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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3)
고후 4:1-15
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 설 교 >
실패자는 없다
고후 4장 7~11절 / 조재호목사
32년만의 폭설이 서울에 왔습니다. 요즈음은 눈이 그리 반갑지가 않습니다. 눈 때문에 곤란을 겪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눈이 많이 오는 날 어느 교회 전도사가 교우들과 함께 병원 심방 가는 중에 직접 봉고를 몰고 가다가 미끄러운 길에서 급브레이크를 잡았다고 합니다. 급 제동에 봉고가 180도 회전하여, 봉고 앞머리가 교회를 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병원으로 가던 차가 방향이 바뀌어 교회로 향하게 되었으니, "심방은 다음에 가고 교회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인 것 같습니다"하고 교회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혹시 교회로 오시다가 길이 미끄러워 집으로 다시 되돌아가신 분은 안 계시겠지요. 주일을 지키는 여러분을 하나님이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의 말씀 제목은 '실패자는 없다'입니다. 실패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을 갖기를 원합니다.
1. 사람은 강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약하고 약한 존재입니다.
자신의 몸에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기계가 낡아지고 채소가 시들어 가듯이 사람의 몸은 세월이 가면 약해지고 시들기 마련입니다. 험난한 인생 항로에서 일사천리로 탄탄대로를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아무 문제없이 태평 세월로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태평세월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첫째로 정신적으로 이상하게 된 사람이거나, 아니면 현실을 도피해서 사는 이상한 사람,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가리켜,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고 아침에 일어섰다가 저물면 쓰러지는 들풀과 같다는 것입니다. 미끄러운 눈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오히려 넘어지지 않으려다가 더 크게 다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넘어져서 조금은 아프지만, 넘어진 그곳에서는 절대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곳을 통과할 때는 매우 주의하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똑 같은 곳에서 다시 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이든지 세상사람이든지 똑 같이 실패와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번의 실패가 영원한 실패자가 되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과 인생은 깨어지기 쉽고 보잘 것 없는 질그릇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은 질그릇과 같이 보잘 것 없고 깨어지기 쉬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보화가 들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발렌타인데이에 선물 잘못 사면 겉포장은 멋있고 화려하지만 속내용은 보잘 것 없고 빈약하지만, 우리 인생의 현실은 정 반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정 반대입니다. 우리는 허약하고 빈약한데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보배,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 능력 때문에, 내 안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비록 우리는 약한 존재이지만, 정 반대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주신 보배로운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어떤 것인가요?
첫째로 예수 보배 가진 그리스도인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습니다. 둘째로, 예수 보배 가진 그리스도인은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예수 보배 가진 그리스도인은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넷째로, 예수 보배 가진 그리스도인은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를 사방에서 우겨 싸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사방에서 우겨 싼다는 것은 여러 방면에서 삶의 압박과 고난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숲에 놓은 덫이 지나 가던 토끼를 덮치듯이 빠져 나올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를 답답하게 만들고 거꾸러뜨리려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우리는 사업을 하면서, 혹은 가정 문제로 답답한 일을 언제나 경험합니다. 새벽이면 남이 알지 못하는 눈물의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소연하는 간구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흘리는 눈물은 슬픔 감정의 눈물이지만 주님 앞에 나와 흘리는 눈물은 간절한 기도의 눈물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할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 121:1-2) 라고 선포하신 하나님 말씀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거꾸러뜨리고 답답하게 우겨 싼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해체해 주실 줄 믿습니다.
4세기 중엽 안디옥에서 태어난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성자 크리소스톰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의 집을 꾸미려 하지말고 당신의 영혼을 잘 가꾸라.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집은 가지고 갈 수 없지만 당신의 영혼은 함께 할 것이다. 당신은 맞지 않는 너무나 큰 신발을 신으려 하지 말라. 당신에게 맞지 않은 큰 신발로는 걸을 수 없고 방해가 될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음모와 중상 모략, 그리고 황후의 핍박으로 멀리 추방될 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를 쫓아내면 엘리야처럼 되어 까마귀가 나를 아침저녁으로 도울 것이요, 바다에 던진다면 요나처럼 될 것이요, 돌로 친다면 스데반처럼 될 것이요, 매로 친다면 바울과 같이 될 것이라" 그는 가는 길에 어떤 핍박과 방해와 실패가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했습니다
역대 마라톤 선수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는 에티오피아의 아베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맨발로 42.195Km를 달려 당당하게 우승해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거의 전신이 마비되고 두 다리를 못쓰게 되었습니다. 앞이 안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나는 두 다리를 잃어 버렸지만 아직 건강한 두 팔이 있습니다" 그는 두 팔로 부지런히 운동, 힘을 단련시켰습니다. 그리고 노르웨이 장애인 동계 올림픽에서 썰매 경주에 출전해서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이러한 장애물들을 극복하도록 도우십니다.
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패자는 없습니다.
실패는 죄악이 아닙니다. 실패는 특별히 잘못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는 누구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요?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패는 누구나 경험하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은 실패를 현실로 인정해야 합니다. 과거에 매이지 않고 미래를 보기 위해서 현실을 받아 드리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실패를 통해 사람의 한계와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전 7:12)라고 하셨습니다. 똑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말기 위해 우리는 생각하며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실패를 통해 믿음 안에서 새로운 각오와 희망과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눈입니다. 보이는 세계의 사물을 보는 눈입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영의 눈입니다. 영의 눈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이 눈을 뜬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믿음의 세계를 볼뿐 만 아니라 자신의 모습도 봅니다. "세상에서 아주 단단하고 다루기 어려운 것 3가지가 있다. 하나는 철이고 두 번째는 다이아몬드이고, 세 번째는 자신을 아는 것이다"라고 벤 프랭크린은 말했습니다. 말츠(Martz)는 말하기를, "사람의 행동과 태도는 그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다"라고 했습니다. 자신 없는 행동, 열등한 행동을 하는 사람과 자신 있는 행동, 당당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보는 태도가 다릅니다. 자아상이 크고 강한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실패의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싫어하고 무시하고 업신여깁니다. 경직된 표정과 태도와 행동, 자신을 인정하지 않듯이 상대방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공의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표정과 말씨가 좋고 자신을 인정하고 상대를 인정합니다. 예수 보배를 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올바르고 멋있는 자아상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는 자신을 인정하고 남을 인정하는 성공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이 결국 성공하고 행복한 삶을 살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어떤 실패와 낭패와 두려움이 있습니까? 사회 진출이나 대학 진학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직장에서의 고민, 사업에서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있을 수 있는 살아가면서 겪는 삶의 한 과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인 실패자는 없습니다. 실패만 있을 뿐입니다. 치명적인 실패는 스스로 작아지고 낙심해서 스스로 실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과 실패가 유익한 교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반드시 승리의 노래를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히 13:6)라는 성서기자의 고백을 마음에 담기 바랍니다. 현재의 고난을 주님의 능력으로 극복하는 보배로운 신앙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고후04장 7~10 / 김영대목사
베드로전서 5:7에 "너희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성경에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몇 번이나 나와있는지 아십니까? 366번이 나와 있어요. 그런데 왜 366번일까요? 이것은 "매일 매일 염려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 일년은 365일인데 왜 365번이 아니라 366번일까요? 예! 그것은 4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윤년, 2월이 29일이 되어 366일이 되는 것까지 계산에 넣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옆에 분하고 인사하십시다. '염려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차량의 급속한 증가와 산업의 발달에 따라 교통사고와 각종 산업재해도 따라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도 각종 사고들로 인한 후유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장애인은 선천적인 경우는 불과 몇 퍼센트 되지 않고 대부분은 사고나 질환 때문에 생기는 후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신체 건강하던 사람들이 사고로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런 사고나 질병으로 장애인이 된 경우 육체적 고통과 불편도 크지만, 실은 정신적 공허와 상실감이 훨씬 더 커서 그 고통을 극복하기가 더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미래에 대한 소망과 재활의지를 갖게 하는 재활의학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습니다. 이 재활의학은 '예방의학'과 '치료의학'에 이은 제3의 의학이라고 합니다.
저는 재활의학 하면 잃어버린 육체의 기능을 되살리는 의학이겠거니 하는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재활의학의 창시자인 하워드 러스크 박사가 내린 정의를 통하여 재활의 의미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재활이란 장애로 인해 잃어버린 능력을 되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능력이 무엇인가를 찾아 개발하는 과정이다." 즉 재활의학은 잃어버린 기능 장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기능과 능력을 최대한 신장시켜 사회에 복귀시키는 의학이 재활의학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관점입니다.
이 재활의학이 갖는 관점, 즉 잃어버린 것에 집중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관점이 아니라, 남아 있는 능력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창의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한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관점은 비단 장애인에게만 필요한 의식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의식이요 관점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잃어버린 것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면 쉽게 낙심하고 의기소침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잃은 것(lost)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남은 것(left)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의 여유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떤 문제를 만나게 될 때, 문제 자체보다 '그 문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하는 자세와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언제나 문제 중심(problem-oriented)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사람은 해결 중심(solution-oriented)으로 생각합니다. 즉 소극적인 사람은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문제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사람은 '어떻게'라는 질문을 가지고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해결의지를 갖는 것입니다. 문제 중심의 사람이 아니라 해결 중심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의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변화시키기보다는, 문제를 보는 시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하십시다. "무지개를 보기 원한다면 먼저 비가 오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낙천적인 인생의 원리를 소유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시각과 관점의 전환을 가진 사람은 심각한 문제를 만나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별 문제도 아닌데 문제를 심각하게 만드는 소극적인 사람은 문제의 무덤 속에 스스로 빠져 버리게 됩니다.
"당신 안에 잠재된 리더십을 키우라"(Developing The Leader Within You)의 저자 John Maxwell은 "문제를 어둡게 보는 사람은 패배자가 되고, 문제를 밝게 보는 사람은 승리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로 방해물을 먼저 봅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소수의 사람만이 목표물을 먼저 봅니다. 그래서 전자는 잊혀진 자가 되고, 후자는 역경의 승리자로 역사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방해물(obstacles)로 보기보다는 기회(opportunities)로 보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문제보다는 가능성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변화시키기보다는, 문제를 보는 시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큰 문제라도, 복잡하게 얽혀진 문제라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런 표상적인 인물이 곧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비전의 사람답게 태산같은 문제들 속에서도 평지처럼 헤쳐나가는 역동적인 기상을 보여줍니다. 그는 문제를 어둡게 보는 패배의식을 갖고 살지 않고, 문제를 밝게 보는 승리자의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니라" 아멘. 이러한 바울의 자세와 믿음을 저와 여러분의 것으로 삼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문제가 안 좋아질수록,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십시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부정적으로 볼수록 낙심하고 의기소침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문제해결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기 때문에 요셉의 생애에 대하여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복 형들로부터 시기와 미움을 받아 노예상인에게 팔려가, 이국 땅 애굽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성실하면 성실할수록, 진실하면 진실할수록 상황은 더욱더 나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상황 때문에 인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그는 애굽의 국무총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덮쳐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온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를 팔았던 형들입니다. 형들은 요셉의 보복과 앙갚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런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요셉은 이런 위대한 말을 합니다. "형님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케 하셨습니다."(창세기 50:20) 참으로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신앙고백은 일의 결말이 해피앤딩으로 끝난 이 상황에서 처음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었습니다. 고난과 억울함이 밀려오는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문제속에서 낙심치 않고 계속 성실할 수 있었습니다. 진실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 문제와 상황이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나에게 어떻게 해롭게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문제를 유익 되게 하실 것인가에 생각을 맞추어야 합니다.
(산낙지 이야기: 낙지와 배고픈 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안 좋은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라고 항변하는 대신에, 하나님, 어렵지만 나는 주님의 자녀이며, 주님은 선하신 분인 줄 압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이 어려운 일에도 주님의 복된 섭리가 있을 것을 믿습니다"라는 긍정적인 신앙의 태도를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은 하나 같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산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 초점을 맞추고 산 자들입니다. 바울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사방으로부터 온갖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핍박과 음모, 환난이 끊임없었습니다. 복음 전하다가, 선한 일 하다가 매맞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치 않고 모든 안 좋은 사건들을 역설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 감옥에 갇힌 일은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습니다."(빌 1:12) 바울은 감옥을 탄식과 후회와 불평의 장소로 생각하지 않고 조용히 글쓰는 장소로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교회에 보내는 옥중서신이 나왔습니다. 또한 그곳을 기도처소로 활용했고 안식처로 활용했습니다. 밖에 있으면 방해를 받았을 텐데 그에게 감옥은 핍박 없는 조용한 묵상의 처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기준이 없으면 사람은 처해진 환경이 불만스러워 살수가 없습니다. 바울과 같이 하나님은 최악을 최상으로 바꾸어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문제가 커질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하십시다.
우리는 때때로 일을 하다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건강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직장을 잃고, 사업이 부도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설상가상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끝은 곧 하나님의 시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위기야말로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문제가 커질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한계상황에 많이 부딪쳤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역부족일 때가 비일비재했습니다. 도무지 그를 핍박하고 반대하는 주모자들의 집요한 공격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바울을 죽이지 않으면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하여 바울을 쫓는 사람이 40명이나 되었습니다.(행23:12-13)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전도활동을 방해하고, 길을 가로막습니다. 로마 군인들을 매수하고 지역 주민들까지 선동하여 그의 선교활동을 저지했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크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교회가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력하게 나타나고, 성령님이 크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힘차게 외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절) 그리고 10절에서는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또한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약해질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더욱 강력하게 드러나는 것(고후 12:9)"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데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마 19:26) 아멘.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약한 자들, 지혜롭지 못한 자들을 통해서 영광 받으심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역사하실 뿐만 아니라, 나의 약점을 통하여 더 큰 일을 행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인생의 시련과 역경을 통하여, 고난과 아픔을 통하여, 가난을 통하여, 질병을 통하여, 불리함을 통하여, 실패를 통하여, 슬픔을 통하여, 손실을 통하여, 희생을 통하여 더 큰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문제가 어렵고 커질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크고 강력하게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문제 앞에서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생각하십시다.
인생은 장애물 경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나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장애물은 성장할 수 없지만, 우리는 계속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힘차고 소망찬 말씀으로 문제를 향하여 외치도록 하십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스가랴 4:7)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평지가 되리라" 아멘.
3. 문제가 어두워질수록,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생각하십시다.
올해도 벌써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300여일 중에서 과연 몇 날이나 밝은 날이었던 것 같습니까?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은 어떻습니까? 소망적이기 보다는 문제가 더욱 어려워지고, 전망이 어둡다는 것이 현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흉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다윗은 간증합니다(시 112:7). 그리스도인은 밤에도 새벽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어두워질수록,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혼자 걷고 있는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어느 날 밤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 한복판에서 풍랑을 만나 밤새도록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큰 풍랑이었습니다. 그들은 초저녁부터 새벽녘까지 여덟 시간 이상을 풍랑에 시달리며 애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칠흑 같이 어두운 깊은 밤중인데도 예수님은 벳새다 언덕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셨음을 강조합니다(마가복음 6:48).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시간이 언제인데 예수님이 보고 계십니까?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3시입니다. 캄캄하여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시간인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고난 당하는 현장을 보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예수님이 보고 계셨습니까? 요한복음을 보면 십여리 쯤 되었다고 하니까(요 6:19), 최소한 5-6km 떨어진 먼 거리인데도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약해 예수님을 보지 못해도, 예수님은 우리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어둡고 험난한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아파하고 신음할 때 주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꼭 필요할 때 우리 가까이 오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풍랑과 어둠 속에 시달리는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곁에 있으니 안심하라."(마가복음 6:50)
그렇습니다. 주님은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3시에도 풍랑 위를 밟고 찾아오셔서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문제가 어두워질수록 하나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바울이 지중해 한 복판에서 광풍을 만나 배가 전복되어 생사가 경각에 달렸던 그 날 밤에 주님은 바울 곁에 가까이 찾아오셔서 동일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으니 안심하라."(행 27:24-25)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신앙이 아닌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았더라면 하루도 못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시는 생각,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가지고 사니까 궁핍에서도 옥중에서도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생각은 긍정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시다는 긍정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를 당면할 때 문제에 빠지는 자가 아니라, 문제의 정복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를 보고 낙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믿고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문제만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 내 가까이, 내 곁에 계심을 믿고 문제를 풀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배를 품은 사람들
고후04장 7-11절 / 조용기목사
저는 장애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그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하나님 앞에서 불평하지 말아야 되겠다고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위를 쳐다보면 불평을 늘하겠지만 밑을 내려다보면 불평하지 않고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지백체가 온전한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하고 찬송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온전한 사지백체를 주셨으니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축복을 온전히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서론>
오늘 저는 “보배를 품은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고해라고 말합니다. 고통의 바다라고 말합니다. 행복 속에도 슬픔이 있고 웃음 속에도 눈물이 있습니다. 숨기고 싶은 비밀한 죄책이 있고 돈, 지위, 명예, 권력의 화려함 속에서도 갑자기 엄습하는 허무와 무의미의 감정이 마음 속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아침에 일어나고 일터에서 일하고 점심 먹고 또 일하고 저녁에 돌아오고 반복되는 이 생활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은 모두 죽음의 그림자 밑에서 몸서리칩니다. 누구도 다 죽어야 됩니다.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젊을 때는 몸에 병이 들고 아프면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나이를 먹으면 24시간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녀요. 언제 죽을지 몰라요. 인류 역사상 가장 호화롭게 살았던 솔로몬도 전도서 1장 2절로 11절에 이렇게 탄식을 했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솔로몬같이 휘황찬란하게 산 사람도 그의 삶 속에 이러한 허무와 무의미의 감정이 꽉 찼습니다. 결국은 호화찬란하게 살았다는 것은 꿈과 같은 일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많은 고난을 겪고 난 다음 죽었다는 그 기억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을 섬기는 가치 있는 목표가 없이는 어떻게 사는지 알지를 못합니다. 날이 갈수록 희망 없이 인생이 어떻게 삽니까?
<본론>
1.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오늘날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다 지구라는 타락하고 저주받은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저주받은 땅입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우리 삶에 장애물 천지인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평생에 수고해야 소산을 먹는다. 여러분 어떻게 사십니까? 허득허득 살아온 것을 보면 수고하고 인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편안하게 롤러스케이트 타고 오지는 않았습니다. 타락하고 저주 받은 땅에서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육신을 입고 이처럼 타락한 세상에 오셔서 고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조차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실 때 당신 자신을 고난의 한가운데 풍덩 빠뜨리도록 던지셨던 것입니다. 태어나서도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셨습니다. 목수의 집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심한 중노동을 했고 그 다음에는 노숙을 하면서 제자들 데리고 33년 동안 이 땅에 살았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 저주받은 땅에 왔습니까? 온 땅이 이렇게 저주받았는데 무엇 때문에 왔나요? 예수님 오기 6백 내지 7백년 전에 이사야는 이 저주받은 땅에 희망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저주받은 땅에 희망을 어디서 찾을 것이냐. 예수님께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단단히 들어보세요. 놀라운 예언입니다.
이사야 53장 1절로 8절인데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결국 이 세상의 희망은 우리 위해서 십자가에 죽어주신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부귀 영화 공명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있다 내일 없어질 세상의 부귀 영화가 희망이 안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왜 예수님이 그만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예수님이 쉽게 우리의 구주가 된 것이 아니지 않아요.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당한 모습 여기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 저가 상함은 우리 죄악을 인함이라 저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 평화를 누리고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가 다 어린양 같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우리 무리의 죄악을 저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쳐다보면 우리 마음에 변화가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제키고 여섯 번째 남자하고 살면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절망적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만나자마자 순식간에 변화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시간이 걸리지 않았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개인도 변화되고 예수를 만난 가정도 변화되는 예수를 만난 나라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보게 될 때 그리스도를 만나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되지 않은 개인과 가정과 나라가 없습니다. 이 세상 교육을 잘 받을 수 있으면 좋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 교육을 못 받은 사람도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나라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미국의 성형외과 의사인 맥스웰 몰츠(Maxwell Maltz, M.D.)는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형수술을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선, 사람들은 성형수술로 자신의 외모가 아름답게 되면 성격이나 인격도 갑작스럽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평소 콤플렉스로 여겼던 부분이 고쳐지면 그로 인해 생겼던 자기 비하, 자기 혐오, 불만, 두려움 등도 없어져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으로 성격이 밝아진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성형수술해서 좋아지면 성격이 밝아진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건은 아무리 성형수술이 잘되어서 얼굴이 몰라볼 정도로 아름다워져도 마음은 달라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감정은 달라지더라도 근본적인 마음은 나쁜 사람은 여전히 나쁘고 악한 사람은 여전히 악하고 거짓말쟁이는 성형수술을 해놓아도 여전히 거짓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변화는 마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성형수술 하지 말고, 마음을 성형수술 하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외형이 아무리 아름다워져도 그 안에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우리는 오직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주의 종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주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왔다갔다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종교적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소문만 듣고 왔다갔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을 만나야 돼요.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무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3장 5절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천국시민권을 얻게 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그리스도의 역사는 그와 만나는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 믿는 사람과 뭐가 다르냐. 안 믿는 사람은 종교는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예수님은 못 만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예수를 만난 사람이요,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친구 두 사람이 만나서 참 친했기 때문에 같이 늘 술 먹고 도박하고 놀러 다니는데 얼마 있다가 한 친구가 술도 먹지 않고 도박도 안하고 놀러도 안갑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가 “야 너 어떻게 되었니? 병들었지 않느냐? 너 잘못됐지 않느냐? 왜 이렇게 변했느냐?” “내가 변한 것이 아니야. 주인이 달라졌어.” “무슨 주인이 달라졌노?” “전에는 세상과 마귀가 내 마음 속 주인이었는데 세상과 마귀가 하자는데로 따라 했는데 내가 교회가서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이 예수님을 마음 속에 새로운 주인으로 모셔 들여서 아버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가슴에 모셔 들여서 이제 내 마음 속에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좋아하는 일을 하네. 내가 술을 안 먹으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좋아해. 우리 주인이 좋아해. 도박하지 않고 놀러 안다니면 내 속에 주인이 좋아해. 주인이 바뀌었어.” 그러자 그 안 믿는 친구가 이해를 못합니다. “주인이 바뀌다니. 내내 너는 너인데 무슨 주인이냐?” “겉사람은 안변했어도 속사람은 변했네. 주인이 달라졌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수양과 도덕을 닦아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일어서나 앉으나 달라진 주인이 우리를 끌고 가요. 그러므로 주인이 달라졌기 때문에 주인과 같이 있으면 주인 성격을 닮게 돼요. 우리의 힘과 능으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가 없어요. 우리 속에 계신 주인이 그렇게 살도록 끌어 주시지. 그러므로 믿는 자와 안 믿는 자가 뭐가 다르냐. 믿는 자는 마음 속에 주인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되어 계시고 안믿는 사람은 그 주인이 세상과 마귀가 주인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의식과 형식이 다르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2. 믿는 자의 삶
그런데 우리 믿는 자의 삶은 어디에 다가 힘을 주어야 되는 것입니까? 성경에는 보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죽고 장사지내고 함께 살았다는 말을 자꾸 합니다.
로마서 8장 36절에도 보면은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우리 믿는다는 것은 법적인 의미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죽어 버렸어요. 그리스도와 함께... 에이~ 예수님이 죽었지 내가 어디 죽었노?
여러분 김연아 이번에 스케이팅을 한번 보십시다. 김연아가 성공을 했지 우리가 성공은 안했지요. 그래도 모두 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가지고서 점프할 때마다 넘어질까 싶어서... 그가 성공을 하면 우리가 박수를 치고 고함을 쳤습니다. 온 우리 국민이 김연아와 하나가 되었어요.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한국 사람만 아니면 안그래요. 보통 때는 아웅다웅 싸우던 사람들이 스케이트 보는 한 마음으로 박수를 치고 동동 굴러요. 영어로 말하면 ‘Idenfificaion’ 동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은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아들 어떻게 믿으라는 말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님 통해서 우리는 옛 사람이 죽었고 장사지내고 말았다고 믿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다. 나는 장사지내고 말았다. 그러므로 내 옛사람에 대해서 하나님도 왈가왈부 안하시고 마귀도 왈가왈부 안한다. 죽어 버렸는데요. 죽고 장사지낸 바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해서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산다.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믿음으로 신앙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지 행위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는데 이 진지를 알고 우리 자유를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속한 내 육체는 내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쳐다볼 때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서 죽어버리고 만것입니다. 그리고 새사람이 되어 자라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깨달음을 늘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난 옛사람이 죽었다. 그러므로 나는 옛사람으로써 세상에 살지 않는다. 옛사람의 죄, 옛 불의와 추악, 옛 질병, 옛 저주, 옛 죽음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었다. 이 깨달음이 빛으로 온 사람은 그 깨달음 속에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하여 이미 죽고 장사지낸 바 되고 용서받고 의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성결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같이 채찍에 맞으므로 병을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저주를 다 벗어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이미 부활해 버린 것입니다. 그 빛을 마음 속에 늘 비추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이 이 진리를 깨닫는 빛을 비춰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여하간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도록 축복을 받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고 깨달아야 됩니다. 우리 신앙은 십자가에서 시작해서 십자가에서 끝납니다. 예수님이 그냥 십자가에 벌거벗고 매달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것입니다. 죄짓고 추악하고 병들고 저주받고 가난하고 낭패와 실망당하고 죽고 지옥가는 그 못난 내가 주께 매달려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새로운 이미지를 마음 속에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빛이 우리 마음 속에 비친 이상 항상 이 빛을 바라보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옛 어둠의 세계로 돌아가서 자기에 대해서 저주와 절망을 가지고 낙심하고 살면 안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하나님이 영광의 광채시오 본체의 형상인 그리스도가 여러분과 나를 위한 재물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이런 하나님의 큰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보증으로 성령이 마음 속에 인치심을 받았다. 성령이 도장을 찍어주셨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는 성령의 도장 받았구나. 마귀 앞에 설때도 아~ 성령의 도장을 받았네. 여러분 자신이 도장 없는데요? 나는 도장 받은 적이 없어요. 그것은 빛을 깨닫지 못하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육신의 여러분 자신과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여러분 자신을 분명히 알고 살아야 예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을 긍정적으로 깨달아 알고 그것을 마음 속에 꿈꾸어보고 그것을 믿고 그것을 입으로 시인하면 그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그래요. 믿음도 나는 믿음이 적습니다. 그런 소리하지 말아야 돼요. 주님께서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내 믿음이니까 주님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믿느냐. 믿음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님이 네 믿음대로 된다고 해요. 물건을 사는데 너 돈 있지 않느냐? 네 돈으로 사라. 내가 도와줄 필요 없다 그 말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으려고 하면 믿고 안 믿으려고 하면 안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주님께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했느냐. 의심을 하고 믿음이 적은 것은 베드로였습니다. 스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서 개들도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데 이방인이라도 주님이 고쳐주신다고 믿는다고 하니까. 주님이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의 인생을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안 믿을 수도 있고 적게 믿을 수도 있고 크게 믿을 수도 있고 죽도록 믿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자꾸 자라게 해야 돼요. 그 믿음있는 사람하고 같이 지내면 이야기를 들어서 용기를 얻지요. 내가 또 체험을 하면 체험을 할수록 믿음이 점점 강해져서 나중에는 믿음의 용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깨달음을 갖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지식을 가지고 주의 성령의 도움으로 새 사람 되는 꿈을 꾸며 마음에 능력인 믿음을 가지고 일어나서 믿고 입술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입술의 말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 압니까? 우리 입의 말이 우리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도 여러분께서 관심을 가지고 선택적으로 해야지 무지막지하게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제가 50년을 그렇게 설교했지만 우리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아멘! 하시고 난 다음 교회 밖에 나가면 다 잊어 버려요. 건망증이 얼마나 심한지 몰라요. 잊어버리지 말고 여러분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항상 주의 말씀을 따라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하십시오. 아브라함이 자식도 없는데 아브라함, 많은 민족의 조상, 사래를 사라, 많은 자식의 여주. 자식도 없는데 이미 말을 바꾼 것처럼 여러분도 항상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십시오. 그러면 그 길로 하나님의 성령이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꿈꾸고 꿈은 다 꿀수 있잖아요. 그리고 내가 믿기로 결심을 하고 그것은 우리 의지에 달렸으니까 믿기로 결심을 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하고 그러면 초자연적인 능력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바로 이와같이 예수님의 대속을 깨닫고 그 안에서 들어가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이 우리의 대속물이 되셨으니 그 대속물을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9절에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우리 위해서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그 열매가 우리 생활 속에 나타나야지요. 아무 목적도 없이 주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아니니까. 주님이 죽으신 열매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마음에 비춰져서 깨달음을 얻어서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H. Taylor) 가 중국 내지에서 개척하며 선교하고 있을 때 한 청년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신자가 되는데 몇 년이 걸립니까?” 테일러 선교사는 그 청년에게 “램프의 심지에 얼마 동안 불을 붙여야 빛을 발합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청년은 “그야 심지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 테일러 선교사는 청년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삶을 얻은 그 영혼에서 빛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몇십년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구주라고 깨닫는 그 순간에 빛이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거듭남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루터의 로마서 강해를 듣다가 성령을 체험하고 그의 신앙과 사역은 결정적인 전기를 맞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순간에 즉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들은 점점 빛을 받아서 그 구원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 구원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을 점점 더 크게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 믿고 턱걸이로 천당가기 위해서 구원받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지도를 받아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받은 것처럼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엄청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그것을 얻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야기만 듣고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고 그것을 꿈꾸고 믿고 말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깨닫는 것 참 중요합니다. 그 교회와서 성경공부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깨닫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음에 깨달으면 깨달는 데로 내가 그렇게 변한다고 상상할 수 있고 꿈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믿을 수 있습니다. 나는 변화되고 나는 저렇게 된다. 그리고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할 수 있지요. 나는 튼튼합니다. 나는 건강합니다. 나는 이쁩니다. 나는 사랑받습니다. 나는 성공합니다.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나는 못났어요. 나는 미움받아요. 환영받지 못해요. 나는 실패할 거에요. 나 같은 사람은 세상에 살 가치도 없어요. 그렇게 말을 하면 그 사람 팔자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기 앞날이 밝아질 것을 기대하면 큰일이지요. 그렇게 말하면 마귀가 그 말을 받아서 박수치고 춤을 추고 야단법석을 할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를 믿자마자 구원을 받지만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 여러분은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넓은 세계로 들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이미 성경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길이 생각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꿈꾸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더욱 30배, 60배, 100배로 향상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3. 우리의 정체성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냐.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질그릇 형편없는 질그릇입니다. 나의 질그릇 얼마냐. 과학자가 우리가 가치가 얼마나 하는지 분석을 해서 산소, 탄소, 수소, 칼슘 이것으로 다 계산을 해보니까 천원.. 한 사람의 물건값은 천원밖에 안돼요.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그 물건값으로 그렇게 따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계시고 주님이 보혈로 값주고 산 거대한 은총이 속에 있기 때문에 이것은 값으로 계산할 수 없어요. 이 질그릇 속에 엄청난 보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닫고 나면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볼 때도 귀하게 여기고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볼 때도 귀하게 여겨는 것입니다. 굉장히 하나님이 여러분 위해서 그 독생자를 주셔서 값주고 샀는데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배로 생각하는데 왜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늘 이 성경에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완전히 새사람이 된 보배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이 되고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님이 내 백성이라고 택하시고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왕노릇 한다. 여러분 환경을 지배하는 왕노릇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사장이 되고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인 것입니다.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리니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 우리 속에 이미 천국이 이루어졌는데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보배로운 사람인 것을 깨달아 알아야 돼요.
고린도후서 6장 9절로 10절에 이 말씀을 우리 소리내어서 읽어 보십시다. 하나, 둘, 셋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게 바로 여러분과 저인 것입니다. 무명한 자 같아도 유명합니다. 하나님이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 유명하잖아요. 시시한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 무슨 소용이 있어요? 하나님이 내 아들아, 내 딸아 알아주는데..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지요. 이러므로 우리 자신의 가치를 우리가 알고 그것을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이 뭐 예수 믿고 난 다음에도 환경이 안 달라지는데... 환경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달라지고 난 다음에 환경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로 11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환경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달라졌기 때문에 사방에서 우리를 우겨싸도 옛날 같으면 우겨싸이는데 싸이지 않아요. 옛날 같으면 답답한 일을 당하면
낙심할 것인데 이제는 낙심하지 않아요. 박해를 받아도 버림바 되지 않고 옛날에는 외로워졌는데 지금은 외롭지 않아요. 아무리 박해해도 즐겁고 기뻐해요.
발을 걸어서 망하게 해도 안망해요. 우리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말씀을 여러분께서 어렵지만 꼭 기억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라는 것은 십자가와 일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그러므로 예수님과 나와 분리해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이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를 쳐다보고 예수 죽음 내 죽음이라고 내가 확실히 시인을 하면은 예수부활이 내 부활이 되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것이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었습니다. 그러면 곧장 부활의 생명이 내 것이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생을 많이 하면 그리스도의 축복도 많이 오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힘든 일을 많이 하면 주님이 그것을 할 수 있는 더 많은 힘을 주시고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주님이 능력을 주시므로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가 쓴「파우스트」라는 책에서, 파우스트는 문학가이자, 법학자이고,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인생 문제에 부딪혀 마음에 심각한 고민을 하다가 결국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리고 자살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절의 종소리가 나면서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 문제로 내가 죽었고 나를 통하여 너도 죽었으니 내가 부활했는데 너는 왜 부활 못하느냐? 네 문제로 내가 죽었고 내가 부활했는데 왜 너는 부활 못하니?” 이것은 무슨 말이냐면 네가 예수 죽은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 생명도 나타날 것 아니냐. 왜 예수 죽음 내 죽음이 안되느냐? 네 문제로 내가 죽었다. 너도 나와 함께 부활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내 문제로 예수님이 죽으셨다. 그러므로 나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다. 이게 우리 신앙인 것입니다. 야~ 내 문제 때문에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죽어서 이미 다 청산했으니 이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내가 체험하고 산다. 우리가 매일 기도할 때도 부활의 능력으로 기도하고 찬송을 할 때도 부활의 능력으로 찬송을 하고 믿을 때도 부활의 능력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후, 파우스트는 기쁨과 소망을 얻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 기쁨 내 기쁨, 예수 소망 내 소망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가 뭐라 말해도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로서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신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깨달을 때 우리는 어떤 환경도 이겨내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방독 유리 상자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병균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삽니다. 그러나 이 모든 병균을 이기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자가 아닙니다. 내 속에 있는 예수님이 승리자인 것입니다. 예수 승리 내 승리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보배가 있고 심히 큰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무능하고 버림받은 인생이 아닙니다. 휴지쪽지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아십시오. 안믿는 사람과 나와 뭐가 다르냐.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느냐. 나의 신분은 어떠한 신분이냐.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을 알고 그에 따라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깨달은 빛이 여러분의 인생을 영원히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몸에 나타나는 예수의 생명
고후04장 7~10절 / 조용기목사
<서론>
오늘 저는 '우리 몸에 나타나는 예수의 생명'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일정 치하나 6.25 사변의 고난을 통해 본 사람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이 얼마나 고맙고 달고 감사한지 형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풍요의 시대에 태어난 그리고 자란 세대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을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감사와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옛날 고생하면서 산 것이 손해인 것 같으나 실제로 지나가 보면 그 배경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부요와 풍요를 감사하고 기쁘게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가 고파본 사람이어야 밥의 귀중함을 압니다. 밥이 항상 많은 사람은 원래부터 밥이 있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하지만 빈 밥그릇을 가지고 울어본 사람은 밥 한톨이 얼마나 귀한지 형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애들하고 밥을 먹을 때 밥풀 하나라도 다 주어 먹으니까 "아버지 왜 그렇게 주접을 떱니까? 그 밥풀 뭐 하러 주워 먹습니까?" "야 이것 먹어서 배가 불러서 먹는 것이 아니라 일정 말년에 육이오 사변 때 밥 한 톨이 얼마나 귀한지 눈물을 흘리며 밥을 먹었단다. 그때를 생각하니까 이 밥 한 톨이 얼마나 귀한지를 안다. 너희들은 말로써 설명해서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제가 그런 말을 여러 번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병이 들어봐야 건강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야~ 건강한 것이 얼마나 좋으냐. 환난을 당해봐야 평안의 귀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본론>
1. 우리 속에 있는 보배
우리는 우리 질그릇 속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정말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시느냐? 못 보았는데, 예수님의 음성도 못 듣고 체험 못했는데 이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고 하는데 보배가 어디 있느냐?"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의 그 보배를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고난을 당해봐야 아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할 때 고통당할 때 그 고통에서 기도하면 주님의 능력으로 해방을 시켜 주면 "야~ 주님이 살아 계시구나.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기도할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살아계신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저는 폐병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해봤기 때문에 치료하는 예수님을 깨달아 알고 그를 감사하고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내 건강했던 사람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지 안 고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체험을 안 해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믿음으로 살려니까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해봐야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주님이 그 우겨 쌓은 담을 헐어버리고 우리를 해방시키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4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고 능력 많으신 분이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알려면 적군이 와서 싸워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적군에게 지면 내속에 계신 예수님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적군을 이기면 내 속에 계신 예수님이 과연 능력이 계시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니 로페즈라는 여성은 47일 동안 혼수상태에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회생불능의 뇌사상태라고 말했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임신 4개월이었습니다. 그 운명이 아기의 운명과 함께 결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그녀에게 산소호흡기 등 생명 보조장치를 모두 떼도록 하고 임종을 기다렸습니다. 그 때 갑자기 그녀의 뱃속에서 아기들이 심하게 꿈틀거렸습니다. 이와 동시에 놀라운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뇌사상태였던 대니 로페즈의 뇌파가 갑자기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완전히 뇌파가 죽었는데 애기가 뱃속에서 발차고 몸부림을 칠 때마다 뇌파가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이 여인은 뇌사 상태에서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의사들의 예측을 깨고 무의식상태에서 건강한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이후 여인은 조금씩 의식을 회복하더니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깨어난 후 자신이 체험담을 기적의 순간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의식이 가물가물해 질 때쯤 뱃속에서 괴로움으로 요동치는 아이들의 태동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었고, 나는 절망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 순간 내 마음에 '너의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 너의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라는 소리가 울렸습니다."그녀는 이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살려 주셔서 이 애기들을 구조하여 주시옵소서.' 뇌는 죽었는데 그 영이 속에서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쉬지 않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 것입니다. 그녀가 뇌사상태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응답하셔서 아기를 순산하고 그 모친도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해결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보배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말하기를 "사람이 뇌사상태에 있어도 영혼은 살아있다는 것을 자기는 안다." 의학적으로 완전히 뇌가 죽었는데 뇌파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가 뱃속에서 꿈틀거릴 때마다 자기 속에서 자기 영이 고통을 당하며 '하나님 나와 어린 아기를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했고 응답 받았다. 이런 고통을 안 겪어본 사람은 뇌사상태에서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둠이 있어봐야 빛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있어봐야 생명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해봐야 그곳에서 해방시키는 주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 죽을 지경일 때 주님께 의지하여 해결될 때 '야~ 주님은 정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4절로 15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해봐야 답답한 일을 당해 죽을 지경일 때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면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그래서 나중에 다른 사람이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에 둘러 싸여서 절망일 때 '걱정하지 말아라. 해결하는 하나님이 계신다. 체험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여인은 화학물질에 중독이 되어 신체의 면역체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5년 동안 진공 상태의 치료실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죽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극심한 고통의 시기에 그녀는 한 가지 작은 목표를 세우고 씨름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매일 성경 한 구절을 읽고 일 분 간이라도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진공상태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그녀에게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말씀을 부여잡는 것뿐이었습니다. 결국 5년간의 투병 생활에서 회복되어 병원을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을 돕는 자선단체에서 일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내게 고통을 맛보게 하시고 그 가운데에서라도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부르짖어서 그 절망에서 낫게 해주셨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 얼마나 장애로 고통당하는 상태라도 도와줄 수 있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다는 것을 내가 깨닫고 장애인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제가 체험해 봐야 아는 것입니다. 자기가 먹어봐야 맛이 어떤지 알지 먹어 보지 않고 맛이 어떤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능력으로 해방될 때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또 핍박당할 때, 버림을 받을 때, 상상을 초월한 주님의 위로를 받을 때 주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4절로 5절에 보면 바울이 말씀하기를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 마음에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체험 하려면 큰 환난과 고난을 당해봐야 아는 것입니다. 환난과 고난을 안 당해 보면 환난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을 만한 위로와 평안을 주는 하나님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머리로 상상을 해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우리가 아시아에서 죽도록 고통을 당해 봤는데 그 가운데서 주님이 큰 위로와 평안을 받았으므로 위로와 평안을 주는 하나님을 깨닫고 너희에게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을 당해봐야 아무리 사람들이 핍박해도 주님이 우리를 끌어안고 품에 위로해 주시는 위로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위로가 있는 이상 아무런 핍박을 받아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거꾸러뜨림을 당해 망했을 때 잿더미 위에서 소생하고 부활 했을 때 창조적인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 아 원수가 와서 거꾸러뜨립니다. 집안을 거꾸러뜨리고 사업을 거꾸러뜨리고 생활을 거꾸러뜨려 버립니다. 완전히 망하고 잿더미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불사조같이 부활한 것입니다. 완전히 망했는데 돌아보니 전에 보다더 흥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면 망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절망에서 부활을 주시는 예수님이다. 이것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봐야 부활을 주신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왜 예수님이 죽으셨나요?" 죽으셔야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 죽으면 부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부활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안 죽었는데 어떻게 부활하는 것입니까? 다른 모든 종교지도자들은 훌륭한 말씀을 가르쳤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증명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날 죽여라. 사흘 만에 다시 살리겠다." 그래서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을 증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예수의 죽음이 무엇인지?
예수의 죽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놀라운 말씀이지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은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와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냥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지고 다녀야 된다. 그것도 일시적이 아니라 아침, 점심, 저녁 순간마다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녀야 되요.
그래야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죄, 불의, 병, 저주, 죽음을 짊어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걸머지고 예수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고 마귀와 세상에 대해서 죽고 병에 대해서 죽고 저주에 대해서 죽고 그리고 사망과 음부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분 사랑하는 부모라도 친자식이라도 죽으면 모저에 가서 묻고 살아있는 세계와 끊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르짖어 봐도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죽었습니다.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죄에 대해서 죽고,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죽고, 병에 대해서 죽고, 저주에 대해서 죽고, 사망과 음부에 대해서 죽었는데 이 예수를 우리가 항상 몸에 걸머지면 예수 죽음 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도 죄에 대해서 죽었고, 나도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죽었고, 나도 세상의 질병에 대해서 죽었고, 나도 저주에서 죽었고, 나도 사망과 음부에서 죽어서 관계가 끊어다. 마귀야 나와 상관없다. 죄야 나와 관계가 없다. 병아 나와 관계가 없다. 저주야 나와 관계가 없다. 사망과 음부야 나와 관계가 없다. 그 말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므로 다시 말하면 우리같이 예수와 함께 죽음을 걸머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철학이 아닙니다. 신학과 도덕의 훈련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 죽음을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수치를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인 것입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어서 장사지내 버리면 그 다음 하나님은 능력으로 부활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도 항상 죄와 세상과 병과 저주와 가난과 죽음의 공격을 당합니다.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이를 피할 수가 없어요. 어디에 가도 죄가 있고 세상과 마귀가 있고 병이 있고 저주와 가난과 실패가 있고 사망과 절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 살면서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이겨 놓았기 때문에 예수를 짊어지고 우리도 같이 그 이김에 동참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이김 내 이김, 예수 승리 내 승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걸머 지면은 면역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겼기 때문에 이긴 예수님을 걸머지고 있으므로 예수를 통해서 죄에 대해서 이기고,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이기고, 병에 대해서 이기고, 저주와 가난에 대해서 이기고, 사망과 음부에 대해서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걸머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겨울 초에 우리 교회 의사선생님에게서 독감주사를 두 번 맞았습니다. 독감주사를 맞았으므로 저의 몸에 면역이 있습니다. 독감주사를 안 맞은 사람은 감기에 들려서 콜록 콜록 콜록 해도 저는 담대하게 추운데도 걱정 없이 돌아 다녔었습니다. 면역이 되었으니까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내 면역에 잡혀 먹어 버리는 것입니다. 면역을 걸머지고 다녀야 되는 것입니다. 면역을 걸머지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죄 많은 세상에 마귀와 세속이 꽉 들어찬 세상에 병이 드글 거리는 세상에 저주가 꽉 들어찬 세상에 사망과 음부가 입을 벌리고 있는 세상에서 내가 살려면 면역이 되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내 속에 있어야 되는데 내게는 없어요. 주사를 맞아야 되요. 그 주사가 뭐냐. 예수의 죽음을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항상 생각하고 예수의 죽음을 항상 바라보고 예수 죽음 내 죽음인 것을 믿고 예수가 나와 함께 죽었다고 입으로 시인하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24시간 자나 깨나 예수 죽음 내 죽음을 생각하고 예수로 말미암아 나는 면역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죄가 와도 이기고, 세상과 마귀도 이기고, 병도 이기고, 저주도 이기고, 사망과 음부도 이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구원 받았는데 왜 그런 것들을 하나님은 내버려 놓고 우리를 공격하게 하느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공격해 봐야 내가 면역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을 봐야 "야~ 내가 예수 믿고 효과를 발생 하는구나" 알 수 있지 그런 것이 없는 곳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피해서 시온 성을 만들어 보자. 미국 시카고에서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가 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자기 믿는 사람들을 다 시온성이라는 곳을 만들어서 모았었습니다. 그러나 시온성에 들어오자 얼마 있지 아니하여 시온성이 죄악성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도 모시가 천년 성을 만들어서 천년성에 들어가면 천국같지 산다고 했는데 천년성에 들어가니까 죄악성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죄와 부패와 세상과 마귀와 질병과 저주와 고난과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피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를 왜 세상에 두었나이까? 원망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할 때 주여 저들을 보호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보호할 수 있는 길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면역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지 아니하고 교회에 왔다 갔다 해서는 면역이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으로 걸머지고 있으면 죄악에 들어가도 죄에 면역이 되어있고 세상과 마귀가 들끓어도 그것에 면역이 되어 있고 병이 들끓어도 면역이 되어 있고 저주와 가난도 극복할 수 있는 면역이 되어 있고 사망과 음부도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면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곳에 사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면역이 되어 있느냐 안 되어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문제는 머릿속으로만 종교적으로 예수를 믿느냐.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다니냐.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예수 죽음 내 죽음이 되어 있는 사람은 면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3절로 5절에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 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것이 예수님으로 면역된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 예수님의 거룩하심, 예수님의 치료, 예수님의 축복, 예수님의 생명이 눈에 보이도록 우리 속에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체험하게 되면 세상에서 체험해야지 빨리 죽어서 천당 가서 죄도 마귀도 세상도 없는 곳에 가야 되겠다고 부르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길 수 있는 면역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아일랜드의 한 청년이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사랑하는 약혼녀가 수영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는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의 늪에 빠졌습니다.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이 청년은 아픔의 장소를 피하기 위해서 캐나다로 이주를 했습니다. 캐나다에 가자마자 집에서 편지가 왔는데 어머니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기가 막혀서 죽고 싶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자기를 향하여 몰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 청년은 힘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흐느껴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 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세요. 응답해주세요.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결단하고 기도를 했는데 그리스도의 평화가 그 마음속에 넘치게 위로가 꽉 들어찼습니다.
그래서 자기 애인이 죽은 슬픔을 이길 수가 있고 어머니가 병들어서 죽게 되었는데도 마음에 위로와 평화가 넘쳐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연필을 들어 기록한 찬송가가 찬송가 487장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고통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아픔이 변하여 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향에 편지해서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는데, 중병을 앓던 어머니가 거짓말처럼 완전히 치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청년이 바로 조지프 스크리븐씨인 것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마귀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날 때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날 무대를 만드는 것밖에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와 치료와 평강과 생명을 더욱 강하게 체험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어려움이 다가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한번 불러 볼까요?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아멘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 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예수님이 우리의 진실한 친구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환난을 당해봐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 친구 다 날 버리고 떠나고 나는 외롭게 될 때 오직 안 떠나는 분이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은 환난을 당해봐야 아는 것입니다. 좋을 때는 모든 사람이 다 친구하려고 곁에 있고 다 찾아오지만 어려움을 당해봐야 진정한 친구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찬송가 작사도 자기가 환난을 당해봤을 때 비로소 엄청난 위로와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을 체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3.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질 때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질 때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한 위로가 다가오므로 오히려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난을 감사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죽음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이런 일을 당해봐야 예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북한이 갈려져서 북한과 대결하고 있다고 늘 원망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먼 것을 보고 감사해야 될 것은 우리 민족이 북한하고 서로 대결되어서 밀고 당기므로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대결되어 있지 아니하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인내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찌할 수 없이 사랑해야만 되고, 이해해야만 되고, 동정해야만 되고, 인내해야만 되고, 도와줘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배웁니까? 이런 상황에 처해야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인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혼자 살면 좋을 것 같아도 혼자 살면 정말 고집 부렁이가 되고 곰팡이 피고, 남의 의견을 듣지 않고 고집스러운 총각, 노처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살아봐야 서로 의견충돌도 하고, 서로 다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양보도 하고, 그래서 이해도하고 동정도 하고 인내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살므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좋은 인격적인 수양처소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하나님께 우리는 죄 있는 세상, 마귀와 세속적인 세상, 병이 있는 세상, 저주가 있는 세상, 사망과 음부가 입 벌리고 있는 세상에 살게 해준 것을 감사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면역이 된 것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이길 수 있는 능력의 신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바울이 말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내가 약해보니까 주님을 의지해서 얼마나 강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속에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이 내가 약한 데 처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것을 감사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원망 불평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날 무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종로에서 부흥회를 열었는데 그때는 육이오 사변이후 회복 된지 얼마 안 되어서 황무지였었습니다. 천막부흥회를 하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구원을 받고 병자가 쏟아지게 나았었습니다. 어느 훌륭한 목사님이 내게 와서 "조용기 목사님 안수 좀 해주십시오." 무슨 안수냐니까 "나도 폐병 들렸다가 낫게 안수해 주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우리 아버지가 잘 살았어요. 나는 아무 돈 걱정 없이 건강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교회도 아버지가 지어주셔서 걱정 없이 목회하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이 살아 계신지 안살아 계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니까 목사님은 폐병으로 피를 토하고 죽음에 이르렀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살아났으니 예수님이 뚜렷하잖아요. 역사적인 예수님이 아니고 형상적인 예수님이 아니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체험했기 때문에 담대하게 설교하는데 나는 그렇게 설교할 수 없어요. 그러므로 내게 안수해서 나도 폐병 걸려서 피를 토하고 안 죽을 만큼 고통 하다가 죽지는 말고 살아나도록 기도를 해 주십시오." 정말 올바른 말입니다. 저는 폐병이라는 고통스러운 무대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서 그 체험에 서서 담대하게 50년을 목회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은 오히려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날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함순(Hamsun, Knut)은 노르웨이의 작가로서 192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릴 적과 청년 시대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채석공 등으로 일하며 고난의 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서 전차 차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고난의 생활을 통해 많은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소설로 쓴 것이 「굶주림」입니다. 이 책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읽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함순이라는 이름이 온 미국에 알려지고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과거에 가난했던 과거의 고통을 바탕으로 쓴 「토지의 성장」이란 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탔습니다. 이 함순이 얼마나 고맙게 생각해야 될 것은 옛날에 돌이나 찍어내고 전차차장이나 하고 막노동을 했기 때문에 그 체험으로 소설을 적어서 세계적인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 체험이 없었으면 평범한 생활을 했으면 그와 같이 영광스러운 상을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단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감사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토대로 해서 큰 영광을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이기는 은혜를 주님은 우리 모든 생활에 넉넉히 주시므로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8절로 9절 우리 다같이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바울선생에게 말씀한 것입니다. 너무 바울선생이 허약해서 세 번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허약을 물리쳐 달라고 그러니까 주님이 "이 사람아 네가 허약하기 때문에 내가 강하다는 것이 나타날 수가 있다. 네가 힘이 있으면 나는 나타날 곳이 없지 않느냐. 네가 허약할 때 내가 강하다." 그 말을 듣고 바울선생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허약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 있고 나타나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아직 어린 신자들은 조금만 고통이 다가와도 부르짖습니다. "이 고통을 면해 주십시오.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십시오."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그런 고난과 괴로움이 다가올 때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주의 종들이 교회성장을 원합니다. 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내 체험을 통해서.. 큰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크게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큰 고통을 당해서 큰 은혜를 체험해야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이 말씀하기를 사망은 내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고 내가 사망을 체험한 만큼 예수의 생명을 체험해서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 안당해본 사람이 고통에서 건지는 예수님을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병 안 나은 사람이 치료한 예수를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배고프지 않는 사람이 밥을 주는 예수님을 증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내속에서 역사해야 생명이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고 말했습니다. 큰 교회를 하자면 큰 은혜를 받아야 되고 큰 은혜는 그냥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산이 높아야 골이 깊습니다. 은혜는 물처럼 깊은 밑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많이 고통을 당하고 가슴속이 파헤쳐져야 은혜의 물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늘 말합니다. "큰 목회를 하려고 하는 것은 좋지만 얼마나 많은 고통으로 가슴이 파헤쳐지고 슬픔 울음을 울고 탄식을 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구나."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가 고통이 다가오면 감사할 것은 은혜를 담기 위해서 하나님이 불도저로 밀어 재끼고 크레인으로 바위를 옮겨주고 마음을 파헤쳐 주는 것입니다. 우물을 파야 물을 고일수가 있지요. 우물을 파지 않고 물을 고여지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물을 파서 물이 고여야 자기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온 동네사람이 다 와서 마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고난당하면 여러분 자체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여러분이 은혜를 체험하고 많은 사람이 은혜의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나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고난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바울 선생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의 종이 된 것은 그가 가장 많이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은혜가 충만하게 넘친 우물이 되어서 온 세계가 마실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주님은 넉넉히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고난 속에서 이겨야 사람이 그리스도의 빛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가 세상에 미숙아로 태어나면 인큐베이터 안에 넣습니다. 병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인큐베이터 안에 넣어서 10개월이 차도록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인큐베이터 안에 넣어서 자라기를 원치 않습니다. 당당히 나와서 병균과 싸우고 역경과 싸워서 이기는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지 보호의 인큐베이터 속에서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 죄와 싸워서 이기고 세상과 마귀를 대항해서 이기고 병을 이기고 저주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승리자를 원하지 약해 빠져서 인큐베이터의 보호를 받고 햇빛도 못비추고 집밖으로 못나가는 이러한 약해빠진 신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싸워서 이기는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걸머지고 나가서 싸워 이기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아버지가 사랑하므로 여러분을 버리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해서 예수의 죽음을 여러분에게 걸머지게 했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께서 어떠한 것이 오더라도 이길 수 있는 힘을 갖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는 이 글을 읽고 굉장히 마음에 감동을 했습니다.
미국의 한 병원에서 일어난 일인데 열여섯 살 된 소녀가 신장 신우염으로 신장을 이식해야만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 신장을 조사해 본 결과에 아버지의 신장이 그 몸에 맞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기쁘게 그 열여섯 살 먹은 딸에게 신장을 떼 주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몇 년이 지나자 그 소녀의 신장에 또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또 신장을 떼 내서 이식을 하지 않으면 살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장을 찾을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병원에 와서 "내 나머지 신장을 어린 아이에게 떼 주십시오." 그래서 의사협회에서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안 됩니다. 신장하나를 떼 주었는데 마저 나머지 신장을 떼 준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떼 줄 수 없습니다. 이는 윤리강령에 어긋납니다." 그 아버지가 윤리위원회에 나가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윤리와 도덕보다 앞선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윤리와 도덕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윤리와 도덕이 올바릅니다. 옳습니다. 신장을 두 개 가졌는데 하나를 떼 주고 하나마저 떼 주려고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나는 죽더라도 내 나머지 신장을 내 딸에게 떼 주기를 원하니 내 심정을 알아주십시오." 그 윤리 위원회가 숙연해졌습니다. 추후 결정하기를 아버지 마지막 신장을 떼 주고 아버지는 평생을 피를 걸러내는 투석기에 의지해서 살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마지막 신장을 떼 주어서 그 소녀가 살아나고 그 소녀는 정식 교육을 마치고 행복하게 결혼해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자녀 손을 놓고 아버지에게 병원을 늘 찾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남은 평생을 기계에 의지해서 피를 걸러내며 살다가 죽어도 조금도 후회함이 없이 세상을 떴다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의 아버지도 자기 마지막 남은 신장을 자기 친딸에게 떼 줍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내 마음속에 굉장한 질문을 했습니다. '조용기 너는 그렇게 하겠느냐?' 좋은 아버지면 별도리 없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가 육이오 사변 때 부산 매축지에 살았는데 석탄을 실은 기차가 많이 지나가면 피난민들이 석탄차 위에 올라가서 석탄을 끌어 내렸습니다. 그러면 군인들이 와서 총을 쏘고 석탄 훔치는 사람을 잡았습니다. 저도 석탄 훔치러 갔습니다. 그때는 석탄 없이는 못살아가니까 한 끼라도 먹을려고.. 그런데 피난 온 한 40대 아버지가 한 10살 된 아들을 데리고서 남아를 했어요. 오다가 폭탄을 맞아서 가족은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아들이 올라가서 석탄을 막 끌어내면 아버지는 주워 담는데 기차가 위에서 헌병이 뛰어 오니까 전부다 뛰어 내리는데 그 아들이 뛰어 내리지 굵은 석탄 덩어리 하나가 화차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애가 그것을 끄집어내려고 화차 밑에 기어 들어가자 기차가 덜커덕하고 움직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이! 저 어째! 저 어째!" 고함을 쳐도 아무도 그 아들을 끄집어내려고 하지 않았는데 비호같이 뛰어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40대의 아버지가 철로 밑으로 화차 밑에 뛰어 들어가서 아들을 밀어내고 기차 바퀴가 그 허리를 지나갈 때 허리가 부러지는 소리가 뚝 뚝 뚝 나는 것을 내가 들었습니다. 그 아버지 눈에 눈물이 뚝뚝 흐르고 코에 콧물이 주루룩 흐르면서 죽어 가면서도 어린 아이를 보고 빨리 피하라고 손을 이렇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학생 시절이니까 '저 바보 봐라. 장가가서 또 낳으면 될 것인데 왜 그 아들을 위해서 죽느냐. 장가가서 낳으면 될 것 아니야. 그 아들 때문에 왜 죽느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제가 장가를 들고 자식을 낳고 난 다음에 늘 생각했습니다. '네가 그 입장에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윤리와 도덕, 생명의 존엄 뭐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살려 놓고 보자.' 사랑은 맹목적인 것입니다. 내라도 뛰어 들어갔을 것입니다. 살려놓고 후에는 어떻게 될지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 계산하면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엄청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아들조차도 아버지를 향해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통곡을 했습니다. 이런 일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묶임을 받아 강요를 받아서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큰 사랑으로 지금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서 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면역을 해주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여러분께서 항상 걸머지고 사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있습니까? 몸서리치게 높고 깊은 넓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떤 마귀가 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주어지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셨으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수룩해 보이면서도 강한 크리스천
고후 4장 절 / 최영기목사
저희 교회를 방문하신 분들이 저의 인상을 말할 때에 배추 장사 같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습니다. 내가 진정 크리스천이 되어가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천이 된다면 좀 어수룩해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을 살펴서 남에게 어수룩한 인상을 주고 있으면 괜찮은 크리스천이 되어가고 있다는 의미이고 그렇지 않다면 신앙생활에 좀 문제가 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크리스천 들은 어수룩해 보이지만 강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좋은 예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과의 문제가 생기고 있는 주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도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위엄도 있었고 영적으로도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강조해야했고 참된 영성이 어떤 것인지 고린도 전서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자면 어수룩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은 이름조차 남지 않았지만 사도 바울은 세계를 복음화 하는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이지만 복음 혹은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을 이것을 보화를 모신 질그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7절). 우리는 값싼 질 그릇이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 별로 값져 보이지를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복음이 있고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어수룩해 보이면서도 강한 사람이 되는 비결을 발견합니다.
Ⅰ. 진실을 단순하게 말한다
어수룩해 보이면서도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서는 진실을 솔직하게 말하여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단순하게 복음을 전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4절). 이러한 복음을 듣고서도 믿지 않는 사람은 복음을 몰라서가 아니라 사단이 이해를 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수사학이 발달이 되어서 현란하고 복잡하게 말하는 것이 지식인의 표징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진솔하게 복음만 전했습니다(고전 2:1-2). 왜 그랬을까요? 진실을 단순하게 말하는 것이 어수룩해 는 보일지 모르지만 힘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설교를 잘 한다는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철학자와 사상가를 인용하고 논리적인 설교를 하십니다. 설교를 잘한다는 칭찬도 자신도 설교를 잘 하는 사람으로 자신하지만 많은 경우에 그런 교회에서 믿지 못할 사람들이 믿고 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변하는 역사를 목격하는 것은 힘듭니다. 힘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힘있는 교회를 보면 목사님이 설교는 잘하지는 않지만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을 봅니다.
1. 복음을 단순하게전한다.
우리는 진실을 단순하게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할 때에 진실을 단순하게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지금은 다원주의 시대입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 독선적인 사람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은 숨겨진 욕구 때문에 그러는지 모든 종교는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마음이 넓은 사람, 지성인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똑똑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지 모르지만 힘이 없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교회나 교단에서 믿지 못할 사람들이 믿고 변하지 않을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목격하기가 힘이 듭니다. 이런 역사는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 받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사실 모든 종교는 다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말하기는 사람들을 저는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요 14:6)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이라고 하면 어떻게 주님의 말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예수님을 배척하든지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면 이러한 예수님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어수룩해 보이고 무식해 보일지 모르지만 진리를 단순하게 말할 때에 거기에 힘이 나옵니다.
2. 단순하게 옳고 그름을 말한다
현대는 다원주의 사회일 뿐이라 상대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죄를 말하면 전근대적인 것 같고 무식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세상의 상대주의를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동성애가 죄라고 분명이 성경이 말하는 데에도 죄가 아니라고 하고 동성애인을 갖고 있는 사람도 목회자로 안수해야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 교회나 교단을 보면 힘이 없습니다. 믿지 못할 사람이 믿고 변하지 못할 사람이 변하는 역사를 보기가 힘이 듭니다.
죄는 궁극적으로 파멸을 가져옵니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자유로워지고 진정한 기쁨을 맛보도록 하기 위하여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무식하다, 독선적이라는 평을 듣는다할지라도 죄는 죄라고 말해야 합니다. 결혼 전에는 성 관계를 가지면 안 된다든지, 크리스천은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 세금 포탈하면 안 된다, 가짜 물건을 팔면 안 된다.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 궁극적으로 상대방을 위한 것입니다. 죄를 죄라고 분명히 말해주어야 회개할 수 있고 죄에서 자유스러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사랑의 마음을 갖는다
진실을 단순하게 말하자면 사랑이 우선해야합니다. 크리스천이 진실을 단순하게 말하면서도 원하는 결과보다 부정적인 결과를 심어주는 것은 사랑보다는 분노에서 하기 때문입니다. 낙태는 태아를 살해하는 것입니다. 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낙태를 실시하는 시술소에 방화를 한다든지 의사를 총을 쏘아 죽이는 것은 안 됩니다. 낙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임신모를 돕고 미혼모에게 태어난 아기를 양입하여 사랑을 보여야합니다. 이때에 비로소 죄를 죄라고 말하는 것이 치유와 자유를 가져옵니다.
동성애도 죄라고 정죄만 하지 말고 동성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주고 AIDS로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아줄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아직은 그런 사역을 할 만한 준비가 안 되었지만 앞으로는 그런 사역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년을 가정 교회를 통한 영혼 구원에 집중하였고 앞으로 10년을 선교를 통한 이방 종족의 구원에 집중하고 다음 10년은 자연스럽게 그런 사역을 통하여 지역 공동체를 위해 일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죄를 지적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낫습니다.
Ⅱ. 매일 죽는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십자가가 있다고 말합니다 (10-11절).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죽은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큰 목회를 하시는 목회자들을 보면 죽는 경험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다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도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를 섬기는 조용기 목사님도 질병으로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온 누리 교회를 담임하는 하용조 목사님은 제가 보기에 진정한 비전의 사람입니다. 남이 못 보는 것을 미리 보고 남보다 항상 앞서 가십니다. 이분이 우리나라에 QT를 보급했고 경배와 찬양을 도입했습니다. 이분은 간암으로 몇 번들 죽음의 문턱까지 갖다가 다시 살아나곤 했습니다. 저는 이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큰 목사는 못될 것 같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죽음의 경험이 선행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눅 9:23). 죽음이란 반드시 육신적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어야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39).우리에게는 목숨만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포기하는 것이 죽은 것입니다. 자신의 꿈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주님의 소원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비전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주님의 뜻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지하리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을 때에 그 삶에서 부활의 능력이 역사합니다.
저 자신이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목회자로 부르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을 때에 많이 저항을 하였습니다. 당시 주위에 보면 많지도 않은 성도님들을 모시고 힘들게 목회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분들과 대화를 나누어보면 나보다도 훨씬 신실하시고 평신도일 때에는 당시 저보다 더 열심히 섬기셨던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보다 훨씬 자질이 떨어진 나 같은 사람이 목회자가 되어서 무엇하느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지금은 교인들의 필요가 다양해져서 담임 목사 한 사람으로는 그 필요를 다 채워줄 수가 없다. 그런데 목회 길에 들어서는 사람은 다 담임 목사가 되어서 목회 꿈을 이루어보려고 한다. 이제는 남이 알아주거나 유명해 지는 것을 포기하고 담임 목사 그늘 밑에서 오직 성도들만을 위하여 섬기는 부목사나 교육 목사가 필요하다. 내가 너에게 가르치는 은사와 상담의 은사를 주었다. 나는 너를 교육 목사로 부른다.” 그래서 순종하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렇게 결심을 하였을 때에 우습게도 가장 서운했던 것이 이제는 비행기를 더 타지 못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일할 때에는 세미나나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하여 비행기를 탈 기회가 자주 있었습니다. 이럴 때에는 좋은 호텔에 묵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기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교육 목사로써 헌신을 하고나면 이런 것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임 목회를 해야 다른 교회에서 강사로 모셔가지 교육 목사를 누가 모셔가겠습니까? 목회자끼리는 부목사나 교육 목사라고 하면 약간 깔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악수를 나누어도 교육 목사라고 하면 상대방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명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주를 위하여 유명해지는 것을 포기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죽기를 결심하니까 살게 된 것입니다.
제 인생에서 부족하지만 주님의 소원을 위하여 나의 꿈을 접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주님이 저를 사용하여 주셨고 남에게 칭찬받는 서울 침례교회를 목회하는 영광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꿈이 없고 야망이 없고 비전이 없는 사람들을 세상에서는 우습게 생각하지만 이러한 것을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의 소원으로 채웠을 때에 강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Ⅲ. 영적인 실체를 본다
남에게는 어수룩하게 보이지만 강한 사람이 되려면 영적인 실체를 보면서 살아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 집중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실체에 시선을 고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8절).현실을 보지 않고 영적인 실체를 보면서 사는 사람은 좀 모자라 보입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부부 중에서 한 쪽이 더 영적인 경우에는 배우자가 염려를 합니다. 남편이 영적인 경우에는 아내가 염려를 합니다. 저렇게 구름을 먹고 사는 사람처럼 살다가 이러다가 가족들 굶기는 것이니 아닌가? 아내가 영적이면 남편이 염려를 합니다. 저렇게 현신을 모르다가 나라도 죽으면 어떻게 하려는가? 그러나 영적인 실체를 보면서 사는 사람이 실제로는 강한 사람입니다.
우선 외모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재미난 말을 합니다. 겉 사람은 낡아가지만 속사람은 새로워진다고 말을 합니다.(16절). 저는 외모에 관심이 별로 없는 편인데도 타지에 가서 전에 알던 사람들을 만났을 때 “아유 목사님 많이 늙으셨어요!”(이런 말은 왜 하는지!) 그러면 썩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외모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얼마나 더 허무를 느끼고 얼마나 영향을 받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영적인 실체에 집중을 하고 외적인 미보다 내적인 미에 집중하는 사람은 나이에서 오는 허무나 사람들의 평가에서 오는 실망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내적인 미에 의하여 점점 더 아름다워질 수가 있습니다. 세월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 강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실체에 집중할 때에 고난이나 환난 앞에서도 쉽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고난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도록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17절에서 영원한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제가 종종 인생은 3생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모태에서 9개월이 1생, 모태에서 나와서 천국가기 전까지 약 90년의 삶이 2생, 그리고 천국에서는 삶이 3생입니다. 모태에서의 1생이 제 2생의 삶을 준비하는 삶이라면 이 세상의 삶이 제 2생은 제 3생을 준비하기 위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제 2생인 이 세상의 삶은 그리스도 닮게 만드는 연습장입니다. 최종적으로 얼마나 변했느냐 그 모습을 갖고 제 3생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제가 생명의 삶 강의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천국에 가서 천국을 얼마나 즐기냐의 정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으면 닮을수록 천국을 더 즐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이 남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실체를 알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더라고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약 1:2).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어수룩한 것 같지만 강한 삶입니다. 환난을 당해도 곤경에 빠지지 않으며, 난처한 일을 당해도 절망에 빠지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을 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8-9절). 왜냐하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를 통하여 크신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7절). 이러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삶은 세상 사람이 보기에는 어수룩해 보이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이 강한 삶인 것을 알고 내 힘을 의지하지 말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강한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쓰레기통과 보배함
고후 4:1-12 / 조용기목사
<서론>
“쓰레기통과 보배함”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사람은 원래 스스로 살도록 지음을 받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이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아담과 하와를 성전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그릇 속에 쓰레기로 채워놓거나 보배로 채워놓거나 무엇이든지 채워 놓아야 합니다. 타락한 이후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 놓을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시고 쓰레기로 꽉 들어찼습니다. 마귀와 세속으로 인간 속에 꽉 들어찬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마귀의 거처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으니 얼마나 비참한 일인 것입니까? 어떠한 것이 인간을 쓰레기통으로 만듭니까?
<본론>
1. 쓰레기통 인간
세상 문화와 풍속을 따르는 악한 쓰레기통이 되는 이유는 이 세상은 다 마귀에게 속하고 온 세상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거역하여 탐욕과 욕심과 오만과 교만 속에 꽉 들어차 있는 것입니다.
성경 에베소서 2장 2절로 3절에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귀는 오늘날 사람들 속에 들어와 있으려고 노력합니다. 거라사인의 케이스를 보면은 한사람 속에 마귀를 쫓아내니까 약 2천마리의 돼지떼 속에 들어가서 2천마리가 다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죽어버리고 만것입니다. 한사람 속에 들어있는 마귀의 수가 돼지 2천마리 속에 들어갈만한 수가 들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마지막 남긴 유언이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항상 귀신을 쫓아냅니다. 귀신을 쫓아내기 전에는 어떤 때는 마음이 굉장히 무겁고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왜 내 마음이 무겁고 괴로울까? 왜 몸이 이유없이 고통스러울까? 아~ 마귀가 또 억압을 하는구나. 마귀가 오면은 훼방을 하든지 억압을 하든지 마음을 짓눌러 우울하게 만들든지 인생에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그 자리에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원수 귀신아 나가라! 나가라! 하면 한번만에 안 떠나갑니다. 제일 처음에는 이 놈들이 모른체하고 가만히 있습니다. 없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래도 몸이 마음에 억압이 떠나지 아니하면 계속해서 쫓아내면 나중에 마귀가 떠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놈 떠나고 두놈 떠나고 세놈 떠나고 억압한 마귀가 떠나가면 떠나갈수록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나중에 다 떠나면 다 떠난 것을 확실히 압니다. 마음이 상쾌해지고 아주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몸의 억압도 사라지고 마음의 우울함도 사라지고 부정적인 생각도 사라지고 건강을 회복해서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어갈 수 있고 아침에 깨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제일 먼저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가 내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라. 오늘 우리 교회가 그것을 등한이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그것을 등한이 하고 있기 때문에 쓸데없이 억압을 당하고 우울하고 슬프고 부정적이고 파괴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마귀가 안들어온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마귀가 와서 훼방을 하고 누르는 것입니다. 안믿는 사람은 아예 마귀가 점령하고 있으니까 더 이상 누를 필요도 없고 훼방할 필요없습니다. 안믿는 사람이니까 완전히 점령했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근처에 못오니까 기회를 타서 언제나 와서 억압을 하고 점령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여러분 항상 귀신을 쫓아내십시오. 여러분은 쫓아낼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쓰레기통 인생이 되어 그대로 내버려 놓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다큐멘터리“환경 스페셜”이란 것을 보고서 정말 놀랬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우리나라 해안가에 쓰레기더미들이 밀려 쌓여있는데 그 쓰레기들이 얼마나 먼 곳에서부터 왔는지 아랍 글씨가 써진 봉투, 중국말이 적혀있는 쓰레기, 일본 등 세계 각국의 쓰레기들이 한국해안에 밀려와 있어요. 우리나라의 쓰레기도 일본이나 태평양 너머로 가고 있고, 일본 쓰레기는 남태평양 섬들에 쌓여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지난 여름, 일본의 쓰나미 이후 바닷물이 빠져나간 일본 국토는 온갖 쓰레기통으로 쌓였습니다. 우리나라도 태풍이 한차례 몰아치고 난 이후, 강이나 바닷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쓰레기더미인 것입니다. 평소에는 푸르고 아름답고 흠과 점이 없어 보이는 바닷물이 일단 나가고 나면 그 밑에 있는 쓰레기통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밑바닥에는 엄청난 쓰레기들이 쌓여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아~ 우리 마음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마음이 겉으로는 말갛고 온전하고 깨끗한 것 같은데 마음의 밑바닥 속에는 온갖 세속과 더러운 것이 쌓여있는 것입니다. 세상 문화와 풍속을 따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 채워진 쓰레기통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죄악과 부패로 채워진 쓰레기통이 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십계명을 비춰보면 알수 있어요. 그냥 안보이는 것도 확대경을 대고 보면 보이는 것처럼 십계명을 우리 마음속에 비춰보면 우리 마음속에 어떤 쓰레기가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성전에서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자를 끌고온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 교법사들이 예수님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으니 성경에는 돌로 쳐 죽이라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자꾸 물을 때 예수님께서 엎드려서 글을 적었습니다. 뭘 적었느냐.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쓰레기가 들어날 수 있도록 십계명을 적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 어깨로 예수님 손가락이 적어가는 십계명을 내려다보고 몸서리를 쳤는데 주님께서 얼굴을 드시고 한사람 한사람 보시고 너희 가운데 죄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쳐라. 그말 한마디가 그들 영혼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을 통해서 그들 죄가 다 드러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두다 돌멩이를 내버려 놓고 한사람 두사람 피해버리고 말았는데 십계명에 보면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내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을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계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 마음속에 비춰보면 쓰레기가 마음의 바다에 깔려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고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인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확대경인 십계명을 마음속에 비춰보면 죄악과 부패로 채워진 쓰레기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탐욕으로 채워진 욕심의 쓰레기가 마음속에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시편 10편 3절에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야훼를 배반하여 멸시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로 15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가장 우리를 넘어뜨리게 하는 것은 마음에 욕심과 탐심과 교만과 오만의 쓰레기인 것입니다. 교만과 오만이 들어오면 다른 사람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만 인정받고 자기말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만나면 부딪힙니다. 마음에 욕심과 탐심이 있으면 자기의 분수 이상의 것을 쥐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하고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교만과 오만의 쓰레기통을 청소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시편 10편 4절에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야훼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교만한가 안한가 보려면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가 안기울이는가 그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충고를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다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해버리면 무엇이라고 말해도 그 사람 교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충고를 들어서 자기를 비춰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충고가 마음에 괴롭더라도 그것을 듣고 비춰보고 회개하고 깨달으면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과 오만의 쓰레기통을 제켜야 마음에 평안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 속에는 쓰나미가 밀려와서 쓰레기를 남겨놓고 간 것처럼 세상의 시험과 환난이 지나고 난 다음에 수없이 많은 쓰레기를 우리 가슴속에 파묻어 놓고 가는 것입니다. 이 쓰레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마음속에 썩은 냄새가 나고 불안과 공포, 좌절과 절망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은 이 쓰레기를 청소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쓰레기를 잔뜩 담아 있으면 결코 평안과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쓰레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그 마음이 보배함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보배함이 된 인간
쓰레기가 치워지고 보배로 가득찬 보배함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러느냐. 예수님의 구원으로 채워 놓으면 마음이 보배로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로 17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니고데모가 예수께 나올 때 예수님이 니고데모 보시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하니까 니고데모가 깜짝 놀랬습니다. 평생을 율법을 공부한 니고데모가 내가 나이가 이렇게 많고 머리가 백발이 된 사람이 거듭나자면 어떻게 합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됩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네게 거듭나야 되겠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나와서 지나갈 동안 생활이 어려우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이 노하셔서 불뱀을 보내서 그들을 물어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나와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뱀이 물러가게 해달라고 할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불뱀을 놋으로 만들어가지고서 장대 높이 달라. 쳐다보는 사람마다 고침을 받으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뱀의 독이 올라서 퉁퉁 부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장대에 높이 단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마다 즉시로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비유해서 인자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들려야 하겠다. 세상 뱀의 독에 물려서 죽어가는 사람이 나를 쳐다만 보면 고침을 받게 하겠다. 구원을 받게 하겠다. 오늘날 우리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기만 하면 용서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온 것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세상이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2천년 전에 사랑했으니까 우리가 하나님 사랑할 여가가 없을 때 하나님이 벌써 우리 사랑하신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빈손들고 나가도 기쁘게 받아주신 것입니다. 언제나 저는 예수님의 좌편강도, 우편강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둘이다 흉악한 강도 아닙니까? 살인죄에 방화죄를 지은 흉악한 강도로써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데 그 중에 한 강도는 예수님을 무시하고 비난했으나 다른 강도는 예수님 주의 나라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 그 자리에 주님 대답하셨습니다.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때 우리가 그 상황을 보면 이 강도는 회개할 시간도 없었고 교회갈 시간도 없었고 세례받을 시간도 없었고 도무지 신앙생활을 할 시간이 없는데 오직 신앙고백만 했습니다. 주님 나라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 주님께서 그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든 그대로 고백할 때 받아들여서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면서 같이 못박힌 예수를 바라보자마자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든 그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만 하면은 구원의 손길이 임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았으니까 이제 자기 쓰레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쓰레기통을 소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마귀를 대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통회하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구원도 받기 전에 회개하고 통회하려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회개하고 통회하냐고 반항하고 달라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으로 채워 놓으면 여러분 우리 속에 보배가 채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속에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보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의로움이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모든 우리의 허물이 사해지고 성령충만 거룩함이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병의 더러운 것은 떠나가고 치료받고 건강의 보배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저주를 통해서 우리의 저주를 제하여 주시므로 저주받고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가난하고 못사는 것은 사라지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의 보배가 쌓여지는 것입니다. 죄값은 사망으로 죽어서 멸망할 썩어진 것이 사라지고 부활, 영생, 천국의 보배가 쌓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우리 속에 상상을 초월한 보배가 쌓여지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희망과 꿈이 가득하게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여러분과 나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희망을 가지십시오. 제일 무서운 것이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마귀가 사람에게 오는 것은 무엇을 도둑질 하느냐. 먼저 희망을 도적질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빼앗으면 절망이 들어오게 되면 죽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으면 어떠한 어두운 밤도 밝은 빛으로 찾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희망을 가진 사람은 마음 속에 내일에 대한 꿈이 생기는 것입니다. 꿈이 생긴 사람은 신념이 생깁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담대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산다. 승리한다. 복받는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희망의 보배로써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희망이 생기면 십자가를 통하여 의로운 보배, 거룩함의 보배, 치료의 보배, 축복의 보배, 영생복락의 보배가 가득히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보배로써 마음을 채워 놓아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보배가 있는 사람은 그 다음에는 믿음과 순종으로 채워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음과 순종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살아계신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예수님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신학을 공부하므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놓쳐 버리고 철학과 학문을 공부하고 종교를 공부하다가 현재 살아있는 예수님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지식을 너무 추구하다가 살아있는 예수님을 잃어버릴 때가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아니시오 이스라엘 땅에 계신 예수님이 아니시오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지금 대한민국 여의도순복음교회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입니다. 지금 내 속에 와 계십니다. 현재 역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므로 동일한 역사를 여러분에게 지금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 주시고 지금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시고 눈이 어두운 자에게 다시 보게 해서 하늘나라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고 지금 마귀에게 억압된 자를 놓여 자유롭게 해주시고 지금 은혜의 복음을 전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예수를 만나는 것이 여러분 인생에 가장 행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쓰레기더미에서 건져 나와서 보배창고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쓰레기가 예수로 말미암아 다 청산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배로운 축복이 가득가득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순종으로 그리스도를 모셔들이는 우리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성경공부하므로 말씀의 보배가 마음 속에 가득가득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오면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로 17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하나님을 어디에서 만나느냐. 말씀 속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곧 말씀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 이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으므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우리가 용서하는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서 만나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성령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를 병고쳐주는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를 환난과 시험에서 건져주는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를 영생복락 천국을 주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만나는 것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한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만나면 담대하게 선언할 수가 있어요.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나니 저는 나를 새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새사냥꾼의 올무에서 건지시는데 우리가 어릴 때는 사람들이 좀처럼 고기를 먹을 수 없습니다. 소고기나 돼지고기는 절대로 먹을 수 있는 처지가 못됩니다. 뭘 먹느냐. 겨울에 새를 잡아 먹습니다. 새를 어떻게 잡느냐 하면 지게 위에 사리로 만든 바지게라고 해서 물건 담기 위해서 이렇게 만든 그릇이 있습니다. 그것을 세워 놓고 그 밑에다 이런 지푸라기를 잔뜩 갖다놓고 낱알을 갖다 놓고 거기에 나무로 이렇게 씌워서 바쳐놓고 돌멩이를 그 위에 잔뜩 얹어놓고 새끼를 쭉 당겨서 방안에 딱 앉아가지고서 창문으로 딱 보고 있으면 새들이 많이 날라와서 그 속에서 막 짹짹 거리고 파헤치고 뭘 먹을 때 탁 잡아당깁니다. 그러면 바쁜 놈은 날라가지만 둔한 놈은 다 그 바재기 밑에 눌리면 뛰어가서 그 위에서 막 밟습니다. 그때 보면은 눈알도 튀어나오고 날개도 찢기고 다리도 부러지고 그러면 그것을 뜯어가지고서 씻어가지고서 소금을 쳐서 불에 구워 먹으면 정말 맛있다구요. 요사이 어떤 불고기보다도 맛이 있습니다. 이 새사냥꾼의 올무인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그렇게 잡아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되 새사냥꾼의 올무에 우리를 꾀들어가지고서 탁 잡아당겨서 치워서 죽이려고 하는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사냥꾼의 올무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극한 염병, 급한 염병 걸리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견딜수 없는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 약속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약속을 입으로 시인하면 그 약속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 계셔서 그 말씀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여러분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내가 어려울 때마다 외우는 것이 참 좋고 찬송이 왜 좋느냐. 아무리 말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도 찬송할 때는 소리를 내서 부르지 않습니까? 찬송가의 말씀은 다 성경에 뿌리를 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을 많이 부르면 굉장히 은혜가 되고 찬송이 흑암의 세력에서 우리를 건져내는 능력을 나타내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채워지면 우리가 보배함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 속에 자연적으로 희망찬 꿈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생각이 있어요. 우리에게 재앙을 주는 생각이 아니라 평안을 줄 생각이요. 장차 희망을 줄 것이 하나님의 소원인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까?
로마서 15장 13절에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소망이 넘친다. 희망이 넘친다. 그러면 희망이 넘치면 사람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내일에 대한 꿈이 가득차지는 것입니다. 꿈이 가득차지면 믿습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하는 신념이 생겨나고 신념이 생겨나면 마음에 기쁨이 충만해지고 즐거움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이러한 삶을 가득히 채운 보배함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3. 변화를 체험한다는 것
우리가 이와 같이 보배함이 되어서 변화를 체험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 쓰레기통을 치우고 보배함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제일 먼저 해야될 것은 쓰레기통을 청소해야 되는 것인데 온갖 냄새와 바퀴벌레, 쥐, 병균이 득실거리는 원인이 쓰레기에 있는 것입니다. 왜 마귀가 자꾸 내게 와서 시험합니까? 왜 귀신들이 달라듭니까? 간단한 것입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쓰레기가 내 속에 있기 때문에 욕심과 탐심과 원한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노 같은 것이 있으니까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좋은 처소가 있구나 하고 이 쓰레기를 좋아하는 귀신들이 들어와서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쓰레기통을 청소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6절로 7절에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찢고 피흘려 우리 희생제물이 되어 청산해 주었으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악의 쓰레기, 모든 더러운 쓰레기를 청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로 청소해야 되는 것입니다. 쓰레기를 비우는 것은 절대로 중요한 것입니다. 작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으므로 우리 언제나 하나님 앞에 나와서 쓰레기통을 정결하게 하면 하나님을 모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냄새가 꽉 나는 쓰레기를 가지고서 주님 오시옵소서. 주님 오시옵소서 하면 주님께서 문밖에 서서 냄새가 나서 못 들어가겠다. 쓰레기부터 치워라. 아이 먼저 들어오십시오 그냥... 아니야 쓰레기부터 치울때까지 내가 기다리마. 그러므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모실 때 반드시 회개를 하는데 언제 죄가 있을 때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늘 집안 청소하지 않습니까? 온 집안에 쓰레기가 차질 때까지 기다립니까? 아니지요. 아침마다 집안 청소하는데 그와 같이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마음에 청결하게 하기 위해서 회개하고 정결케 하고 주님을 모시는 것이 좋습니다.
세계적인 문호인 톨스토이는 그리스 정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청년 시절에 세계적인 추세였던 합리주의와 인본주의에 물들어서 불신자로 자라났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그는 자신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가서 사람을 많이 죽이고 도박, 간통, 폭행, 살인자로 자신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자기가 미워졌습니다. 나중에는 절망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결국 나는 죄의 포로가 되었다. 나는 흉악한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그 가운데 빠져서 허덕여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배우고 믿었던 지식과 과학에서 결코 만족한 답을 얻지 못하는 것을 알아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말씀 안에서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 다음 그가 말하기를 인간은 하나님 없이 못산다. 하나님이 계셔야 살 수 있다. 톨스토이는 잃어버린 자기를 찾고 난 다음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인 「부활」이라는 소설을 적었습니다. 사람이 그 안에 쓰레기로 가득 차 있으면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로 새 사람이 되어 말씀과 성령으로 채워서 사는 사람이 되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구원으로 채워 놓은 보배함이 되어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기를 예수님은 다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서 깨어지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면 보배함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모르는 아주 농꾼이었습니다. 교육도 받지 못하고 순 농꾼으로 살았습니다. 목장으로 살았는데 주님이 하루 나타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1~2)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기 전에 떠나라고 했습니다. 네가 오래 살아온 죄악의 땅, 거소에서 너희 부모, 전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너가 살고 있는 세상 문화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시할 땅은 십자가 밑입니다. 십자가 밑으로 나오라. 세상에서 떠나서 십자가 밑으로 나오라. 그러면 네가 복의 근원이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 밑에 나와서 내가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여러분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복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순종하여 장래 유업으로 받을 땅으로 나갔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여 믿음으로 십자가 밑에 나가면 변화받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도 40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80에 불붙는 가시넝쿨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올 때 하나님께 모세에게 과거를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신발을 벗으라는 것은 과거에 살아온 모든 족적을 벗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신발을 벗고 하나님께 항복하고 나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모세는 거기에서 신발을 벗고 하나님 품에 안긴 것입니다. 야곱을 얍복강의 체험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그가 얍복강에서 형이 400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죽이려고 오니까 아들과 딸들과 처자들 다 먼저 강건너 보내고 자기는 강건너에 앉아가지고서 처자가 형에게 맞아 죽으면 도망치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있는데 의리가 없는 남자였었습니다. 처자를 먼저 보내고 자기는 살아 도망치겠다고 강에 있는데 건너가면서 아버지 같이 갑시다. 왜 아버지 거기 있느냐? 너희들 먼저가라. 먼저가라. 아버지는 여기 볼일 있다. 볼일은 무슨 볼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너도 건너가라! 너도 건너가라 그러니까 안갈랍니다. 그래서 천사하고 밤새도록 씨름을 하는데 아무래도 고집을 부리고 나는 안갑니다 하니까 천사가 나중에 환도뼈를 치니까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일어나보니까 절룩거리니까 이제는 안건너가도 별 효과가 없겠다 말입니다. 형이 오니까 달아나려고 해도 다리가 절룩발이까 못달아나니까 그때야 날 축복 안해주면 난 당신 안놓겠다 하니까 너 이름은 야곱이지? 사기꾼이지? 예! 이제 이름을 이스라엘 하나님의 복받은 사람으로 바꿔라.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꿔서 절뚝절뚝 하면서 강을 건너오니까 그의 처자들이 아니 어제는 괜찮았는데 오늘 왜이리 절름발이가 되었습니까?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처자들 앞에서 절뚝거리면서 나가니까 형이 단칼에 목을 베려고 뛰어와서 보니까 절뚝발이 뭐 칼 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셔서 회개하는 마음을 줘서 두 사람이 끌어안고 통회하고 자복하고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변화를 시키기 위해서 절뚝발이를 만들고 이름을 바꿔 주신 것입니다. 변화 받아야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요셉은 17살에 집에서 형들에게 버림을 받아 떠나서 13년 동안 고통을 통하여 자기를 버리고 난 다음에 30살이 되어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와 지식이 너무 많으므로 육신의 가시를 주어서 몸이 아팠습니다. 고쳐달라고 아무리해도 하나님 고쳐주지 아니하면서 네가 약할 때 내가 강하다. 네가 약해야 하나님께 의지하고 변화받는 삶을 살므로 내가 너를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나중에 오히려 자기가 육신의 가시가 있고 약해지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부활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2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죽은 것을 내 죽음으로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상상하고 바라보고 믿고 입술로 시인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지내고 부활한 것을 인정하면 예수님의 생명이 여러분 몸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그릇이 되면 성령이 우리 연약함을 도와주시고 성령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혼자 살지 않습니다. 보배함이 되면 성령께서 그 보배함 속에 같이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요 우리를 돕기 위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그는 지금도 돕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에게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성령이 알았어요. 내가 도와줄게. 성령은 여러분의 기도가 예수 이름으로 드려지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기도하면 성령이 받아서 전달하는데 기도를 잘못하면 마귀가 여러분 기도를 전달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고 절망적인 말을 하면 마귀가 집행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구속적인 말을 하면은 성령이 이루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며 모신 것이 보배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예수 십자가 축복을 생각하고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꿈꾸고 믿고 입술로 시인하십시오. 저는 매일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외웁니다. 저가 찔림은 우리 허물을 인함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 죄악을 인함이라. 저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양같이 그릇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저에게 담당시켰다를 외우고 그 다음에는 눈을 감고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죽음 내 죽음.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죽었다. 그 다음 예수 부활은 내 부활. 예수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치료받고 건강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영생복락을 얻은 나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내게 이루어주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 혼자 내가 늘 중얼거립니다. 나는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다. 나는 성령께서 같이 계신다. 나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 나는 축복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나는 부활 영생 천국을 가지고 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함을 입었다. 입술로 늘 시인합니다. 누가 뭐라고 말하든지 나는 보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보배가 바로 십자가 밑에서 얻은 보배인 것입니다. 눈에 안보여도 이 보배가 내 마음 속에 서서 이를 내가 알고 꿈꾸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보배가 현실로 내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 보배가 다 있는 것입니다.
<결론>
세상 사람 보기에는 저 질그릇 같은 인간이라고 하지만 보배가 여러분 속에 있으므로 여러분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림바 되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보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고 아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패배자가 되지 않고 승리자가 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쓰레기통을 다 청산하고 보배함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는 보배가 되고 성령이 같이 계시고 이 보배를 여러분 깨닫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현실적으로 눈 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보배를 가진 여러분은 어느 곳에 갖다 놓아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광야에 가면 광야에 축복받은 처소가 되고 들에 가면 들이 복된 곳이 되고 집에 들어오면 집이 복된 곳이 되는 것은 여러분 속에 있는 보배가 나타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보배로운 사람이다. 보배가 내 속에 가득하다. 할렐루야! 다같이 고개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직분 받은 자의 길
고후04장 1~6 / 지용수목사
이집트, 요르단, 이스라엘 광야를 다니다 우리나라에 오니 푸른 산, 푸른 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산천이 이렇게 푸른 것은 하나님께서 비를 적절하게 내려 주셔서입니다.
이사야 55장 10절, 11절에 말씀하십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할렐루야!
비는 자연을 적시지만 하나님 말씀은 우리 인격을, 영혼을, 삶을 적십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침투되어 큰 변화를 일으키실 것을 확신합니다.
오늘 1부와 2부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시는 성도님들의 표정을 읽어 보았습니다. 기쁜 얼굴, 감격한 얼굴이 많아서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단비를 맞으면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파리 교회의 집회를 마치고 난 후 목사님께서 “목사님, 어른부터 아이까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되어서 참 감사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한 유학생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유학 온 한 학생이 프랑스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부흥회에 참석하려고 귀국을 미루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학생이 목사님께 “목사님, 파리에 있는 동안 제가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교회를 섬긴 것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답니다. 물론 그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자기 꿈도 성취했지만, 가장 힘쓴 일이 교회를 섬기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학생은 공부를 하고, 사업가는 사업을 하고, 직장인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 일에 열심을 쏟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 청년들, 새벽이슬 같은 우리 청년들을 매우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데, 그 중에서 특별한 자랑은 결혼식을 하고 바로 신혼여행을 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은 결혼식을 하면 반드시 본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난 후 여행을 갑니다. 그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나면 피곤해서 어디로든 도망을 가고 싶어집니다. 그런데도 우리 청년들은 주일 예배를 드리고야 신혼여행을 갑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가정들을 손들어 축복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참 귀한 말씀입니다.
어제 우리 청년 한 쌍이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나서 신혼 여행지를 물으니 파리로 간다고 하면서 부흥회를 마치고 갈 것이라고 대답해서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흥회를 목요일 새벽까지 하니, 토요일에 결혼한 신혼부부가 목요일에 신혼여행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결혼할 때는 부흥회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음 편하게 신혼여행을 갔는데, 만일 그때 우리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다면 제가 신혼여행을 미루고 부흥회에 참석했겠습니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보아도 그 신혼부부가 참으로 예쁜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더 예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길이길이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먼저 예배,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도 했지만, 직분을 받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나타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직분을 받은 자가 나아가야 될 길을 가르쳐 줍니다.
직분을 받았다는 것은 좁은 의미로는 바울이나 베드로나 디모데나 디도 같은 사도, 목회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넓게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직분을 받았습니다.
왜입니까? 사도와 목회자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전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니 새 신자도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받은 자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나는 직분을 받은 자’라는 의식을 갖고 살아야 됩니다. 내가 장관이 되면 장관으로서, 공인으로서 살아야 됩니다. 내가 목사라면 목욕탕에 가도 목사로, 이발소에 가도 목사로, 식당에 가도 목사로 살아야 됩니다. 영적인 직분, 하나님의 귀한 직분을 받았으면 직분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직분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우리가 먼저 긍휼하심을 입어서 구원을 받아 직분을 받았으니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됩니다.
대통령에게 임명 받아 장관이 되었으면 대통령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직분을 받은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일을 해야 됩니다.
사실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전도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나는 교회에 안 갑니다. 교회에 가면 위선자들로 꽉 차 있어 역겨워서 안 갑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범브란트 목사님이 “그렇습니까? 나는 교회에 가면 편합니다. 내가 위선자이기 때문에 위선자가 많이 모이는 교회에 가면 나는 편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세계인이 존경하는 성자 같은 분이지만 범브란트 목사님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거룩합니까? 교회에 위선자가 있어서 못 가겠다는 당신은 깨끗합니까? 왜 당신 자신을 모릅니까?’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위선자, 죄인이 와서 구원 받고 거룩하게 되어지는 집입니다. 교회에 위선자가 있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위선자이고 부족합니다. 이런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창세기 25장 20절 이하에 보면, 이삭이 아리따운 아가씨 리브가를 만나 결혼하여 부부 생활을 한 지 19년이 지나도 잉태되지 않습니다. 리브가는 의학적으로 볼 때 불임 여자입니다. 그러나 이삭이 하나님께 “내 아내의 태에 복을 주세요.”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태를 재창조하셔서 아기를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분이 몇 분 계십니다. 아기를 잉태하지 못한다는 진단 결과를 갖고 왔어도 “자매님,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참고로 들으시고 우리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십니다.” 하며 함께 기도하여 잉태한 자매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임 여자라도 잉태케 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이 굳어 간경화가 된 사람의 간을 새롭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IQ, EQ가 좋지 않은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뛰어나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십니다.
불임 여자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했는데, 뱃속에서 둘이 싸웠습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하나님, 뱃속에서 형제들이 싸웁니다.”하고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야, 네 뱃속에 두 국민이 있는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뱃속의 야곱을 택하셔서 야곱은 축복하시고 에서는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후손들, 에돔 족속들이 회교를 섬깁니다. 회교를 섬기는 그들은 구원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후손들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뱃속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 여 청년이 ‘목사님, 사랑해요.’라는 글로 시작된 편지를 제게 보냈는데, 어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 여 청년은 중학생 때부터 어머니께 매를 맞으면서도 교회에 다녔답니다. 교회에 다니지 말라고 어머니께서 그렇게 때려도 교회 가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좋았답니다. 할렐루야!
매를 맞으면서도 교회에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땅이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서 이 세상이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명하시니 환한 빛이 비취었습니다.
오늘 세상의 모든 악한 마귀, 귀신들이 사람을 혼미하게 해서 예수님의 얼굴에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성지 순례 중 사하라 사막을 통행할 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없었는데, 시내산 가까이 가니 싯딤나무가 몇 백 킬로미터에 한 그루씩 외롭게 서 있었습니다. 싯딤나무는 너무 너무 단단하고 질겨서 톱질을 하면 톱이 휘어지고, 꺾으려 해도 꺾이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쓸모없는 나무, 못된 나무라고 싯딤나무 가까이에는 가지도 않는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싯딤나무로 하나님의 법궤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기는 법궤를 쓸모없는 싯딤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순금을 입혔습니다.
우리는 사막에 버려진 외로운 싯딤나무처럼 쓸모없는 사람이고 죄인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하나님의 성령을 담는 상자로 삼으시고 순금보다 더 귀한 믿음으로 우리를 입히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얼마나 귀한 존재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복음을 전할 직분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믿음 생활을 하며 복음을 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직분 받은 자는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낙심할 일이 가끔 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천사 대접, 예수님 대접을 받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4절에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을 천사처럼 대접하고 예수님처럼 섬깁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몰려와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돌로 칩니다. 그들이 돌에 맞아 쓰러진 사도 바울을 개처럼 끌어다가 성 밖에 던져 버립니다. 그들이 떠난 다음에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이 바울에게 모여와 둘러서서 기도할 때 바울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살려 주셨습니다. 바울은 일어나자마자 금방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한 다음 다시 루스드라에 가서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가지만 하나님께서 감옥 문을 열어 주십니다. 사도행전 23장 2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사람이 40명이나 있습니다. 40명이 바울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강하게, 귀하게 전하면 마귀가 물러가고 사람이 구원을 받기 때문에 마귀는 복음을 귀하게 전하는 자를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악한 마귀가 우리를 막아도 하나님께서 계시니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가정과 직장에서 귀하게 살고 복음을 전하면 칭찬과 인사를 받지만 때로는 핍박도 받고 조롱도 받습니다. 그래도 낙심하면 안 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말씀하십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따라 합시다.
“나를 능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하나님께서는 지용수를 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능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복음을 전한다고 항상 인사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대접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욕도 먹습니다. 어떤 집에 가서 전도하니 제게 침을 뱉었습니다. 설교를 왜 그렇게 하느냐고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악한 사탄은 복음을 막습니다. 그래도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고 담대하게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길입니다.
그리고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섬기면 남들이 보기에는 거룩하고 천사 같지만 스스로는 압니다.
‘내게는 아직도 이것이 부족한데…. 나는 가끔 가끔 실수를 하는데….’
남편이 모르는, 아내가 모르는 자기만 아는 부끄러운 죄가 있습니다.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어도 아직까지 깨끗하게 끊지 못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숨은 부끄러움의 죄를 끊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다이아몬드가 크면 비싸고 작으면 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가 아무리 굵고 커도 흠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을, 흠이 없고 투명해야 값비싼 다이아몬드가 된다는 것을 이번에 배웠습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흠이 보인답니다. 그래서 현미경으로 본답니다.
장로나 목사는 귀해 보이고 평신도는 덜 귀해 보일 수도 있지만, 평신도라도 맑으면 귀하고 목사라도 결점이 많으면 귀하지 않습니다. 숨은 부끄러움의 죄를 끊어 버려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 중에 ‘아, 내가 장로로서, 집사로서 끊어야 되는 이것을 끊지 않은 것이 있는데….’ 하는 것이 있으면 오늘을 시점으로 성령께서 끊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귀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태어난 흑인 사생아 소녀가 있었습니다. 세 살 때부터 할머니께 매를 맞으며 자랐습니다. 아홉 살 때 많은 남자들에게 성 폭행을 당했습니다. 열네 살에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20대에 이 남자 저 남자와 더불어 마약을 하며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매일 밤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해 주세요. 저를 하나님의 도구로 써 주세요.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으로 써 주세요.”
그는 자기의 모든 부끄러운 생활을 끊어 버리고 의롭게 삽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조롱합니다.
“너는 사생아를 낳은 여자가 아니었냐? 너는 마약 중독자가 아니었냐? 너는 방탕한 자가 아니었냐?”
“맞아요. 나는 몹쓸 여자예요. 그러나 내 속에 계시는 하나님은 위대해요.”
많은 사람이 조롱해도 대꾸하지 않고 숨은 부끄러운 죄를 끊어 버리고 새 생활을 하니 그는 지금 20세기를 빛내는 여성,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미국 최고의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그는 지금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밤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저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도구로 써 주세요.”하고 기도한다고 간증합니다. 할렐루야!
상처투성이 여자, 얼룩진 여자이지만 부끄러움의 죄를 끊어 버리니 이 세대의 보석 같은 여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숨은 부끄러움이 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짓지 않아도, 죄를 짓고 잘못 사는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 죄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한 장로님이 계셨는데 몸에 병이 왔습니다. 약을 쓰고 병원에 다녀도 차도가 없고 목사님의 안수 기도를 받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무슨 죄가 있나 하고 회개하려고 해도 깨끗하게 살았기 때문에 죄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목사님이 장로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장로님, 장로님이 용서해 주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세요.”
“목사님, 저는 용서해 주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가 용서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하고 기도하니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기록했더니 400명이나 되더랍니다.
‘아이고, 그 사람은 왜 그래? 아이고, 그 사람은 아주 재미없는 사람이야….’
장로님이 정죄하고 비판한 사람이 400명이나 되었습니다. 자기에게는 허물이 더 많으면서 상대방을 정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하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남을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처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 교회에 다니면서 그 집사님을, 그 장로님을 미워하면 내가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자기가 조금 경건하게 산다고, 자기보다 조금 못한 사람들을 정죄했던 것입니다. 장로님이 그 죄를 회개하자마자 몸이 깨끗이 나았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남을 정죄하고 상처 받은 것을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손해를 봅니다.
어제 밤에 요셉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셉에게 상처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요셉은 어릴 때 엄마가 세상을 떠나서 엄마 없이 자랐습니다. 그 상처를 갖고 자랐습니다. 게다가 형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다가 팔렸습니다. 또 보디발 장군의 부부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갑니다. 떡 맡은 관원장에게 등에 고랑이 지도록 채찍을 맞습니다. 상처투성이 요셉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요셉만큼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에게 상처 준 사람을 보복하려고 이를 갈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었을 거야. 그럴 수도 있지. 하나님, 그럴 수 있었겠지요?’하며 모든 것을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그래서 그가 위대한 총리가 된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자기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보복하려고 앙심을 품었다면 화병으로 자기가 죽었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상처 준 사람을 미워하고 계속해서 앙심을 품으면 여러분이 먼저 죽습니다.
따라 합시다.
“그럴 수 있겠지. 그럴 수도 있지.‘
용서하고 넘어가야 내가 삽니다. 할렐루야!
지난번 하버드 대학 졸업식에서 제일 각광을 받은 학생은 부르크 엘리스입니다.
그는 목 아래 온몸이 완전히 마비가 된 여자입니다. 그런데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타임지에서 ‘졸업 평점은 A마이너스, 인생 평점은 A플러스'라는 제목으로 그 여학생을 기사화 했습니다.
그는 중학교에 다닐 때 교통사고를 당해 목 밑으로는 완전히 감각이 없는 전신마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서 하버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을 원망하지 않느냐?”
“원망하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면 내가 망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못 살기 때문에 그를 용서하고 이해합니다.”
이것이 중합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꽁 하고 있으면 내가 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어떤 사람을 만나서 물었습니다.
“아직도 그 형제를 미워합니까?”
“예, 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놈은 사랑할 수 없어요.”
“아, 당신은 앞으로 죄를 지으면 큰일 나겠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나님께서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내가 어떤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 죄도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슴속에 누구를 조금 섭섭하게 생각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여러분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지 않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받은 자는 누구를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그분들을 아뢰고 용서하여 자유를 얻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숨은 부끄러움의 죄를 끊어버리고 궤휼을 행치 말아야 됩니다. 궤휼은 사람을 속이고 잔머리를 굴리는 것,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겠지.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되겠지.’하며 잔꾀를 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궤휼로, 잔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진실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전파하고 진리를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잘 되어도 내 이름이 나타나면 안 됩니다. 성공해도 성공이 나를 위한 것이면 안 됩니다. 잘되고 성공해도 그 잘된 것, 그 성공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비춰지고 진리가 이 세상에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직분 받은 자의 길인 것입니다.
지금 이 세대에 가장 성공한 영화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예수의 수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간이 나지 않아서 아직 보지 못했는데,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그 영화를 보고 “이 영화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대한 완벽한, 설교 같은 영화다. 내 평생에 전한 복음을 설교해 주는 귀한 영화다.”라며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했다고 합니다.
그 영화를 제작하고 감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유명한 영화 배우였던 멜 깁슨입니다. 그가 영화를 제작할 때 그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이 반 유대적이라며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러니 어느 제작사도 자금을 대주지 않고 영화를 만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자기 재산을 다 팔아 360억을 만들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 영화가 지금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미국 교회들이 수요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고 영화관에 가서 그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그렇게 했습니까? 종교 영화는 성공한다는 보장이 희박한데 왜 자기 전 재산을 다 쏟아 영화를 만들고 망해도 좋다고 했습니까? 그가 인터뷰할 때 말했습니다. 그가 20대에 성공한 배우가 되어 돈 방석, 인기 방석에 앉아 사람들이 원하는 인생의 유토피아를 누려 보았지만, 항상 공허하고 높은 빌딩을 보면 뛰어내려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답니다. 팬들은 그를 우러러 보며 박수를 보냈지만 그는 공허해서 살맛이 없고 왜 이런 인생을 살아야 되나 하다가 나중에는 마약과 술과 도박에 빠졌답니다.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살아야 되나? 죽어야 되나?’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만났답니다. 예수님을 만나니 참 만족이 있고 참 평안이 있고 참 의미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참 구세주이고 참된 만족이고 참된 평화인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전 재산을 쏟아 영화를 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망한 것이 아니라 더 흥하고 흥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내가 장관이 되든지, 장군이 되든지, 사장이 되든지, 병원 원장이 되든지, 대학 총장이 되든지, 어떤 사람이 되든지 그것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 전파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또 바울은『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의 복음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복음을 전할 직분을 받은 자는 사람의 종이 아닌 주님의 종이지만 사람의 종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셨듯이 우리도 같은 길을 걸어야 됩니다.
제가 여러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여러분을 섬깁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종같이 여러분을 섬깁니다. 제가 파리 있을 때도 오늘 전한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했습니다. 어제 밤에도 12시가 넘도록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왜입니까? 여러분에게 말씀을 잘 대접하려고, 여러분이 말씀을 잘 드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잘 되고 귀하게 살도록, 평안하게 살도록 하루에 다섯 번씩 손들고 기도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종입니다.
우리 장로님들도 여러분을 보살피는 여러분의 종입니다. 그래서 시간 시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받은 자는 어디서나 종으로 살아야 됩니다. 가정에서도 종으로, 회사에서도 종으로 살아야 됩니다. 회사 사장은 근로자를 섬기는 종으로, 근로자는 다른 근로자들과 사장을 섬기는 종으로, 모두가 종으로 살 때 예수님의 영광이, 빛이 이 세상에 가득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나 흔들림이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는 교인인데 회사에 가면 얼굴을 가리고 교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는 친구와 있을 때는 교인인데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교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의 직분을 받은 자로 살아야 됩니다.
한 병장이 쓴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제대 말년에 김 이병이라는 졸병이 자기 내무반에 와서 기뻤답니다.
‘잘 되었네. 저놈을 부려 먹어야 되겠네.’
그런데 일을 시키려고만 하면 항상 김 이병이 보이지 않았답니다.
“김 이병 어디 갔어?”
“대대장실에 갔습니다.”
김 이병이 바둑을 잘 두니 바둑광인 대대장이 바둑을 두려고 김 이병을 불러서 갔다는 것입니다. 대대장이 시간만 나면 김 이병을 불러다가 바둑을 두고는 사과나 과자 같은 것을 들려 보냈답니다. 그러니 병장이 이병에게 일은 시키지 못해도 먹을 것을 얻어먹으니 좋아했답니다. 군대에서는 먹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대장에게 불려간 김 이병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답니다. 내무반에서는 김 이병이 늦게 오는 것만큼 더 많은 과자 보따리를 갖고 올 줄 알고 기다렸답니다. 그런데 김 이병이 과자는 고사하고 얻어 터져서 퉁퉁 부은 얼굴로 들어왔답니다. 내무반원들이 물었답니다.
“야, 김 이병, 과자는 어떻게 하고 이렇게 얻어 터져서 들어오니?”
바둑을 두던 대대장이 바둑판을 뒤엎더니 “내가 몇 달 동안 너와 바둑을 두었는데, 어찌 한 번도 져주지 않나? 뭐 이런 놈이 있어?”하며 30분간 때리더랍니다. 김 이병의 말을 듣고 고참들이 “야, 이 병태 같은 놈아, 고문관 같은 놈아, 군대는 요령으로 사는데 대대장에게 계속 이기기만 했으니 얻어터지지. 가끔 져주지 어찌 늘 이기기만 했냐?”하며 또 때렸답니다. 그러자 김 이병이 울면서 “저는 아마추어가 아닙니다. 프로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취미로 바둑을 두는 아마추어는 상대에 따라 져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직장의 상사와 바둑을 두면 일부러 져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프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대국에 들어가면 상대가 아버지이든 직장 상사이든 상관없이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프로는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자기 기량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 이병은 대대장 앞에서도 자기 기량을 다하고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이긴 것입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그래, 우리는 프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된다. 나는 프로 목사가 되어야 된다.’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디에서나 상황과 환경에 변함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등경 위의 등불처럼 살아서 우리의 얼굴에 주님이 나타나고 우리 입의 말에 주님이 나타나고 우리 삶에 주님의 향기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어디에 가나 감사하고, 어디에 가나 낙심하지 않고 담대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숨은 죄가 없이 깨끗하고, 어디에서나 간사한 꾀를 쓰지 않고 진실하며 주님만 높이려 하고 겸손하게 이웃을 섬기는 프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양곡교회 교인들만 프로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이 지역이 살 줄로 믿습니다. 한국의 천 몇 백만 그리스도인들이 프로 그리스도인, 프로 직분자가 되면 한국이 변하여 새 나라가 될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직분을 받은 자로 어디에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잘 달려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이 가리어진 이유
이성희목사 / 이사야 59:1-3, 고후 4:3-5
서론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은 35가지입니다. 그 중에 9가지는 자연에 대한 기적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신 기적이나 바람을 잔잔케 하신 기적이 자연기적입니다. 자연기적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나머지 26가지 기적은 사람을 치유하신 기적입니다. 고치시고, 살리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기적입니다. 치유기적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원자이심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기적 가운데 4가지가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는 두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는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신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바디매오라는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나면서 시각장애인이 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을 ‘메시야적 기적’이라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메시야가 오시면 눈먼 자의 눈이 밝아질 것이라는 전승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35:5에는 메시야가 도래하는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라고 합니다. 이사야 42:7에는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고 합니다. 눈을 뜨게 하는 일은 메시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므로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기적이란 없습니다.
예수님은 보시기에 좋게 만드신 이 세상의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친히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가리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다 드러나기를 원하시며, 모든 사람이 드러난 모든 것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눈 가리고 아웅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다 알고 있는데 얕은 수단으로 속이려 한다는 뜻입니다. 눈을 가리는 것은 속이는 것입니다. 내가 내 눈을 가리는 것은 내가 내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세상에는 눈을 가리고 속이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눈을 가리는 것은 속일뿐만 아니라 또한 속는 일입니다.
이사야 44:18에는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죄는 양심을 가리게 하고, 흐리게 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이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하늘의 밝은 빛을 보고 눈이 감겼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는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는 듣고 빛은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울은 그 빛을 보고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는 바울이 천부장 앞에서 변명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 가던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빛의 광채로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광채로 세상을 보는 눈이 감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세상을 향한 눈이 가리워지고, 하나님께로 향한 눈이 떠진 것입니다.
‘열자’(列子) ‘설부편’(說符篇)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 제나라에 금을 탐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아침 일찍 시장에 있는 금가게에 들어가 금을 훔치다가 잡혔습니다. 잡힌 다음에 관리가 물어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는데 어째서 남의 금을 훔쳤나?”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금을 훔칠 때 사람이 보이지 않고 금만 보였습니다”(攫金者不見人-확금자불견인). 인간은 세상의 유혹과 욕심으로 눈이 가리어집니다. 본문에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 가리어진 이유가 무엇인가를 보고 복음이 가리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첫째, 멸망의 길을 가는 자에게는 복음이 가리어집니다.
고린도후서 4:3에는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이 가리어지면 멸망의 길을 갑니다. 바꾸어 말하면 멸망의 길로 가면 복음이 가리어집니다. 복음이 심령에 밝게 비취게 되면 멸망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할 때에 만일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면 멸망의 길을 걷는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복음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눈이 가리어진 까닭입니다. 마음이 굳게 닫힌 까닭입니다.
복음에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안 들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복음이 가리어진 사람입니다. 복음을 듣지 않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멸망뿐입니다. 복음이 사람을 살리는 것인데 복음을 듣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자기 의로 사는 사람들은 율법이나, 관습이나, 전통의 틀에 갇혀 삽니다. 이런 사람들은 절대 마음을 안 열고 타인을 불신하고 불인정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집의 포로로 삽니다. 자기 의로 사는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어떤 복음의 말씀도 안 듣고,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삽니다. 자기들의 마음에 안 들거나, 이익에 배치되면 돌로 치라고 하고, 죽이라고 소리칩니다.
복음은 믿은 자들에게는 참 쉬운 것입니다. 복음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참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양극성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믿지 않으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제자들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까닭을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무에게나 공개하지 않으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열왕기하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범하려고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아람군대에게 병거소리, 말소리, 큰 군대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아람사람들은 놀라서 이스라엘 왕이 그들을 치려고 헷 사람의 왕들, 애굽 왕들을 값 주고 오게 하였다고 하며 다 도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가리게 하시고, 귀를 막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눈이 가리어진 사람은 헛된 것을 보고, 엉뚱한 것을 듣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눈이 가리고, 세상에 눈이 뜨게 되면 보는 것이 모두 헛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 모두가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2:21에는 “그들은 헛되니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인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3년을 함께 지내고 말씀을 들었지만 예수님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24:16에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실에 절망하고 삶을 포기했을 때 복음에 눈이 가리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주실 때, 31절에는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라고 합니다. 복음이 그들의 눈을 밝게 한 것입니다.
복음이 가리워지면 멸망입니다. 복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리는 복음이 가리워지면 죽은 것입니다. 복음이 가리워지고 살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복음이 가리워지면 생명이 아닌 사망만 쫓아다니게 됩니다.
이사야 59:2에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합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게 하여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하고, 복음을 가리게 하여 복음이 들리지 않게 합니다. 이런 삶의 종말은 멸망입니다.
최근 ‘퀴어 페스티벌’을 통하여 동성애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커졌습니다. 또한 이에 대한 반발도 커졌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동성애란 “부끄러운 일”이라고 합니다. “그릇됨”이라고 합니다.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고 합니다. 동성애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원리에 어긋나는 일이며 사회의 질서와 문화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동성애를 찬성하는 자들이 자기 아들이 며느리 감으로 남자를 데리고 오면 환영하겠습니까? 동성애가 정상적인 사랑의 행위라면 왜 동성애를 통하여 질병이 생기겠습니까? 복음이 가리어지게 되면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팬티만 입고 나체행진을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라고 보입니까? 복음이 가리어지게 되면 그릇됨을 옳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가 되고 가정을 이루게 하십니다. 결혼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남자와 결혼하고, 딸이 여자와 결혼하면 생육하고 번성하겠습니까? 복음이 가리어지게 되면 이에 상응한 보응을 받습니다. AIDS를 비롯하여 온갖 질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정신적 사랑 보다 육체적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동성애입니다. 결국 이런 동성애는 나라를 멸망하게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이 동성애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동성애 목사의 성경해석은 온통 자가당착이며 아전인수격인 해석들입니다. 복음이 가리어진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이 가리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복음을 확실하게 믿고 전해야 합니다. 기독교 진리를 호교하고, 진리를 수호하고, 우리 모두가 성경 지킴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확실하게 전합니다.
고린도후서 4:5에는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예수의 주 되신 것입니다. 예수가 주라는 것이 복음의 핵심내용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심이 복음의 핵심가치이며 복음의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왜 중요합니까? 첫째는 주인이 누구냐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삶의 가치이며, 존재이유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주가 되셔야 내가 종이 됩니다. 예수님이 주라는 사실은 자신의 신분, 자신의 사명을 확실하게 합니다.
‘주’(퀴리오스)란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신분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주라는 사실은 초대교회에서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이며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황제의 10대 박해로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로마황제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주 원인은 ‘주’란 단어 때문입니다. 로마제국 당시에는 ‘주’란 단어는 로마황제에게만 사용하는 단어였습니다. 황제가 유일한 ‘주’인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주인을 바꾼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형을 당할 만한 죄목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삶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주인은 고기잡이 배와 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므로 예수님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주인은 그의 가문이며, 율법이며, 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예수님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하늘을 향해 물었습니다. 주인이 바뀔 때 ‘주여’라고 하였습니다.
‘주’는 신약 여러 서신들에서 예수님께 대해 사용된 고유 칭호입니다. ‘주’는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란 호칭의 의미를 신약에서 그대로 전달하는 호칭입니다. 그래서 ‘주’는 야훼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깊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바울서신 전체에 ‘예수’라는 단어가 219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란 단어는 272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389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라는 용어는 신약에 100번 이상 등장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등입니다. ‘주’라는 단어는 아주 보편적인 그리스도께 대한 호칭인 것을 말합니다. ‘주’란 한 마디에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대단한 신앙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신앙고백의 기초가 되는 성경의 고백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신약의 위대한 세 가지 신앙고백은 주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코너(W. T. Conner)는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했고 그래서 그 분이 나의 구주가 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예수를 주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참 좋은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세상의 것을 주인으로 삼은 사람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돈, 명예, 정욕, 지식, 심지어 사탄을 주인 삼은 사람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인을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두 주인을 섬기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만이 우리 삶의 영원한 주인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행복하고 영혼이 평안합니다.
‘종’(둘로스)이란 고대사회에서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종은 사람이 아닌 주인의 물건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고대사회에서 노예가 되는 것은 여러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가 노예인 경우 자녀가 세습으로 되는 경우도 있고, 가정의 빚을 갚지 못해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고,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고, 흉악 범죄로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형편에서 노예가 되었든지 ‘종’이란 수치스런 신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기꺼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예수를 위하여 너희의 종”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가가 확실할 때 가능한 말입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은 사래가 아기를 갖지 못하자 사래를 대신하여 아브라함의 아들을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의 아기를 가졌다는 자부심에 하갈은 주인인 사래를 업신여겼고, 사래는 하갈을 구박하였습니다. 사래의 구박을 이기지 못한 하갈은 도망치다 광야 샘물 곁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하갈은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합니다”라고 하였고 하나님은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의 아기를 가졌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종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주인을 몰라보고 업신여긴 것입니다. 아무리 주인의 아기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종은 종입니다. 더구나 당시 법에 의하면 종이 낳은 아기는 종의 아기가 아니라 주인의 아기입니다. 그러므로 아기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종은 주인을 알 때 자신의 신분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는 그릇에 관한 비유가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이 있습니다. 금그릇이 반드시 좋은 그릇이 아닙니다. 무엇에 쓰느냐에 따라 질그릇이 가장 좋은 그릇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합니다. 그릇인 종은 주인의 쓰심에 합당해야 합니다. 귀하게 만들어진 것, 천하게 만들어진 것은 주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지 내 탓이 아닙니다. 단지 자기를 깨끗케 하면 천하게 만들어진 것 같지만 하나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깨끗한 그릇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정지용시인의 ‘호수’라는 시가 있습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하니 눈 감을 밖에”라는 시입니다. 아주 짧은 시지만 참 포근한 감정을 주는 시입니다. 눈을 감는 것은 감추는 것입니다. 아닌 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속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을 감는다고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
“색안경을 쓰고 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서 색안경을 벗어야 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색안경을 벗고 확실하고 깨끗하게 복음을 봅시다. 복음에는 주님이 있고, 우리의구원이 있습니다. 복음이 가리어지면 큰일입니다. 멸망입니다. 확실하게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섬기는 사람의 종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고후 4:7-18 / 조용기목사
성가도 잘 부르고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도 잘하고 다 잘합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행복합니다. 기쁘고 즐겁습니다. 건강합니다. 부요합니다. 나누어주며 삽니다. 할렐루야~ 옆에 계신 분들에게 참 잘 오셨습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항상 긍정적으로 살자” 그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J. 하드필드 박사는 자신감에 대하여 한평생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넌 틀렸어. 이젠 끝났어.” 이렇게 말하고
스스로 마음에 낙심하면 자기가 가진 능력의 30%도 발휘할 수 없는 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넌 할 수 있어. 넌 특별한 사람이야.” 이와 같이 말하고 자신감을 가질 때는 자기 능력의 한계을 뛰어넘어 150%까지 실력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나타나는 능력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이 있습니다. 자기가 잘났다. 못났다. 훌륭하다. 훌륭하지 못하다. 평가를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며 우리에게 엄청난 잠재능력을 주셨습니다. 저는 저의 책상에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다 그러니 오늘도 엄청난 일을 할 수가 있다. 왜, 하나님 닮았으니까.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게 되면 하나님처럼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읽을 때마다 힘이 생깁니다. 아침에 와서 읽으면 내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엄청난 사람인지 몰랐다. 하나님을 닮았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 이래뵈도 하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여러분도 해야 된다구요. 엄청난 것 아닙니까? 절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고 입술의 고백을 통해 시인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믿음은 강하게 되고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열두지파의 대표 열두명을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서 보냈는데 이 사람들이 40주 40야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열명이 보고한 것을 보면 저들은 우리보다 훨씬 크다. 우리는 저들에게 비교하면 메뚜기와 같다. 우리는 절대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할 수 없다. 그렇게 보고했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뭐라 했습니까? 아니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떠났고 우리가 능히 들어가서 점령할 수 있다. 들어가자! 똑같은 가나안의 백성들을 보고 열 사람이 평가한 것하고 두 사람이 평가한 것이 틀립니다. 부정적인 평가를 한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으니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못한다. 안된다. 할 수 없다고 말하면 이것은 그의 앞길을 첩첩이 막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태도를 항상 취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얼마전에 제가 초교파적인 목사님들 모시고 운동을 갔는데 운동을 하다가 잘안되어서 제가 그 목사님 앞에서 나는 잘 못해. 안돼. 그러니까 거기 나와 같이 운동하는 목사들이 전부 “아니 조 목사도 그런말 할 줄 압니까?” 내가 깜짝 놀랐어요. 그들이 나를 생각하는 것이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는 보통 사람이니까 안되는 것 안된다고 말하는데 그들은 “어떻게 조목사가 안된다는 말을 할줄 압니까? 우리는 조목사는 안된다는 말 전혀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해서 조 목사가 닮아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하고 왔는데 아이구 오늘 보니까 안된다는 말을 하는 조목사를 보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데요?” 그래서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면 됩니다. 해 봅시다.” 제가 고백을 고쳤다구요.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방식을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온 전국에 온 천하에 전달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의도순복음교회라고 생각하면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만 보면 할 수 있다 사람이다. 하면 된다 사람이다. 해 보자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요사이 목사님들 만나거나 평신도들 만나도 그래요. 상당히 조심을 해요. 또 놀랄까 싶어가지고서... 할 수 없다고 말할 때도 혼자서 아무도 없을 때 말해야지 사람 있을 때 말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면 그 부정적인 태도는 정신적인 독입니다. 독을 마시면 죽지 아니하면 큰 상처를 입는 것처럼 부정적인 삶의 태도는 정신적인 독입니다.
<본론>
1.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마귀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전략이 바로 부정적인 태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부정적인 것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열매를 많이 나게 하시고 에덴동산에 극락의 처소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것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마귀가 와서 부정적인 삶을 살도록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것입니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애비요, 마귀가 가는 곳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우리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 마귀는 나쁜 마귀입니다. 좋은 하나님께서는 나쁜 것 주시지 않습니다. 나쁜 마귀가 좋은 것 주지 않습니다. 이 마귀가 아담과 하와에게 와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긍정적인 태도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고 믿는 이상은 아담과 하와가 절대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하루는 퇴청마루에서 있는데 우리 아버님이 지나가시다가 저를 보더니만 “용기야, 하나, 둘, 셋 뛰어라. 안아주마.” “아버지 날 정말 안을래?” “뛰어라. 내가 안아줄게.” “그러면 뛰겠다. 하나, 둘, 하나, 둘... 아 나 못해!” “안아준다니까? 뛰어!” 또 하나 둘 하나 둘 아 나 못해. 그러니까 아버님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하냐면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것 모르느냐?” 그것 내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어릴 때인데 그 말이 내 마음 속에 딱 부딪히더라구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니까 나를 절대 떨어져서 바위에 부딪히게 안할 것이다.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 그래서 그 다음에 하나 둘 셋 눈 감과 뛰니까 아버님이 나를 덥썩 받아 주었어요. 그 다음에는 아버지가 어른 거리기만 하면 뛴다 뛴다~ 그러니까 아버님이 “내가 너를 볼 때 뛰어라. 안 볼 때 뛰면 내가 받아줄 수가 없다.” 그런말을 하시던 것이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 떨어져 나가게 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것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6절로 17절에 “야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가막힌 에덴동산을 만들어 놓으시고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그것은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다 계셔서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귀는 역이용한 것입니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을 보고 그들을 하나님과 분리시키고 하나님을 거역하도록 뱀을 통해서 하와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그런데 뱀은 야훼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조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믿으면 말씀 그대로 믿어야지 거기에 우리의 생각을 보태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생각을 보탰습니다.
창세기 3장 2절로 3절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언제 하나님이 먹지도 말라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 했습니까?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지요. 죽을까 하노라. 이렇게 되면 예수 믿어도 구원받을까 하노라. 안수받아도 병나을까 하노라. 주님 잘섬겨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까 하노라. 여러분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요.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도 긍정도 안하는 하와의 말을 듣고 당장 치고 들어왔습니다. 틈만 있으면 쳐들어오는 것이니까요.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하나님이 시기하고 질투해서 선악과를 못먹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진실로 그 중심에 너희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 마귀의 거짓에 아담과 하와는 속아 넘어갔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유명한 저술가 맥스 루케이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삶 가운데 두 가지 목소리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목소리는 여러분의 생각을 의심과 원망,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 채우지만 긍정적인 목소리는 소망과 힘으로 가득 채웁니다. 그럼 어떻게 어떤 것에 귀를 기울이실 겁니까?”우연히 지나가면서 우리에게 하는 말도 듣는 사람에게는 굉장한 충격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위로한다고 친구를 만나든지 선배를 만나든지 지인을 만나면 손을 덥썩 잡고 “오랫 만입니다.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많이 늙었네요.” 자기는 존경하고 사랑하고 인사차 한 말인데 듣는 사람에게는 독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부정적으로 하면 듣는 사람에게는 굉장한 타격을 주는데 긍정적으로 하면은 애교로 한 말이라도 마음에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목소리는 마귀의 것입니다. 창조 이래로 마귀는 부정적인 목소리로 사람을 타락시키고 멸망시킨 것입니다.
존 보일 오리일드는 말하기를 “의심은 절망의 형제 악마”라고 말했습니다. 의심 그 자체가 절망의 형제인 악마입니다.
가스파링 부인은 “의심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지옥”이라고 했다. 우리 마음속에 의심을 하면 크고 적은 의심은 벌써 마음 속에 지옥을 가져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에게 의심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 주어 의심을 통해 천국이 떠나고 지옥이 가슴에 다가오고 에덴동산이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여 가시와 엉겅퀴가 우거지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속에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남편도 부인에게 긍정적으로 말을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부인도 남편에게 긍정적으로 말해줘야 됩니다. “여보, 요사이 당신 피곤한 것 같아. 참 보기에 안됐어. 너무 무리하지마.” 그것 사랑스러운 말 아닙니까? 고마운 말 아닙니까? 듣는 사람은 야, 내가 간암 걸린 것 아닐까? 내가 왜 이렇게 피곤하게 보이지? 당장 마귀가 의심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속에 제일 중요한 것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절대 긍정을 하라. 부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긍정 속에 하늘나라가 임하고 부정 속에 마귀가 오는 것입니다.
2.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그러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늘 긍정적이 될 수 있느냐.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면 언제나 긍정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도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쳐다보면은 그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임하여서 부정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이란 뭐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든 부정을 걸머지고 죽었지 않습니까? 우리의 연약과 질병을 걸머지고 죽었지요? 우리의 가난과 저주를 짊어지고 죽었지요? 우리의 흑암과 지옥을 걸머지고 죽었으니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부정을 다 걸머지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걸머지고 우리의 질병을 걸머지고 우리의 파멸을 걸머졌습니다. 무엇이든지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정리 안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처리 안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께 나아가서 예수를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나와서 하나님이 같이 계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하는 위대한 일을 보통 사람 못할 것이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니고데모 보고 두말하지 않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어떻게 이 늙은 사람이 거듭날 수 있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려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뱀에 물려서 죽어갈 때 모세가 불뱀을 만들어서 다니까 그것을 쳐다본 사람마다 뱀의 독이 다 해독된 것입니다. 오늘날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나무에 달린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기만 하면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이 싹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쓴물이 달아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우리 가슴 속에 있는 부정적인 쓴 물이 달아지는 것입니다. 죄의 쓴물이 달아지고 더러움의 쓴 물이 달아지고 질병과 고통의 쓴 물이 달아지고 저주와 가난의 쓴물이 달아지고 죽음과 멸망의 쓴물이 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만이 우리에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런 꿈을 꾸게 되고 믿고 말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결코 부정적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적이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속에 우리가 조금만 잘못하면 부정적이 돼요. 언제나 말씀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주님이 내어 주셨다. 아브라함에게 그 외아들을 모리아산에 재물로 드리라고 했을 때 이삭을 모리아산에 데리고 와서 재물로 드리기 위해서 묶어서 장작불 위에 올려서 갈로써 잡으려고 할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외독자 이삭에게 칼대지 말라. 네 외독자라도 아끼지 않고 내게 내놓는 것 보니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줄 알겠노라.” 증명된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놓으셨으니 증명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예수님을 내놓을 정도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부정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이 여러분과 같이 계시는데 부정적이 될 수가 없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하고 꿈을 꾸고 믿고 말하고 나가면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노인이 아내가 앞서 천국가고 혼자서 아들을 길렀습니다. 홀아비로써 살면서 아들을 키우고 사는데 나중에는 나이 먹으니까 직장도 안받아주니까 고속도로 옆에 가서 조그마한 건물을 하나 판잣집을 짓고 거기에서 햄버그하고 핫도그 같은 간이 음식을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별로 공부도 못하고 무식했지만 성실한 분입니다. 아주 다른 사람보다 더 햄버그에 고기도 많이 넣고 채소도 많이 넣고 맛있게 만들었습니다. 핫도그도 맛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파니까 잘돼요. 그래서 아들 대학등록금도 내고 비용도 드리고 잘되기 때문에 전광판도 하나 갖다가 붙여 놓고 그리고 아르바이트 하는 학생도 두명 더 고용해서 밑에 거느리고 장사가 잘된다. 이것 먹고 살고 우리 아들 대학 등록금 내고 이만하면 되었지 않느냐. 그런데 여름방학 때 아들이 아버지 돕는다고 왔어요. 방학동안이니까 왔는데 아들은 대학에서 경제를 전공합니다. “아버지,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전광판을 붙이고 이렇게 햄버그에 고기를 이렇게 많이 넣고 채소를 많이 넣고 아르바이트하는 사람 둘이나 쓰고 이럽니까? 이러면 망해요 망해!” “그래?” “아버지는 무식해서 몰라서 그래요. 경제학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지금 우리 미국 경제가 좋지 않은데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이 전광판도 꺼야 되고 아르바이트 하는 애들 내보내야 됩니다. 그리고 고기도 될 수 있으면 적게 넣고 채소도 적게 넣고 해야지 이렇게 많이 넣으면 안됩니다.” 아버지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아들은 지금 대학교 다니면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 말입니다. 자기는 그저 아침에 엎드려서 새벽기도때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부탁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도와주신다고 믿고서 했는데 먹고 살고 아들 등록금도 내고 했는데 아들이 와서 보니 틀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에 긍정적인 생각이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아들을 바라보자 마자 싹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곧장 전광판도 없애 버렸습니다. 아르바이트 하는 애들도 내 보내고 고기도 적게 넣고 채소도 적게 넣으니까 잘 안 팔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잘 안팔리니까 우리 아들 말이 맞았구나. 그러면 전에 잘 팔렸던 것은... 그것은 우연히 그렇게 잘 팔렸지. 무식한 내가 뭘 아나. 아들이 하는 말이 맞다. 그래서 식자우환이라고 아들 때문에 장사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을 수밖에 없게 된 이야기를 제가 읽어 보았습니다. 차라리 아들이 와서 안 도와줬으면 아버지가 무식해도 기도하고 믿음으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나갔으면 될 것을 가지고서 아들이 와서 너무 학식이 깊은 말 듣고 망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학식이나 지식보다도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태도가 학교 졸업장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학교 우등생이 안되었을지라도 예수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통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을 가지고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그 사람이 훨씬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다 말끔히 씻어버리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왜 합니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마음에 못한다. 안된다. 할 수 없다는 태도를 가지고 기도하면 아무리 멋진 기도를 해도 효과가 없습니다. 효과없는 기도를 왜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는 긍정적인 말씀의 기도를 들으셔서 오늘날도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반역할 때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 잘 믿었든 못 믿었든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하나님이 죄인 되었을 때보다도 덜 사랑할 리가 만무하잖아요.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나를 무척 사랑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절대로 부정적이 되지 말라는 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칠 때 이렇게 가르칩니다.
골리앗이 나타났을 때 너무 엄청난 장군이라 모든 사람이 다 두려워해서 벌벌 떨었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 왜냐, 골리앗의 큰 키가 구척 장신이요, 거인이 무장을 하고 나왔는데 다윗이 보니까 돌을 아무데나 던져도 맞겠다 말입니다. 조그만 사람 같으면 던지면 맞추기 힘든데 하도 거인이 오기 때문에 눈감고 던져도 맞을테니까 문제없다. 그래서 해석을 그렇게 하라는 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친답니다. 무엇을 보든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해석을 해야지 부정적으로 보도록 해석을 해서는 안된다고 그렇게 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마음에 결심을 해야 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항상 긍정적으로 나는 생각하고 말하겠다. 결국에 울어보고 웃어보니 뭐하던 것이 낫더라구요? 웃는 것이 낫더라구요.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해보았더니 결국에는 긍정적인 말이 열매를 맺으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읽어서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생각이 긍정적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져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물을 씻고 있는데 예수님이 와서 배 좀 빌려달라고 해서 배를 빌려드렸더니만 주님께서 배에서 설교하시고 난 다음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 상식적으로 어림도 없는 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해가 뜨고 난 이후에 물고기는 모두다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잠을 자기 때문에 그물에 안걸려요. 얕은 곳으로 밤에 나오면 해변가에서 고기를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을 받아서 뭐라고 했습니까?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지나 잡은 것이 없으되 주님 말씀에 입각해서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그냥 그물을 던지는 것 아닙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니까 말씀에 따라서 그물을 던지겠다. 우리 신앙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의지하느냐.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면 흑암에서 광명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긍정적으로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무덤가에 오셔서 무덤에 돌을 옮겨놓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럴 때 마르다가 말하기를 오라비가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주님께서 마르다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마르다가 돌문을 옮겨 놓았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옮겨놓은 것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옮겨 놓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말씀이 이 성경말씀 속에 있습니다. 이게 여러분의 금고입니다. 여러분의 보고요, 여러분의 금고입니다. 이 말씀 속에 여러분의 필요한 모든 것이 다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성경말씀을 잘 사용하면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15장에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3. 항상 긍정적으로
잠언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는데 마음을 어떻게 지킵니까? 말씀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말씀 위에 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했으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부여잡으면 마음 속에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성경을 새로운 눈으로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안믿는 사람은 그것을 모르지만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이 성경입니다. 성경에 있는 약속의 말씀을 여러분께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언약으로 안다면 그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고 의지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주세요.
마음에 우울하고 불안하고 괴로우면 시편 23편을 읽으십시오. 저는 시편 23편을 종종 읽습니다. 왜냐하면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것을 읽고 난 다음에는 나는 내 인생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축복을 다 허락해 주셨습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주셔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는 것은 형통하게 만드는 것이요,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은 평안을 주시는 것이요,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나를 축복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질구래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날 때라도 주님이 같이 계시면 사망의 세력을 다 멸하시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하사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시고 큰 원수가 다가오면 잔치상을 차려 주시고 나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축복을 한평생 따르게 해주시니 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23편을 묵상하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꿈을 꾸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을 갖고 입으로 시인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에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천국 열쇠를 내게 주노니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리라.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 대한 천국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천국 열쇠를 내 손에 주님이 주셨으므로 여러분이 기도와 믿음으로 천국 문을 열고 닫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열고 닫느냐. 생각과 꿈과 믿음과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하늘 문을 열고 닫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차원의 영성을 통해서 여러분 천국문을 마음대로 열고 닫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생각이 긍정적이고 항상 성공적인 꿈을 꾸십시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나아지는 성공적인 꿈을 꾸시고 변화를 받아 내 환경이 좋아지는 것을 늘 꿈꾸십시오. 건강해지고 잘살게 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축복받게 되고 남에게 도와줄지라도 남에게 손내밀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그러한 내 자신이 된 모습을 꿈꾸십시오. 마음 속에 꿈꾸는 것은 오늘 여러분 전화기에 사진찍는 기구가 있는 것처럼 마음에 여러분의 청사진을 찍는 것입니다. 그 사진 찍은 대로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젊은이에게는 환상을, 늙은이에게는 꿈을 주는데 여러분 젊은이도 꿈을 꾸고 환상을 보고 늙은이도 꿈을 꾸고 환상을 보고 주님은 그를 통해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삼차원의 세계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를 뛰어 넘어 계시고 사차원의 영성은 눈에 안보이지만 생각이 바로 사차원이요, 꿈이 사차원이요, 여러분 믿음이 사차원이요, 여러분 입술의 고백이 사차원으로써 이를 통해서 여러분의 운명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가슴 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원망하고 불평해도 원망과 불평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문제해결의 키는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천국 열쇠는 여러분에게 준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을 통해서 천국 열쇠를 열어야 되고 꿈을 통해서 천국의 문을 열어야 되고 믿음을 통해서 천국 문을 열어야 되고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천국문을 열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로써 늘 말하는 것이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자기의 힘이 약하면 말로써 힘을 줘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승리한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축복받았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화목하다. 말로써 나를 변화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여러분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여러분 손에 들려있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주님께서 내 운명을 내 손에 맡기셨다. 천국열쇠를 내게 주셨다. 그 천국 열쇠가 바로 생각, 꿈, 믿음, 말이 천국 열쇠인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여러분의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기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우리 가운데 주셔서 우리가 기적을 통해서 우리 주위를 변화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결론>
성경말씀 잠언서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죽고 사는 권세가 있다. 보통 권세가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혀의 말로써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말로써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내가 부정적인 말을 하면 그만큼 사람들을 죽이고 내가 긍정적인 말을 하면 그만큼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인도의 선교사로 잘 알려진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은 69살에 중풍에 걸려서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인도에서 공수를 해서 미국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미국에서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데 의사들이 다 말했습니다. “나이가 고령이고 중풍은 또 뇌혈관이 터졌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스탠리 존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능력을 믿었습니다. 방에 들어오는 간호원이나 의사들보고 아침에 들어오면 하는 말이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Good morning!!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아라. 저녁에도 Good night!! 그런 소리하지 말라. 반드시 아침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스탠리 존스 Get up in the name of Jesus Christ!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그래서 간호원들이 어떻게 그렇게 말합니까? 우리는 목사도 아닌데... 막 화를 내면서 그러면 나 이 병원에서 퇴원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들어올 때 스탠리 목사 일어나라.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의사보고도 진찰하기 전에 일어나라고 하라. 그런데 희안하게 의사들이 다 못 일어난다고 했는데 성경 말씀대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고 계속 말한 결과에 스탠리 존스 목사님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인도로 돌아가서 20년동안 더 하나님 사업을 하다가 천당 갔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말이 얼마나 힘이 있습니까? 천국 열쇠가 여러분 입술에 있지 않습니까? 자매님 여러분 집에 가서 남편보고 자꾸 축복을 해주십시오. 당신은 잘됩니다. 당신은 성공합니다. 승리합니다. 그것 입에 발린 소리 아닙니다. 실제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당신은 건강합니다. 당신은 축복 받았습니다. 내 입의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힌다. 보통 말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 입술의 말입니다.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이 입술을 그냥 놀려 놓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식들 기르면 자식들 늘 축복해 주십시오. 너는 머리가 좋다. 너는 잘된다. 너는 하나님을 잘 믿어라. 너는 성공한다. 긍정적인 말을 해주십시오. 그 말들이 다 축복의 조각들이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말은 기적을 일으키니는 것입니다. 말에는 위력이 있어요. 여러분의 말을 통해서 위력이 일어나기 때문에 제가 저를 살펴보면 제가 요사이 굉장히 건강해졌잖아요.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마다 저보고 건강히지라고 축복을 해주니까. 기도를 해주시고 조용기 목사 건강해져라. 나는 90만 살겠다고 하는데 120까지 살라고...
그 집약된 힘이 오늘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제가 저를 생각해 봐도 희안해요. 어디서 이렇게 힘이 생기는지 모르겠어요. 하루종일 서서 설교하라고 해도 하겠어요. 물론 우리 집사람이 날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주시고 축복을 해 주신 것이 제일 첫째 원인이겠지만 여러분 우리 성도 여러분의 축복과 기도가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여러분 위해서 늘 축복을 합니다.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 들어오며 나가며 꼴을 얻고 축복 받으라. 영혼이 잘되며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늘 넘치게 얻으라. 그게 천국문을 열어 제켜 놓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회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마다 복을 받게 되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교회 나와서 하나님 백성이 되었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사람이 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옛사람은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고 우리 마음 속에 마귀가 갖다준 부정적인 생각일랑 다 쫓아내 버리고 긍정적인 생각, 부정적인 꿈은 긍정적인 찬란한 꿈으로 부정적인 믿음, 안된다. 못된다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는 긍정적인 믿음으로 부정적인 말은 긍정적인 말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실제로 달라졌어요 여러분, 여러분 천국 열쇠가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을 쓰시라구요. 여러분은 일반 사람하고 다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하나님의 사랑 하늘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압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그 모습을 복구한 사람으로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꿈꾸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으니 보통 큰 사람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 아니지요. 여러분 할 수 있습니다. 하면 됩니다. 무엇이든지 해 보십시오.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능력은 하나님께 있으니
고후 4:7~10
‘높여주심’은 1990년부터 이집트에서 16억 이슬람 영혼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였던 유해석 선교사가 지은 책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신문팔이와 구두닦이를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도왔습니다. 중3 때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했으나 회사가 망하면서 실직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현실을 비관하고 16살 나이에 음독자살을 시도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의 문턱을 넘었습니다.
우연히 전도를 통해 교회에서 예수를 만나 구원을 받았고 그 후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교인의 손길을 통해 어렵게 신학대학과 대학원을 마친 뒤 1990년 한국 오엠 선교회를 통해 영국에서 선교 훈련을 받고 이집트 빈민가에서 첫 선교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4번의 말라리아로 왼쪽 청각을 잃어버렸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몸 상태가 심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난의 길이 영광의 길이 되었다며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캄캄한 절망 속에서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이 한 줄기 빛으로 찾아오셔서 기댈 곳 없는 저에게 능력의 언덕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계를 품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하는 생면부지의 이슬람 영혼들을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죽기를 소망했던 16살 소년을 16억 영혼을 품은 거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다고 무릎 꿇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비로소 능력으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유해석 선교사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이 높여주셨다고 간증합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 자신을 깨지기 쉬운 질그릇에 또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배에 비유하였습니다. 자신은 깨지기 쉬운 존재이지만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환난 가운데도 풍성함을 누리며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7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하려 함이라” 여기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는 원어로 ‘테스 뒤나메오스 에 투 데우’인데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약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강함을 자랑하였습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심히 큰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이 역사하니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열매 맺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질그릇 같이 약한 우리에게 큰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약하다고, 부족하다고, 가진 것이 없다고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하여야 합니까?
첫째로 낙심하지 아니하며
스탠리 존스 (E. Stanley Jones)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선교하였지만 완악한 인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낙심이 되어 사과나무 밑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때 나무 사이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존스야, 피곤하여 지쳤지?” “예, 하나님, 많이 지쳤습니다.” “왜 지쳤느냐?”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저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아무 열매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낙심한 스탠리 존스에게 말했습니다. “사과나무를 보아라. 지금은 열매가 없는 것 같으나 뿌리가 땅에 묻혀있고 잎이 태양을 향해 펼쳐있으니 언젠가 열매가 맺힐 것이다. 채널이 나를 향해 맞춰져 있다면 반드시 열매가 맺힐 것이니 낙심하지 말아라. 아름다운 열매가 곧 맺힐 것이다.”
본문 8절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여기의 ‘낙심하지 아니하며’는 원어로 ‘우크 엑사포루메노이’인데 ‘심령이 눌리지 아니하며’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거짓 사도들로 인하여 많은 모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미혹된 교인들이 바울을 대적하였습니다. 심히 낙심할 만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답답한 일들이 많습니다. 직분을 맡아 일하면 오해와 시기와 모함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 즉 질그릇 속의 보배이신 예수께서 답답함 가운데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고 낙삼하지 말고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버림받지 아니하며
롤랜드 헤이즈(Roland Hayes)는 신앙이 독실한 가수였습니다. 그러나 흑인이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독일의 베를린에서 음악회를 할 때입니다. 극장에 모인 청중들은 거의 백인이었습니다. 막이 오르고 헤이즈가 노래를 시작하려고 할 때 “흑인의 노래는 듣지 않겠다. 노래를 그만 두라!”고 청중들이 소리쳤습니다. 심지어 상스러운 욕을 하며 물건을 집어 던집니다. 헤이즈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나가는데 눈앞에 예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온갖 조롱과 욕설과 침 뱉음을 당하시는 모습입니다. 그 순간 헤이즈는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손가락질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버림을 받아도 물러서지 않으셨다. 그런데 왜 내가 물러서야 하는가?” 그는 용기를 내어 청중 앞에 다시 섰습니다. 소란스럽던 청중들이 조용해졌습니다. 헤이즈가 흑인영가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잠시 후 감동한 청중들이 박수와 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음악회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핍박과 박해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버린 바 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는 것은 능력의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여기의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는 원어로 ‘우크 엥카탈레이포메노이’인데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박해를 받는 상황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박해를 통해 믿음의 진가를 보시고 박해 속에서 인내하며 충성하는 성도에게 상급을 베푸십니다.
사랑과 의를 행하다가 받는 박해는 상급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박해는 신앙을 성장하게 하며, 더욱 큰 지혜를 얻게 하고 더 거룩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박해 받을 때 버림당할까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통해 오히려 주님께 쓰임 받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박해와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망하지 아니하며
홀로센버그 수용소의 군의관 베스게(Eberhard Bethge)는 1945년 4월 9일의 일기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날은 히틀러에 의해서 많은 독일의 장성들이 사형을 당하고 또 외국인들도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중에 나의 영혼을 사로잡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히틀러 암살 운동에 관여했다는 혐의를 받고 처형을 받게 된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였습니다. 그날 사형 집행방식은 총살형이 아닌 교수형이었는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죽음 일보 직전의 그의 평화로운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두려움이 아닌, 기쁨이 넘치는 모습이었는데, 오랫동안 사형수를 돌보는 의사를 해왔지만, 자신의 목을 매달아 숨통을 끊어버릴 올가미 바로 밑에 서서, 저렇게 평안하고, 저렇게 기쁘고, 저렇게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인생의 가장 연약했을 본회퍼의 심장 속에 분명하게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기에 나치가 목을 매달았지만 평안하게 예수의 품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 본회퍼의 가슴 속에 예수 생명의 부활을 품었기에 사망의 화살이 그의 영혼을 뚫을 수 없었습니다. 교수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그는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망하지 아니했습니다. 사실상 승리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여기의 ‘망하지 아니하고’는 원어로 ‘우크 아폴뤼메노이’인데 ‘생명이 끊어지지 아니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대적들의 갑작스러운 습격을 당했어도 죽음의 위협이 바울을 망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설사 생명이 끊어진다 할지라도 영광스러운 안식에 참여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궁극적인 멸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이유로 넘어진다 할지라도 결코 망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사업에 실패하거나 대적자들로 넘어지거나 하나님의 징계를 당해도 결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을 때 어떠한 경우에도 재기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5절에서 고백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담대한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이시온 선교사는 밤낮 테러가 일어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선교에 관한 책을 보다가 구한말 26세 때 조선에 들어온 감리교 여자 선교사 루비 캔드릭(R. Kendrick)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녀는 안타깝게도 9개월 만에 병에 걸려 순교했지만 그녀가 남긴 일기에는 “내게 천 개의 심장이 있다면 나는 그 심장을 하나하나 터뜨려서 조선을 위해 죽겠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시온 선교사는 그 글을 읽으면서 “너도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그와 같이 죽거라.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천 개의 심장’이라는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선교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이 땅을 보면 내일이 없어 보이지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면 미래가 보입니다. 이 땅을 보면 눈물만 보이지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면 미소가 생깁니다. 이 땅을 보면 절망으로 가득하지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면 살아야 할 힘이 생깁니다.” 모든 것이 힘들다고, 망했다고 느껴지십니까?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실패하였습니까? 병중에 있습니까? 절망적 상태에 놓여 있습니까? 그렇다면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이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게 하십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