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스브스
참고글
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606040448560841(기사)
https://www.youtube.com/watch?v=BFJb0ZOWglg (신비한 tv서프라이즈)
https://www.youtube.com/watch?v=CukUfiG_ohw (디바제시카의 토요미스테리)
A6 살인사건:
영국 형사사법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가장 논쟁거리가 큰 사건으로 40년동안 이어진 사건.
영국 1961년 8월 밤 9시.
한 옥수수밭 근처에서 차를 세우고 데이트를 하던 남녀가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미혼 여성 22세 발레리 스토리와 기혼남성인 36세 마이클 그렉스텐.
그 때 갑자기 총으로 무장한 복면강도가 나타나 그들을 납치한다.
강도는 그렉스텐에게 총을 겨누며 운전을 하게 했는데 런던 북부를 4시간 동안이나 달렸고,
다음날 새벽 1시 30분 인적 없는 A6번 도로변에 차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그렉스텐을 살해하고 발레리를 강간했다.
범인은 발레리에게도 총을 쏘았고 실탄이 떨어지자 탄창까지 바꿔가며 7발이나 난사했다.
그러고는 그들의 차를 빼앗아 도주했다.
발레리는 가슴과 목 등 5발을 맞았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다음날 새벽 한 농부의 도움으로 병원에 후송됐다.
그녀는 척수를 다쳤고 상반신 일부와 하반신이 마비되어 평생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에 경찰은 범행이 일어난 도로의 이름을 따 A6사건이라 명명하고, 본격 수사에 돌입 한다.
얼마 후 범인이 타고 간 피해자의 차량과
런던의 시내버스에서 범행에 사용된 총기, 그리고 한 호텔에서 빈 탄창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범인을 특정할 만한 증거나 지문은 없었다.
그러던 며칠 후 유력한 용의자가 체포된다.
그는 피터 알폰이라는 남자로,
범행에 쓰인 탄피가 발견 된 비엔나 호텔에 사건이 발생한 밤 가명으로 숙박했었다.
또한 도박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기에 동기가 충분하다고 판단되었다.
경찰은 피터 알폰과 함께 다른 용의자들을 세웠고
최종적으로 유일한 목격자인 발레리를 불러 범인 식별절차를 밟게 되는데..
경찰은 용의자들에게 한 마디씩을 하게 시켰다.
그렉스텐을 살해한 뒤 “이 나쁜 놈, 왜?” 라고 절규하는 발레리에게 범인이 했다는 말.
“조용히 안 해? 난 나쁜 놈(finking)이야!”였다.
그런데 이것이 상당히 런던 토박이 특유의 말투였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발레리가 지목한 사람은 피터 알폰이 아닌 다른 남자였다.
그는 25세의 제임스 핸래티.
절도, 주거침입 등의 전과가 있던 인물.
그 역시 범행에 쓰인 탄피가 발견된 비엔나 호텔에 숙박한적이 있으나,
사건 전날이었기에 경찰은 그를 주요 용의자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런던 토박이 특유의 말투와 차가운 음성,
복면 위로 희뜩이던 파랗고 커다란 눈동자를 발레리는 기억한다고 말했다.
발레리는 핸래티를 범인이라고 두 번 세 번 단언했다.
경찰에 체포된 제임스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경찰 조사에서 알리바이를 입증하지 못했고, 재판 도중 진술을 번복하기도 했다.
핸래티는 무죄를 주장했으나 이듬해 사형을 선고 받았고, 항소마저 기각 당했다.
그후, 수많은 사람들이 제임스 헨레티의 무죄를 주장하고 나서는데..
핸리티 가족과 변호인단을 중심으로 A6변호위원회가 조직되는데,
영국 언론상을 수상한 바가 있는 저널리스트 폴풋 등 수십명의 사회 유명인사들이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제임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1.범행 동기및 범죄 전력
비록 제임스에게 4건의 전과가 있었지만
모두 차량절도,주거침입 등 자잘한 전과로 이런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주장.
또 제임스에게는 뚜렷한 살인동기가 없었다.
돈이 목적이었다면 그렉스텐의 소형차(56년형 모리스 마이너)를 노리지 않았을 테고,
강간을 의도했다면 그렇게 오래 그들과 함께 머물렀을 리 없다는 게 변호인의 주장이었다.
2.증거부족
수사결과 범행에 사용된 총 등 어떤 물적증거에서도 그의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고,
경찰은 그 어떤 법의학적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DNA검사 기법이 나오기 전이었으므로 피해자의 속옷에 묻은 단순 정액검사를 실시했는데,
범인과 핸래티가 O형 혈액형인점이 일치했으나 런던의 40%가 O형이었다.
결국 유죄판결의 결정적인 근거는 발레리 스토리의 확신에 찬 증언뿐이었다는것이다.
3.수사과정의 문제점
결정적으로,
범행 직후 핸래티가 피해자 차량을 운전하는 걸 목격했다는 재판 증언은
A6변호위원회의 조사결과 정황상 불가능하다는 게 드러났고, 경찰도 그 사실을 알면서 위증을 묵인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피의자 진술자료를 고쳐 쓴 사실도 뒤늦게 밝혀졌다.
이에 당시 무려 9만여명의 사람들이 그의 무죄 방면에 동의하는 서명을 남기며 그를 응원하게 된다.
특히 존레논과 오노요코는 후원금을 내고 공개적으로 제임스의 가족을 만나 위로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형선고 된지 6주만인 1962년 4월 4일.
제임스 핸래티는 교수형에 처해진다.
사형집행 전날, 마지막으로 가족을 만났던 제임스 핸래티.
그의 동생은 그가 마지막까지 자신의 무죄를 밝혀달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결국 사건을 빨리 종결하기 위해 무고한 제임스를 범인으로 몰고간 경찰을 질타했으며,
발레리 역시 불완전한 기억에 근거한 섣부른 증언으로
죄 없는 한 남자를 죽게 만들었다는 원성을 피할 수 없었다.
발레리 스토리는 수많은 언론사로부터 집요한 인터뷰 요청을 받았지만
이후 그녀는 어떤것도 말하거나, 반응하지 않았고 침묵을 지켰다.
이렇게 A6 사건은 영국에서 수십년동안 큰 논란으로 남게 된다.
제임스의 사형이 집행된지 35년후인 1997년.
드디어 영국 사법부에서 A6사건을 공식적으로 재수사할것을 결정한다.
다행히 당시엔 PCR 검사기법이 갓 도입됐을 때였다.
범행당시 총을 감쌌던 손수건과 발레리의 속옷에 남은 정액의 DNA를 검출하여
사망한 제임스 대신 유가족의 DNA와 대조하기로 한다.
그리고 얼마후, 그 결과가 발표 되는데...
두 DNA는 완벽히 일치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제임스 본인의 DNA가 아니란 점에서 검사의 신뢰도에 의문을 제기했고
급기야 2001년엔 제임스 핸래티의 무덤을 파내 대조하기까지 하는데...
결국 무려 40년동안 무죄를 주장하며 영국을 뜨겁게 달군 A6사건은 제임스 핸래티가 진범으로 확인된것이다.
법원은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핸래티의 유죄를 확정짓는다" 라고 최종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언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이번에는 증거의 ‘오염 가능성’이 제기됐다.
60년대 초반의 허술했던 증거물 관리ㆍ보존 관행,
현장에서 경찰서로 법의학실로 법원으로 증거물이 오가는 동안 다른 증거물과 부딪혔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법의학팀은 반박했다.
“만일 증거물이 오염됐다면 총기를 싼 손수건에서 핸래티 외에 ‘진범’의 DNA도 나와야 하지만
거기선 오직 한 사람, 핸래티의 DNA만 검출됐다.
그리고 피해자의 속옷에선 단 두 명- 핸래티와 그렉스텐-의 DNA만 나왔다”
그리고, 사건발생 당시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고간 가해자로서 '거짓말쟁이'라는 질타를 40년 가까이 받아야 했던 발레리 스토리는
사건이 완전히 종결된지 1년후인 2002년
62세의 나이로 드디어 인터뷰에 응한다.
“
나는 핸래티의 가족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핸래티를 옹호했던 사람들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어느 어머니도, 자신의 아들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긴 힘들거에요.
모든 살인자에게는 어머니가 있지요. 어머니는 그들이 해야한다고 여긴 일을 했을뿐입니다.
”
(그밖의 이야기)
-핸래티의 유가족은 여전히 그의 무죄를 믿고 있다고 한다.
-피살자인 그렉스텐의 유족도 큰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
저널리스트 폴풋은 <누가 핸래티를 죽였나>(1971)라는 책에서 피터 알폰이 진범이며, 그랙스텐의 아내 재닛이 사건 배후에 있다고 추정했는데 그렉스텐의 아들은 11살에 이 책을 읽었다.
그는 "어머니는 내가 당신을 의심하는 기미라도 보일까봐 두려워하며 내 눈치를 보곤 했다. 나 역시 위축된 삶을 살아야했다." 고 밝혔다.
-제임스 핸래티는 긴 세월 동안 사형제의 순교자이자 무고한 희생자로 떠받들어졌다. 그는 사형이 폐지되기 전의 영국에서 사형된 마지막 8명중 한명이다.
-발레리는 사건 후 10개월 뒤 휠체어를 타고 직장에 복귀해 병든 부모를 부양하며 장애인 이동권 개선 사업에 몰두했다.
그녀는 사형제도 옹호론자였고 독신으로 살았다.
-발레리는 인터뷰 등으로 번 돈 4만 파운드를 14년 슬라우 교통국 장애인 지원 사업에 기부했다. 교통국은 그 돈으로 마련한 장애인 버스에 ‘발레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한다.
- ‘데일리 메일 온라인’은 법원 최종 판결을 보도하며
스토리가 ‘ 위엄 있는 침묵(dignified silence) ’을 지켰다고 썼다.
- 1966년 방영된 BBC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늘 핸래티의 유죄를 확신했다. 그는 이 나라의 법에 의해 재판을 받았고, 배심원은 그를 유죄로 판단했고, 선고 받았다..
나는 우리 모두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유죄다”
첫댓글 헐..흥미롭다...한강 그거 생각나노 ㅠ...
헐 진짜 한강 생각나네..
피해자가 목소리 듣자마자 범인이라고 하는데 시발 믿어주지도 않고 살인범은 웬 후원까지 처받고,,,
뒤지기 전까지 존나 뻔뻔하네
와 뻔뻔항놈 굿다이너
진짜 아량이 엄청 나시다..
와 범인놈 어차피죽는데 끝까지 아니라고 우겼네ㅋㅋㅋ
허.. 중간까지는 저렇게 세간의 관심을 받는 사건에 사형이 너무 빠른거 아닌가 싶었는데.. 진범이여서 피해자한테 다행이네
피해자가 맞다는데 왜 제3자들이 난리여
감싸준 사람들이 더 괘씸하다... 뭘 안다고 나대
씨벌 피해자가 맞다는데 왜 지들이 난리
와... 그래도 잡혀서 다행이네.. 부당거래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