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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2)
고후 4:1-15
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 설 교 >
예수님의 죽으심을 짊어진 사람들
고후 4장 10절 / 조용기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의 죽으심을 짊어진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옛날 로마의 사형 가운데 죄를 크게 지은 사형수는 어떻게 죽였느냐 하면은 죽은 시체를 나무에다 매달고 그 시체하고 같이 묶어 놓습니다. 눈은 눈대로 코는 코대로 입은 입대로 몸은 몸대로 시체하고 같이 묶어서 매달아 놓습니다. 그러면 시체가 썩어서 점점 산사람의 몸에 병균이 퍼져 들어오고 독이 들어와서 시체와 함께 죽어 부패해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선생은 염두에 두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의 죽은 시체를 우리 몸에 걸머지고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4:10) 예수의 죽은 몸을 걸머지고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지내고 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킬 때 우리를 함께 부활시켜 주신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본론>
1. 예수님의 죽음
첫째로,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가 하나 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2절로 16절 함께 읽어 보십시다.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여기에 보면 계속해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고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낸바 되고 함께 부활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흉악한 죄인입니다. 우리의 지은 죄는 머리털 보다 더 많고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의로운 행동으로 우리 죄를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박혔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덕분에, 예수님의 은혜로, 예수님 축복을 통해서 우리가 함께 복을 누리게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몸이 걸머지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떠한 의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해서 함께 천당 가는 예수와 함께 영원히 사는 우리들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은 홀로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와 함께 이 땅에서 부터 영원한 천국까지 같이 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세상 나라에 대해서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었습니까? 이 세상을 걸머지고 죽은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 없이 마귀를 섬기고 사는 세상나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나라에 태어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나라를 품에 품고 세상나라에 끌려 살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품고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죽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더불어 마귀와 세상에 대해서 죽어서 우리와 인연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인연이 끊깁니다. 아무리 부모 자식 간에 사랑을 해도 부모가 죽고 난 다음에 자식이 죽은 부모를 가정에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무덤에 묻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옛사람이 세상과 같이 살다가 예수님을 모시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에 대해서 죽어 버렸으므로 세상을 하직하고 만 것입니다. 별세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는 체제이고 온 세상은 마귀에게 속해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9절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온 세상이 악한 자에게 처해 있는데 그 악한 자의 세상에 우리는 별세해 버리고 만것입니다. 죽어 버렸었습니다. 세상과 인연이 끊어졌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법적으로 세상에 속해있지 아니하고 이제 하나님의 아들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몸에 걸머진다는 것은 이제는 세상하고 이별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세상의 탐욕을 벗어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탐욕에 대해서도 죽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에 지배되어 탐욕에 끌려 다니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므로 탐욕에 대해서도 죽었고 인연이 끊어지고 만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마귀의 본성이 탐욕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40주 40야 금식하고 광야에서 나왔을 때 마귀가 제일 먼저 유혹한 것이 탐욕인 것입니다. "돌을 변하여 떡을 만들어 먹어라." 떡은 쌀로써 만들어야지 돌로써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생기면 돌로써 떡이라도 만들려고 달라드는 탐욕으로 유혹한 것입니다. "뾰충탑에서 뛰어 내려라! 하나님이 돌보아 주어서 발이 땅에 부딪혀 부서지지 아니하면 사람들을 그를 보고 너를 칭찬하고 따라올 것이다." 탐욕인 것입니다. 비정상적으로 명예를 얻으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아주 인간적인 흉악한 방법으로 명예를 얻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마귀에게 절하면 온 천하만국을 다 주겠다고 말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마귀와 짝을 해서 살으라고 것입니다. 이러한 탐욕에 대해서 예수님은 전부 거부했었습니다. 예수님은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상나라에 대해서 죽고 세상 탐욕에 대해서 죽어버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중심의 체계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삶의 임금이요, 자기가 자기 삶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 주인이지요. 자기가 자기의 임금인 것입니다. 자기 원대로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임금으로 자기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손님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내 주인으로 모셔 들이고 나의 임금님으로 모셔 들여서 예수님이 나를 점령하시고 다스리시고 예수님이 소유하게 한 것이 참 신앙인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8절로 29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자기가 주인이 되고 마귀가 임금이 되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생겨나고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하게 되고 수군수군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 주인 따라서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이면 타락한 마귀의 종 아닙니까? 마귀가 임금으로 점령하니까 마귀의 행실을 다하지요. 그런데 이 속사람이 주인이 죽고, 예수가 주인이 되고 임금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내 마음에 내가 주인이 되지 아니하고 마귀가 주인이 되지 않고 내 마음의 주인은 예수님이 되고 임금님은 예수님이 되도록 변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리스도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 죽고, 탐욕에 대해서 죽고, 세상에 주인과 임금 노릇하는 자기와 마귀에 대해서 죽고 세상을 하직해 버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별세해 버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구 아버님이 건강하세요?"라고 물으면 "작년에 별세했습니다." "예? 별세하셨다구요?" "어머니는 건강하십니까?" "금년도에 별세했습니다."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안녕하십니까?" "예. 별세했습니다." "언제했나요?" "10년 전에 했습니다." "5년 전에 했습니다." "살아있는데요?" "예. 예수 안에서 세상과 별세했습니다. 세상 임금하고 별세하고 세상 주인하고 별세하고 세상 탐욕하고 별세하고 세상 삶과 별세를 하고 나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별세하고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나라로 옮기심
둘째로,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진다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나라로 하나님이 옮기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하고 세상에서 죽었으니 이제 어디를 갑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들 나라로 하나님이 옮겨 주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로 14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여러분은 예수를 믿을 때 이사를 갔습니다. 세상에서 살던 여러분이 세상과 하직을 하고 별세를 하고 하나님이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서 그 사랑의 아들나라로 이사를 가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하늘 나라에 이사를 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요, 하늘나라 아들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마귀가 다스리는 세상나라에 살지 않고 하나님 아들이 다스리는 하늘나라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여러분을 통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통치하는 것입니다. 마귀에 속해있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에게 소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나라에서 별세하고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속에 예수님이 주인으로 와서 계시고 임금으로 예수님이 들어와 계시고 하늘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우리 안에 하늘나라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세상나라가 속에 들어와 있고 마귀가 그 속에 들어와 있는데 우리는 마귀와 세상나라에 별세하고 난 다음 예수를 통해서 하늘나라가 우리 속에 들어와 있고 예수님이 임금으로 주인으로 들어와 있으니 하늘나라 안에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은총을 살게 된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에 우리가 들어와 있어요.
영국 웨스트민스터에서 오랫동안 목회하시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20세기에 참으로 설교를 잘하는 목사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런데 원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젊은 시절 영국 황실에서 의사 선생님으로 병원을 결석하고 환자를 돌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환자를 의술로써 치료해주고 난 다음에 한 2~3개월 지나면 도로 그 병이 도져서 찾아오곤 합니다. 또 치료해 주면 또 한 2~3개월 지나서 또 병이 들려서 오곤 했는데 그래서 이 로이드 존슨 의사 선생님은 가만히 생각하기를 "아무리 내가 의사로서 껍데기 사람을 치료해 줘봤자 소용이 없는구나. 속에 있는 주인을 치료해야 진짜 치료가 되지 겉만 치료해 놓고 나니까 마음에 부정적인 마음, 긍정적이지 않은 마음, 절망적인 마음, 원망, 불평, 탄식, 절망을 가지고 있으니까 병이 도로 돌아오고 만다. 껍데기를 치료해 봤자 소용이 없다. 알짜 속사람을 치료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해서 병원을 버리고 그는 목사로써 출발한 것입니다. 1년 동안 목사로써 받은 월급이 병원에서 한 달 받은 월급보다 작았습니다. 그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그는 사람들의 영혼을 치료해야 된다. 그 사람을 아무리 치료해 봤자 영혼이 병들어 있으면 도로 병이 돌아오기 때문에 영혼을 치료해야 영혼도 살고 그 사람도 산다. 그렇게 해서 그는 훌륭한 주의 종이 되고 설교자가 되어서 나중에 영국에서 제일가는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최고의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시려고 우리를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치료를 받아서 영혼이 변화를 받아야 우리의 육체가 변화를 받고 영혼이 변화를 받아야 우리 삶이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왔고 예수님과 함께 사니 예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역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며, 영혼이 잘되며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하늘나라의 역사인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기적이 하늘나라에 들어와 사는 사람에게는 늘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에 사는 사람은 세상나라 마귀의 흉악한 일들이 늘 일어나는 것처럼 하늘나라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의 역사가 우리의 생활 속에 늘 일어나게 돼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오면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미움과 원망과 불평이 늘 넘쳐났는데 이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 아닙니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아무리 행복한 결혼을 해서 돈이 많고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산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좋은 집, 좋은 음식, 좋은 옷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삶을 살아도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행복하게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육자가 열심히 아동들을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사랑을 가지고 내 자식처럼 가르치지 아니하고 직업적으로 가르친다면 아무리 훌륭하게 가르쳐도 그는 기계적인 직업인이요, 교사가 될 수없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처럼 제자들을 가르치면 훌륭한 교사가 되는 것처럼 이 세상에 사랑이 모든 것에 제일인 것입니다. 장사를 해도 물건을 사가는 사람을 참으로 사랑해서 내 가족처럼 여기고 물건을 팔아야 그 사람이 축복을 받고 돈도 벌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하는 대통령은 사랑을 가지고 국민을 다스려야 되고, 또 목회하는 목사는 목회에 설교만 할 것이 아니라 마음에 참 사랑을 가지고 성도를 돌봐야 참 목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배하는 세계는 사랑의 세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어와서 주님이 사랑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을 억지로 할 수 있나요? 미움을 억지로 버릴 수도 없고 사랑을 억지로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들어와 있으면 예수님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넘쳐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4절로 5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하나님이 적은 사랑이 아니라 큰 사랑을 베풀어서 허물투성이인 우리, 죄투성이인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시고 부활시켜 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우리는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사랑으로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을 먹고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수많은 슬픔에서 해방되고 수많은 범죄에서 해방되고 수많은 고통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나누기 운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자는 운동이요, 사랑을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고 미움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나누기 운동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하나님 중심 체계인 나라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나라에 들어와 산다는 것은 내 중심으로 살고 세상중심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주인이에요. 하나님이 나의 임금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나를 섬기고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살았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예수님이 원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이 이것을 했으면 무슨 말씀을 했을까. 예수님이 어떻게 할 것인가.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 예수님을 섬기는 삶이 하늘나라에 들어와서 사는 우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5절에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우리의 왕이요, 우리의 주인이 되었으니 이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3. 대속의 죽음 17:27
셋재로, 여러분 예수님의 죽음을 걸머지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습니까? 쓸데없이 순교 당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서 값을 지불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을 건져 내어서 용서와 의와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예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허물에서 죽고 그리스도의 의와 영광을 선물로 받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의 생명에 참여해요. 우리 힘으로 의롭게 될 사람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죄를 옷 입듯이 다 입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먹고 마시고 사는 것입니다. 죄 덩어리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수 없어요. 하나님의 광명한 빛이 비취면 어두운 죄가 다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발가벗고 군중들 앞에 설 수 없는 것처럼 도망을 치고 말 것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옷을 받아 입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다 청산하고 갚어 버리고 죄 없는 의로운 옷을 벗어서 우리에게 입혀 주었으니 예수님의 옷을 입었으므로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설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밝은 빛이 비춰서 부끄럽지 않은 것은 예수의 의로운 옷을 받아 입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값 지불하지 않고 공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인이 아니라 의롭게 되었는데 행위로 이루게 된 것이 아니라 공짜로 예수를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죄인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값없이 공짜로 은혜의 옷을 받아 입었습니다. 지금은 의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강제로 의인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어요. 죄인은 결코 하늘나라에 못 들어 갑니다. 의인만이 들어가는 곳인데 행위로써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행위로 의롭게 될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의 의로운 옷을 받아 입으면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히기 위해서 죄악의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에서 성결의 생명에 참여 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 동안에는 여러분 더러운 부패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속에 속해서 생각이 더럽고 부패하고 마음이 더럽고 부패하고 행위가 더럽고 부패합니다. 무엇을 봐도 더럽고 부패한 것이 꽉 들어차 있는 것입니다. 돼지소굴과 같은 곳에 살고 있고 구더기와 같이 화장실 속에 살고 있는 것과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우리 힘으로 거룩하게 될 수가 없어요. 깨끗하게 안돼요. 참말을 아무리 하려고 해도 자꾸 거짓말을 하게 돼요. 방탕을 안하려고 해도 방탕하게 돼요. 도둑질 안하려고 해도 자꾸 도둑질 하게 돼요. 미워 안하려고 해도 자꾸 미워하게 돼요. 우리의 힘으로 거룩하고 성결하게 안 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상과 마귀를 못 박아 버리고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 함께 읽어 보십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씻어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우리의 힘으로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께 의지하면 성령이 여러분을 거룩하게 살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곤하면 박카스를 마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원비디를 마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힘을 얻으려고 하는데 여러분 영적으로 박카스와 원비디는 바로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며 성령이여 나를 도우사 거룩한 생각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도우사 거룩하게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도우사 참말을 하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이 우리에게 힘을 부쩍부쩍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과 죄악을 멸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예수님이 짊어지고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치료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진 것입니다.
우리가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아도 늘 마음도 병들고 몸도 병듭니다. 이 세상에 병 안드는 사람이 누가 있는 것입니까? 한평생을 살면서 모두다 병들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더구나 공기가 부패하고 물이 부패하고 생활의 모든 환경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음식도 다 오염된 음식이요, 물도 다 오염되고 생활도 다 오염되니까 그것을 먹고 마시는 우리가 건강해 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심신이 다 고달프고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치료할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생기와 생명을 주어서 우리를 깨끗하고 건강하게 만들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여러분과 나에게 건강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우리 베드로전서 2장 24절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는 말씀이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고 당신도 나음을 얻었고 여러분도 나음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지 않습니까?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여러분 나음을 얻었습니다. 오늘 건강을 얻은 것을 축하합니다. 박수로 축하합니다. 하루에 천번도 만번도 나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 나는 나았다. 나는 나았다. 나는 나았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나았다고 외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귀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진리를 통해서 질병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병이 안들 수는 없습니다. 병이 들어도 우리는 고침 받을 수 있는 능력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걸머진 것은 우리에게 아담이 갖다 준 저주에서 해방시켜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되고 네가 복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복덩어리가 될 것이다. 우리가 복을 받은 사람이 들에 가면 들이 복을 받고 집에 들어오면 집이 복을 받고 떡반죽 그릇을 만지면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짐승을 키우면 짐승의 새끼까지 복을 받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하고 같이 살면 복이 훨훨 넘쳐 들어오는 것입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이냐. 예수를 믿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사람이 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 다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우리를 저주에서 피로서 값 주고 사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누구라구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복덩어리입니다. 당신은 복덩어리입니다. 여러분은 복덩어리입니다. 우리는 복의 근원이 됩니다. 저주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여러분 매일같이 말하십시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복을 받았으므로 저주가 나를 넘어뜨리지 못한다. 나는 망할 수가 없다. 나는 저주받을 수가 없다. 여러분 네 입의 말로 네가 묶였으며 네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꾸 말하면 복이 여러분을 묶고 사로잡아 놓는 것입니다. 사람은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만 잘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되는데 그 복은 예수님을 통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복을 받아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린 것은 저주를 담당하시고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그 대속의 은혜에 참여하기 위해서 예수의 죽음을 몸이 걸머지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활 영생의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과 나를 이 땅에서 죽음에 처했을 때 그대로 버려 놓는 것이 아니라 육체로 죽고 육체로 부활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주님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죽으면 육체를 벗어 버리고 영혼이 낙원에 갑니다. 낙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주님 강림하시는 날엔 주와 같이 와서 부활해서 이제는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낙원에 들어가 있다가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부활의 영생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죽음이 없습니다.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은 철폐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멸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므로 사망과 음부는 멸망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약속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살고,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살고, 이래도 살고, 저래도 살고, 엎어져도 살고, 넘어져도 사는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살고,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산다. 뭐 항상 사는 것이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 영생을 얻었으니 축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십자가에 죽은 것을 우리가 끌어 안고 짊어지고 있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값주고 사주신 용서와 의의 영광도 우리에게 다가오고 거룩함과 성령충만한 역사도 다가오고 치료의 역사도 다가오고 아브라함의 축복의 역사도 다가오고 부활 영생 축복의 역사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내 죽음이요,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에게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 해에 거두려거든 곡초를 심어라. 십 년 뒤에 거두려거든 나무를 심어라. 백 년 뒤에 거두려거든 사람을 심어라. 영원을 거두려거든 복음 즉, 예수를 심어라." 또한 이런 말도 있습니다. "돈을 잃은 것은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아니요, 건강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요, 인격과 영혼을 잃은 것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영혼을 잃어버린 것은 모든 것을 잃어 버립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의와 결과 치료의 생명에 참여할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과 함께 부활영생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항상 걸머지고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우리 신앙생활이 중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지 하나님이 우리를 천사를 통해서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인 우리의 죄,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고 마귀와 더러움을 짊어지시고 사람의 병을 짊어지시고 사람의 저주를 짊어지시고 사람의 죽음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다 멸하시고 청산해 버리고 부활했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걸머지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겨서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며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주장하는 역사를 베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신학적인 이론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4. 우리가 사는 두 세상
넷째로, 지금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두 가지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예를 들어보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에서 살았나요? 애굽에서 살았지요. 애굽은 바로가 그들의 임금이었습니다. 바로를 섬기며 바로가 주는 복을 받아 살고 바로 밑에서 노예생활을 한 것입니다. 혹독한 노예생활을 한 것입니다. 애굽에 살 동안에는 별 도리 없이 바로를 섬겨야 되고 바로가 주는 음식을 먹고 물과 양식을 먹고 살아야 되고 바로의 종노릇 하고 살아야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6절에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했는데 사백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산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를 통해서 해방되어 광야에 나왔을 때는 이제 바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아 살고 자유와 해방 속에 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두 세계 속에 살았습니다. 바로의 지배하에서 살다가 광야로 나와서는 하나님의 지배하에 살게 된 것입니다. 바로에게 복을 받아서 살던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만나를 받아먹고 물이 바위에서 솟아나고 쓴물이 달아지고 하나님이 치료해 주시고 신발이 떨어지지 않게 해주시고 의복이 닳지 않게 해주시고 하나님이 평안을 주신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게 된 것입니다.
신명기 7장 8절로 9절에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야훼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들이 옛날에는 하나님 없이 살았지만 이제 하나님 모시고 살고 옛날에는 바로의 손에서 인간적으로 도움을 받고 살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제는 기적으로 살고, 옛날에는 바로의 종살이했지만 이제는 자유와 해방 속에 사는 것입니다.
5. 우리의 삶
우리의 삶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두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는 세상에 살지 않았습니까? 마귀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세상 복을 따라 살았었습니다. 세상에서 애쓰고 힘쓰며 땀을 흘리고 세상 복을 따라서 살고 죄와 탐욕의 노예가 되어서 산 것 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사람은 세상 나라의 삶을 살고 마귀의 지배를 받아 살고 세상 복을 따라서 살고 죄와 탐욕의 노예가 되는데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서 별세하고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온 우리들은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뿐 아니라 우리가 이제는 예수님의 복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 복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 세상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이요 너희 하늘나라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을 줄을 아시느니라.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경제가 나쁩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사업이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저 세상나라 식으로 살면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식으로 사니까 땅보고 살지 않고 하늘 쳐다보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만나처럼 내려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복을 주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기 때문에 세상이 어두울지라도 겁날 것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사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하나님의 복인 것입니다.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축복을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놀라지 말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바랍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너를 붙들어 주리라. 내가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없이 인간의 수단과 방법과 노력으로 살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짊어져 주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은혜로 살게 되는 이러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나라에 들어와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자유와 해방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을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5장 1절 다시 읽어 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는 자유와 해방이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 악의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습관에 종노릇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유를 얻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의와 평강과 희락 가운데 행복을 누리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예수님 나라에 들어와서 사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세상 나라와 예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동시에 임하여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나라에 들어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변화를 받고 사는 것입니다.
교회사 가운데 예수님을 만난 후, 확실하게 변화되어 위대한 인물이 된 분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한분이 고아와 기도의 아버지로 유명한 죠지뮬러 목사님인 것입니다. 그는 16살 때 절도죄로 감옥에 들어갔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술과 여자, 노름 등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20살에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과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서 3천명의 고아를 기르고 수많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도와주는 성인으로서 인생을 사는 변화를 받게 된 것입니다. 중세의 위대한 교부인 어거스틴 역시 젊은 시절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여 결혼도 하지 않고 동거하여 아들을 낳기도 하고 이단에 빠지고 그 어머니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못을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32살에 마음에 회개하고 예수 믿고 난 다음 "옛 어거스틴은 죽었고 나는 새사람이 되었다." 위대한 성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두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을 따라 노예의 생활을 하는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며 자유와 해방 속의 삶으로 살 것인가. 이 두 가지 세계를 우리가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자유와 해방이 있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영광과 기쁨을 삶을 살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 안보이는 두 나라가 우리를 서로 빼앗으려고 투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나라가 여러분과 나를 시시각각으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고 하나님의 나라에는 성령이 여러분을 지키고 보호하고 은총과 사랑과 역사를 베풀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모두다 예수 죽음을 몸에 걸머지면 세상과 마귀와 별세를 하고 하직을 하고 예수의 나라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 죽음, 내 죽음을 외치시기를 바랍니다. 매일같이 아침에 일어나면 십자가 바라보고 낮에도 십자가 바라보고 저녁에도 십자가 바라보고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국 내 천국을 외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이와 같은 은총을 입게 된 것입니다.
<결론>
예수 믿는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에 하나가 되어 함께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 나라의 체계를 따라 살지 않고 우리 안에 임하신 예수님의 나라 체계를 따라 삽니다. 세상의 복과 하나님의 복은 그 근본이 확연히 다른 것입니다. 세상복은 마귀와 세상을 따라오고 하나님의 복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통해서 하늘나라에 들어왔으니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을 믿고 기도하고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십시오. 여러분은 홀로 살지 않습니다. 예수 플러스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에게는 항상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들어와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가 있기 때문에 좋은 일이 안 일어 날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항상 짊어지는 예수님의 죽음
고후 4장 10절 / 조용기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가 항상 짊어지는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살기 위하여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아침을 드셨을 것입니다. 점심은 못 드시고 오신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또 저녁은 꼭 드실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명령이 있어서 금식을 안 하는 이상 사람들은 먹어야만 삽니다. 초식동물들은 풀을 먹고 육식동물들은 초식동물들을 잡아먹고 삽니다. 그래서 삶의 에너지를 얻습니다. 약한 생명체를 강한 생명체가 잡아먹고 사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좀 비극적인 것 같습니다만 죽음과 생명이 우리 주변에서 동시에 늘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마음속에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될 것인 것입니다.
<본론>
1. 예수님은 왜 죽으셔야 했나?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당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로 5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40년 동안 방황할 때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을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안 먹고는 못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라고 한 것입니다. 제일 처음에 이 말을 들을 때 깜짝 놀랍니다. 우리가 식인종도 아닌데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어떻게 마시느냐? 그러나 주님은 엄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 우리가 음식을 먹지 아니하면 굶주려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의 에너지는 음식을 먹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영적인 영생의 생명의 에너지는 예수님을 먹어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먹지 않고 종교를 먹어서 힘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을 행하므로 힘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먹고 마셔야만 우리가 삶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이 정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므로 매일 매일 살아간다는 심각한 내용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살을 주고 피를 흘려 마시게 하기 위해서는 고난을 당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구원하는 것은 무슨 수양이나 도덕을 통해서 구원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당신이 죽어서 살을 찢어 주시고 피를 흘려 주셔서 먹고 마시게 하시므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로 죽은 우리를 십자가에서 걸머지고 매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하여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살은 우리를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그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파우스트」라는 책에서, 파우스트는 문학가이자, 법학가이고,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인생 문제에 부딪혀 마음에 심각한 고민을 한 끝에 도저히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리고 자살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절의 종소리가 나면서 “네 문제로 내가 죽었고 너도 나와 함께 부활했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후, 파우스트는 기쁨과 소망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삶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을 걸머지고 찢어지고 피를 흘리시고 옛사람을 청산해 버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기 위해서 찢어진 살과 피를 먹고 마시도록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먹으므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이유는?
성경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무엇 때문에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입니까? 몸에 짊어진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저는 지난 50년 동안 항상 순복음교회를 몸에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잘 때도 순복음교회를 짊어지고, 깰 때도 순복음교회를 짊어지고,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여행할 때도 항상 순복음교회가 내 어깨 위에 얹혀 있었습니다. 순복음교회를 걸머지고 50년의 세월을 지냈습니다. 순복음교회를 걸머진다는 것은 내 모든 관심이 순복음교회에 있고 내가 순복음교회에 그만큼 친밀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날 위해서 죽은 그 심각한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내가 굉장히 친밀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은 이유가 뭡니까? 왜 내가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질어지고 살아야 됩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내 죄의 용서를 염려하기 때문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일생의 죄를 짊어지고 빚을 갚으므로 우리는 값없이 빚에서 해방되고 용서와 의로움을 얻게 되었으므로 예수의 죽음이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의 죽음이 내 관심사가 되고 예수의 죽음을 몸이 짊어지고 자고 깨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 부패한 삶이 청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마귀에 잡혀서 꼼짝을 못합니다. 세속적인 인생이요, 마귀의 종으로 살았는데 이 세속과 마귀에서 우리를 놓아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려 마귀를 멸하고 세속을 청산하고 우리에게 용서뿐 아니라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성령과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함을 공짜로 받은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몸에 짊어지고 친밀할 때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의로움과 성령충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절과 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헛된 행실에서 값 주고 속량을 받았던 것입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행위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항상 몸에 걸머지고 깊은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또한 우리의 병을 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병을 주님께서 청산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매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가 상함 받기를 원하사 우리의 질고를 당케 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을 걸머지고 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 죽음을 통해서 나의 마음과 몸의 병을 짊어지고 청산했다는 것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친밀해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았음으로 너희는 여러분 개인을 보고 말씀합니다. 나음을 얻었느니라. 이미 여러분은 법적으로 2천년 전에 나음을 입었습니다. 현재 여러분 몸에 붙어 있는 병은 거짓되고 헛된 것입니다. 실제로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볼 때는 예수님이 다 청산해 버린 병이므로 거짓되고 헛된 것으로 알고 대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 원수 병마는 물러가라! 나와 상관이 없다. 이미 청산되어 버렸다고 우리는 늘 믿고 외쳐야 될 것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진다는 것은 언제나 예수님이 내 병을 청산하고 치료했다는 것을 깨달음을 갖고 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저주를 대속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에덴에서 쫓겨나올 때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생활이 고생스럽고 말할 수 없이 괴롭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렸습니다. 제3세계 오늘날 그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지 수많은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 저주에서 해방시키려고 사람들은 노력을 해도 어느 정도 성공하는지 몰라도 문명국을 내놓고 난 다음에는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 인류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죽었다는 말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저주를 주님이 다 담당하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을 항상 짊어진다는 것은 예수의 죽음을 깊이 관심을 가지고 그 죽음을 통해서 나의 가시와 엉겅퀴 저주가 청산되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내게 다가오는 인생살이의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과 가난이 십자가를 통해서 청산 되었다. 그 사실은 내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 예수의 죽음 속에 나는 저주에서 해방된 것을 깊이 인식하고 그 사실을 친밀히 마음속에 알고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의 죽음을 대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다 죽어야 돼요. 저는 옛날에 우리 할아버지가 92살이 되셨을 때 할아버지는 영원히 살줄로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결코 세상에서 안 죽을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94살이 된 아버지, 어머니는 세상을 뜨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별 도리 없이 죽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한번 태어났으면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육신이 사라지는 것이지 그 속에 사는 영혼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영혼이 육체라는 옷을 입고 살다가 그 두꺼운 옷을 벗어버리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옷을 벗어 버리고 영혼은 새로운 영적인 세계 속에 들어가서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이 예비한 아름다운 천국에서 깨어나야지 버림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지옥의 고통스러움 속에 떨어져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죽음에 이른 사람들이 가는 곳은 둘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원한 기쁨이냐, 영원한 슬픔이냐. 영원한 즐거움이냐, 영원한 고통이냐. 둘 중에 한곳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기 위해서 당신이 지옥의 고통을 걸머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그 영혼이 사흘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그리고 지옥의 세력을 멸하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다 썩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썩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영광의 약속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걸머진다는 것은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았다는 것을 마음속에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영양분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지 아니하면 그를 통해서 나타나는 용서와 의, 거룩함과 성령충만, 치료, 저주에서 해방, 아브라함의 복, 영생복락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을 통해서 용서도 받고, 의롭다함도 얻고, 거룩함을 얻고, 치료를 받고, 축복을 받고, 영생복락을 얻는 것이지 예수님의 죽음 아니고는 그것을 얻지 못하므로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잘 때도 예수의 죽음, 깰 때도 예수의 죽음,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일할 때도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최고 관심을 가지고 마음에 친밀하게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지 물건을 24시간 걸머지고 평생을 지낸다면 그것하고 굉장히 친해지지 않습니까? 예수의 죽음을 늘 몸에 걸머지고 있다는 것은 예수의 죽었다가 부활하심과 내가 친밀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당 내 천당, 예수 그리스도와 나는 분리 할래야 분리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도망을 쳐도 예수님이 우리 등에 얹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와 우리는 불가분하게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이 있어야 우리에게 생명이 있지 죽음이 없는 곳에 생명이 없습니다. 어떠한 공로를 세워도 수양과 도덕을 닦아도 연구를 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날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생명이 되지 예수님 떠나서는 생명이 없습니다. 종교 좋지요. 철학 좋지요, 학문 좋지요, 수양과 도덕 좋지요. 훌륭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없습니다. 오직 생명은 날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끌어안고 짊어지고 의지할 때 생명이 내 속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1절로 12절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이 없는데 무슨 생명이 있어요? 예수님의 생명을 심지 않았는데 무슨 생명이 있어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 예수가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평생 교회 나와도 예수님을 내 구주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생명이 없습니다. 금식을 아무리 하고 철야를 아무리 하고 아무리 헌신해도 예수가 마음속에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 예수의 부활이 나와 하나가 되어서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50년 동안 여의도순복음교회를 항상 짊어지고 있는 것과 같이 자나 깨나 먹으나 안 먹으나 순복음교회를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나 깨나 마음에 안고 걸머지고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의지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생명의 원천인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 없이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예수 중심으로 살면서 사람들에게 핍박도 당하고 손가락질도 당하고 고난을 당하나 우리는 결국에 예수와 함께 영원한 천국을 상속으로 받을 상속자인 것을 알고 마음속에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물고기 가운데 연어는 큰 바다에서 3~4년 동안 살다가 알을 낳을 시기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하천으로 정확히 찾아오는데, 폭포를 만나도 포기하지 않고 뛰어 오릅니다. 그러다 보니 막상 태어난 강으로 돌아왔을 때는 온 몸이 깨지고 지느러미도 상해 거의 기력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알을 낳기 위해서 연어는 강 바닥에 가로 세로 1미터, 깊이 40센티미터 정도의 구멍을 또 팝니다. 그리고 2~3회에 걸쳐 7백 개에서 7천 개까지 알을 낳은 후 팠던 모래나 자갈로 그 자리를 덮어놓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알을 낳은 후에 연어는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연어가 죽고 난 다음에 그 알이 60일이 지나면 그 알에서 수백, 수천 마리의 연어 치어가 나옵니다. 연어의 삶을 통해 우리는 생명이란 죽음을 통해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연어가 죽어야 새끼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연어가 죽지 아니하면 새끼들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태평양인 바다에서 우리 동해까지 와서 강을 타고 또 하천에 자기가 태어난 곳까지 찾아옵니다. 그 동안 돌멩이에 치이고 찢기고 곰에게 잡혀 먹기도 하고 새들에게 찢기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와서 자기가 태어난 그곳에 새끼를 낳고 자기는 그곳에서 죽습니다. 그러면 60일 후에 새끼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과 생명은 언제나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죽음만 있고 생명이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의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지라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살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서 온 몸의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져야 돼요. 예수 죽음이 있으므로 내 생명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마음속에 예수 죽음을 내가 걸머지고 예수 죽음을 내가 의지하고 죽음과 함께 있을 때 내게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기 위하여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난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만 걸머지고 있으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를 죽음을 걸머지면 예수의 부활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생명이 예수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입니다. 치료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활 영생 천국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죽음을 걸머지면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걸머지라고 한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만들어 가지고서 내가 진짜로 등에 걸머지고 다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등에 걸머진 것처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날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는가 그 의미를 끊임없이 묵상하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루도 잊지 말고 예수님이 날 위하여 죽은 의미를 생각하고 마음속에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에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깊이 예수님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 로마의 사형 가운데 죄를 가장 크게 지은 사형수는 참으로 고통과 두려움으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죽은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그 시체와 눈은 눈대로 코는 코대로 입은 입대로 몸은 몸대로 맞춰 가지고 같이 매달아 놓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므로 시체에서 썩은 물이 몸에 베어 들어와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선생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그 옛날 흉악한 죄수가 시체에 묶여서 시체와 더불어 같이 죽어가는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기록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린도후서 4장 10절의 말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우리가 끌어안고 그리스도와 함께 늘 죽음을 생각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도 어찌할 수 없이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신 의미를 깊이 생각하여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고 죽음에 대한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이 없습니다. 부활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생명이 있어야 돼요. 증거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돼요. 씨앗이 심어지면 열매를 맺어야 돼요. 우리에게 용서와 의로움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충만과 거룩함과 회개가 있어야 됩니다. 우리에게 치료와 건강이 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이 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부활 영생 천국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예수의 죽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끌어안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옛날에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굉장히 가난했습니다. 우리 아랫집에 학교가자고 제가 가면 아침을 먹는데 맑은 국물만 있는 죽을 먹어요. 그것을 먹고 힘이 없어서 허덕허덕하는데 그런데 그 윗목에서 볏가마가 한 3개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물었습니다. 그 우리 친구 이름이 수진이인데 “수진이 아버지여, 수진이 아버지여, 이렇게 맑은 죽만 먹고 살아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저 윗목에 벼가 3가마니나 있는데 저것을 찌어서 밥을 해먹으면 어떻습니까?” 아이 숟가락을 탁 놓으면서 저를 정면을 보고서 “누구를 죽이려고 그런 소리하느냐? 저 벼 3가마니는 우리 가족의 생명이다. 봄이 오면 벼 이삭을 뿌려야 되는데 봄에 저것을 먹어 버리면 씨가 없어져. 종자 씨앗이 없으면 우리 식구들은 다 굶어 죽어! 지금 굶어서 고생하더라도 종자씨앗은 먹으면 안 돼!” 그 말이 내 마음속에 지금도 쟁쟁하게 울리고 기억나는 것입니다. 종자를 심어야 열매를 얻는 것입니다. 종자가 없이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의 종자는 뭡니까? 예수의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 생명의 종자씨앗인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심지 않고는 종자씨앗이 없는데 무슨 새로운 생명이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까? 종자씨앗을 항상 우리 마음속에 우리는 간직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늘 꿈 꿀 것은 내가 예수의 죽음을 마음속에 모시고 걸머지므로 내게 예수의 새로운 생명이 나타날 것을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유 있는 시간에 헛된 생각하지 말고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이 넘쳐 남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로움이 들어와서 내가 변화 받고 의롭게 되는 나를 상상하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이 들어와서 나를 변화시키는 것을 상상하고 내가 치료받아 건강하게 되는 것을 상상하고 내가 가시와 엉겅퀴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모습을 상상하고 부활영생 천국을 얻는 것을 상상하고 꿈을 꾸고 기뻐하고 그를 믿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생명이 된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바라봄의 법칙으로 예수 죽음은 내 죽음이 되고, 예수 부활 내 부활이 된 것을 늘 마음속에 바라보고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일으켜 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2절에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항상 바라보고 죽음에 의지하고 예수님의 부활이 내 몸에 넘쳐나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를 채운다는 것을 마음속에 상상하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입으로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생명 내 생명 늘 그렇게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의 큰 지방마다 선교회를 설립하고 큰 희생과 겸손으로 복음을 전하여 중국 선교의 문을 연 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 자신이 극심한 영적 빈곤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자기는 죄인이고 무력하고 무능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통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아무 힘도 없는 것을 알고 자기는 무능력해서 쓸데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 메카티가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를 받고 난 다음에 이 테일러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친구 메카티가 쓴 편지 내용은 “이 세상에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었으면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예수 이름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 죽음이 내 죽음이 되면 예수 부활도 내 부활이 되는 것이다. 부활은 예수님이 내 속에 계시고 내가 그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내 힘으로 살지 않고 예수 힘으로 산다. 예수 힘으로 의롭게 살고 예수 힘으로 거룩하게 살고 예수 힘으로 건강하게 살고 예수 힘으로 저주를 이기고 살고 예수 힘으로 영생천국을 누리게 된다. 나를 의지하지 말고 내 안에 계신 부활한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믿고 살아라.” 이것이 허드슨 테일러의 생애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내 속에 예수님이 나의 생명을 살아준다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굉장한 기도의 힘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고 활력이 생겨서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수많은 일을 중국에서 한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이제 이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그가 여러분 속에 살아 있다고 믿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죽으시고 나와 함께 부활하셔서 내 안에 지금 사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명을 의지하면 새로운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TV를 보고 제게 그런 말을 합니다. “조목사님 몸이 요사이 약하고 그래서 부흥회도 안 나가고 해외여행도 안하고 선교도 안한다고 하는데 TV에서 설교하는 것 보면 빨갛게 거짓말 아니냐? 말도 똑똑하고 기운차고 괜찮은데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느냐?” 강단에서 일어섰을 때하고 강단에서 내려가는 조용기는 다른 사람이다. 강단에 내려 갈 때는 조용기가 내 힘으로 살기 때문에 힘이 없고 지치고 피곤하고 능력이 없지만 강단에 올라올 때는 내가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 업고 사는 것이므로 예수의 생명으로 설교한다. 저는 저의 스스로를 봐도 언제는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강단 밑에 내려갔을 때 얼마나 힘이 없고 지치고 피곤한데 강단에 올라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고 새로운 능력과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우리가 인지하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들어오면 우리 생애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김준호 씨는 대학교 2학년 때 기술 병으로 군에 입대하여 탱크 위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목을 다치게 되어서 전신마비가 되어 일거수일투족을 남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면 못살게 되었습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그는 처절한 상황 속에서 매일 절망과 슬픔 가운데 자신을 저주하며 죽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휠체어를 탄 여자 전도사님 두 분이 그에게 와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평안을 얻으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고통스런 짐을 대신 짊어져 주시는 분으로 참 구세주가 되십니다." 가만히 보니까 그 여자 전도사 둘이도 서서 걷지 못하는 휠체어에 탄 불구자임에도 불과하고 얼굴이 태양같이 빛나며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를 믿어 새사람이 되라고 해서 거기에 감동을 입고 이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칠흑 같이 어두웠던 그의 마음에 형언할 수 없는 평안의 빛, 생명의 빛이 비춰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자 광명한 빛이 마음속에 들어오고 삶의 기쁨이 용솟음치며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긍정적인 희망찬 생각이 들어 왔습니다. 게다가 그가 입원하고 있던 병원에 간호 실습생으로 나온 아가씨와 사랑을 하게 되었고, 병원 원목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소명을 주셔서, 그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겨나게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입술이 부르터서 몇 번이나 좌절하고 포기하려 했지만 아내의 격려와 그 자신의 끊임없는 기도와 노력으로 결국 놀라운 예술의 경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그린 동양화와 서예 수십 점을 모아 드디어 그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절망과 좌절의 운명 속에서 고난을 딛고 일어선 성공적인 모습의 작품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많은 사람들이 그 작품을 사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인데 그 속에 다른 생명이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용기와 힘과 능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생명의 영양분이 되신다고 생각하니 황송하지요. 내가 밥 먹듯이 예수님의 살을 먹고 물 마시듯이 예수님의 피를 마시고 산다니 이렇게 황송할 수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날 위하여 그 살을 찢어 양식으로 주시고 피를 흘려 음료로 주셨으니 나는 감히 하나님의 아들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황송한 일인 것입니까? 성찬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매시간 마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의 몸을 먹고 항상 예수님의 피를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뿌리가 예수님의 죽음에 뻗어있지 아니하면 우리에게 결코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국 내 천국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와 하나된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같이 되어서 죄인이 되고 고통을 받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할 때는 자기와 같이 되기 위해서 부활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와 같이 되어서 예수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되고 예수님의 거룩함이 나의 거룩함이 되고 예수님의 치료함이 나의 치료함이 되고 예수님의 축복이 내 축복이 되고 예수 천당이 내 천당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와 같이 되기 위해서 오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가서 있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철학이 아닙니다. 수양도 아니고 도덕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처럼 되어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이제는 의롭게 되고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되고 예수님처럼 건강하게 되고 예수님처럼 축복받게 되고 예수님처럼 천국백성이 되어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삶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위해서 죽은 예수님, 우리는 예수 위해서 살아나야 되는 것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그것이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의 생명의 씨앗이 된 예수님 우리가 항상 몸에 짊어지게 도와주시옵시고
그리스도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예수의 죽음을 몸에 받아들이므로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는 우리들이 다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가 주목하는 것
고린도후서 4:8-18 / 이수영목사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8-9에서 자기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며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한 경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도 이미 사도 바울이 그 자신이 겪은 고난에 대해 언급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먼저 고전4:11-13을 봅니다: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사도 바울은 고후1:8-9에서도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경험을 털어놓으며 그것을 한 마디 말로 압축하여 “큰 사망”(고후1:10)다이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뒤에 있는 6:4-5에서도 사도 바울은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겪었음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죽은 자” 같았고 “징계를 받는 자” 같았다고 합니다(6:9). 또 고후11:23-27에서는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하고 12:10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진술 앞에서 우리는 기독교 이천 년 역사 속에서 그 누가, 아니 성경의 모든 인물 가운데 그 누가 사도 바울의 고난에 견줄만한 고난을 당했을까 질문해봅니다.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러한 모진 고난을 평생 어떻게 감당했는가 하는 것을 들으며 우리는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에서만도 뭐라고 쓰고 있습니까? 8-9절에서는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였다” 하며, 16절에서는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런 고난을 그렇게 감당할 수 있게 한 힘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본문 10절 이하에서 발견합니다. 우선 10-11절을 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10절의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과 11절의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사도 바울이 앞서 말한 온갖 고난을 압축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하여 끝까지 그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은 10절에서는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하고, 11절에서는“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하겠습니까?
첫째는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선포한다는 뜻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생명을 얻었으며 그와 그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몸을 바치는 것임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의 죽음을 믿기만 하면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주 예수를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 바쳐 일하지만 아직 죽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살려주셨기 때문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사도 바울이 나중에는 거룩하고 장렬한 순교를 당했지만 어쨌든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쓸 때는 그 큰 사망의 위험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 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일을 해왔는데 그것은 생명의 주께서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며 그가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만인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 숱한 고난을 두려움 없이 끝까지 감당하게 한 두 번째 힘은 그의 전도자로서의 사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은혜로 그와 그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에서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그였기에 그는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새 생명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본문 12절입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그의 생명이 “너희” 즉 고린도 교회 교인들 안에서 역사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도 바울의 사명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 하여금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한 세 번째 힘은 그의 부활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4절을 봅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부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믿음이 어떠했는지는 우리가 앞서 충분히 살핀 바 있습니다. 부활신앙만큼 우리의 삶을 담대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세 절에서 사도 바울은 부활신앙이 자기에게 준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주는 유익함 몇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끊임없는 고난을 몸으로 겪으며 그의 몸의 쇠약해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 세월의 흐름도 그의 몸의 쇠잔해감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그는 언제부턴가는 자신의 죽음의 날이 가까워오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쇠잔해가는 것은 그의 겉사람뿐이었습니다. 그의 속사람은 날로 더욱 새로워지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소망과 확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 합니다. 부활은 단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다시 살아서 다시는 죽지 아니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영생에 대한 확신과 소망과 갈망을 우리는 부활신앙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은 아무리 길어도 잠시뿐이고 아무리 심해도 경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체험적으로 고백하며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 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부활신앙이 그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만 잠깐일 뿐인 것에 주목하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을 주목하게 만들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눈에 보이지만 잠깐일 뿐인 것으로 여긴 것들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는 일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는 것입니다. 박해를 받는 일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일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는 것 같은 일들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도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것이 잠깐이고 가벼운 일로 여겨질 수 있다고 그는 힘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난만이 잠깐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누릴 영원하고 복된 삶에 비하면 이 세상에서의 기쁨과 즐거움도 사실 잠깐의 것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건강과 부귀와 명예와 권력과 자랑도 다 잠깐의 것들일 뿐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우리에게 이미 약속된 하나님나라 앞에서는 지극히 잠깐일 뿐입니다. 이 잠깐 지나가는 것들에 우리의 눈과 마음과 영혼을 온통 다 빼앗기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이며, 잠깐 있을 것들이 아니고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육안에 보이지 않지만 참되고 영원한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일들을 주목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새문안의 모든 성도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신앙으로 오늘 우리에게 닥치는 환난과 고통과 위기와 불안과 절망과 죽음까지도 능히 이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
고후 4:7~9 / 김흥규목사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apostleship)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적어도 사도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려면 남다른 능력이 있어야지만 된다고 믿었습니다. 용모가 준수하다든지, 말주변이 뛰어나다든지, 뭔가 초능력을 행사한다든지 해서, 보통 사람들과는 좀 달라야만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생각을 가진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가 연약하고 무능력(powerlessness)할 때 하나님의 진짜 능력(power)을 증거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강할 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약할 때 임한다는 역설(paradox)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도직'의 역설적 진리에 대해서 바울은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① 인간은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② 그러나 이 그릇에는 '복음'이라는 보배가 담겨져 있습니다. ③ 그러므로 어떤 외부의 충격을 받아도 결코 완전히 부서지지 않습니다. 이제 이 세 가지를 다함께 살펴봅시다.
첫째로, 바울은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질그릇'과 '보배'를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금이나 은이나 다이아몬드와 같이 귀중한 보배를 질그릇에 넣지 않습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그릇이기 때문에 첫째 보기가 흉합니다. 질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 곳에 부딪혀도 쉽게 금이 가거나 깨집니다. 그러므로 소중한 보물을 못생기고 위험한 질그릇에 담아두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질그릇'은 제사장이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드릴 때 사용했던 그릇이라고 합니다. 제사용 그릇으로 쓰여진 질그릇은 조금만 불결해져도 곧바로 버렸습니다. 이렇게 질그릇은 금방 쓰고 금방 버리는 일회용 소모품에 불과했습니다. 만약에 질그릇이 깨어져서 버릴 경우 다시 재생해서 쓸 수 없습니다. 유리나 쇠붙이로 만든 그릇은 비록 부서져도 다시 녹여서 재생해 쓸 수 있지만 질그릇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리사이클을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질그릇'이라는 말로서 인간의 약함을 강조합니다. 창 2: 7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의 관계로 설명했습니다(사 29: 16; 45: 9; 64: 8 참조). 인간은 흙으로부터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인간을 '질그릇'이라고 불렀을 때 인간의 부서지기 쉬움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심신이 다 약해서 금방 쓰러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인간이 죄와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천년만년 살 수 없고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저는 저녁에 차를 몰고 가다가 바로 앞에서 가던 차에 부딪혀 죽어 가는 다람쥐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정면으로 부딪힌 것도 아니고 살짝 차에 치였을 뿐인데 쭉 뻗어서 고개를 한 번 쳐들더니 금방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짐승에 불과했지만 그 다람쥐의 죽음이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조금만 부딪혀도 너무나 쉽게 부서지고 깨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도가 금그릇이나 은그릇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복음을 전해야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한다는 생각을 배격합니다. 유리그릇이나 쇠붙이로 만든 그릇처럼 단단해야지만 능력이 임한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정반대로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이 될 때 하나님의 진짜 능력이 역사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였지만 십자가 위에서 무기력하게 돌아가신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형도구 위에서 가장 비참하고 가장 무기력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십자가야말로 진짜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바로 이 십자가로부터 왔던 것입니다.
둘째로, 질그릇이 보배를 담고 있습니다. 질그릇은 그 자체로서는 형편없이 연약한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그릇입니다. 그러나 이 그릇에는 보배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질그릇 자체는 약하지만 보배가 담겨질 때 더 이상 부서지지 않습니다. 보배로부터 오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7절 후반에서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금이나 은이나 강철로 만들지 않으시고 흙으로 만드신 것은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이 질그릇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막강한 존재로 만드셨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질그릇임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만들고 '복제 인간'을 만들고 난리를 피우는데 아마 세상은 훨씬 더 무서운 교만의 바벨탑을 쌓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복음 전하는 사도인 바울을 왜 온갖 고난을 다 받게 그냥 두셨을까요? 왜 연약하기 짝이 없는 질그릇 상태에서 복음 전하도록 그냥 두셨을까요? 천사처럼 초능력이라도 있으면 더 쉽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그 이유는 자기 힘을 믿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자기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만 신뢰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질그릇 상태에서 복음 전하도록 그냥 두셨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보통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병에 안 걸리고 안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사업에 실패하지 않고 손해 안 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환란의 칼바람에 넘어지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겪는 모든 약함을 우리도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한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다 똑같이 흙으로 만든 질그릇이요 깨어지기 쉬운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보배가 없고 우리는 보배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고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복음이 없고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고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보배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셋째로, 아무리 큰 외부의 충격을 받아도 완전히 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바울은 그동안 자기가 복음 전하느라고 당한 모든 약함을 네 가지의 고생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네 가지 약함과 고생은 반드시 정반대 되는 말과 대조시켜 놓았습니다.
제일 먼저 8절 전반부에 보면,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 NRSV를 보면 "We are afflicted in every way, but not crushed"라고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사방팔방으로 고통을 받아도 망가지지 않는다"고 번역할 수 있겠지요. 바울이 이 표현을 쓸 때 레슬링 경기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레슬링 선수가 상대방을 아무리 누르고 제압하려고 해도 상대방은 결코 완전히 짓눌리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예수 믿는 이들에게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쳐도 완전히 망가뜨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8절 후반부를 보면,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살다보면 답답한 일을 얼마나 많이 당합니까? 실망스러운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대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갈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픕니까? 그러나 예수 믿는 이들은 완전한 절망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왜요? 능력의 보배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9절 초반부에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일 때문에, 혹은 의로운 일을 하다가 핍박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핍박이 거세고 심지어 순교를 당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신 31:6은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보배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9절 후반부를 보세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바울이 이 표현을 썼을 때에는 복싱 경기를 염두에 두었다고 합니다. 복싱 선수가 상대방에게 강펀치를 날려서 여러 차례 링 위에 눕힐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넘어진 선수는 일어서고 또 일어섭니다. 그리하여 수없이 거꾸러뜨릴 수는 있으나 완전히 망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이들에게는 보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 호레이시오 스패포드(Horatio G. Spafford, 1828-1888)라는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시카고에서 부동산 투자에도 손을 대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1871년 시카고 대화재가 일어나서 300 여명이 죽고 십 만명 이상의 화재민들(火災民)이 집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 때 스패포드 역시 많은 재산을 잃어버렸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남 4녀 중 외아들까지 갑자기 폐렴으로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패포드는 실망하지 않고 화재로 집을 잃은 사람들을 힘껏 돕는 일에 앞장을 섭니다.
그러다가 한 2년이 지난 후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 만큼 되었을 때 온 가족이 영국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패포드는 사업상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부인과 네 딸만 배에 태워서 먼저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배는 또 다른 배와 충돌해서 수 백명이 죽고 47명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스패포드는 아내로부터 전보 한 장을 받았는데 단 두 글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SAVED ALONE." "저만 살았어요." 스패포드의 아내 애나(Anna) 만 구조되었고, 네 딸--Maggie, Tanetta, Annie, Bessie--은 모두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스패포드는 즉시 다음 배를 타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 갔습니다.
아내가 네 딸이 죽은 곳이라고 가리키는 현장을 보면서 처절하게 죽어 가는 네 딸들의 모습이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엄청난 비극의 현장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강 같은 평화가 기적적으로 마음에 흘러왔습니다. 그리고서는 즉시 선실에 들어가서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같든지 /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 내 영혼 평안해 /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시는 찬송가 470장인 것입니다.
스패포드는 사랑하는 네 딸을 잃어버리고서도 움츠러들지 않았습니다.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망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슬픔을 딛고 다시 재기했습니다. 그 후에 딸 둘을 더 낳아서 완전히 하나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고 예루살렘으로 이사했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다가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이라고 해서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금그릇이 아닙니다. 은그릇도 아닙니다. 강철로 만든 그릇도 아닙니다. 깨지기 쉬운 질그릇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그릇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과 은혜라는 보배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보배를 붙들고 있는 한 여러분들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을 것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비록 질그릇과 같이 연약하다고 할지라도 이와 같은 보배를 가졌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다같이 스패포드에 얽힌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찬송가 470장을 부릅시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
고후04장 07~18절 / 유영설목사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인간, 얼마나 위대한 걸작인가, 이성은 고귀하고, 능력은 무한하고, 행동은 천사와 같고, 이해는 산과 같다. 세계의 미요, 만물의 영장이다.” 과연 그런가요? 인간이 완전한 영장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의 인간이해는 어떨까요? 세례요한의 첫 선포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라고 했으며, 예수님도 동일하게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인간 이해를 보면,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롬7:19)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에 대해 바울은 속에 있는 ‘죄’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다고 했습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두 종류 밖에 없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라고 했습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의인이라 생각하지, 죄인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 선포의 장벽 중에 하나가 복음의 내용을 들을 때 “내가 왜 죄인인가?”라며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자가 없고,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 체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대인들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명예, 권세, 지식, 모든 것을 갖추고 누려 보았습니다. 그것을 위해 살 때는 그것이 가장 중요했고, 그것을 통해서 인생의 가치가 나타나고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알고 믿고 경험한 그의 개인적인 신념이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 이외에 또 다른 것을 보지 못한 결과입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훗날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후, 그토록 귀하게 여겼던 자신의 신념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자신의 경험보다 더 가치 있고, 고상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헛된 것, 무가치한 것으로 자랑 삼고, 자부심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자신을 ‘질그릇’이라 말합니다. 그 많은 그릇가운데 하필이면 왜 질그릇이라고 했을까요? 질그릇은 투박하고, 볼품없고, 집밖에 보관하고,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약해서 잘 깨집니다. 바울은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질그릇 같은 인간성에 보배를 담았다고 했습니다. 질그릇만 보고 평가 할 것이 아닙니다. 그릇이 담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 보배가 살아갈 이유와 삶의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배는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①살아가야 할 이유 즉, 사명을 깨닫게 합니다. ②일을 행하고, 이룩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이 복음 안에 있는 자마다 인간의 연약함을 이길 수 있고, 인간의 자랑과 교만을 막을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이기고 견디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할 때에도 질그릇 같은 인생에 보배가 있으면, 낙심하지 않고, 버림받지 않고,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보배를 가진 자의 삶의 능력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갑니다. 목표, 성장, 명예, 만족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지만 모두 자기를 위한 것들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뜻대로 안됩니다. 그때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만 위해 살지 않습니다. 질그릇 속에 있는 보배를 위해 삽니다. 이 보배 속에 삶의 이유와 방법, 목표와 사명, 비전이 있습니다. 보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망의 사람입니다. 보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낙심은 자신의 이익이나 재산에 매달려 살아가는 자가 느끼는 실패의 감정입니다. 보배를 가진 사람은 겉 사람은 낡아도 속사람은 날로 새롭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를 질그릇에다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의 가치, 이유, 목적으로 삼았더니 우겨 쌈, 낙심, 버림받음, 망했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질그릇에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고, 그 생명 때문에 육체는 약해지고, 쇠해지나 속사람은 소망으로 가득차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계속 성장, 성숙해져가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발견한 자신의 영적 실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나의 신앙인생에서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땅의 것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내 인생의 미래가 소망으로 충만한 삶이 되도록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고후 4장 7~15절 / 박조준목사
시편 23편 3절 말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도다" 이미 우리가 생각한 말씀 중에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으면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으면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했는데 얼른 생각할 때 이 말씀이 좀 이상하게 들릴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아 부족함이 업이 지내고,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내 영혼이 소생을 받으리만큼 고통을 받거나 피곤한 자리에 이르거나 아니면 좌절상태에 이르는 일이 있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편 42편 11절 같은 데를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인도함을 받는 양 중에 넘어져 있는 양을 연상하게 됩니다. 넘어져 있는 양은 불쌍합니다. 가련합니다. 벌렁 나자빠진 채 발로 허공을 치며 허우적거리며 일어나 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양이 말은 못하지만 살려 달라고 소리 지릅니다. 이상한 것은 양은 한번 자빠지면 자기 힘으로는 일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보통 다른 짐승은 넘어 졌다가 다시 자기 혼자 일어납니다. 소도 자빠졌다가 혼자 일어납니다. 개도 자빠졌다가 혼자 일어납니다. 그런데 양은 자빠지면 혼자서 일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다가 기진맥진해서 죽어버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꼭 있어야 하는 이유는 혹시 양이 자빠지게 되면 얼른 찾아가서 부뜰어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양과도 같습니다. 자빠지면 일어서지를 못합니다. 가령 목회자에게 즐거움이 있다면 교회에서 모이는 모임에 꼭 참석하는 일입니다. 성도들이 그 자리에 늘 참석하시는 것을 보면 그렇게 반갑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 자리에 늘 보이시던 분이 보이시지 않습니다. 궁금한 생각이 들어 '그 아무개가 요사이 잘 안보이시는데 좀 찾아가 보세요'라고 교역자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러면 교구 담당목사님이 찾아가시는데 가보면 발랑 나가 자빠져 있습니다. '내가 이번 우리 아이 대학입학시험 위해서 40일 조반 굶어가며 기도했는데 떨어졌어요. 그런 하나님 믿을 것 없어요. 이번 기업체 구조조정에 우리 집 양반 퇴출 됐어요' 하면서 발랑 나가자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들이 '아니, 성도님, 시험이야 합격될 수도 있고 불합격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물론 상심이 되시겠지만 힘을 내셔야죠. 우리 흔히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방면으로 축복하실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어서 일어나세요'하면서 부뜰고 이끌면 못 견디는 척하고 나오십니다. 아마 이 자리에도 그런 분이 계실꺼예요. 그래서 목회자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자빠지는 양을 예수님 대신해서 부뜰어 세우려고 목회자가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넘어져 있는 양을 부뜰어 일으켜 세울 뿐 아니라 양을 잡아먹는 맹수들의 위협으로부터 지켜 주는 일을 합니다. 매나 독수리, 늑대와 이리 같은 짐승들이 넘어져 있는 양을 손쉬운 먹이로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공중의 세력을 잡고 있는 마귀는 하나님의 양무리 중에 넘어진 양을 먹이로 생각하고 달려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혹시 잘못해서 넘어지면 우리는 목자 되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경험 있고 신실한 목자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양들의 수를 세어보고 혹시 자빠져 있는 양이 발견되면 지체하지 아니하고 붙들어 세워 줍니다. 목자는 아침 일찍 밖에 나아가 하늘을 쳐다봅니다. 검은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천천히 기다란 나선형을 그리며 돌고 있는 것을 볼 때는 걱정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목자는 양들이 있는 곳에 가서 어떤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양들의 수를 세어 봅니다. 한 마리의 양이 넘어질 때 목자는 이 넘어진 양을 위하여 얼마나 마음을 쓰는지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영적인 미궁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무력한 상태에서 좌절되어 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시고, 나에게 실증을 느끼시고, 나에게 화를 내신 것 아인가?"고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생각이 아닙니다. 주님을 선한 목자로서 사랑과 동정으로 나를 해대 주십니다. 주님은 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 하나 하나를 사랑으로 대해 주십니다. 주님을 멀리 떠나 자기 혼자 살 수 있을 것처럼 교만을 부리다가 넘어진 사람을 찾아가십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돌이켜 볼때도 주님이야말로 넘어진 양을 일으켜 세우는 선한 목자이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넘어진 베드로의 영혼을 일으켜 세우시고, 새 힘과 새 용기를 주시고, 새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온유와 사랑과 인내로 넘어진 양을 부뜰어 세우십니다. 주님은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넘어졌을지라도 왜 넘어졌느냐고 추궁하지 아니하시고 나를 일으켜 세우시려고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시편 56편 13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을 발견합니다.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치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말씀했습니다. 시편 100편 3절에서도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그의 백성,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으면서도, 주님의 인도와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때때로 낙심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자신감을 갖는다는 것도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맥없이 비틀거리고 쓰러지기 쉽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믿음이 자라난 것 같아서 교만해 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 이런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했습니다.
그러면 양들이 왜 넘어집니까?
필립켈러라는 분이 쓴 '목자가 본 시편 23편'이란 책에서 네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로, 너무 편한 곳을 찾다가 넘어진다고 합니다.
양들은 옴폭하고 편한 곳이 있으면 '편해서 좋다. 편해서 좋다'하다가 그만 자빠지고 맙니다. 마찬가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고생 없이 평안히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위험한 것입니다. 편한 것만 찾다가는 넘어지기가 쉽습니다. 가령 우리가 뛰는 것보다는 걷는 게 쉽습니다. 걷는 것보다는 서 있는게 쉽습니다. 서 있는 것보다는 앉아 있는 것이 편합니다. 앉아있는 것보다는 누워 있는 것이 편합니다. 누워 있는 것보다는 자는 게 편합니다. 자는 것 보다 아주 자면 더 편합니다. 편한 것 편한 것 찾다가 발라 자빠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좀 힘들고 귀찮아도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도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연습은 같은 일의 반복입니다. 지루하고 귀찮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연습은 실력의 향상을 가져오고, 믿음의 성장이 있게 합니다. 학생 치고 공부하기 좋아하는 학생은 거의 없습니다. 만에 하나 정도의 학생은 공부 안 하면 죽을 정도로 싫다는 학생이 있다고 합니다. 보통은 주일이 좋고, 공휴일이 기다려지고, 방학이 되면 신명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휴일이 싫을 정도로 공부가 좋은 학생은 정신과 전문이의 말에 의하면 머리가 조금 돈 경우라고 합니다. 공부는 싫어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정에서 자녀들이 공부 안 하겠다고 하면 야단치지 말고 하나님께 '정상적인 자녀 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싫은 공부를 해야 합니까? 공부 안 하면 상급학교 진학을 할 수 있습니까? 입시 시험에 합격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싫어도 해야 하는게 공부 아닙니까? 내려가는 것은 힘쓰지 않아도 쉽게 내려갑니다. 그러나 올라갈면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평안하고 쉬운 곳만 찾다가는 내 영혼이 넘어지기 쉽습니다.
둘째로, 털이 너무 자라면 넘어진다고 합니다.
양의 털이 자라는 것은 자연입니다. 그 털로 우리 옷을 만들어 입지 않습니까? 그런데 너무 길게 자라면 거기에 오줌이 묻고 똥이 묻어 마르면 딱딱해 지는데 지나가다가 나뭇가지에 걸리면 뱅그르르 돌아서 자빠지게 됩니다. 성경에서 털은 그리스도인의 낡은 습관에 비유해서 말씀했습니다. 자기 중심의 생활입니다. 꼭 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길어지고 길어지면 자빠지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갈 때 털옷을 입고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퍽 의미 있는 일입니다. 양털은 자신의 자랑과 개인적인 우선권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마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양의 털이 너무 길면 무거운 털로 인해서 양이 넘어지기 때문에 선한 목자는 양의 털을 깎아 주어서 넘어지는 위험에서 건져줍니다. 그런데 이것이 양에게는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양은 털을 깎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실은 목자에게도 힘이 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취미나 습관 중에 그것이 꼭 죄는 아니더라도 그것이 길어지고 너무 깊어지면 자빠질 위험이 있는 것이 없습니까?
전에 어느 농촌에서 목회 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농번기에는 교인들이 다 밭이나 논에 나가 일을 하기 때문에 심방도 할 수 없고, 좀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지만 혼자 몸으로 누구는 돕고 누구는 안 돕고 할 수도 없어서 낚시를 배워가지고 거기에 재미가 붙었습니다. 그리고 고기가 아침과 저녁에 잘 물리니까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에야 돌아오곤 했습니다.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이 목사님이 여느 날이나 다름없이 낚시 기구를 가지고 낚시를 나가는데 어느 여집사님이 정장을 하고 찬송 성경을 끼고 어디를 가시더래요. 그래서 목사님이 "집사님, 이렇게 아침에 어디가세요?"하고 인사를 했더니 그 집사님이 "아니, 어디가다니요? 교회에 가지요. 오늘이 주일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일 다 된 거지요. 여러분, 낚시가 죄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깊어지면 목사가 주일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우리 삶의 주변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자빠질 염려가 잇는 것은 아쉬워도 잘라 버려야 합니다.
친구 사귀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라면 잘라 버려야 합니다.
셋째로, 양이 너무 비대해 지면 넘어진다고 합니다.
양이 너무 비대해 지면 건강에도 좋지 않고 생산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대한 양일수록 더 넘어지기를 잘합니다. 체중이 무거운 양일수록 자연히 느리고 둔합니다. 다리는 가는데 위는 무거우니까 돌에 걸리기만 해도 나가자빠지고 움푹한데 빠져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자빠지고 맙니다.
사람도 그렇잖아요? 위가 좀 무거운 분들은 자빠지기도 잘하고 발목도 쉬 상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이런 비대한 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엄격한 정량의 사료로 배급량을 줄입니다. 목자의 소원은 비대하고, 연약하고, 무기력한 양이 아닌 튼튼하고, 정력적이고, 민첩한 양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몸이 너무 비대해지면 성인병이 생기는 것 때문에 가족들이 걱정합니다. 그래서 절식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그렇게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해야될 줄 알면서도 실제가 어렵습니다. 본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절식을 하면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수입은 적은데 소비열량은 많아서 그럽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집사님은 그런 분들을 위해서 단식원을 경영하는데 일단 입원을 하면 식사는 안주고 아침, 점심, 저녁 세때 녹즙을 한그라스씩 줍니다. 그리고 7-8㎞ 걷고 뛰게 합니다. 먹은 것 없이 걷고 뛰니까 얼마나 고생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몸이 빠지는데 열흘정도 하면 10㎏정도가 빠져 보기에도 나타나고 본인도 몸이 가벼워 진 것을 느낄 정도입니다. 그리고 퇴원할 때는 150만원 내고 나옵니다. 안 먹고 돈 내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되고, 성공적일 때, 안정감과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때가 어떤 의미로 위험한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기적으로 건너게 되고 난경불락의 도성 여리고를 성공적으로 함락시키고 그 다음 작은 성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완패의 쓴잔을 마시게 된 사실을 기억하시지요? 우리가 축복을 받았을 때, 우리가 은혜를 받았을 때, 우리가 성공을 했을 때 사실 그 순간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위기 일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 이후를 조심해야 합니다. 응답 이후를 조심해야 합니다. 성취이후를 조심해야 합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내 뜻대로 되어 질 때 그때가 내 삶에서 가장 무서운 위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요한계시록 3장 17절에 지적한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부유하고 풍부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실상은 절망적인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상 적인 보이는 것의 성공이 반드시 영적인 건강의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아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단련시키기로 한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힘들고 고달픈 일이 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비대해져서 제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다가 넘어지고 마는 양이 되기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무서운 불운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강인성은 인내와 고생의 단련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세상 적인 것으로 인해 너무 살이 쪄있는데 이것을 좀 빠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좀 괴롭고 힘이 들어도 우리에게 훈련을 시킵니다. 막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결코 기대하시거나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들고 괴로운 훈련을 받을 때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신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믿음과 신뢰는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하게 하시고 새롭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왜 양이 넘어집니까?
넷째로, 너무 힘들면 지쳐서 넘어 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면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시편에 보면 '우리가 넘어지나 아주 넘어지지 아니함은 여호와의 오른손이 나를 부뜨심이요'라고 말했습니다.(시 37:24)
고린도후서 4장 8절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은 사람도 세상에서 넘어질 때가 있고, 실패할 때가 있고, 환난을 당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안에 잇는 사람은 환난과 역경 그리고 실패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해도 싸이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합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버린바 되지 아니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필립스의 번역대로 표현하면 Knock down 당합니다. 그러나 망하지 않습니다. Knock out 되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은 어떤 환경과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그러나'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위로 받을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절망적인 상황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절망이란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절망적인 상황을 주님의 약속을 향한 전진의 기회로 변화시키는 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가운데 놓였을 때 체념하고 포기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선다'는 말은 계속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때로는 우리 앞에 원치 않는 장벽, 막힐 때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어려운 길을 가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은 많습니다. 이제 다음 주일 생각하겠습니다마는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다른 좋은 길을 예비해 두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절망하지 말고, 주저앉지 말고, 이 절망적인 상황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전진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영이 편한 자리에 누우려 하지 않습니까? 양의 털이 너무 자란 것처럼 세상것 때문에 걸려 넘어질 염려는 없습니까? 아쉽고 힘들어도 자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일이 너무 잘되어서 자만심에 빠진 분은 안 계십니까? 주님 앞에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앙망합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 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심령이 피곤하고 지쳐서 거의 자빠진 분 안 계십니까? 선한 목자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들려 영혼이 소생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자
고후04장 07~15절 / 김홍도목사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앙 생활의 승리하는 비결을 자기 노력이나 수양을 통하여 이룩되는 줄로 착각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신앙 생활의 승리나 완성은 내 육신의 노력이나 수양을 통해서 이룩되거나 향상하고 발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며,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산에 가보면 감나무와 비슷한 야생 나무가 있는데, 그것은 고욤 나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나무는 생김 생김이 감나무와 거의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도토리알만한 작은 열매를 맺곤 합니다. 거기에다가 아무리 거름을 많이 주고 잘 가꾼다고 하더라도 다른 열매를 맺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 나무를 잘라서 감나무에 갖다 접을 붙이면 그 나무는 좋은 감나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의롭게 살고 주님 원하시는 삶을 살려고 하면, 나 스스로는 죄의 열매 밖에 맺힐 수 없지만 내가 죽고 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게 될 때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 순간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고 예수의 생명으로 살도록 나를 그에게 맡기고 의지하게 될 때에 신앙 생활의 절정을 이룰 수 있는 것이요, 바로 그 때에야 승리하고 열매 맺는 비결임을 깨달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에 저는 이런 신앙 생활의 승리와 완성을 위해 중요한 세 가지의 비결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우리 인간은 그릇에 불과함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릇은 어디까지나 그릇 자체로 남아있는 것이지, 결코 그 그릇 자체가 무엇을 만들어 내거나 창조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보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사람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고 부패한 죄인으로 태어났으므로 선(善)을 창조해 낼 수도 없고,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죄를 이길 수도 없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무가치한 질그릇에 불과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시간에 저는 진정으로 고백합니다.
저는 때때로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 보곤 합니다. "네가 진정으로 목사냐? 또 네가 무슨 자격으로 천여명이 넘는 성도들 앞에서 설교하고 2천여명의 교인들을 치리하고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교회를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한다고 하느냐? 또 너는 학식도 부족하고 나이도 젊고 인격도 모자라고 무엇을 보나 목사의 자격이 없지 않느냐?" 이런 질문을 나 스스로 하고는 절망을 느낄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저는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김목사야 너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일을 네가 하는 줄로 알았느냐? 네가 아니라 나 하나님이 하는 줄 왜 모르느냐 너는 질그릇에 불과하고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전달하는 것 뿐임을 알아야 한다" 저는 그 순간 다시 한번 항복을 하고 깨닫게 되곤 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가 무엇을 하겠다고 할 때에는 기도도 제대로 못하고, 말씀도 심령을 파고 드는 힘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서 손들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질그릇에 불과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주님께 내어 맡기게 될 때에 비로소 성령께서 새 힘을 주시고 역사함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질그릇과 같이 무가치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겸손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이러한 보잘 것 없는 질그릇 속에 보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질 때에 그 보배로 말미암아 시험도 이기게 되고, 승리하게도 되고,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이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옳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lmm만 떨어져도 열매를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말라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지"는 원줄기에서 올려 보내주는 진액을 담고 있으면 자연히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파이프(Pipe)와 같은 존재입니다. 파이프 자체가 물(水)을 창조하거나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물을 통과시키기만 잘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조심하며 살펴야 할 일은 파이프 속에 혹시 "나"라고 하는 것이 막혀있지나 않는지, 항상 들여다 보고 만약 막혔다고 하면 중간에 막힌 "나"라고 하는 것을 뚫어 놔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파이프가 더러운 것으로, 혹은 육적인 내가 가득 메워졌다면 하나님은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뜻하지 않은 고통과 실패와 낭패가 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연걸된 파이프가 막혔기 때문에 그것을 뚫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작업임을 깨닫고 오히려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언제나 기도할 때마다 "나는 못해요, 나는 못해요… 주님만이 하실 수 있어요" 하므로 누가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왜 언제나 그런 못난 기도만 하느냐?"할 때에 그 목사님의 대답이 "천만에요 나 자신의 무능과 부족과 절망을 깨닫고 하나님께 맡기고 전적으로 의지하고 나니 놀라운 능력이 나타남을 체험했기 때문이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부흥되는 비결은 목사나 교역자나 장로나 어느 직원이 잘 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그릇으로 쓰셔서 그 속에 보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여러분이 예배 시간마다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도 목사가 설교를 잘함이 아니라 목사는 파이프 역할만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 보낸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서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자랑할 것이 있다고 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영광돌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2. 죽음을 통과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생명이 내 속에 나타나려면 옛사람 "나"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 와서 생명으로 나타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가 죽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노력해서 죽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나로 말미암아 죽어 주셨으므로 그 사실을 믿고 인정하고 의지하게 될 때에 성령을 통하여 예수의 생명은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령을 통해서만이 깨달아지게 되고 따라서 인정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죠지 뮬러(George Muller) 목사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어떤 날 죽었다. 죠지 뮬러에 대하여 죽고 세상이나 친구들의 칭찬이나 책망에 대하여도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말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나는 날마다 죽어지고 다시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나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누구에게서 칭찬을 들을 때 좋아하거나 교만할 것도 없고, 또 싫은 소리 듣거나 책망을 듣는다고 실망하고 불쾌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선교사는 "하나님께 모두 바치니 번민할 일이 전혀 없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성경 가운데 로마서의 총 주제는 죄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 속에 나타난 사상은 무엇인가 하면,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어쩔 수 없이 짓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린다고 하면 사과나무는 사과열매를 맺기 때문에 사과나무가 아니라 사과를 하나도 열리지 못해도 사과나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노력하고, 선행을 해도 죄인은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나는 죽고 살리시는 영이 되시는 제 2의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야 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문제는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 열매를 맺으려면 돌감람나무를 잘라서 참감람나무가 접붙힘을 하게 될 때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돌감람나무와 같은 우리가 진정 열매 맺는 생활을 하려고 하면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나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지고, 그리스도 예수에게 접붙힘을 당해서 그 안에 거하게 될 때, 참 생명과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아담 안에서"(in Adam)란 말과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예수는 "마지막 아담"(last Adam)으로서 첫 아담의 마침(끝)이 되었음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행위로 지은 죄(what we do)는 십자가의 피로 용서함 받지만, 원래 부패한 죄인으로 태어난 옛 사람은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자연적인 것 그대로는 하나님의 일에 무용무익한 것입니다. 옛 것은 다 죽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들어가지 않고는 진정한 생명을 소유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옛 사람이나 육의 사람은 아무리 그가 잘나고, 지식이 많고, 재주도 많고, 웅변을 잘 한다 해도 무용한 것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더욱이 영의 일,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데는 아담에 속한 옛 사람의 재주나 학식이나 능력은 전혀 무가치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지도 않거니와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자연 그대로 힘을 가지고 있던 것은 죽고, 영적인 새 생명으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조직화된 기독교(Organized christianity)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는 인간의 힘이나 조직력을 하나님의 사역에 사용해 보려고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만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으로 시작이 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져 가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끝을 맺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나"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라는 것을 알고(Knowing), 인정해야(Recogning) 합니다.
로마서 6장 6절에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로마서 6장 l1절에서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여길지어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3. 우리는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옛 사람 즉, 아담 안에서 태어난 "나"는 죽었으니 마지막 아담 "예수"의 생명으로 살도록 믿고 의지해야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곧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도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안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살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 지혜가 되어 주시고,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의로움이 되어 주시고, 우리는 거룩하지 못하지만 거룩함이 되어 주시고, 구속함이 되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질그릇에 불과한 무가치한 존재이니,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 가십시다.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으로 시작이 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 나가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끝을 맺는 나, 개인, 가정, 교회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높은 산을 넘어서
고후04장 07~15절 / 박조준목사
오늘 읽은 말씀은 위대한 사도 바울의 성공적인 삶의 철학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서 불안해하면서 고민에 싸여 있습니다. 지난 일을 가지고 고민하고, 현재에 대해서 고민하고,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여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겁 이 많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념이 없고, 하나님께 대해서도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고민합니까?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면 내가 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다는 것은 하등의 쓸모 없는 일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 굉장히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 어디가 조금만 아파도 혹시 암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해서 겁을 집어먹고, 의사가 암이라는 진단을 내릴 것이 걱정되어 병원에 도 가지 않으려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건강에 유의하고 정기적으로 의 사의 진단을 받으면 그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심과 걱정 그리고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이렇게 근심과 걱정 그리고 두려움 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그들의 문제 때문에 두 려움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성공적인 삶을 가로막는 장벽입니다. 두려움은 현실적인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아주 좋은 기회까지도 놓쳐 버리게 합니 다. 두려움은 우리 몸에 해를 끼치고, 우리를 아프게 만들고, 말도 제대로 못하게 하고, 결국은 우리의 생명을 단축시켜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가신 믿음의 선배들이 이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어떻게요? 신념과 행동을 통해서 두려움을 극복해 냈습니다. 구약 여호수아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약속한 땅으로 인도해야 할 책임을 맡게 된 여호수아가 두려운 생각에 싸여 있을 때 하나님께서 거듭거듭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고 했습니다. 어떻게요? 네가 어디 로 가든지 제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달려드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 며, 가장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는 길을 준비해 두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34편 4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를 경배하고 주께서 내 기도를 들으사 나를 모 든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고 했습니다. 몇 가지 두려움이 아니라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시 켜 주십니다. 어떤 책을 읽다가 근심과 걱정에 대해서 연구해 둔 연구 조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조사표 를 보면 우리가 근심하고 있는 일의 40퍼센트는 일어나지도 않을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0퍼센트는 과거에 있은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12퍼센트는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 에 관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10퍼센트는 현실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질병에 대한 고민이라 고 합니다. 나머지 8퍼센트만이 진정으로 고민할 만한 걱정거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8퍼센트도 믿음과 행동만 있으면 이 근심과 의심 그리고 두려움 을 떨쳐 버리고 행복하게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것들입니다.두려움의 높은 산을 넘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위 분노의 감정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파괴시키는 지 모릅니다.
분노와 미움은 우리를 파멸적인 감정으로 이끌러 갑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자제력까지 잃게 만듭니다. 화가 난 사람의 얼굴을 보세요. 꼭 미친 사람과 같습니다. 심장마비에 걸렸던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그의 담당 의사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시는 것이 좋 을 것입니다. 결코 화를 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화를 내기 전에 하나에서 열까지 세어 보도 록 하세요. 이 말은 우리에게 너무 필요한 권면입니다. 분노는 죽음의 신과도 같은 것입니다. 분 노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잠언에도 분노에 대한 귀한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잠언 12장 16절에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 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고 했습니다. 잠언 14장 17절에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한다 고 했고,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 (잠 15 : 18)고 했습니다. 16장 32절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 고 했습니다. 또 29장 22절에 보면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 았습니다. 그때 가인이 심히 분해서 안색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잘못이 어디에 있 나 생각해 보려 하지 아니하고 화를 냈습니다. 분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 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 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고 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분해하고 안색이 변했던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편 37편 8절에서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니라 하였습니다. 분노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고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분한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한 생각을 오래 품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 라는 알을 품고 있으면 무엇을 까게 되 는지 아십니까? 죄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처럼 마귀가 틈을 타지 못 하게 해야 합니다. 대개 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동안 마귀가 제일 많이 활동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공적인 삶을 가로막는 분노의 높은 산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는 길에는 실패의 높은 산이 가로막힐 때가 있습니다. 빈스롬발디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쓰러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다시 일 어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오늘 본문에 이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 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우리는 모두 실패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실패한 경험을 통해서 성 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실패를 통하여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고 다음 번에 보다 잘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에 대해서도 검 토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군대에게는 승리와 전진만이 있은 것은 아닙니다. 여리고 성은 기적적으로 점령했 으나 아이 성에서는 비참하게 실패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실패의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아간 의 범죄가 하나님을 떠나게 한 사실을 발견했고 그래서 이스라엘 군대라 아이 성 사람들에게 부 끄러울 정도로 실패한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는 이것을 아골 골짜기에서 해결하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두 번의 실패가 완전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실패한다 는 것은 우리가 인간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패했다는 것 자체가 무슨 일을 위해서 노력했다 는 증거입니다. 일하지 않은 사람은 실패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실패한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실패한 일을 계속 생각하면 다른 일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성공한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초점을 맞추세요. 성공 을 생각하세요. 그러나 실패를 통해서 배우세요.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러므로 실패는 절대로 수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실패가 수치스럽다면 우리 모두가 수치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실패할 요소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 실패했다면 그것은 절대로 수치가 아닙니다. 목표 없이 사는 것 이 수치요, 도전 없이 사는 것이 수치이며, 모험 없이 사는 것이 수치입니다. 목표가 없으면 지 금 이 순간보다 나아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한 번의 실패가 모든 것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실패한 적이 있고, 지금 실패하고 있다고 해서 미래에도 그와 같이 실패할 것이라는 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포기하고 중단하기 전에는 결코 우리는 패배자가 아닙니다. 전에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했는데 6,000번을 실패했습니다. 누가 그에게 6,000번씩 실패했는데 낙심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에디슨의 대답이 아니요, 나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없었던 6,000가지의 방법을 터득했어요. 라고 하더랍니다. 에디슨과 같이 우리는 때때로 성공을 배우기 전 에 실패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로 낙심되려 할 때 개인적 인 약점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음 속에 되새겨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젊어서 몹시 수줍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약점을 딛 고 일어나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기독교계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헬렌켈러는 태어날 때부터 장 님이며 벙어리였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조니라는 여자는 전신을 쓸 수 없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낙심하지 않고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려 유명한 미술가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문제는 실패의 높은 산을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실패라 는 높은 산을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실패를 하나의 도전으로 생각했습니다. 성공을 향해 넘어서야 하는 높은 산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모든 생에는 투쟁의 연속입니다. 이것이 배움의 과정 입니다. 올리버 웬델 홈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게 만일 곤란한 문제가 닥쳐온다면 나는 그것을 피 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곤란한 문제는 그 자체 속에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저 곤란한 문제를 그냥 안고 있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곤란한 문제를 친구와 같이 대하라는 말 입니다. 왜냐하면 친구는 자주 볼수록 좋은 것이고, 친구와는 아주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미 깊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패가 없다고 믿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그러나 실패는 부정적인 마음의 상태입니다. 저는 어릴 때 집뜰 살구나무 위에 있는 새 둥지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새가 알을 까고 나오면 어미 새는 새끼들이 그들의 날개를 펴고 날아갈 수 있는 시기가 언제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 데 새끼들을 보면 어떤 새끼 새는 겁에 질려 그들의 보금자리를 떠나지 못합니다. 새끼 새들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안절부절하고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미 새는 새끼 새들 달 래는 것을 집어치우고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 버립니다. 왜냐하면 어미 새는 새끼 새들이 마음만 먹으면 자기 힘으로 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새끼 새들은 멀리는 못 가도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날아가며 자리를 옮겨 봅니다. 그러다가 멀리 날개를 펴고 날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새끼 새는 날아 볼 생각도 아 니하다가 어미 새가 떠 밀치면 땅에 떨어져 죽어 버리고 맙니다. 투쟁하는 것이 두려워 날으려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새들입니다. 노력도 해보지 않은 것이 그들의 실수였습니다. 그래서 죽었 습니다. 그러나 투쟁하고 노력한 새들은 살아서 창공을 날아다닙니다. 우리가 자신의 실수를 극복하고서 그 실수에서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을 때에는 다시 실패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변화도 성장도 없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실 패에 대한 공포심을 버려야 합니다. 어느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악보를 기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 고 묻는 질 문에 공포심이지요. 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공포심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고 대답했다고 합 니다. 그러면서 계속해 하는 말이 악보를 잊을까 봐 두려움을 느낀 학생들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바로 그 부분에 가서 약속이나 한 듯이 실수를 합니다. 고 말하더랍니다. 이처럼 실패란 일종의 부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간절하게 권합니다.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실수를 저질러야 합니다. 실수를 통해서 배 우도록 하십시오. 외국어를 배울 때 내가 이렇게 말해서 실수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외 국어를 할 수 없습니다. 실수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아니합니 다.
실패의 높은 산을 넘어서야 성공의 마을에 이를 수 있습니다. 끝으로 문제의 높은 산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데는 어디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성장과 자극의 핵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 리의 문제는 성공적인 삶을 위한 도전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디 가나 이게 문제요, 저게 문제라 고 큰일났다고 걱정하고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하나도 없다면 발전과 성장이 있을 수가 없습 니다. 문제가 없다는 것이 사실은 큰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성공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일들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문제를 시련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도전으로 생각합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게 만드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를 성장하게 만들고, 우 리가 성장하면 더욱 큰 문제가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풀리지 않는 문제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모든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그 속에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가 하나도 없으면 우리의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하는 문제 가 있었기에 난로가 나왔습니다. 어디에 빨리 가야 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자동차와 비행기 가 나왔습니다. 질병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치료하는 약이 나왔습니다. 문제는 개인이나 단체의 운명을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미국 신시내티 어느 조그마한 비누 공장에서 건망증이 심한 노동자가 기계를 멈추는 것을 잊어 버리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습니다. 기계는 계속 돌아 비누 거품이 공장 안을 채우고 공중에 떠다 닐 정도가 되었습니다. 기계 안에 있던 비누가 거품으로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비누 거품 이 물위에 둥둥 떠다니게 되었습니다. 신시내티 시민들은 오하이오 강에서 목욕을 하다가 이 사 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 경과를 거쳐서 탄생한 것이 프록토 갬블 회사의 아이보리 비누입니다. 이 아이보리 비누를 개발할 당시 푸록토 갬블 회사는 일대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아이보리 비누가 개발되 지 않았더라면 그 회사는 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의 높은 산이 기회를 창조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 인류는 역사상 가장 커다란 문제점들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위험, 세계 각처 의 기근 문제, 국내외적인 범죄 사건, 에너지 부족 문제, 인권 문제 등 수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문제들이 결국은 잘 해결되리라고 낙관하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 속에 해결책이 들어 있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질그릇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질그릇 속에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근심과 걱정, 두려움의 높은 산, 분노의 높은 산, 실패의 높 은 산, 해결할 수 없어 보이는 문제의 높은 산을 넘어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와 같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가 많은 사람
고후04장 07~15절 / 조재호목사
며칠이 지나 7일 수요일이 되면 24절기로 입동입니다. 그런데 입동보다 더 관심 있는 것은 수능시험일 것입니다. 대입을 앞두고 시험 준비를 하는 여러 학생에게 심리적 안정과 가정에는 감사가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또 희망과 포부를 가지고 사회로 진출하려는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선하게 앞길 열어주시기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오늘 저희 교회에 처음 오신 분이나, 오랜만에 나온 고척가족 모두를 환영합니다.
여러분에게는 21세기 첫 감사주일에 하나님에게 감사 드리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요?
오래 전에 어느 분이 양희은씨가 신앙고백적으로 부른 찬송가 CD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녀의 2년전 고백인데요. "나이 서른에는 석달을 못 넘기고 죽을 수도 있었던 목숨이었습니다. 살아서 이렇게 찬송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입니다. 말 그대로 제 인생이 다 찬송이었으면..."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찬양할 수 있고 살아 있다는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리는 고백이 인상깊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한동안 매일 새벽이면 그 음반을 듣고 또 들었습니다. 이 음반에는 이런 기도시 낭송도 있었습니다. 뉴욕대학 부속병원 재활센터 입구에 걸려 있는 기도문이라고 합니다.
큰 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더니,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 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싶어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내 맘속에 진작 표현하지 못한 기도는 모두 들어 주셨습니다.
나는 가장 많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감사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 노래를 기억하십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3:17-19) 진정으로 감사해야될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어느 여자 분이 어제 목양실로 와서 잠깐 만났습니다. 좀처럼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려 했던 오빠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완고했었던 오빠가 오랜 기도 끝에 믿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기쁘던 지요. 감사를 고백하며 이러한 말을 저에게 해 주었습니다.
"모든 것 다 가진 것 같으나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요, 아무것도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어느 설교보다 위대하고, 어느 간증보다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그 여종이 그렇게 살고 있었기에 그렇습니다. "모든 것 다 가진 것 같으나 그 가운데 감사가 없으면 불행한 사람이요, 원하는 많은 것을 다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 가운데 감사가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격언의 삶이 그에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기독교 교단 '그리스도 연합교회'는 하루 열 두 번 감사생활 안내라는 지침을 통해서 감사하는 생활을 이렇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아침, 새로운 시간을 주심에 감사, 아침 식사에는 음식을 보며 감사, 일터에 가면서 움직이는 기쁨에 감사, 일하는 보람에 감사, 일하면서 비판이나 압력을 받을 때는 도전을 주심에 감사, 칭찬을 받을 때는 만족함에 감사, 점심에는 대화할 수 있는 동료에 감사, 일과 후 작은 성취에 감사, 귀가 후 가족을 보며 감사, 신문,TV를 보면서 여가를 주심에 감사, 잠을 주신 은혜에 감사, 꿈속에서는 생명을 주신 은혜에 감사! 우리에게 있는 최고의 감사는 소유의 감사가 아니라 존재의 감사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 15절을 보면,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고린도교회에 고난, 핍박, 낙심된 일, 공격받는 일 등이 많이 있지만, 예수 생명이 있고 은혜가 많은 사람들이 많이 있으므로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것입니다.
1. 은혜가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은혜가 작은 사람, 은혜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라고 하는 단어가 히브리어에 여러 가지가 있고 그 뜻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은혜의 기본 뜻은 '구부리다. 굽히다'라는 의미입니다.
옛날에 왕이 행차를 하면, 경계가 삼엄합니다. 길 가던 백성들은 제자리에 서고, 얼굴을 숙입니다. 왕의 행렬이 지나가다가, 왕이 갑자기 타고 가던 가마를 세웁니다. 그리고 내려서서 얼굴을 깊이 숙이고 있는 허름한 한 백성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왕은 허리를 굽히고 손을 내밀고 무슨 일인가 두려워서 떨고 있는 사람의 거친 손을 잡고, 위로하고 축복합니다. 여기에서 허리를 굽혀 아랫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바로 '은혜'의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워하겠습니까? 임금님이 행렬을 멈추고 다가와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시다니! 손만 잡아 주신 것이 아니라, 놓고 보니 다른 사람 모르게 금화가 하나 쥐어져 있었습니다. 왕이 손을 잡아 준 것이 은혜라면, 금화까지 쥐어 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은혜 위에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7) 라고 했습니다.
2. 은혜를 말할 때 움직일 수 없는 2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는 결코 받을 자격이 없는데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던 임금이 허름한 옷을 입고 있던 그 사람 앞에 서지 않고 지나가도 그만입니다. 무슨 자격을 갖춘 것도 아닌데 임금이 내 앞에 멈추어 섰다면,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그냥 손만 잡아주고 가도 생애 최고의 영광인데 손에 금화 하나 쥐어 준 것은 더 큰사랑입니다.
둘째는 은혜는 절대로 갚을 수도 없고 갚을 길도 없다는 것입니다.
유학시절에, 학교 기숙사에 있는 총각들이 주말이면 저희 가정에 많이 왔습니다. 집사람이 한국음식으로, 김치찌개, 육개장 등을 맛있게 끓여서 즐겁게 함께 먹곤 했습니다. 미국에 음식은 풍성하지만, 한국요리를 먹을 수 있는 데가 많지 않습니다. 기숙사로 자취방으로 돌아가면서 "고맙습니다. 평생에 있지 않겠습니다"라고 인사들을 하곤 했습니다. 저희 가정도 참 기쁘죠. 그런데 말이죠 만약 주머니 뒤척거리고 음식값을 내민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제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도 몹시 화가 났을 것입니다. 돈 받으려고 한 것인가요? 그러한 자리에서 나눌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 돈으로 계산이 됩니까?
세상사람들도,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거나,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 주거나,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일 등은 교회보다 잘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은혜를 베푸는 일은 세상은 할 수 없고 교회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3. 은혜가 많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께서 값없는 사랑과 호의를 많이 베풀어주신 사람입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베풀어주시지만, 은혜가 많은 사람은 동일하게 베푸신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은혜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셨는데도 받아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구원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지만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감격과 감사로 그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로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가 많은 사람은 질 그릇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화를 가득 담고 사는 사람입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 보배가 계십니다. 꽃병은 꽃을 담고 있을 때만 꽃병이고, 화분은 나무가 심겨져 있을 때만 진정한 가치가 있는 화분입니다. 은혜가 많은 사람은 어려운 일을 만나지만 예수 생명으로이기며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은혜가 많은 사람은 하나님 함께 하심을 확신하기에 감사 찬송하는 사람입니다.
패 자 부 활
고후 4:7-12 / 김진호목사
운동경기중에는 패자부활전이 있습니다. 처음에 한 두 번 졌지만 다시 대기하여 패자부활전에 오르게 되어 결승까지 오르게 되면, 시합하는 선수도 말할 것 없거니와 그 게임을 보는 사람도 더욱 손에 땀을 쥐면서 게임에 임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엔 실패하고 졌지만 다시 일어나 결승까지 올라와 승리한다는 것은 너무 기분 좋은 게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번도 패하지 않고 승승장구하여 결승까지 올라 왔으나 마지막게임에서 지면 정말 억울하고 애석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패자부활해서 이긴 것은 승승장구해서 이긴 것 보다 더 값지고 귀한 승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부모 만나고 넉넉한 환경에서 한번도 실패의 쓴잔도 맛보지 않고 귀공자 같이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의 삶에는 드라마가 없습니다. 인생의 감격도 감동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불행한 환경에서 다시 일어나 승리했다면 우리의 삶의 모습에서 감동과 감격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이런 책을 보고 목사인 저 자신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책은 꾸며낸 소설책이 아니라 삶의 간증서이기에 더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 책이름은 "나는 위대한 과학자 보다 신실한 크리스챤이고 싶다"란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세계적인 원자력전문가인 정근모 박사입니다. 그는 모교회 장로요 과거에는 과학처 장관이기도하였고 현재는 호서대학교 총장이며 집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국제 해비타트운동에 한국지부 이사장으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중고등학교를 최고수석으로 공부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서울대학교에 들어가서 너무 공부를 잘하니까 미국에 유명한 대학에 들어가 20대 초반에 박사가 되고 25살 때 미국의 유명대학교수가 되어 그 학교에서는 한국인인 정근모 박사를 꼬마교수로 별명까지 부쳐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현재 세계적인 원자력 연구회원중에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천재의 머리를 가진 그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그가 어려서부터 몹씁병으로 고생하며 중대한 수술을 6번이나 하면서 나중에는 자신의 신장하나를 아들에게 떼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근모박사에게 닥친 아들이 죽을병에서 고생하면서 그는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되고 자신의 머리가 천재면 뭘 합니까? 자식이 중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정박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정근모박사는 그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고통스런 경험이 때로는 귀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시 이런 말을 합니다. "아 정말이다. 인생의 시련이 없었더라면 나는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아들의 고통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시련을 만나거든 기도하십시오" 이 짧은 말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고통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교훈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정근모박사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죽을 때 그의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제가 죽거든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마세요. 저를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세요. 제게 있어서 죽음은 곧 천국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더란 것입니다. 이런 말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깊은 믿음가지고 살지 않는 자가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정근모 장로님은 이런 아들의 마지막 말을 듣고 신앙의 위대한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은 정근모 박사에게 위대한 믿음을 주시게 된 줄로 믿습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인생들은 모두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고 실패의 쓴잔을 마시면서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통과 실패 앞에 여지없이 좌절하고 낙심하며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회 안에는 신문에 그 기사가 다 나지 않았을 뿐이지 평균 하루에 18명이나 자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 일본보다 더 많은 통계로 계속 자살이 증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 자살자들은 모두가 시련과 실패를 이겨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는 중 라디오에서 어떤 분이 자기의 기가 막힌 사연을 아나운서에게 보내서 그 아나운서가 방송에서 읽어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 글의 주인공은 남편과 함께 7년만에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갖게된 40대 초반의 한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가정에도 큰 문제가 닥쳐왔는데 남편이 40중반에 회사에서 명퇴당하고 그래서 경험이 없는 남편이 사업을 하다가 이젠 자기집도 날리고 사채 빚까지 있어서 12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사는데 어느 날 남편의 와이셔츠를 세탁하려는데 그 와이셔츠 앞주머니에서 다량의 약이 나오는데 알고보니 남편이 세상을 비관하고 자살할려고 다량의 수면제를 넣고 다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남편에게 다그쳐물으니깐 이 남편이 지금 비관주의에 빠져 자살하려고 깊이 낙심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더 살길이 없으니 미안하지만 당신은 어린아이와 함께 살고 자기는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40대 주부가 제발 남편에게 죽지 말아달라고 간청하면서 너무 괴로워서 방송국에 편지를 보낸 것을 아나운서가 방송시간에 읽어주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 이 사회는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인생의 실패와 좌절 속에서 인생자체를 비관하고 지금의 실패가 영원한 실패로 여기면서 절망과 신음속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더 놀라운 사실은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모두가 인생의 좌절로 그리고 실패의 쓴잔을 맛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도 인생의 실패의 쓴잔을 맛본 사람이요 약삭빠른 야곱도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감으로 20년간 고향과 부모곁을 떠나 타향살이하며 머슴살이를 하였습니다. 요셉은 젊어서부터 형들의 미움을 받고 타국에 팔리는 요즘말로 우리나라에 와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처럼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죄수의 몸이 되는 일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어떻습니까? 40살까지는 잘 나가다가 그만 사람을 죽이는 죄를 범하고 아무도 없는 미디안 광야에 가서 40년간 양치는 목자로 80세까지 살지 않았습니까? 성군 다윗도 그가 임금 되기까지 수 없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져있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저 유명한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그리스도를 위해 살면서도 얼마나 많은 고통과 시련과 실패가 그에게 닥쳐왔습니까? 그는 본문 8절 이하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였다"했습니다. 답답한 일도 당하였습니다. 핍박을 받아 버림도 받았습니다. 어느 땐 거꾸러뜨림도 당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핍박과 환난과 쓰러짐과 실패 속에서도 그는 낙심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실패하여 넘어졌을 찌라도 절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이지요? 그것이 바로 본문 10절에서 "예수의 생명이 자기 몸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은 이 사실을 가르켜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조그만 잘못하면 깨지고 금이 가고 부셔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그릇이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질그릇 속에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의 보배가 담겨져 있기에 그 질그릇은 귀하게 쓰임받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에게만 어려움이 있고 실패가 있고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도 이 광에 같은 세상에 살면서 우리도 요셉과 같이 다윗과 같이 살면서 그리고 바울같이 시련도 있고 실패도 있고 억울함도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진 자는 이 실패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지금은 넘어졌으나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늘 애송하는 성구가 있습니다. 시37:24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으려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잠언에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실패한 다음에 절망하는 줄 아십니까? 지금의 실패가 영원한 실패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실패가 오늘의 고통이 영원한 실패요 영원한 고통이라고 생각하면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어제 넘어졌으나 오늘 다시 일으켜주십니다. 지금은 실패했으나 내일 다시 성공케 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젊어서 고생하지만 이 다음엔 고생한 보람을 찾게 해주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에 아브라함도 다시 일어났습니다. 야곱도 요셉도 모세도 다시 일어나서 위대한 인생과 축복된 인생을 살게 된 줄로 믿습니다.
이런 복음성가를 다 아시지요.
"주님여 이 손을 꼭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기독교야 말고 패자부활의 중교입니다.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는 능력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오늘은 넘어졌으나 주님 붙들고 살면 내일 다시 일어나게 해 주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지금은 실패했으나 앞으로 다시 재기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이 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이 성경이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목사님도 그가 성령 받기 전에는 실패자 목사님이셨습니다. 미국선교사로 가서도 실패하고 돌아왔고 영국에 와서도 목사로써 구원의 확신도 없고 맘에 기쁨도 없던 그가 1738년 5월 24일에 성령을 체험한 후 다시 믿음으로 일어남으로 이 땅에 뜨거운 감리교회를 창시케 된 것입니다.
정근모 장로님도 실패와 슬픔 속에서 주님을 만나 다시 일어난 분입니다. 이제 우리모두 패자였으나 낙심하지 않고 주님의지하고 살아가면 반드시 다시 승리케 할 줄로 믿습니다.
성도에게 왜 고난을 주시는가
고후 4장 07-12절 / 민경설목사
서구의 오래된 풍습 중에 시집가는 딸에게 친정 어머니가 값비싼 진주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는데 이 진주는 ‘얼어붙은 눈물’이라 합니다. 이 얼어붙은 눈물이라는 이름을 가진 진주는 시집 간 딸이 흘려야 할 눈물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릴 때 아픔과 고통이 따라오지만 그 가치는 귀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진주는 아비귤레데라는 조개가 먹이를 먹을 때 모래도 먹게 되는데 모래가 들어오면 락카라는 조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이 모래를 녹여서 그것이 응고될 때 값비싼 진주가 됩니다. 그런데 조개는 락카를 흘릴 때 엄청난 고통을 느낍니다. 그래서 조개는 무조건 락카를 흘리지 않고 선택을 해서 락카를 흘리는데 조개에게 선택되지 못한 모래는 조개의 몸 속에 박혀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개를 썩게 합니다. 조개 자신은 고통스럽지만 눈물을 흘리면 진주가 되고, 당장은 쉽더라도 모래를 그냥 두면 썩게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면서 고난이 올 때가 있지만 믿음으로 통과하면 축복입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고난을 피하고 죄를 짓고 기도하지 않으면 고난은 그 사람을 죽게 합니다. 잘못을 했기에 고난이 올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고난이 오는 것이며 고난은 후에 우리에게 유익이 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고난 자체보다 해석, 대응이 더 중요합니다. 고난은 연합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교회는 예수님이 남겨 두신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를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초대교회 성자인 터튤리안은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순교가 교회의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고난이 없다면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고난을 통해 은혜가 깊어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십니까?
첫 번째, 능력의 원천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7-9) 인간에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이고 주님은 보배이십니다. 이 보배가 질그릇 안에 있기에 질그릇이 깨져야 보배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질그릇이 깨져야 합니다. 능력은 질그릇이 아니라 보배이신 주님께 있습니다. 질그릇이 깨지고 주님이 능력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꾸러뜨려도 망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주님 자신이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0-11) 인간은 고난이 아니면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나님이 나타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8-9) 사도바울은 잘못이 없이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고난이 있었으나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야 내가 온전한 자가 됩니다. 내가 부족해도 주님이 나타나시면 내가 온전한 자가 됩니다.
세 번째,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12)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입니다.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기에 당신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이 깨져야 다른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미국의 데미안 선교사는 나환자들이 모여사는 몰로카이 섬에서 전도하기 위해서 나환자가 되기를 원했고 마침내 자신이 나환자가 되어 몰로카이 섬의 사람들 90% 이상을 구원했습니다. 지금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통과하여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우리를 능력있게 하는 것
고후04장 07~12 / 문기태목사
어떤 골동품 애호가가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그 집 개의 밥그릇이 청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저것을 가져갈까 궁리하다가 잡종개인 그 개를 30만원이나 되는 많은 돈을 주고 사겠다고 했습니다. 식당 주인은 좋다고 개를 팔았습니다. 개를 안고 나오려다가, 그는 값을 후하게 쳐주었으니 저 개 밥그릇도 같이 주면 안 되냐고 했더니 주인은 그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그 개 밥그릇 때문에 개를 30마리도 더 팔았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개 밥그릇이지만 실제로는 청자이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그걸 사려고 안달한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를 보물을 담은 질그릇(고후 4:7)이라고 한 것은 겉 보기에는 개 밥그릇 같으나 실제로는 청자같이 존귀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보는 눈이 없는 사람에게는 개 밥그릇이지만, 눈이 있는 사람에게는 청자보다 더 귀합니다. 그리스철학에서는 우리 몸뚱이를 천한 것으로 여기고 영혼만 소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질그릇 같은 우리 몸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담고 있는 고귀한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우리안에는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을 소유한 존재임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갈 것을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이란 무엇일까요?
1.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것입니다.(8)
보배로운 예수님이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계심으로 우리가 아무리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사람들은 이 땅에 살면서 끊임없이 죄악에 둘러 싸여 공격을 당하고 죄의 포로가 되어서 끌려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를 구주로 모신 사람은 죄악이 우리를 둘러 싸도 우리 안에 계신 보배로 말미암아 용서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 죄악의 끈을 산산조각 내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피를 흘리심으로 그 피 앞에 어떠한 죄도 우리를 묶을 수가 없습니다. 죄가 아무리 우리를 둘러싸도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에게서 거룩함이 넘쳐나와서 언제나 죄의 권세를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미움으로부터 에워싸일 때가 많습니다. 끊임없이 서로 갈등하게 되고 미움을 받게 되고 미운 마음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의 사랑이 이 모든 미움과 증오를 다 무너뜨려버리고 포로가 되지 않게 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넘치기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의 증오와 미움을 다 없애 버립니다.
질병이 우리를 둘러싸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치료의 역사가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4장 2절은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치료하는 광선이 넘쳐 남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질병을 물리쳐 버리고 질병에 우겨싸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으므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면 그의 능력으로 우리는 질병의 담을 헐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저주가 우리를 둘러싸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2.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8)
천지가 꽉 막혀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함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에 도착했을 때입니다. 앞에는 홍해바다요 뒤에는 애굽 군대가 포위 했습니다. 이제 피할 길이 없습니다. 독안에 든 쥐와 같습니다. 온 백성이 통곡하고 탄식했습니다. 모세에게 나아와 '왜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고와서 죽게하느냐? 그냥 노예로 살며 애굽 사람을 섬기는 삶이 더 낫다.'고 하며 원망했습니다. 낙심하고 절망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손을 바다위로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홍해바다 가운데에 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추격하던 애굽군대를 바다속에 쓸어버리셨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 보배가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 보배를 우리 질그릇 속에 가졌는데 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내가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만들어 내셔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가 주위 사람들에게 오해와 모함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오해와 모함을 받아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시고 승리하여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만 의지하면 어떠한 모함이 다가와도 그리스도가 모함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영광이 우리 마음을 붙잡아 줌으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절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올바르게 사는데 사람들이 우리를 오해하고 여러가지 거짓으로 모함해서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에 앞서 그런 답답한 일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만 의지하고 참은 결과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 모든 오해와 모함을 불식하고 위대한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도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우리 속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이 어떠한 답답한 일도 다 제켜 버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3. 우리는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 생애 속에 다가오는 핍박도 종국적으로 영광이 되도록 변화시켜 주십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핍박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갖고 힘차게 나아가면 우리 속에 계신 보배로운 예수님이 오히려 그 핍박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여 보좌에 앉게하는 은총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핍박을 영광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핍박을 당하여 잡혀 깊은 감옥 속에 갇혔을 때 그들은 밤중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매 감옥 안이 지진으로 뒤흔들려 다 풀리고 모든 감옥 문이 다 열리고 바울과 실라가 오히려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가둔 로마의 관원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와 성도를 핍박한 개인이나 나라는 다 버림 받았어도 교회와 성도는 절대로 버림 받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것은 큰 축복이고 영광입니다. 핍박받을 때에 성령이 우리와 같이 계시고 핍박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헤아려 주셔서 나중에 핍박받은 것 이상의 놀라운 영광을 주십니다. 역사를 통해서 보면 로마시대에 로마 황제가 교회를 핍박했고 히틀러가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교역자들을 죽이고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한국교회의 문을 닫고 수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통을 주었지만 교회는 오늘날도 더욱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다 망했습니다. 공산주의는 가는 곳마다 교회의 문을 닫고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신은 죽었다고 외쳤지만 오히려 공산주의는 이 지구 상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핍박받던 교회는 이 지상에서 더욱 왕성하게 살아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핍박을 받아도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결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4. 우리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면 복음전파는 잠잠해 질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복음이 온 천하에 가득하게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여러가지 삶 속에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다가오는 시험과 환란과 고통은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능히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이 위기설을 말합니다. 나라의 경제가 침체에 빠지고 살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고 경제 기반이 역한 우리나라가 그 큰 파도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라안에서도 여러 갈등이 연속되므로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땅에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서 우리나라가 어떤 거꾸러질 위험에 처해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6.25 전쟁으로 거꾸러뜨림을 당하였어도 망하지 아니했습니다. 또 경제 대란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무너질 뻔 했었는데 이런 위기에 처해도 다시 재기하고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우리 속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1절은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로마서 8장 37절에도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므로 어떤 대적이 나타나 발목을 걸어 넘어뜨려도 우리는 다시 일어납니다. 반드시 승리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어느 작은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사역을 통해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장로들에 의해 강제로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섬겼던 마을은 까다로운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차가웠고 진리에 대해 적대적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섬겼던 기간 동안 회심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설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예배 중 헌금 쟁반이 돌려지고 있을 때, 한 어린 소년이 쟁반을 바닥에 놓고는 일어서서 그 쟁반 위로 올라섰습니다. "왜 그랬느냐?"고 하자 그 소년은 목사님의 삶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드릴 돈이 없어 자신을 고스란히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쟁반 위에 올라섰던 소년이 바로 1817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간 최초의 선교사 보비 모팻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 작은 교회에서, 그리고 인정받지 못했던 그 목사님의 충성스러운 사역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보배를 가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보배는 예수님이며,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들이 우겨 싸고, 답답하게 하고, 핍박하고, 거꾸러뜨려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생명을 지니고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큰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살면 이 모든 것을 이기신 예수님으로부터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다 무너뜨리고 완전한 승리와 영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있게 되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림받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심히 크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도 당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생명이 여러분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이 얼마나 고귀한 보배입니까? 여러분 그 보배를 귀하게 여기고 행복함에 젖어 사십니까? 그 보배를 사랑하며 모르는 이들에게 자랑하며 사십니까? 예수 생명의 보배를 날마다 꺼내보고 확인하며 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바랍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
고후 4장 07~11절 / 문기태목사
여러분의 보물 1호는 무엇입니까? 며칠전에 운전중에 '당신의 보물1호는 무엇입니까?' 이라는 주제로 방송이 흘러 나왔습니다. 어떤 이는 연애시절 주고 받은 연애편지, 어떤 이는 자녀, 또는 남편, 건강한 몸, 재봉틀, 등 다양한 보물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주 셀모임에서는 각자 자신의 보물 1호라는 주제로 아이스 브레이크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보배는 일반적으로 질그릇보다는 고급도자기나 화려한 상자에 담아 보관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고 말씀합니다. 질그릇은 무엇입니까? 질그릇은 우리의 몸을 뜻합니다. 본래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우리의 몸을 질그릇에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딤후2장에 보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몸이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인 우리 자신을 의지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거기에 담긴 보배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존귀하게 하려고 우리안에 주신 보배를 깨닫고 잘 간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존귀한 보배를 질그릇인 우리 몸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아주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몸을 귀히 여기고 잘 관리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어떤 보배를 담으셨습니까?
1. 예수 생명입니다(10-11).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새생명을 소유합니다. 육체적인 생명외에 영적인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안에 있던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육체적인 생명은 누군가에 의해 잃을 수 있습니다. 병들어서 시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백년을 넘기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뿐만아니라 사는동안 미워하고 불안해 하며 시기하고 괴로와하다가 불행하게 보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생명은 완벽하며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사람이 예수를 믿고난 후 변화되는 것도 그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때문입니다. 생명의 힘이 우리를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를 예수님처럼 온유한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그 생명이 역사하여 우리로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만듭니다.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성장합니다. 식물도 생명이 있으면 잎을 내고 꽃을 피웁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그 안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영생에도 생명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아름답게 변화시켜줍니다. 예수 생명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믿음이 자라게 합니다. 식물이 꽃을 피우듯이 거룩한 영향을 끼쳐 향기를 발하며 아름답게 살아가게 해 줍니다.
겨우내 죽은 듯이 말라있던 나무가 새 봄이 되면 새순을 틔우고 잎을 냅니다. 아주 아름답게 변합니다. 온갖 아름다운 빛깔의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하게 됩니다. 열매도 주렁주렁 맺습니다. 그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있게 되면 이처럼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살아있는 것은 성장할 뿐 아니라 충분히 성장하면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력은 열매를 통하여 아주 넓게 확산됩니다. 지구상에 한 때 무서운 힘을 과시하던 것들중에서 번식력이 약한 것은 이미 멸종되고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한 것들중에서도 번식력이 강한 것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안에 생명이 있다면 성장할 뿐 아니라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계속 번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한 생명력으로 세상을 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생명이 여러분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는 예수 생명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통해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기를 원하셔서 우리안에 생명을 담으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나타내면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예수님께 굴복시킬 때 예수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예수의 성품이 나타나도록 여러분의 성품을 굴복시키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향기가 나타나도록 여러분의 냄새를 절제하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뜻이 나타나도록 여러분의 뜻을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여러분이 영광을 받고 싶은 유혹을 절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통해 예수 생명이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 의 인생이 보배롭게 되고 존귀해져서 행복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 생명을 나타내어 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바랍니다.
2. 심히 큰 능력입니다.(7)
예수의 능력이 우리안에서 운동하고 있습니다. 나의 능력과 비교할 수 없이 큰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본문은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주 넘어집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불안해하고 낙심합니다. 조금만 큰 일이 주어져도 쩔쩔매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이 우리안에서 역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심히 큰 능력이 무엇입니까?
1)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능력입니다.(8)
예수를 구주로 모신 사람은 죄악이 우리를 둘러 싸도 우리 안에 계신 보배로 말미암아 용서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 죄악의 끈을 산산조각 내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어떠한 죄도 우리를 묶을 수가 없습니다. 죄가 아무리 우리를 둘러싸도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에게서 거룩함이 넘쳐나와서 언제나 죄의 권세를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미움으로부터 에워싸일 때가 많습니다. 끊임없이 서로 갈등하게 되고 미움을 받게 되고 미운 마음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의 사랑이 이 모든 미움과 증오를 다 무너뜨려버리고 포로가 되지 않게 합니다.
질병이 우리를 둘러싸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치료의 역사가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으므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면 그의 능력으로 우리는 질병의 담을 헐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 능력입니다.(8)
천지가 꽉 막혀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함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에 도착했을 때입니다. 앞에는 홍해바다요 뒤에는 애굽 군대가 포위 했습니다. 이제 피할 길이 없습니다. 독안에 든 쥐와 같습니다. 온 백성이 통곡하고 탄식했습니다. 낙심하고 절망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하고 손을 바다위로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홍해바다 가운데에 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 보배가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만들어 내셔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십니다.
3) 우리는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핍박도 영광이 되도록 변화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핍박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갖고 힘차게 나아가면 우리 속에 계신 보배로운 예수님이 오히려 그 핍박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여 보좌에 앉게하는 은총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핍박을 영광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핍박을 당하여 잡혀 깊은 감옥 속에 갇혔을 때 그들은 밤중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매 감옥 안이 지진으로 뒤흔들려 다 풀리고 모든 감옥 문이 다 열리고 바울과 실라가 오히려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가둔 로마의 관원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와 성도를 핍박한 개인이나 나라는 다 버림 받았어도 교회와 성도는 절대로 버림 받지 않았습니다. 핍박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헤아려 주셔서 나중에 핍박받은 것 이상의 놀라운 영광을 주십니다. 역사를 통해서 보면 로마시대에 로마 황제가 교회를 핍박했고 히틀러가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교역자들을 죽이고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한국교회의 문을 닫고 수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통을 주었지만 교회는 오늘날도 더욱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다 망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핍박을 받아도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결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4) 우리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능력입니다.
원수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복음이 온 천하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다가오는 시험과 환란과 고통은 우리안에 예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능히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이 나라의 경제가 침체에 빠지고 살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고 경제 기반이 역한 우리나라가 그 큰 파도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땅에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서 우리나라가 어떤 거꾸러질 위험에 처해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6.25 전쟁으로 거꾸러뜨림을 당하였어도 망하지 아니했습니다. 또 경제 대란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무너질 뻔 했었는데 이런 위기에 처해도 다시 재기하고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우리 속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심히 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바랍니다. 여러분, 큰 일을 만났을 때 연약을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심히 큰 능력으로 역사하는 예수님이 여러분안에 있음을 깨닫고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이 심히 큰 능력으로 우리도 살리실 줄 믿습니다. 예수 생명이 우리안에서 역사함으로 강력한 사단의 권세도 얼마든지 이기게 될 줄 믿습니다.
1868년의 일이다.아라비아 사막 부근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베두인족이 어느날 비석을 발견했습니다. 알 수 없는 글씨가 깨알같이 적힌, 꽤 낡은 비석이었습니다. 마침 서양인 선교사가 달려와 비문을 탁본했습니다. 고대사의 비밀이 담겼을지 모른다는 직감 때문이었습니다. 그 비문의 존재가 알려지고 나서 유럽 여러나라 관계자들이 비석을 손에 넣으려고 앞다퉈 나섰습니다. 너나없이 후하게 값을 쳐주겠다고 했습니다. 베두인족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회의 끝에 비석을 팔지 않기로 했습니다. 비석안엔 황금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들은 마을 한복판에서 불을 지피고 비석을 넣었습니다. 비석이 벌겋게 달아 오르자 물을 부었습니다. 몇 차례나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황금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아브왕에 관한 기록을 담은 비석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비문은 성서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입증한 최초의 글이었습니다.
우리가 왜 보배입니까? 황금으로 만들어져서 입니까? 우리 몸이 돈으로 환산하면 엄청난 가치가 있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물이 너무나 가치가 있어서입니다. 보배인 예수 생명과 예수의 능력을 빼 버리고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만 귀히 여기다가는 초라한 결과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보배를 귀히 여기고 잘 간직하고 잘 활용하며 산다면 우리의 인생도 그 보배와 함께 존귀해 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속에 보배로운 생명과 능력이 그대로 나타나 여러분의 삶도 보배롭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보화가 담긴 질그릇
고후 4장 07~11절 / 안효관목사
여러분에게 사진을 한 장 보여드리겠습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외국의 어느 유원지가 아닙니다. 이곳은 호텔 안입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Las Vegas)에 있는 베네치안 호텔(Venetian Hotel)의 내부 사진입니다. 호텔 안에 개천이 흐르고 그 개천에서 배를 타고 다닙니다. 그리고 위쪽에 있는 하늘은 진짜 하늘이 아니라 가짜입니다. 호텔 로비의 천장을 하늘로 꾸며놨습니다. 그리고 실제인 것처럼 구름도 움직입니다. 옆에 보이는 것이 호텔의 전부가 아닙니다. 이건 호텔 로비에 있는 명품판매점일 뿐입니다. 이 호텔은 35층 높이에 객실 수가 3천 개가 넘습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려보는 관광명소입니다.
7년 전에 이 호텔에 구경 갔을 때 개천 옆에 있는 명품들을 파는 가게에 들어갔다가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명품 시계들이라 그런지 몰라도 시계 하나의 가격이 싼 것은 5천 불에서 비싼 것은 5만 불 정도나 되었습니다. 5만 불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약 5천만 원이 넘습니다. 당시 제가 미국에 가면서 시계를 가지고 가지 않아서 공항면세점에서 하나를 사서 차고 갔습니다. 제가 산 시계가 지금도 차고 다니는데, 21달러를 주고 산 것입니다. 당시 환율로 2만원도 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시계를 차고 있던 내게, 아니 그런 것이 어울리는 제게 5천만 원을 호가하는 시계는 정말 신기할 뿐이었습니다. ‘누가 저런 시계를 차고 다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한 편에서는 ‘저런 시계를 차고 다니면 사람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인가?’ 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비싼 시계를 찰 정도면 갑부이거나 유명 인사이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비싼 시계를 차야만 그 사람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자신의 인격이나 사람됨에는 별로 관심 갖지 않고 비싼 명품 옷을 입고 명품 가방 같은 것들을 갖고 다녀야 자신의 가치가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어떤 백화점에서 몇 십만 원 짜리 옷을 진열해놓았는데, 몇 달 동안이나 진열해 놓아도 팔리지 않자, 그 상점 점원이 심심해서 가격표에다가 뒤에 동그라미 하나를 더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 십만 원 짜리가 졸지에 몇 백만 원 짜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 당장에 팔렸다는 겁니다. 같은 상품일지라도 품질을 따지지 않고 가격표에만 관심을 갖고 비싸야 좋은 것이고, 비싸게 사야 내 품위가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누군가가 만들어 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겉치장에만 열을 올리는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을 꼬집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중고품에 새 포장지를 쓴다고 중고품이 새 것이 되나?’ 여러분, 그렇지요? 몸은 중고품이고 별 볼일 없는데, 포장지만 예쁜 것을 쓴다고 좋은 제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포장지만 새 것으로 바꾼다고 해서 품질이 좋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몸은 날마다 중고품이 되어갑니다. 하루하루 폐차장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폐차될 몸입니다. 거기에다가 요란하게 비싼 것으로 치장한다고 해서 폐차장에 안 갈 것도 아니고, 옷을 잘 입고 겉치레를 잘한다고 해서 오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의 몸을 돈의 가치로 따진다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물론 인간의 몸을 돈의 가치로 따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엉뚱하게도 인간의 몸뚱아리의 가치를 계산해 본 사람이 있었답니다. 인간의 몸을 화학 성분으로 나눠보니까, 칼슘이 2.25㎏, 인산이 500g, 칼륨이 252g, 나트륨이 168g, 마그네슘이 28g, 그리고 철과 구리가 28g이랍니다. 이걸 시가로 환산하니까 1달러 50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겨우 1,700-800원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에 있는 화학 재질로 어떤 물건을 만들어서 판다면 1,800원은 받을 수 있답니다. 너무 싸지요?
그런데 이제는 몸의 가치를 따지는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원자력 시대인지라, 어떤 사람은 원자력의 견지에서 몸의 값어치를 계산해보니 그 가치가 더욱 커졌다고 합니다. 사람의 몸 안에 있는 원자는 1Kg에 2,513만 Kw의 힘을 생산한다고 한다. 그만한 힘의 분량을 값어치로 따지면 1Kg에 약 1,256달러 정도 된답니다. 그러니까 70Kg의 체중이 나가는 사람은 몸의 가치가 87,920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약 1억 원 정도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우리 몸의 가치도 많이 높아졌습니다. 70Kg의 몸무게 나가는 사람의 값어치가 1억 원이라면, 체중이 더 나가는 저 같은 사람은 몸값이 더 많이 나갈 것입니다. 그러니까 몸무게 많이 나간 사람들은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남보다 비싼 몸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성경은 우리 몸의 가치를 얼마로 보고 있는가’ 하는 것에 우리는 관심을 가져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본다면, 우리 몸값은 그렇게 많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우리를 ‘질그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흙으로 구워 만든 항아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시장에 나가서 항아리 하나 사려면 얼마를 주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리 비싸지는 않을 것입니다. 항아리가 그래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고려청자, 이조백자 그래서 아주 비싼 값에 팔리 수 있지만, 우리야 어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유물도 아니고, 길어야 한 80년, 짧으면 이제 겨우 몇 십 년 지난 항아리니까 그렇게 값이 많이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좀 잘 만들어진 항아리라면 조금 비쌀 것이고, 잘 못 만들어진 항아리라면 몇 천 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게 우리 몸의 가치입니다.
겨우 몇 천 원, 몇 만 원 짜리 항아리에다가 몇 십 만원, 몇 백 만 원짜리 옷을 입혀 놓는다고 그 항아리가 몇 천 만 원짜리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성경은 왜 우리를 가리켜서 질그릇, 흙으로 구워 만든 항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흙으로 빚어서 만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고 나면 결국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히브리 사람들의 농담끼 섞인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다음 불에 구웠는데, 처음 구운 것이 너무 빨리 꺼내서 덜 구워져 하얂게 되었습니다. 그게 백인입니다. 두 번째 것은 너무 오래 구워서 새까맣게 타버렸습니다. 그게 흑인입니다. 세 번째에는 알맞게 - 노리끼리하게 알맞게 구워졌습니다. 성공적인 작품입니다. 그게 우리 황인족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히브리 사람들도 우리와 같이 황인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잘 구워져서 노리끼리하던, 덜 구워져서 하얂든, 아니면 너무 구워져서 새까맣든 간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흙으로 지은 존재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흙덩이라면 우리는 다른 동물들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흙덩어리인데 단순한 흙덩어리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7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흙으로 빚은 질그릇 - 항아리이긴 한데 그 안에 보화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그 보화가 무엇입니까? 그 보화는 생명입니다.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이유는 우리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생기가 바로 생명입니다. 흙으로 지어진 항아리 안에 하나님의 영인 생명이 들어오니까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들어오기까지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항아리 하나가 있습니다. 그 항아리는 별로 값나가지 않는 평범한 항아리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값진 진주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굉장한 값어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담겨진 보화 때문에 그 항아리는 값비싸게 팔릴 수 있습니다. 항아리가 귀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진주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질그릇이라는 항아리에 보화를 담아둔다고 하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귀중한 보배가 있으면 금고에 넣어 둔다든지, 아니면 은행에도 귀중품을 보관하는 장소가 있기 때문에 은행에다가 자기 서랍을 만들어 보관합니다. 아마도 항아리에 값나가는 보화를 담아두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서울 산돌교회에서 사역할 때 교회 사무실에서 한 2년 동안 사무장의 일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교회 건축을 마치고 땅과 건물을 등기를 했습니다. 등기를 다 끝내고 나니까 등기권리증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그게 아주 귀중한 것입니다. 그 귀한 등기권리증을 사무실에 보관할 수가 없어서 은행에다 맡겨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은행 창고에 서랍 하나를 세내서 거기에다가 등기권리증을 넣어놓고는 열쇠 두 개로 잠가놓습니다. 그리고는 열쇠 하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고, 하나는 은행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것을 찾고 싶거나 잠깐이라도 보고 싶으면 은행에 찾아가서 은행 직원과 함께 창고에 가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열쇠로 열고, 그 다음 은행에서 보관하고 있는 열쇠로 열어야 그 문이 열립니다. 은행에 보관된 열쇠만 가지고도 열 수가 없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열쇠만 가지도고 열 수가 없습니다. 열쇠 두 개가 다 있어야 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귀중품을 그렇게 보관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은행제도가 발달되지 않았고, 금고도 없는 옛날에는 값나가는 물건을 항아리에 담아서 땅 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나만이 알고 있는 땅 속에 묻어두고서 보고 싶을 때는 삽을 들고 가서 항아리를 파서 보화를 한 번 보고는 다시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보화를 항아리에 - 질그릇에 담아둔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땅에 보화를 담은 항아리를 묻어 두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죽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우연히 그것을 찾을 때까지는 임자 없는 보화가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중에 그 밭이나 땅을 사서 우연히 그 보화를 발견하면 그 사람의 소유가 됩니다.
당시의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밭에 감추어 놓은 항아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무엇인가 싶어 항아리를 열어보았더니 그 안에 귀중한 보배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항아리가 감추어져 있는 밭을 통째로 사버렸습니다. 이 사람이 그 밭을 산 것은 밭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또 보화를 담고 있는 항아리가 좋아서도 아닙니다. 그 안에 보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화 때문에 밭을 사게 되었고, 보화 때문에 보화를 담은 항아리가 값비싼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고 존귀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우리 안에 생명이라는 보화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는 존재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짐승들은 죽으면 그 고기가 사람들에게 팔려갑니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아무도 그 고기를 사 가지 않습니다. 아니 가까이 가기조차도 꺼려합니다. 생명이 있을 때에만 가치가 있고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몸뚱아리인 항아리 - 질그릇이 존귀한 것이 아니라 그 질그릇 안에 생명이라는 보화가 담겨 있기에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보화가 담겨 있는 한 그 사람의 가치는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가지게 되었는데, 여러분! 우리 안에는 또 다른 보화, 또 다른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또 다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욱 귀중한 존재로 여김 받는 것은 당신의 독생자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기에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영생을 소유한 자로 살아가는데, 우리가 영생을 소유한 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간직하는 비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안에 우리의 생명 말고 다른 생명이 있다는 것을 말하면 그들이 그 비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고개는 끄덕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 예수님의 생명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게 우리에게 있는 비밀입니다.
여러분! 이 비밀 때문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계십니까? 우리 안에 나만이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생명이 있다는 것, 예수의 생명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 때문에 자부심을 갖고 있느냐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게 하셨고, 그 비밀을 알게 하심에 감사하며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이 세상에서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본문 8-9절에 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 망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둘러싸고 넘어뜨리려고 하더라도 우리는 답답하지 않고,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아도 부끄럽지 않고, 깨어져도 아깝지 않고, 누가 우리를 멸시한다 하더라도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가 가장 값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보화가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 한들 그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생명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화를 우리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나를 비웃어도 ‘허허’ 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예전에 많이 불렀던 복음성가에 이런 가사 있었던 것 기억나시죠.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크신 은혜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우리는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질그릇일 뿐입니다. 깨지기 쉽고 약하고 천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넘어지기 쉽고, 죄에 노출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 때문에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만,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자신이 보화인양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가졌어도 우리의 몸은 여전히 질그릇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가졌다고 질그릇이 금그릇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부심을 가지고 귀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옛말에 정승을 태우고 가는 말이, 사람들이 허리를 숙여 절을 하니까 정승한테 절한다는 것을 자기에게 절하는 줄로 착각하고 고개를 꾸벅 꾸벅하더라는 말입니다. 정승 때문에 사람들이 절을 하는 것이지, 말을 보고 절을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주책 맞은 말은 자기에게 절을 한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승을 태우고 간다 하더라도 말은 말일 뿐입니다. 정승을 태우지 않으면 누가 말이 지나가는 데 그 앞에서 절을 하겠습니까?
아동문학가 정채봉 씨가 쓴 글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짧은 동화”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내용은 정말 짧습니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마디 하였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화를 가진 값진 존재이지만 결코 교만하거나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옷걸이가 귀중하게 여김 받는 것은 아름다운 옷이 걸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귀중한 존재로 인정받는 것은 우리 자신이 잘 나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보화가 값지기에 우리가 값진 것입니다.
또 하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질그릇이 깨어져야 보화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죽음에 넘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깨어지고 우리 자신이 부인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인 보화가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우리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육체를 벗어버리는 순간 우리 안에 있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그 모습을 나타낼 것입니다. 영원한 집, 아름다운 보화로 지어진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집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찌하든지 이 땅의 장막 집이 무너지고 깨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가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날마다 자신을 깨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벗어버려야 하고, 이생의 자랑을 죽여야 합니다. 영원한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방해하는 육체적인 것들을 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라는 값진 생명의 보화가 우리 안에서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4: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 고백은 아주 감격적인 고백입니다. 질그릇인 우리의 육체는 날로 후패해져 갑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보화 - 예수 그리스도는 날마다 우리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가십니다. 날마다 폐차장에 가까워지는 우리의 겉모습과는 달리 우리의 영혼은 날마다 새로운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계십니까? 폐차장에 가까이 가고 있는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 살고 계시진 않습니까?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통하여 그 아름다운 가치를 드러내길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가진 자답게 당당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도록, 나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도록 말입니다.
누가 세상을 이기는가
고후04장 07~11절 / 민경설목사
우리가 세상 속에 생존경쟁을 하며 늘 속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보이는 것, 물질적인 요소, 환경적인 요소에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남보다 더 높아지고 더 많이 소유하며 더 많이 지배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나중에 가면 다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고후4:18]“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엡6: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즉, 우리의 싸움이 세상의 보이는 것과의 싸움이 아니라 세상 속에 보이지 않는 영과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세상 싸움은 보이는 환경, 보이는 것과의 싸움 지만 실제는 보이는 것 뒤에 역사하는 악한 세상의 영인 사탄 마귀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한 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 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우리 인간을 구원하려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성육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사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그래서 그 분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는 세상 임금인 사탄 마귀의 사망 권세를 부활로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요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전15: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주님의 보배를 갖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나 곤란, 시련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고후4: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그러면 우리 속에 와 계신 주님 때문에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를 본문 속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1) 세상 속에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직 우리를 죽이려고 우겨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상황이나 환경은 절대로 우리의 편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의 세력이 영적으로는 주님께 실패했지만 세상 속에서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는 불법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부활하신 주님을 굳게 의지하면 어떤 우겨쌈을 당하여도 우리는 싸이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주님이 함께 하시면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4:8)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답답한 일이 많습니까? 우리 믿는 자가 세상 속에서 답답하여 갈등하고 쓰러질 것 같지만 길이 없는 것 같지만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역사하는 주님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3) 주님을 믿으면 아무리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9) 이 세상은 예수 믿는 자를 어떻게 해서든지 핍박하고 어렵게 합니다. 그렇다고 버린 바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영이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바벨론의 포로로 붙들려 갔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자기의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일곱 배 뜨거운 풀무 불에 넣는다고 협박했지만 그들은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4) 주님을 믿으면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거꾸러뜨림을 받으면 다 망합니다. 그들은 한 번 넘어지면 못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날 수 있습니다. 7전 8기입니다. 우리 속에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초대 교회에 그렇게 핍박이 심했지만 그들은 더욱 복음을 전했습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40-42) 우리는 심지어 죽는다고 해도 걱정이 없습니다. 천국에서 영원합니다. 누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입니다. 예수 믿고 영생을 얻고 세상에서 영원히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승리하는 삶의 비결
고후04장 07~11절 / 민경설목사
화니 크로스비라는 여성의 찬송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 의사의 실수로 맹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9,000편의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맹인이라는 불행의 환경 속에서도 한 번도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가진 신체의 장애를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믿었으며 이 괴로운 조건이 성전의 기둥이 될 수 있는 거룩한 봉사의 계기가 되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불운을 불평하지 않고 행운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그 사람은 하나님이 그의 삶의 힘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그 환경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은혜의 힘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어떻게 하면 환경에 매이지 않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1.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세상 속에서 장애받지 않고 승리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로 선교를 가려다가 밤중에 꿈에서 마게도냐 지방에서 구해달라는 손짓을 보고 데살로니가 지방으로 선교를 갑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빌립보 감옥에 갇혀 착고에 차여 죽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중 삼중 장애물로 막혀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 매이지 않고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미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기적으로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풀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5-26)
부활의 주님이 역사한 것입니다. 그러니 매인것이 벗어졌습니다. 여기서 더 엄청난 것은 이 사건에서 간수가 예수를 믿어 거기서 빌립보 교회의 토대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구속에서 자유가 일어날 뿐 아니라 반드시 복된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허드슨 테일러는 말하기를 “우리가 부활의 주님과 동행한다면 하늘에 뿌리 내린 포도나무 같이 세상에 상관없이 열매 맺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2. 부활의 주님이 질그릇 같은 내 속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성령의 역사로 구원받아 주님이 우리 속에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계신 주님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속에 계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분을 의지하십시오. 그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3. 능력이 나타나려면 질그릇이 깨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10-12)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은 것을 짊어짐은 예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죽어 깨어져야 우리 속에 능력의 주님이 나타나게 되어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주님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아픔과 어려움과 고통의 환경이 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의 길을 가르쳐 주시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정말 죽을 것 같다고 할 때 내 질그릇은 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한 알의 밀알로 죽어야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12) 죽으면 생명은 역사합니다. 능력의 주님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깨어지면 삽니다. 아멘.
질그룻 안에 있는 보배
고후04장 07~11절 / 지용수목사
교회에는 옥토 같은 교인과 박토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옥토에 떨어진 밀알은 열매를 맺지만 아스팔트에 떨어진 밀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옥토 같은 교인은 사시사철 잘됩니다. 박토 같은 교인은 되는 것 같아도 안 됩니다. 그런데 박토라도 자꾸 만져 주면 옥토가 되어 잘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옥토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옥토로 만드실 수가 있으십니다.
일본의 유명한 물리학자인 마치부라는 제국대학을 졸업할 때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그를 부르더니 대학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그를 특별히 아껴주는 교수님이 계신 것도 아닌데 어찌 교수가 되라고 하는지……. 어쨌든 그는 실력이 부족한 자기가 교수가 된 것이 너무 영광스럽고 고마워 남보다 배나 더 노력했습니다. 마침내 그는학자로 대성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그가 제네바에 유학갔을 때 그는 자신이 교수가 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교수였던 니토베 박사를 만났는데, 그때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네가 기억하는지 모르겠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내 처가 부채를 들고 영어 수업을 하다가 부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네. 그래서 어려워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조용히 나와 부채를 주워다가 내 처에게 주었다네. 내 처는 그것을 두고두고 고마워했지. 그리고 그 태도, 그 인품을 보면 장래에 큰 일을 할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지. 그 학생이 바로 자네라네.”
그 대학의 교수였던 니토베 박사의 부인에게 부채를 주워 준 것 때문에 공부도 잘못하던 사람이 교수가 된 것입니다.
사람의 실력이 참 중합니다. 우리는 실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잠자는 시간과 운동하는 시간 외에는 계속 공부를 합니다. 5분도 그냥 있지 않고 고3처럼 공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쟁쟁하고 모든 여건을 다 갖추고 배경이 좋아도 삶의 태도와 인품이 좋지 않은 사람은 실패합니다. 그러나 실력이 부족하고 배경이나 여건이 좋지 않아도 삶의 자세와 태도가 귀하고 인품이 향기로운 사람은 어디에서나 사랑을 받고 길이 열리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내가 비록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해도 삶의 태도가 귀하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한 청년은 큰 신문사 사장 집의 머슴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얼마나 신실하고 착실했던지 사장이 그런 그를 공부시켜 자기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 청년이 지금 유명한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남의 집 품팔이를 하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가난하지만 마음이 착하고 진실하여 남의 밭이라도 아무렇게나 갈지 않고 자기 밭처럼 깊이깊이 쟁기질을 했습니다. 그러다 서그럭 거리는 소리가 나서 땅을 파보니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항아리 뚜껑을 여니 보석이 가득했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어느 부자가 묻어 놓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발이 닿지 않는 산기슭의 밭에 묻어 놓고 피난 갔다 와서 캐내 가려고 했는데 전쟁에서 그만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없는 보화입니다.
그러나 그 농부는 착하고 정직해서 그것을 몰래 훔쳐 가지 않았습니다.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돈을 많이 주고 그 밭을 샀습니다. 그 후에 보화를 팔아 큰 집을 짓고 수많은 땅을 사고 많은 종을 거느렸습니다.
품팔이를 하지만 신실하면 그런 일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농부는 우리를, 밭은 세상을, 보화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질그릇 같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우리는 밭의 보화를 발견한 사람보다 억만 배 더 큰 복을 받았습니다. 밭의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이 세상의 복, 땅의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우리는 땅의 복도 받고 하늘의 복도 받았습니다. 현세의 복도 받았고 내세의 복도 받았습니다. 현세의 복, 미래의 복, 땅의 복, 하늘의 복을 다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만 생각하면 기쁩니다.
제 딸이 아이를 낳아서 한창 청춘인 제가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가만히 있다가도 손자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손자를 보지 못한 분들은 이해를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손자가 얼마나 좋은지 손자 생각만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손자는 변합니다. 다 자라도 그 귀여움이 계속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영원히 우리의 기쁨이 되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부족합니다.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는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질그릇입니다. 흙덩어리입니다. 아무리 잘나도, 아무리 으스대도, 박사 학위를 일곱 개 가지고 있어도 흙덩어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제가 들고 있는 이 지폐는 종이입니다. 그런데 종이에 마크가 있습니다. 같은 종이인데 마크에 따라 이것은 천 원짜리이고, 이것은 만 원짜리로 구별됩니다. 그러나 한두 살 먹은 아이에게는 천 원짜리와 만 원짜리가 다 같은 종이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한두 살 먹은 아이는 천 원짜리와 만 원짜리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철이 든 사람에게는 천 원과 만 원은 다릅니다.
영안이 어두운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나 우리나 같은 줄 압니다. 자기들도 사람이고 우리도 사람이니 다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질그릇, 흙일뿐이고 우리 안에는 예수님께서 계시니 그 가치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짜리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통째로 주셨습니다.
한 성형외과 의사에게 모녀가 찾아와서 한참 앉아 있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선생님, 제 딸이 곧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딸이 어릴 때 손이 부서져 몇 차례 수술을 했습니다. 다른 손가락은 괜찮은데 반지를 낄 약지가 없습니다. 결혼하면 반지를 껴야 되는데 반지를 낄 손가락이 없습니다. 선생님, 제 손가락을 잘라서 제 딸의 손가락을 만들어 주세요.”
의사 선생님이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사랑에 감동을 받고 결국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그 딸은 자기 손가락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리며 '엄마, 엄마!’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째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서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할렐루야!
깨끗하지도 못하고 거룩하지도 못하고, 때때로 주님을 근심시키고, 정말 주님께서 견디기 힘들어하시는 일도 하는 우리 안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 주위에 답답한 일이 아무리 많아도 예수님을 생각하면 기쁘고 즐거워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절에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Finally, my brothers, rejoice in the Lord!)』라고 말씀하십니다.
‘rejoice in the Lord!’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기뻐할 이유가 하나 없어도, 사업이 잘 안되고 회사가 재미 없어도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뻐함으로 세상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입원을 했는데 고통이 심해서 정기적으로 진통제를 맞았습니다. 제 시간에 진통제를 맞지 않으면 1분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고통이 심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는데 문 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침 진통이 시작되려 하는 때라 목사님은 간호사가 진통제를 놓으러 왔을 것이라 짐작하고 읽고 있던 책을 계속 보며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어서 오시오.”라고 했습니다. 이제 간호사가 엉덩이를 탁 치고 주사를 놓은 후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간호사가 주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계속 책을 보며 “어허, 왜 그리 늑장을 부리시오. 어서 주사를 놓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주사를 놓지 않아서 돌아보니, 세상에! 여 집사님 한 분이 서 있었습니다. 목사님 교회의 여 집사님이 병문안을 왔다가 엉덩이를 내놓고 있는 목사님을 보고 어쩔 줄을 몰라 서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 어렵게 인사를 한 후 집사님이 쑥스러워 도망치듯 병실을 나갔습니다. 여 집사님이 나간 후 목사님이 생각하니 정말 기가 막힙니다.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목사님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데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웃음소리가 병실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베개로 입을 막고 막 웃었습니다. 한참 웃다가 다시 책을 읽었는데, 책을 읽다가도 그 일이 생각나 자꾸 웃다 보니 세 시간을 웃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세 시간 동안 통증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진통제를 맞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웃음이 그렇게 좋은 것인가 봅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웃으신 것은 기뻐서가 아닙니다. 기가 막혀서 웃으신 것입니다. 그런 웃음도 그렇게 좋다면, 하물며 항상 웃을 이유가 있는 우리의 웃음, 우리의 기쁨이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 능력이 발산되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어제 우리 교회의 어느 집사님이 보내주신 편지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저희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가정보다 더 행복한 가정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시작된 편지에 이런 저런 내용이 조목조목 적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3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사님의 딸이 해산할 때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더랍니다. 그것을 보고 집사님이 마음이 아파 “하나님, 제 딸의 고통을 줄여 주세요.”라고 기도했더니 딸이 두 시간만에 아기를 낳았답니다. 집사님의 부인이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도 두려워서 “하나님, 제 아내가 수술을 받을 때 두려워하지 않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했더니, 부인이 담대하고 편안하게 수술실에 들어가서 수술을 받았답니다. 세 번째는 며느리가 임신했을 때의 일입니다. 며느리가 임신하여 아주 기뻐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태중의 아기를 검진하고는 아기 머리에 혹이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 혹이 혹시 종양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암에 걸린 상태로 태어나는 아기들도 제법 많답니다. 그러니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습니까? 온 가족이 “하나님 아버지, 아기의 혹을 없애 주세요. 아기가 정상으로 태어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했답니다. 며느리가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의 머리에 혹이 없더랍니다.
너무 감사하여 집사님이 제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신비로우신, 크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할렐루야!
마산에 사시는 한 분은 몸이 너무 아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청소나 설거지 같은 집안의 작은 일도 못하는 것은 물론 먹지도 못하여 친정에 와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교회 집사님의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겨우 우리 교회에 나왔는데, 그때 그분의 아버지께서 “너 나가면 죽는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라고 하셨답니다.
그런데 그날 예배 시간에 가슴이 뜨거워지더니 온 몸이 개운해지더랍니다. 그래서 그분이 흥분했답니다.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온 세상이 새롭더랍니다. 하늘도 새 하늘이고 나무도 새로워 보이고 꽃들도 자기를 반기는 것만 같더랍니다. 얼마나 기쁜지 그냥 걷지 못하고 가방을 빙빙 돌리면서 깡충깡충 뛰었답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딸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아버지께서 딸의 생기찬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셨답니다. 그날 집에 들어가서 밥을 한 그릇 비벼 먹고 설거지하고 청소도 했답니다. 예배 시간에 능력이 발산하여 그분의 병이 깨끗하게 나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예수 권세 크도다 예수 권세 세도다」할렐루야!
우리 안에 우리 주님께서 계십니다. 이것은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편안하고 우리 앞길이 형통하고 좋지만,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본문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는 말씀이 있는데, 우겨쌈은 환난으로 싸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사방으로 환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싸이지 아니한다고 바울이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할렐루야!
우겨 싸여서 길이 없는데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다(I am the way).”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가는 길일 뿐만 아니라 영원히 우리 삶의 길이 되십니다. 우리의 길이 막힐 때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십니다. 홍해도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어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참 소망인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변함 없는 희망입니다. 변함 없는 소망입니다. 우리가 자식에게 소망을 걸었는데 그 자식이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남편에게 소망을 걸었는데 남편이 병으로 먼저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고, 회사에 소망을 걸었는데 회사가 부도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변함 없이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핍박을 받아도 버림 받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핍박은 오다가다 욕을 듣는 그런 것이 아니고, 추격을 받으며 당하는 공격을 말합니다. 누군가가, 그 무엇이 나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나를 추격하며 괴롭히고 공격해 보십시오. 사울 왕이 삼천 명의 특공대를 거느리고 다윗을 따라다니며 죽이려 했습니다. 다윗이 그런 핍박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나아갈 때 그런 핍박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버린 바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시면 버림받지 않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버리고 나라가 다윗을 버리고 모든 사람이 다윗을 버려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리지 않으시니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친구가, 직장이 나를 버려도, 형제와 가족마저 나를 버려도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시면 나는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친구들은 나를 버려도 나를 버리지 않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나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혹 죄를 지어서 낙심에 처해도 예수님께서는 더럽다며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악에 뒹굴어서 너무 부끄러운 일을 해도 우리를 차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씻어 주십니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 앞에 늘 부끄러웠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교회의 지도자로, 굉장한 인물로 알고 있지만 자기가 아는 자기는 늘 부끄러운 죄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아는 그와 자신이 아는 그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늘 괴로워하던 그가 하루는 밤이 늦도록 “하나님, 나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희망이 없는 죄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며 괴로워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잠이 들자마자 꿈을 꾸었습니다. 한 천사가 나타나서 흑판에 ‘마틴 루터의 죄’라고 제목을 적어 놓고 그 밑에 죄목을 적는데, 얼굴도 들지 못할 부끄러운 죄를 다 적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나는 망할 거야. 나는 영원히 죽을 거야. 죄값으로 영원히 죽을 거야.’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데, 피를 뚝뚝뚝 흘리는 못 박힌 손이 나타나서 흑판에 요한일서 1장 7절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리고 그 피가 흑판을 덮으니 모든 죄목이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때 잠에서 깨어난 그는 “내 죄가 흉악해도 주님께서 나의 죄를 다 사해 주셨구나!”하며 뛸 듯이 기뻐하며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면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 속에 빠져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씻어주십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우리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것은 죽을 지경까지 내몰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밀친 다음 돌로 때려 거꾸러뜨립니다. 그리고 바울이 죽은 줄 알고 끌어다가 성문 밖에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넘어져도, 녹다운(knockdown)되어도 KO는 안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권투 경기를 보면, 몇 번 넘어진 자가 일어나서 오히려 KO승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일곱 번 넘어져도 주님께서 여덟 번 일으켜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 안에 능력의 주님께서 계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설혹 우리가 부서져도 괜찮은 것은 우리가 부서져 죽게 되고 순교를 해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7장에 보면, 기드온의 특공대 300명이 오른손에는 나팔을, 왼손에는 항아리를 들었는데 항아리 안에는 횃불이 있습니다. 항아리가 깨지니 횃불이 밝게 빛을 발해 세상을 비춥니다. 그러니 밤에 적들이 놀라 자기들끼리 서로 죽여 기드온이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우리 질그릇이 깨지면 오히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천사의 얼굴로 죽습니다. 그것을 보고 바울이 깨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다가 혹 핍박을 받아 끝나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어도 감사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고 있으니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즘 날씨가 무척 덥습니다. 이렇게 더운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집은 꼭대기 층이라 정말 얼마나 더운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렇게 더운 것을 싫어하고 시원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덥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더운 것이 오히려 축복인 것입니다. 요즘 경기가 좋지 않으니 사람들이 돈이 있어도 돈을 쓰지 않아 경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었는데 하도 더우니 냉장고, 선풍기, 음료수,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이 잘 팔리는 것입니다. 이런 더위가 두 달 더 계속되면 그런 회사들이 돈을 많이 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복 주시려고 특별히 더위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름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시원하면 여름 장사는 다 망하는 것입니다. 또 겨울에는 겨울 날씨답게 추워야 그것이 축복입니다. 우리의 욕심대로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희망대로, 우리가 구하는 대로 되는 것도 축복이지만 엉뚱하게 되는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계시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가 신촌 끝에 있는 땅 150평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때 그 땅을 받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또 양곡초등학교 앞의 땅 200평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땅을 받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그 땅들을 달라고 그렇게 매달려 기도해도 하나님께서는 주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그때 그것을 받았으면 우리 교회가 동네에 파묻혀서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그것을 주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때가 되니 이 넓은 땅을 주셨습니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큰 길이 있는 이 땅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만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행하십니다.
인생은 간단합니다. 그 해답이 내 안에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예수님이신데, 해답 되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설레는 꿈은 세상 끝인 서바나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로마의 감옥으로 보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죄수가 되어 감옥에서 몇 년간 살았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원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빌립보서 1장 12절에 바울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로마의 시위대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시위대는 황제의 친위대로 인원이 9,000명입니다. 그들이 왕실에 있는 죄수들을 윤번제로 돌아가며 지키니,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는 몇 년 동안 신분이 좋은, 귀족의 아들들인 그 9,000명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 복음이 들어가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서바나에 갔었다면 그런 큰 일을 할 수 없었을 텐데, 하나님께서 바울을 로마에 가게 하셔서 그곳에서 큰 일을 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것이고 내가 원하지 않는 길로 되어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 합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된다.”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일이 선이 된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의 모든 일이 선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역사의 주인, 역사의 지배자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땅의 주인,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시편 18편 29절을 읽다가 또 힘을 얻었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이 말씀은, 내 앞에 적들이 있을 때 내 정신으로는 나가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의뢰하면 하나님께서 내 방패가 되시니 적들이 아무리 내게 화살을 퍼부어도 적군 속을 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담을 뛰어 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면 뛰어 넘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담은 장애물입니다. 우리 앞에 장애물이 있어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 장애물을 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겁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마귀가 겁납니까? 세상이 겁납니까? 그 무엇이 겁납니까?
따라 합시다.
“덤빌 테면 덤벼라.”
언젠가 서울에서 술 취한 한 아저씨를 보았는데, 그 아저씨가 거리에서 “덤빌 테면 덤벼!”라고 소리쳤습니다. 제가 덤벼도 그 아저씨를 이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술에 취하니 그렇게 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에 취한 사람이 “덤빌 테면 덤벼!”라고 하면 아무도 덤비지 못합니다. 환난도, 핍박도, 답답함도, 우리를 거꾸러뜨리려는 것도 우리는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덤빌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기고 영원히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실재하십니다. 어디든지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승리의 깃발을 흔드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