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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그거 노라[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떨기나무의 ‘있음’을 만났을 때이다.
개개 존재자의 있음은 구약에서는 천사(天使)로 형상화되어 있다.
성경 번역은 『톰슨대역 한역성경』(문우사, 1989)에 실린 King James Version[KJV]을 주로 참조하였다.
출애굽기 3장 2절: 주님의 천사(the Angel of the Lord)가 떨기나무 한가운데서 밖으로 피어난 불꽃 속에서(in a flame of fire out of the midst of a bush) 모세에게 나타나시니라. 모세가 보니, 보라!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불타 사라지지 않았다.
출애굽기 3장 3절: 이에 그가 말하길 내가 지금(now) 얼굴을 돌리면 이 엄청난 광경이 보이리라. 왜 떨기나무가 불타 사라지지 않는가?
모세는 등산을 하면서(출애굽기 3장2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자신의 생각을 벗어나 감각이 엄청나게 밝아지는 각성(覺醒)을 체험하게 된다. 떨기나무를 보았는데, 떨기나무가 불붙은 듯이 환하게 빛나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이스 철학의 여명기에 있음의 여러 가지 이름 중에 하나로 말했던 자연(physis)를 만난 것이기도 하다(Martin Heidegger, Der Einfuehrung in die Metaphysik).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에 따르면 이 physis의 뜻은 the arising of something from out of itself(어떤 것이 그 자체 안에서 밖으로 솟아오름/피어남/나타남)이며, 마치 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은 있음의 일어남이다(Willam Lovitt이 번역한 Martin Heidegger, The Question Concerning Technology and Other Essays(New York: Harper & Low)에서 인용함. 독일어 원본 텍스트는 Die Technik und die Kehre(Pfulllingen:Günther Neske Verlag, 1962)). 떨기나무를 관념이나 이미지[우상]로 파악한 게 아니라, 떨기나무가 스스로 자신을 자신 가운데서 밖으로 펼쳐 보이는 그 순수한 있음 그 자체를(in a flame of fire out of the midst of a bush) 마주치게 된 것이다.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마음이 생각에서 벗어나면서 등산을 통해 고양된 기운의 바다 속에서 감각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과거의 상처와 미래의 투사로 헤매던 생각은 사라지고 지금(now) 여기를 온전히 관찰하게 되면서 감각이 눈부시게 빛나게 된 것이다(내가 지금(now) 얼굴을 돌리면 이 엄청난 광경이 보이리라.).
이것이 떨기나무가 불이 붙은 듯이 빛나 보이지만 떨기나무가 불타지 않는 상태의 열려 있는 비밀이다. 그 빛은 화재에서 난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떨기나무란 존재자[있는-것]의 있음을, 관념으로 더럽힘 없이 만나는 데서 나오는 빛이었던 것이다. 떨기나무의 있음의 빛이 너무나 강렬하여 떨기나무가 불에 탄 것처럼 보였지만 떨기나무는 불에 타서 사라져 재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있음의 빛의 경이(wonder)로운 일어남!
출애굽기 3장 4절: 모세가 고개 돌려 그 광경이 보이게 되었음(see)이 주께 보이게(see) 되자, 하나님은 떨기나무 한가운데 계시면서 밖에 있는 모세를 부르시어(God called unto him out of the midst of the bush)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있는 것들의 순수한 있음 그 자체에 있다. 하나님은, 주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난 떨기나무의 있음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모세가 이 있는-것의 있음을 관찰할 때 비로소 있음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And when the Lord saw that he turned aside to see,), 있음의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있음에 응답하라고 부르신다(God called unto him out of the midst of the bush, and said, Moses, Moses!).
출애굽기 3장 4절: 모세가 고개 돌려 그 광경이 보이게 되었음(see)이 주께 보이게(see) 되자, 하나님은 떨기나무 한가운데 계시면서 밖에 있는 모세를 부르시어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모세가 말하길 제가 여기 있나이다(Here am I).
어디서 하나님을 만나는가? 바로 여기 나의 있음(Here I am.) 속에서 만난다. 그래서 모세는 Here am I(여기서 am은 이탤릭체임)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어디서 나를 부르는가? 사물들의 있음 속에서 나를 부른다. 나는 어디에서 이 있음의 부름에 답하는가? 바로 나의 있음으로 그 부름에 답한다.
보통 영어에서는 이런 경우 I가 대명사로서 정보 무게가 낮기 때문에 be동사를 문장에 끝에 놓는 “Here I am.”을 쓴다. 영어에서 장소부사(Here)가 강조되어 앞으로 나가면 정보 내용이 별로 없는 대명사 주어인 경우 <대명사 주어+목적어 없는 동사>로 보통 Here I am의 어순이 되는 것이다. 문장의 끝에는 보통 정보 무게가 나가는 단어가 오게 마련이며 보통 지시기능만 있는 대명사보단 동사가 더 정보 무게가 무겁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Here am I(여기서 am은 이탤릭체임)인가?
주께서 그 떨기나무에서 있으시면서 나에게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시니 내(I)가 주님과 대비되어 여기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즉 I가 여기서는 단순히 다른 정보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아니라 주님과 대조되는 ‘나’라는 정보 무게를 갖기 때문이다(대명사[I]가 정보 무게를 갖추게 되면 ‘Here am I’처럼 문장의 끝에 올 수 있게 된다. 나의 있음에 철저히 서 있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있음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am(여기서 am은 이탤릭체임)인가? 이 am은 히브리어로 에흐예[היה]로서 영어의 be 동사 중에서 am에 해당하는 것이다. KJV에서 이 am을 이탤릭체로 표기한 것은 이것이 있는 것들의 있음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곧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있음을 만나는 것은 바로 나의 있음을 통해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분은 ‘누구’가 아니실지도 모른다(개그 콘서트에 나왔던 갸루상의 ‘사람이 아니무니다’가 떠오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dqYbN7suDXk ).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가?
출애굽기 3장 14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길 나는 ‘내가 있노라’이다, 나는 내가 있다는 바로 그거니라(I AM THAT I AM).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말하거라. “‘있노라(I AM)’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라고.
히브리어로 ‘나는 내가 있다는 바로 그거니라’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라고 한다( http://blog.daum.net/onlyprophey/409 에서 ‘아하야 아세르 아하야’라고 발음하지만 강성열 구약학 교수님에 따르면 '에흐예'는 '하야'(be) 동사의 미완료 1인칭 단수이고 '아쉐르'는 that이나 who로 번역될 수 있는 관계대명사로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가 올바른 발음이다). 여기서 에흐예[היה]는 우리말처럼 이다/있다가 분리된 어근이 아니라, 이다/있다가 한 단어로 통일되는 영어가 속하는 인도유러피안 어족과 마찬가지의 어근으로, 영어로 말하자면 1인칭 다음의 be동사인 am의 뜻으로 보인다.
(톰슨대역 한역성경의 출애굽기에 나온 주석에 따르면
3:14 am─היה(하야). ‘존재하다’는 기본 뜻에서 ‘이다’(창 10:8) ‘되다’(레 26:12) ‘성취하다’(삼 13:19) 등 ‘있음’(출 5:13)과 관련되는 복합적 용어)
http://blog.daum.net/onlyprophey/409에서는 이를 I am who I am으로 해석하여 ‘나는 나이다’ 또는 ‘내가 나인 바로 그 사람이다’로 해석하고 있지만(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무니다-.-;;), KJV의 I am that I am이 앞뒤 문맥으로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본다. 출애굽기의 이 부분에서는 일관되게 ‘있음’을 통해 ‘있음’과 만남을 말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에흐예(I am)’는 ‘내가 있다’는 뜻이며 ‘that I am’의 that은 “걸어서 하늘까지”의 주제곡에서 ‘네가 있다는 그것’이라고 했듯이 that 뒤에 나오는 그것(that)이라는 뜻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sJzdFx7YY ). 즉, 하나님은 ‘내가 있다는 그것(that)’ 즉 ‘나 있음,’ “(내가) 있노라’이다.(우리 옛말에서 ‘~노라’는 영어의 am가 마찬가지로 1인칭 뒤에 쓰임을 주의하라. 예.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여기서 be동사, 이다/있다를 분명하게 영어에서 파악해보자. 영어의 be 동사는
1. 뒤에 명사 역할을 하는 것이 나오면 ‘이다’의 뜻이며(예. I am a boy. 나는 소년이다),
2. 뒤에 형용사가 나오면 ‘어떠하다,’ ‘~ 상태이다,’ ‘~ 상태로 있다’는 뜻이다(예. You are beautiful. 너는 아름답다/너는 아름다운 상태이다, 너는 아름다운 상태로 있다).
3. 그 외의 경우는 ‘있다’는 뜻이다(예. 데카르트의 말의 영어 번역인 I think, therefore I a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
떨기나무의 있음에서 말을 걸어오는 있음의 하나님께 모세는 ‘내가 여기 있음’이라고 응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에흐예’라고 하시는 분, ‘나는 내가 있다는 바로 그거’하고 하시는 분을 만나게 되었다.
이 에흐예(אהיה)가 야훼(YHWH)란 이름이 된다(출애굽기 3장 15절). 최근에 찾은 바로는 야훼는 ‘하야(haya)의 히필형 미완료 3인칭은 야흐예, 또는 야혜이며, 그 동의어 하와의 미완료 3인칭은 야흐웨 또는 야훼’라는 데에서 나왔다 한다( http://www.parusia.or.kr/bbs/zboard.php?id=bible_research&page=18&sn1=on&divpage=1&sn=on&ss=off&sc=off&sl1=off&keyword=%C7%D1%BF%F8%BD%C4&select_arrange=name&desc=asc&no=351&cno= ). 히필형은 사역 능동( https://godpeople.or.kr/board/5160835 )으로 (~게 하다[let])의 뜻이 있다. 즉 ‘에흐예’로 나타난 ‘하야’ 동사와 관련해서는 ‘있게 하다(let there be)’의 뜻이 나오므로 ‘야혜’ 또는 ‘야훼’에는 기본적으로 ‘있게 하는 자’라는 뜻이 들어간다(https://www.youtube.com/watch?v=TCAUbVXz3hI&t=417s 5분, https://www.youtube.com/watch?v=GfJTBpi09sQ&t=381s 의 6분 8초).
여기서 다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를 관찰해보면 이것은 영어의 I am that I am으로조차 번역될 수 없는 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원문에는 나(I)에 해당하는 ‘아니(אני)’도, ‘아노키’도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에흐예는 무엇인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는 ‘에흐예하는 그것이노라’고 한다. ‘나’는 빠져있다.
출애굽기 3장 13절: 모세가 하나님께 말씀드리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애굽기 3장 14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길 “에흐예 그것이노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에흐예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 ‘에흐예’는 무엇인가?
현대 히브리어는 사실 한 히브리어 학자에 의해 다시 복구된 언어라고 한다. 구약 시대의 히브리어와는 큰 간격이 있다. 큰 간격 중 하나는 현대 히브리어 동사에는 우리말처럼 현재, 과거, 미래가 있는데, 구약 시대의 히브리어 동사에는 ‘완료’와 ‘미완료’만 있다는 것이다. 즉 동사는 함이나 있음이 완료된 것과 함이나 있음이 완료되지 않은 미완료만 표시하는 것이다. 보통 완료는 과거, 과거완료, 현재완료와 미래완료 등으로 인식된다( http://blog.daum.net/ipssen/17949272 ).
동사에는 당연히 현재, 과거, 미래가 있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영어에도 2시제론[Two Tense Approach]에 따르면 2시제 밖에 없다. 즉 과거와 비(非)과거이다. 동사의 형태가 변할 정도의 시제(two morphological tenses)는 과거와 비과거형 뿐인 것이다. 예컨대 I am here에서 am은 현재 1인칭 비과거, I was here에서 was는 1‧3인칭 단수 과거형이다. I will be there는? will은 비과거형으로서 의미로 미래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의미로 시간을 나타내는 것은 시상(時相)이라고 한다. 완료형, 진행형 등은 시상(時相)이다. 현재 과거 미래를 동사 형태 변화로 나타내는 3단계 시제에 목숨 걸 필요는 없다. 중국어는 아예 시제가 없어도 잘 굴러간다. 시제는 때를 나타내는 말로 따로 표시하면 충분하다(예. 석유환국(昔有桓國).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 중국어는 모든 1음절 단어가 단어 형태가 없는 불변화사로서 이 1음절 단어가 합쳐져서 보다 긴 단어들도 만들어진다. 하지만, 때를 나타내는 부사 역할을 하는 불변화사와 의미 전달을 명확히 하는 조사 역할을 하는 불변화사를 넣어 정교하게 시상(時相)을 표현할 수 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oyoland&logNo=220772000327&proxyReferer=http:%2F%2Fwww.google.com%2Furl%3Fsa%3Dt%26rct%3Dj%26q%3D%26esrc%3Ds%26source%3Dweb%26cd%3D%26ved%3D2ahUKEwj97enQ9ZzuAhWZ-mEKHR6eAoEQFjAAegQIAhAC%26url%3Dhttp%253A%252F%252Fm.blog.naver.com%252Fyoyoland%252F220772000327%26usg%3DAOvVaw15YZ_vm3hL_Df_nYikHiw5 ).
에흐예로 나타난 이 하야 동사는 어떻게 쓰이는가? 인터넷의 다음 글이 도움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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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예타 토후와 보후(혼돈과 공허하며...>(창1:2)
라는 말에 쓰인 <하예타>인데, 이 말은 <하야>의 완료형, 3인칭. 여성. 복수로써 "혼돈과 공허가 있었고"라는 뜻이다.
이 혼돈과 공허의 상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이미 종말을 고하고, 창조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2. 먼저 <있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이다.
<예히>라는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있다>라는 뜻으로 4회가 쓰였다.
2-1. <예히 오르 와예히 오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예히>는 <하야>의 미완료, 3인칭, 남성, 단수, 단축형이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게 되었다는 보도인데,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신 후에 지금까지 빛이 계속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이 동적개념인가? 정적개념인가?
빛은 항시도 가만히 있지 않다. 매초마다 30만 km의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누가 이것을 정지상태라고 말할 것인가?
빛은 그 어떤 피조물 보다도 빠르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적 존재인 것이다.
이 외에도 <예히>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쓰였다.
2-2. <예히 라키아 (궁창이 있으라)> (6절): 궁창이 하루라도 움직이지 않는 날이 있는가?
2-3. <예히 메오롵> (광명체들이 있어 (14절): 해.달.별들이 가만히 있는 날이 있는가?
이렇게 볼 때, <하야>는 정지하고 있는 관념이 아닌 것이다.
http://jesusdom.net/board_column/43733 <---
즉 하야 동사 자체가 “있다”는 뜻뿐 아니라 “있게 하다,” “일어나게 하다”는 뜻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완료를 나타내는 1인칭 에흐예와 3인칭 남성 단수 ‘이흐예’와 그 준말인 ‘예히’에는 “있으라 하여[있게 하여, 일어나게 하여] 지금도 있게 함이 완료되지 않아 계속 있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3인칭 그분으로 말씀하시는 걸로 묘사할 때는 ‘예히 오르 와예히 오르’ (빛이 있으면 좋겠다 하시니 빛이 있어 지금도 있고 https://tongues.tistory.com/108 )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qI5a2bViCaY 20분 45초). 그러면 하나님이 1인칭으로 직접 말씀하실 때는?
‘아흐예 오르 와예히 오르’(빛이 있게 하자 하시니 빛이 있어 지금도 있고)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런 맥락은 고대 번역본 2 곳에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를 '말씀하시어 이 세상이 있게 하신 분'(“the one who said and the world came into existence”)이라고 번역한 데서도 보인다(「출애굽기 3:14의 번역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14).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에서도 뒤의 에흐예를 1인칭 미완료 히필형[사역형]로서 알브라이트 학파와 같이 “있게 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http://theologia.kr/board_system/45455 https://m.blog.daum.net/soon4832/13398235 ). ‘있다’에 집중한 번역은 뒤의 에흐에를 현재 분사 being으로 번역하여 “그 ‘있는’ 이노라(ἐγώ είμι ὁ ὥν = I am the being)”로 번역한 70인역에서도 볼 수 있다(「출애굽기 3:14의 번역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9-11).
그렇다면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는 모세에게 ‘있다 하는 그것이노라,’ ‘있게 하노라 하는 그것이노라’ 즉 ‘있음 그 자체이노라,’ ‘(모든 사물과 사건의) 일어남 그 자체이노라,’ ‘나는 있게 하는 자이노라,’ ‘나는 있게 하는 자 그로다,’ ‘I am what lets there be (everything).’라고 하시는 것 아닌가? 더욱이 있음 그 자체께서 모세에게 ‘있음[있게 함=일어남=일어나게 함=에흐예]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라고 하시지 않는가? 그리고 이 ‘있게 함’은 과거의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 새롭게 존재자[있는-것]를 ‘있게 함’으로 지금 눈앞에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창세기에 이 에흐예/예히가 쓰이며, 모세가 어떻게 해서 기존의 다신교를 일신교로 통일할 수 있었는지가 자명해진다. 있음의 말씀을 들은 모세에게 하나님은 모든 있는-것을 있게 하는 “있음,” “있게 함,” “일어나게 함” 그 자체였다. 모든 다른 신은 하나님이 있음을 주었기[있게 했기] 때문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신과 사물, 일어난 사건에 있는, 그 있는 것들의 있음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있음의 빛을 체험한 모세에게 ‘있음은 모든 있는 것의 있음[있게 함=일어나게 함]’이며, ‘모든 있는 것은 있음의 있는-것’이란 것이 자명하지 않았을까?
놀라운 것은 이 모세의 체험이 그리이스 철학의 여명기에 있었던 있음의 체험과 놀랍도록 상통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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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자에게는 이 있다는 것 이외에 또 무엇이 허용되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자는 존재 안에 모여 있다는 것, 존재의 빛 속에서 존재자가 나타난다는 것, 이 사실이 그리이스인을, 그리고 그리이스인을 처음으로, 또 그리이스인만을 놀라움 속에 몰아넣었다. 존재 안의 존재자─이것이 그리이스인에게는 가장 놀라운 것이 되었다.
“哲學이란 무엇인가?”, 『삼성판 세계사상전집6 하이데거/哲學이란 무엇인가 外 야스퍼스/哲學的 信仰 외(外)』(삼성출판사, 1985) :41 <---
‘있는-것이 있다’는 경이(wonder)로운 체험이 그리이스 철학을 시작하게 했고, ‘모든 있는-것이, 있게 하시는[있음] 그분 속에 있다’는 아찔한 빛의 체험이 헤브라이즘의 새벽빛이 아닌가? 그리이스 철학은 있음에 대한 지성적인 물음과 응답이며, 헤브라이즘은 있음에 대한 감성적인 영접(迎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나는 구약의 하나님이 정의로운 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야훼는 부족신과 전쟁신으로서 여러 가지 편협하고 독단적이고 잔인한 모습도 상당히 많이 보인다─구약에는 이와 관련되는 피와 살육과 학살로 가득 차 있는 부분도 자주 있다. 하지만 야훼에게는, 모세가 만났던 있는-것의 있음으로 체험되는 면도, 또한 있었다고 본다( http://cafe.daum.net/vipassana/30sN/650 ).
있음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좀 더 순수하게 구현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아마도 메시아는 예수 같은 모습보다는 모세 같은 모습일 거라고 볼 유대교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나는 예수가 있음의 하나님을 완벽하고 순수하게 구현했다고 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예수의 위대함은 이런 자신의 인간적인 모습을 최후의 순간에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묵묵히 사람의 아들로서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였다는 데 있을 것이다( http://cafe.daum.net/vipassana/4KHg/248 ).
출전: http://cafe.daum.net/vipassana/30sN/675 http://cafe.daum.net/vipassana/30sN/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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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는 있게 하는 자이노라,’ ‘나는 있게 하는 자 그로다,’ ‘I am what lets there be (everything).’ 를 추가해보았습니다.
다음 부분으로 첨삭 보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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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흐예(אהיה)가 야훼(YHWH)란 이름이 된다(출애굽기 3장 15절). 최근에 찾은 바로는 야훼는 ‘하야(haya)의 히필형 미완료 3인칭은 야흐예, 또는 야혜이며, 그 동의어 하와의 미완료 3인칭은 야흐웨 또는 야훼’라는 데에서 나왔다 한다( http://www.parusia.or.kr/bbs/zboard.php?id=bible_research&page=18&sn1=on&divpage=1&sn=on&ss=off&sc=off&sl1=off&keyword=%C7%D1%BF%F8%BD%C4&select_arrange=name&desc=asc&no=351&cno= ). 히필형은 사역 능동( https://godpeople.or.kr/board/5160835 )으로 (~게 하다[let])의 뜻이 있다. 즉 ‘에흐예’로 나타난 ‘하야’ 동사와 관련해서는 ‘있게 하다(let there be)’의 뜻이 나오므로 ‘야혜’ 또는 ‘야훼’에는 기본적으로 ‘있게 하는 자’라는 뜻이 들어간다( https://www.youtube.com/watch?v=GfJTBpi09sQ&t=381s 의 6분 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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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보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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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3인칭 그분으로 말씀하시는 걸로 묘사할 때는 ‘예히 오르 와예히 오르’ (빛이 있으면 좋겠다 하시니 빛이 있어 지금도 있고 https://tongues.tistory.com/108 )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qI5a2bViCaY 20분 45초). 그러면 하나님이 1인칭으로 직접 말씀하실 때는?
‘에흐예 오르 와예히 오르’(빛이 있게 하노라 하니 빛이 있어 지금도 있고)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런 맥락은 고대 번역본 2 곳에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를 '말씀하시어 이 세상이 있게 하신 분'(“the one who said and the world came into existence”)이라고 번역한 데서도 보인다(「출애굽기 3:14의 번역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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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TCAUbVXz3hI&t=417s 5분에 명확히 나오는 군요. 야훼는 "그분이 있게 하셨고, 있게 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있게 하실 것이다"라는 뜻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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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보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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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예 오르 와예히 오르’(빛이 있게 하자 하시니 빛이 있어 지금도 있고)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런 맥락은 고대 번역본 2 곳에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를 '말씀하시어 이 세상이 있게 하신 분'(“the one who said and the world came into existence”)이라고 번역한 데서도 보인다(「출애굽기 3:14의 번역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14).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에서도 뒤의 에흐예를 1인칭 미완료 히필형[사역형]로서 알브라이트 학파와 같이 “있게 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http://theologia.kr/board_system/45455 https://m.blog.daum.net/soon4832/13398235 ). ‘있다’에 집중한 번역은 뒤의 에흐에를 현재 분사 being으로 번역하여 “그 ‘있는’ 이노라(ἐγώ είμι ὁ ὥν = I am the being)”로 번역한 70인역에서도 볼 수 있다(「출애굽기 3:14의 번역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