쳐도 결국은 사망의 밥, 죽음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동물원에 있는 큰 뱀은 대개 하루에 주식으로 닭을 두세 마리 먹고 간식으로 수십 마리의 쥐를 먹습니다. 수십 마리의 쥐를 뱀이 있는 방에 넣으면 뱀에게 잡아 먹히지 않으려고 쥐들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도망다니기에 바쁘지만 하루만 지나면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뱀이 쥐들을 다 집어 삼키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보려고 운동을 하고 이것 저것 노력을 하지만 때가 되면 모두 사망의 밥이 됩니다. 식인 상어를 선장이 이기지 못하고 경찰서장이 이기지 못했듯이 사망의 권세를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사탄의 권세를 인간이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공부하고 실력을 쌓아도 이길 수 없습니다. 핵으로도 미사일로도 사탄은 죽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탄을 이기고 사망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뱀의 방에 있는 쥐와 같습니다. 결국은 사탄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해방을 얻게 됩니다. 영원히 살게 됩니다. 죄가 있어도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 십자가 보배 피의 권세로 죄가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무리 큰 죄, 부끄러운 죄, 더러운 죄, 악한 죄를 많이 지어도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 십자가의 보배 피로 깨끗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사탄의 밥, 사망의 밥이 되어 영원히 멸망하는 자들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나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곳곳마다 믿는 백성이 생겨나고 교회가 생겨나고 구원받는 백성들이 불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 교회가 우뚝 서고 천 몇 백만 명이 구원을 얻게 된 것도 선교사들 때문입니다. 영국에서, 미국에서, 호주에서 문화 생활을 하던 그 지성인들이 목숨을 걸고 이 피폐한 땅, 가난한 땅, 미개한 땅에 와서 환난과 핍박을 받고 또 돌에 맞고 순교를 당하면서까지 복음을 전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생명을 건 주의 종들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씀합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린도후서 4:12)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고린도후서 1장 8절, 9절에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환난을 받았고 아시아에서도 환난과 핍박을 받고 매를 맞으며 ‘오늘 죽는구나. 오늘 죽는구나.’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맛보는 그런 수고가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죽음을 맛보는 그런 수고의 결과로 교인들은 영원히 사는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은 것은 죽음을 무릅쓴 사도들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1997년 7월 30일 오후 7시 10분, 서울 올림픽 대로에서 공항으로 가는 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젊은 부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택시를 타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11톤 트럭 한 대가 빗길에 미끄러져 갈팡질팡하는 어떤 차를 피하려다가 그 택시의 옆구리를 박았습니다. 사고를 당한 택시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졌고 부인은 즉사를 했는데 두 아이는 멀쩡했습니다. 위기를 감지한 부인이 두 아이를 의자 밑으로 내려놓고 자신의 몸으로 아이들을 덮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 엄마가 그냥 있었으면 두 아이가 먼저 죽었을 텐데, 급히 아이들을 내려놓고 엄마의 몸으로 아이들을 덮어서 아이들이 산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망은 엄마에게 역사하고 생명은 아이들에게 역사한 것입니다.
바울에게, 베드로에게, 사도들에게는 죽음의 맛을 볼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그것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특별한 선교지가 아닌 평화로운 나라에서는 주의 종들이 죽음을 맛볼 정도의 위기나 핍박은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사랑의 수고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울과 사도들이 수고한 것은 사명 때문이 아닙니다. 사명도 있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고 택시를 탄 그 엄마가 두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은 사명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 때문에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인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서 수고를 합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해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들 중에 삯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들 중에도 이상한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부모, 자식을 귀찮아하는 부모도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자기 인생을 위해 자식을 낳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식을 낳지 않고 그 돈을 모아 편하게 살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국가도 생각하지 않고 집안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목회를 하면서도 교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영혼을 사랑하지 않고, 영혼 구원을 위해 힘쓰지 않는 목회자들이 혹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자는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여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제가 부족한 목사지만, 목사이기 때문에 그것을 잘 압니다. 부족한 저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끓어올라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우리 교우들 중 한 영혼도 마귀의 밥이 되는 일이 없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우리 교우의 가정은 한 가정도 파괴되지 않아야지. 한 가정의 아이라도 잘못되면 안 되지.’ 하는 마음으로 하루에 다섯 번씩 손들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저는 혼자 기도할 때도 많으니 식사 때에는 우리 교우들 중 건강이 좋지 않은 여덟 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마음인 것입니다.
목회자는 교우들의 믿음만 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가정이 잘 되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경영하는 병원이나 회사가 확장될 때, 작은 집에서 살다가 큰 집으로 이사갈 때, 교우들의 아들딸이 잘되었다는 소식이 들릴 때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우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교우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양식을 먹이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수고입니다.
교우들은 목회자의 이런 수고를 알아주고 감사해 하며 기도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 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여러분이 주의 종을 위해 기도하고, 주의 종이 목말라 할 때 냉수를 주고 힘이 없어 보일 때 받쳐 주며 도와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주의 종을 찌르지 마세요.
하나님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그 영혼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을 가시로 찌르면 어떻게 합니까? 주의 종을 찌르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성경 어디에 주의 종을 찌르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혹 주의 종이 좀 그렇다 해도 찌르지 말고 기도해 주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의 종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기도해 주는 일이 성도의 일인 줄로 믿습니다.
지금 저의 어머니께서 섬기시는 교회를 새로 짓고 있는데, 그저께 제가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머니와 작은댁과 전도사님 댁과 또 어느 한 댁에 드릴 고기를 똑같이 세 근씩 사 가지고 갔습니다. 전도사님이 저보다 나이 어린 후배이지만 어머니를 말씀으로 기르시며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어머니의 믿음의 아버지라서 제가 정중히 대접을 해드립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주의 종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의 종을 찌르는 것은 예수님을 찌르는 것과 같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는 주의 종에게 격려는 못할 망정 찌르는 사탄의 가시가 없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뿐 아닙니다. 구역원들은 구역장의 사랑의 수고를 알아야 됩니다. 구역장님은 날마다 구역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구역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구역원을 위해서도 매일 기도합니다. 구역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녀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날이 있어도 구역장님과 교회학교 교사는 여러분 자녀를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합니다. 그 사랑의 수고를 기억할 수 있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꽃꽂이로 봉사하는 것도 사랑의 수고입니다. 강단에 있는 이 꽃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이 아름다운 꽃들을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지만 사람들도 기뻐합니다. 찬양대원들이 찬양하는 것도 사랑의 수고입니다. 찬양대의 찬양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만, 우리에게도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됩니다. 또 차량 안내하는 것도 사랑의 수고입니다. 그 덥고 추운 날,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며 차량을 안내하는 것은 생명의 수고, 사랑의 수고인 것이니다. 이렇게 수고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교회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 말이 얼마나 무거운 썰매를 끌 수 있는가를 시험했습니다. 가장 힘센 말은 2,000kg을, 그 다음의 말은 1,800kg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말이 함께 한 썰매를 끄니 5,500kg을 끌었습니다. 계산상으로는 3,800kg만 끌면 되는데 두 마리가 함께 끄니 5,500kg을 끌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일하는 것보다 힘을 합하여 일하면 더 큰 역사를 이룬다는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지금 이만큼 모여서 이렇게 큰 역사를 이루고 있지만 10만 명이 모이면 더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수고, 사랑의 수고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도, 교사도 모두 사랑의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구역장도, 찬양대원도, 차량 안내위원도, 교회를 깨끗하고 아름답게 청소하는 교우들도 다 사랑의 수고, 생명을 낳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몇 달 후에는 우리가 300명 정도의 안수 집사님과 권사님들을 세우게 됩니다. 그분들이 지금 새벽기도와 성경 읽기, 성경 연구, 책읽기, 전도의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훈련에서 탈락되면 안수 집사님이나 권사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이번에 안 되면 다음에 하지.’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다음에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 살아 있지 못할 수도 있고, 이번에 안 되면 다음에도 안 될 수 있습니다. 또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이 바쁘다고 교회 일을 뒤로 미루면 안 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쁜 일이 많아도 먼저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작년에 이태리의 한 남자가 860억 원의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복권을 8월 16일까지 보험회사에 제출해야 되는데, 자기 딸의 결혼 준비에 바빠 뛰어다니다 보니 이틀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그 복권에 당첨된 것이 무효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남자는 졸도하여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2시간 만에 깨어났지만 그 복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딸의 결혼 준비가 바빠도 먼저 860억을 챙겨 놓았어야 했습니다.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이 세상의 사장, 부장, 이사, 대학총장 ,병원원장 같은 것들이 귀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것들이 별 것 아닙니다.
이번에 피택 된 분들 모두 이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훈련을 잘 받아 한 분도 낙오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난 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흙덩이에 불과합니다. 겸손히 훈련을 잘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새 일꾼들이 함께 사랑의 수고를 하면 우리 교회가 생명의 큰 역사를 이룰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수고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형 선고를 받는 것 같은 수고와 고생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이유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상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한 상을 생각하면 사도 바울은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 14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은 사랑의 수고를 하면 하나님께서 큰 상을 주실 것을 알고, 과거에 충성한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일 즉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생명의 수고, 사랑의 수고를 할 때 큰 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땅에서도 승리와 축복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 포도원교회의 김메리 장로님은 한국에 계실 때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일하셨습니다. 13세부터 교회학교 교사를 했는데 83세이신 지금도 교회학교 교사로 충성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직도 얼마나 건강하신지 모릅니다. 그분께 장수의 비결을 물으니 교회 봉사와 기도 생활과 규칙적인 운동과 수면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교장 선생님은 은퇴하고 7개월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학생들이 보고 싶은데 마음대로 볼 수 없으니 또 학생들이 있어야 살맛이 나는데 학생들이 없으니 힘들어하시다가 7개월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직장에서 은퇴해도 교회에 일이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또 기도하고 교회에서 충성하면 건강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젯밤 9시에 어머니께 취침 전화를 드렸는데 어머니께서 전화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일찍 주무시는데 전화를 받지 않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0분 후에 다시 전화를 드렸더니 받으셨습니다.
“어머니, 어디에 갔다 오셨어요?”
“청소하고 왔지.”
“무슨 청소를요?”
요즘 어머니께서 섬기시는 교회당을 새로 짓고 있는데 일하시는 분들이 어질러 놓고 그냥 가셔서 매일 어머니께서 청소를 하신답니다. 그리고 교회당을 새로 짓기 위해 이전 교회당을 다 헐었기 때문에 요즘 어머니께서 사시는 저희 집이 임시 교회당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안방에 강대상을 놓고 교인들은 응접실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머니께 “어머니, 요즘에는 교회까지 걸어가지 않으셔도 되니 참 좋으시겠네요. 일어나면 교회, 일어나면 교회라서 얼마나 좋으세요?” 했더니, 어머니께서 "말도 마라.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교인들이 오기 전에 예배드릴 준비를 하느라 얼마나 바쁜지 모른다.”라고 하셨습니다.
80이 넘으신 어머니께서 교인들이 오기 전에 집안 청소하고 또 새로 짓는 교회당에 가서 청소를 하시는데도 힘이 펄펄 나십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면 건강도 오고, 축복도 오고, 모든 것이 다 오는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수고를 하는 사람이나 사랑의 수고를 받아서 생명을 얻은 사람이 함께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13절에 말씀하십니다.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따라 합시다.
“믿음의 말을 하자.”
말을 할 때 의심하게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도 병들고 상대방도 병들게 합니다. 믿음의 말을 하면 자기도 강해지고 상대방도 강해지게 됩니다.
생명을 얻으면 믿음의 말을 하게 됩니다.
저는 링컨을 사랑합니다. 지난 주에는 구역장회가 없어서 링컨 전기를 다시 한 번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링컨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집니다. 그의 어머니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링컨이 열세 살 때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때 그의 어머니가 믿음의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에이브(링컨의 애칭), 내 부모님이 읽으셨고 내가 읽었던 이 낡은 성경을 너에게 유산으로 주는 것이 참 감사하다. 내가 너에게 10 에이커(1만 2천 평)의 땅을 주는 것보다 이 한 권의 성경을 물려주는 것이 나는 더 기쁘다. 네가 이것을 읽고 이대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하실 것이다.”
학교라곤 초등학교 9개월밖에 다니지 않은 그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니 미국의 많은 지성인들을 제치고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남북전쟁 중에 장관들은 불안해 하는데 대통령인 그는 아주 평온한 모습이었습니다. 장관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각하, 전쟁 중인데 어찌 그리 평안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편에만 있으면 우리는 이길 것이니 어찌 평안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전쟁에서 유리하던 링컨의 북군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평안했습니다.
“각하, 지금 우리가 어렵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됩니다.”
그는 언제나 믿음의 말을 했습니다. 그대로 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 아이들에게도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도와주신다. 네가 혹 죄를 지어도 우리 주님께서 네 죄를 씻어 주신다. 너는 하나님을 떠나도 하나님께서는 너를 떠나지 않으신다. 너는 잘 될 수밖에 없다.”
남편이 회사에서 해고를 당해도 “여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하고 믿음의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암에 걸린 사람에게도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천국으로 데려 가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살리실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오늘 1부 예배에 우리 고등부의 정광수 학생이 나왔습니다. 두어 달 전에 큰 사고를 당했는데,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몸이 다 망가졌고 의식도 다 잃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말을 하며 광수를 위해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 광수가 오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언제나 믿음의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서울도 아니고, 부산도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창원에 있는 우리 교회를 통해 2010년까지 10만 명을 구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제 이성의 말이 아니라 제 믿음의 말입니다. 제 이성으로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하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 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 개의 농촌 교회를 도와주기를 원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면 하실 수가 있는 일입니다.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말 중에서 최고의 믿음의 말, 믿음의 절정의 말은 무엇입니까? 본문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따라 합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신다. 우리를 살리신다. 반드시 살리신다.”
최고의 믿음의 말은 ‘우리를 다시 살리신다’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죽어도 삽니다. 살아서 믿을 때 주님께서 오시면 영원히 죽지 않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 땅에서 잘 된다.” “예수님을 믿으면 병이 낫는다.” “예수님을 믿으면 힘있게 산다.”라는 믿음의 말도 귀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말은 “예수님을 믿으면 다시 산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는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입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는 사람이나 사랑의 수고의 복을 받아 생명을 얻은 사람은 이런 믿음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세계 2차 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패전한 이후 전염병과 가난이 그 나라를 휩쓸었습니다. 소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파출소장이 자전거를 타고 길을 가다가 길목에 앉아서 마른 빵을 드시고 있는 어떤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파출소장은 자전거를 세우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어르신네, 무엇을 드세요? 그 빵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요?”
할아버지가 드시는 빵은 원래 치즈와 고기, 야채 같은 것을 듬뿍 넣어 먹는 것입니다.
파출소장의 말이 끝나자 할아버지가 빵을 뚝 부러뜨렸습니다. 그 빵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이 빵 안에는 꿈이 들어 있어요. 나는 지금 꿈을 먹고 있어요.”
이 말이 영화로 만들어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다고 합니다.
믿음은 절망에서도, 벼랑 끝에서도 우리에게 꿈을 심어 줍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죽여야 할 때 아브라함은 벼랑 끝이었습니다.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말을 했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어요? 장작도 있고 불도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없네요.”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말대로, 창세기 22장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숫양을 수풀에 걸리게 하셔서 번제물을 친히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막다른 골목에서도, 벼랑 끝에서도 우리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삽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목자만 따라가면 양에게는 꼴이 있고 물이 있고 쉼터가 있듯이, 하나님만 따라가면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말을 합시다. 그래서 나도 살고 가족도 살리고 이웃도 살리고 나라도 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함께 사랑의 수고를 하여 민족과 세계를 살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이 낳는 생명
고후 4장 11~12절 / 조용기목사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서론>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사망이 낳는 생명”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 목마른 자가 우물판다는 말이 있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이 간절히 밥을 찾습니다. 추운 사람은 따뜻한 옷이나 따뜻한 처소를 찾아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추운 지역에 있는 나라들이 선진국이 되고 따뜻하고 온화한 환경에 있는 나라와 민족들이 대게 후진국이 된 이유는 추운 나라에서는 그 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엄청나게 노력하며 애를 쓰지만 자연환경이 복을 받아 온화한 나라에서는 그렇게 애쓰고 힘쓰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자연히 사람들이 게을러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이 심할수록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금식하고 철야하고 부르짖어 외치기 때문에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평안하면 자기를 의지하고 주님을 찾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의 세력인 고통이 결국에는 거꾸로 오히려 생명을 가져오는 역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해산할 때에 굉장히 괴로워하는 고통을 당하지만 그 고통의 결과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본론>
1.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첫째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이 원리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처절한 싸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 없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하게 죽는 이유는 우리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을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 스스로는 죽을 이유가 전혀 없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악의 잔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 잔을 들여다보니 음란, 방탕, 시기, 분노, 질투, 살인, 강간, 간음 온갖 더러운 죄가 혼탁하게 가득하게 차여 있는데 이것을 마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독을 전부 책임지라. 죄의 독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몸서리쳤습니다. 몸을 움츠렸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합니다. 죄를 지은적도 없습니다. 순식간에 모든 인류의 죄악의 잔을 주님이 다 짊어지고 마시고 책임져야 되니까 주님이 고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몸부림쳤습니다. 하나님께 그는 잔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지엄하신 뜻이 계시므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 가운데서 갈등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42~44에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 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의사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피가 터지잖아요. 그와 똑같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 피하에 있는 모세혈관이 터져서 땀구멍을 통해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무시무시한 죄악의 잔을 마셔야 된다는 그 상황에 처해서 그는 몸부림쳤고 안 마시자니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게 되고 마시자니 너무나 어마어마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 갈등에 주님이 기도하는데 땀이 피로 변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우리 주님은 심한 마음에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원수들이 조수했습니다. 주님이 기도만 하면 열두 영 되는 천사를 보내어서 능히 십자가에서 내려 오실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원수들을 한마디로 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처절한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주님이 두말하지 않고 참으신 것은 주님이 죽으셔야 우리가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살면 우리가 죽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악의 빚을 갚으려고 십자가에 매달렸는데 주님이 그 빛 갚지 아니하면 우리가 갚아야지요. 죄의 값은 사망이지요. 우리는 죄를 짊어지고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요, 사람이시기 때문에 우리 죄를 갚고도 살아날 수 있지만 우리는 못살아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는 다 멸망 받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면 우리가 삽니다. 정말 역설적인 것입니다. 죽으면 살리고 살면 죽입니다. 죽음이 생명을 가져오는 원천이 된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6:53~54에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주님은 내려올 수 없는 분이 아니라 능히 내려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택하고 매달리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선택이 우리 주님께 더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내려올 수 있는데도 안 내려 오시고 못 내려오시니까 그 고통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주님의 택하신 길은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임으로 인류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사망을 통하여 주님께서 생명을 낳으신 것입니다. 나죽고 너 살고. 너 살리기 위해서 내가 대신 죽겠다는 주님의 결의를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5:31~32에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 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희롱합니다. “야! 너 남은 살리고 왜 너는 못 살리냐? 남 살린다고 큰 소리하고 난 다음 너는 왜 못 살리냐?” 그 원수들이 한 말이 맞았습니다. 남은 살렸으되 자기는 살릴 수 없습니다. 왜, 자기가 빚을 갚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의 빚을 청산해줄 수 없지 않습니까? 자기가 죽지 아니하면 사람들을 살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 억센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너무나 우리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주님이 그때 살기로 결정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왔더라면 우리의 형편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희망이 없이 절망이요, 앞길이 캄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죽음과 모욕과 고통을 택하시고 삶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과 고통에서 해방되고 오늘날 영원한 소망과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1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했습니다.
히브리서 2:10에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 하도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고 우리는 들어가면 영원히 무덤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 청산하셨습니다. 그만큼 능력이 계신 하나님 아들이 우리 인생들은 한번 무덤에 들어가고 음부에 빠지면 영새토록 못나오는데 예수님 우리 대신 무덤에 들어가고 음부에 내려갔으나 사흘 만에 사망과 음부를 다 극복하시고 승리하시고 일어나시므로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영원한 생명의 원천입니다.
성경말씀 요한복음 12: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주님은 이제 수없는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과 음부는 다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쇠사슬은 그리스도 안에서 철컥철컥 다 꺾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사망과 음부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넉넉히 이기게 된 것을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어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님 죽음이 우리의 생명을 낳아 주셨습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사망이 생명을 낳았습니다. 사망이 이김과 승리를 낳아 주신 것입니다.
2. 왜 바울인가?
둘째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성경은 사도 바울 선생은 위대한 사도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에 들지 않았지만 예수님 죽었다가 부활하신 이후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선택한 사도 바울이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고 성경의 3분의 2를 기록한 신약성경의 저술자가 된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 선생이 이렇게 위대했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바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오늘날 기독교가 온 세계를 정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을 통하여 구라파와 소아시아에 복음이 증거 되고 이것이 소아시아와 구라파와 세계를 복음화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 바울입니까? 그것은 바울이 생명을 낳기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짊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느 사도 보다 바울은 더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죽음의 멍에를 짊어지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사망은 그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신비한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어느 교회 가든지 목사님의 설교가 굉장히 은혜로우면 그 배후를 알아보면 그 목사님이 고생을 많이 한 분인 것입니다. 목사님이 교육을 많이 받아 석학 박사학위를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아무리 유식하게 설교를 한다 해도 아무런 은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편안하게 인생을 산분인 것입니다. 많은 눈물과 고통과 괴로움을 겪은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우리에게 넘쳐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포도송이를 입에 넣고 굴리면 아무 맛이 없습니다. 터뜨려야 단맛이 나옵니다. 호두를 손에 넣고 아무리 돌려도 안에 있는 살을 먹을 수 없습니다. 망치로 때리면 아주 보드랍고 달콤한 속살이 나오지 않습니까? 여러분 향 기름을 얻으려면 감람열매를 찧어야 되는 것입니다. 찧어야 향 기름이 나옵니다. 주의 종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얻어터지고 깨어지고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한 사망을 체험한 사람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망은 주의 종에게 역사하고 생명은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과 생명의 역사는 서로 손을 잡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망이 역사하는 곳에 생명이 나타나고 생명이 나타나는 근원을 보면 사망의 원줄기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그렇게 위대한 생명의 역사를 나타냈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복음이 마케도니아를 통하여 온 유럽에 전파되고 소아시아를 통하여 아시아 전체에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일을 하게 된 이유는 바울선생이 무지무지한 사망의 고통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 7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선생은 자만할 만해요. 아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로마시민이었습니다. 산헤드린회원이었고 그는 하나님의 엄청난 묵시와 계시를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고난의 이유와 그 원리를 설명하신 어른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이 그는 교만해 질 수 있는 모든 환경이 있습니다. 교만의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하기 않기 위해서 하나님이 극심한 고통을 통해서 바울을 쳤기 때문에 그는 그 고통 가운데 교만할 여과가 없었습니다. 너무 괴로우니까 주야로 하나님의 도움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교만과 오만이 그를 사로잡을 수 없었고 그는 언제나 하나님 품안에서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용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한국 교회 통계를 보면 1996년 국민소득 1만 불이 넘었으면서 교회 출석률이 40%로 떨어졌습니다. 반수이상이 주일날 들로, 산으로, 사업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기도원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국민소득 만 불이 되고 난 다음 기도원 출석률이 30%로 떨어져서 많은 시설이 열악한 기도원은 문을 닫아야만 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나라 교인 출석률이 가장 좋았던 때는 6.25사변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온 국민이 어마어마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을 때 교회 출석률은 95%였습니다. 고난이 닥치자 그 영혼에 구원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입니다. 사람은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편안해지면 하나님의 나라와 신앙은 악세서리로 변화되고 본업이 안 됩니다. 부업이 됩니다.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좋고 서서히 부업이 되는 것입니다. 억센 고난이 다가와서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부업이 되던 신앙이 본업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벽에 주님께 나와서 부르짖게 되고 고통스러우니까 금식하고 철야하고 기도원에 가서 외치고 몸부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란 사망의 세력이 오히려 변화되어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편안하면 하나님을 떠나서 마귀를 따라가고 세상을 따라가고 탐욕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세상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쳐다보고 생명의 원천 되시고 구원의 능력되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의지하게 되어서 오히려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역설적인 역사가 있습니다. 교만의 가시넝쿨 속에서 복음의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사도바울 선생은 억센 고통을 당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자만심이 깨어져서 하나님만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 나는 산헤드린 회원이다.” 유대인의 국회의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교육도 최고로 받았고 헬라철학과 로마법에 정통한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께 계시를 엄청나게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리를 깨달은 사람이다. 이만하면 나는 자격이 있고 이만하면 나는 당당하다.” 자만심이 생길만합니다. 그러나 바울 선생에게 다가온 사망의 고통이 얼마나 컸기 때문에 자만심이 다 연기와 먼지가 되어서 사라졌습니다. 자만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 앞에 납작하게 깨어지고 엎드려서 주야로 주의 도우심을 간절히 간구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은 이렇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신이 너무 아파 목숨 걸고 하나님을 찾았고 그 때문에 신령하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 8~10에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선생 같은 분이 세 번 주께 부르짖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우리 평범한 신자들이 세 번 기도했다 해도 굉장한 기도인데 바울선생이 한번 목숨을 다하여 기도하고 또 두 번째 또 몸부림쳐 기도하고 세 번째 또 몸부림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 이 고통에서 해방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대답하기를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네가 강하면 하나님 의지하지 않지 않느냐. 네가 약해져야 나를 의지하므로 내가 너를 도와줄 수 있지 않느냐.” 강하면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식을 키워 보십시오. 아주 지혜 있고 총명하고 좋은 학교 나오고 출세해서 나가면 부모 의지하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전화도 안 걸어와요. 편안하면 아주 부모 잃어 버려요. 누가 부모 의지합니까? 병들고 병약하고 혹은 불구가 되고 공부도 못하고 세상에 나가면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자식은 아버지, 어머니 부여잡고 “아버지, 어머니 없으면 나는 못살아요. 나는 어떻게 하지요? 아버지, 어머니!” 이러면 아버지, 어머니가 목숨을 바쳐 못난 병신자식 위해서 온갖 힘을 다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병신자식 때문에 일생을 바치는 아버지, 어머니가 얼마나 많아요? 왜, 아버지, 어머니에게 목숨을 바쳐 의지하기 때문에. 건강하고 잘난 자식은 의지하지 않지만 병신자식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의지하기 때문에 그 자식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잘났다 하고 내 자만심 가지고 오만하게 자기의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의지하고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붙들어 줄 수 없으나 힘들고 고통당하고 괴로움을 당하여 의지할 곳 없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은 주님이 끌어안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울선생보고 말했습니다. “네가 고통스럽고 괴로우므로 나를 찾지 않느냐.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 그래야 네가 나를 의지하지 않느냐?”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 이니라”
우리 신앙생활이란 세상에 약할 때 신앙은 강해집니다. 세상에서 부귀, 영화, 공명을 누리고 잘난 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부업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은 신앙이 약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고난당하고 괴로움을 당해서 세상 등지고 주님 바라보고 주님 의지하고 주님 믿는 것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은 신앙이 강합니다. 신앙이 깊고요. 그런 사람을 주님께서 품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더 많은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더 많은 고난을 하나님은 허락한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적게 일어나는 사람은 적은 고난을 가합니다. 생명의 역사가 제법 많이 흘러나려면 제법 많이 깨뜨리기 위해서 제법 많은 고난이 오지요. 크게 주님이 사용하는 사람은 큰 고난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사망이 몸에 들어와서 그를 깨뜨리고 짓밟으므로 터지고 깨어져서 그는 온 전신을 다하여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주의 도우심을 바라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들어 크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중국에 유명한 신학자요, 복음전도자였던 리토 숭 목사님은 너무 몸이 약해서 의사들이 30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 온 몸 전체가 병 백화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루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30을 넘기지 못한다고 하는데 하나님 이 고통과 괴로움에서 나를 놓아 주십시오. 치료하는 하나님 나를 치료해 주십시오.” 그러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앞에 큰 바위가 생겨서 배가 못 지나가게 하는데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야, 내가 이 바위를 옮겨주랴? 물을 높여 주어서 바위 위로 물이 흐르게 해서 바위 위를 지나가게 하랴? 네가 택해라!” 그래서 리토 숭 목사님은 꿈에 “주님, 바위를 옮기는 것보다 양자강물이 부풀러 올라와서 바위 위로 흐르게 해서 배가 지나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물이 높아지면서 배를 타고 바위 위를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네 일생도 이와 같다. 병은 바위와 같다. 병은 옮겨주면 은혜는 그 정도밖에 안되지만 병은 그대로 두고 은혜를 넘치게 해서 병을 이기게 만들어 주면 네가 더 큰 역사를 할 수 있다.” 그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내게 병이 있고 연약함이 있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은혜를 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시기 위해서 그런 줄 압니다.” 더욱 주님께 매달렸는데 그가 중국 부흥에 큰 역사를 베풀었고 30대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로 말미암아 병을 극복하고 80이 넘도록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과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주님을 찾으면 주님은 고통과 괴로움보다 더 큰 은혜를 주셔서 고통과 괴로움이 오히려 우리에게 복이 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더 많은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더 많은 고난을 하나님이 허락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0~12에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 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정말 역설적인 것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죽은 그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예수 부활처럼 우리 속에도 생명이 넘쳐나서 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에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선생이 하나님 사업을 버렸나요? 그 모든 고생을 극복하도록 자꾸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바위가 생기면 그보다 더 높은 은혜의 물결을 주셨습니다. 수많은 고통이 다가오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수많은 은혜를 주어서 그 은혜를 통하여 생명의 역사가 넘쳐나서 구라파와 아시아를 복음화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생명의 역사를 나타내는 종은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사망이 있어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고난이 있어야 우리가 기도하게 되고 신령한 은혜 속에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역사는 고난이 있고 난 다음에 축복을 주어서 형통하게 하시고 형통해서 자만하고 교만해서 하나님을 떠날만하면 또 고난을 주셔서 회개하고 깨어지게 하시고 이러므로 형통과 고난을 형제간처럼 손을 잡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난이 왔느냐. 부르짖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축복을 주셔서 형통하게 되시고 형통해서 하나님을 잊어 버렸느냐. 고난이 와서 깨뜨려서 다시 주님 속에 서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햇빛이 좋잖아요. 햇빛이 쨍쨍 비취는 것 얼마나 좋아요? 비가 오는 것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잖아요. 그러나 햇빛만 비취면 어떤 나라도 사막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고 모래만 휘날리는 사막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햇빛이 비췬 후에 비가 와야 땅이 축축해서 수목이 살아나고 열매를 맺고 사막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햇빛이 쨍쨍 뜨는 형통만 있을 뿐 아니라 고난과 괴로움의 장맛비도 오고 폭풍우도 다가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밸런스가 잡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 8~10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큰 역사를 아시아에 나타내기 위해서 큰 죽음이 다가 왔습니다. 아예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고통이 왔기 때문에 엄청난 간구와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고 매달렸기 때문에 하늘 문을 여시고 은혜를 폭포와 같이 부어 주셔서 아시아 전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고난이 반드시 우리에게 손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 우리를 하나님의 은총 속에 몰아넣는 몽학선생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아프리카계 미국시민인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 보면 한때 목사님이 백인들의 위협으로 두려움에 떨었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몽고메리 버스 스트라이크’를 주도하고 있을 때 많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테러와 폭파 협박을 해왔습니다. 그들이 협박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던지 킹 목사님이 두려운 마음에서 이제 이 일에서 손을 떼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번 주님께 기도해 보고 손을 떼겠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려왔습니다. “마틴 루터 킹, 루터야 정의를 위해 일어서라. 평등을 위해 일어서라. 진리를 위해 일어서라. 보라 세상 끝 날까지 이제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결코 너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 싸움을 계속하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 평등 권리를 위해서 주장하기 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시민인 흑인들은 굉장히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백인과 함께 버스를 타지 못하고 식당에서도 백인과 함께 섞여서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을 당하고 슬픔을 겪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 자녀 세대에서는 결코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살게 하겠다.” 그래서 그가 일어난 것입니다. 킹 목사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사라지고 어떤 어려움에도 의연히 대처하겠다는 용기가 넘쳤습니다. 결국 그는 백인들의 위협과 협박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흑인 해방운동과 비폭력 저항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암살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많은 위협과 고통을 감례하면서 흑인해방운동을 부르짖었고 결국에는 총에 맞아 죽었지만 오늘날 흑인은 그로 말미암아 인권,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된 것입니다. 미국에 이제는 차별이 없습니다. 차별대우를 법적으로 못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날은 미국 대통령까지 축하하고 미국에서는 경축일로 그날을 공휴일이 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자유와 해방을 가져온 이 역사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뤄진 것입니다.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해방과 자유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 있어 많은 자유와 해방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사망을 통해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자녀들이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면 그 고난을 통해서 위대한 생명의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도 어떤 장로님이 은혜롭습니까? 고난을 많이 통한 분인 것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어떤 안수집사님이, 어떤 지역장, 구역장이 가장 은혜롭습니까? 많은 슬픔과 고난과 눈물을 흘린 사람이 은혜로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가시떨기에 붙은 불
셋째로, 가시떨기에 붙은 불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모세가 광야에서 양을 치는데 메마른 광야에 가시떨기에 불이 붙어서 타는데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놀래서 구경하러 가니까 가시떨기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가시 떨기라는 것은 재목으로도 쓸 수 없고 뗄 감으로도 쓸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가시넝쿨입니다. 가시넝쿨에 불이 붙으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우리는 누굽니까? 우리는 전부 가시넝쿨 같은 사람입니다. 재목이 되지 못합니다. 뗄 감도 되지 못한 죄 덩어리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 속에 하나님의 성령의 불꽃이 와서 활활 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가 만들어져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깨어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들은 다 탐심과 욕심의 가시떨기 속에서 태어나서 살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마귀를 바라보고 세상을 따라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시떨기입니다. 우리가 돌아와서 하나님 성령의 불이 붙기 위해서 돌이키기 위해서는 고통이 다가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회개하지요.
우리들은 항상 자기의 쾌락과 행복을 생각하고 인생성공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용의 가치로 생각합니다. 오늘날 왜, 구라파가 저렇게 황무지가 되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이용가치로 생각하는 공리주의로 떨어졌기 때문에 오늘날 구라파는 가시넝쿨만 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습니다. 깨어져야만 하나님이 들어올 수 있는데 하나님을 이용만 하면은 하나님이 들어와서 역사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가시떨기 속에 구원의 불이 붙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고난 사망의 세력이 압박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그러면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서 우리에게 생명이 나타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 나는 광야의 가시떨기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알아줍니까? 나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다가와서 “우향우!” 세상에서 돌아서고 마귀에 돌아서서 주님을 향하게 되면 성령의 불이 가시떨기 속에 붙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시편 9:13에 “야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사망의 문에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3: 3에 “야훼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사망의 잠을 자는 사람이 다 세상사람 아닙니까? 사망의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고통의 채찍이 와서 때리면 사망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눈을 비비고 주님을 찾고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38:17에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큰 고통 온 것은 내게 평안을 주기 위해서 고통을 주신 것이다. 나를 죽이려고 고통을 주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고통의 결과로 내가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고 하나님을 찾으면 평안을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자로 칭송받는 성 프란시스는 본래 부잣집 아들로 부족한 것을 모르고 자라났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또래의 청년들과 함께 허랑방탕하고 술 취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큰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세상 가는 길을 돌이키고 하나님께 나와서 회개하고 주님께 간절히 찾고 부르짖는 결과에 중생하고 변화되고 나중에 그는 온 일생을 바쳐 하나님을 섬기는 성자가 된 것입니다. 유명한 문학가 존 밀턴도 실명 후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고 은혜를 받아 유명한 「실락원」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썼습니다.
미국 흑인노예해방에 큰 영향을 미쳤던「Uncle Tom's Cabin」이라는 책을 지은 스토우 부인의 고난을 통해 이 위대한 일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 흑인해방운동을 문학적으로 격려한 분이 스토우 부인입니다. 스토우 부인이 지은 책은 미국에 널리 읽혀졌고 명작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도 이 책을 읽고 노예해방에 전진적으로 앞에 나갈 수 있는 결단을 내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딸을 하나 낳았는데 금지옥엽 귀한 딸이 갑자기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스토우 부인은 딸을 잃은 슬픔에 빠져 절망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흑인들이 생각났습니다. 자신은 딸이 죽어서 이별하여 이렇게 슬픈데 흑인들은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노예로 끌려와서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딸은 딸대로 뿔뿔이 노예로써 팔려나가 이별을 당하고 생이별의 슬픔을 가슴에 쓰리게 안고 사는데 이 얼마나 가혹한 일이냐. 자기 딸이 죽고 난 다음 딸의 죽음을 통해서 흑인은 해방되어야 되고 노예제도는 철폐 되어야 된다는 깊은 신념으로 그가 책을 지은 것이 바로 「Uncle Tom's Cabin」인 것입니다. 이때부터 스토우 부인은 흑인들이 더 이상 비참하게 이별하지 않도록 해야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출간되므로 백인들이 흑인의 처지를 공감하고, 노예 해방 운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고통을 통해 생명을 낳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속에 육신에 사망이 다가와야 생명의 불꽃이 피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속에 꽉 잠겨서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누가 세속과 탐욕에 찌들어진 인생을 돌이켜서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것입니까? 고통의 채찍이 그렇게 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 더 돈 많이 벌고 더 부귀하고 더 영화를 가지면 영영 하나님께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말씀하기를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말한 것입니다. 왜, 세상 부귀, 영화, 공명이 다 있어 세상에 찌들어져 있으니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귀, 영화, 공명을 다 잃어버리게 되면 누구를 찾습니까? 하나님을 찾게 되고 오히려 하늘의 부요한 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당할 때 생명의 주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호세아 5:15에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죄를 지으니까 하나님이 회개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굴을 감추어 버리겠다. 그래서 고난을 보내면 고난당하고 괴로우면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나올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편 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말했으며 시편 119:71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67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여러분! 저는 정근모 박사의 자서전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챤이고 싶다」를 읽어 보았습니다. 정근모 박사는 세계적인 원자학자입니다. 그는 장로이고, 과학처 장관도 했고, 현재는 명지대 총장으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국제 해비타트운동 한국지부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 최고의 석학들이면 한림원 원장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정근모 박사는 어릴 때부터 얼마나 머리가 좋았던지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20대에 미국에 건너가서 유명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5세에 이미 미국 명문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은 정근모 박사에게 ‘꼬마 교수’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 있었습니다. 아들 하나가 어려서부터 병으로 고생해서 중대한 수술을 6번이나 했습니다. 나중에는 정근모 박사가 자신의 신장 하나를 떼어서 아들에게 주었지만 결국 아들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인간의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의술이 발달하고 자신이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지만, 자식의 병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절감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깨어져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정근모 박사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인생의 고통스런 경험이 때로는 귀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인생의 시련이 없었더라면 나도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아들의 고통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교훈으로 “시련을 만나거든 기도 하십시오”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가시떨기 같은 탐욕에 사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찾고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시련이 다가와야 되는 것입니다. 정근모 박사와 저는 친한 친구입니다. 만날 때 마다 나는 그가 얼마나 신앙심이 깊고 하나님께 겸손하고 모든 것을 맡겨서 주님을 섬기는 훌륭한 분인 것을 느낄 때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얼마든지 교만하고 오만하고 자만할 수 있는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고통과 시련이 그로 하여금 가시넝쿨 속에서 성령의 불길이 타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가시떨기 속에서 구원의 불이 붙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 크고 작은 고난 즉 사망의 세력이 압박해야 합니다. 고통 속에서 구원의 불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페스탈로치는 ‘고난은 풍족을 가져온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져온다. 만일 행복하였더라면 나는 결코 성숙되지 않았을 것을 고난이 나를 성숙하게 만들었다’고 말했으며 독일의 격언은 ‘고난은 기도의 선생’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난당하면 안 가르쳐 줘도 기도해요. 왜, 고난이 기도의 선생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스위스의 법학자요, 철학자인 힐티는 말하기를 “대게 행복한때보다도 고난의 때에 하나님은 더 가까이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때보다 고난에 처한 때가 신앙에 더 좋은 때라”고 말했습니다.
<결론>
탐욕의 가시넝쿨 속에 사는 우리가 순수한 신앙의 불길을 가슴에 품기 위해서는 강력한 육신의 고통이 다가와야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비록 탐욕과 욕심의 가시넝쿨 속에서도 회개하게 되고 반성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과 고통의 위협이 가해질수록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생명의 주님을 간절히 찾게 되고 그 생명의 은혜로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많이 제게 묻습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 믿게 되었냐구요. 저는 17살에 폐병 3기에 걸려서 죽음으로 내동이치지 않았으면 결코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닙니다. 대대로 불교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불신앙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가문에 있을 수가 없는 수치로 생각하고 결코 예수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폐병에 걸려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습니다. 좌절과 절망에 있을 때 살고 싶었습니다. 의학도 세상도 가문도 나를 고쳐주지 못할 때 나는 살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그때 내가 당한 정신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부르짖고 찾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고 난 다음 사망의 압박에 의해서 회개하고 깨어지고 예수 믿은 결과로 주의 종이 되고 생명의 역사를 온 천하에 나눌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돌이켜 볼 때 사망은 오히려 큰일을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 안에서는 사망은 오히려 생명을 산출하는 도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병실에 걸린 시를 보고 굉장히 마음에 감동을 입었습니다. 그 시를 이곳에 가지고 나왔습니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틀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들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친구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인간 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데 힘겹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써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하고 가난한 사람을 동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세상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놀라운 시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고난이 생명을 산출하는 어머니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
고후04장 11절 / 조용기목사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11~12)
<서론>
“질그릇에 담긴 보배”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품고 계신 보배인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제2위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 품에 계시다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사람으로 태어나 33년 동안 이 세상에 사시면서 온갖 고초를 다 겪었으나 죄는 짓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죄, 불의, 추악,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받아야 될 고통을 대신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청산했으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우리의 보배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보배가 되어서 우리 속에 계시면서 언제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천국으로 데려가는 역사를 베풀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누가 있느냐. 우리 안에는 우리 마음이 있고 우리 마음은 생각을 하는데 무슨 생각을 하느냐. 나를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마음속에 하루에 5만 가지 내지 6만 가지 생각을 합니다. 오만 생각 다한다지 않습니까? 그 생각 속에는 부정적인 생각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능력이 없다. 실력이 없다. 돈이 없다. 그런 생각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므로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계실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질 따름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가 죄 대신 의, 허물 대신 거룩함, 질병 대신에 치료와 건강, 저주 대신에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 지옥 대신에 천국 이러한 영광으로 마음속에 채워 놓으면 우리 마음속은 항상 보배로써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보배가 하나님 성령에 의해서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역사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질그릇에 담겨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배가 되시면 어떻게 되는지 성경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방으로 욱여싸는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8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사방에서 압력을 당해도 질그릇인 우리가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보배이신 예수가 계시고 그 예수님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는가 그 바라봄의 법칙을 쫓아서 그 상대가 우리 생애 속에 이루어지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신 보배이신 예수님을 힘차게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는 예수님을 힘차게 바라볼 때 자기도 물 위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환경을 바라볼 때는 그는 물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명력이 죄와 허물의 압력도, 병의 압력, 저주와 고통의 압력, 죽음의 압력 등을 무력화시킬 수 있도록 힘차게 예수님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이 와서 물어서 죽일 때 불뱀에 물려서 퉁퉁 부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범죄한 것 용서하고 살려달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장대에 불뱀을 내달라고 했습니다.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 높이 달았을 때 그를 바라보는 자는 다 낫는다. 여러분, 바라보는 것이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지만 바라보면 그 상대 바라보는 상대가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요사이도 우리가 텔레비를 통해서 보면 여러 가지 세속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사진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 그와 독이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어도 구원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종일 지나면서 예수님을 늘 마음속에 바라봐야 돼요. 그러면 사방으로 욱여싸도 싸이지 않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우리 신학교에 와서 채플에 설교를 해주기를 늘 바라고 그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 굉장히 은혜가 되었습니다. 김상호 목사라고 충청도지구에서 주로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 했는데 이 목사님의 이야기는 굉장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6.25 때 얼마나 춥고 눈이 많이 오고 그랬는데 상간 벽지를 돌면서 전도를 하고 부흥회를 하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충청도 어느 산골짜기에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손전등도 없고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데 길을 잃어서 방황하다가 보니까 지치고 피곤해서 이제는 바라볼 것이 죽음밖에 없었습니다. 영 지치고 절망적이 되어서 그는 눈 속에 쓰러지면서 마음속에 십자가를 바라보았었습니다. 주님, 내가 이 눈에 파묻혀서 죽는 것은 너무 억울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면 복음을 전하다가 죽어야지 눈에 길을 잃고 죽으면 되겠습니까? 그 말을 약간 기억하고 그냥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눈 속에서 잤는데 아침까지 굉장히 훈훈하고 좋거든요. 그래서 눈을 뜨려고 하는데 누가 얼굴에 세수를 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보니까 큼직한 범이 밤새도록 안고 아침 기상 시간이 되니까 세수를 시켜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 김상호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보통 때 같으면 겁이 나야 되는데 하나도 겁이 안 났다고 합니다. 마음이 얼마나 훈훈한지. 그래서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아버지! 밤에 자는 동안에 날 보호해 달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살아있는 범을 보내서 나를 이렇게 끌어안고 평안하게 잠을 자게 해주신 것 감사하고 호강을 보태어서 범이 세수까지 해주시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리고 범아 참 고맙다. 너에게 누룽지라도 하나 줬으면 좋겠는데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일어나니까 범이 일어나더니만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발톱을 이렇게 적게 잡고 뒷걸음질치면서 서서히 물러갔어요.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는 그것이 진짜 범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천사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천사가 자기를 범의 형상으로 만들어서 나타났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그에게 다가왔을지라도 예수님이 속에 계시니 범이 김상호 목사 좋아서 안았겠습니까? 김상호 목사님 속에 계신 예수님이 좋아서 안았겠지요. 여러분 속에 예수님이 계시면 천사들뿐 아니라 온 하늘의 능력이 여러분을 돌봐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로 9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정말 하나님이 날 사랑할까? 그런 질문 자꾸 합니다. 정말 나를 사랑하고 계실까? 정말 나는 사랑받는 사람일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증거를 내세우는 것은 죄인 되었을 때 그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은 사랑의 표적이 아니고 뭐냐. 사랑도 안 하는데 여러분 대신해서 십자가 걸머지고 죽을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시편 118편 8절로 11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야훼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야훼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야훼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그들이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야훼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는데 하나님이 아람왕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올 기미를 보이면 엘리사에게 낱낱이 정보를 유출했습니다. 엘리사가 정보를 가지고서 이스라엘 왕에게 군대를 여기에 배치시키십시오. 진지를 여기에 만드십시오 해서 아무리 해도 아람이 이스라엘을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람왕이 제직회를 열면서 하는 말이 우리 가운데 스파이가 있다. 그렇지 않고는 이스라엘 왕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 리가 있느냐. 우리 가운데 스파이를 색출하라. 그러니까 부하가 하는 말이 왕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하나님의 종이 있어서 왕이 침상에 들어가서 머릿속에 생각하는 것 다 알아내어서 이스라엘 왕에게 다 알려줍니다. 그러니 우리가 작전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엘리사를 잡으라. 사람을 보내어서 엘리사가 어디 있는지 살펴보니 도단이라는 성에서 엘리사가 밤을 새운다는 소리를 듣고 밤새도록 군대를 동원해서 군대가 총동원되어 도단성을 둘러쌓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엘리사의 종이 일찍 나와서 스트레칭을 했습니다. 아~ 어? 온 천지에 깃발천지입니다. 그 무슨 깃발인가 보니까 아람 군대의 깃발이 온 천지에 가득해요. 첩첩이 둘러싸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죽었지요. 그래서 그는 벌벌 떨면서 ‘엘리사 선생님 우리는 죽었습니다. 온 천지에 아람군대의 깃발이 꽉 찼으니.’ 걱정하지 마라. 내가 다 알고 있다. 알고 계시면 뭐합니까? 둘러싸였는데. 여기 앉아라. 앉혀 놓고 하나님 아버지, 이 청년이 눈을 떠서 보게 해주시옵소서. 청년의 눈의 영안이 열리니까 저 아람 군대와 엘리사 사이에 하늘에서 불말과 불병거가 온 산천을 덮었습니다. 그 사이를 꽉 메워서 있으니까 엘리사가 그 종보고 하는 말이 저들보다 우리와 같이 하는 분이 더 많지 않느냐. 걱정하지 마라. 천천히 세수하고 나오니까 적군들이 다 따라옵니다. 그 적군의 한 병사가 와서 여기에 엘리사가 잔다고 하는데 엘리사가 자는 곳을 아느냐. 잘못 찾았습니다. 성도 잘못 찾았고 사람도 잘못 찾았습니다. 날 따라 오십시오. 그러니까 쭉 따라옵니다. 이스라엘의 수도로 이끌고 와서 ‘전부 여기 앉으십시오. 내가 엘리사를 찾게 해줄테니까.’ 그래서 사마리아에 이스라엘 수도인데 거기에 수십만 군대가 따라와서 앉아있는데 나타난 것은 이스라엘 군대가 그들을 애워싸고 이스라엘 왕이 나와서 엘리사보고 이 놈들을 다 칼로 칠까요? 어떻게 할까요? 보니까 적군의 서울에 들어와 있어요. 그러더니 엘리사가 하는 말이 우리가 칼과 창으로 이 사람들을 포로로 잡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밥 잘 먹이고 대접 잘해서 보내십시오. 그래서 전쟁이 아니라 파티가 이루어졌고 잘 먹고 잘 마셔 고맙습니다 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난 다음 다시는 쳐들어오지 않았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적군이 우리를 둘러 진 치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보배가 너무나 크므로 예수님 지키기 위해서 천사들이 와서 우리를 둘러 진 치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천사들이 끊임없이 여러분과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보호하는 천사만 같이 계신 것이 아니라 이번에 독감이 심하니까 주사도 맞아 놓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독감 주사 개발해서 맞도록 했으니까 독감 주사도 맞는 게 좋습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그다음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내어 맡겨야 합니다. 내가 왜 이 말을 하냐면 갑자기 기억이 나네요. 어떤 분이 내게 와서 목사님, 독감 주사를 맞아야 합니까? 안 맞어야합니까? 그냥 믿습니다로 지내면 안 됩니까? 맞아야 합니까? 목사님은 독감 주사를 맞았습니까? 안 맞았습니까? 나는 우리 교회 의사선생님이 맞으라고 해서 한번 맞은 것이 아니라 두 번이나 맞았다. 그럼 맞아도 괜찮군요? 그 생각이 납니다. 면역을 가져오는 피부 속에 있는 역사가 우리를 둘러 진 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병에 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하간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지고 있으니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 속에 와 계신다는 것을 늘 머릿속에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속에 와서 같이 죽었으므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나도 죄에 대해서 세속에 대해서 마귀에 대해서 질병에 대해서 저주에 대해서 다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 부활할 때 그리스도 옷자락 잡고 같이 부활한 것을 상상하십시오. 여러분 신앙은 생각이 굉장히 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생각을 예수님께 드려서 예수님이 내 마음의 생각을 꽉 부여잡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저의 설교를 듣고 있어도 마음속에 설교를 듣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생각하고 몸 찢고 피 흘리신 예수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생각을 통하지 않으면 그냥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각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다가오고 꿈을 통해서 여러분을 안아주며 믿음을 통해서 여러분과 같이 있고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여러분과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입술의 고백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내 입의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힌 다고 여러분 입술로 말을 하면 그 말이 여러분 주변에 성령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반드시 여러분 생각이 있어야 여러분에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꿈이 있어야 성령이 역사하지 꿈도 없는 사람은 성령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믿어야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얼마나 간단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을 믿고 예수님이 날 사랑하는 것을 믿으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여러분 통해서 역사하고 말을 해야 창조적인 말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여러분 꼭 모든 속에 있는 육신의 감각이나 수단이 아닌 영적인 하나님의 수단을 통해야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왔는데 여러분 개인의 생활이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부도가 나고 싸움이 걸리고 고통을 당하고 수렁에 빠지고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먼저 주님을 생각 속에 모셔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내 마음속에 들어오사 내 인생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생각을 주님께 바치면 여러분 생각을 통해서 주님이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하늘을 쳐다보고 여러분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사망에서 벗어나서 생명 속에 들어오고 건짐을 받아 주님이 여러분을 둘러 진 치고 있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생각,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의 꿈을 이루어주고 그다음에는 사랑을 베풀어 주고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말씀을 통해서 환경을 만들어 주시고 여하간 여러분은 하나님께 보호를 받고 하나님이 둘러 진 쳐서 사방으로 우겨 싸이지 않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께서 저희 안에 계시므로 둘러싸이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지금 들어와 계시므로 우리는 둘러싸이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은 축복으로 우리를 둘러 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가 우리를 둘러 진 칠 뿐 아니라 원수가 우리 사이에 하나님의 사자가 둘러 진 친 것은 우리 속에 보배인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2.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
그다음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씀한 대로 답답한 일을 당합니다.
내가 불광동에서 목회할 때 오랫동안 꿇어앉아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가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몸을 움직이면서 어떻게 저렇게 뜨겁게 열심히 기도하느냐고 가서 들어보니까 답답해 답답해 답답해. 보리 보리 보리 가을보리. 답답해 답답해 답답해. 보리 보리 보리 가을보리. 그래서 내가 자매님! 아이고 놀랬네! 무슨 기도가 답답해 답답해 답답해. 보리 보리 보리 가을보리. 그게 무슨 기도가 그런 것이 있습니까? 목사님 설교를 하는데 내가 아무리 들어도 무슨 말인지 뜻은 알 수가 없고 나의 어려움은 점점 더 다가오고 답답하기가 짝이 없는데 자꾸 갈보리를 믿으라고 하는데 봄보리는 있어도 가을보리는 없는데 자꾸 가을보리를 믿으라고 하니 내가 답답하지 않을 수 있나요?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 가르쳐 달라고 답답해 답답해 답답해. 보리 보리 보리 보리 가을보리. 하나님 봄보리는 있는데 가을보리는 없는데요.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을보리, 봄보리가 아니고 갈보리라는 산위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섰으므로 그것을 갈보리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알아야 알지 공부를 안했으니 내가 알 수 있느냐.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봄보리, 가을보리를 분별을 못하면 안 되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답답한 일을 많이 당합니다. 그런데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보배가 우리 속에 있으면 가을보리, 봄보리가 아니라 어떤 보리가 다가와도 우리를 둘러 진 쳐서 우리를 파멸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삶의 수고로운 짐과 문제 때문에 괴로움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서 이기시고 우리 안에 계심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고 구하면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 용기와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답답한 일을 당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힘차게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능력과 권세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축복의 능력이 우리를 둘러 진 쳐서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4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여러분 안에 계신 주님이 모든 면에 마귀를 이기고 승리자로써 여러분 속에 와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언제나 승리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승리자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을 통하여 이기게 하시고 또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굉장한 은혜가 되는데요. 시편 27편 1절에 “야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야훼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야훼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빛과 구원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있는 채소 있지 않습니까? 김치 담궈 먹는 무나 모든 채소 그보다도 많은 바다 풀, 이것은 엽록소라는 요소를 통해서 햇빛을 받아야 산소동화작용을 통해서 양분을 만들어 냅니다. 이 엽록소가 햇빛을 받아가지고서 양분을 만들어내면 동물들이 그것을 먹고 살이 포동포동하면 여러분이 잡아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부 무엇을 먹고 사느냐. 빛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을 비춰주므로 빛을 받아서 양분이 생겨나고 그 양분이 풀을 통해서 동물들에게 먹여지고 동물들은 사람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빛은 우리의 육체적인 양식이 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빛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니 나는 생명수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생명의 빛이 되어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먹으면 여러분의 인생이 빛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훼 하나님은 여러분의 빛이 되고 구원이 되고 하나님이 같이 계셔서 하나님을 잡숫고 삶으로 말미암아 아무도 여러분을 감당할만한 힘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의 능력으로 모든 원수를 물리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절로 2절에 보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바라보고 그렇게 인정을 해야지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피난처는 우리가 원수가 우리를 둘러쳐 오면 원수를 피하는 넓은 의미에서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새는 그보다 좁은 의미로써 적군들 안에 성을 치고서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적군이 몇 겹 둘러 진 치고 있어도 문제가 없는 것이 요새입니다. 그다음에 의뢰하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므로 오늘날 경제적인 어려움이 다가와도 대개 이 나라에서 그것을 피할 수가 있고 홍수가 다가와도 홍수에 함몰되지 않게 지켜줄 수 있는 그러한 곳을 피난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새는 강합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같은 이런 한정된 곳을 강하게 만들어서 군대가 지키고 있는 것은 요새입니다. 그다음 의뢰하는 하나님, 이것을 매일 아침 일어나셔서 외치십시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야훼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시니 내게 두려움이 없도다. 내 입의 말대로 될지어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입술에서 나오는 말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을 안 하면 속에 그냥 계시고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잡수셨지 않습니까?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속에 들어와 있고 구원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데 이것을 입술로 말을 하면 강력한 능력으로 여러분에게 나와서 여러분 주위에서 둘러 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을 이긴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으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면 항상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무엘상 17장 45절로 47절에 보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거기에 실제로 보면 칼 들고 이렇게 막 싸우는 일 없습니다. 말싸움으로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골리앗은 30대의 위대한 블레셋 장군이라 엄청난 장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니까 사울왕과 그 군인들이 벌벌 떨고 어찌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초립동인 17살쯤 되는 다윗이 목자의 도구를 들고 와 대신 싸우는데 골리앗을 향해서 그는 말싸움으로 기를 뽑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오는데 여기에 다윗은 목자의 도구밖에 없습니다. 물 멧돌이라는 물메끈에다가 돌 다섯 개 그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 얼마나 힘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밖으로 내놓는 것입니다.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보십시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가슴이 저리도록 말하지 않습니까? 여러분께서도 여러분의 원수와 싸울 때 말로써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에서 싸울 것은 없지 않습니까? 환경과 싸울 때 연탄불이 꺼졌으면 연탄불이 왜 꺼졌느냐. 꺼지지 말고 항상 활활 잘 타라.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런 말조차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입술로 사망의 세력을 멸하고 부패를 멸하고 패배를 멸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물학자가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 그것 아닙니까? 물 두 컵을 책상에 얹어놓고 한 컵에는 참 예쁘다. 잘생겼다. 신선하고 좋다. 한 컵에는 못생겼다. 썩은 물 보기도 싫다. 그렇게 욕을 하고 나중에 물을 조사해 보니까 칭찬한 물은 굉장히 아름다운 육각형의 형태를 가진 물이고 육을 한 물은 팍팍 썩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이 여러분 주위 환경을 얼마나 변화시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밥그릇 두 그릇을 갖다 놓고 한쪽 밥그릇을 보고 야~ 밥이 참 잘되었다. 참 맛있겠다. 참 이쁘다. 너는 참 훌륭하다. 칭찬하고 한 밥그릇은 밥이 잘 익지도 않고 네가 무슨 밥이냐? 보기도 싫다. 온갖 욕을 다 했습니다. 그리고 한 일주일 지나고서 두 밥그릇을 내서 보니까 칭찬한 밥그릇은 누룩이 되었는데 아주 좋은 누룩이 되었는데 욕을 한 밥그릇은 팍팍 썩었어요.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과 나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까? 60%가 물입니다. 자꾸 욕을 하면 물이 썩지 않습니까? 밥도 썩는데. 그러므로 상대와 싸우려거든 주먹으로 때리고 그렇게 하지 말고 입술로 욕을 하면 썩어버려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있는 환경도 자꾸 축복을 해요.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하고 축복을 해서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만들어 가야 되고 여러분 자신을 여러분이 축복하는 것 참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축복을 안 해줄지 몰라도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는 인격자가 있어서 다른 사람이 축복을 해주면 좋겠지만 아무도 보고 축복을 안 해주는 사람 같으면 내가 나를 보고 축복해주는 거예요. 너 참 잘생겼다. 힘 있게 생겼다. 건강하게 생겼다. 복 받게 생겼다. 너 꼭 복을 받을 것이다. 저는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거울을 보고 난 다음에 물로써 얼굴을 닦고 난 다음에 그래도 잘 생겼다. 기분 좋지. 건강해야 된다. 하나님이 건강 주신다. 늘 웃어라 웃어. 그렇게 말을 하고 나오니까 그 말이 오늘 지금까지 따라다니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고 했는데 여러분, 여러분의 입술로 하는 말씀이 여러분이 답답한 일을 당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아주 속이 답답할 때 여러분이 답답한 일을 당하지 않는 축복을 자꾸 이야기 하면 축복이 들어와서 답답한 일을 다 멸해주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
3.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는다
그 다음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한다.
핍박을 당하고 왕따를 당해 친구가 없고 사귀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최고의 친구 예수님이 계심에 적막하게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소외당하는 일이 많습니다. 더구나 요사이는 학교에 애들이 자기들 그룹에 들어오지 않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 소외당하고 구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데 상당히 핍박을 당하는 것은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중동에 가면 예수 믿는 사람하고 이슬람교도들하고 싸워서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죽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있는데 우리는 36년 동안 일본의 노예 하에 있었을 때 그때 우리 선조들은 핍박을 당했고 6.25 사변 때 예수 믿는다고 총살도 당하고 핍박을 당했는데 지금 우리는 제일 좋은 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 고통당하면서 축복한 그 결과로 우리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때보다 얼마나 잘삽니까? 그러니 우리는 절대로 주님께서 버리지 않고 우리를 붙잡아 주셔서 아시아에서 세계에서 이름난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줄줄 믿습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로 6절에 친히 이렇게 말씀했는데요. 참 아름다운 말씀인데요. 우리 함께 같이 읽으십시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결코 버리지 않는다. 그냥 말한 것이 아닙니다. 결코 너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예수 믿는 여러분에게 결코 버리지 아니하고 결코 떠나지 않는 분이 여러분 곁에 같이 계시므로 여러분은 결코 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주가 여러분을 돕는 자로 있으니 두려워 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아무리 박해를 당해도 결코 주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로 37절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장엄한 말씀인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나와 봐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사람이 누구인지 나와 보라.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주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많이 사랑을 해주시는지 그 사랑을 가지고서 세상에서 다가오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을 비교해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 세력들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이요 외롭지 않게 하나님의 친구로 여러분에게 같이 계시므로 일어서나 앉으나 복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써 복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한번 저 따라 말씀해 보세요.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복이 나를 따라온다. 축복받아서 기쁘다. 감사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행전 7장 9절로 10절에 보면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요셉 보십시오. 요셉이 그 마음속에 꿈을 버리지 않고 꿈을 품고 있으니까 어느 곳에 가나 형통했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꿈을 갖고 있으면 꿈이 나를 형통케 한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열한 번째인 요셉만 마음속에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꿈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요셉을 보고 뭐라고 말했습니까? 저 꿈꾸는 자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냥 요셉이라고 말하지 않고 저 꿈꾸는 자식 보라. 여러분 주변에도 여러분 친구나 이웃이 꿈 이야기하는 꿈꾸는 사람이 산다고 그렇게 말하면 욕이 아니라 칭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꿈이 우리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가지고 있으니까 종으로 팔려도 총리가 되고 감옥에 갇혀도 감옥의 총리가 되고 왕에게 불려가도 그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고 꿈은 그 길을 다 닦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하나님께서 아무리 사람이 박해를 당해도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돌봐주시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고 형제들이 저 꿈꾸는 자식이 오는 것을 보는도다. 우리가 저 놈을 죽여서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 꿈꾸는 놈을 죽여 버리면 꿈이 안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꿈꾸는 놈을 죽이려고 가보면 이미 꿈이 안 죽도록 길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이 있는 백성은 형통하게 되고 꿈이 있는 백성은 죽음의 길을 피하게 되고 잘살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꿈을 안 가져도 여러분 마음속에 전인구원의 꿈은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기를 간구하는 하나님이 계신다. 앉아도 전인구원 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것을 상상하고 서도 그렇게 상상하고 길을 걸어가더라도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상상하고 그 꿈을 꾸고 있으면 그 꿈이 여러분을 형통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도대체 여러분 마을을 빈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뿐 아니라 그 긍정적인 마음의 한가운데 꿈을 언제나 꾸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언제나 머리가 되고 꼬리가 안 되고 위에 있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축복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에게 꿈을 주기 위해서 와 계시며 언제나 꿈을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4.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이 세상에 살면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아니한다.
거꾸러뜨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 아닙니까? 거꾸러뜨림을 당한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때려눕힌다는 것입니다. 아예 사업상으로도 때려눕히고 사람으로서 때려눕히고 일이 때려눕혀서 죽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려눕혀 파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속에 보배로운 예수님이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으로 딱 버티고 있으므로 아무리 때려눕혀도 죽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2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부활했으니까 죄에서 부활하고 허물에서 부활하고 병에서 부활하고 저주에서 부활하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부활의 생명이 충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상상 속에 예수의 죽음을 우리가 끌어안고 걸머지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내가 예수의 죽음을 끌어안거나 짊어지면 예수 속에 부활의 생명이 넘쳐 나와서 우리 몸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치고 피곤할 때 드러누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날 위해서 죽은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이 예수님을 마음에 끌어안고 등에 업고 걸어가는 여러분 모습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몸속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끊으려야 끊을 수가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죽을 몸에 나타남이라. 습관이 되면 늘 그렇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늘 피곤하고 지치면 예수님을 등에 걸머지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우리 할머니가 저 보고 야, 용기야 어부바~ 어부바~ 그렇게 한 것이 늘 생각이 나서 예수님, 어부바~ 내 등에 올라타십시오. 어부바~ 그러면서 내 상상 속에 그리스도가 내 어깨를 잡고 내 위에 업혀지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내 마음속에 넘쳐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생각보다도 더 신비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이론이 아니라 실제인 것입니다. 내가 예수 죽인 것을 걸머짐은 예수의 생명이 내게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죽음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우리가 죽을 힘을 다해서 일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생각하고 죽을 힘을 다하여 일하면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 속에 가득하게 넘쳐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가 거꾸러져도 멸망하지 않게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요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어서 우리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전지전능한 주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축복을 받고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생명을 얻고 마음으로 생명을 얻고 육체의 생활에 생명을 얻고 어떻게 되든지 여러분은 이웃이 여러분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는 축복의 근원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입니다. 여러분은. 복 자체가 여러분 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속에 들어와서 버티고 있으므로 우겨 싸이지 않지요.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지요. 아무리 원수가 핍박해도 점점 축복이 되지요.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예수 생명이 와서 날 망하지 않게 하지요. 온전히 긍정적인 것만 나를 부여잡고 있지 부정적인 것은 없습니다. 싸이지 아니한다. 낙심하지 아니한다. 버림받지 아니한다. 멸망하지 아니한다. 나는 죄와 허물에서 용서받고 병에서 치료받고 건강하고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자요, 축복받은 사람이요, 나는 죽었다가 살아나서 영생을 얻은 자라. 여러분이 이것을 항상 마음속에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것은 마땅히 그렇게 될 것이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옵니다. 마음에 바라보는 것이 밖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마음에 바라보게 될 때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으로 살고 육체로 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품고 사는 것은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생각을 통해서 살고 꿈을 통해서 살고 믿음을 통해서 살고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사는 것은 눈에 안 보이는 마음을 통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내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 살고 탐욕을 통해서 살고 의심과 불안을 통해서 살고 욕을 하고 낙심하면서 살고 그러면 3차원의 세계에서 사는 것으로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엉망진창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면서 늘 마음으로 살면 그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4차원의 영성을 나타내어서 사는 것입니다. 사차원의 영성은 성령인 것인데 성령은 여러분 생각을 통해 나타나시고 꿈을 통해서 나타나시고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시고 여러분의 생각을, 말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이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교회 오셔서 집에 돌아가셔서 생활하실 때 마음속에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사용하고 내일에 일어날 꿈을 마음속에 잔잔하게 꿈을 꾸면 내일 그것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고 믿음을 가지고서 주님께 죽도록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능력이 계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을 믿으면 믿음대로 될 것이고 입술로 고백하면 입술의 고백이 여러분을 지키는 것입니다. 나는 독감이 걸리지 않는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평안하다. 안 걸리고 말고 나는 굳세게 산다. 그 말이 여러분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와 같이 있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는 그런 말씀을 짧은 것을 많이 외워서 여러분 가슴속에 그것을 풀어 놓는 것 참 좋습니다. 야훼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나는 부족하지 않다. 먹고 입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다. 야훼가 나의 목자시므로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므로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렇게 사는 것은 참으로 여러분 진리를 알고 사니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확실히 알고 십자가의 구원의 승리를 바라보고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믿고 승리를 외치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과 삶에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과 테러와 죽음의 공포로 가득한 곳,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알려진 땅에 우리 한국 사람인 이시온 선교사라는 분이 들어가서 그곳에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테러가 일어나서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아침에 선교하러 나가면 저녁에 살아서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왔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책을 읽는데 감리교 선교사가 우리 한국에 제일 처음 들어와서 26살 먹은 젊은 선교사가 들어와서 잡혀서 죽었습니다. 순교를 당하면서 그가 일기책에 써넣기를 일 천개의 심장이 내게 있더라도 나는 그 심장을 하나하나 터뜨려서 한국을 위해서 죽겠다. 그렇게 썼습니다. 그 글을 읽고 그는 너무나 감동이 되어서 성령께서 너도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그와 같이 죽어라.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겠느냐? 그래서 그는 회개하고 눈물을 흘려 하나님께 기도하며 천개의 심장이라는 책을 지어서 출판이 되었고 그는 지금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적은 시가 한편이 있어서 내가 좋아서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그 시는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이 땅을 보면 내일이 없어 보이지만, 눈을 들어 주님을 보면 미래가 보입니다. 이 땅을 보면 눈물만 보이지만, 눈을 들어 주님을 보면 미소가 생깁니다. 이 땅을 보면 절망으로 가득하지만, 눈을 들어 주님을 보면 살아야 할 힘이 생깁니다.」그러므로 여러분은 두 쪽 방향을 보고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살든지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든지. 둘 중 한 가지를 보고 살면 둘 중 한 가지가 여러분 미래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너무 하루 종일 신문을 들여다보고 텔레비 들여 다 보고 일어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시련을 모두 다 바라보고 살면 그것이 여러분 속에 자리를 잡고 곧 역사해서 여러분의 내일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일어나서 신문 보는 시간에 성경 보십시오. 설교를 들으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용서받은 나, 치료받은 나, 건강한 나, 생명을 얻은 나, 내가 예수님 죽으심을 인하여 얻게 되었다는 것을 자꾸 바라보고 생각하고 그러면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마음속에 가득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내일 여러분에게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 봐라. 내가 전에 꿈꾸었던 것이 이루어졌네? 내가 마음속에 생각했는데 이것이 이루어졌구나. 희한하다. 내 마음속에 그림을 그린 것은 다 이루어지구나. 그럼요. 여러분이 마음속에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얻은 믿음으로 그림을 그리며 바라보면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미국 선교사가 한국을 위해서 천개의 심장이 있으면 천개의 심장을 가지고 한국을 위해서 살다가 죽겠다고 했는데 그 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연세대학이 생기고 연세의료원도 생기고 수많은 교회들이 생겨났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도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을 힘차게 바라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믿음을 주고 축복을 주시거든 그것을 받아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나누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고후 4장 11절 / 조용기목사
<서론>
오늘 저는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심한 고생을 당하면 뭐라고 말합니까? "죽도록 고생했다" "죽을 고생을 했다" 그렇게 말합니다. 고생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사는가" 하고 물으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을 지경이다"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살아 있는 우리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고 했었습니다. 왜 죽음에 넘겨지느냐. '예수의 생명도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오면 생명도 뒤따라 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죽음의 반대급부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본론>
1. 왜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져야 하나?
"왜 하필이면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져야 하느냐. 그냥 죽으면 죽었지 왜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겨져야 하느냐."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릴 때 예수님의 생명의 광채가 나타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두워야 빛이 효과가 있지 어둠이 없는 곳에는 빛이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태양이 작열하는데 전등불이 무슨 효과가 있는 것입니까? 어두움이 내리 깔아야 전등불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죽음이 있는 곳에야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는 17살에 폐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었습니다. 병원에 진찰하러 가니까 서울대학교 엑스레이과 과장 조중삼 박사님이 엑스레이를 들여다보더니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폐 오른쪽 중엽이 다 썩어서 구멍이 뚫어졌고 왼쪽은 폐병이 꽉 들어찼고 넉마는 고름이 꽉 들어찼으니 이런 병은 수술도 할 수 없고 약물치료도 없으니 그저 잘 먹고 잘 입다가 가는 것이 좋다." 완전히 절망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한국말로 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영어를 모르는 줄 알고 17살 나이가 어리다고 생각해서 의사들끼리 영어로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는 다 알아 들었지요. 우리 아버님은 못 알아듣고 "그저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내가 아버지 손잡고 "아버지 갑시다. 필요 없습니다. 끝장났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하루 종일 냉방에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보고 천장의 파리똥만 헤아리고 별도리 없는 다른 종교의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으나 날로 날로 죽음이 내게 다가왔습니다. 여러분 죽음이 탁 오면 쉽지만요 숨이 차고 드러누워도 숨을 쉴 수 없고 앉아도 숨을 쉴 수 없는 그 고달픔은 밤새도록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고 아침이 오면은 저녁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괴로움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그 죽음의 짙은 그림자가 비취니까 비로소 예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은 살려 준다 그러니까. 그래서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고 진짜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서 오늘 50년 동안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우면 예수의 생명도 또한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생명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도 다가오는 것입니다. 절망에 처해야 소망을 찾게 되고 소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부형님 한분이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을 읽어 보았었습니다. 그는 갑상선암에 걸렸었습니다. 갑상선암은 별로 위험한 암이 아니기 때문에 병원에 가서 쉽게 수술을 했어요. 그 다음에 그 암이 전이 되어서 간암이 되었습니다. 간암 초기가 되어서 그것도 수술해서 나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그것이 전이 되어서 후두암이 생겼습니다. 의사는 하는 말이 "전에 갑상선암을 수술한 것과 곁에 있으므로 이것은 수술 불가능합니다. 의학적으로는 못 고칩니다. 당신은 후두암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누가 나를 살려 주겠는가. 하나님밖에 없겠구나!" 갑상선암도 심한 것이 아니니 하나님 생각을 안했다는 것입니다. 간암도 수술하고 고칠 수 있으니 하나님 생각 안했는데 후두암에 걸려서 이제는 살길이 없으니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하나님 밖에 떠오르는게 없더랍니다. 만사를 다 제켜 놓고 난 다음에 오산리 기도원에 찾아 올라가서 그곳에서 회개하고 금식하며 부르짖고 "주님, 살려 주십시오. 나는 예수도 안 믿고 주일도 안 지키고 소위 성도들이 말하는 십일조도 드리지 아니하고 내 멋대로 산 죄를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그 다음 주일부터 우리 교회 나와서 등록하고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나오고 말씀 읽고 기도를 하고 부르짖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찾자 점점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지고 마음이 평안해지고 기뻐져서 그 다음 다시 재차 검진하러 가서 갑상선암을 후두암을 검사해 보니까 의사가 "얼마 전까지 있었는데.. 당신 기도 받았느냐?" "기도 받았다." "그럼 그렇지. 없어졌다 암이.. 깨끗이 나아버렸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은 뭐냐면 "암이 나은 것만 기쁜 것이 아니라 암 때문에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천하에 이렇게 좋을 수가 있느냐.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 잡은 격이다. 병도 낫고 영혼도 구원받았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그런 간증을 기록한 것을 읽어 보았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때 해방시켜 주는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평범할 때는 예수님이 필요 없어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서 갈 길이 없을 때 우리를 해방시키는 예수님이 필요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봐야 답답할 때 우리를 이끌어 주는 예수님이 필요해서 비로소 새벽기도도 나오고 철야도 하고 부르짖어 기도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받게 되고 남에게 핍박을 당해 버림을 당해봐야 그때는 나를 위로해 주시는 주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님을 찾고 간절히 기도하게 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서 완전히 망해봐야 다시 잿더미 위에서 일으켜 세우는 주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배고픈 사람이 밥을 찾고 병든 사람이 의원을 찾는 것처럼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있어야 그것을 채워줄 자를 찾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크고 작은 죽음에 노출되어야 생명을 주는 주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생명을 체험하면 크신 은혜의 감정과 큰 확신을 가지고 이웃에게 생명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절로 5절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난이 넘치면 반대급부로 위로도 넘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넘치면 생명도 넘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경험하고 고난을 경험해봐야 생명도 체험하고 위로도 체험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2절에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우리가 사망을 체험해 봐야 생명을 맛보게 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전에도 말한 것 같이 주의 종은 많은 환난, 고통, 괴로움을 겪어서 주의 종이 되어야 성도들에게 살아있는 짜릿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학문적으로 배운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 없습니다. 바리새교인이나 사두개교인들과 같이 권세 없고 능력 없는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고통을 당해보고 배고파 보고 헐벗어 보고 병들어 보고 죽음을 넘긴 사람은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체험했기 때문에 그의 복음은 산 그리스도를 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사망이 있는 곳에 생명의 역사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미국인 청년이 오사카에서 나가사키로 향하는 배를 탔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일본 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오랜 훈련을 받아 선교지로 가기 위해서 일본에 도착해서 오사카에서 배를 갈아타고 나가사키로 가는데 선실에 들어가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기분이 이상해서 올라가 보니까 폭풍우에 배가 암초에 부딪혀서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구명복을 입고 물속에 뛰어 들어갔는데 보니까 구명복을 안 입은 한 여성이 물에 허우적거리고 물을 먹고 가라앉으려고 해요. 그래서 그 선교사 지망생인 미국청년이 그 여성을 붙잡아서 자기 구명대를 목에 걸어주면서 "나는 미국에서 일본에 온 선교사입니다. 이 풍랑에서 내 구명대를 당신에게 주고 나는 이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지만은 하나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죄악의 물에 빠져서 지옥의 강물로 떨어져가는 인생들을 위해서 나같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가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하시므로 믿는 자는 다 살려주는 것이니 당신 물에서 건져 남을 받거든 이것을 온 일본 천지에 전하십시오." 그리고 난 다음 청년은 물에 휩쓸려가고 만 것입니다. 이 여인이 거기에서 구원을 받고 그 폭풍에서 건져냄을 받고 난 다음에 가는 곳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예수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에게 생명을 전달해 준 젊은 청년이 예수를 믿으면 죄악과 지옥의 물에서 건져냄을 받아 영생을 얻는다고 말했는데 내가 그 예수를 믿고 마음속에 평안을 얻고 영생을 얻었으니 여러분 이 예수를 믿으라."고 일본전역에 다니면서 눈물을 흘리며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죽었지만 그 죽음을 통해서 한 일본 여성에게 생명이 전달되어 그 청년이 일생을 보내려고 일본에 왔는데 그 선교사역을 대신으로 감당해 준 것입니다. 일본말과 문화를 잘 아는 그 여자이기 때문에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망은 우리에게 역사해도 생명은 반드시 그 반대급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안에서 환난을 당하는 것은 언제나 축복의 전주곡인 것입니다. 환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환난만 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2. 환난이 주는 축복
우리가 환난을 당하면 뒤에 축복이 온다는 사자로써 환난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환난을 보고 놀래서 뒤로 넘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 함께 읽어 보십시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환난은 잠시 받아요. 그러나 잠시 받은 환난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후한 것을 채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광물의 원석은 용광로의 불길을 통해서 재련해야 귀한 금석이 되지요. 원석인 철광석이나 구리 원석이나 다이아몬드도 원석 그대로는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을 재련을 해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욥기 23장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요사이 금값이 굉장히 비싼데 주님이 우리를 단련하면 비싼 금이 된다는 것입니다. 단련을 하고 난 다음에 좋은 일이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라 하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 중에 하나가 '포도주'인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포도나무를 어떻게 심느냐. 산비탈 험한 바위 박토에다가 포도나무를 심습니다. "아~ 기름지고 좋은 땅에 포도나무를 심으면 좋겠는데 왜 기름지고 좋은 땅에 심지 않고 산비탈에 박토에다가 포도나무를 심느냐." 내가 하도 신기해서 그것을 수차례 물었습니다. "불란서 사람은 머리가 좀 아이큐가 모자라냐. 왜 아무 나무도 잘 자라지 못하는 저 산비탈 박토에 저런데 포도를 심느냐." 하니까 "그것은 이유가 있다. 좋은 땅에 포도나무를 심으면 포도나무 뿌리가 깊이 들어가지 않고 얕은데서 벌써 습기를 빨아들이고 모든 양분을 빨아 들이는데 얕은데는 중금속이 많고 오염된 흙이 많은데 그곳에서 중금속과 오염된 흙의 양분을 빨아들이므로 포도가 나중에 열매를 내더라도 포도주가 질 높은 포도주가 안 된다. 그러나 험한 산 박토에다가 심어 놓으면 포도나무가 살아나려고 깊이깊이 뿌리를 땅 밑에 깊이 들어가서 물기를 빨아들이고 양분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중금속이 없고 해독하는 요소가 없기 때문에 아주 좋은 포도열매를 맺어서 포도주가 질이 좋고 맑고 깨끗하고 맛있는 포도주를 양산할 수 있다." 그래서 '아~ 결국은 고통 속에 있으면 뿌리가 깊어져서 더 좋은 포도를 열매 맺는구나.' 하는 것을 제가 알았었습니다. 우리나라 소나무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대목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좋은 집을 짓는데 소나무는 얕은 산에서 무성하게 자란 소나무를 쓰지 않습니다. 소나무 질이 약하고 잘 부서지기 때문에 그것을 쓰지 않고 높은 산 낙락장송 어려운 환경 속에 자란 소나무는 뿌리가 깊고 험한 곳에 자랐기 때문에 나무질이 좋아서 좋은 집을 짓는데 재목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 사실을 잘 아시겠습니까? 이러므로 우리가 훌륭한 재목이 되고 하나님이 사용할 사람이 되려면 박토에 자라게 하고 고통을 당하게 해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심지가 굳고 연단된 사람으로 만들어서 축복을 주는 것입니다. 쉽게 쉽게 받은 복은 쉽게 쉽게 흘러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어렵게 번 돈은 어렵게 보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록펠러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록펠러 아버지는 세계적인 거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점심때 내려와서 2센트 주고 샌드위치를 사먹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친구들을 구름떼같이 데리고 온 호텔 한 층을 다 점령해 놓고 난 다음 거부와 같이 밥을 먹습니다. 같은 호텔에 있는 직원들이 "아버지 록펠러씨여, 어떻게 아버지는 이렇게 샌드위치 2센트짜리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아들은 저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호텔 한 층을 다 점령해서 아주 백만장자처럼 식사를 하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하니까 "이 사람 모르냐. 그는 부자 아버지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부자 아버지가 없네. 아버지는 돈 번다고 하도 고생을 해서 돈을 벌었기 때문에 돈이 무서운 것을 알고서 아주 2센트짜리 점심 샌드위치를 먹지만 아들은 자기가 안 번 돈이니까 아버지가 번 돈이기 때문에 돈이 쉽게 벌어온 줄 알고 쉽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 3대 부자들이 계속하지 못하는 것은 돈을 쉽게 여기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일본에 부자저널 보니까 일본의 명치유신 이후 100년 동안에 일본의 500대 기업 중에 30년 이상 계속한 기업이 없이 다 망했어요. 왜냐, 창설자는 고생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일을 하고 개혁을 하고 사업을 했는데 후대 3대는 쉽게 거드렁 거리고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하게 사업을 하다가 다 망해버린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나라를 여러분 속에 세우기 위해서 쉽게 하늘나라에 복을 받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망하고 하늘나라도 무너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어려운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축복을 받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환난을 통하여 연단 받은 우리의 신앙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환난이 절망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가져오기 위해서 환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자식은 채찍 하나라도 더 때립니다. 미운 자식 떡 한 개 더 주라는 것입니다. 왜, 밥을 많이 먹고 배가 불러지면 뇌 활동이 적어지기 때문에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식은 매라도 한 대 더 때리고 꾸중을 하나 더 하는 것은 잘되라고 하기 때문에 소망을 주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절망을 주려고 매를 때리고 꾸짖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환난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바꿔 놓는 것입니다. 사망의 체험을 하고 환난과 고통의 체험을 하는 우리의 삶의 코스를 완전히 바꿔 놓고 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가 세상에 살 동안에 환난을 당하기 전에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을 주목하고 이 세상 부귀 영화 공명 이러한 것에 주목을 하지만 환난을 당하고 보면 이런 것이 다 물거품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일장지춘몽인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이제 보이는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에 주목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잠시 누리는 허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의 영원한 평안과 기쁨의 천국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에도 그런 찬송 있지 않습니까?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일세.
큰 풍파 일어나는 것이 세상 줄 끊기 위해서 큰 풍파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도 환난을 당해서 폐병에 안 걸렸으면 저는 정상적으로 갔으면 공학박사가 되고 우리 한국에서 기계공학에 아마 태두가 되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바꿔졌습니다. 폐병으로 죽다가 살아나니까 그 모든 인생의 목표가 허무하기 짝이 없고 주님의 나라를 찾게 되는 영원한 곳에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17살 때 수영을 잘하는 미국의 조니 소녀는 다이빙을 하다가 그만 밑에 바위에 머리가 부딪혀 목 밑의 뼈가 부러져서 신경이 전달되어서 전신 마비가 되 버리고 만 것입니다. 조니는 목이 부러져 하루 아침에 전신마비가 되는 장애가 되었으니 그는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가족들과 친구들이 위로해 주고 또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로써의 훈련을 받아서 그 취미로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은 책 서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림 그리는 일과 가족 그리고 친구들의 도움은 나를 완전히 절망에서 끌어내어 주었었습니다. 이 휠체어 인생으로부터 무엇보다도 더 먼저 감사받으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마비로 인한 내 모든 시련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제게 임하신 것임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고통 뒤에 이유를 두셨고 그것을 알고 나니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여러분의 고통 대해서도 하나님은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조니는 비록 목이 끊어져서 밑에 반신마비가 되어 휠체어 신세가 되었지만 그는 입으로 그림 그리는 유명한 화가가 되고 그의 그림은 비싸게 팔리고 어느 곳에 가나 강연자로써 부름을 받고 또 자기를 열렬히 사랑하는 남자가 생겨서 그 불구의 몸에도 결혼을 하고 상상할 수 없는 행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 모든 것 위에 조니가 말하는 것은 "나는 만일 내가 불구자가 되지 않았으면 예수를 믿고 하늘나라를 알지 못했을 것인데 내가 이 불구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하늘나라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불행이 불행이 아닌 것입니다. 불행과 고난은 그 뒤에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인생에 새로운 목표를 주기 위해서 다가온 시험과 환난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환난과 시험을 당하면 그 뒤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손길을 찾게 되고 인생의 목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의미 없이 그냥 우리를 죽이려고 다가오는 시험과 환난은 없는 것입니다.
3. 반드시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이 다가올 때 여러분, 내가 감당할 수 있겠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내게 하나님이 짐을 지울 때는 짐을 질만한 힘이 있게 만들고 난 다음에 짐을 지우게 하시지 짐에 깔려 죽게 만들려고 짐을 지우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시험을 당해서 고통과 괴로움에 처할 때 '이제 나는 살 수가 없다. 고통을 당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당할 쯤에 하나님이 반드시 피할 길을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피할 길 없이 시험을 당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시험을 당할 때 피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에 여러분 시험만 바라보지 말고 시험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는 성인이 되면은 반드시 밤에 산속에 나무에 묶여서 밤을 세워줘야 되는 것입니다. 사나운 짐승들이 많은데 성인식을 하고 난 다음에 아버지가 데리고 가서 그를 나무에다가 묶어 놓습니다. 밤새도록 사나운 사자와 호랑이나 여우들이 지근지척 하면서 그를 죽일 것인데 얼마나 두렵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통과해야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언제나 밤에 사나운 짐승이 곁에만 오면은 픽 쓰러져 죽고 픽 쓰러져 죽습니다. 왜 그러느냐, 성인식을 하고 그 아들을 나무에 묶어 놓은 아버지는 그 근처 나무 위에 올라가서 잔뜩 활에 화살을 먹여서 내려다보고 있다가 짐승이 아들 가까이 오면 쏘아 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안보이지만 휙하는 화살 소리가 나면서 짐승은 퍽 거꾸러져 죽는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 감춰진 아버지가 늘 있어서 보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우리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의 밧줄에 묶였을지라도 하나님은 숨어 계셔서 언제나 시험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시고 감당치 못할 시험이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하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항상 우리와 함께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그 날에는 내가 너 안에 내가 너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만 보지 마십시오. 파도만 바라보면 놀라서 빠질 수 있습니다. 시험의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 시험은 동등 이상 축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시험과 환난과 고난은 항상 동등 그 이상의 축복을 가져오기 위해서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는 것이지 무의미하게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가에서 무서운 시험을 당했지 않았습니까? 3백만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서 모세를 따라 홍해수가에 왔는데 앞에는 창열한 바다요, 뒤에는 애굽의 바로가 군대를 동원해서 다시 그들을 잡으러 진격해 왔었습니다. 샌드위치가 되었습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을 향해서 부르짖어 고함치고 모세를 향하여 애굽의 장지가 없어 우리를 이곳에 와서 다 죽게 하느냐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말했습니다. "너희는 오늘날 가만히 있어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는 구원을 보라 오늘 너희가 본 애굽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손을 내밀매 홍해수가 갈라지고 그들은 홍해수를 육지같이 건널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백성들에게 나타내기 위해서 이런 무대를 만든 것입니다. 이 무대 없이도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을 능히 이끌고 홍해수 윗쪽에 갈대밭을 지나서 광야를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홍해수 중간에 데리고 와서 이런 시련을 겪게 하느냐. 하나님이 환난과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며 하나님이 어떤 영광과 권세가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역사한 은혜의 무대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무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무대 없이 배우가 와서 연출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무대가 없이 나타나실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이 다가오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나타나기 위한 무대를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무대를 우리가 완성하면은 하나님이 그 무대에 나타나셔서 주인공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시험에 넘겨지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기 위한 기회인 것입니다. '왜 내게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하게 하고 죽음의 고통이 다가오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무대가 있어야 연극을 하지요. 무대가 있어야 하나님이 나타나시지요. 나는 조용기가 폐병에 안 걸렸으면 병을 고쳐서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은 결코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병이 걸렸기 때문에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초년에 많이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너무나 고마운게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기도 응답하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평안했으면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르짖지 아니했을 것이요. 그리고 하나님이 기적으로 응답하는 체험을 못했을 것인데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하고 빈손 들고 갈 길이 없어 답답했기 때문에 밤새도록 부르짖어 기도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어서 오늘날 돌아볼 때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아름다운 경험인지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대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환난은 무대요, 죽음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날 수 있는 무대를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말하기를 "원수가 다가오면 원수를 기회로 해서 나에게 밥상을 차려주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잔이 넘치게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밥상 차려주고 기름 부어 주셔서 높여 주고 잔이 넘치게 해주려면 원수가 다가와야 되는 것입니다. 원수가 없는데 혼자서 그렇게 해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인생에는 환난이 있으면 축복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생명이 있는 반대급부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로 13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불시험은 기쁨과 즐거움을 갖다 주기 위한 무대에 불과한 것입니다. 많은 시련을 겪어봐야 시련에서 해방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늘 좋은 환경만 있으면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이 무엇인 것입니까?
저는 일정말년에 너무나 배고플 때 자라났고 육이오 사변 때 피난생활에 억척같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지금 돌아보면 그때가 얼마나 고마운지 요사이 매일 마다 따뜻한 잠자리 들어갈 때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침대 이렇게 좋은 이불을 덮고 자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요사이 젊은 애들에게 말해 보십시오.
"좋은 침대, 좋은 이불 덮고 자는 것 고맙게 여겨라." "누구는 안 그래 잡니까? 뭔 별나게 그렇게 말을 합니까?" 밥을 먹어도 밥풀 하나 다 뜯어 먹습니다. “아이 주접을 떨고 밥풀 하나까지 다 주워 먹는다. 왜 그렇게 합니까?”육이요 때 너무나 배가 고팠기 때문에 밥풀 하나를 먹으면서 눈물을 흘린 것을 알기 때문에 밥 먹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여러분 밥 먹는 것 행복한 줄 알아요? 밥 먹을 때마다 '아~ 행복하다. 밥을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나는 밥 먹을 때마다 기억하는 것은 육이오 사변 때 우리 고모집에 내가 갔는데 우리가 점심을 먹고 있는데 피난살이 온 아주 아리따운 젊은 여성이 보퉁이를 들고 물건 팔러 왔다가 물건을 못 팔고 우리가 밥 먹는데 가만히 서서 입맛을 쭉쭉 다시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우리 고모님이 "여기 와서 앉으세요. 한술 뜨세요." 그러면서 자기가 먹던데 아직 침이 붙어있고 밥풀이 붙어있는 그 숟가락을 주는데 내 속으로도 '고모가 저걸 씻어주지. 저것 자기가 먹던 것을 왜 주느냐.' 그런데도 그 부인은 날래 뛰어 오더니만 그 숟가락을 잡아서 밥을 떠먹으면서 눈에 눈물을 죽죽죽죽 흘리던 것 지금도 내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쳐다보고 얼굴이 정말 이쁘더라구요. 정말 미인이고, 날씬하고, 환경이 좋았었으면 남편 사랑받고, 온 사람에게 추앙을 받고, 무릇 남자들의 동정을 받고 했을 것인데 피난살이에 다 먹고 살기 힘드니까 개떡같이 취급을 받고 남의 먹던 침이 묻은 밥숟가락에 밥을 더 줘도 눈물을 흘리고 먹는 것을 보게 될 때 여러분 밥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압니까? 감사한 일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과 고난이 나중에 우리에게 기뻐하고 감사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인생을 사는 것을 고맙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초년에 고생을 해본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초년고생은 금 주고도 못 바꾼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를 바라보고 긍정적인 기도와 감사를 하십시오. 환난의 시험을 당해서 원망하고 탄식하고 불평하고 뒤로 물러가면 않되는 것입니다. 야 시험과 환난이 다가왔으니 하나님이 좋은 일 예비하시는구나. 감사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기뻐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하지 말고 시험과 환난 당하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고 하나님께 맡겨라. 하나님이 합동하여 유익을 이루어 주실 것이니까.
야고보서 1장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고린도후서 1장 8절로 10절은 우리에게 굉장한 귀감이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바울이 아시아에서 얼마나 핍박을 당했던지 도저히 살아갈 희망조차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인간의 수단과 방법과 지혜로써는 살아갈 길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내버려 두신 것은 인간의 막다른 골목은 하나님의 열린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력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완전히 포기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완전히 포기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바울을 건져주는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에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라.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래서 하나님이 건지시는 영원한 건짐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경험하게 하셔서 과거에도 건지고 지금도 건지고 장차도 건질 것을 믿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시험과 환난을 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돌이켜 하나님을 바라보고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하나님의 지시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기대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여러분의 생애 속에 홍해수 사건이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데 하나님을 바라보니 쌓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했는데 하나님을 바라보니 답답한 일에서 건져냄을 받고 핍박을 받아 버림을 받았는데 하나님을 바라보니 위로가 넘쳐서 도움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해 망했는데 주님께서는 다시 재기해서 불꽃같이 일어나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인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체험해서 간증도 하고 자서전도 적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했다고 사람들에게 외칠 수 있지 그런 것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체험하지 못하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여러분을 통하여 무대를 만드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믿을 만한 사람을 택해서 환난과 고난과 죽음을 통하게 하시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면 하나님이 찾아올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
고후 4장 11절 / 문기태목사
오래 전에 미국에 윌리암 헐스트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신문 편집인이면서 동시에 고미술품을 수집하는 고미술 수집광이었습니다. 그는 유럽의 왕가에서만 사용되었다는 신기한 도자기에 대해 듣고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여기저기를 돌아 다니면서 그 도자기의 자취를 추적했습니다. 얼마의 돈을 내고라도 그 도자기를 소유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그는 여러 해 동안 힘과 노력을 들이면서 찾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도자기는 벌써 언론인 출신의 미국의 어떤 사업가가 오래 전에 사갔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찾아 다녔습니다. 열심히 찾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도자기를 산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이 오래 전에 이미 사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의 에피소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값어치가 나가는 그 귀한 보화를 사서 자기 집의 광 속에 두고는 그 보화가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그것을 찾아서 헤매는 모습, 얼마나 어처구니 없습니까?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일이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엄청난 보배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그런 어마어마한 보배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서 일생동안 다른 보배를 찾아 헤메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질그릇은 흙으로 빚음받은 사람의 몸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굉장한 보배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보배가 무엇일까요?
1. 우리 안의 보배는 예수 생명입니다.(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1)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새생명을 소유합니다. 육체적인 생명외에 영적인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안에 있던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육체적인 생명은 누군가에 의해 잃을 수 있습니다. 병들어서 시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건강하고 철저한 보호를 받는다해도 백년을 넘기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뿐만아니라 사는동안 미워하고 불안해 하며 시기하고 괴로와하다가 불행하게 보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생명은 완벽하며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초기 교회부터 20세기를 내려오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죽음에 넘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안 믿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살려준다는 회유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 이유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보배로운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기뻐하며 찬송을 부르며 영광스럽게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고난 후 변화되는 것도 그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으로 생명의 힘이 변화시켜 줍니다. 예수님처럼 온유한 사람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만들어줍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는 사람으로 그 생명이 역사하여 변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있게 되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림받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심히 크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도 당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의 생명이 여러분안에 있으므로 여러분을 당해낼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생명이 여러분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이 얼마나 고귀한 보배입니까? 여러분 그 보배를 귀하게 여기고 행복함에 젖어 사십니까? 그 보배를 사랑하며 모르는 이들에게 자랑하며 사십니까?
예수 생명의 보배를 날마다 꺼내보고 확인하며 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바랍니다.
2. 우리 안의 보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 4:6)
세상의 사람들은 아무리 아이큐가 높아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해도 하나님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4)'
영에 속한 일은 하나님이 깨닫게 보여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삽니다. 하나님을 모르기때문에 하나님께 지음받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사는것이 가치 있게 사는 것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최선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날마다 만나며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고 있습니다. 여러분안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비취고 있습니까?
빛이 없으면 어둠의 세력이 활개를 칩니다. 유 1:6에는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골 1:13에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사단의 세력은 어둠의 권세입니다. 어둠가운데 있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사단도 사람들로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사단은 어둠으로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합니다. 사단은 사람들을 흑암에 가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둠과 싸울 때는 칼도 소용없습니다. 총도 소용없습니다. 힘이 아무리 세어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빛을 비추면 어둠은 즉시 물러갑니다. 작은 빛만 있어도 어둠을 이길 수 있습니다. 밝은 빛이 있으면 어둠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엡 1:17 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고 마음 눈을 밝혀 주셔서 우리가 밝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계시로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있도록 성경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비추어 주시는 빛을 따라 성경을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성경을 가까이하고 성경을 통해 나타내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동역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그리고 깊이 아는 자가 능력있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에 의해 쓰임받습니다. 여러분이 계시의 빛가운데서 밝히 진리를 분변하면 어둠의 권세는 힘을 잃고 쫓겨갑니다.
모세는 신34:10에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모세는 역사가운데 가장 큰 권능을 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아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가장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대하며 잘 아는 자였기에 모세는 탁월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소원을 갖기 바랍니다. "나도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대면하여 잘 아는 자가 되어 강력한 삶을 살리라."
여러분 이번 기회에 성경공부에 참여하십시오. 귀찮게 생각하지 말고 말씀배우는 일에 투자하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야 말로 가장 유익합니다. 성경공부 좀 열심히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가까와지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자가 되고 행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강력한 능력을 소유하고 하나님께 사로잡힌 삶을 살기 바랍니다.
말씀에는 권능이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안에 뿌리내리면 사단은 쫓겨갑니다. 말씀이 우리안에서 믿음과 화합하여 역사하면 질병도 떠나갑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심히 큰 능력도 담겨 있습니다.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이 능력은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그리스도인은 무슨 큰 일을 하려면 먼저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심히 큰 능력을 행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있는 굉장한 능력이 우리안에서 역사하고 나타나면 강력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말슴밖에는 능력이 없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 큰 믿음을 갖게 됩니다. 말씀의 사람이 주님께 크게 헌신하며 살아갑니다. 말씀을 통해 죄의 권세와 싸워 쉽게 이깁니다. 또 말슴에 붙잡히고 말씀의 진리를 경험한 사람이 전도도 잘합니다. 말씀을 잘 아는 사람이 기도도 잘합니다. 가정생활도 잘 합니다. 교회생활도 잘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보물은 성경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바르게 배워 큰 능력을 행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3. 우리 안의 보배는 하나님께 받은 직분입니다.(1)
사람들이 이리 저리 흔들리는 이유는 내가 누군지, 어떤 사명이 내게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왜 보내셨는지? 어떤 사명을 주셨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리 저리 갈팡질팡합니다. 그래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적고 자기 이익에 끌려 일하려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돈 몇 푼에 자기 양심도, 자기 꿈도, 자기 인생도 송두리채 팔아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직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왜 하필 그 직분을 맡겨 주셨는지를 생각하고 직분을 보배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직분을 사랑하고 잘 감당하려고 모든 것을 쏟아야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슴을 맡은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버리고 자기 뜻대로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다에 갑자기 큰 폭풍이 불게 하십니다. 배가 뒤집힐 지경입니다. 그래서 요나를 바다에 던지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결국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할 사명을 다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 요나가 하나님 주신 직분을 외면하자 영문도 모르고 한 배에 탄 많은 이방인들이 요나로 인해 두려움에 파랗게 질려 폭풍과 싸우는 고통을 당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이 주신 직분과 사명을 잊고 방황하면 여러분때문에 세상이 많은 고통을 당합니다. 오늘 이 나라가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배로운 직분을 감당하지 않고 되는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중에 많은 이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사명을 회피하고 살고 있습니다. 대다수가 교회안에서 종의 사명을 깨닫지도 못하고 감당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 국민이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이 불행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어떤 직분을 받으셨습니까? 어떤 사명을 받아 어떻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직분을 깨닫고 사명을 감당하려 하면 목표가 분명히 보입니다. 오늘 현대인의 문제는 너무 바쁘다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 주님이 맡겨 주신 일에는 집중하여 헌신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것 저것 다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꼭 필요한 것만 하십시오. 하나님앞에 설 때 내가 너에게 맡긴 것 어떻게 했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실 때 '그게 뭐였지요? ' 하고 되묻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 다른 것은 몰라도 주님 주신 사명은 열심히 감당하다 왔습니다. 복음 전도만큼은 확실하게 하다가 왔습니다. 어린이 양육만큼은 생명을 바쳐 감당하다 주님 부르셔서 왔습니다. 청소년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에 나의 젊음을 다 쏟고 왔습니다. 목장하나는 온 힘을 다해 부흥시키고 왔습니다. 선교에 집중하여 선교사님들을 잘 섬기다가 왔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이 주께 받은 직분을 알고 사명을 깨달아 여러분의 인생을 그것에 걸어야 합니다. 집중력을 발휘하여 탁월하게 감당하려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명과 직분을 거추장스러운 짐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보배라고 믿습니까? 보배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생각의 전환이 여러분의 섬김을 바꾸어 줄것입니다. 직분과 사명이 있으므로 여러분의 인생이 온갖 시험을 만나도 곁길로 빠지지 않고 바르게 나아갈 수 잇습니다. 직분과 사명이 있으므로 주님앞에서는 날 인정받고 칭찬듣고 상받는 영예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보배를 골치 아픈 쓰레기 대하듯 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보배가 자신 안에 있음을 잊고 활용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보배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참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보배를 날마다 닦고 바라보며 자랑하고 활용하여 진가를 나타내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보배는 참 많지만 특히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된 생명, 하나님을 아는 지식, 직분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여러분의 삶을 통해 그 가치가 나타나고 더욱 빛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에서의 역전(逆轉)
고후04장 10~12절 / 김경호목사
바울은 어떤 사도들보다도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그 사고에 있어서도 매우 합리적인 분이십니다. 지난 두 주간 살펴본 대로 바울은 그 당시 묵시문학적인 세계관과 용어들을 차용하면서도 묵시문학의 신화적 부분들을 인간학적인 용어로 인간의 내면적인 용어들로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서 여전히 합리성의 영역을 떠나 주술과 같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파라독스(역설)입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수치가 영광으로, 외로움이 기쁨으로, 죽음이 부활로 전환되는 장소로 보았습니다.
첫째, 수치가 영광으로
갈3,13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은 사람이다"하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수치라고 하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나무에 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은 사람이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이 벌개 벗겨져서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수치의 십자가입니까? 그가 모욕당하고 조롱 받으셨기에 수치입니까? 나무에 달린 사람의 이야기는 신 21,22-23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죽을 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의 주검은 나무에 매달아 두어야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 주검을 나무에 매달아 둔 채로 밤을 지내지 말고, 그 날로 묻어라.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신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유대인의 사형법은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파렴치한 범죄, 만인이 "저래서는 안된다"고 새겨 둘 만한 범죄에 대해서는 그 주검 마저 나무에 매달아 수치를 줌으로써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라도 그 주검을 나무에 매달아 둔 채로 밤을 지내지 말고, 그 날로 묻어야합니다만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가장 모욕 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이었고 몹시 부끄럽게 생각하는 수치였습니다. 한마디로 저주받은 죽음입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전통으로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히 6,6; 12,2)이요, 몹시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고 꺼리는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이 가장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부끄러움은 고난 중에서도 가장 그 무너짐이 심한 고난입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내면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자리, 수치의 자리에 서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큰 낭패와 실망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그들을 당신의 품에 안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육신에다 죄를 정하"(롬8,3)신 것입니다.
둘째, 외로움과 슬픔이 기쁨으로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격시비에 휘말렸고 그가 세운 교회마저도 그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파당을 만들어 다투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그 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고후 11,27-28) 그는 각 교회에 편지를 쓸 때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나는 몹시 괴로워하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썼습니다."(고후2,4)라고 합니다. 그의 삶은 이러한 고통과 외로움의 삶이었지만 동시에 항상 십자가와 함께 하는 뿌듯한 기쁨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외로움을 당하셨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고, 그의 생애 새벽 미명에 하나님께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홀로있고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은 겉으로는 외로운 시간이지만 그것은 우리 안에 무한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시간입니다. 현대인들은 홀로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합니다. 수첩을 펴서 어디 빈 공간이라도 있으면 허전해서 견디지 못해하고 무슨 일을 해서라도 그 공간을 채우고야 맙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마치 죄를 짓는 시간처럼 생각합니다. 조금 빈 시간이 나면 수첩을 꺼내들고 이리저리 전화를 돌립니다. 마치 모든 사람을 자신이 관리해야 관계가 유지되는 것처럼... 조금 긴 여유가 생기면 무언가를, 무슨 강좌니, 무슨 공부니, 하다못해 무슨 취미니....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배우고 학습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머리맡에는 항상 끝까지 읽지 않은 책들을 쌓아놓고 마음에 일정한 부담을 지워줍니다. 홀로 있을 시간이 없고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그 시간 갖기를 두려워하고 죄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홀로 있지 못하는 사람, 자기 자신이 혼자 있지 못해서 남을 만나고 다니는 사람은 남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들에게 부담을 지워 줄 뿐입니다. 걸핏하면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남을 훈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지적하는 문제는 정당할 수 있지만, 사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마치 금방 부풀어올라 어딘가 출구를 찾는 고무풍선처럼 자기 안에 불만으로 가득찬 불안한 에너지, 무언가 시비를 걸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공격성, 그의 수양되지 않은 마음이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하는 시간마저도 우리는 하나님께 무슨 청구서를 늘어 놓듯이 떠벌이고 또 집단으로 아수라장을 만드는 기도를 드리는 것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그 분께서 내게 말씀하실 수 있는 여유와 공간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깊은 내면의 대화를 하는 시간, 홀로 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 기도이고 이 시간은 찬송가 처럼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 가 가장 즐거운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셋, 죽음이 부활로
오늘 본문은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있으나, 예수를 위하여 늘 몸을 죽음에 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힘을 떨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힘을 떨칩니다."(고후4,10-12) 고 합니다. 바울은 항상 죽음을 옆에 끼고 사신 분입니다. 그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하고, 예수를 위하여 늘 몸을 죽음에 내 맡긴다고 합니다. 그는 늘 죽음과 함께 지냈지만 성서의 어떤 사람보다도 가장 생명력 있는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항상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이 있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 길게 늘어져 있다고 생각하기에 정작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꼭 해야할 일을 뒤로 미루거나 간과하고 지내기가 쉽습니다. 성탄절 연극 스크루우지에서도 그 영감이 구두쇠 노릇 만 하고 살다가 자신의 죽음을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수많은 것을 움켜쥐고 수많은 자물통으로 자기를 얽어매고 짊어지고 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게 되고 그가 다시 생명을 갖게 된 후에 개과천선한다는 내용입니다. 뒤집어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날이, 그 시간이 이제 몇 일 아니 몇 시간 후로 임박했다고 생각했을 때 나에게 남은 이 짧은 시간에 내가 꼭 해야 할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해야할 일들입니다.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신 바울은 아예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하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임박한 의식을 가지고 사신 것 같습니다. 죽음과 함께 하는 그의 삶은 그를 가장 치열하게 살게 만들고 가장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후 4:10~11 / 조용기목사
<서론>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개별적인 노력과 힘쓰고 애씀으로 신앙적 성숙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내가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고 그 영혼이 떠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데는 우리로서는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자란 점이 있어야 우리가 보태고 뽑지만 모자란 점이 없이 다 이루었을 때는 뽑고 보탤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여러분과 나의 구원을 위해서 33년 동안 이 땅에 와 계셨고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더 보탤 것도 없고 더 뺄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믿고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항상 그것을 우리 마음속에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구원을 위해서는 인간에게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 요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종교치고 여러분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는 조건을 안 세우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기독교만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기 때문에 다 이루어 놓은 것 할 일이 없습니다. 10번을 물어도 다 똑같은 대답입니다. 주님, 우리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할 일 없다. 내가 다 이루었다. 잠시 있다가 또 주님, 우리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할 것 없다. 내가 다 해버렸다. 믿고 의지만 하라.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주님이 다 이루어 놓은 것 우리가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감사할 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테텔레스타이. 이 말은 상업적인 용어로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테텔레스타이’라는 단어가 쓰여진 문서가 발견 되었는데 거기에 뭐라고 했느냐면 ‘완전히 돈을 다 지불했다. 빚지지 않았다.’ 그 내용이 덧붙여 있었습니다. 완전히 지불 되었다는 영수증의 의미로써 테텔레스타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의 빚을 90%만 갚은 것이 아니고 99.9%만 갚은 것도 아니고 완전히 갚아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수 이름으로 나오면 하나님이 아무리 눈을 닦고 보셔도 죄가 안보입니다. 허물과 죄를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테텔레스타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마지막 고통을 당하시고 난 다음에 그 마음속에 여러분을 보시고 우리를 보시고 테텔레스타이. 내가 다 지불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참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큰 은혜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아버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조상은 누구입니까? 아담이지요? 아담 안에서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죄인이요 죽었다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새로운 인류 조상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새로운 인류를 생산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옛 아담의 자손들은 예수님이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죽을 때 같이 법적으로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어서는 안돼요. 우리 옛사람이 그리스도를 모시므로 함께 죽은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할 때 혼자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나를 안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고 주 안에서 부활하셔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국 내 천국, 예수 보좌 내 보좌, 하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1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완전히 하나된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앉아있지만 실제 하나님이 법적으로 볼 때는 예수를 구주로 모신 사람은 예수의 죽음을 덮어쓰고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지내고 부활할 때 예수님을 따라 함께 부활해서 이미 하늘 보좌에 앉은 자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내가 예수 믿는 다는 것은 마음으로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인즉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곤란할지 몰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역사하신 계획과 노력이 거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4절로 6절에 보면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예수 믿고 난 다음 물로 침례를 받지 않습니까? 그 이면에는 뭐냐면 예수님 안에서 함께 무덤에 장사지내 버리고 또 물에서 올라 올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해서 일어났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 침례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침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지낸 바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해서 이제 예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아닌 예수 사람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 사람. 나는 세상 사람이 아니고 예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십니다. 마귀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꼭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 성경에 보면 역시 그것을 강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죽으면 갖다가 파묻어 버리지 죽은 사람을 집안에 같이 데리고 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법적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법적으로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버리고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사람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새사람을 하고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새사람을 가지고서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산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과정을 우리 마음속에 잊지 말고 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는 분이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힐 이유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이유는 나 때문에 또 그렇다고 당신 왜 십자가에 죽었습니까? 우리 목사님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돼요. 어느 목사님이 할머니 한 사람을 물로 침례를 베푸는데 문답을 하는 사람에게 올바른 대답을 하기 위해서 가르쳤습니다. 할머니 예수님이 누구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혔나요? 그러면 날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렇데 대답하세요. 또 물었습니다. 할머니 내가 물어볼테니까 대답하세요. 예수님이 누구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까? 날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됐습니다. 꼭 그렇게 대답하십시오. 침례받기 전에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할머님,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나요? 우리 목사님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 다시 나만 위해서 못 박힌 것이 아니라 할머니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요. 그것 압니까? 하니까 우리 목사님이 그렇게 안 가르쳤는데요? 그렇게 되면 정말 잘못된 신앙고백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조용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힐 뿐 아니라 여러분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누구든지 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그 사람의 일생의 십자가를 다 주님이 통해서 죄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날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깨달아 알면 우리가 늘 마음속에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9시간 동안 몸을 찢고 피를 흘리고 고통을 당할 때 주님께서는 나 때문에 고통당했다. 날 위하여 십자가에 중한 고통을 당했지 자기를 위해서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늘 마음속에 상상하고 믿고 여러분 스스로 입술의 고백을 늘 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는 예수님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과거 청산하고 죽은 사람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너는 살아난 사람이다. 깨달아 알면 머릿속에 십자가를 바라보고 상상하고 입술로 자꾸 고백하면 이 신앙이 굳어지고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했다는 사실을 늘 말하면서 그것을 머릿속에 상상해보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우리가 머리에 상상한 것을 입술로 시인하면 실제적인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는 것 이것은 우리 생애 속에 안 보이는 것이 보이도록 만드는 기적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주님의 진리를 마음속에 그려보고 믿고 고백하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예수 믿은 사람도 이 과정을 통하지 않으면 눈에 안 보이는 것이 현실생활에 보이도록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것이라도 여러분이 마음속에 꿈이라도 분명히 그려보고 그리고 그것을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바라보고 믿고 말하자. 아주 간단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운명을 바꾸는 기적을 불러오게 되는 것입니다.
2. 율법이냐 은혜의 선물이냐
우리는 항상 우리의 삶속에 율법을 통해서 구원 받았느냐 은혜를 통해서 구원 받았느냐 이것을 생각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 자신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주인이 됩니다. 율법은 내가 나를 섬기고 살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내가 걸머진다. 어릴 때부터 장성한 사람이 되어 죽을 때까지 모든 삶의 책임은 내가 걸머진다. 그러므로 나는 내 마음대로 산다. 내가 주인이니까 누가 시키는 대로 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산다. 아담이 선악을 스스로 분별하겠다는 것도 그것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분별해서 주는 대로 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겠다. 나도 하나님처럼 좋은 것은 내가 좋은 것은 좋고 내가 나쁜 것은 내게 나쁘다. 하나님 판단 받기 전에 내가 판단해서 살겠다. 그렇게 반역의 생각을 갖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반역하여 쫓겨나온 천사장인데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하다가 버림받은 제1호인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이 좋다하면 자기가 나쁘다고 하고 하나님이 나쁘다고 하면 자기가 좋다고 하고 마음대로 삽니다. 자기 정신을 아담에게 불어넣어 주어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마귀와 똑같이 하나님을 반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는데 아담은 하와와 더불어 선악과를 먹고 죽었습니다.
창세기 3장 4절로 5절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뱀이라고 하여서 기어다니는 뱀 말구요. 마귀가 뱀의 형상을 입고 온 것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과 똑같이 되어서 동등하게 인생을 살게 된다고 마귀가 꾀어서 거기에 넘어가서 그들은 독립을 선포하고 만 것입니다. 독립을 선포한 사람은 이제는 모든 행동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해요. 하나님의 법을 자기 힘으로 지켜야 돼요. 자기 힘으로 안 지키면 아무도 도와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짐도 다 내 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도 다 내 짐이니 내가 짊어져야 되고 일도 다 내 일입니다. 내가 다 해결해야 되고 모든 일에 내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는 주님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고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께 내어 맡깁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를 책임져 주셨으므로 주님이 주인입니다. 우리 인생에.. 내가 아니라 주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주님이 내 책임을 다 짊어져 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짐을 진 것도 주님이 대신 짊어져 주시고 내가 해야 될 일은 주님이 대신 해 주시고 우리는 그 결과에 다 이룬 결과만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한다. 다 주님이 맡았습니다. 주님 내가 할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다 맡았는데 네가 할 일은 없다. 그래도 뭐 있을 껄요? 없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주인이라. 네가 다 내게 맡겼은 즉 나는 내가 다 이룰터이니까 나중에 열매만 거두어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짐을 지고 고달픈 사람을 보고 율법주의자가 되어 있으면 네가 너 위해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죄의 값은 너가 지불하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종이 되면 주님이시여! 이 죄짐을 어떻게 할까요? 내가 다 맡아서 청산했으니 너는 평안히 하나님의 은혜를 즐기면서 살아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어주사 나의 책임을 대신 짊어져 주시므로 하나님 앞에 설 때 마음에 죄책감이 없이 가슴을 딱 펴고 설 수 있는 것은 죄도 하나님이 짊어지시고 짐도 하나님이 짊어지시고 문제도 하나님이 짊어지시고 예수님 안에서 다 청산했으므로 우리는 다 이룬 예수님의 날개 밑에 편안하게 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오늘 죄 없습니다. 완전히 씻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수고와 무거운 짐도 주님께 맡겼으면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 일을 지어 성취하시는 야훼 야훼라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네가 할 일은 부르짖는 것이지 하라는 것이 아니다. 일은 내가 다 맡아서 하고 너는 내게 부르짖어 부탁한 것을 내가 완전히 이루어서 주는 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죄도 청산해 버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도 주님께 맡겨서 주님이 우리 위해서 일을 해주시고 죽는 것도 우리 대신 죽어주시고 사는 것도 우리 함께 살아주시고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이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살아주기 위해서 이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을 건널 때 물이 엄몰하지 못하게 하시고 불이 붙을 때 타지도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배워야 할 것은 언제나 내가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그것을 마음에 생각하고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주인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음에 휴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염려하고 근심하고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갖기를 원치 않습니다. 가져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맡았는데 우리가 왜 또 짊어져야 되는 것입니까? 모든 것을 다 주님께 기도로 맡기고 감사하고 찬송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면 주님이 내가 다 이루었다. 내가 다 책임진다. 내가 다 돌보아준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렇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참된 신앙을 가지려면 주님 안에 안식을 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 주님이 쉬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믿고 쉴 줄 아는 것을 배운 사람은 참된 신앙의 도리를 배운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도 늘 불안, 공포, 벌벌 떠는 것은 일을 자기가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할 일은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구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책임을 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주의 약속을 믿고 맡기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레마를 주십니다. 주님이 맡았다. 걱정하지 말아라. 레마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레마를 따라서 기쁨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3.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기적
오늘 우리의 참 삶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같습니다.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믿음 그로써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일은 주님이 십자가 걸머지고 다 책임져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하나님이 그렇게 취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예수님께서 날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니 내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들어와서 나를 대신하여 살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나의 인생을 책임져 주신 주님을 믿고 사는 것이 우리 크리스챤인 것입니다. 그저 믿습니다만 하면 여러분은 천국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죄에서 해방되고 허물에서 놓여남 받는 것에만 적용하지 말고 병들었을 때도 똑같습니다. 내가 병에서 고침 받으려면 먼저 합법적으로 내 병을 청산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깨달아 압니까?
4. 이 과정을 삶에 적용하라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다고 말하죠.
구약 이사야 53장에서 보면 저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 슬픔을 당했다고 말했지요.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내 병을 전담해 주셨다. 테텔레스타이. 갚았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해야 될 일은 십자가에서 내 병을 다 짊어지고 청산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마음속에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생각이 나는 죽겠지. 나는 못살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 안돼요. 십자가를 바라보고 저 십자가에 예수님이 나의 질병을 다 짊어지고 고통당하여 청산했다는 것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내 병을 청산한 것을 늘 바라보고 그 다음에는 마음속에 기도하면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날 위하여 질병을 짊어지고 고통을 다 청산했으니 이제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난 다음에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앉으나 서나 나는 병이 나았다. 나는 건강해졌다. 암은 떠나갔다. 관절염은 떠나갔다. 보고 믿고 말하는 것 이를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다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그러므로 오늘 병드신 분들은 예수님이 날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병을 걸머졌다는 것을 깨닫고 여러분이 앉으나서나 여러분 자신을 볼 때 병자로 보지 말고 십자가를 통해서 바라보고 나은 것으로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가장 건강하고 쾌활한 사람이 된 것을 마음속에 늘 꿈꾸고 바라보고 그 다음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믿었으면 그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버스를 타고 갈 때도 시인하고 내릴 때도 시인하고 집에 들어가서 밥 먹을 때도 시인하고 잠잘 때도 시인하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가 나음을 얻었느니라. 그러면 하나님의 치료하는 능력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능력이 성경에 가득하게 약속되어 있을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잘 유도해서 내게 이루어지도록 해야지 구경만 해서는 소용 없습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이 된 것처럼 예수 십자가에서 병을 앓은 것은 내 병을 대신 짊어진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바라보고 이제 건강하게 된 내 모습을 바라보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고백함과 동시에 치료의 능력이 여러분 몸속에 따라 들어오는 것입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참 평안하게 살게 될 것인 것입니다. 그것만 아니라 여러분 우리가 축복 문제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나를 믿는 백성은 머리가 되고 꼬리되지 않고 아래 내려가지 않는다고 했는데 왜 나는 모든 것이 꼬리가 되고 머리가 안되고 늘 남에게 동냥해야 되고 남에게 동양해 주면서 살지 못하고 이러냐. 마음이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내 생애 속에 실천되도록 과정을 밟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저주와 가난을 대신 짊어졌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였으니 이는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나님이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저주했습니다. 땅을 저주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못사는 것입니다. 낭패와 실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저주를 대신 짊어졌습니다. 어떻게, 저주받은 자는 십자가 못 박아 달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저주가 예수를 통해서 십자가에서 다 청산되었다는 것을 바라보고 그리고 난 다음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내 저주를 담당했으므로 예수님 축복 내 축복, 아브라함의 축복 내 축복, 그렇게 여러분께서 믿고 그 다음에는 입술의 말을 늘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께 복 받은 삶을 산다. 머리되고 꼬리되지 않는다.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는다. 자꾸 자기를 축복하고 복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선언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가난과 실패를 걸머진 것을 마음속에 그려보고 그 다음에 그것을 믿고 그 다음 입술로 중얼거리면서 고백하는데 별 볼일 없을 것 같아도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실제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이 보이는 내 세계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은 여러분이 그러한 마음에 사차원의 영성을 협조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여러분 주위에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약속이 내 것이라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예수님이 채찍에 맞았으므로 혹은 십자가에 매달리므로 내 저주를 담당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리고 알고 난 다음에 그것이 내 것이라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잘 된 것을 바라보고 그 다음에는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한평생 목회하면서 세계에서 최대 교회를 이룩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늘 교회 빈자리가 없이 꽉 들어찬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바라보았었습니다. 늘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믿고 나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의 목회자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이루어주셨습니다만 오늘날도 그것이 습관이 되어가지고서 어느 교회나 어느 강단에 가서 빈자리를 보면 안절부절하고 편안하지 않아요. 자리가 꽉 차야지 비어 있으면 마음이 평안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언제나 다른 교회 가면 목사님 보고 당신 현재 자리가 비었으니 마음속으로라도 꽉 들어찬 교회를 바라보십시오. 바라보면 본대로 그 다음 믿으시고 믿으면 믿은 대로 그 다음 입술로 고백하십시오. 고백하면 고백한데로 될테니까... 다른 사람이야 뭐라고 말하든 나는 꽉 들어찬 교회 그것을 마음속에 바라보고 그것을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어떤 사람은 듣고 난 다음에 당신 좀 돌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좋은 방향으로 돌았지 나쁜 방향으로 안돌았으니까 그대로 하라고.. 그대로 하면 그대로 되는 거라구요. 오늘도 여러분 제 말을 들으면서 저렇게 말을 쉽게 하는데 책임을 어떻게 지려고 저렇게 하느냐. 정말 될까? 제가 새파란 신학교 졸업생이 와서 말을 한다면 그렇게 질문해도 좋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50년의 세월을 목회하면서 지나온 세월이라구요. 다 시험해 봤다구요. 박수쳤으니 여러분 박수친 대로 될지어다. 여러분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을 약속해 주셨는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주님이 얼마나 여러분 가난한 것 싫어했든지 여러분 가난을 대신 짊어지고 고난당하고 가난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보고 이런 말을 해요. 조목사님이 자꾸 예수 믿으면 축복받고 잘 산다고 하는데 예수님이 다른 성경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라고 말했습니까? 부자가 천당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조목사님 식으로 다 되면 부자는 다 천당에 못 올라가지 않습니까? 내가 왜 천국에 가면 부자가 와글거리는데? 천국은 부자가 사는 곳인데.. 그 말은 부자가 돈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천당 못들어간다는 말이지요. 가난한 사람은 쉽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 의지하면 부자로 만들어 줄줄 알고서 쉽게 믿지만 이미 부자가 된 사람은 내 구할 것이 없는데 뭐 모자란 것 없는데 뭘 믿으려고... 전도를 안 받으니까 구원 못 받는다는 것이지 부자가 천당, 그냥 부자기 때문에 그냥 못 들어간다는 말은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고 말했었습니다. 이 성경 우리가 고린도후서 8장 9절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하나, 둘 셋.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서로 맞바꾼 것 아닙니까? 저의 부요함을 여러분에게 주고 여러분의 가난함을 저가 맡고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었다고 했으니까 오늘 여러분 위해서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또 누가 묻거든 조용기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말하지 마시고 날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 그는 자기의 부요함을 내게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성경 참 기막힌 성경입니다. 그가 부요하신 자 아닙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가난할 수 있습니까? 부요하신 자로서 산과 들에서 주무시고 얻어 잡수시고 이 세상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한 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셔서 자기의 부요가 여러분에게 넘어가게 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여러분은 항상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내 가난을 다 담당했으므로 나는 부요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꿈꾸십시오. 여러분을 바라볼 때 부요하게 된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시라구요. 그리고 난 다음 믿으십시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고 입술로 고백하십시오. 나는 부자다. 나는 잘산다. 나는 도와주면서 산다. 나는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다. 나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 무엇이든지 일이 술술 잘되어 가는 것입니다. 문제가 풀리고 좋은 일이 생기고 나중에 지나고 보니까 부자가 되어 있더라구요.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이 실제로 살아서 여러분을 위해서 역사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 우리 이것도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이 땅을 저주해 버렸는데 그래서 우리가 일어서고 앉은 곳마다 가시와 엉덩퀴가 나고 괴로운 인생을 살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를 담당해서 청산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였다. 야~ 그러면 여러분이 어떠한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조용기는 복 받은 사람이다. 여러분은 복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복 받은 교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한국에 많으면 한국이 복 받은 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유명한 대학교 경제학 박사가 한국에 와서 강의할 때 자기가 가만히 조사를 해보니까 신흥국으로써 부자가 된 나라마다 부자가 되기 전에 교회가 왕성하고 예수 믿는 신도의 수가 많아졌더라. 그렇게 공산주의자가 그의 입술로 고백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 받은 사람이 많으면 그 나라가 복 받은 나라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주님이 간구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이 오늘 집에 들어가거든 복 받은 사람이 들어간다. 그렇게 말씀하십시오. 밥상을 대하시면 복 받은 사람이 밥상을 대한다. 잠자리에 들어가거든 복 받은 사람이 잠자리에 들어간다. 입술로 축복하면 그것이 실제로 나타나기 때문에 바라보고 믿고 말한다. 이 법칙은 다 행할 수 있으므로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바라보고 믿고 말한다. 그러면 되는 거에요. 나중에 또 잊어버리지 말구요. 그러면 우리가 축복도 받고 병도 그 법칙으로 낫고 축복도 그 법칙으로 축복도 받고 천당 가는 것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천국가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를 통해서 대속했다는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바라보고 꿈꿀 때 지옥에 가있는 나를 꿈꾸면 안돼요.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있는 내 자신을 늘 상상하고 꿈꾸고 그리고 믿고 나는 천국 백성이다. 나는 영생복락을 얻었다. 사는 것과 죽는 것 다 겁나지 않는다. 그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그러니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고 사는 것이 이미 초월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생명이니 우리는 예수님을 모셨으므로 생명을 얻어서 죽음도 겁나지 않고 사는 것도 겁나지 않습니다.
골로새서 3장 1절로 4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이제는 예수님과 내가 일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천당 내 천당, 예수님 보좌 내 보좌, 예수님의 삶 내 삶. 이와 같이 엄청난 새 인종이 된 것입니다. 아담 족속이 아니라 예수 족속이 된 것입니다. 아담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담으로 죽음을 상속받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죽고 부활 영생을 상속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우리가 얻은 축복은 도저히 말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나의 행위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노력해서 내가 힘써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순종하므로 주님께로부터 죄 사함도 받고 의롭게 되고 믿고 순종하므로 모든 허물도 청산되고 거룩하게 되고 믿고 순종하므로 병도 낫고 믿고 순종하므로 축복도 받고 믿고 순종하므로 천당도 가고 모든 것이 믿고 순종하므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므로 예수 믿는 신앙생활은 알고 보면 정말로 편안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주님이 대신 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믿고 순종하고 선물을 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다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헬라어 단어 하나쯤 외워 놓으면 참 재미있습니다. 테텔레스타이. 무슨 말하거든 테텔레스타이를 아냐? 다 이루었다. 주님이 날 위해서 구원도 이루시고 치료도 이루시고 저주에서 해방도 이루시고 천당도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그러면 다 이루어 놓았으니 내가 할 일이 없지 않느냐. 믿고 순종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
신학자 매튜 헨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와서 십자가의 승리를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는 여러분의 치료입니다. 그의 고뇌는 여러분의 평온이고, 그의 신음은 여러분의 노래입니다. 그의 아픔은 여러분의 위로이고, 그의 수치는 여러분의 영광입니다. 그의 죽음은 여러분의 생명이고, 그의 고통은 여러분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면 십자가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거꾸러 생각하면 돼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천당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고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병의 채찍에 맞지 않게 하심이고 예수님이 굶주린 것은 우리가 부자가 되어서 잘 먹고 잘 살려고 만드신 것이요 모든 고통은 예수님이 여러분과 날 위하여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강한 믿음을 가지고 마귀를 대적하고 환경을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한 복음의 은혜를 우리가 알고 깨닫고 믿음에 굳게 서야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은즉 그러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죄의 종, 허물의 종도 되지 말고 병의 종도 되지 말고 저주의 종도 되지 말고 죽음의 종도 되지 말라. 예수님이 주인이 되었은즉 우리는 다른데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품안에 안겨서 예수 이름을 가지고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누리라고 주신 상속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살려고 하면 죽고 죽겠다고 하면 산다
고후 4:10~11 / 조용기목사
<서론>
“살려고 하면 죽고 죽겠다고 하면 산다”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죽는 것보다 좀 더 사는 것이 좋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살려고만 하면 오히려 죽고 죽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많이 듣는 이야기지만 실제로는 힘든 일입니다.
<본론>
1. 왕의 우상숭배 명령을 거역한 세 청년
성경에 보면 중동 일대를 석권하고 천하왕으로 자부하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수도에 자기 모습의 금우상을 세워 놓고 자기 나라의 모든 지도자들과 수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동원시켜서 우상에 절하는 예식을 선포했습니다. 엄청난 모임입니다. 온 세계를 석권하고 난 다음에 자기의 영광과 권세가 얼마나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민관 상관할 것 없이 모아서 상량식을 하는 날이니까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두라평지에 세운 높이 60규빗 너비 6규빗되는 금신상에 제막식에서 누구든지 절하지 않는 사람은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는 군중 가운데 큰 불구덩이를 만들어 놓고 불이 활활 타고 있습니다.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 사람은 여지없이 그곳에 던져 놓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유다민족의 사람들 중에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세 청년은 엄청나게 머리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택함을 받고 요사이 말하면 도지사격인 그런 위치에서 일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세 청년이 서로 언약한 것은 우리는 절대로 우상에 절하지 말아야 된다. 우리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에 절하다가 이 모양이 되었으니 우리는 절대로 다른 신에 절하지 말고 우상을 섬기지 않기로 하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음악소리가 날 때 모두다 엉덩이를 치켜 들고 땅에 머리를 대어서 우상 앞에서 절을 하는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뻣뻣이 서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동료들이 시기, 질투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즉시로 느부갓네살 왕에게 가서 왕이여, 왕이 택해서 도지사로 세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사람은 음악이 울릴 때 다른 사람은 다 절을 하나 절을 안했습니다. 이것은 왕에 대한 도전이요, 우리 신에 대한 도전이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본대있게 풀무불에 던져 넣어야 됩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는 분해서 몸을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명령에 불순종한 놈이 자기 도를 다스리는 자가 되었다는 후회도 있고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이제라도 내가 기회를 한번 주겠으니까 준비했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가 있겠느냐.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내가 만든 금신상에 절을 하면 내가 사면해주겠거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여부없이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 타협 없는 신앙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100살에 낳은 아들을 모리아산에 재물로 드리라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것처럼 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산천초목이 떠는 위엄과 권세를 가지고 이 세 청년들에게 명령을 했는데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좋은 삶을 살았습니다. 신앙이 독실했습니다. 그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말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느냐. 왕이 듣고 있는데...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므로 그가 살아있다면 그를 섬기는 우리를 위해서 역사해서 불에서 안 타죽고 왕의 협박에도 건져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 바라고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도 우상은 섬기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지 아니하셔도 하나님을 섬기고 의지할 것입니다. 그 참 놀라운 말입니다. 건져주실 것을 바라고 불순종하는 것은 우리도 다 할 것인데 안 건져줘도 불속에 들어가서 죽겠다고 하면 그 신앙은 견줄 데가 없습니다. 비교할 수 없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러니 느부갓네살이 앉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야 이놈들아! 이 세 놈을 잡아서 묶어 가지고서 당장 온 대중이 보는 앞에 불에 던져 넣어라. 무시무시한 순간이었습니다. 왕의 명령이 너무 엄하고 풀무불이 심히 뜨거우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군인들이 불길에 타죽기도 했습니다.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울 정도로 활활 탔으니 이 세사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결박된채 불꽃 가운데 던졌으니 살아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다 생각하기를 바삭하고 타버릴 것을 생각했는데 던져 놓고 보니까 불구덩이 속에 세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의 결박은 다 풀려지고 네 사람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것입니다. 꿈 같은 일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여보게들 분명 세 사람을 던져 넣었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봐라. 네 사람이 아니냐? 네 번째 사람은 신의 아들 같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와서 손잡고 춤추고 있으니 이것 웬일이냐? 그래서 그는 불구덩이 가까이 가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그만 춤추고 나오너라. 세 사람이 나왔어요. 좀 더 시위를 했으면 좋겠다고 저는 생각을 하는데 너무 빨리 나왔어요. 그리고 왕과 모든 관원들이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보니 머리카락이 안 탔고 옷을 냄새 맡으니 옷에 거스른 냄새도 안 나고 불에 댄 흔적도 없고 여전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였습니다. 그러나 그 네 번째 사람은 사라졌습니다. 그 네 번째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환난 때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건지고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이 다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매 자기를 따르는 자를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은 크게 그 자리에서 깨우침이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말하기를 이제부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돌려라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전도는 기가막힌 멋진 전도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병고침을 받는다든지 악한 습관에서 해방을 얻는다든지 사람들 보는 앞에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건을 가지면 자기만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보는 사람들이 다 은혜를 받습니다. 큰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동경에서 집회 할 때 암이 걸려서 6번 수술한 자매님이 병원에서는 이제는 칼 댈 곳이 없다. 온 몸에 암이 다 퍼졌는데 어디다 칼을 대느냐. 죽을 날만 기다리라고... 숨조차 쉬기 어려운데 한국 오산리최자실금식기도원에 가자고 해서 그의 형제간이 그를 붙들고 기도원에 와서 사흘간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몸이 너무 약해서 사흘동안 금식기도하는데 너무 괴로워요. 그리고 난 다음에 동경순복음교회의 목사인 시가끼 목사의 부탁을 해서 내 사무실에 왔어요. 내 사무실에 왔는데 걸음도 걷지 못해요. 완전히 살았다하나 죽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머리에 손을 얹었는데 내 속으로 하나님이 과연 이런 분을 고치겠는가? 내 스스로가 믿음이 안 생길 정도로 시체 같아요.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해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그 병을 고쳐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하고 얼굴을 들라고 하니까 얼굴이 창백하던 사람이 얼굴이 빨갛게 되었어요. 그래서 너무 흥분해서 빨갛게 된 것이다 싶어서 빨리 모시고 나가라고... 이번에 내가 동경집회에 가니까 완전히 청년같이 활달하게 봉사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한국에서 일본으로 돌아갈 때는 고통이 다 사라지고 숨쉬기도 그렇게 좋고 그래서 일본에 가자마자 자기 치료하는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조사를 해봐달라고 하니까 할 필요 없다고... 조사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또 무슨 조사를 한단 말이오? 암이 그렇게 쉽게 들었다가 쉽게 낫지 않는다. 잠잠하라고... 아니 그래도 조사해봐 달라고... 그래서 CT조사를 했는데 의사가 화닥닥 놀라면서 아니 어디 갔다 왔느냐고 그래요. 그래서 한국 기도원에 갔다왔다. 이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온 몸을 새까맣게 태우듯이 먹어간 암이 하나도 없다. 다 나았다. 그래서 그 병 나은 것이 자기에게만 나은 것이 아니라 자기를 치료한 의사도 나도 믿어야 되겠다고... 전도를 하고... 우리 예수 믿는 신앙생활은 자유와 해방이 반드시 따르는 것입니다. 마귀에서 해방되고 여러 가지 고통에서 자유를 얻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것입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내가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기름 부으시고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눈 먼 자에게는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며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함이라. 이런 놀라운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우리 생활 속에 나타낼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마음속에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 믿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고 여러분이 담대하게 말하면 오늘날도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이방에 나가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시행한 것을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 하십니까?
느부갓네살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금 신상에 절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고 권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죽기를 각오하고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두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에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같이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갖가지 두려움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의 두려움을 넉넉히 이기고 이렇게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다 같이 한번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야훼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 118:6) 하나님이 내 편이다. 내 빽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하겠는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 그림자처럼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마음속에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2.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을 공경한 다니엘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을 공경한 다른 이야기가 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니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바벨론은 메대와 파사 나라에 의해서 망했습니다.
전 구라파와 중동은 파사의 다리오왕의 통치하에 들어갔는데 다리오 왕이 역시 유대인의 포로가 되어서 다리오 왕에게 끌려온 다니엘이라는 사람을 너무 사랑하고 그를 굉장히 높여서 그 나라 총리대신 세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으로 삼고 주된 총리로 삼아서 왕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의논하므로 다른 사람들의 시기와 분노가 굉장히 가득 찼습니다. 유대인들이 여러분 오늘날 온 세계 가서 정치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나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나 학문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거의 유대인이 과반수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유대인들은 그 가슴속에 야훼를 섬겼기 때문에 나를 아는 사람을 내가 높이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1대, 2대, 3대째 내려가면 어느 곳에 가나 머리가 되고 꼬리가 안 되는 하나님의 축복이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니엘은 파사 국가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직을 얻고 왕의 총애를 받기 때문에 다른 총리들과 관원들이 굉장히 미워하고 어떻게 하든지 다니엘을 넘어뜨리려고 다른데 넘어뜨릴 조건이 없고 오직 그가 하루에 세 번씩 아침, 점심, 저녁때 집으로 돌아가서 동쪽으로 창문을 열어 놓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을 보고 신앙으로 이 놈을 때려 잡아야 되겠다. 그래서 그들이 모여서 왕에게 아부를 합니다. 다리오 왕이여, 왕은 천하에 비교할 수 없는 왕인데 누구든지 왕에게 불경한 행동을 하면 그는 죽여야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시작해서 30일 동안 어떤 신이나 어떠한 우상에게 기도를 하거나 예배를 하는 사람은 다 잡아 죽여야 합니다. 왕의 권위를 세워야 합니다. 이 많은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이 권위는 왕 이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는 사람들은 잡아 죽인다는 특별한 명령을 포고해야 합니다. 왕이 자기 위해서 그렇게 말해주니까 기분이 좋다 말입니다. 도장을 탁 찍었습니다. 다니엘이 보니까 자기를 노리고서 그렇게 하는 것을 알았다 말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것을 알고도 집으로 돌아가서 창문을 동쪽으로 열어 놓고 아침, 점심, 저녁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현장에서 잡혔어요. 그를 노리고 있던 다른 관원들이 와서 현장에서 잡았으니 왕이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왕이 그때야 늦게 깨닫고 다니엘을 잡아 죽이려고 너희가 모함했구나. 그러나 이제 정말 왕의 권위 때문에 안 죽일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을 사자굴 속에 던져 넣어라. 며칠 굶은 사자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있습니까? 이리 뛰고 저리 날뛰다가 다니엘이 굴속에 달아매서 내려오니까 우리 생각하기에는 그냥 달라들어서 뼈까지 부서뜨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다니엘이 내려오는데 사자들이 아주 얌치 있는 여성같이 앉아서 목을 쭉 내밀고 꿈쩍도 안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천사가 와서 벌써 이 사자들의 입을 막았으므로 사자들이 꿈쩍 합니까? 왕은 한밤을 지나고 난 다음에 너무너무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잠을 못잤습니다. 사자굴 앞에서 울음 섞인 소리로 다니엘아, 네가 그렇게 섬기던 하나님이 너를 보호해 주시더냐? 다른 사람들은 아이고 임금이 참 헛된 짓 한다. 배고픈 사자가 다니엘이라고 내버려 두겠느냐? 그런데 곧장 가서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아이고 살았구나. 내가 왕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도 아니고 왕에게 손해를 끼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왕이여, 하늘의 천사가 와서 나를 보호해 주어서 살아났습니다. 빨리 다니엘을 끄집어내라. 그래서 다니엘을 끄집어 내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긁힌 자국도 하나도 없다 말입니다. 그리고 사자가 그냥 고함을 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다니엘을 참소한 총리들과 높은 사람들을 모두다 끄집어 내어서 이 사자굴 속에 던져라! 사자들이 달라 들어서 내려오기도 전에 뼈를 꺾어 버렸습니다. 이런 신앙이 위대한 유대민족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꼭 살라고 하면 못살아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서 나가면 오히려 살아요.
3.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
실제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이것을 절실히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되 죄가 없이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없이 태어나서 원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입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처럼 희노애락이 다 있고 먹고 입고 자고 하는 모든 것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들을 대신해서 죄를 짊어지고 청산한 재물로 왔기 때문에 죽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 죽어야 하는데 주님이 죽기를 싫어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 안하려고 자꾸 하지만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기를 싫어하셨습니다. 죽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살려달라고 간언을 했습니다. 죽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죽는 것은 자기는 죄를 한 번도 안 지었는데 아담의 자손들이 지은 그 죄를 다 자기가 짊어져야 되니까 지옥에 떨어져서 고생할 그 죄값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져서 청산하니까 그 괴롭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태복음 26장 38절로 39절에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죽음에 대해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게 되었어요.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보십시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할 수만 있으면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내가 살고 인생들이 다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뜻이 내가 죽는 것이면 내가 아버지의 뜻을 받들 것이겠습니다만 방법만 있으면 나를 살려 주십시오. 성경에는 보니까 달이 밝은 달밤인데 예수님이 이 기도를 하는데 예수님 얼굴에 땀이 물줄기 같이 흐르는데 핏방울이 되어서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마음에 고통스럽고 괴로웠든지 땀이 피가 되었습니다. 머리에 핏방울이 뚝뚝뚝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아~ 기쁘다. 죽을 날이 왔다. 내가 대속의 재물이 되겠다. 할렐루야~ 하고 십자가에 올라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자기가 걸머질 필요가 없는 죄악을 대신 걸머졌는데 주님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알면 자기가 3년 반 동안 가르친 제자들이 다 배신했습니다.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고쳐 준 환자들, 돌봐준 유대인들이 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등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따라서 오며 울고 울고 가슴을 치는 그 어머니와 어머니의 형제들을 볼 때 더 마음에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세상 죄를 다 짊어졌으니 그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인으로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하늘을 쳐다봐도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구렁이 있고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다가 생손에 대못을 박고 발가벗겨 십자가에 매달렸으니 그 수치와 곤욕이 어떠하겠습니까? “제구시쯤에” 우리 시계로 오후 세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버림받은 심정을 느꼈습니다. 이제 예수님 조차도 버림받았다. 이제 나는 영원히 지옥에서 불탈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오로지 여러분과 나의 죄악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 죄악을 인함이라. 저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저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은혜라는 것은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 왜, 내가 너 때문에 몸 찢고 피 흘리고 고생 당했기 때문에...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 저가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내 모든 병을 고치시며 내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며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내 소원을 만족케 하사 내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해주시기 위해서 그는 영원히 하나님께 버림받고 그 마음에 한없는 불안과 고통을 겪었고 육체의 고통도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숨이 끊어지기 전에 내가 다 이루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성전의 휘장이 쫙 찢어졌습니다. 지성소 안에 법궤에 임재하여 계셨던 하나님이 일반 사람이 그 지성소에 들어오면 다 죽었습니다. 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피를 가지고 들어갔지 보통때는 못 들어갑니다. 그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모든 종교는 우리가 좋은 일을 해야 되고 종교적인 율례를 지켜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선물로 구원을 받습니다. 무엇을 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주겠다.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셔서 구원을 선물로 주는 것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우리가 믿기만 하면 그 다음 일은 주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너무 공짜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값없이 용서해 주시고 의롭다함을 주시는 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귀와 세상은 너무나 흉악하기 때문에 인간의 선행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생명을 가져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살았으면 우리는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끝까지 참고 죽으셨기 때문에 주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7~9)
마가복음 10장 45절에도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예수님께서는 우리 위해서 나 위해서 고난당했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1절 같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은 그 공로를 내 것으로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생명도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당 내 천당, 예수 영생 내 영생. 이렇게 나와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산 것은 우리가 아니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모든 것은 법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품에 안겨서 같이 죽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는 우리는 고통을 안 당했는데 예수님이 법적으로 우리를 끌어안고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것은 우리가 당한 것이요, 예수께서 자유를 값 주고 사신 것이므로 다 우리의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 십자가는 참으로 위대한 진리요 생명입니다. 살고만 싶어 하면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난 다음에 우리의 생각에 깨달아야 될 것은 제가 늘 말하는 예수 십자가 내 십자가, 예수 고통 내 고통,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이게 기독교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고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상관이 있지요. 죽고 살고 일체가 되었으니까. 우리가 마음속에 확실히 깨달아야 될 것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사 나의 모든 죄악을 자기 죄악으로 끌어안고 나의 허물을 자기 허물로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죄를 사하고 허물을 사하고 의로움과 거룩함을 선물로 주시고 나의 병을 자기의 병으로 끌어안고 채찍에 맞아서 병을 다 청산하고 나의 저주와 가난을 십자가에 매달리므로 다 청산하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주시고 그 다음 나의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음부에 내려가지 않고 낙원으로 들어가서 같이 있다가 주님 재림하시는 날 주님과 같이 재림하여 내려와서 부활의 몸을 얻어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이것을 늘 생각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깨닫지 못하므로 주님의 은총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생각하고 깨닫게 하기 위하여 성찬을 마련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주가 우리 안에, 우리가 주 안에 일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라는 것입니다. 항상 여러분의 생각 속에 그리스도가 날 대신해서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쳐다봐야 돼요. 갈보리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매달리신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매달린 것이다.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여러분은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저것은 인간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니 내가 믿어야 한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를 믿어서 하신 일을 본받아 우리가 시인하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여러분이 혼자 있을 때라도 그냥 있지 마시고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당 내 천당을 입으로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깨달아 알고 묵상하고 바라보고 믿고 입술로 말하면 그 은혜가 여러분의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생활 속에서 모든 것 다 제켜 놓고 가장 중요한 것이 갈보리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을 우리 몸에 항상 걸머지고 있으라고 바울은 항상 말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있으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생각하고 예수 부활을 내 부활로 생각하고 깨달으면 그 사람은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서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깨닫고 바라보고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해방된 나 자신을 바라보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 모세가 뱀에 물려서 죽어가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 놋뱀을 만들어서 높이 달았습니다. 쳐다보고 믿는 자마다 독에서 해방되고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내가 그와 같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죄를 짓고 추악하고 불의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을 위해서 높이 매달릴 것이다. 나를 쳐다보고 믿는 사람마다 구원을 받는다. 얼마나 위대한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까? 여러분 누구든지 이 진리를 믿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님은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하면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 예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 속에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여러분 깨닫게 하시고 여러분이 꿈꾸게 하시고 여러분이 믿게 만드시고 입으로 시인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므로 여러분은 하늘나라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자리에 계셔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하여 죽고 살아나심을 따라 영원히 살게 된 여러분을 끌어안고 축복을 주시고 계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