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생활용품을 통해 본 색채미학
김성종
남아있는 유물을 살펴봄으로써 이미 사라져버린 시대의 살림살이와 그들의 미의식과 물건에 얽힌 땀과 웃음, 눈물, 한숨까지를 짐작해보는 것은 그 실체는 사라져버리고 땅 위에 남긴 족적을 좇아 길을 따라가며 살피는 것처럼 흥미로운 일이다. 그 방법은 유물의 쓰임새며 쓰던 계급적 특징, 유물의 조형적 검토, 소재의 채취와 제작, 또는 유통경로, 시대적 변화, 문화적 파급효과와 전파경로를 따라 흐름을 추적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테지만 여기서는 조선시대 생활용품에 쓰인 색채의 특징을 통한 그 시대의 미의식과 정서를 유추해보고자 한다.
색이란 무엇인가? 각각의 색이 어떻게 생기며 무엇을 상징하고 또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느낌을 이끌어내는지 살펴보자. 모든 색은 빛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빛은 여러 가지 파장으로 이뤄져있는데 비온 뒤 뜨는 무지개에서 보듯이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색으로 나름의 파장을 가진 조합이다. 무지개는 비온 뒤 늘어난 공기 중의 물 입자가 분광작용을 일으켜 빛의 스펙트럼을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 보여주는 것이다. 이 색 파장들 중 빨강색 파장이 가장 길며 보라색으로 갈수록 파장은 짧아진다. 태양빛은 우주선, 감마선, 엑스선, 자외선, 가시광선, 적외선, 초단파, 단파, 중파, 장파로 이뤄져있으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은 가시광선이라는 아주 짧은 한 토막뿐이다. 만약 우리가 가시광선 이외의 더 많은 파장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은 더 색다르고 다채로웠을 것이다. 빛이 물체에 닿을 때 어떤 파장은 물체에 흡수되고 어떤 파장은 반사되는데 우리가 보게 되는 색이란 흡수되어버린 파장은 느끼지 못하고 물체가 반사시키는 파장만을 지각하게 되는 것이다.
색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우주를 이루고 유지하는 궁극적인 요소와 기운을 살펴 연구하고 그 이론을 삶과 죽음은 물론 정치에까지 대입해 썼는데 음양오행론도 그중 하나다. 우리가 흔히 듣게 되는 오방색이라는 말은 이 음양오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음과 양은 다시 잘게 나뉘어 겉은 양이되 속은 음인 ‘외양 내음’, 겉은 음이되 속은 양인 ‘외음 내양’, 양이 변하여 음이 되는 ‘양변음’, 음이 변하여 양이 되는 ‘음변양’,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이 생긴다는 ‘양극도달즉음시생’,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생긴다는 ‘음극도달즉양시생’ 등으로 점차 나뉘고 쪼개져 수많은 괘를 이루는데 색도 그와 같이 보았다. 오행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로 계절, 방위, 천간, 지지, 오색五色, 숫자, 오상五像, 오기五氣, 오성五性, 오곡五穀, 오미五味, 오장五臟 등으로 각각 구분되었는데 그 중 오색을 보면 목木은 청靑(동東, 봄, 신맛, 인仁) 화火는 적赤(남南, 여름, 쓴맛, 예禮), 토土는 황黃(중앙中央, 사계절, 단맛, 신信), 금金은 백白(서西, 가을, 매운맛, 의義), 수水는 흑黑(북北, 겨울, 짠맛, 지智)으로 보았다.
이 중 백색과 흑색은 무채색이고 청색, 적색, 황색은 모든 색의 기본이 되는 삼원색이다. 삼원색은 다른 어느 색으로도 만들 수 없는 고유한 색이며 이 삼원색을 섞으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무한히 만들어낼 수 있는 기본요소이다. 오행에서 비롯된 오색 등은 나름의 기운이 있고 오방, 계절, 성정, 맛, 곡식 등으로 서로 연결고리를 가지며 제각각 특징과 쓰임, 나타나는 현상이 다르므로 색을 쓰는 데 있어서도 그 성질을 구분했다. 음양오행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각각의 기운이 맡은 역할이 따로 있으되 어느 것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혹은 옳다거나 그르다고 나누어 취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기운이 모여 어느 한 극단으로 치닫지 않으면서 섞이고 어우러져 균형을 이루거나 꼭 알맞게 자리하여 스스로를 지키면서 동시에 서로 모자란 부분을 채우거나 더욱 돋보이는 것을 제일로 쳤다. 이른바 상생이다. 음양오행을 보면 예부터 색 본연의 성질과 색이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고유한 색이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 또 한 가지 이상의 색이 만나 서로 상생과 상극, 중화, 설기의 과정을 거쳐 어떤 결과에 이르는지를 살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오늘날 드물지 않게 이루어지는 색채심리나 색채치료 또는 미술치료와 서로 통하는 바가 많다.
빛을 받은 물체의 광선 흡수 또는 반사로 인해 보이게 되는 색이 인체에 미치는 물리적 영향은 아직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지만 심리적인 영향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졌으며 근래에는 색을 이용한 심리학적 치료와 함께 집이나 사무실, 학교, 병원, 공원 등의 일상생활과 주변 환경에서 색을 이용한 성격적 보완 또는 교정의 한 방식으로까지 쓰인다. 색을 만드는 빛이 동식물에게 미치는 영향 중 식물의 성장에 간섭하는 것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태양의 복사선 중 식물의 광합성에 쓸모 있는 빛은 가시광선이며 그 중 빛의 파장에 따라 생장에 다른 영향을 주는데 파장이 긴 적색광선이 쓸모 있으며 파장이 짧은 보라색광선이나 자외선은 오히려 성장을 억누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색이 그 고유한 파장과 상징과 심리적인 영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색은 완벽한 독립 공간-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색을 보는 관찰자가 그 색 속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지만 그곳-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 한 고유의 성질을 지킬 수 없다. 어떤 한 가지 색이 어디에 어떻게 놓이는가에 따라 사뭇 다른 성질로 변하기 때문이다. 또한 제 본디 색이 무엇인가 보다는 그 색이 어떤 둘레에 어떻게 자리하느냐에 따라 어떻게 달라져 보이는가가 중요하게 된다. 또한 어떤 자리에 놓이느냐와 더불어 고유의 색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 색-특정 빛 파장을 반사시키는 물체-에 어느 정도의 강도를 지닌 빛이 쪼이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밝은 빛을 비추면 원색의 빨강으로 보이는 색채도 빛의 세기를 줄여나감에 따라 어두운 암적색을 띠다가 빛이 사라지고 나면 검정색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살이 따끔거릴 정도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가 약간 따뜻한 물로 옮길 경우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반대로 차가운 물에 있다가 따뜻한 물로 옮길 경우 그 강도를 더해 뜨겁게 느껴지는 것과 같이 어느 한 색 옆에 어떤 색이 맞닿아 놓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변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변한다는 말은 고유색을 띤 물체의 성질이 변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특정 파장을 반사하는 양이 달라지거나 반사 양이 같더라도 다른 파장에 의해 색 인식이 간섭받는 것이다.
어느 두 가지 색이 옆에 자리하면서 생기는 변화 중 색상환에서 마주보고 있는 두 가지 색을 맞댄 보색대비는 서로의 색을 방해하지 않고 가장 순수하며 생기 있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그것은 양극단인 보색 간의 관계에서 모든 색 파장의 자극을 균형 있게 느낄 수 있도록 하여 서로의 색상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맞댄 색의 채도를 더욱 높여주기 때문이다. 보색대비는 동시에 명도대비 현상도 따라오게 되는데 예를 들면 보색인 노랑과 보라는 색 자체가 지닌 명도 차이가 커 명도대비도 이룬다. 또 색상환에서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한난대비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보색대비는 순색에서만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채도가 낮은 중성에 가까운 색에서도 그 효과가 잘 나타나게 되고, 따라서 채도가 낮은 색들을 주로 사용할 때 탁한 색 가운데서도 생기를 불러일으키기는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보색대비를 쓰는 것이 흐리고 답답하고 우중충한 느낌을 줄여 살아 움직이는 리듬을 만들기에 적절하다.
옛 공예품의 여러 색 쓰임
색은 밝은 색과 어두운 색(명도), 맑은 색과 탁한 색(채도),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한난)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옛 생활용품의 색채 특징을 보면 재료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여성용품과 각종 예식용 물품이나 안방의 생활용품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칠보와 자수와 화각(사진)에서는 생동과 생명력이 한껏 뿜어져 나오는 명도대비와 채도대비, 보색대비가 강한 원색이 쓰였는가 하면, 도자기 베갯모(사진)와 양념그릇 등의 자기에서는 고상하고 맑으며 소박하고 차분한 흰색과 청색계열이 주를 이뤘고, 사랑방용품 및 장롱, 궤, 함, 표주박(사진) 등에서 주로 보이는 나무제품에서는 진중하고 점잖고 묵직한 어두운 갈색계열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러 생활용품의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색채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공통점은 여러 색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는 데에 있다.
옛 여인들의 색
칠보는 뒤꽂이, 비녀, 노리개, 합, 족두리 장식등에 쓰였다. 이들은 다 여성용품들로 무척 맑은 채도와 밝은 명도를 가진 색 조합으로 이루어졌으며 간혹 금에 올린 칠보도 있으나 주로 은 위에 올렸다. 은은 금이나 황동 같은 다른 금속에 비해 색이 서늘하고 차가우며 제 스스로 뛰쳐나가며 두드러지기보다는 얌전하게 자리를 지키며 다른 색의 말을 다소곳이 들어주고 부드럽게 품는 성질의 온건한 회색계열이다. 그러므로 칠보가 아무리 은 위로 요란하게 올라가더라도 칠보 물품을 전체적으로 보자면 시끄럽거나 현란하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며 오히려 칠보의 화려함이 지나쳐도 경박하게 보이지 않도록 다잡이 역할을 해준다. 그리하여 칠보의 화려하고 역동적인 색채들은 마음 놓고 은 위에서 한껏 제 강렬한 몸짓을 부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화려함과 소박함, 역동과 고요, 뛰쳐나가는 힘과 붙들어 매는 인력, 뻗어나가는 가지와 버티는 뿌리 같은 균형과 조화의 미의식이 엿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의 칠보를 보자면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같은 칠보라도 어떤 것은 명도와 채도가 높은 난색계열의 원색을 쓰고 또 어떤 것은 약간 누그러뜨려진 한색계열의 원색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사진) 같은 귀이개인데도 위의 귀이개가 더욱 도드라지는 색을 썼고 아래의 귀이개는 화려함 속의 점잔을 차린다. 두 귀이개의 차이점은 명도와 채도가 높은 색을 쓴 귀이개가 한눈에 봐도 기법에서나 전체적인 조형미, 기술적으로 떨어지는 솜씨고 그에 비해 아래의 귀이개는 기술적인 면에서나 색상 배치와 조형적인 면에서 더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데 이는 필시 사대부나 반가의 아녀자가 쓴 물건일 것이다. 난색의 성질은 명랑하고 가벼우며 앞으로 튀어나오는데 한색은 차분하고 새침하며 뒤로 물러선다. 난색계열의 순색을 쓴 귀이개와 원색에서 한색계열로 차분하게 살짝 가라앉힌 칠보를 얹은 귀이개에서 느껴지는 차이점을 보면 순색 그대로 쓴 귀이개가 상대적으로 더욱 노골적이고 적나라하며 화려함 자체에 한껏 들떠있어 요란하고 가볍게 느껴지는 반면 한색계열로 채도를 살짝 가라앉힌 귀이개는 전체적으로 원색을 써서 화려함을 유지하면서도 일견 맑고 순정하며 청초한 기품을 느끼게 된다. 이 또한 화려함을 즐기되 지나치지는 않으려는 조화와 절제의 색채 미의식이다.
또한 칠보비녀와 칠보뒤꽂이, 칠보귀이개는 그 자체만으로도 조형이나 배색에서 충분한 아름다움을 갖추었지만 무엇보다 그 물건들이 자리하는 곳은 동백기름을 발라 곱게 빗어 땋고 쪽진 낭자머리임을 되새겨야 한다. 그 물건을 만든 장인도 낭자머리에 자리할 것을 상상하며 만들었을 테고 물건을 주문하거나 삯돈을 치르고 사던 이도 그랬을 테니 시대를 건너뛰어 우리 앞에 놓인 물건을 볼 때도 당연히 낭자에 꽂힌 모습을 상상하며 봐야 한다. 단순히 칠보 공예품만을 볼 때와 머릿기름을 발라 반지르르하니 윤기 흐르고 동그스름한 검은 머리 끝 쪽진 낭자에 꽂힌 모습의 차이는 무척 크다. 머리통의 큰 둘레며 너비와 칠보용품의 작고 오종종한 면적대비, 새까맣고 반지라운 머리의 바탕에 견주어 높은 명도와 채도의 칠보가 자리함으로써 마치 칠보는 밤하늘에서 깜박거리는 별처럼 더욱 빛을 발하고 머릿결은 더욱 검고 곱고 깊이 있게 보이는 상호 대조와 조화의 기운을 주고받는 것이다.
자수용품은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 면을 채워나가며 지극한 정성을 들여 만드는 것이다. 여느 생활용품과 달리 이상하리만치 원색의 조밀한 배치를 통한 화려함으로는 따를 물건이 없을 정도로 명도와 채도가 높은 색을 좁은 면에 빼곡하게 썼다. 화면구성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미술품에서 흔히 통용되던 넓은 여백으로 인한 편안한 느낌과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으로 채울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데 비해 헐거운 구성은 배제되고 화면을 가득 채워 마치 단청에서와 같은 색 배치로 색끼리 서로 맑고 밝은 다채로움을 강조하며 조형적인 면에서도 독특한 화면연출을 보여준다. 자수는 관복의 흉배에서처럼 오색실과 금사, 은사로 권위와 지위를 자랑하듯 드러내는 데 이용되기도 했으나 생활용품에서는 주로 여성용품과 안방치레에 쓰였다. 자수는 소재 자체가 귀하고 공급이 쉽지 않은 진주, 산호, 옥, 비취, 세공제품과는 달리 접근하기 쉬운 소재고 무엇보다 직접 수를 놓는 노동력만 있으면 누구라도 쉬 배워 자수 본을 이용해 만들어낼 수 있었으므로 서민들이 틈틈이 짬을 내 즐기기에 알맞아 신분이나 살림살이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며 그 화려함을 즐겼다.
자수에서 보이는 색은 채도가 높고 따뜻한 계열의 색을 한껏 써서 술과 음식이 넘치는 흥겨운 잔치를 보는 듯하다. 자수를 쓴 생활용품의 종류로는 베갯모, 굴레, 방석, 댕기, 주머니, 보자기, 인두판, 버선, 골무, 버선본 주머니, 바늘쌈, 수저집 등이 있으며, 자수로 표현한 것으로는 봉황, 원앙, 학, 사슴 등의 동물과 소나무, 모란, 매화,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난초, 국화, 연꽃, 장미, 철쭉 등의 식물과 수壽, 복福, 부富, 귀貴 등의 글씨를 쓰기도 했는데 그 뜻은 건강하고 오래도록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바람을 담았고, 수놓은 물건이 여러 가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색의 쓰임은 한결같이 화려하여 잇몸을 다 드러내고 웃는 듯 명랑하다.
자수에서는 순색의 빨강과 함께 초록, 연두, 노랑, 군청, 보라색을 함께 놓아 명도대비, 채도대비, 한난대비가 더욱 활발하게 쓰여 각각의 색이 더욱 빛나 보이도록 배치되었고 전체배색에서도 빨강색이 특히 도드라지게 주를 이루며 그 빨강색이 명도와 채도가 높은 원색이거나 주금색이어서 따뜻하고 보는 이의 기분을 즐거이 충동질하고 한껏 떨쳐 일어나게 하는 색이다. 빨강색은 칠해진 바탕에서 더 튀어나오는 색으로 실제 배치된 면보다 더 넓어 보이면서도 안으로 끓어오르며 연상할 수 있는 사물과 감성은 살아서 퍼덕이는 피와 생명력 또는 태양과 불, 사랑의 결합, 기쁨과 적극적인 의지와 욕망을 되새겨 굳히게 돕거나 자극하며 순색일 경우에 그 영향이 더욱 커지는데 자수에서 특히 많이 쓰인 이유는 그 기운을 이용해 삶을 더욱 즐겁고 활기차게 하고 싶은 뜻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자수의 생명력 넘치는 조형과 배색이 베갯모에 많이 쓰였는데 그 베개를 베고 누웠다면 낮에 있던 근심걱정을 조금이라도 잊고 편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도록 이끌었을 것이며 한결 누그러진 마음은 부부의 잠자리로 이어져 많은 자녀를 두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시대에 색채에 대한 이론이 미처 정리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배색에 의한 심리적 작용을 모르고서야 어찌 이렇게 쓸 수 있었겠는가 하는 마음이 든다.
머리모양과 칠보에서처럼 베갯모에서도 배색과 조형의 균형이라는 면에서 눈여겨볼만한 점이 있다. 베갯모는 자수를 놓은 것이 가장 많지만 그 외에도 목각, 상아, 화각, 자개 등 여러 재료를 이용해 만들기도 했는데 크기도 아담하고 그 쓰임도 침구라 남다른 맛이 있어 아껴 수집하는 이들이 제법 있다. 그러나 베갯모를 볼 때 흔히 베개 양끝에 마주 대는 화려한 꾸밈새에만 눈길을 주는 감이 있는데 그 화려하고 현란한 색채로 생명력이 퍼덕이는 베갯모 양끝의 조형을 이어주는 베갯잇의 크고 빈 공간을 함께 본다면 더 확장된 조형미와 옛사람들의 미의식을 발견할 것이고 베갯잇과 베갯모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 베개와 이불의 조형, 화려한 이불보와 텅 빈 담요의 배색, 침구와 안방의 구조로까지 시각을 넓히면 또 다른 조형미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사랑방용품과 나무
흔히 나무에는 벌레가 파고들어가 갉아먹는 것을 막고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도록 옻칠을 했는데 옅게 칠해 붉은 밤색으로 중후하면서도 화사한 색을 내기도 했고 여러 번 칠해 고동색을 내 깊고 차분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옻칠로 짙은 고동색을 내 자칫 무겁고 칙칙해 보일 수 있는 사랑방용품과 안방용품 가구는 자물쇠 앞바탕이나 광두정, 경첩, 거멀쇠 등의 쇠붙이 장석을 달아서 쓰임에도 마땅하고 세월에 따라 물품이 망가지는 것을 보호하면서 계절에 따른 습도나 온도의 차이로 나무가 뒤틀리거나 쪼개지지 않고 애초 만든 모양대로 붙잡아매는 노릇도 하며, 나무와 쇠를 포개놓음으로써 쓸모는 물론 조형과 배색에서도 조화를 이루려는 뜻이 또렷하다. 안방에서 쓰는 장롱과 궤에서는 장석으로 주석과 백통을 많이 썼는데 주석은 황동처럼 금색이 나 바탕이 되는 나무의 색과 어울려 더욱 따뜻하고 화려하며 백통은 무쇠나 주석보다는 시대적으로 후기에 보이는데 은색이 나 나무 바탕색을 더욱 짙고 깊게 보이도록 해 전체적으로는 화려하면서도 맑고 차분한 분위기를 낸다.
남성들이 쓰던 사랑방용품의 소재는 대개 나무를 썼다. 덧붙인 재료로는 옻칠한 나무 위에 조개껍질을 갈고 쪼개 상감으로 붙인 나전칠기, 거북이 등껍질을 갈아 붙여 무늬를 낸 대모, 물소 뿔을 불려 펴서 붙이고 그 위에 석채안료로 그림을 그린 화각, 또는 지통과 필통 등의 소품에 대나무를 이용하기도 했으나 화려한 그림이 들어가는 화각이 안방용품장롱에 더 들어가는 데 비해 사랑방용품에서는 소품에서 약간 쓰일 뿐 그 중 가장 흔하게 쓰인 재료는 역시 나무고 화려한 치장을 삼갔다. 나무는 금은을 포함한 쇠붙이, 도기, 자기, 돌이나 보석과는 달리 그 기운이 무르고 부드럽고 푸근하며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기분이 들게 하며 느티나무, 참죽나무, 오동나무, 돌배나무, 소나무, 먹감나무 등 수종에 따라 여러 가지 다채로운 나이테 결과 색채를 보여 그 자체로도 충분한 조형미를 즐길 수 있는 훌륭한 재료다. 또 나무는 소재를 구하기 쉽고 다듬어 쓰기도 어렵지 않아 널리 이용되었다. 나무가 천연으로 갖는 아름다움은 자른 면을 곱게 다듬어 짜고 그대로 두어도 충분하지만 아름답게 꾸미거나 재질 보호를 위해 옻칠을 하거나 콩기름, 동백기름 등의 식물성 기름을 바르거나 불에 그슬려 갈아내는 낙동법을 쓰기도 했다. 낙동은 나무를 불에 그슬린 다음 갈아내거나 인두로 지진 후 문대서 나이테가 있는 단단한 부분은 검은 색을 띤 그대로 남고 나이테와 나이테 사이 부드러운 부분은 쉬 갈려 옅어지는 기법인데 이렇게 하면 나무가 갖는 나이테 무늬가 한층 강조되며 나무 면이 나이테에 따라 올록볼록해져 입체적으로 돋보이고 색이 짙게 검어지는 손질법이다.
사랑방용품에는 책장, 의걸이장, 경상, 벼루함, 붓걸이, 담뱃대걸이, 망건통, 탕건통 등이 있는데 그 주인인 남성의 성정에 맞추어 화려함과 치장은 밀쳐놓고 기개와 검소함이 강조되어 장롱, 앞닫이, 반닫이의 경우에도 여성용품과는 차이를 보인다. 안방에서 쓰는 궤와 장롱은 물소 뿔을 불려 펴고 석채안료로 그림을 그린 화각, 화각의 재료가 구하기 어려운 데다 제작이 힘들고 온도와 습도에 빠르게 반응하여 망가지기 쉬었으므로 그 대용으로 유리 뒷면에 그림을 그린 후 색지를 발라 쓴 화초를 곁들인 그림 등으로 장식을 쓴 데 반해 사랑방에서 쓰인 궤와 장롱에는 드물게 자개를 상감해 넣은 나전칠기장롱이 보이기는 하나 멋을 부린 경우라고 해야 앞면에 글씨를 새겨 넣거나 단순한 문양을 넣거나 그림을 새겼는데 그조차도 안방장롱에 견주면 인색하다 싶을 만큼 아껴 넣고 그림의 경우에도 여백을 크게 두어 요란해보이지 않도록 했으며 겉면만 올록볼록하게 파 입체감만 있을 뿐 색을 넣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자물쇠 앞바탕, 광두정, 들쇠, 경첩, 거멀쇠, 여러 귀장식 등의 쇠붙이 장식에서도 안방용품에서는 주석이나 백통을 써서 더욱 화려하게 만들었으나 사랑방용품에서는 주석과 무쇠를 써 배색에서 진중함이 풍기도록 했고 자칫 요란해보일 수 있는 많은 장석 수를 줄여 경첩과 자물쇠만으로 마무리해 차분하고 검소하게 만든 예가 많다.(사진) 이런 장을 보면 깡마르고 꼿꼿한 선비의 기개를 보는 것 같다.
맞섬과 어우러짐
옛 생활용품의 색 쓰임은 살펴본 것처럼 재료에 따라 사뭇 다르다. 자수와 칠보, 화각, 화초는 원색적이고 피 끓는 젊은이 같고 장롱, 궤, 책장, 경상 등의 나무로 만든 사랑방 물건들은 점잖고 말수 적은 선비 같으며 안방의 장롱과 궤는 곱고 맵시 있는 여인네를 그대로 닮았으며 도자기는 맑고 새침한 새색시 같다. 어찌 보면 저마다 다른 모습이어서 일관성 없는 색 쓰임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지켜보면 어느 것이든 그 물건의 쓸모, 물건이 놓이는 자리와 둘레, 물건을 쓰는 이에 꼭 알맞은 색을 골라 썼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물건을 만들어낸 장인과 그 시대 사람들의 미의식이 여러 가지 작은 요소가 모여 더 큰 하나를 이루는 조형미와 색 배치의 원리를 꿰뚫고 있었기에 이처럼 적절하게 썼음을 알 수 있다. 베갯잇과 베갯모, 머리모양과 칠보비녀, 옻칠바탕과 장석 또는 자재, 장롱과 화각의 관계는 넓은 면과 좁은 면, 텅 빈 여백과 가득 찬 빽빽함, 소박함과 화려함, 지루함과 흥겨움, 휴식과 축제, 침묵과 발언, 날숨과 들숨 같은 대조면서 동시에 공존의 미학이다. 그 대조와 공존은 색에서도 밝음과 어두움, 맑음과 흐림, 따뜻함과 차가움이 만나 어우러진 음악적 가락과 같다. 장단, 고저, 대소, 강약이 만나 마주서기는 하지만 밀치거나 다투지 않고 오히려 서로 손을 맞잡아 몸을 기대기도 하고 마음껏 튀어 오르도록 아래에서 받쳐주기도 하며 극과 극이 만나되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멋들어진 노래가 되는 것이다.
첫댓글 얼마 전 어느 책에 내겠다고 부탁 받아 쓴 글인데, 다른 생활용품 이야기도 있지만 나무 이야기도 있어서 통사공 여러분들께서 읽으면 도움 되지 싶어서 올립니다. 잘쓴 글은 아닙니다만. 다들 잘 계시겠지요. 저는 간간이 서각하며 잘 지냅니다.
잘게시지요 저도 옛생활소품에호감있어 좋아합니다 특히 구름 문양이 넘좋데요..
예. 생활용품은 으시대고 거들먹거리는 고급예술에 비해 바닥 사람들 손때가 묻어서 그 나름의 독특한 매력이 있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정선은 더 선선할 듯 싶네요. 그제 생일이셨다고요. 즐겁게 잘 지내셨겠지요? 건강하시고요. 공예가 님 작업 잘 보고 있습니다.
애고 숨차라....
극과 극이 만나도 밀쳐내거나 다투지 않고 어우러지는...읽는 것만으로도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조용할때 공부하면서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어설픈 글을 올리고 보니 좀 부끄럽군요. ^^
한국의 미는 세계적 수준이죠^^
예. 날이 덥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길. ^^
일간 다녀가구려~~ ^^*
옙! 날이 더워져서 시원한 묵요리 인기 좋지요? ^^
에고.............힘들어라....!!!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저두 환자들과 상담을 할때 五色이 五腸의 운동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 하곤 합니다..예를 들어 기침을 하거나 여타호흡기증상이 있을때는 흰옷이..신장 방광이 약하거나 비뇨기계에 이상이 있을때는 검은옷이...비위가 약한 사람은 황색계통이 도움이 된다고 말 해 주는데 잘 안믿더라구요ㅎㅎ.....뜨거운 여름엔 시원한 푸른색,겨울엔 따뜻한 색이 편한거나 한가지 이치인데두요 ....^ ^
예. 요즘 색채치료라는 것도 서서히 인기를 타는 것 같더군요. 색이 갖는 고유 파장과 영향이 분명히 있지요. 오장과 오색 오방 이론을 만든 이는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 명리학 처음 배울 때는 좀 도식적인 대입 아닌가 했는데 요즘에서야 조금씩 수긍이 갑니다. 제가 아는 명리학 한 이는 사람에 따라 모자나 핀, 머리 길이, 염색, 화장, 그런 것으로도 조언을 하더군요.
반의반쪽 님, 시향 님, 아이고, 모니터로 읽기에는 숨 찰 길이지요? 긴 글 올려서 괜히 누를 끼쳤나 봅니다. 정 무료할 때 보세요. ^^
글 쓰랴 서각하랴 판소리도 함시로 애들도 챙기랴 참 바쁘겠네요.
예. 잘 지내시죠? 저는 그래도 다채로워서 좋습니다. 한 가지만 물고늘어지는 인내심이 모자라서요. ^^
그점은 저와 많이 비슷하네요. 제가 하는짓들은 시시한 짓거리들이지만........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