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망(BALMAIN)
삐에르 발망(Pierre Balmain)은, 사브와(Savoy)산에 있는 휴양지인 엑스레뱅(Aix les Bains)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발망의 아버지는옷감 도매상점을 경영하고 있었으나 발망이 일곱살 되된해에 죽었다. 발망의 어머니인 프랑소와즈(Franfoise)는 결흔하기 전까지, 그녀의 두 자매가 운영하는 한 부띠끄(boutique)에서 일했었다.
::그지역에서 가장큰 옷감 도매상점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의 어머니와 숙모들이 아버지의 사업을 유지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옷감을 가지고 놀거나, 손님으로 오는 여자들의 드레스들을 보고 탄복하곤 했다. 발망의 어머니는 그가 해군 군의관이 되길 바랐지만 근의 가슴은 이미 꾸띄르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발망은 마담 쁘리메( Premet )의 딸과 평판 좋은 파리의 의상실인 베르나르(Bernard)와 시 하우스(Cie House)의 지배인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발망은 이들이 종사하는 패션의 세계에 매료되었지만, 그의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에 그가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 파리의 미술학교(Ecole des Beaux Arts)에서 공부 하기로 결심 했다고 하고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건축학에 대한 흥미는 없고 건축 청사진 대신 점점 패션 스케치를 하는데 더 시간을 보냈다. 그 후에 그는, 몰리뇌(Molyneux)에게서 보조 디자이너 자리를 제안 받았으며 한달 후에 건축을 포기했다. 발망이 몰리뇌를 위해 2년간 일한 후인 1936년에 그는 징집 영장을 받게 되었다::
::몰리뇌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군 복무 기간에도 계속해서 고용을 인정할 정도였다. 병역을 마치고 몰리뇌에서는, 자신에게 더 이상의 가능성이 주어질 것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사표를 내게 되었다. 그래서 1939년에는 루시엥 르롱(Lucien lelong)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해에 전쟁 이 터지자, 그는 엑스레뱅으로 되돌아와서, 그의 어머니가 새롭게 오픈한 드레스샵에서 어머니를 도왔다. 발망이 최초로 게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과 앨리스 비토클라(Alice B Toklas)를 만나고 그들에게 옷을 만들어 준 곳도 이 곳에서 였다::
::1941년에, 루시엥 르롱(Lucien lelong)은 자신의 샵을 다시 열면서, 또 한 명의 젊은 디자이너인 크리스띠앙 디오르(Christian Dior)와 함께 발망이, 자신의 컬렉션을 완전히 주관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유혹을 하면서 그를 파리로 불러 들였다::
::그 이후 몇 년간, 디오르와 발망은 서로 협력하여 즐겁게 일했다, 그들은 아이디어를 교환하며 서로의 작품을 손질해 줌으로써 하나의 의상이 컬렉션에 등장했을 때, 누가 그 의상을 실제로 디자인 했는지 말하기 어려을 정도였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 들의 샵을 함께 동업해서 오픈하자는 말까지 오갔으나,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5년에 발망은 그 자신의 샵을 프랑소와 1번가 44번지(44, Rue Francois Premier)에 오픈했다. 발망은 의상을 제작하기보다 디자인을 스케치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는 연극이나 영화를 디자인하는 것을 더 좋아 했으며 100편 정도의 작품에 무대 의상을 만들어 주었다. 브리짓드 바르도,마를렌느 디트리히,캐서린 햅번등을 위해 옷을 제작 했으며 타일랜드 왕비 시리킷을 포함 외교관 부인과 왕비들도 그의 고객이었다::
::발망은 능력있는 사업가로서 수완이 좋았다. 1947년에는 그의 첫번째 브띠끄인 졸리마담(Jolie madame)를 파리에 오픈했다. 그후 베네쥬엘라,브라질,뉴욕등에도 브띠끄를 오픈하였다::
::엘바(Elba)에서는 스포츠웨어 패션인 엘바메인(Elbalmain)이 생산되고 있었으며 뉴욕은 기성복의 총 본산이 되었다. 1947년에는 '엘리제(Elysees) 64-83'이라는 향수를 발표 했으며 그후 졸리마담, 방베르, 이브와르등의 향수도 발표 하였다. 크리스챤 디오르(Christian Dior)가 뉴룩( New look )으로 세상을 뒤흔들기 2년전에, 삐에르발망은 신선하고, 그림같고, 부드러우며 동시에 고양이 같고 용(dragon) 같다 고 이름 붙여진 매우 예쁜 디자인으로 채워진 훌릅한 컬렉션을 발표하면서,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최초의 컬렉션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주로 실용성이 강조된 작품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으나 발망의 컬렉션에 의해, 사람들은 갑자기 모드(mode)가 진실로 어떠해야 하는지를 새롭게 인식 하게 되었으며, 여성의 신체를 장식하고 그들의 아름다운 매력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발망은 실크와 울, 레이스, 깃털, 꽃으로 우아함과 섬세함 세련미를 표현해야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삐에르 발망은 성격이 외향적이고 파티를 좋아하는 성격이며 건축에 대한 그의 관심으로 건축과 의상과의 관련성을 강조하기도 하였으며 여러채의 집을 소유하기도 하였다. 1982년 삐에르 발망은 사망 하였으며 그의 오른팔인 덴마크 사람 에릭 모르텐센(Erik Mortensen)에의해 많은 자회사와 라이센스를 가지고 번창하고 있다::
피에르 발맹은 1914년 사부아의 생 장 드 모리엔에서 태어났다. 풍족한 가정-아버지는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직물 회사를 물려받은 사람이었다-출신인 그는 몇 장의 소개 편지를 들고 파리로 올라왔다. 그는 당시 가장 위대한 두 명의 디자이너인 몰리뇌와 뤼시엥 를롱 회사에서 디자인을 배웠다. 를롱 회사에서는 장차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디자이너가 될 크리스티앙 디오르와 함께 콜렉션 제작을 책임맡기도 했다.
프랑스가 해방된 후, 그는 프랑수아 프르미에 거리 44번지에 디자인 회사를 창설한다. 그가 개최한 최초의 콜렉션은 전쟁의 상처를 씻어버리고 구원의 풍성함을 선사한다. 풍성한 자수 모피 망토, 재단이 개성적인 투피스, 화려한 이브닝 드레스 등. 오래지 않아 활동적이고 재기 발랄하며 우아한 여성의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1952년에 등장한 '졸리 마담Jolie Madame'(그가 만든 향수 이름)의 정신이다. 이 스타일은 50년대를 기록하게 된다.
미국 작가 Gertrude Stein의 찬사를 받은 '뉴 프렌치 스타일'은 브리지트 바르도, 캐더린 헵번, 소피아 로렌과 덴마크 왕비 마르그레테, 태국 왕비 시리키트를 매혹시키기도 했다.
1982년에 피에르 발맹은 숨을 거두었다. 1951년부터 발맹 회사의 제1 조수로 일한 에릭 모르텐센이 회사를 물려받았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1983년과 1987년) 황금 골무상을 수상했다. 1990년에는 에르베 피에르가 그의 뒤를 물려받고, 이어서 오스카 들 라 렌타가 1993년에 오트 쿠튀르와 프레 타 포르테 기술부장이 된다. 부모가 스페인인으로 생 도밍고에서 태어난 그는 발렌시아가 회사와 랑뱅 회사에서 일하다가, 1966년에 뉴욕에 자신의 회사를 창설했다. 그는 미국 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오트 쿠튀르 콜렉션을 디자인한 사람이었다. 오스카 들 라 렌타는 발맹의 정신을 존중하면서도 한편으로 디자인을 일신했다. 뉴욕의 부유한 고객들은 콩코르드 비행기를 타고 와서, 그가 개파리에서 개최하는 최초의 콜렉션에 참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