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3월 6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율법학자들과 바리아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오 23,1-12)
“The scribes and the Pharisees
have taken their seat on the chair of Moses.
Therefore, do and observe all things whatsoever they tell you,
but do not follow their example.
For they preach but they do not practice.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악을 버리고 선을 실천한다면 과거에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제1독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교만하고 위선적인 삶을 살았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들처럼 살지 말라고 하시며,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높은 지위나 명예는 많은 사람이 지향하는 목표이며, 때로는 삶의 자극제가 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정당하고 성실하게 노력한 결과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들에게 칭찬이나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칭찬과 인정이 자기 자신의 이익과 욕심만을 채우려는 것일 때 그는 결국 심신이 허약해질 것이며, 그가 속한 공동체도 오래 지탱되지 못할 것입니다. 남을 위해 살아가면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되고, 그리하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와 몸도 더욱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조건 없이 봉사하는 이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봉사는 남을 위한 일이지만 봉사하면서 얻는 기쁨과 보람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 됩니다.
☆☆☆
유다인들은 성전 율법 규정에 따라, 겉옷 가장자리에 자줏빛 끈으로 장식한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기억하며 율법을 지키는 것을 언제나 명심하도록 하는 구실을 했습니다. 또한 성구갑을 만들어, 그 안에 구약 성경 구절들을 적은 양피지를 이마나 팔에 달고 다녔습니다. 늘 율법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율법을 사랑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유난스럽게 겉옷에 술을 길게 만들었고, 성구갑도 남들 눈에 띄도록 크게 만들어 달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인사받기 좋아하는 그들은 뭔가 달라 보여야 했습니다. 허영심과 우월감이 높은 사람들의 심리가 의복이나 가식적인 행동으로 겉치레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의 이런 껍데기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명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사람들이 필요 이상의 재물을 소유하며 과시하는 것은 다 같은 심리입니다. 사람들에게 관심과 호감을 받으려면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치장해야만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내적으로 비어 있는 사람일수록 늘 남의 눈을 의식하며, 이런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내적인 겸손’입니다. 겸손이 없는 행동은 결국 겉꾸밈으로 흘러 금방 그 힘을 잃고 맙니다. ‘무늬만’ 신자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삶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남을 섬기고 자신을 희생하는 내적인 겸손 때문입니다.
☆☆☆
잘 익은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입니다. 알이 꽉 차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짜 벼’는 고개를 숙이고 싶어도 숙여지지 않습니다. ‘알맹이’가 없는 탓입니다. 가을 들판이 되면 어디서나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대충 보더라도 어느 것이 가짜 벼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자리가 높아지면 웬만한 사람은 착각합니다. ‘대단한’ 사람이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람은 ‘그대로’이고 자리만 높아진 것인데, 그걸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습니다. 점차 ‘마음의 고개’도 숙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뻣뻣한 사람’으로 바뀌어 갑니다. ‘알맹이 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가짜가 판치는 세상이 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복음 말씀도 ‘자리의 유혹’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현대판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섬김의 자리에 앉았건만 ‘섬김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이들을 ‘자신의 판단’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낮추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어의 이해한다는 말은 ‘언더스탠드’(understand)입니다. 직역하면 ‘아래에 서다’이지요. 상대에게 맞추어야 이해가 가능해진다는 암시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어울리게’ 사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자리에 가든 고개를 숙입니다. 아무도 그런 사람을 가벼이 보지 않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렇다고 ‘육친의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그렇게 받아들이면 ‘어린이의 신앙’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나를 있게 하신 분이며,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주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다.” 진리는 주님께만 유보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정확한 이론도 그분 앞에선 ‘참고 사항’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진정 ‘아는 사람’은 고개를 숙입니다. 낮추어야 할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합니다. 스승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인지천산 불여 천지일산’(人之千算不如天之一算)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천 번’을 계산해도 하늘이 ‘한 번’ 계산함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하늘이 한 번 봐주는 것에 못 미친다는 말과 같습니다. 중국 고전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복음 말씀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하늘의 힘이 개입하기에 그렇습니다.
☆☆☆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은 맹목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사야에게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은 이사야가 하느님을 이해하는 독특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이사야에게서는 다른 우상들과 절대 공유되어서는 안 되는 독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에 따라 살지 않는 삶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배척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갖 종류의 우상 숭배와 하느님의 눈길을 피해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교만은 반드시 단죄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사야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생활을 버리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올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형식적인 예식으로만 일관하는 이스라엘에게 구체적인 행동으로 그 믿음을 증언하라고 외치고 있으며, 이렇게 하느님께 돌아온 죄인들은 그 죄가 아무리 다홍같이 붉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용서로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과, 말만 앞세우고 실천하지 않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는 가르침입니다.
순종과 겸손의 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최고의 덕과 가장 아름다운 덕은 무엇일까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그것을 ‘순종의 덕과 겸손의 덕’으로 보았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육화의 신비에서 ‘지극한 겸손’을,
십자가 수난의 신비에서 ‘사랑의 순종’을 발견하고
이를 보화로 여겨 죽을 때까지 마음에 간직하며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최고의 덕목과 아름다운 덕목은 그래서 우리가 매일 쌓아야 할 덕목은
바로 ‘순종과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 덕행은 참으로 지키기
어려운 것들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 데서,
겸손하지 못한 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범하는 가장 큰 죄는
‘불순종 죄’이고, ‘교만의 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듣는 이유도 그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교만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끊임없이 낮아지려고 하는 삶, ‘너’의 발아래에 머무르려고 하는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입니다.
비하
- 윤인규 신부-
자신을 낮추는 비하 (humiliatio) 나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 (humilitas) 이나 모두 ‘흙 (humus)’ 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흙은 사물의 마지막 모습인 동시에 첫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처음과 마지막에 대해 요한묵시록은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묵시 1, 8; 21, 6; 22, 13) 라고 증언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창조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손에 드셨던 첫 흙이며, 완성하시는 마지막 흙으로서의 마음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 2, 6-8) 이렇게 비하나 겸손은 모든 것의 꼭지인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합니다. 마침내 성자께서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 것처럼 사람을 하느님께 이르게 합니다.
자신을 낮출 줄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자신을 하느님 안에서 완성시키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순례는 자신이 부서지고 녹고 사라지는 여정을 거치게 됩니다. 세월 속에서 큰 바위가 더위와 추위를 겪고 비바람을 맞으며 작아질 대로 작아지고 가난해져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먼지가 되듯, 사십 년간 광야를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할 여정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는
-김찬선신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참으로 저를 아프게 하고 괴롭게 하는 복음입니다.
저뿐이 아니고 대부분의 성직자들에게 그러할 것입니다.
천당에 가면 성직자는 없고 평신도들뿐이라지요.
성직자는 가르치기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고
평신도는 가르치는 대로 열심히 실천을 하였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니 자조적으로 얘기한다면 성직자는 사랑을 실천하는데,
그 사랑은 자기는 지옥에 가면서도 다른 사람을 천당 가게 하는,
그런 사랑인 셈입니다.
지난 금요일 공부를 끝내고 신자들과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예약해놓은 식당이 금육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취소하고 다른 식당으로 갈지를 물으며 제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관면해주면 안 되냐는 것이지요.
금요일 금육의 정신이 꼭 고기가 아니라
맛을 즐기는 것을 금요일만이라도 삼가자는 것이니
꼭 고기 안 먹는 것에 구애받을 것 없다고 할 수 있고
그러니 관면을 줄 수도 있지요.
문제는 신자들에게는 금육의 규정을 어깨에 지워놓고
그래서 신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열심히 지키는데 비해
신부는 관면할 수 있으니 상황에 따라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 하기에 사제 수품 미사의 경문을 보면
아주 적절하면서도 감동적인 말이 나옵니다.
주례자는 새 사제에게 복음서를 수여하며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는 이제 복음 선포자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으십시오.
읽는 바를 믿고,
믿는 바를 가르치며,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십시오.”
그런데 이 말씀을 이렇게 바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읽는 바를 믿고,
믿는 바를 실천하고,
실천하는 것만 가르치십시오.”
거의 아무 것도 가르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매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나눠주라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더더군다나 자기는 회개치 않으면서
남에게 회개하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거창한 것까지는 못 가르칠지라도 그보다 쉬운,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는 있고,
열심히 기도하라고 정도는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입 다물고 자신의 회개를 위해서나 눈물을 흘려야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인들은 용기 있게 이렇게 한 분들입니다.
나도 할 수 있으면 말 안하며 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매일 강론해야 하고
어디 가서나 좋은 말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는 저와 달리
용기 있게 입 다물고 용맹정진하여 진심으로 회개한 분들입니다.
그리하여 복음이 저 밑에서 차고 올라와
발이 입이 되어 복음을 전하고,
손이 입이 되어 복음을 전하고,
눈이 입이 되어 복음을 전하고,
입은 감사와 찬미로 복음을 전한 분들입니다.
담장을 낮춘 선생님
- 송동림 신부-
지인 가운데 교직에 계시다가 은퇴한 선생님이 계신다. 남은 여생을 고향에서 지내고 싶어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내려가셨는데, 웬일인지 주위 분들이 자신의 집에 찾아오는 것을 은연중에 꺼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고향사람들의 집에 비해 눈에 띄게 좋은 집, 높은 담장, 육중한 대문 등이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며칠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담장을 허물고, 밖에서 집 안이 훤히 보일 정도로 개방된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대문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런 갑작스런 변화에 어색해하는 분들도 있지만 이전과 달리 집에 찾아오기도 하고 훨씬 편안하게 대하더라는 것이다. 본인도 담장을 낮추고 대문을 없애면서 집 밖 풍경도 아름답고 이웃도 자연스럽게 볼 수 있어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느낀다고 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 따른 모범을 보이셨다. 낮은 데로 가셨고 낮은 곳을 향하셨다. 낮은 자리에 앉으려 했고, 낮은 사람들과 함께했다. 기꺼이 희생의 길을 가셨다. 그래서 더욱 예수님의 행적이 부각되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좋은 평가를 받는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도 원만하다. 어쩌면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겪고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만든 높은 벽 때문인지도 모른다. 담이 높으면 안정감을 줄지는 모르지만 집 밖의 자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이웃과의 교류도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고향 사람들을 향해 과감하게 담을 허물고 대문을 없앤 그 선생님이 가끔은 대단하게 여겨진다. 생각해 보면 벽을 허물고 담을 낮추고 대문을 없애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마음의 벽을 허무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첫 마음
-김효준신부-
사제품을 받고 첫 본당에서 사목을 시작할 때 저는 더위가 한창인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반드시 수단을 입었습니다. 미사 시작 30분 전에는 늘
고해소에 들어가 앉아 있었습니다. 미사 경본을 읽을 때는 한 구절 한 마디를
또박또박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면담을 요청하는 교우들이 있으면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든지 만나서 함께 고민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수단이 어느 옷장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해소는 너무
답답하게만 느껴집니다. 미사 경본을 읽을 때 실수로 한 페이지를 건너뛰고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면담을 요청하는 이가 있으면 가슴부터 덜컥
내려앉습니다. 10년 동안 저는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좋지 않은 모습으로
너무 변했습니다. 10년이라고 하는 시간이, 그 시간 동안 쌓아올린 많은 지식과
경험들이, 약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많은 지식과 경험이 나를 완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완덕으로 이끄는
힘은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려는 내 의지이며 자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엄중히 들으며
-김찬선신부-
우리에게는 고약하고 성숙치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좋은 얘기인데도 누가 얘기를 하면 다 듣기 싫은 경우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실은 따르지 않더라도
그들이 하는 말은 다 실행하고 지키라고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행실이 그릇되어도
그들의 가르침이나 말은 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오늘 두 가지로 저를 반성합니다.
하나는 신앙적이지 못한 저에 대한 반성입니다.
어떤 분의 강의를 듣게 되면 강의는 잘 하는데
꼭 하느님을 가지고 장사하는 것 같아서 듣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를 통해서도,
그 무엇을 통해서도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인품에 따라
제가 받아들이기도 하고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면
이것은 신앙적으로 성숙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에 의해 좌우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권위와 능력과 인품에 의해 좌우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고 인간의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그 말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로 아무리 내가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말이 하느님에게서 온 맞는 말이면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위선적인 저에 대한 반성입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겠지만 좋은 말은 많이 하는데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에 대한 반성입니다.
어디 가든지 좋은 말을 해야 되는데
좋은 말을 할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위선적입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와 저의 위선 사이에 고민을 합니다.
위선적이지 않기 위해서 입을 다물어야 하는가,
나의 위선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니 그래도 복음 선포를 해야 하는가?
재작년 저희 수도원 회의에서 하나의 결정을 하였습니다.
복음 선포 차원에서 인터넷 상에 말씀 나누기를 하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다른 형제들은 지금 거의 안 하고 저만 하고 있습니다.
왜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저와 같은 고민 때문입니다.
보통의 강의나 강론도 위선 때문에 부담스러운데
이것은 글로 남기는 것이고
그것도 인터넷 상에서 여기저기 막 떠다니는 것이기에
너무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도원에서 형제들이 하는 강론을 들으면
참 좋은 내용이 많아서 강론을 올렸으면 하는데
형제들은 영혼이 참 순수해서 올리지 않고
저는 뻔뻔해서 글을 계속 올리고 있습니다.
강론을 하건 하지 않건
저는 어차피 위선적이라고 철판을 까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복음 선포를 위장하여
나의 선과 사랑을 과장하는 것이 아니 되도록
오늘 주님의 말씀을 엄중히 들으며
가책의 채찍질을 포기하지 않기를 빌 뿐입니다.
인생이라는 무대
전삼용신부-
누구나 세상의 중심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세상의 주인공인 자신에게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괜히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 때도 있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자신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다른 엑스트라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다큐 프로그램에서 정말 놀라운 실험을 본 일이 있습니다. 서로 확연히 다른 사람들이 옷만 똑같이 입고 행인에게 길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 사이로 판자가 지나가며 길을 물어보는 사람이 바뀝니다. 길을 가르쳐주던 사람은 얼굴 생김새도, 목소리도 많이 다른 이 사람이 계속 길을 물어보자 아무 의심 없이 길을 계속 가르쳐줍니다. 70% 이상이 사람이 바뀐 것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심한 경우는 남자가 여자로 바뀌어도 눈치 채지 못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을 볼 때 바뀌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엑스트라로 본다는 뜻입니다.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엑스트라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자가 주인공이기에 남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관심을 받으려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때는 남들 앞에서 나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내세우기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을 믿으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위한 연극의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산을 오르실 때 예루살렘 여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 때 여인들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시는 분입니다. 다른 이들은 자신들이 주인공이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만 이들은 아무 힘없이 예수님만을 바라만 볼 뿐입니다. 이들은 어쩌면 엑스트라처럼 대사도 없이 비극을 맞는 주인공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녀들에게 주인공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녀들을 보며 당신이 아닌 ‘자신들과 그녀들의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을 건네심으로써 그들을 연극에 초대하십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던 이들은 그 분의 시선과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연극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주인공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보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들에겐 한명의 엑스트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은 무대의 유일한 주인공입니다. 예수님께서 대화를 걸어주는 사람들만이 또 다른 주인공들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대화를 걸어주어 함께 연극에 동참하게 되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의 연극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십니다.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가르치고 있지만 자신들이 가르치는 대로 살지는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의 가르침은 잘 따르되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 그들이 하던 일들은 모두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정말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외적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면이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앉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바로 주인공이 되어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우리들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주인공이 되려고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계신 무대가 아닌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무대에서 아무 의미 없는 말만 반복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대신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주인공이 없는 허무한 무대의 헛된 주인공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쓸모없는 배우들이 되는 이유는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의 자리를 빼앗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고 또 내가 주인공이 되어 나머지는 자신의 엑스트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역할은 당신의 연극에 참여하는 이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극을 보고 눈물을 흘려주지 않는 사람과는 감정의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누구든 주님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닌 당신을 주인공으로 바라보고 공감하는 이들에게만 말을 걸으시고 연극에 동참시키십니다. 이 세상의 연극의 진정한 주인공들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바라보시고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마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양승국신부-
<예수님의 교육철학>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예수님이셨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견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훌륭한 스승, 교사였는지는 복음서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즉시 하나의 교육공동체를 형성하십니다. 당신의 사상이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 공동체를 구성하십니다.
제자 공동체는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독창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던 일종의 학교였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분석해보면 예수님은 다른 어떤 존재에 앞서 교육자셨습니다. 복음서에 주고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거의 대부분 제자들이나 백성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의 모습입니다.
그 학교의 교장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교장은 종래의 교장과는 완전히 다른 교장이셨습니다. 종래의 교장들이 고수해오던 교육철학이나 교육노선을 완전히 초월하는 획기적인 교육방식을 통해 제자들을 교육시키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독창적이고 획기적이었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가르침과 삶의 일치" "언행일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대 지도자들로 손꼽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제들과는 달라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당신이 가르치신 바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신 것입니다.
복음서 그 어디를 봐도 예수님께서 말씀 따로 삶 따로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복음서 그 어디를 봐도 예수님께서 속 보이는 모습, 뒤가 구린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예수님께서는 당시 그럴듯하게 폼을 잡으면서 "내가 스승이네. 교육자네" 자랑하던 바리사이파 사랑들과 율법학자들을 대상으로 혹독한 독설을 퍼부으십니다.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마치도 회칠한 무덤 같구나. 너희는 너희의 그 이중적인 생활로 인해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그럴 듯한 말로 백성들 앞에서 가르치고 많은 율법조항들을 만들어 백성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놓았지만 너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구나" 하시면서 당시 지도자들의 가르침 따로 삶 따로의 이중적인 모습에 크게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당신이 선포하신 말씀에 대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교육방식에 있어서 우리가 가장 눈여겨볼 일은 이론적이거나 원론적인 것에 바탕을 둔 삶 따로 가르침 따로의 이중적인 교육이 아니라 가르침과 실생활이 완벽하게 일치되고 조화된 살아있는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육철학이야말로 모든 지도자들이 추종해야할 교육철학입니다.
서로 말없이 이해하는 것은 진실된 우정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세네카)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양승국신부-
<말하기에 앞서 먼저>
여기저기 ‘꼭 오셔서 귀한 말씀 나눠달라’는 곳에 자주 다니다보면 스스로 ‘이게 아닌 데’하는 생각과 함께 사람이 좀 이상해진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을 쉽고 간결하게, 또 재미있게 풀이해서 전해드리고, 지치고 힘들어하시는 분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런 일들이 절대로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면 할수록 본인에게 손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솔직히 별 것도 없는데 사람들 앞에 그럴듯한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사람들의 호응과 박수갈채에 맛을 들여갑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좀 더 극적인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과장해서 말도 하고, 거짓말도 자주 하게 됩니다.
결국 사람들 앞에 자주 서면 설수록 자신의 고유한 가치, 에너지가 고갈됩니다. 품위도 하락됩니다.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입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내면은 점점 공허해지고 자주 허탈감을 느낍니다.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은 감동받고, 환호하고, 감사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데, 정작 나 자신은 우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질타를 받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 역시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들 역시 외면적인 삶은 그럴듯했겠습니다. 멋있게 차려입고, 어디를 가든지 귀빈석으로 안내되었습니다. 그들의 명강의에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가르침 안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명설교 안에는 자신의 박학다식을 드러내려는 사적인 욕심만 가득했습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하느님 말씀의 전달자로서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저 이벤트 회사 사람의 노련한 이미지만 풀풀 풍겼습니다.
오늘도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들, 최고의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떠벌이지 않고 늘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인생길을 잘 걸어가고 계십니다.
사사건건 가르치려고 하기보다 묵묵히 온몸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 참된 스승으로서의 좋은 자질을 갖추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말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람들, 말뿐인 사람들, 말이 행동보다 앞서는 사람들, 언젠가 반드시 자신이 던진 말에 걸려 넘어질 것입니다.
말하기에 앞서 먼저 심사숙고하고, 말하기에 앞서 먼저 사랑을 실천하고, 말하기에 앞서 먼저 겸손의 덕을 갖추길 바랍니다.
투명해져야
-전삼용신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칭찬은 ‘예수님을 닮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주 가끔이지만 누군가 이런 말을 해 주면 저는 너무 얼토당토하지 않아서 기쁨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그 다음 기분 좋게 들어본 칭찬은 이런 것입니다.
“제가 새로 간 성당의 보좌 신부님은 키도 크고 잘생기고 기타 치며 노래도 잘합니다. 다른 성당에서 신자들이 이 신부님을 보러 몰려들어요. 그러나 전 신부님이 더 좋아요. 왜냐하면 그 신부님은 사람들을 자기에게 모이게 하지만 신부님은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니까요.”
뭐 저도 잘 생겼다고 그래줬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무튼 한 사제로서 듣기에 너무 행복한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십니다.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가르치고 있지만 자신들이 가르치는 대로 살지는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의 가르침은 잘 따르되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 가르치는 사람들은 성직자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 자신을 반성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런 자리에 앉아 가르치면서 주위 해야 할 것은 똑같은 것 같습니다.
그 때 모세의 자리에 앉아 가르치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놓고 자신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혹 지금의 사제들이 신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놓고 자신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면 똑 같은 비난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제가 되면서 첫 마음은 어떤 일을 하던 가장 먼저 나와서 가장 늦게 들어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늦게 나와서 가장 빨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또 그들이 하던 일들은 모두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정말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외적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면이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앉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제생활 얼마 안 했지만 이런 모든 것들이 전혀 생소하지 않은 것은 어느 정도는 지금도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누구도 스승이라고 불리지 말고 결국 다 평등한 형제들임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그의 자리에서 가르치는 일꾼들에게 잊어서는 안 되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나귀는 예수님을 태우고 걷지만 사람들이 자꾸 자신에게 인사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고 그래서 자연적으로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성직자들은 이 나귀에 불과하지만 자신이 정작 무엇인지 끊임없이 성찰하지 않으면 자신이 스승이 되어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어버리는 오류에 빠지고 맙니다.
태양을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글라스를 끼고 보면 태양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는 마치 이 선글라스와 같은 존재입니다. 신자들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중간에 서서 보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선글라스에 이물질이 묻어 투명하지 못하다면 사람들은 태양은 보지 못하고 선글라스만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모두 성체현시를 할 때의 성광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성광은 예수님의 성체를 넣어 신자들이 볼 수 있게 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성광이 투명하지 않다면 그것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여 쓸모없게 되어버립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에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투명하게 만들어 나를 통해서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해야 합니다.
도로 표지판이 도로 한 복판에 있으면 안 되고 옆에 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주님께 가는 데 도움만 주면 되지 그 앞을 가려 막아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쓸모없는 종이 되는 이유는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 때문에 내가 정말로 그리스도의 자리를 빼앗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삶을 원한다면 자신을 버리라는 주님의 이 말씀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하느님 앞에 우열 없이
-김찬선신부-
지금도 교만하지만 옛날 더 교만하던 때 저는
비교를 하려면 하느님하고 비교하던지 적어도 聖人하고 해야지
다른 인간하고 비교하여 잘 났다 못 났다 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옛날 신분제가 있을 때 도련님을 머슴 아들과 비교하여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면 칭찬을 들은 도련님이
머슴 아들과의 비교 자체를 수치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심사겠지요.
그런가 하면 대단히 속물적으로
용의 꼬리가 되느니 닭의 머리가 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런 이율배반이 당시 저의 주제였지요.
그러니 그 당시에는 비록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저의 세속성을 뛰어넘으려는 좋은 뜻도 있었지만
그 안에는 지독한 교만이 숨어 있었음을 저도 몰랐던 것입니다.
진정 제가 인간과의 비교를 초월한 그런 경지에 있었다면
그저 하느님 앞에 있을 뿐 아예 비교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여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 자존심 상하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 우위에 서려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겸손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그래서 탁월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씀하듯
우리는 진정 누가 우월하고 누가 열등하지 않은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형제로서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존재이고
하느님 앞에 같이 서 있는 존재입니다.
같이 하느님을 흠숭하고
같이 하느님 뜻을 받드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같이 하느님을 흠숭하고 받든다는 말은
‘함께’라는, 즉 공동체성을 포함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누구는 하느님을 더 잘 흠숭하고 받들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는, 그런 것이 없이
‘모두 똑같이’라는, 즉 평등성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어제는 수도원 당가 형제께
외국에 나가 있는 어른께 보낼 선물 좀 사다달라고 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본다면
시장가는 김에 사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지만
가만히 속을 들여다보면
한 번도 그런 것을 제 손으로 산적이 없는 저의 무의식 안에는
‘나는 그런 것 살 줄 몰라’ 하면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손가락 하나 까닥하려 하지 않음이 숨어있습니다.
부탁해도 되는 사람 따로 있고,
부탁 받아도 되는 사람 따로 있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자기 손가락은 하나 까닥하지 않고
다른 사람 어깨에 큰 짐을 올려놓는 것이
그저 시장바구니 정도라면 그래도 낫겠는데,
그것이 자기 십자가든, 공동체의 십자가든,
하느님께서 제게 맡기신
그래서 제가 져야 할 십자가가 아닌지 두렵고 걱정이 됩니다.
십자가는 지지 않고
칭찬과 영광만 받으려는 그 날도둑놈의 심보가 있지 않은지
오늘 복음을 통해 들여다보는 오늘입니다.
겸손의 지도력
- 배미애 수녀-
“예수님께서는 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죠?”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견진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시골 본당을 방문하신 주교님이 나에게 느닷없이 던진 질문이다. 나는 아무런 대답을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주교님의 그 질문과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모습을 모범으로 주시기 위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당시엔 주교님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나 성인이 된 지금은 그 말씀이 좀 더 깊이 있게 다가온다. 벌거벗고, 나약하고, 다치기 쉬운 아기 예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도 평화와 기쁨을 온 세상에 퍼뜨릴 수 있는 우리 존재의 본성과 고결함의 원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계신다.
오늘 복음에서는 한 분이신 스승, 한 분이신 아버지, 지도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신다. 자기 자신의 신원이 하느님한테서 왔음을 믿고 선포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자유롭다. 그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일하지 않고, 가장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애쓰지 않으며, 남들이 자기를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방어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위선이나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지도자·스승의 모범으로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들은 겸손을 축복으로, 기쁨을 열매로 후하게 받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믿었기에 기쁘게 봉사와 섬김의 삶을 실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 토머스 무어는 “겸손, 그것은 낮은 곳에서 천국의 모든 미덕들을 싹 틔우는 감미로운 뿌리”라고 노래했나 보다.
새벽을 열며
14세기, 벨기에는 레이몬드 3세라는 왕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먹고 노는 것을 좋아해서 매일 잔치를 벌였고, 사람들을 초대하여 재미있는 일들을 즐겼지요. 왕으로서의 의무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고, 백성들의 형편이나 국가 위신, 국제 정세는 그의 관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먹는 즐거움이 그에게는 전부였습니다.
결국 이 모습을 보다 못한 동생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에 성공한 동생은 차마 형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이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던 왕이지만, 자신의 형이기도 했기 때문에 기회를 한 차례 더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형을 가둔 감옥에 작고 좁은 문을 만들고는 이렇게 말했지요.
“만약 형이 음식을 절제하여 살을 뺀 후 이 문을 나올 수 있다면 나는 다시 형에게 왕의 자리를 돌려주겠소.”
그리고는 매일 진수성찬을 형이 있는 감옥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형은 이 유혹을 이기고 다시 왕이 되었을까요? 물론 자신이 다시 왕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처음에는 음식의 유혹을 이겨냈지만, 결국은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더욱 비둔해져서는 그 작은 감옥에서 음식과 함께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평생 굶는 것도 아닌, 살을 빼서 감옥의 작은 문으로 나갈 정도까지만 굶기만 하면 다시 왕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몬드 3세 왕은 잠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만 더 절제하고, 조금만 더 사랑한다면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차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끊임없는 욕심과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과 미움으로 살찌워서 하느님 나라의 문 밖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판하면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겸손하게 자신을 끊임없이 낮추는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으며, 이로써 하느님 나라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앞선 레이몬드 3세의 왕처럼, 현세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유혹에 얼마나 자주 넘어가고 있는지…….
하긴 그러한 유혹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겨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인간들은 그러한 유혹에 너무나 자주 넘어가는 불완전하고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내 자신만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도 우리들의 그러한 나약한 면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기도가 더욱 더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당신 사랑의 힘으로써 채워달라는 기도를 말이지요. 그러한 기도가 실현될 때, 우리들 앞에 놓인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은 그만큼 넓어 질 것입니다.
체중 조절을 합시다. 저도 아주 심각하답니다. ㅠㅠ
빠다킹 신부
너와 함께 있다
-허찬란 신부-
성전을 신축할 때 컨테이너 생활을 하였습니다. 냉난방 없이 여름과 겨울을
보냈고, 경추성 편두통으로 하루에 두통약을 10알 가까이 복용하며 몇 개월을
보냈습니다. 하루에 잠이라고는 고작 3시간 정도 자는 게 전부였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보는 광경은 제주도 전역을 도는 장애인 학교의
스쿨버스와 그 버스 안으로 자식을 밀어 넣으며 사라지는 안타까운 부모들의
고충이었습니다. 낮에는 버스 종점인 성당 근처에서 버스를 주차한 채 피곤에
절어 잠을 자는 기사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늦은 밤에는 성당 옆 운송회사를
찾는 농민들의 트럭 소리, 바닥까지 값이 떨어진 농산물을 운송하는
농민들의 한숨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세수는커녕 볼 일도
동네 공중 화장실을 써야 했으며 아침에는 신문지를 들고 줄을 서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2만 원짜리 버너에 라면만 수두룩 쌓여 있던
컨테이너 사제관 생활, 곧 닥칠 병마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아파가던
젊은 신부의 미래, 그렇게 지쳐 있던 사제에게 매일같이 들려주던 용기와
위로는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고귀한 존재
-이동훈 신부-
오늘은 절기상 경칩이다. ‘우수, 경칩이면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옛말이 있듯이 오늘은 얼었던 땅과 물이 녹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깨어나 먹이활동을 시작하는 시기다. 삼라만상이 생기를 띠기 시작하는 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입을 열고 생명을 받아들이듯 우리도 얼었던 마음, 닫혀 있던 마음을 열어야 한다.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은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다. 낮아질 때 우리는 풍요로운 생명을 누릴 수 있다.
바다가 수많은 생명을 키울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바다의 위대함은 낮은 자리에서 온다. 마리아도 바다처럼 낮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태중에 잉태할 수 있었다. 세상을 구원하는 큰 뜻을 실현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인 마구간에 오셨다. 그리고 병자·과부·창녀 등 사회의 밑바닥 인생과 함께 머물며 먹고 마셨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그를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었다(필리 2,6-11 참조). 이처럼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움직이는 자연의 이치는 하느님의 방식과 일치한다.
나무의 뿌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나무의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의 생명, 숨을 간직한 심장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진 상태에서 하루 온종일 쉼 없이 일하고 있다. 세상은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고귀한 존재들이 있음으로 풍요로운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사순 제2주간 화요일
- 우종선 신부-
오늘 복음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잘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안에서 그리고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면 주님의 자비를 얻어 누리고, 평화롭게 살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왜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을 힘들게 하고 이웃을 힘들게 하고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는지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받아 누리는데서 기쁨과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물을 받아야 하고, 위로를 받아야 하고, 용서를 받아야 하고, 은혜를 얻어야 하고, 자비를 얻어야 하는데서 말입니다. 바라는 것들을 얻지 못하면 어딘가 슬프고, 삶이 고되고 살아가면서 불편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주님은 반대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주라고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를 베풀어라. 용서해 줘라. 후하게 베풀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이 잘 못 되었다고 반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를 편하게 하고 평화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메스컴을 통해 사건 사고를 접하게 됩니다. 그 사건의 전말을 들으면서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생명을 앗아가고, 그럼으로써 가정의 평화를 깨뜨린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해주는 사람을 볼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반성하고, ‘잘못했다’라고, ‘용서해 달라’고 청하면 용서해 주겠다”라고 말입니다.
그의 얼굴을 보면 이미 반쯤은 용서를 한 상태로, 분노에 차있는 인상이 아님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죄인이 용서를 청하면, 환하게 웃으면서 용서해 줍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정리된 사람처럼 편안해 합니다. ‘더 이상 죄 짓지 말고 형량동안 잘 지내라’고 덧붙이는 말에 더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어떤 것이 자신을 편하게 하는지 이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떻게 하는 것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평화로운 것인지 우리는 판단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가정과 연관된 일이 아니라, 타인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우리는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대부분은 ‘절대로 이해 할 수 없고,’ ‘용서 할 수 없다’라고 할 것입니까? 그러면 안돼죠. 만일에 나와 내 가정에 일어난 일에 대화여서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면, 감동받은 앞의 이야기나 복음도 한낱 동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이나 그 안에 있는 복음은 동화가 아니며, 예수님은 단지 마음 착한 주인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지침서이며 스승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시킬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적용을 시켜야 의미가 있으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조건없이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조금은 다른 면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마치 조건을 내거는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 자비를 얻으려면 자비를 베풀어라. 지은 죄를 용서 받으려면, 남을 단죄하지 말고 용서해 주어라”라고 말입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자비를 얻을 수 없고,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내 죄도 용서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염치없는 인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찌 받기만을 바라겠습니까? 받는데서 오는 기쁨보다 베푸는데서 얻는 기쁨이 크다면, 우리는 더욱 더 베풀도록 노력해야하며,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합니다. 사실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받는데서 오는 즐거움도 있지만 베푸는데서 오는 즐거움과 기쁨, 행복이 더 크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신의 가정을 해친 사람을 용서해 주는 사람의 넉넉한 자비로움에 감동만 받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주님께로부터 더 많은 자비와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러운 일입니까? 우리 모두도 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단순히 용서하기 이전에 그리고 마땅히 용서할 대상이 없다면 1독서의 다니엘 예언자처럼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지르고 악을 행하고 하느님께 거역한 일, 계명과 법규를 지키지 않은 것 등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비로우신 주님께 용서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받아본 사람만이 진정으로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나 자비를 청하지도 않을뿐더러, 용서 할 줄을 모릅니다. 은혜를 입어 보지 않은 사람이 은혜를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조건을 내건다기 보다 더 많은 자비와 용서의 은혜를 받기 위한 것임을,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임을 깨닫고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겸허
-김훈일 신부-
오나라 왕이 강을 건너 원숭이들이 사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모든 원숭이들은
오나라 왕을 보고 달아났으나 오직 한 마리의 원숭이만이 달아나지 않았습니다.
그 원숭이는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물건을 던지기도 하며 갖은 기교를 다
부리고 있었습니다. 오나라 왕은 이상히 여겨 그 원숭이를 향해 화살을 쏘았습니다.
원숭이는 재빨리 그 화살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오나라 왕은 신하들에게 계속
화살을 쏘게 하였습니다.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갔고 그 원숭이는 마침내
화살을 손에 쥔 채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때 오나라 왕은 자신의
친구 안불의를 보며 말했습니다. “이 원숭이는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느라고,
또 자기의 재빠름을 믿고서 까불다가 이렇게 죽게 된 것이네. 그러니 자네도
조심하게. 건방진 얼굴로 남에게 교만하게 굴지 말란 말일세.” 그 뒤로
안불의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수행하였고, 그 후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고 합니다. 겸손, 이것은 신앙인의 모든 미덕이 담겨지는 바구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어떤 은총을 받고 깊은 체험을 하고 굉장한
능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겸손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곧 마귀의
유혹에 걸리게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실천해야 한다고 할 때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교훈이나 인간적인 노력의 차원이 아닙니다.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겸손한
자세를 겸허(謙虛)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에 비하면 우리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자세입니다. 겸손을 넘어서 겸허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갑시다.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양승국신부-
<존경하는 목사님의 설교>
가끔씩 저는 열정과 감동으로 가득 찰 뿐 아니라 순발력과 기지가 번뜩이는 한 개신교 목사님의 설교를 경청하곤 합니다. 무엇보다도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 본인이 정말 행복하시다는 것을 느낍니다. 정말 존경스럽다 못해 신기해하기까지 합니다. 듣는 신자들을 쥐었다 놓았다, 울렸다 웃겼다 합니다. 재미도 있고 내용도 있습니다.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그런 설교를 듣고 있는 신자들 얼굴도 환합니다. 은혜도 엄청 받는 느낌입니다.
그런 모습 보면서 은근히 샘도 나고 다른 한편으로 반성도 많이 합니다. 우선 말씀을 선포하는 저 자신부터 자신감이 없습니다. 확신도 부족합니다. 그러다보니 마지못해 하게 됩니다. 당연히 반응도 시원찮습니다.
세상에 괴로운 것 중에 정말 괴로운 것이 내용도 없으면서 길고 지루한 강론이나 설교겠지요. 결론이 빤한 훈계조의 강의, 잡다한 지식을 길게 늘어놓지만 들을 거라곤 하나 없는 그저 그런 강좌, 자기만의 억지논리를 집요하게 강요하는 특강, 듣고 있노라면 정말 괴롭습니다. 그나마 빨리 끝나면 좋으련만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다가 다시 이어집니다. 고문을 넘어 폭력에 가깝습니다. 앉아있으려면 정말 죽을 맛입니다.
언젠가 한 단체에서 주관하는 심포지엄에 갔습니다. 주제 발표가 있었는데,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나른한 봄날, 점심식사 후에 곧바로 진행된 강의였기에, 거기다 내용도 틀에 박힌 고리타분한 것이었기에 거의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꿈나라를 헤매시더군요.
방청객석에 앉아있던 저도 무척 졸렸지만 ‘사회적 체면’도 있고 해서 억지로 졸음을 참고 있었는데, 더 이상 안 되겠더라구요. 졸음도 쫓을 겸해서 수첩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주 저희 공동체에서 있게 될 행사의 윤곽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열심히 적었습니다.
참석 예상 인원: 250명, 행사 장소: 지하 강당, 간식: 차 종류와 떡, 진행: 김○○, 특기사항: 중앙 마이크 점검, 손님용 화장실 청결상태 확인...
그렇게 열심히 적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고개를 들었는데, 그 순간 저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날 심포지엄 취재차 따라온 한 지상파 방송국 카메라가 어느새 제 바로 앞으로 다가와서 열심히 적고 있는 제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사태를 파악한 저는 태연스럽게 가끔씩 강사도 쳐다보고, 필기도 하는 척하면서 강의에 몰입하고 있는 포즈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밤 늦은 시간에 텔레비전에 잠깐 제가 나왔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나중에 제게 전해졌습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이란 말이 있습니다. 날카로운 말 한마디로 상대편의 급소를 찌름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비록 단 한 마디 말이지만 오랜 인생의 경험, 혹은 깊은 신앙, 혹은 삶의 진리에서 나온 말이기에, 영혼이 담긴 설득력 있는 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바로 ‘촌철살인’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은 어찌 그리도 쉬운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도 간결한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도 힘이 있는지 모릅니다. 엄청난 설득력과 잠재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장황하게 늘어놓지만 말씀의 핵심이 없는 바리사이들의 가르침, 뭔가 그럴듯한데 알쏭달쏭, 애매모호한, 그래서 사람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습니다.
신앙의 정수, 종교의 근본, 깊이 있는 영적생활과도 같은 본질적인 가르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종교지도자들의 훈계 앞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등장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골수를 파고드는 명쾌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궁금증을 일거에 풀어주던 시원시원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많은 율법조항들을 단 한마디에 요약해서 귀에 쏙 넣어주는 가르침 중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한 말씀을 우리에게 던지시는군요. 아주 구체적인 말씀, 신랄한 말씀, 뼈에 사무치는 말씀, 결국 구원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철저하게도 가난한 민중들 그 한 가운데로 파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들에게 어려운 말씀 전혀 하지 않으시고, 아주 쉬운 말씀으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감동시키셨습니다. 아주 쉽게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설파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가르침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보다 쉬워지기 바랍니다. 보다 구체적인 것이 되길 바랍니다. 보다 실천적인 것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그 누구든 쉽게 교회로 다가서길 바랍니다.
"참 나의 씨알을 사는 자유인"
-이수철신부-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밖에 있을 때
말 그대로 껍데기의 삶입니다.
온 마음으로 지금 여기에 살 때 참 행복이요,
참 나의 씨알을 사는 자유인입니다.
수도생활이나 가정생활이나 똑같습니다.
몸은 수도원에 있어도 마음은 밖에 있을 수 있듯이,
한 가정의 부부라 해도
마음은 딴 사람에게 두고 살 수 있습니다.
“껍데기하고 살았다.”
한 몸의 부부로 믿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마음속으로는 딴 여자를 품고 산 남편에 대한
어느 자매의 증오어린 독백을 잊지 못합니다.
과연 지금 여기서 온 몸과 온 마음을 다해
참 나의 씨알을 살고 있는 이들 얼마나 될까요?
아마 많은 이들이 참 나의 씨알을 살지 못하고
착각 중에 껍데기의 허영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껍데기 삶의 전형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
자기(Ego)를 만족시키는 허영의 껍데기 삶입니다.
본질이 아닌 부수적인 것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어리석고도 허망한 삶입니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는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하는
지극히 외부 지향적 삶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기도 합니다.
이런 허영에 노예가 된 삶, 도저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세상 누구를 아버지라 부를 때,
또 누구를 스승이나 선생이라 부를 때
우리는 매이게 되고 자유롭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고,
스승이자 선생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며,
우리 모두는 형제들이라는 철저한 자각이 있어
참으로 자유인입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자리에,
스승이신 그리스도 자리에 놓아서는 안 됩니다.
도처에 우리를 유혹하여
허영과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낮아져 섬기는 삶을 살 때
비로소 허영에서 벗어나
참 나의 씨알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내부에 눈길을 돌려
구체적 사랑과 정의를 실천합니다.
이사야 말씀대로,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고,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웁니다.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보살피며,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줍니다.
하느님을 찾는 여정은
참 나를 추구해 가는 여정입니다.
참 나의 씨알을 추구해 갈 때
비로소 허영에서 벗어나 본질적 삶에 충실하게 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를 허영에서 벗어나
참 나되어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구약을 파기하고 그 관계자를 제거하는 작업
-박상대신부-
마태오복음 21장부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가 보도된다. 갈릴래아 활동(4,12-18,35)을 접고, 예루살렘 상경기(19,1-20,34)를 거쳐, 수많은 군중의 환호와 갈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곧바로 성전을 정화하셨다(21,12-17).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가 화려한 입성과 성전정화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한 의미를 제공한다. 예루살렘 활동기는 예수님 생(生)과 가르침(복음선포)의 마감을 의미하며, 구약에 대한 궁극적인 종지부를 의미한다. 특히 성전정화사건은 구약의 모든 제사, 즉 구약의 제관과 제단과 제물을 파기하는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구약제사의 파기를 통하여 신약의 제사를, 즉 예수님 스스로가 제관이요 제단이요 제물이 되시는 새로운 제사의 제정을 목전에 두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루살렘 활동기는 예수께서 구약의 제사를 파기하고 새로운 신약의 제사를 제정하시려는 의도에 따라 연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를 파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구약의 제의(祭儀)를 파기해야 하며, 이스라엘의 대사제와 제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든 조직과 기능과 사상 등을 전체적으로 와해(瓦解)시켜야 하며, 나아가 그 사람들까지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예루살렘 활동기 안에는 예수님의 과감한 파기와 제거작업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지금껏 서서히 준비되어 온 이 작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 셈이다. 파기와 제거작업에는 심한 반대와 갈등과 논쟁이 따르기 마련이며, 파기하고 제거하지 못하면 스스로 파기되고 제거되는 법이다. 이 법칙을 예수께서도 잘 알고 계신다. 허나 그분은 당신의 길을 포기하시지 않을 것이다. 이미 성전정화사건 때문에 예수의 이런 권한을 놓고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심한 논쟁이 있었다.(21,23-27) 이어지는 ’두 아들의 비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들(21,28-22,14)과 세금논쟁(22,15-22)과 부활토론(22,23-33)은 모두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층 인사들을 단죄하기 위한 목적으로 언급하신 것들이다. 또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로서 사랑의 이중계명을 새롭게 선포하여(22,34-40) 신약의 유일한 계명으로 제시하셨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자신이 육(肉)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영(靈)으로는 다윗이 이름 불러 칭송했던(시편 110,1) 주님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유다교의 공적 지도자들 앞에서 계시하셨다.(22,41-46) 이 계시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마지막 자기계시이다.
구약의 파기와 제거작업은 유다교의 지도층인 대사제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총체적이고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질책으로 전개된다. 그들이 총체적으로 예수님의 질책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모세의 율좌(律座)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막중한 권한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행동은 말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은 저버리고 태만하였으며 권위를 과시하고 남에게 과도한 짐만 지우는 "위선자"들이었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예수님의 입술에 "위선자"라는 단어가 오르게 될 것이며, 이들에 대한 불행이 선포될 것이다.(23,13-33) 사실 마태오복음 23장은 이들에 대한 책망과 불행선언으로 가득 차 있다.
구약의 파기와 그 관계자들의 제거를 위한 작업으로 제시되는 책망은 거꾸로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유다교의 지도층을 포함한 군중과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지만 유다교의 지도층을 간접적으로 책망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 우리 교회의 지도층에 만연한 바리사이적 조직과 기능과 태도를 책망하는 말씀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율좌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았으며, 무거운 짐을 백성에게만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이마나 팔에 성구(聖句)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달고 옷단에도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니며 잔치에서 맨 윗자리와 회당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즐겨 찾았고, 거리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사람들로부터 스승이다, 지도자다 하는 말을 즐겨 들으려 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하지도 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스승과 지도자는 그리스도 예수 한 분뿐이시며, 믿는 이들은 모두 한 형제자매이다. 으뜸가는 사람일수록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자신을 낮추어 타인을 섬길 때야 비로소 참으로 높은 자가 되는 것이다. 신약의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스승도 지도자도 없다. 권위도 없다. 있다면 오로지 직분(職分)과 섬김과 봉사만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사람은 늘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는 성구(聖句)를 자신에게 매어두어야 할 것이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마태 23,1-13)
-유광수신부-
그 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아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제 자리가 있다. 우리는 저 마다 자가 자리를 알고, 제 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눈은 눈의 자리가 있고, 입은 입의 자리가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가 있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자리가 있다. 선생은 선생의 자리가 있고 학생은 학생의 자리가 있다. 저마다 자기의 자리를 지킬 때 사회의 번영이 있고 가정의 평화가 있고 교회의 발전이 있다. 저마다 자기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데에서 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질서가 어지러워지고, 혼란과 멸망의 길로 전락한다.
저마다 제 자리를 알고,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을 한문에서는 수분(守分)이라고 한다. 제 분을 지키는 것이다. 수분은 질서와 평화와 번영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미의 원리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저마다 제자리에 있을 때 건강하고 아름답다. 밥알이 밥그릇 속에 있을 때에는 이름답지만 얼굴이나 옷자락에 붙으면 아름답지 못하고 도리어 추하다. 그것은 제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사회는 제 각기 제 자리를 지키는 사회다. 그 자리에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있다.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 우리는 저마다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든 존재는 다 제 구실이 있다. 우리는 저마다 제 구실을 다 해야 한다. 우리말의 구실이란 말을 한문으로 옮기면 직분이요, 책임이요, 사명이요, 기능이다. 어머니가 되기는 쉽지만 어머니 구실을 다하기는 어렵다. 스승이 되기는 쉽지만 스승 구실을 다하기는 어렵다. 신자가 되기는 쉽지만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것은 쉽지만 수도자나 사제의 구실을 다하기는 쉽지 않다. 인생의 의미는 저마다 제 도리를 다하고 제 구실을 다하는 데 있다. 인생은 사명실현(使命實現)의 자리요 직분완수의 무대이다. 인생은 놀고 즐기는 향락의 놀이터가 아니고 제 각기 제 구실을 다하고 제 도리를 다함으로써 제 빛과 제 의의를 드러내는 창조의 일터이다.
사람은 사람 구실을 하고, 학교는 학교구실을 하고, 나라는 나라 구실을 다해야 하고 교회는교회의 구실을, 가정은 가정의 구실을 다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사회에는 제 구실을 제대로 하는 것이 별로 없다. 정치, 경제, 입법, 교회,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제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스럽다.
눈이 눈의 구실을 다하고, 위가 위의 구실을 다하고, 간이 간의 구실을 다 할 때 우리의 몸은 건강하다. 눈이 보는 구실을 못하고, 위가 소화하는 구실을 못하고 간이 영양저장의 구실을 못한다면, 우리의 신체는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구실, 어머니는 어머니의 구실, 선생은 선생의 구실, 사제는 사제의 구실, 수도자는 수도자의 구실, 평신도는 평신도의 구실을 다할 때 이 사회가 교회가 건강하고 발전한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모세의 자리란 어떤 자리인가? 모세는 하느님한테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이끌어낸 사람이다. 그리고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간 이스라엘백성의 지도자요, 목자이다. 그는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중간 위치에서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였고 하느님의 분부대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간 사람이다. 그는 하느님께 충실한 종이었고 또 하느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충실히 전달한 지도자요, 목자였다. 모세는 자기의 영광을 위해 일하지 않았고 자기의 뜻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았고 하느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백성의 지도자로서 흠없는 자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충실하게 봉사하였다. 모세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백성의 지도자로서, 하느님의 종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요, 목자로서 자기의 직분에서 자기의 구실을 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모세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의 나이 120세 나이로 그의 사명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자리를 이어 여호수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가나안 땅에 이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의 자리를 이어받는 이들의 사명과 역할이 조금씩 흐려졌고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였고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즉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이 제 본연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백성들에게 봉사하고 모범을 보여주기보다는 자신의 영예와 존경을 받는 자리로 삼았다. 즉 본연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들의 이익과 영예를 위해서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았으며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 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였다.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잘 몰랐던지 아니면 잘못 알고 있었든지 둘 중에 하나의 삶을 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기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 또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 자기의 자리가 있고 역할이 있다. 어느 한 사람만이 잘해서 모든 것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올바르게 해줄 때 사회가 건강해지고 가정이 그리고 공동체가 교회가 단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한 사람이 자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그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그 사람의 자리와 역할이 어떤 자리 어떤 역할이냐에 따라서 그가 끼치는 영향은 다를 것이다. 세계 최대 강대국의 대통령의 자리는 세계 모든 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부시의 오만하고 탐욕 때문에 전 세계가 전쟁의 불안 속에 떨고 있고 자칫 잘못하면 수많은 생명이 죽어갈 수도 있는 긴급한 상황이다.
결국 나의 삶은 내가 사는 것이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자기가 져야 한다. 나의 말과 행동에 대한 마지막 심판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역할과 사명을 맡기신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자리와 역할을 얼마나 충실하게 하느냐 하는 것은 나에게 달린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평가는 그리고 책임은 주님이 하실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