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얼마나 닮았을까
어버이의 성격이나 체질 따위를 비롯해 형상 등의 형질이 자손에게 전해짐 또는 그런 현상을 유전(heredity)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과학적 기틀을 정립한 효시(嚆矢)는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 멘델이다. 다시 말하면 새롭게 태어나는 자식 세대는 부모로부터 유전형질을 물려받는 게 유전이다. 유전형질에는 홍채나 피부, 머리카락의 색 같은 것들부터 혈액형과 같은 특성, 혈우병과 같은 유전병 따위가 있다.
이제 겨우 희수(喜壽)에 이르렀음에도 아마도 그 옛날에 태어났다면 백발노인 취급을 당했으리라. 왜냐하면 백발(白髮)에다가 백미(白眉)*이며 백수(白鬚)*의 모습인 까닭에 아얏 소리도 못하고 그런 대접을 받아도 감수할 밖에 도리가 없지 싶다. 요즈음은 수염을 기르지 않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만일 그 옛날처럼 수염을 기르는 관습이었다면 백발과 백미도 모자라 백수까지 드러냈으리니 얼마나 곤혹스러웠을까.
어린 시절의 회상이다. 조고(祖考)는 이순(耳順)무렵부터 탈모가 되어 머리의 정수리는 민둥산처럼 머리털이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몇 가닥 안남은 경우도 백발인데다가 눈썹이 백미이고 허옇게 센 수염인 백수였던 까닭에 호호백발의 도인의 풍모와 위용을 자랑했다. 그래서인지 주위의 엇비슷한 연배의 분들과 확연히 다르게 위풍당당했던 아우라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도인의 것을 방불케 하는 지팡이를 지니고 나들이에 나서던 모습이 낯설고 괴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마도 선친(先親)의 경우는 불혹(不惑) 무렵부터 백발에 백미 그리고 백수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가계(家系)에서 백발과 백미와 백수는 최소한 3대째 이어지는 유전 현상이다. 나 역시 불혹 초반부터 새치가 나타나더니 몇 해 지나면서 볼썽사납게도 백두옹(白頭翁) 으로 변모되었다. 그런데 나의 두 아들이 이미 불혹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씁쓰레한 유전현상이 나타나지 않음에 안도해야 할까. 팔팔한 젊은 날에 머리위에 흰서리가 무참하게 내려앉은 게 황당해 망연자실에 빠져 진한 속앓이를 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생각나 마음을 고쳐먹고 콤플렉스(complex)에서 벗어나려 진력했다. 천우신조랄까. 다행히 백발에 민감하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동네인 대학에 자리 잡았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넘겼다. 하지만 일반 직장이었다면 허구한날 염색을 반복하며 끌탕을 쳤을 개연성이 다분했으리라.
백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심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지천명(知天命)의 끝 무렵 어느 날 머리에 무언가를 바르려고 거울 앞에서 씨름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비록 백발로 변했지만 머리숱이 꽤 많은 편이라서 그나마 흉하지 않고 봐줄만 하다고 여겨온 터였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머리의 정수리에 머리털이 거의 다 빠져 듬성듬성해진 낯선 모양에 참담했다. 이 모양인 줄도 모른 채 무심하게 지나쳤던 자신이 한심했다. 하기야 그렇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했어도 신통한 묘수는 어디에도 없었을 터이다. 선친 3형제 중에서 아무도 탈모 증상이 나타났던 경우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으니 조고의 형질을 물려받은 게 확실하다. 따라서 이는 격세유전(隔世遺傳)에 해당하는 걸까.
치아가 부실하고 약한 편이다. 현재 나의 치아는 상악(上顎)과 하악(下顎)에 각각 12개씩 모두 24개 남아있다. 여기에는 임플란트 4개, 브리지(bridge)한 의치(義齒)가 3개, 금(金)으로 때운 차아가 2개 등을 제외한 자연 그대로의 치아는 겨우 15개 뿐 이다. 언젠가 여동생들 앞에 치아가 말썽을 많이 부린다고 했더니 선비(先妣)에서 물려받은 유전적 요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돌이켜 회상하니 선친의 경우는 이승을 떠나실 때까지 치아문제가 전혀 없었다. 그에 비해 선비의 경우는 치료나 발치(拔齒)를 하며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런 맥락에서 치아 문제는 선비의 유전형질을 물려받았음이 명백하지 싶다.
형제자매 중에 나와 두 여동생은 나이가 들면서 미세하지만 퇴행성관절염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고 입원 치료를 받아하거나 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심하지 않다. 내 경우 고희를 넘기면서 양쪽 손가락 중에 3개의 끝마디가 약간 휘어지는 증상이 나타났지만 아무런 지장이 없어 방치하고 버티고 있다. 두 여동생 중에 하나는 올해 예순 여덟에 이르렀는데 나보다 증상이 다소 심한 상태이다. 그리고 올해 예순 다섯인 동생의 경우는 나와 엇비슷하다. 배움을 핑계로 일찍이 양친의 슬하를 떠나 타향을 전전했기 때문에 잘 몰랐는데 여동생들의 말에 따르면 이 또한 선비가 겪었던 질환이었단다.
내 얼굴 생김새나 외형적인 특징은 선친의 복사판 같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어쩌다 선친을 기억하는 어른들을 만나면 “자네 선친을 보는 것 같이 빼 닮았네”라는 얘기를 흔히 들어왔을 뿐 아니라 내 스스로도 그렇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고 보니 다양한 부위에서 조고를 비롯해 선친 혹은 선비의 유전인자가 살아 숨 쉬며 꿈틀꿈틀 요동치고 있지 싶다. 그렇다면 됨됨이나 영혼에는 어느 분의 피가 얼마만큼 섞여 흐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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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미(白眉) : 본래는 ‘흰 눈썹’이라는 뜻이며 ‘여럿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삼국지(三國志)의 촉지(蜀誌)의 마량전(馬良傳)에 나온다. 마량(馬良)에게 형제가 다섯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오형제의 ‘자(字)’에 모두 ‘상(常)’자(字)가 들어 있다는 이유에서 세인들은 그들을 마씨오상(馬氏五常)이라고 호칭했다. 한편 ‘그들은 한결같이 재주가 뛰어나 명성이 자자했으나 그중에서도 흰 눈썹의 마상이 가장 훌륭하다’는 뜻에서 마씨오상백미최량(馬氏五常白眉最良)이라고 했다. 다섯 형제 중에 마량은 어려서부터 눈썹에 흰털이 섞여 있어 그렇게 불렸단다. 이때부터 ‘형제 뿐 아니라 또래나 같은 분야의 많은 이들 중에 가장 뛰어난 경우’나 ‘여러 작품 중에 발군의 경우’를 지칭할 때 백미라고 이르고 있다. 한편 사자성어인 읍참마속(泣斬馬謖)에서 나오는 마속(馬謖)은 바로 마량의 아우를 지칭한다는 전언이다.
* 백수(白鬚) : 허옇게 센 수염
2021년 3월 7일 일요일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교수님은 머리,하얀 눈썹 조부님을 닮으셨군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