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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유소망(愛有所亡)
뜻이 더없이 지극하더라도 사랑에는 늘 끝이 있다는 말이다.
愛 : 사랑 애(心/9)
有 : 있을 유(月/2)
所 : 바 소(戶/4)
亡 : 망할 망(亠/1)
출전 :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이 성어는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노(魯)나라 현인인 안합(顏闔)이 위(衛)나라 영공(靈公)의 태자를 가르치러 가게 되어 거백옥(蘧伯玉; 노나라의 대부)에게 물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는 천성적으로 덕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와 함께 사귐에 있어 방종에 맡겨 두면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이요, 법도를 지키게 할 경우에는 내 몸을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지혜는 남의 잘못은 잘 보지만, 자신의 잘못은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을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顏闔將傅衛靈公大子, 而問於蘧伯玉曰 : 有人於此, 其德天殺. 與之為無方, 則危吾國; 與之為有方, 則危吾身. 其知適足以知人之過, 而不知其所以過. 若然者, 吾柰之何?
이에 거백옥이 대답했다. "좋은 질문이구나! 무엇보다도 먼저 그를 경계하고 조심해서 자신의 몸가짐을 바로 해야 한다. 겉으로는 따르게 하고 속마음도 맞춰 주도록 해라.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여전히 두 가지만으로는 근심이 있다.
蘧伯玉曰 : 善哉問乎! 戒之, 慎之, 正女身也哉. 形莫若就, 心莫若和. 雖然, 之二者有患.
(...)
자네는 사마귀를 모르는가? 사마귀는 자기 팔을 휘두르며 수레바퀴에 맞서려 하면서 자기가 감당 못함을 모르네.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재주를 자랑한다고 생각하네. 이를 보아서도 자네는 경계하고 조심하라. 자신의 훌륭한 재주를 자주 드러내 그를 거역하면 위태롭게 될 것이네.
汝不知夫螳螂乎? 怒其臂以當車轍, 不知其不勝任也. 是其才之美者也. 戒之, 慎之, 積伐而美者以犯之, 幾矣.
자네는 또 범을 기리는 사람을 알 테지! 그가 범에게 날고기를 호랑이에게 주지 않는 것은 그 범이 산 짐승을 물어 죽이는 버릇이 매우 사나와질까 경계함이요, 또한 먹이를 통째로 주지 않는 것은 먹이를 찢어발기려 하는 버릇이 사나워질까 경계함이다. 그러므로 범의 배고플 시기와 배부를 시기를 잘 살펴 그 사나운 기운을 달래주기만 하면 비록 범일지라도 저를 기르는 이에게 꼬리를 치게 된다. 범에게 사람이 물려 죽는 것은 범의 본성을 거스른 까닭이다.
汝不知夫養虎者乎! 不敢以生物與之, 為其殺之之怒也; 不敢以全物與之, 為其決之之怒. 時其飢飽, 達其怒心, 虎之與人異類而媚養己者, 順也. 故其殺者, 逆也.
말을 사랑하는 사람은 값비싼 광주리에 말똥을 받고 대합조개로 장식된 그릇에 오줌을 받기까지 한다. 하지만, 어쩌다 말의 등에 모기나 등에가 달라붙은 것을 보고 갑자기 채찍을 내리치면, 놀란 말은 재갈을 물어 끊고 머리를 여기저기 부딪치고 가슴을 다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생각(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했지만 도리어 사랑하는 말은 잃게 된 셈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夫愛馬者, 以筐盛矢, 以蜃盛溺. 適有蚉䖟僕緣, 而拊之不時, 則缺銜毀首碎胸. 意有所至而愛有所亡, 可不慎邪!
(莊子/人間世)
2500년 전의 이 고사가 현대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자녀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면 말을 아끼는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아이들에게 별로 의미없는 명품 옷과 고급 환경 등으로 과도하게 베풀며 키우고, 그러다 아이를 너무도 아끼는 욕심에서, 아이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강요하며 이끌거나 아이가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힘든 정서적 자극을 가한다.
아이는 좌절하거나 반발하고, 그리하여 아이의 역량을 억압하거나 장래를 망친다. 더욱 나아가서는 말에게 가슴을 걷어 차이듯 큰 상처를 입고,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이 망가뜨린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아이에 대한 애정이 크면 클수록 잘못된 결과가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자는 이러한 사람의 심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사랑으로 인해 사랑을 잃다(愛有所亡). 사랑은 상대의 취향에 따라 애정을 배푼다면, 집착은 자신의 욕구에 따라 애정을 배풀며 사랑은 상대의 행복을 바란지만 집착은 자신의 만족을 충족시키려 한다.
▣ 애유소망(愛有所亡)
주역(周易)의 항룡유회(亢龍有悔)란 말을 보고선 한 동안 이 말이 내 뒷골 어딘가에 박혔습니다. 지금 치솟는 용은 나중에 후회하리라. 그런데 왜 저 잘나가는 용이 후회할까를 생각했습니다. 생각해낸 답은 이런 겁니다. 왜냐하면 그는 계속 저렇게 잘나갈 순 없을 거니까. 말하자면, 주역은 우리의 시력에 주의를 준 겁니다.
우리에겐, 눈 앞에 닥친 것 만이 보이거든요. 다른 건 안보이죠. 저 예언의 경전은 '잠깐 뒤'를 보여줌으로써 세상 돌아가는 통박을 역설합니다. 올라가는 용은 곧 내려갈 수 밖에 없다. 올라갈 때 좋았다면 내려갈 땐 그 좋음이 경감하거나 싫음이 증대되는 형태로 마음이 바뀌리라.
그러면 그 싫음 미리 계산해서 좋을 때조차도 좋아하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그건 주역의 의도가 아닐 겁니다. 좋을 때 좋음이 완전하지 않은 것처럼 싫음에 대해 너무 낙망하거나 놀라지 말라는 게 그 취지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한창 좋은 팔자에게 초치고 소금 뿌리려는 게 아니라, 좋음을 아끼듯 싫음도 에누리해서 받아들일 줄 알아야 삶이 다소나마 평온해진다는 개연성을 설파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느냐고요? 장자(莊子)의 애유소망(愛有所亡)을 얘기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장자 시대엔 말이 애완동물이었습니다. 요즘 샴푸해 주고 마사지해 주고 러닝머신까지 사주는 견공 못잖게 당시 사람들은 말을 애지중지했나 봅니다. 말에 드레스를 입히는 것은 물론이고 말발굽에 금을 박고 사람도 못하는 호사스런 장식으로 말을 꾸몄습니다. 나보다 더 말을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봐. 그게 그 당시 부자들의 자랑이었나 봅니다.
한 애마아저씨가 장자에게 찾아와 울면서 호소하는 겁니다. "대체 이걸 어찌 하오리까?" 당시의 명카운셀러 장자는 그 말을 들어줍니다. "무슨 엄청난 괴로움과 슬픔을 겪었기에 그러느냐?" 애마엉클은 말씀하십니다. "제가 넘넘넘 사랑하는 마(馬)님이 한 분 있었걸랑요. 저는 그 말을 귀히 여겨 잘 때도 같이 자고 똥도 만지고 내 먹을 것 아껴서 그에게 다 줬지요. 그런데..."
흑흑흑 우는 아저씨를 달래서 장자는 마지막까지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어제 말입니다. 이 말이 뒷발로 저를 찼어요. 먹이를 먹는 모습이 하도 이뻐서 그 허벅지를 쓰다듬어 주려고 하는데 제 가슴을 있는 대로 힘껏 갈기지 뭡니까? 이 사랑스런 놈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찌 사랑이 사랑을 몰라 주는지요?"
잠자코 듣고 있던 장자는 한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죽은 뒤에 마누라가 장례식도 끝나기 전에 바람 피울 걸 예측했던, 그 눈밝은 장자이니, 저 애마남이 지닌 문제의 핵심을 놓칠 리 없었을 겁니다. "그건 말입니다. 당신이 사랑을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상심입니다. 사랑에는 눈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기본적으로 눈이 달려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랑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당신이 사랑 아니라 사랑 할배를 모셔도, 그 뜻이 지극해서 하늘이 경끼를 하더라도, 사랑은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게 의유소지(意有所至) 애유소망(愛有所亡)입니다. 뜻이 더없이 지극하더라도 사랑에는 늘 끝이 있다. 영원하지 않은 인간, 직선의 끝없는 삶이 아니라 선분의 태엽 길이 만큼만 살아야 하는 인간이 영원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우습느냐. 하지만 인간은 사랑을 하게 되면 너무나 쉽게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믿어버린다. 믿을 뿐만 아니라, 사랑은 영원하다는 생각을 진리처럼 세상에 퍼뜨리지 않느냐.
그러나 나, 장자가 톡 까놓고 말하노니 아무리 니가 공을 기울여도 사랑은 시든다. 사랑에 봄이 있듯이 사랑에 가을이 있다. 그런데 말이 뒷발 찬 걸 가지고, 장자는 왜 뜬금없이 사랑의 유한을 말했을까요. 사람이 말을 사랑했지 말이 사람을 사랑한 건 아닐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장자는 그 사소한 질문에 자기의 철학을 슬쩍 내놓은 것입니다. "사랑 사랑 사랑 타령 하지 말라. 그건 사그라드는 것이니라." 항룡유회처럼 얄미운 말입니다.
좀 해피한 몽상을 즐기려 하는 때에 저렇게 영감쟁이처럼 나타나서 험한 말을 할 게 무어란 말입니까? 그러나 장자의 저 말은 중요한 효용을 지닙니다. 사랑을 시작할 때의 두려움처럼 사랑이 잘 나갈 때도 그 두려움을 잊지 말란 얘깁니다. 사랑하니 이제 종신보험일 거라고 믿지 말란 얘깁니다.
우린 영원의 기왓장에 나란히 이름 써놓고 맹세했으니 별일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하지 말란 얘깁니다. 오히려 그 자랑과 믿음을 덜어 조심조심 사랑을 보듬고 아껴 짧은 인생이나마 그 안에선 롱런하란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리 지극하더라도 사랑은 끝이 있다. 그러니 "있을 때 잘하지!" 여인의 저 애교어린 뾰로퉁이, 실은 장자 말씀입니다.
▣ 장자(莊子) 이야기 - 인간세(人間世)
네 목을 잘리우지 않고 천수를 누리리라.
4-1
무릇 도(道)는 잡스러워 하지 않으니 잡스러워지면 많아지고 많아지면 근심이 생기고 근심이 생기면 남을 구제할 수 없느니라. 따라서 예전의 지극한 사람은 먼저 자신을 다스리고 그리고 나서 남을 구제하였다.
도는 세상에 충만하나 이 일 저 일에 구차하게 관여하지 않는다. 장자 1장 7절에서 연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덕은 만물과 어울려 하나가 되나 세상은 어지럽기를 바라고 천하의 일은 복잡하니 이것이 인간세상의 일이로다. 선인은 아무도 해칠 수 없고 홍수가 나서 하늘에 닿아도 빠져 죽지 않으며 가뭄이 들어 쇠와 돌이 녹고 땅과 산이 불타도 데이지 않는다. 몸에 붙은 먼지와 때, 쭉정이와 겨를 가지고 요, 순 임금을 만들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세상일에 몰두하겠는가?"
선인의 삶은 도 그 자체다. 도는 구차한 것을 싫어하니 선인 역시 세상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도를 깨닫고 천지의 바름(天地之正)에 올라타고 육기의 변함(六氣之變)을 제어할 줄 알고 이로써 무궁(無窮)에 노닐 수 있는 선인이 왜 세상일에 관여할 것인가? 이는 대학생이 초등학생들의 유치한 시비에 관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도는 세상에 충만하나 구차하게 이것저것의 시비를 가르는 일에 관여하지 않음으로 순결하다. 순결하다는 것은 잡스럽지 않다는 것이며 잡스러워지면 많아지고 많아지면 근심이 생긴다. 근심하는 자는 남을 구제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예전의 지극한 사람은 먼저 자신을 다스려 순결하게 한 후 그리고 나서 남을 구제한 것이다.
흔히들 많은 정치인들이 선거에 나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려 한다는 말을 한다. 이는 국가와 민족을 구제하겠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자신도 못 다스리면서 남을 구제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러하기에 공자는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말하였다. 천하를 구제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몸을 닦아야 하고 자신의 가정을 조화롭게 운영해야 하며 그러고도 덕이 차고 넘쳐 밖으로 흐를 때 그때서야 비로소 출사표를 던지고 남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4-2
덕(德)은 이름(名)을 내세움으로 허물어지고 지(知)는 다툼(爭)으로 인해 빠져나간다. 이름을 내려 하면 서로 간에 알력이 생기게 되고 지식이 많아지면 다툼 또한 많아진다. 이름이나 지식이라는 것은 둘 다 흉기(凶器)니 극진히 행할 바가 아니다.
또한 덕이 두텁고 신의가 굳은 사람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기질을 알지 못할 수 있고 이름을 위해 경쟁하지 않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억지로 인의(仁義)의 옳은 말을 폭인(暴人) 앞에서 사용하는 것은 남의 잘못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려 하는 것이니, 이는 결국 남을 해치는 일이다. 남을 해치는 자는 반드시 자신도 해침을 받게 되니 이를 극히 주의해야 한다.
아무리 덕이 있는 사람이라도 이름을 내세우고 세상의 시비를 가르려 한다면 허물어지게 된다. 이는 평소 훌륭해 보이는 사람들이 정치판에 뛰어드는 순간 바로 망가지는 메커니즘과 같다. 덕은 이름을 내세움으로 허물어지고 지식이라는 것은 다툼으로 인해 빠져나간다.
만물은 모두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만물은 모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자기를 상대방이 보면 저것이 되고 자기가 스스로를 보면 이것이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힘써 모두 자신들의 주장을 하나 그것이 본래 같다는 것을 모르는 것을 조삼(朝三)이라 한다. 명분과 실리에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시비를 가려 기뻐하고 화를 내니 이를 바로 조삼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큰 앎(知)은 한가롭고 작은 앎은 좀스럽다 하고 큰 말(言)은 담담하나 작은 말은 시끄럽다고 하였으며 이름이나 지식이라는 것은 둘 다 흉기니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덕이 두텁고 신의가 굳고 큰 지식을 가진 사람도 때로는 실수를 하는데 바로 다른 사람의 기질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해 그런 사람들 앞에서 바른 말을 하는 것이다. 예수는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말했다. 진주는 귀한 것이나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에게나 귀한 것이지 그 가치를 모르는 돼지에게 진주는 돌멩이와 다를 바가 없다.
지혜자의 말도 그러하다. 그 말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에게는 목숨을 살리는 것이지만 폭인에게는 신경을 거슬리는 주제넘은 조언일 뿐이다. 폭인은 입에 발린 달콤한 말은 좋아하지만 자신의 몸을 살리는 양약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은(殷)나라 주왕(紂王)에게 충언을 했던 비간(比干)은 소금에 절여지고 기자(箕子)는 노비(奴婢)가 되었으며 한 때 유대인의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되었던 세례 요한은 왕의 가족사에 관여하다가 목이 잘린 것이다.
폭인 앞에서 그의 잘못을 꾸짖는 것은 폭인의 잘못을 이유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이니 이는 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상처를 준다는 것은 해친다는 것이니 남을 해친 자는 자기 또한 반드시 해침을 받게 된다. 그러니 최선의 방법은 폭인 근처에 가지 않는 것이다. 공자의 사랑하는 제자 안회(顔回)가 위(魏)나라 젊은 왕의 잘못을 일깨워주기 위해 위나라로 가려 했을 때 공자가 크게 놀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4-3
믿어주지 않는 사람에게 솔직한 말을 하는 것은 그로부터 죽음을 부르는 일이다. 걸왕(桀王)은 관룡봉(關龍逢)을 죽이고 주왕(紂王)은 왕자 비간(比干)을 죽였다. 이들은 인격을 잘 닦은 사람들이었지만 신하의 신분으로 오히려 백성의 편을 들어 그들을 동정하다가 임금의 눈에 거슬리게 되었다. 그들의 훌륭한 인격이 오히려 임금이 그들을 제거하는 빌미가 되었으며, 결국 이들은 이름 내기를 좋아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꾸밈이 많으면 고리타분하지만 벌은 면할 수 있다. 악인을 개선시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니 과욕부리지 말고 오히려 그를 피하라. 넘치는 말의 결국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진시황(秦始皇)은 평소 한비자(韓非子)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적국(敵國) 사람이라 믿을 수 없다는 이사(李斯)의 주장에 그를 죽이고 만다.
반복하지만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세상에 충고가 그렇게나 많은 것은 충고가 값싼 것이기 때문이라고 딕슨 와츠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도를 이루고 덕이 넘치며 지식이 충만한 사람은 폭인의 근처에 가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극히 말을 삼가야 한다.
남에게 충고하는 것은 그의 실수를 핑계로 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상처를 주는 것은 남을 해치는 것이니 남을 해치는 자는 필히 그 자신도 해침을 받게 될 것이다. 믿어주지 않는 사람에게 솔직한 말을 하는 것은 그로부터 죽음을 부르는 일이니 이를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4-4
악인과 함께할 때 최선의 방법은 제(齊)하는 것이다. 공자는 제(齊)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첫째, 마음을 하나로 모아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둘째,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만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氣)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道)는 오로지 빈 곳(虛)에만 있는 법이다. 이렇게 비우는 것을 마음의 제(齊)라 한다. 폭인은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우리는 싫은 사람이라고 마냥 피할 수만 없다. 그러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자는 악인과 함께 할 때 최선의 방법은 제(齊)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제(齊)란 마음을 모아 기(氣)로 듣는 것을 말한다. 귀가 아니라 기(氣)다. 사람에게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5감뿐만 아니라 육감(肉感)이라는 영감(靈感)이 존재한다. 영감으로 듣는 것이 바로 기(氣)로 듣는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보고 듣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인간은 단지 20~20000Hz 사이의 소리만을 들을 뿐이고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은 단지 가시광선에 불과하다.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영역이 이렇게 좁으니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3차원의 공간과 4차원의 시공간에 살고 있으나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11차원의 공간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7차원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따라서 귀로 듣는 것보다는 기(氣)로 듣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지만 기(氣)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인다. 이렇게 텅 빈 마음을 유지하는 것을 심제(心齊)라고 한다.
4-5
심제(心齊)를 실천하기 전에는 스스로가 실재처럼 존재하지만 심제를 실천하여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을 비움(虛)이라 한다.
虛室生白(허실생백)
吉祥止止夫且不止(길상지지부차부지)
是之謂座馳(시지위좌치)
텅 빈 방이 흰 빛을 뿜어낸다. 길하고 상서로움은 머무르고 또 머물러야 나온다. 이것을 모르고 머무르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앉아 있기는 하나 달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심제의 이치를 모를 때는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심제의 도를 실천하고 나면 나는 사라지고 우주만이 남는다. 너와 나는 다른 것이 아니며 나와 자연과 우주는 다른 것이 아니라 두루 통하는 하나다. 텅 빈 방이 흰 빛을 뿜어낸다(虛室生白). 그러니 마음을 비우라는 말이다. 길하고 상서로움은 머무르고 또 머물러야 나온다(吉祥止止夫且不止). 그러하기에 성철스님은 어디 제트기처럼 돌아다니지 말고 한 곳에 머물라고 한 것이다.
이는 공간뿐만 아니라 우리의 머리와 마음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잡다한 지식으로 머리가 차 있거나 세상의 잡다한 욕심으로 우리의 마음이 꽉 차있다면 그곳에 다른 무엇이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성철스님은 신문이고 잡지고 책이고 등등, 문자를 보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 주의할 것이 있다.
성철스님의 말씀은 머리와 마음이 세상의 지식으로 꽉 찬 사람에게 하는 조언이지 머리가 텅 빈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선인은 말한다.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채우고 그리고 나서 비워야 한다고.
4-6
세상에는 지킬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명(明)이요 하나는 의(義)라. 부모를 섬기는 것은 명(明)이니 이를 마음에서 지울 수 없고 의(義)는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이니 천지지간(天地之間)에 이 두 가지를 피할 수 없으며 이를 일컬어 대계(大戒)라고 한다.
자녀가 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것은 효(孝)의 극치요, 신하가 임금을 편안히 섬기는 것이 충(忠)의 완성이다. 자기 마음을 섬길 때 슬픔과 기쁨이 엇갈려 나타나게 하지 않고 피할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여겨 운명으로 편히 받아들이는 것이 덕(德)의 극치다.
세상에는 지킬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명(明)이고 하나는 의(義)다. 명(明)은 하늘과 인간간의 약속이고 의(義)는 인간과 인간간의 약속이다. 어버이를 극진히 모시는 효(孝)는 명(明)이니 이는 사람간의 약속이 아니라 하늘과 사람간의 약속으로 자연의 본성이다. 반면 신하가 임금을 편안히 섬기는 충(忠)은 의(義)로 이는 사람간의 약속일 뿐이다.
그래서 맹자(孟子)는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못할 땐 갈아치우라는 말을 한 것이다. 공자(孔子)는 명(明)과 의(義)는 우리가 삶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대계(大戒)라 하였고 피할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여겨 편히 받아들이는 것을 덕(德)이라 하였다.
4-7
교묘히 말을 다투는 사람들은 양(陽)에서 시작하여 항상 음(陰)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예의를 갖추고 술을 마시던 사람들도 종국에는 싸움으로 대화를 끝내기 마련이다. 지나치면 곧 다양한 교묘한 즐거움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쾌하나 종국(終局)에는 항상 비천(卑賤)하다. 그 시작은 간단하나 나중은 항상 거대(巨大)하므로 말을 함에 있어서는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주역(周易)의 곤괘(坤卦)에 리상 견빙지(履霜 堅冰至)라는 말이 있다. 이는 서리가 밟혀 뭉쳐지면 단단한 얼음이 되니 사소한 일에 조심하라는 말이다. 교묘히 말을 다투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품위 있고 고상하게 시작하여도 결국은 말싸움이나 주먹질로 끝나기 마련이다.
말을 하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의 도가 있기에 말을 하다보면 교묘한 즐거움을 느끼고 뜻 보다는 말 자체에 의미를 두다 결국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일로 다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토론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상쾌하나 종국에는 항상 비천하다 한 것이다. 리상 견빙지(履霜 堅冰至)라는 주역의 가르침처럼 작은 눈덩이가 나중에는 산사태로 번질 수 있으니 말을 함에 있어서 극히 조심하라는 것이다.
4-8
무릇 말이란 풍파(風波)와 같고 행동에는 얻음과 잃음이 있다. 풍파가 쉽게 변하는 것처럼 얻음과 잃음은 쉽게 위험으로 변하므로 참는 것忍이 중요하며 교묘한 말과 일방적인 주장을 삼가해야 한다. 짐승이 죽을 때 음(音)을 가릴 여유가 없기에 그 숨이 거칠어지고 여기에서 사나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의 경우도 이와 같아서 너무 지나치게 다그치면 상대방은 필히 좋지 않은 감정으로 이에 반응하기 마련이다. 말은 이것과 저것으로 시비를 가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말할 때는 항상 조심하고 시비를 가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 도전을 하게 되면 그에 따른 응전을 받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따라서 말과 행동에는 반드시 얻음과 잃음이 있다. 그러나 도전과 응전, 그리고 그에 따른 발전적 도전, 이것은 정반합의 원칙으로 사람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니 말과 행동을 함에 있어 삼가 절제하긴 하되 그 뜻이 명(明)과 의(義)에 맞는다면 용기를 낼 필요도 있다.
짐승이 죽을 때 음(音)을 가리지 못하는 것은 그가 죽게 되리란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 어찌 예의를 따지고 음(音)을 고르겠는가? 그러하니 남을 다그칠 땐 항상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다그쳐야 그로부터 물림을 당하는 일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군주의 명(命)을 고치려 하지 말고 무엇을 이루려고 너무 애쓰지도 마라. 도를 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주어진 명령을 고치려 하고 무언가를 반드시 이루려 애쓰는 것은 위험하다. 마음이 만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게 하고 피할 수 없는 일은 그대로 놔두며 핵심을 키우는데 집중하라. 이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무엇을 더 꾸며서 말하겠는가? 그저 명(命)을 받으면 명(命)을 수행할 뿐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일을 함에 있어 항상 핵심을 찌르는 것이 중요하다. 핵심을 찌르지 못하는 말은 차라리 하지 않음만 못하니 말을 할 땐 항상 그 뜻이 분명하게 해야 하고 본질을 건드려야 한다.
군주의 명령은 설령 그것이 잘못되었다 해도 고치기 힘들다. 군주가 군주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남과 다른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군주 스스로가 알고 있기에 그보다 급이 낮은 신하의 말로써 군주의 명을 고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 주어진 명령을 반드시 고치려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몇 번 정중히 삼가여 고하고 그러고도 군주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저 만물이 그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게 놔 둘 뿐이다. 피할 수 없는 일을 피하려 애쓰지 말고 자신의 핵심 역량을 키우는데 집중하라. 쉽지는 않겠지만 이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4-9
사마귀를 아는가? 화를 내어 팔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수레에 맞서는 자다. 제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행동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조심하고 또 신중하라. 자랑하고 아름다움을 뽐내는 자는 사마귀와 같아 기회를 놓치기 쉽다.
달려오는 수레에 맞서 사마귀가 화를 내어 팔을 휘두르는 것은 스스로의 분수를 모르기 때문이다. 혼마 무네히사는 말한다. 주식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삼위(三位)를 아는 것이라고. 삼위란 시세의 고점과 저점, 그리고 현재의 위치를 아는 것이다. 말로는 쉬운 것 같지만 이 삼위를 알기위해서는 엄청난 공부가 필요하다. 이처럼 스스로의 분수를 아는 것 또한 많은 공부와 경험을 필요로 하는 힘든 일이다.
4-10
쓸모없음의 미학. 쓸모없다는 것은 결코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가장 탁월한 처세(處世)는 쓸모없음의 미학을 깨닫고 그렇게 처신하는 것이다.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덕으로써 남을 대하는 일을. 위태롭고 위태로우니 금을 긋고 그 안에서 노니는 일. 산나무는 스스로를 잘리우고 등불은 스스로를 불태운다. 세상 사람들이 쓸모 있음의 쓸모(有用之用)는 알지만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는 모르는구나.
미인(美人)은 박명(薄命)이라 한다. 재주 많은 사람은 그 수명(壽命)이 길지 않다는 뜻이며 그래서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쥐와 바퀴벌레는 그 쓸모없음으로 오랜 시간을 멸종하지 않고 번식하며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 반대로 고래나 아메리카 들소는 그 쓸모 있음으로 인해 멸종의 위기에 몰려있다. 직장에서도 일 잘하는 부하에게 일 하나를 더시키게 되는 것을 보면 쓸모 있다는 것이 항상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지리소라는 꼽추는 턱이 배꼽에 묻히고 어깨가 정수리보다 높고 두 넓적다리가 옆구리에 닿아 있어 보기 흉한 사람이었지만 바느질하고 빨래하여 열 식구를 배불리 먹였으며 나라에서 군인을 징집할 때도 두려움 없이 사람들 사이를 당당히 다녔고 나라에 큰 사역이 있어도 성한 몸이 아니라 언제나 면제 받았으며 나라에서 병자들에게 곡식을 배급할 땐 언제나 3종류의 곡식과 거기에 장작까지 지급받았는데 성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처럼 외모가 온전하지 못한 곱추도 몸을 온전히 하고 천수를 다하는데 하물며 그 덕이 곱추인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 愛(사랑 애)는 ❶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본디 천천히 걸을쇠 발(夊; 천천히 걷다)部와 기운기엄(气; 구름 기운)部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천천히걸을쇠발(夊)部를 뺀 글자 애(가슴이 가득차다, 남을 사랑하다, 소중히 하다, 아끼다)와 좋아하는 마음에 다가설까 말까(夊) 망설이는 마음의 뜻이 합(合)하여 사랑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愛자는 '사랑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愛자는 爫(손톱 조)자와 冖(덮을 멱)자, 心(마음 심)자, 夊(천천히 걸을 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금문에 나온 愛자를 보면 단순히 旡(목맬 기)자와 心자가 결합한 형태였다. 이것은 사람의 가슴 부위에 심장을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금문에서는 사람의 가슴에 심장이 들어가 있는 모습을 그려져 '사랑하다'를 표현했다. 이러한 모습이 변하면서 소전에서는 마치 손으로 심장을 감싸 안은 것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그래서 愛(애)는 어떤 명사(名詞)의 밑에 붙어서, 위의 명사의 내용에 대하여 가지는 자애(慈愛), 사랑 등을 나타내는 어미(語尾)의 뜻으로 ①사랑, 자애(慈愛), 인정(人情) ②사랑하는 대상(對象) ③물욕(物慾), 탐욕(貪慾) ④사랑하다 ⑤사모(思慕)하다 ⑥가엾게 여기다 ⑦그리워하다 ⑧소중(所重)히 하다 ⑨친밀(親密)하게 대하다 ⑩역성들다(옳고 그름에는 관계없이 무조건 한쪽 편을 들어 주다) ⑪즐기다 ⑫아끼다, 아깝게 여기다 ⑬몽롱(朦朧)하다, 어렴풋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사랑 자(慈),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미울 증(憎), 미워할 오(惡)이다. 용례로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애국(愛國), 사랑하는 마음이나 남녀 사이에 서로 그리워하는 정을 애정(愛情),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애마(愛馬), 사랑하고 좋아함을 애호(愛好), 사랑과 미워함을 애증(愛憎), 윗사람의 딸을 높여 이르는 말을 애옥(愛玉), 남을 사랑함 또는 열애의 상대자를 애인(愛人), 사랑하여 가까이 두고 다루거나 보며 즐기는 것을 애완(愛玩), 아끼고 소중히 다루며 보호함을 애호(愛護), 본이름이 아닌 귀엽게 불리는 이름을 애칭(愛稱), 어떤 사물과 떨어질 수 없게 그것을 사랑하고 아낌을 애착(愛着), 사랑하고 사모함을 애모(愛慕), 좋아하는 사물에 대하여 일어나는 애착심을 애상(愛想), 사랑하는 마음을 애심(愛心), 사랑하고 좋아함을 애요(愛樂), 겨울철의 날이나 날씨 또는 시간을 아낌을 애일(愛日), 사랑하는 아들이나 아들을 사랑함을 애자(愛子), 귀여워 하는 새 또는 새를 귀여워 함을 애조(愛鳥), 사랑하는 아내 또는 아내를 사랑함을 애처(愛妻), 남의 딸의 높임말을 영애(令愛), 형제 사이의 정애 또는 벗 사이의 정분을 우애(友愛), 아쉬움을 무릅쓰고 나누어 줌을 할애(割愛), 모든 것을 널리 평등하게 사랑함을 박애(博愛), 남달리 귀엽게 여겨 사랑함을 총애(寵愛), 남녀 사이에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사랑함을 연애(戀愛), 널리 사랑함을 범애(汎愛), 아랫 사람에게 베푸는 자비로운 사랑을 자애(慈愛), 이성에게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여 상대편도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일을 구애(求愛), 어질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 또는 어진 사랑을 인애(仁愛), 자타나 친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모든 세상 사람을 똑같이 사랑함을 겸애(兼愛), 매우 사랑하고 소중히 여김을 이르는 말을 애지중지(愛之重之), 사랑이 지붕 위의 까마귀에까지 미친다는 뜻으로 사람을 사랑하면 그 집 지붕 위에 앉은 까마귀까지도 사랑스럽다는 말을 애급옥오(愛及屋烏), 자기의 나라와 겨레를 사랑함을 이르는 말을 애국애족(愛國愛族), 남을 자기 몸같이 사랑함을 애인여기(愛人如己),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자기 몸을 낮춤을 이르는 말을 애인하사(愛人下士),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함을 일컫는 말을 애친경장(愛親敬長), 사랑하고 아깝게 여김을 일컫는 말을 애지석지(愛之惜之), 사람은 덕으로써 사랑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애인이덕(愛人以德),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을 이르는 말을 애주애인(愛主愛人), 선정을 베푼 인재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감당지애(甘棠之愛),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 주는 사랑이라는 뜻으로 부모의 자식 사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지독지애(舐犢之愛), 사랑하는 사람의 집 지붕 위에 앉은 까마귀까지도 사랑한다는 뜻으로 지극한 애정을 이르는 말을 옥오지애(屋烏之愛), 효자는 날을 아낀다는 뜻으로 될 수 있는 한 오래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여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을 효자애일(孝子愛日), 제자는 스승을 존경하고 스승은 제자를 사랑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을 존사애제(尊師愛弟), 얼음과 숯이 서로 사랑한다는 뜻으로 세상에 그 예가 도저히 있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빙탄상애(氷炭相愛) 등에 쓰인다.
▶️ 有(있을 유)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달월(月; 초승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𠂇(우; 又의 변형)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有자는 '있다, '존재하다', '가지고 있다', '소유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有자는 又(또 우)자와 月(육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에 쓰인 月자는 肉(고기 육)자가 변형된 것이다. 有자의 금문을 보면 마치 손으로 고기를 쥐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내가 고기(肉)를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有자는 값비싼 고기를 손에 쥔 모습으로 그려져 '소유하다', '존재하다'라는 뜻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有(유)는 (1)있는 것. 존재하는 것 (2)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 소유 (3)또의 뜻 (4)미(迷)로서의 존재. 십이 인연(十二因緣)의 하나 (5)존재(存在)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있다 ②존재하다 ③가지다, 소지하다 ④독차지하다 ⑤많다, 넉넉하다 ⑥친하게 지내다 ⑦알다 ⑧소유(所有) ⑨자재(資財), 소유물(所有物) ⑩경역(境域: 경계 안의 지역) ⑪어조사 ⑫혹, 또 ⑬어떤 ⑭12인연(因緣)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재(在), 있을 존(存)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 폐할 폐(廢), 꺼질 멸(滅), 패할 패(敗), 죽을 사(死), 죽일 살(殺), 없을 무(無), 빌 공(空), 빌 허(虛)이다. 용례로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음을 유명(有名), 효력이나 효과가 있음을 유효(有效), 이익이 있음이나 이로움을 유리(有利), 소용이 됨이나 이용할 데가 있음을 유용(有用), 해가 있음을 유해(有害), 이롭거나 이익이 있음을 유익(有益), 세력이 있음을 유력(有力), 죄가 있음을 유죄(有罪), 재능이 있음을 유능(有能), 느끼는 바가 있음을 유감(有感), 관계가 있음을 유관(有關), 있음과 없음을 유무(有無), 여럿 중에 특히 두드러짐을 유표(有表), 간직하고 있음을 보유(保有), 가지고 있음을 소유(所有), 본디부터 있음을 고유(固有), 공동으로 소유함을 공유(共有),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는 뜻으로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우환을 당하지 아니함 또는 뒷걱정이 없다는 뜻의 말을 유비무환(有備無患), 입은 있으나 말이 없다는 뜻으로 변명할 말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구무언(有口無言), 있는지 없는지 흐리멍덩한 모양이나 흐지부지한 모양을 일컫는 말을 유야무야(有耶無耶), 형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천지간에 있는 모든 물체를 일컫는 말을 유상무상(有象無象),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명무실(有名無實), 머리는 있어도 꼬리가 없다는 뜻으로 일이 흐지부지 끝나 버림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유두무미(有頭無尾), 다리가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박식한 사람을 이르는 말을 유각서주(有脚書廚), 만물은 조물주가 만드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일컫는 말을 유생불생(有生不生), 다리가 있는 양춘이라는 뜻으로 널리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유각양춘(有脚陽春), 뜻이 있어 마침내 이루다라는 뜻으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을 유지경성(有志竟成),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온다는 뜻으로 뜻을 같이하는 친구가 먼 데서 찾아오는 기쁨을 이르는 말을 유붕원래(有朋遠來), 시작할 때부터 끝을 맺을 때까지 변함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시유종(有始有終), 무슨 일이든 운수가 있어야 됨을 이르는 말을 유수존언(有數存焉),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있으나 마나 함을 이르는 말을 유불여무(有不如無), 말하면 실지로 행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함 또는 각별히 말을 내 세우고 일을 행함을 이르는 말을 유언실행(有言實行), 끝을 잘 맺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으로 시작한 일을 끝까지 잘하여 결과가 좋음을 이르는 말을 유종지미(有終之美), 입은 있으되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정이 거북하거나 따분하여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유구불언(有口不言), 행동이나 사물에 처음과 끝이 분명함 또는 앞뒤의 조리가 맞음을 일컫는 말을 유두유미(有頭有尾),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 융통함을 이르는 말을 유무상통(有無相通), 장차 큰 일을 할 수 있는 재능 또는 그 사람을 일컫는 말을 유위지재(有爲之才), 끝까지 일을 잘 처리하여 일의 결과가 훌륭함을 이르는 말을 유종완미(有終完美),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그대로 있지 않고 인연에 의하여 변해 가는 것이라는 말로 세상사의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유위전변(有爲轉變), 가기에 잎을 더한다는 뜻으로 이야기에 꼬리와 지느러미를 달아서 일부러 과장함을 이르는 말을 유지첨엽(有枝添葉),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의 문이 개방되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유교무류(有敎無類) 등에 쓰인다.
▶️ 所(바 소)는 ❶회의문자로 음(音)을 나타내는 戶(호; 집을 나타냄, 소)와 도끼(斤)로 찍은 그 곳이라는 뜻이 합(合)하여 '곳'을 뜻한다. 나무를 베는 소리를 일컬은 것이었으나 나중에 處(처; 곳)대신 쓴다. ❷형성문자로 所자는 '곳'이나 '지역', '지위', '위치', '얼마'와 같이 다양한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所자는 戶(지게 호)자와 斤(도끼 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所자는 본래 도끼로 나무를 찍는 소리를 뜻했던 글자였다. B.C 470년경의 시가집인 시경(詩經)에는 '벌목소소(伐木所所)'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여기서 所所란 '나무를 찍는 소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所자는 본래 나무를 찍는 소리를 뜻하기 위해 戶자는 발음요소로 斤자는 의미요소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후에 '장소'나 '자리'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본래의 의미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所(소)는 ①바(일의 방법이나 방도) ②것 ③곳, 일정한 곳이나 지역 ④처소(處所) ⑤관아(官衙), 어떤 일을 처리하는 곳 ⑥지위(地位), 자리, 위치(位置) ⑦장소(場所)를 세는 단위(單位) ⑧기초(基礎) ⑨도리(道理), 사리(事理) ⑩경우(境遇) ⑪얼마 ⑫쯤, 정도(程度) ⑬만일(萬一) ⑭있다, 거처(居處)하다 ⑮~을 당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곳 처(處)이다. 용례로는 수입이 되는 이익을 소득(所得), 일정한 기관이나 단체에 속함을 소속(所屬), 들려 오는 떠도는 말을 소문(所聞), 가지고 있음 또는 그 물건을 소유(所有), 있는 곳이나 있는 바를 소재(所在), 매우 귀중함을 소중(所重), 어떤 일에 있어서 의미나 의의를 가지거나 쓸모가 되는 바를 소용(所用), 요구되거나 필요한 바를 소요(所要),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바를 소위(所謂), 바라는 바나 기대하는 바를 소망(所望), 원함 또는 원하는 바를 소원(所願), 몸에 지님 또는 지닌 것을 소지(所持),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옳다고 믿고 그에 따라 하려고 하는 생각을 소신(所信), 마음속에 품고 있는 회포를 소회(所懷),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을 장소(場所), 사는 곳을 주소(住所), 보초가 서 있는 곳을 초소(哨所), 사업을 벌이고 있는 곳을 업소(業所), 사람이 살거나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을 처소(處所), 몸 가운데에 목숨에 관계되는 중요한 곳을 급소(急所), 무덤이 있는 곳을 묘소(墓所), 머물러 묵는 곳 또는 숙박하는 곳을 숙소(宿所), 원하던 바를 이룬다는 말을 소원성취(所願成就), 나아가는 곳마다 적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소향무적(所向無敵),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을 무소불능(無所不能), 못 할 일이 없음 또는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는 말을 무소불위(無所不爲), 알지 못하는 바가 없다는 뜻으로 매우 박학다식 하다는 말을 무소부지(無所不知), 열 사람의 눈이 보고 있다는 뜻으로 세상 사람을 속일 수 없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십목소시(十目所視), 어떤 일에 적당한 재능을 가진 자에게 적합한 지위나 임무를 맡김을 적재적소(適材適所), 훌륭한 소질을 가지고도 그에 알맞은 지위를 얻지 못한다는 말을 부득기소(不得其所),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리지 못할 생각이나 평범하지 않는 생각을 이르는 말을 비이소사(匪夷所思) 등에 쓰인다.
▶️ 亡(망할 망, 없을 무)은 ❶회의문자로 兦(망)이 본자(本字), 동자(同字)이다. 사람(人)이 망하고 도망해 와서 숨는다는 뜻이 합(合)하여 망하다를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亡자는 '망하다'나 '도망가다', '잃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亡자는 亠(돼지해머리 두)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돼지머리와는 관계가 없다. 亡자의 갑골문을 보면 칼날 부분에 획이 하나 그어져 있는데, 이것은 칼날이 부러졌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칼날이 부러졌다는 것은 적과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亡자는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의미에서 '멸망하다'나 '도망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亡자에는 '죽다'나 '잃다'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亡(망, 무)은 ①망하다, 멸망하다, 멸망시키다 ②도망하다, 달아나다 ③잃다, 없어지다 ④없애다 ⑤죽다 ⑥잊다 ⑦업신여기다, 경멸하다 ⑧죽은, 고인(故人)이 된 그리고 없을 무의 경우는 ⓐ없다(무) ⓑ가난하다(무)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이룰 성(成), 있을 유(有), 일 흥(興)이다. 용례로는 죽은 아버지를 망부(亡父), 망명해 온 사람을 망객(亡客), 아주 주책없는 사람의 낮은 말을 망골(亡骨), 패가망신할 못된 짓을 망덕(亡德), 죽은 며느리나 죽은 아내를 망부(亡婦), 망할 징조를 망조(亡兆), 죽은 뒤를 망후(亡後), 망할 조짐을 망괘(亡掛), 집안이 결딴남을 망가(亡家), 망하여 없어진 나라를 망국(亡國), 있는 것을 아주 없애 버림을 망살(亡殺), 사람의 목숨이 끊어져 죽는 때를 망종(亡終),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일을 망축(亡祝), 무례한 언동을 망상(亡狀), 죽은 사람의 혼을 망혼(亡魂), 장사葬事를 치르는 동안에 죽은 사람을 일컫는 말을 망인(亡人), 손아래 사람의 죽은 날을 망일(亡日), 죽은 아이를 망아(亡兒), 체면이나 명망을 망침을 망신(亡身),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망령(亡靈), 자기 나라의 정치적 탄압 따위를 피하여 남의 나라로 몸을 옮김을 망명(亡命), 피하여 달아남이나 쫓기어 달아남을 도망(逃亡), 망하여 없어짐을 멸망(滅亡), 꺼져 없어짐을 소망(消亡), 잘 되어 일어남과 못 되어 없어짐을 흥망(興亡), 잃어 버림이나 망하여 없어짐을 상망(喪亡), 싸움에 져서 망함을 패망(敗亡), 쇠퇴하여 멸망함을 쇠망(衰亡), 위태로워 망하려 함을 위망(危亡), 사냥이나 주색의 즐거움에 빠짐을 황망(荒亡), 양을 잃고서 그 우리를 고친다는 뜻으로 실패한 후에 일을 대비함 또는 이미 어떤 일을 실패한 뒤에 뉘우쳐도 소용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망양보뢰(亡羊補牢), 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는 뜻으로 학문의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 진리를 찾기 어려움 또는 방침이 많아 할 바를 모르게 됨을 일컫는 말을 망양지탄(亡羊之歎), 죽은 자식 나이 세기라는 뜻으로 이미 지나간 쓸데없는 일을 생각하며 애석하게 여김을 일컫는 말을 망자계치(亡子計齒), 죽을 죄를 저지른 사람이 몸을 감추어 멀리 도망함을 일컫는 말을 망명도주(亡命逃走), 물건을 얻거나 잃거나 함에 있어 그 이해를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의 말을 망극득모(亡戟得矛), 입술을 잃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가까운 사이의 한쪽이 망하면 다른 한쪽도 그 영향을 받아 온전하기 어려움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순망치한(脣亡齒寒), 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는 뜻으로 학문의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 진리를 찾기 어려움 또는 방침이 많아 할 바를 모르게 됨을 일컫는 말을 다기망양(多岐亡羊), 책을 읽느라 양을 잃어버렸다는 뜻으로 마음이 밖에 있어 도리를 잃어버리는 것 또는 다른 일에 정신을 뺏겨 중요한 일이 소홀하게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독서망양(讀書亡羊)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