擧案齊眉.hwp
거안제미(擧案齊眉)는 밥상을 눈썹과 가지런히 하도록 공손히 들어 남편 앞에 가지고 간다는 뜻으로 곧 남편을 깍듯이 공경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후한서 양홍(梁鴻)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오늘은 양홍과 맹광 부부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동한 초기의 은사 양홍은 자는 백란(伯鸞)이며 부평 평릉 사람으로 비록 가난했지만 박학다식하고 지조가 굳은 선비였습니다. 그는 태학에서 공부하였으며 학업을 마친 후 황실의 사냥터에서 돼지를 기르는 일을 하였는데 하루는 불이 나서 주위의 인가에 불길이 번지게 되었습니다.
양홍은 집집마다 찾아가 피해상황을 살펴본 후 매 집마다 돼지로 보상해 주었는데 어느 한 집이 보상이 너무 적게 되어 ‘제가 더 이상 가진 재물이 없으니 노동으로 갚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아침저녁으로 성실하게 일을 하여 보상하였습니다.
양홍의 인품에 반한 사람들이 그에게 딸을 시집보내려 하였으나 양홍은 모두 정중히 사양하고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그와 동향인 맹씨에게 딸이 한 명 있었는데 그녀는 뚱뚱한데다 얼굴이 검고 못생겼으며 돌절구를 가볍게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장사였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상냥하고 그 언행은 조금도 나무랄 데가 없어 마을에서도 평판이 좋아 사방에서 혼담이 들어왔으나 그녀는 시집을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딸의 혼사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그것은 사윗감들이 그녀를 못생겼다고 나무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신랑감들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가 그녀에게 왜 시집가지 않느냐고 묻자 그녀는 “저는 양백란처럼 어질고 덕이 높은 사람과 결혼하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양홍이 바로 예를 갖추어 그녀를 맞이하기로 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는 날 맹녀는 기쁘게 혼수를 준비하고 또 곱게 치장하였지만 결혼 후 7일이 되도록 양홍은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맹녀는 “저는 일찍이 부군의 현명함을 듣고 당신이 아니면 시집가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당신께서는 수많은 청혼을 거절하시고 마지막에 저를 아내로 택하셨는데 결혼 후 말씀 한마디 없으시니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양홍은 “나는 줄곧 내 아내는 마로 짠 옷을 입고 나와 같이 깊은 산 숲 속에서 은거할 수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분을 바르고 머리를 꾸미고 있으니 어찌 내가 꿈꾸는 부인이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맹녀는 “제가 며칠 동안 좋은 옷과 화려한 치장을 한 것은 당신께서 정말 제가 생각하는 현사(賢士)인지 알아보고 싶어서였습니다. 바로 일하기 좋은 옷과 물품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화답했습니다.
양홍은 기뻐하며 아내에게 맹광(孟光)이라는 이름과 덕요(德曜)라는 자를 지어주었습니다. 그녀의 인덕이 빛처럼 빛나라는 의미였지요. 이후 그들은 패릉의 산 깊은 곳에서 밭을 갈고 베를 짜며 때때로 가야금을 벗 삼아 시를 읊으며 스스로 즐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양홍이 농사일의 틈틈이 친구들에게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중에서 몇몇 시가 황실을 비방하는 내용으로 오인 받아 나라에서 그에게 체포령이 떨어졌고 이에 환멸을 느낀 양홍은 오나라로 건너가 고백통(皐伯通)이라는 명문가의 방앗간지기로 있으면서 구차하게 생활을 꾸려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양홍이 방앗간지기로 고된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맹광은 남편을 반갑게 맞이하며 밥상을 눈썹 높이로 올려 바치면서 식사하기를 권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본 고백통은 크게 놀라며 ‘아내가 이토록 공경하는 것을 보니 그는 분명히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양홍일가를 그의 집안에 머물게 하여 옷과 음식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양홍은 많은 책과 이론을 저술할 수 있게 되었지요.
이와 같이 남편의 인품을 존경하며 그의 의지를 따르고 극진한 내조로 집안을 화목하게 꾸려 남편으로 하여금 마음 놓고 학문에 정진하게 하여 명저를 저술할 수 있게 한 맹광의 처사를 높이 칭송하여 거안제미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