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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지으신 집(1)
고후 4:16-5:10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4:16-5:10 / [믿음의 생활]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 겉사람은 시들어 가지만 우리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17)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며 오래가지도 않습니다. 이 짧은 고통은 영원히 다함이 없는 영광을 가져올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눈에 보이는 어려움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하늘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려움은 곧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5:1)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의 천막 집이 무너지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죽어 이 육체를 떠나면 하늘에 있는 새로운 몸, 영원한 우리 집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 집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입니다. 2) 우리는 이미 이 세상살이에 지쳐 신음하며 새 옷을 갈아입듯 하늘의 몸을 입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3) 그것은 우리가 몸이 없는 영으로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이 땅에서 이 몸을 입고 살아가면서 힘들어 신음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새로운 몸 입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그리하여 이 죽을 몸이 영원한 생명을 덧입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5)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두신 것이며, 그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6) 지금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하늘의 몸을 대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땅위에서 이 몸으로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과 함께 지낼 하늘의 영원한 집에서 떨어져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7) 우리는 이 사실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8)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는 것이 더 만족스럽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과 함께 하늘의 집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9) 우리는 이 육체를 가지고 여기서 살든지 육체를 떠나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살든지 항상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10) 장차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앞에 서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살아온 모습이 그분 앞에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했든지 악한 일을 했든지 땅위의 육체로 사는 동안에 행한 대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자신이 가진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지금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는 자도 살리셔서 함께 그분의 앞에 서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바울에게 지금의 고난을 나중의 영광과 비교해 가볍게 여기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을 쫓아 살게 한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간절히 사모하여 신령한 몸을 덧입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16-18) 바울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며 복음 전파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겉사람은 약해집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점점 강해져 갑니다. 우리가 당하는 환난 역시 잠시 받는 것에 불과하고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어야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확신하며(5:1-7) 이 땅의 육신의 삶은 매우 덧없고 유한하여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이 몸의 부활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부활의 변화를 우리의 장막 집에 빗대어 말합니다. 우리의 몸은 잠시 머무는 집과 같습니다. 몸은 낡고 헐지만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해 입혀 주시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이 세계에 힘든 날을 보내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담대히 살고 믿음으로 행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최후의 심판(8-10) 바울은 육신의 죽음을 통해 영의 몸을 입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몸을 입고 있는 삶을 의미 없는 것처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현재 이 몸으로 행한 것을 가지고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몸은 썩을 것이지만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심판을 받기 때문에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게 하는 삶 살아야합니다.
적용: 세상의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며 포기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나누어보길 바랍니다.
기독교를 말할 때 ‘경험의 종교’라는 말을 씁니다. 기독교에 이성적, 철학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기독교는 하나의 사상이기보다는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신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고 대화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인격이고, 인격은 연구의 대상이기보다는 경험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평생토록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를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정오의 해 보다 밝은 빛이 비추는 그 알 수 없는 신적 권능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때 들렸던 음성은 “네가 핍박하는 예수”였습니다.
< 설 교 >
낙심하지 않고 소망하는 비결
고후 4장 16~18절 / 계강현목사
“어느 날 난 낙엽 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그냥 덧없이 흘러버린 그런 세월을 느낀 거죠. …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늦어 버린 것이 아닐까. 흘러버린 세월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우-.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우~~~.” 김도향 씨가 작사, 작곡한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란 노래다. 내가 청년 때 이 노래를 참 좋아했다. 그는데 이 노래 가사를 살펴보니까 살다가 문득 자기 모습을 보니 잘못 산 게 후회되어 낙심하는 걸 표현한 내용이다. 내가 청년 때 이런 노래를 좋아했으니 얼마나 한심하고 낙심에 찬 젊은 시절을 보냈겠나 싶다. 지금 이렇게 목사가 된 게 다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낙심하고 포기할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코로나 때문에 얼마나 낙심천만한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일을 하면서도 낙심되고 포기할 일이 수도 없이 많다. 여러분이 혹시 요즘에 낙심하고 포기한 일이 있다면 그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나? 본문을 기록한 바울사도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역에 낙심할 일이 수도 없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낙심하지 않았다. v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낙심만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소망이 있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단 얘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낙심할 일이 쌔고 쌨지만 낙심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뭘까?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세 가지를 분명하게 비교, 대조하여 말씀하고 있는 걸 본다. v16에서는 겉 사람과 속사람과 대조한다. 그리고 v17에서는 고난과 영광을 비교한다. 그리고 v18에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비교하고 있다. 이 둘 중에 어디에 초점을 맞춰 사느냐가 낙심하지 않고 소망하는 비결이 될 것이다. 왜 어떻게 바울사도는 낙심하지 않고 소망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1. 겉 사람은 낡아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v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사람에게는 겉 사람과 속사람이 있는데, 겉 사람은 육이고 속사람은 영이다. 우리 겉 사람은 나이를 먹게 되어있고 늙어 죽게 되어 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누구나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인간은 죽음을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존재다. 나이가 들수록 몸은 약해지고 낡아간다. 어릴 때는 깨물고 싶고 찔러보고 싶을 정도로 예쁘고 귀엽지 않나? 처녀 총각 때는 화장 하나 안 해도 얼굴에서 막 빛이 나는 것 같다. 청춘예찬을 할 정도로 푸릇푸릇 하고 보기 좋은 때가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이가 들면서 살집이 잡히고 팽팽하던 얼굴과 피부가 점점 처지고 주름이 생기고 탄력을 잃어버린다. 머리도 희어지고 검버섯도 생기고 아이들이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나중에는 산건지 죽은 건지 그게 그거 같은 인생이 되고 만다. 결국은 죽어 썩어 없어진다. 그게 우리 겉 사람이다. 후패하는 육신이다. 후패(朽敗)란 ‘썩어서 문드러져 못 쓰게 됨’이란 뜻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나이 먹어 가는 모습을 보며 무얼 느끼나? 배우자의 나이 드는 모습에 어떤가? 바울사도는 복음을 전하느라 고난을 너무 당했기에 그의 육신이 후패해져 갔다. 그러나 그의 속사람, 그의 영은 날마다 더 새롭기 때문에 그는 후패해가는 육신을 바라보면서도 낙심하지 않았다.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이런 유행가 가사가 있다. “겉 사람만 건강하다고 건강한 거냐? 속사람이 건강해야 건강한 거지.”로 바꿔 생각해볼 수 있다. 육만 건강하면 안 되고 영이 건강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에 지나친 신경을 쓴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 지나친 집착을 갖는다. 또 어떤 사람은 먹고 마시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또 어떤 사람은 남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게 다 겉 사람을 위한 것들이다. 다 지나가는 것이다. 물론 아예 외모에 신경을 쓰지 말거나,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거나, 먹고 마시지 말라는 금욕주의를 권장하고 있는 건 아니다. 예쁘게 가꾸며 살아야 한다. 건강하게 운동도 해야 한다. 매력 있게 살아야한다. 그러나 거기에만 매달려 살지 말란 얘기다. 왜냐하면 다 썩어 없어질 겉 사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육도 중요하지만, 영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영은 영원하니까.
이제는 속사람에 관심을 투자하라. 속사람에 초점을 맞춰 살아라. 속사람이 날마다 새롭게 되도록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에 에너지를 투자하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제를 통해 여러분은 매일 새로운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시간과 관심을 쏟으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갖지 못했던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될 것이고, 확실한 주의 인도를 받게 될 것이다. 형제들을 사랑하는데 시간과 열정을 쓰라.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될 것이다.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사용하라. 그렇다면 여러분은 가치와 보람과 기쁨을 누릴 것이고, 하늘의 소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속사람에 신경 쓰고 산다면 겉 사람은 나이 들어 낡아져가도 낙심하지 않고 소망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이 분명하다.
2. 잠시 고난 뒤에는 영원하고 큰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v17,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바울사도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이란 표현을 썼다. 여러분, 바울사도가 겪은 고난은 결코 일시적이고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네가 겪어보질 않아서 그래. 겪어보면 그렇게 말 못해” 흔히 우리들이 쓰는 말이다. 바울사도가 안 겪어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복음 전도하는 내내 중한 고난 가운데 처해 있었다. 그가 루스드라 성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와서 무리들을 선동시키자. 무리들은 바울사도에게 돌을 던졌다. 이 던진 돌에 바울은 머리가 깨지고 피가 났다.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다버릴 정도가 되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다 여러 번 감옥에 들어갔다. 풍랑과 죽음의 위험을 겪었다. 그런데 왜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이라고 표현했을까? 너무 많이 겪어서 둔감해져 버린 걸까? 아니다. 바울은 감각이 없는 사람이어 설까? 아니다.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렸고 두들겨 맞을 때 아픔을 느꼈다. 그러면 왜 고난이 일시적이고 가볍다고 말했을까? 어떻게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었을까?
현대어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며 오래가지도 않습니다. 이 짧은 고통은 영원히 다함이 없는 영광을 가져올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지 보면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된다. 그가 영원한 미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보니까, 거기에 비교해볼 때 현실의 고난은 잠깐이고 가벼운 것이다. 영원에 비교해보니까, 현재 고난은 지나가는 것이고 큰 영광에 비교해보니까, 현재 고난은 가벼울 뿐이다.
대학생들은 공부와 미래 진로 때문에 고민이 많다. 성도 여러분들은 아마도 노부모님들의 건강을 보며 낙심천만할 때가 많을 거다.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둔 자식들은 마음이 찢어진다. 그러나 일생 고통을 당해도 영원한 천국의 영광에 비하면 잠시 잠간이다. 지극히 큰 천국에서의 영광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다. 이걸 보면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걸 알 수 있다. 미래의 영광은 지극히 크고 중요하고 영원한 영광이기 때문이다.
계 21:18-21, “그 성벽은 벽옥으로 쌓았고, 도성은 맑은 수정과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19 그 성벽의 주춧돌들은 각색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첫째 주춧돌은 벽옥이요, 둘째는 사파이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비취옥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옥수요, 일곱째는 황보석이요, 여덟째는 녹주석이요, 아홉째는 황옥이요, 열째는 녹옥수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었습니다. 21 또 열두 대문은 열두 진주로 되어 있는데, 그 대문들이 각각 진주 한 개로 되어 있었습니다. 도시의 넓은 거리는 맑은 수정과 같은 순금이었습니다.” 천국의 영광을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가 없으니까, 가장 아름답고 귀한 열두 보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변화산에서 잠깐 동안 이런 미래의 영광을 맛봤다. 그 영광이 얼마나 큰지 그들은 거기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했다.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삽시다.”
내가 어렸을 때 동네에 오는 엿장수는 먹거리가 귀하던 때에 아이들에게 아주 귀한 손님이었다. 엿장수가 동네 어귀에서 가위를 치면서 나타나면 아이들은 빈 병이나 양은 냄비나 고철 등을 가지고서 엿장수 아저씨에게 달려갔다. 그러면 엿장수 아저씨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저울을 가지고 고철 무게를 달고는 자기 멋대로 엿을 잘라 준다. 그래서 ‘엿장수 맘대로!’란 말이 생긴 거다. 그런데 우리 집에 엿과 바꿀 빈 병이나 고물이 없는 거다. 엿이 먹고는 싶고 그래서 집에서 쓰는 양은냄비를 갖다 엿을 바꿔먹었다가 나중에 어머니에게 크게 혼난 적이 있다. 엿 한 조각 먹자고 집에서 쓰는 냄비를 갖다가 바꿔먹었으니! 철도 없지!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귀한 것이 뭔지 모른다. 그래서 돈하고 부딪치면 예배고 모임이고 다 포기한다. “무엇이 중한디!”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이 얼마나 중한지도 알고, 심지어 고난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안다. 왜냐하면 현재 잠간의 고난이 미래에 영원한 영광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잠간의 고난은 이후에 있을 영광의 무게와 관계가 있다. 성경은 고난이 영광을 얻기 위한 조건이라는 걸 누누이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고난을 받기를 자처한다.
구원은 믿는 누구에게나 공짜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의 보혈을 흘림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죄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피는 매우 값지고 보배롭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시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미 예수님이 가장 비싼 값, 자신의 목숨 값을 지불하신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믿는 모든 이들에게 무료다. 공짜요 은혜다. 그러나 영광은 그렇지 않다. 영광은 반드시 고난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얻으신 영광을 생각해보라. 그냥 얻으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대가로 지불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다. 영광은 반드시 고난을 통해 얻는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 면류관 없고 고난이 없다면 영광도 없다. 고난 뒤에 영광임을 기억하고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마라. 현재의 고난이 아니라 미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춰 살라. 낙심하지 않고 소망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이다. 고난의 계단으로 기꺼이 내려가라. 그러면 여러분이 내려간 고난의 계단에 비해 훨씬 뛰어난 영광으로 빛나게 될 것이다.
3. 보이는 것 대신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며 살기 때문이다.
우리 사람에게는 두 가지 시력이 있다. 육적인 시력과 영적인 시력이다. 요즘 시력이 더 안 좋아졌는지 안경을 새로 바꿨는데도 눈이 시리고 눈물이 자꾸 난다. 현대인들은, 더구나 코로나 시대에는 컴퓨터와 휴대폰을 보는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에 더 눈이 안 좋아진다. 그런데 그런 육적인 시력만 있는 게 아니라 영적인 시력이 있다. 영적인 시력이 좋아야 낙심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왜 낙심할까? 눈에 보이는 부분이 맘에 안차서 그렇다. v18,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기 시작할 때 낙심하지 않고 소망할 수 있다.
여러분의 영적 시력은 몇 인가? 영적인 시력은 무상한 것과 참다운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보이는 것은 헛되고 덧없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참다운 것이다. 사람의 일생을 통해 생각해보라. 태어나서 학령이 되면 공부하고 입시준비하며 살다가 대학진학하고 취업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승진을 하고 실패를 하기도 하고, 사업을 하다가 잘 되기도 하고 실패도 하고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 이게 다 보이는 것 아닌가? 이 세상 전체가 보이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며 산다. 그런데 보이는 것은 모두 잠간이란 사실이다. 보이는 것은 다 무상한 것이다. 인생무상이란 말이 있지 않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가족도 건강도 물질도 성공도 지나간다. 보이는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항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천국, 지옥은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재림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 믿는 사람이 받을 영광과 불신자가 받을 심판이 보이지 않는다. 주님의 통치도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위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참다운 것이 있다. ‘바라보다.’(σκοπέω, 스코페오)란 말은 번개 불에 콩 튀기듯이 슬쩍 보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을 때 줄치며 보거나, 청소년들이 컴퓨터 게임을 할 때 몰입해서 보는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다. 영어식 표현으로 ‘pay attention to’, ‘watch out’ ‘be careful’ 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몰입하여 들어가서 거기에 초점을 맞춰놓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인 것이다.
야간에 운전을 할 때는 낮에 운전하는 것보다 더욱 조심해야 한다. 특히 앞에서 오는 차량의 헤드라이트 빛을 조심해야 한다. 만일 앞에서 잠시 비추고 사라지는 헤드라이트 빛을 주시하다가는 순간 눈이 멀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수가 있다. 때로는 앞에 있는 물체를 보지 못하고 사고를 낼 수도 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차량의 불빛을 쳐다보면 눈이 멀어 사고의 위험이 있듯이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이 세상의 것들에 주목하여 쳐다보다가는 영적 시력을 잃어 큰 손실과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야간 운전할 때 요령은 상대 차량의 불빛을 직접 보지 않고 약간 시선을 피해 슬쩍 보는 거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이 세상에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두는 것이 아니라 슬쩍 보면서 보이지 않는 참된 것에 영적인 시선을 고정시켜야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믿음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이런 영적 시력을 가지고 산 사람들이다. 히 11:27, “믿음으로 그(모세)는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견디어냈습니다.” 이집트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었던 이집트의 왕자 모세는 보이는 세상 권력과 부귀영화를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바라봤기에 광야의 고난의 길을 자처하고 나섰다.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습니다. 25 오히려 그는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장차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그 세계를 믿었기 때문에 기꺼이 고난을 택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훨씬 남는 장사라고 판단했으니까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하늘의 장차 받을 상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혼구원하기 위해 섬기며 희생하는 시간과 돈과 에너지와 모든 것들은 낭비가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보상하시고 하늘의 상급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지금은 잘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하늘나라에서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우리 교회가 평세를 위해서 집을 오픈하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섬길 때 그것 또한 헛된 일이 아니다. 그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고 반드시 하늘에서 보상해주신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님 오시는 날에 확연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소망을 품어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일에도 낙심하지 말자. 믿음의 사람은 낙심하지 않고 소망하는 자다. 왜냐하면 겉 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에, 잠간의 고난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참된 것에 초점을 맞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속사람을 강건하게 키우는 일에 관심을 갖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면서 보이지 않는 참된 것을 향해 달려가고,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고 소망하며 사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낙심될 때일수록
고후 4:16-18 / 송기성목사(정동교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아프리카에서 33년간 선교사요 탐험가로 헌신한 리빙스턴은 “노예매매에 관한 긴 토론”에서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서 본 가장 이상한 병은 상심(broken heartedness)같다. 그것은 자유로운 사람에게 엄습하여 그를 사로잡아 노예로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상심과 낙심은 삶의 의욕과 용기를 잃게 하며 멀쩡했던 사람을 근심과 걱정, 불안과 절망의 노예로 만들기 쉽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 8, 16에서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라며 낙심을 경계하였습니다. 이는 그에게도 낙심될 때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실은 모세와 여호수아, 다윗과 엘리야도 낙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낙심될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낙심으로 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당하게 낙심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리고 낙심될 때일수록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그 모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낙심과 상심, 어느 특정인만 겪는 일이 아닙니다. 어제 오늘만의 일도 아닙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앞으로도 언제든지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요즘 들어 낙심과 상심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성경 말씀에서 그 해결의 길을 찾고 그 극복의 힘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1. 속사람을 날로 새로워지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실 그를 낙심케 하는 요인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육체의 질병도 실은 큰 고통이었으며 낙심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동료들을 포함해서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근거는 비록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겉사람’은 ‘육체적인 존재’ (physical being)를 뜻하며 ‘속사람’은 ‘영적인 존재’ (spiritual being)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흙으로 빚어지고 흙으로 돌아갈 우리의 육체는 그 본질상 낡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고 병들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병약하고 노쇠해진 사도 바울도 낙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가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비록 그의 겉사람은 낡아질지라도 그것을 결코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기회로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자기의 겉사람이 낡아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나이가 들어 겉사람이 낡아질지라도 날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사람은 비록 자신의 겉사람이 낡아질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연유로든 낙심될 때일수록 속사람을 날로 새로워지게 하는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고 도리어 더 가치 있고 유익한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금년에 구십 세가 되신 김동길(1928~) 박사님의 이야기입니다. 2년 전 미수 때 <나이듦이 고맙다>라는 책에서 “오늘보다 내일 더 느리게 걸을지라도 나는 고맙다, 나의 나이 듦이. 나는 고맙다, 오늘이 그리고 내일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건강 문제, 경제 문제 등등으로 나이듦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체감하는 대로 나이듦이 한편으로 고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기쁨이며 설렘이기도 합니다. 나이듦이야말로 새로운 만남을 향해 가는 새로운 여정이 아닙니까”라면서 겉사람이 낡아질지라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함을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자라고 자라 진정으로 성숙한 노인이 되려면, 내 힘만을 의지하여 악착같이 살아왔던 생활을 내려놓고, 겸허히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만을 붙드는 순간을 지나와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늘 사다리에 올라 영원까지 닿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지금도 굽은 등으로 돋보기를 쓴 채 성경을 읽어 내러가는 노인들을 보면 가습이 뜁니다.” 아멘!
세상에 나이듦에 따라 겉사람이 낡아지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이듦에 따라 겪는 고통과 고독 등의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낙심합니다. 그렇지만 자기 힘만을 의지하며 악착같이 살아왔던 생활을 내려놓고 겸손히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만을 붙드는 사람은 겉사람이 낡아질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낙심하기는커녕 자신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짐을 경험하면서 감사하며 행복해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등이 굽고 눈이 잘 안보이며 걸음이 느릴지라도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줄 믿습니다.
로마서 12:1-2에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며 속사람의 새로워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 예배’(spiritual worship)란 ‘참된 예배’(true worship) 또는 ‘합당한 예배’(reasonable worship)를 뜻합니다. 속사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영적 예배, 참된 예배,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알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낙심될 때일수록 속사람을 날로 새로워지게 함으로써 겉사람이 낡아지는 것조차도 고맙게 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광을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를 낙심케 하는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환난 (troubles, sufferings)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가 몸소 겪은 환난은 참으로 다양하고 참혹했습니다. 그는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더 많이 옥에 갇혔으며 매로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로마 사람들에게 세 번 몽둥이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하루 밤낮을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다고 했습니다 (고후11:23~27).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 바울이 겪은 환난 곧 고난과 시련(sufferings and troubles)은 보통 사람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환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 했습니다(롬 5:3)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그는 그가 당한 환난을 잠시 받는 가벼운 것으로 보았으며 (small and temporary trouble) 이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a tremendous and eternal glory) 가져온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환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한다’는 말의 헬라어 (스코페오)는 ‘소망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보이는 것을 주목하며 일시적인 것에 소망을 두고 집착하는 사람은 잠시 받는 환난을 견디지 못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며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에 소망을 두고 집념하는 사람은 잠시 받는 환난에 낙심하지 않으며 도리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될 줄 믿습니다.
선교사 엘리엇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남미 키치와 인디언 선교를 위하여 병원과 학교 시설을 중심해서 여러 가지 건축 공사에 일 년 이상을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건축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낙심천만한 일이 닥쳤습니다. 어느날 큰 홍수가 나서 이 모든 시설을 하루 아침에 다 쓸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보이는 것들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선교사 엘리엇의 신앙과 소망, 사명과 헌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는 그를 위해 기도하며 지원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어 보냈습니다. “나는 그 날 아침 나의 모든 수고와 땀과 기도가 들어있는 선교회관을 휩쓸어가는 홍수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너의 하나님이다. 너는 지금도 나를 신뢰할 수 있느냐?’ 이제 나의 모든 수고는 물거품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실 것입니다.” 아멘!
건물과 시설 등 보이는 것은 사라지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임재 등은 영원합니다. 보이는 것이 사라질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고 주목하는 사람은 보이는 것이 사라질 때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가치와 의미를 보이는 것에 두지 않습니다. 교만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더욱 믿고 의지하며 겸손히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체험하고 찬양하게 될 줄 믿습니다.
로마서 8:24-25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소망하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라며 참된 소망은 보지 못하는 것에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참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낙심될 때일수록 보이는 것을 주목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 곧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주목함으로써 잠시 겪는 고난과 시련 중에도 즐거워하며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루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문에 ‘비막대어심사’ (悲莫大於心死) 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 슬프다 슬프다 하여도 마음이 죽는 것보다 슬픈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죽으면 사실 육체도 무너지게 됩니다.
런던에 있는 킹대학병원 (King College Hospital)의 암연구소에서 환자들의 신심과 낙심에 관한 연구를 했습니다. 유방암 환자 57명을 상대로 연구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환자들 가운데 믿음으로 투병한 사람들은 10명 중 7명이나 10년 후에도 생존해 있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암진단을 받고 “이제 죽었구나!” 하며 낙심한 사람들은 5분의 4 곧 10명 중 8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시편 42:5에 다윗은 극심한 고난을 당하며 낙심될 때에 “내 영혼에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며 낙심을 찬송으로 대치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연유로든 낙심될 때일수록 속사람을 날로 새로워지게 하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광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낙심될 때에도 여전히 찬송을 부르며 소망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겉사람과 속사람의 차이
이한규목사 / 고후서 4장 16-18절
< 속사람의 믿음을 보이라 >
진심으로 믿는 것과 겉으로 믿는 척 하는 것은 다르다. 사람 눈에는 겉으로 믿는 척 하는 것이 더 진짜 같다.왜 이단과 사이비가 활개를 치는가? 겉으로는 더 믿음과 능력이 있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겉으로 대단한 능력과 신비를 보여 주어도 속사람의 변화가 없다면 가짜다. 예수님을 영접해 구원받으면 마음과 인격도 달라지고 삶의 시각과 스타일도 달라진다. 그런 변화를 이루지 못하고 신비와 능력과 영성과 금욕을 과시하는 것은 거짓과 위선이다.
겉으로 영성을 꾸미고 과시하기보다 소리 없이 의를 행하라. 겉으로 영성을 과시하면서 말로는 “오직 예수야!”라고 하지만 가는 곳마다 잘 부딪치면서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거짓된 영성을 주의하라. 사람은 본능적으로 싸움이 벌어지면 더 즐기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싸움은 영혼을 죽이기 위한 사탄의 갈라치기 작전임을 깨닫고 싸움을 즐기는 본능을 잘 극복하라.
가끔 회의할 때 심한 의견 갈등 중에도 조는 사람이 있다. 그때는 역설적으로 그가 가장 영성이 높은 사람이다. 설교를 들을 때 조는 사람은 있어도 싸움이 있을 때 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싸움이 생기면 눈이 번쩍 뜨인다. 어떤 교인은 평소에는 교회에 잘 안 나가다가 싸우는 일이나 투표하는 일이 생기면 더 나간다. 그처럼 싸움을 즐기는 겉사람을 잘 극복하고 믿음으로 사는 속사람을 추구하라.
어느 날 한 집사가 불경기인데 많은 선교 헌금을 했다. 사역자가 고마움을 표시한 후 왜 그렇게 선교 헌금을 많이 했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목사님, 어떤 문제가 생겨서 선교 헌금을 했어요.” 대부분의 사람은 문제가 해결된 후 감사하면서 헌금하지만 그는 문제가 생길 때 역설적으로 “이제껏 내가 감사하고 선교하는 일에 게을렀구나.”라고 깨닫고 헌금한 것이다. 그런 역설적인 속사람의 삶을 추구하라.
< 겉사람과 속사람의 차이 >
사도 바울은 겉사람이 낡아져도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면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다(16절). 그러므로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으로 살라. 겉사람과 속사람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가?
1. 영적인 지식
성경 잠언을 강해할 때 설교자는 성도다운 삶의 원리에 관한 윤리적인 설교를 하게 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저 설교에는 예수가 없어.”라고 말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영성을 과시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씀보다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말씀이 훨씬 많다. 그래서 설교에는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요소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사실을 외면하고 왜 “예수가 없어.”라는 말로 비하하는가? 자신의 영성을 과시하면서 영혼을 교회에서 멀어지도록 꾀어내기 위해서다.
극단적인 영성주의와 율법주의가 겉으로는 영성과 거룩성이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영성과 거룩성이 없는 것이다. 겉사람은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알기에 점차 교만해지지만 속사람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기에 점차 아름다운 인격체가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은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많이 아는 것보다 바로 아는 것이다. 바른 말씀 지식을 가지면 많이 알수록 더 겸손해진다.
어느 날 한 초신자에게 오래 교회에 다닌 친구가 물었다. “자네 크리스천이 됐다지?” “그렇네.” “그러면 예수님에 관해 꽤 알겠군.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났나?” “잘 모르겠네.” “예수님이 몇 살에 돌아가셨나?” “잘 모르겠네.” “예수님의 제자는 몇 명이었나?” “그것도 잘 모르겠네.”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예수님에 대해 전혀 모르는군.”
그때 초신자 친구가 말했다. “자네 말처럼 난 아는 게 거의 없지만 이 정도는 아네. 3년 전에 난 주정뱅이 빚쟁이였고 가정은 깨졌네. 저녁마다 가족들은 나의 귀가를 무서워했네. 그러나 지금은 술도 끊었고 빚도 다 갚았고 가정은 화목하고 저녁마다 가족들은 나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네. 이 변화를 예수님이 주셨네. 나는 예수님을 이만큼은 아네.” 그 말을 듣고 지식을 자랑하던 친구가 오히려 수치를 느꼈을 것이다. 겉사람은 지식의 증대를 자랑하지만 속사람은 변화된 삶을 자랑한다. 변화와 실천이 없는 지식은 교만의 표식이다.
2. 먹는 음식
겉사람은 몸에 좋다면 무엇이든지 다 먹는다. 특히 한국 사람은 몸에 좋다면 뱀, 지렁이, 곰 발바닥, 원숭이 뇌, 불개미 등까지 먹는다. 또한 겉사람은 남의 땅을 먹어치우는 것에도 집착한다. 그래서 고대에는 침략 전쟁을 벌였고 요즘은 고상한 침략 전쟁인 땅 투기에 집착해서 땅값 상승과 환경 파괴로 지구촌 전체를 병들게 만든다. 반면에 속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기에 점점 내면이 풍성해진다.
영국 해안에는 종종 갈매기들이 떼로 죽는 현상이 생긴다. 여름 관광객 때문이다. 여름에 관광객이 먹이를 던져주면 갈매기들은 과자와 사탕 등을 맛있게 먹는다. 그런 음식들은 사실상 갈매기들에게 해롭다. 더 나아가 그런 음식을 계속 먹으면 좋은 자연 음식에 대한 식욕을 점차 잃는다. 그 후 철이 지나 여행객의 발길이 끊기면 좋은 자연 음식이 바다에 풍성해도 그것을 먹지 않아 굶어죽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은사나 능력이나 외형 같은 겉사람의 음식을 너무 좋아하면 속사람에게 좋은 신령한 미각을 잃고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별것 아니게 여긴다. 결국 잘못된 맛에 길들여진 겨울 갈매기처럼 그 영혼은 점차 죽어간다.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가까이하라. 말씀은 재미없는 것 같아도 영혼에 양약이 된다. 그러다가 말씀에 맛을 들여 말씀이 꿀맛처럼 느껴지면 그때부터 축복의 문이 신기하게 열린다.
3. 상황을 보는 눈
문제가 생길 때 겉사람은 문제를 크게 보고 힘을 잃지만 속사람은 문제를 작게 보고 잘 이겨낸다. 상황을 보는 눈에서 겉사람과 속사람의 차이는 닭과 독수리의 차이만큼 크다. 폭풍이 불면 닭은 몸을 날개 속에 파묻지만 독수리는 날개를 펴고 폭풍에 몸을 실어 더 빨리 안전지대로 날아간다. 그처럼 고난 중에 겉사람은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만 속사람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낸다.
한 성도가 큰 수술을 앞두고 자꾸 두려움이 생겼다. 그 두려움을 읽고 담임목사가 심방 예배 때 에스더 4장 말씀을 통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도전했다. 그리고 마취될 때는 죽는 체험을 한다고 여기고 마취에서 깨어날 때는 부활 체험을 한다고 여기라고 했다. 그 말씀을 통해 그에게 담대함이 생기면서 편안하게 수술대에 올랐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속사람의 믿음을 가지면 용기와 평안이 생기면서 더 죽지 않는다.
수술이 잘 끝났다. 회복도 빨랐다. 그가 다시 꿈에 부풀어 사업을 구상하는데 종종 “다시 아프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담임목사가 그 두려움을 또 읽어내고 치유 후에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살고 나중에 사업에 성공해도 간증한다고 자랑하지 말고 겸손하게 소리 없이 헌신하라고 했다. 또한 숫자로 성공을 저울질하지 말고 욕심을 버리고 사명을 따라 사업하면서 늘 믿음으로 살라고 했다. 그러자 다시 신기하게 그에게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에 깊은 평안이 임했다.
탈무드에는 큰 슬픔을 표시하는 세 등급의 사람이 나온다. 3등급의 사람은 슬플 때 울부짖는다. 일반적인 겉사람의 모습이다. 2등급의 사람은 슬플 때 잠잠히 고통을 받아들인다. 인격적인 겉사람의 모습이다. 1등급의 사람은 슬플 때 노래를 빚어낸다. 그런 모습이 바로 속사람의 모습이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이다. 그처럼 절망의 밤에 희망의 별을 찾아서 노래하는 복된 속사람이 되라.
< 속사람의 모습을 앞세우라 >
나무가 속이 튼튼해지고 새로워질 때는 겨울이다. 추운 겨울에 앙상한 나뭇가지만 보면 생명이 없어진 것 같지만 생명력이 뿌리에 감춰진 상태에서 내면은 더 튼튼해지고 강해진다. 그리고 봄이 되면 그 내면의 생명이 밖으로 드러나 잎과 열매를 맺는다. 인생과 교회의 겨울에는 신나는 느낌도 없고 풍성한 잎과 열매도 없고 소리도 없다. 그러나 그 고독과 침묵 속에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면 영혼은 내적인 활력과 끈질긴 생명력으로 더욱 넘치게 된다. 결국 겨울의 고통은 춥고 힘들고 피하고 싶지만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야생마를 최고의 준마로 길들일 때 먼저 말을 급류에 몰아넣고 지치게 한다. 그다음에 뭍에 오르면 다시 모래 경기장에 몰아넣고 쉬지 않고 뛰게 한다. 마침내 말이 지쳐 쓰러져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게 된다. 그때부터 말은 자신을 포기하고 조련사의 손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면서 최고의 준마로 길러진다.
사람들은 조금만 여유가 있어도 자기 인생의 고삐를 하나님께 잘 넘기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이 큰 문제나 시련을 통해 기필코 자아를 포기하게 만들고 결국 그가 “하나님이 없으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할 때 그를 새롭게 일으키신다. 그때부터 사랑과 평화와 안식과 지혜가 넘치면서 축복의 문도 활짝 열린다. 그러므로 큰 문제가 생길 때 너무 낙심하지 말라. 그때가 내가 하나님을 깊이 만날 때이고 하나님이 나의 축복을 위해 놀랍게 일하실 때다. 늘 겉사람보다 속사람의 모습을 앞세워 더욱 큰 복을 예비하라.
속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고후 4:16-18 / 이대성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속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속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여러분!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으십니까? 제 마음은 아직도 청춘인데 제 몸은 하나 둘 그 기능이 고장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세월이 빛의 속도로 빠르게 지나가고 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은 이처럼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가는 세월을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겁니다.
지난 월요일 새벽기도를 마친 후 출발해서 화요일 늦은 밤에 돌아오는 일정으로 노회 목사님들과 함께 전남 곡성에 있는 나눔 영성원을 다녀왔습니다.
그 곳은 한 동안 매월 청계산 기도 모임을 함께 했던 반정헌 목사님께서 이사장으로 계신 곳으로써 그 동안 코로나로 인해 가 보지 못하다가 이번에 큰맘 먹고 우리 목사들이 다녀오게 된 겁니다.
저는 청계산 기도 모임 때부터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던 나눔 영성원 원장 장로님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반목사님께서 기도 모임 당시 들려줬던 놀라운 일들을 저는 솔직히 들으면서 반신반의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머릿속에 생각했던 원장 장로님의 모습은 영적으로 은혜가 넘쳐나는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었는데, 직접 만나보니 외관상 너무나도 젊으신 겁니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장로님께서 밝게 웃는 모습으로 우릴 맞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과 계속적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진짜 건강은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이 건강해야 함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음에도 왜 그토록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요?
우리가 정작 싸워야 할 대상은 그 사람을 조종하고 있는 사탄 마귀임에도 속사람이 영적으로 강건하지 못하기에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영적 분별력이 없어서 그만 사탄 마귀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 말씀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아멘.
여러분! 얼마 전에 2023년이 시작된 것 같은데 벌써 상반기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철을 정신없이 보내고 나면 나뭇잎들이 옷을 벗는 가을이 되고,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캐롤송을 부르다 보면 또 한 해가 지나고 우리 모두는 나이를 한 살씩 더 먹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이 먹는 것이 반가우면 아직 젊은 것이고, 나이 먹는 것이 반갑지 않으면 늙은 것이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아마 아주 젊은 청년이 아니라면 거의 대부분 나이 먹는 게 반갑지 않을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모두 늙어가고 있는 겁니다. 누구에게나 늙어간다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육신이 쇠약해지고 많은 것을 상실해 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쾌한 일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점점 더 하나님께 가까워지고, 영원한 본향, 저 천국에 다가가고 있는 겁니다.
지난 6월 3일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 한국 방문 여의도 전도 집회 50주년을 기념해서 그의 아들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가 부흥 집회를 열었다는 기사를 접하고서 유튜브를 통해 아들 그래함 목사의 설교를 듣고는 제 가슴이 너무나도 뭉클함을 느꼈습니다.
1973년 6월 여의도 집회 현장에 까까머리 중학생인 저 또한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시간이 흐르면 쇠하여 낡아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영적인 계보는 결단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똑똑히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도 바로 그런 내용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육신은 나이가 들수록 쇠약해지고 추해질지 모르지만, 우리 영혼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나이테는 거친 모습일지 모르지만, 영혼의 나이테는 곱고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이 드는 것이 결코 불쾌한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나이 드는 것이 반가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의 나이테는 얼마나 곱고 아름답게 새겨지고 있는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이 더욱 강건해짐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영혼의 나이테가 너무나도 곱고 아름답게 새겨지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세월이 흐르면서 겉사람은 낡아지더라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다같이 16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먼저, 세월의 흐름과 겉사람의 낡아짐입니다. 여러분! 16절 말씀을 보면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육체는 겉사람, 영혼은 속사람입니다. 육체는 태어나서 일정 기간 동안(약 25년 내외)은 성장하지만, 그 후로는 점점 노화됩니다.
아무리 건장한 사람이라도 20대 후반이 되면 자기도 모르게 노화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예민한 운동선수들의 경우를 보면 30세만 넘어도 벌써 은퇴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육체는 세월이 갈수록 쇠퇴합니다.
이전 성경인 개역 한글을 보면 “겉 사람은 후패하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후패하다’는 ‘낡아지다’ ‘닳아서 해어지다’ ‘썩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가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특히 중년을 넘어가면서 육체의 노화 현상이 확연하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문득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희어지고, 쉽사리 피로를 느끼면서 신체 기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성경에도 보면 인간의 육체가 낡아지는 모습이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노화의 모습을 가장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전도서 12장 3절에서 5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화면을 보면서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 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노화 현상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들입니다. 집을 지키는 자는 손을 가리키는데, 늙으면 무기력해지고 손이 떨리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힘 있는 자들은 다리를 가리키는데, 늙으면 다리에 힘이 없어진다는 표현입니다.
맷돌질하는 자는 이를 가리키는데, 이가 빠져서 씹기 어려워진다는 겁니다. 창들로 내다보는 자는 눈을 가리키는데, 늙으면 눈이 어두워지는 것을 비유합니다. 길거리 문들은 귀를 가리키는데 청각이 어두워지는 것을 의미하고,
맷돌 소리가 적어진다는 것은 이가 없어서 음식물을 먹을 때 소리도 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새 소리에 잠을 깬다는 것은 잠을 깊이 자지 못해서 일찍 깬다는 겁니다.
음악 하는 여자들은 성대를 가리키는데, 늙으면 목소리도 약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노년이 되면 높은 곳, 길에 마음대로 거동하지 못함을 나타냅니다. 또한 살구나무는 봉오리 때는 분홍빛이다가 만개해서 떨어질 때가 되면 흰색이 됩니다.
이것은 머리칼이 희어짐을 묘사합니다. 메뚜기도 짐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몸이 약해진다는 겁니다. 정욕이 그친다는 것은 식욕이 없어지고 매사에 의욕이 없어짐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육체가 낡아지다 보니 더더욱 외모나 건강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요즘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노화 방지를 위한 식품이나 약품, 화장품 등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늙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많이 씁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아무리 그렇게 해도 가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낡아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좋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은 육체를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죄악시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육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일진대 유지 잘 하고, 최대한 아름답게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육체!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만을 전부로 알면 오히려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니 너무 육체의 낡아짐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결코 주목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 주목해야할 대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입니다.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 즉 ‘속사람의 강건’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같이 17절과 18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게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여기서 ‘주목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스코페오’인데요? 목표(스코포스)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그래서 주목한다는 것은 곧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후로는 날로 낡아져 가는 겉사람을 신경 쓰느라고 진짜 주목해야할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시고,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을 만들고자 애쓰고 힘쓰는 자 다 되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상 16장 9절을 보면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영혼을 더 중시하신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우리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릇보다 더 중요한 건 내용물입니다. 똑같은 그릇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느냐?’ 내용물에 따라 달라집니다. 밥그릇, 국그릇, 반찬 그릇 등 똑같은 상자라도 내용물에 따라 보물 상자도 되고, 쓰레기 상자도 되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저는 영혼이 중요하다고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우리의 겉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엔 낡아질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갈고 닦으면 날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을 닮고자 애쓰고 힘쓰면 우리 영혼이 더욱 풍성해지고,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신실한 신앙인들은 한결같이 영혼에 큰 관심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 말씀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여러분!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영혼이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며 수고하는지... 이를 마치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3절과 4절 말씀입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 육체가 낡아지더라도 영혼이 새로워지면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겉사람이 쇠하는 것만 보면 낙심이 되지만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생각하면 참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은 언젠가는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불치병에서 기적적으로 온전히 나음 받았다 할지라도 결국엔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입니다.
따라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겉사람이 아닙니다. 속사람입니다. 우리네 겉사람은 언젠가는 낡아지게 되지만, 우리네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잠시 받는 환난은 경한 것이라고...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 진짜로 중요하다고...
그러하기에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그것은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더 이상 곧 낡아질 겉사람을 치장하기 보다는 영원토록 변함없을 속사람의 강건을 위해서 날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온전히 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속사람을 가꾸는 사람이 받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속사람을 가꾸는 사람이 받는 유익” 여러분! 저는 그 동안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께서 선포하셨던 3박자 구원 말씀이 좀 불편했던 게 사실입니다.
요한삼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런데 이번에 속사람을 가꾸는 사람이 받는 유익을 묵상하다 보니 이 말씀이야말로 진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영혼이 온전히 잘되게 되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속사람을 가꾸어 감으로 날로 새로워지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첫째는, 영생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영혼 가운데 예수를 모시고 있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데 영생은 장차 천국에 가서 얻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모심으로 이미 우리 영혼에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머니 머니해도 머니가 최고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머니는 댈 것도 아닙니다.
돈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더 풍요로운 것입니다. 예수 믿고 영생을 얻으면 이 험한 세상을 살면서도 환경을 초월해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평안과 기쁨을 맛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찬송가 438장 3절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아멘!
둘째는, 천국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은 육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통해서는 볼 수 있습니다. 영혼이 맑지 않으면 천국이 보이지 않지만, 그 영혼이 날로 새로워질수록 천국은 명료하게 보입니다. 이게 곧 천국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넘치면 이 세상에서 겪는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 소망을 보게 되면 그것이 너무나도 엄청남으로 세상 고난을 새털처럼 가볍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아멘!
셋째는, 육체의 건강과 아름다움을 덧입게 됩니다. 여러분! 영혼이 날로 새로워지면 그것이 육체에도 영향을 줍니다. 설교 모두에 제가 영성원 원장님 나이가 50대 정도로 보인다고 했지요?
저 또한 제 나이에 비해 동안이라는 말을 듣곤 했는데 그 원장님은 60년생 남자분인데도 얼굴 피부가 얼마나 맑고 깨끗하던지요... 우리말 ‘얼굴’은 본래 ‘얼꼴’에서 왔다고 합니다. ‘얼’은 영혼을 의미하고 ‘꼴’은 모양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얼굴은 영혼의 모양이란 뜻입니다. 우리 영혼이 강건하고 아름다워지면 외모도 좋게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기 좋게 늙을 수 있습니다.
어느 자매님 이야기입니다. 그 분은 항상 밝은 표정입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분의 나이를 알고 나면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10년 이상 젊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위에서 자꾸 묻습니다.
“매력을 유지하는 비결이 뭡니까?” 그 분은 겸연쩍어서 대답을 못하다가 하도 성화를 부리니까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글쎄요. 저는 특별히 외모를 많이 가꾸지 않습니다.
저는 영혼을 위해 살았습니다. 입술을 위해서는 진실을 말하고, 음성을 위해서는 찬양을 하고, 눈을 위해서는 긍휼을 품고, 손을 위해서는 자선을 베풀고, 얼굴을 위해서는 정직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흔히 자주 분노하는 사람은 인상이 험하게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찡그리면 안면 근육 72개가 움직이고, 미소를 지으면 안면 근육 14개가 움직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웃으면 주름이 덜 생기고, 생겨도 곱게 생긴다는 겁니다.
실제로 연로해서 주름이 생긴 분들을 가만히 보면 어떤 분은 주름이 웃고 있고, 어떤 분은 주름이 화내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인상이 달라진 겁니다. 영혼에 평안과 기쁨이 있으면 분명 얼굴 또한 좋아집니다.
이는 건강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은 물론 유전적인 요인이나 환경적인 요인이 있기에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영혼의 상태가 육체의 건강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잠언 17장 22절 말씀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넷째는, 부활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망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는 부활 소망입니다. 이는 영혼만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도 완전히 새롭게 부활하는 겁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과 21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속사람을 가꾸어 나감으로 영생의 기쁨, 천국 소망, 육체의 건강과 아름다움은 물론이요, 끝까지 부활의 참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속사람을 아름답게 가꾸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속사람을 아름답게 가꾸는 방법” 여러분! 속사람이 강건해야 겉사람까지도 강건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의 속사람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을까요? 첫째는, 마음의 문을 통제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세상의 악한 것들이 자꾸만 밀고 들어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의 문을 잘 통제하는 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혼자 집에 있을 때는 함부로 문을 열지 않습니다. 벨이 울리면 신원을 파악하고 유익한 사람만 집으로 들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속에 좋은 것들만 선별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움, 질투, 의심, 교만, 불안 등 무익하고 악한 것들은 예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진정 속사람을 순결하게 보존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죄악의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통제하는 것과 더불어 중요한 게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항상 죄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밖에서 밀고 들어오는 악한 것들을 제아무리 잘 막아도 우리 속에서 죄악의 잡초가 자꾸만 돋아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육체를 갖고 사는 한 피할 수 없는 겁니다.
농사하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오뉴월 같은 때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바쁘고 힘들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잡초를 뽑고 돌아서면 금방 또 다시 돋아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계속 돋아나는 잡초를 제거하다 보면 진이 다 빠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는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늘 깨어 있어서 죄성의 잡초가 돋아나는 것을 계속 뽑아줘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속사람이 진정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말씀과 기도로 늘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에 악한 것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마음속에서 죄가 솟아나는 것을 조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자세입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란 말이 있듯이 신앙도 공격적인 게 좋습니다. 우리는 죄악을 막아냄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늘 항상 성령충만할 때 세상 죄악은 감히 우릴 침범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꾸준히 교제하면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어지고, 거룩한 주의 형상이 날마다의 삶속에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마음속으로 각자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의 속사람, 영혼의 모습은 어떠한가?’
육체의 나이테는 세월이 가면 저절로 새겨집니다. 그러나 영혼의 나이테는 저절로 그려지는 게 아닙니다. 10년, 20년, 아니 그 이상 신앙생활을 했어도 여전히 한 살, 두 살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날마다 경건에 이르기를 애쓰고 힘쓸 때에 비로소 우리는 영혼의 나이를 먹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7절과 8절 말씀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날마다 경건에 이르도록 나 자신을 연단할 때에 우리 영혼은 낡아지는 육체와는 달리 날로 새로워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영혼의 나이테는 곱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 둘 새겨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나아 온 저와 여러분 모두 영혼의 나이테가 곱고 아름답게 새겨짐으로 말미암아 진정 하나님의 기쁨이요, 자랑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네 속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이제 후로는 속사람이 강건해서 날마다의 삶속에서 천국의 기쁨과 감격을 맛보며 살다가, 저 천국에서 우리 주님 품 안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새로운 관점으로
고린도후서 4:16~5:5 / 김철환목사
사람이 이 세상을 살다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끝일까?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한 실험이 있다. 즉 임사 체험자들인데 그들의 공통된 이야기는 이것이다. 사람이 운명할 때 육체는 죽지만 사람의 영은 살아있어 육체의 무너진 집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공상 또는 망상처럼 생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학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과학이란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고 하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부정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더욱 더 보이는 육체만을 위해 살고 육체라는 장막 집만 단장한다. 보이는 육체가 이끄는대로 살되 영혼이 이끄는대로 살지 않는다. 즉 겉사람만 중요시 여기지 속사람은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육체라는 집은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아무리 인삼을 비롯한 보약으로 단장하고 리모델링, 성형 수술을 해도 한 순간에 무너지는 집이 우리 인생의 육체이다. 그러므로 관점을 다르게 해야 한다.
1.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시 여겨야 한다. (고전4:18, 5:1)
고후5:1에서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하였다.
바울은 육체를 장막 집이라고 하였고 그 집이 무너지는 날, 하늘에 있는 집,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으로 간다고 하였다. 고전2:3~5을 보라. 삶의 노년이란 다 허물어지는 집이고 죽는다는 것은 육체는 땅으로,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에 너무 주목하지 말아야 한다. 영혼의 머무는 집으로서의 육체는 장막에 불과하다. 장막이란 수시로 철거되는 집이다. 임시막이다. 이런 집에 거하는 영혼이 육체와 이탈될 때 아버지 집, 하나님의 집으로 떠나간다는 것을 중요시 해야 한다.
바울은 고후4:18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즉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 안 보이는 것이다. 육체라는 겉사람이 아니라 육체 속에 거하는 영혼의 사람, 속사람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나, 영원하도록 존재하고 있는 영체로서의 나에 집중해야 한다. 무너지지 않는 내 영혼, 소멸되지 않는 내 영혼이 보이는 장막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잘 되도록 새로운 관점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 속아 향락, 미모, 권세에 속아서 음부의 지옥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천사의 인도를 받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집에 들어가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2. 죽는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소망으로 나아가자. (고후5:2)
바울은 고후5:2에서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 하였다. 바울은 어떤 면에서 하늘의 집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집에 들어가는 것을 사모하는 바울은 인생이란 짐이 고달파서 벗고자 함이 아니라고 하였다. 삶이 너무 무거워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덧입으려는 소망 때문이었다. 즉 죽은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었다. 썩은 몸, 낡아지는 몸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함이었다. 고후5:4에서 이것을 대망한다는 것을 “탄식한다”는 말로 표현하였다. 어서 아버지의 나라로, 어서 하나님의 집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 그의 신음 소리였다는 말이다.
육체를 입고 사는 것은 죄성을 지니고 산다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은 은혜를 외면하고 죄악으로 가게 한다. 탄식이란 육체의 죄성에서 벗어나려는 신음 소리이다. 완성된 구원을 대망하는 소리다. 바울의 사생관이 여기 있다. 죽는 것은 슬프지 않다. 죽으면 천국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도착하는 것이다. 바울은 주님께로 가는 것을 사모하였다. 아니 살아있는 이 세상의 삶보다 더 좋은 일이라고 소망하였다.
빌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놀라운 고백이다. 어찌하여 바울은 이렇게 철저히 죽는 것을 거리끼지 않을까? 나는 지금 죽으라고 하면, ‘아니 조금 더 있다가 할 일이 남아서요.’라며 핑계를 될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을 분명히, 그리고 똑바로 알고 있다.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에서 사망의 원수는 박살이 난 것을 확신하고 있다.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부활을 믿는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겼다. 그를 믿는 자는 죽음이 문제가 안된다. 죽은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었으니 죽음은 새로운 삶의 변화다. 우리는 가야 할 처소가 있다. 그러기에 그 처소를 간절히 사모하게 된다.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주님을 떠나보내고 주님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십자가의 죽음이 눈 앞에 있는데도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죽음이란 신앙의 새 관점을 가진 이에게 근심해야 할 것이 아니다. 내 아버지 집으로 가는 출발이다. 천병상 시인의 시처럼 이 땅에 소풍을 왔다가 돌아가는 날이다. 장막을 거두고 하늘 맨션, 예비된 곳으로 처소를 바꾸는 날이다. 영혼이 머물러 있던 장막 집을 벗어버리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떠나는 여행의 시작이 죽음이라는 것도 안다면 소망이 생긴다. 설레임이 생긴다. 우리는 바울처럼 하늘의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면 죽음을 뛰어넘는 특별한 삶을 살 수 있다.
3. 성령이 소망의 삶을 보증하셨음을 알라. (고후5:5)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준비의 삶이 이 세상의 삶이다. 소망으로 아버지 집을 사모하며 살기에 여기서의 삶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충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새 관점은 주와 함께 머물 하나님의 집이다. 그런데 이런 소망의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된다. 보는 것으로만 행하는 내가 믿음으로 행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소망의 삶의 보중으로 성령을 주신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우리가 내세, 소망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떠나가는 주님을 대신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속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을 하나님이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그 보혜사 성령,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오시면 확신이 생긴다.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 성령은 우리의 보증이 되신다. 즉 아버지의 집, 하나님이 지으신 집,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의 것임을 보증하신다. 그 집을 간절히 덧입기를 사모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보증하신다. 겉사람보다 속사람이 더 중요하고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 장막 집보다 하늘의 집이 더 중요한 것임을 보증하신다.
보이는 것은 다 변질되고 퇴화되고 소멸되어가도 보이지 않는 영은 죽지 않는다는 보증을 성령님이 해주신다. 이 보증으로 영적 진리를 알게 되니 삶의 새로운 관점으로 산다.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영으로 죽지 않게 된 나는 나의 몸, 썩고 사라질 육신의 장막 집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게 됨을 보증 받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약속이다.
고전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죽음은 사탄의 최고 무기였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속이지 못한다. 사탄이 죽음을 앞세워 100년 밖에 안되는 삶이라고 허무와 비관, 우울과 슬픔으로 공격해 왔으나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주 안에서 잠시 잠자는 것이요 새로운 하나님 아버지 집으로 떠나는 여행의 시작이다. 인생이란 우울할 수가 없다. 성령이 보증하신 내 삶은 기대와 설레임으로 나아간다. 그러기에 고후5:6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라고 하였다. 주눅 들거나 슬프거나 망설이는 삶을 살지 않는다.
이 땅에서 육체를 벗고 하나님의 집을 수 백번 다녀온 이가 있다. 그는 스베덴 보리다. 그는 스웨덴의 수도에서 태어난 과학자로 아이작 뉴튼과 같은 최고 천재 과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57세 하늘에 다녀오는 체험을 한 후 지옥과 천국을 기록으로 남기고 하늘 나라의 삶, 영생의 삶을 전하는 이가 되었다. 그는 말하길 나같은 과학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영계의 진리를 알고 보니 이는 학문이 아니고 인류의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이다. 이 특별한 소명은 내가 과학자로 공헌하는 것보다 수 천, 수 만배 더 중요하다고 하고 그는 과학자의 길을 멈추었다. 그의 책, 「위대한 선물」에 실린 찬사의 글을 보면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다. 스베덴 보리를 알고 나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천국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천국에 가면 나는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닌 것도 알았다. 나는 그의 저서를 읽은 후 죽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천국의 여행기인 책만 읽고도 삶이 담대해진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갈 곳이 분명하게 있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고 성경책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다. 거기다가 성령으로 보증해 주시는 소망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영혼의 때를 위해 사는 나는 초점이 달라져야 한다. 주님, 아버지 집, 주님과의 만남을 향한 여기에서의 삶이란 성장과 더 나은 변화와 더 나은 삶의 준비로 서야 하지 않겠는가?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서야 하지 않겠는가? 어리석고 더러운 삶의 집, 육체를 위해 살던 삶의 집을 가볍게 하고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삶을 다시 꾸리는 전환과 결단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버지 집에 들어가는 내 영혼이 주님과 닮은 모습이 되어 그 얼굴과 용모, 옷들에서 거룩한 빛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새로운 관점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내 인생을 새롭게 정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리석은 자가 되어 지상 백 년동안이 삶의 전부인 줄 알고 육체만을 위한 삶을 추구하다가 영원한 천국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지혜로운 자가 되어 이 지상에서 영생 천국으로 나가기 위해 백 년을 투자하는 영혼의 때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양화지 묘역에 가 보라. 이국 땅인 조선에 와서 생을 마친 선교의 사람들, 그들은 어리석은 투자를 한 것인가? 엘리엇(J.Eliot) 선교사는 휫튼 대학을 수석으로 마치고 교수 회의에서 학교 교수직을 제의 받았던 신앙인이었다. 그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식인족인 아쿠와족 선교를 나갔을 때 선교지에서 순교를 당하였다. 그때 발견된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써 있다.
“영원을 향한 나의 삶의 투자를 향해 어리석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 모두 무너질 육체를 위해 투자하는 삶을 버리고 내 영혼을 위해, 수많은 영혼을 위해,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상 받는 영혼을 위해 투자하고 살자. 새로운 것을 바라보고 소망하는 관점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매일 새롭다
고후04장 16~18절 / 이충섭목사(승리교회)
예수님안에서 매일 새롭습니다.예수님안에서 매일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매우쉬운일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겉사람과 속사람의 구별이 안 되었습니다. 뭐가 겉사람이고 뭐가 속사람인지 분별하려고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사람으로 태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곧 옛사람과 새사람이 확연히 마음속에 구별되고 그날부터 마음속에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새사람과 겉사람이 주도권 싸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왜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전쟁을 하는 주요 요인을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즉, 경쟁자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인 이익 추구, 명예 추구인 것입니다.
인생은 빵 한덩어리를 두고서 누가 더 많이 점령하느냐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욕심이 없으면 싸우지 않지요. 그러나 욕심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싸우는 것입니다. 겉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아담을 따라 하나님 없이 인간의 정욕,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면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1. 겉사람으로 사는 것
겉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겉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경고한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왜 겉사람이냐.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즉시로 속사람은 죽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속사람, 영생의 사람은 죽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사람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은 자기의 정욕중심으로 삽니다. 자기 욕심중심으로 살아요. 무엇이든지 내 욕심을 먼저 앞세워 놓고 그 욕심에 따라서 결정하는 것이 겉사람이 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리고 겉사람은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마귀를 따라 이 세상에 나와서 그때부터 마귀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쫓지않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해서 마귀의 종이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시키는 대로 따라서 행하면 시키는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지배하에 사는 사람은 모든 면에 악한 꾀를 쫓아서 사는 것입니다. 악한 꾀라는 것은 탐욕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삽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겉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결국은 멸망의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죽고 나면 저 세상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한해가 지나면 나이가 한 살 더 먹잖아요. 죽음이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 저 건너편에 무엇이 있을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확신이 없는 사람도 죽고 난 다음에 천당과 지옥이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주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모릅니다. 죽고 난 다음에 정말 저 세상에 있을까? 의문을 가지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이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물질과 쾌락과 인본주의에 사로잡혀 살다가 하나님께로부터 불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한가지입니다. 훌륭한 성이요 사람들이 화려하게 생활을 했지만 인본주의로 쾌락주의로 살다가 하나님 심판을 받아 불과 유황불에 타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의 시대 문명은 첨단 기술이 발달하여 정보화 시대, 유전자 생산 시대, 국제화 시대 등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 가치관이 붕괴되고, 도덕적 삶이 타락하여 정신적으로는 공황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사람은 하나님 없이 인본주의로, 인간의 지식과 과학 기술에 의지하여 문화적 혁명을 이루고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겉사람의 삶은 아무리 뛰어난 문명 안에 살지라도, 타락과 부패가 속에서 솟아오르기 때문에 다 파괴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 손으로 지어놓고 자기 손으로 파괴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인본으로 살지 말고 신본으로 살아야 합니다.
2. 속사람으로 사는 것
그러면 속사람은 무엇이며 속사람으로 사는 것은 무엇인 것입니까?
속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께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으셨으면 이런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짜고짜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거듭나다니요? 나같이 나이 많은 영감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또 나올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람이 혈육으로써 천국에 못 들어간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어떻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납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거듭난다는 것은 마지막 아담 예수께서 우리의 처음 아담 하에서 지은 모든 죄를 다 청산하고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임하셔서 하나님 형상과 모양의 생명을 복구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예수님은 죽음을 극복하시고 새로 살아난 생명의 원천이 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영생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영생이란 이땅에서 영원히 사는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사는 생명인 것입니다. 사람은 다 영원히 살지요. 지옥가도 영원히 살고 천당가도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는 것을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여러분은 지금 영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 산 생명 아닙니다. 하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사람이 살아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요 또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와서 계신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을 성전 삼고 와서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속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님의 인도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혼자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 성령께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무서워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4절로 16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놓지 않고 다시 네게로 오리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그렇기 때문에 근심시켜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사람이 된 사람은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서 온 최고의 보혜사인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예수님, 오늘 성령시대에 성령 하나님이 여러분과 같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을 근심시키면 여러분 우리가 참 손실이 많습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므로 근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슬프게 하는 가장 큰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피하고 게으르고 태만하면 성령께서 근심하시고 슬퍼하십니다.
내가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지, 근심하고 있는지, 내 마음을 살펴 한번 보십시다.
첫째로, 평안을 잃어버린 사람은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근심한다고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능력을 상실합니다. 성령이 근심하고 슬퍼할 때는 역사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찬송할 때 내 마음이 진동해요. 마음이 진동하면 마음이 설레요. 마음에 감격이 있어요.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요. 희망이 생겨나요. 그러한 역사가 사라지면 성령을 슬프게 하고 마음에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성령이 슬퍼하면 마음에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이 슬퍼하시므로 우리도 삶에 근원적인 기쁨이 없고, 살아갈 열망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우편이 즐거움이 넘친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하나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우편에는 즐거움이 넘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기쁨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안 기뻐할 도리가 없어요. 하나님 기쁨인 것입니다. 마귀는 슬픔입니다. 마귀의 앞에는 슬픔이 충만하고 마귀의 우편에는 괴로움이 넘칩니다.
넷째로, 성령이 잠잠하면 마음에 의심이 생깁니다. 확신이 사라지고 의심이 들어와서 자기도 모르게 갈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성령이 떠나면 건강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병들므로 몸이 병들 때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속사람으로 날로 새롭게 살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근심하거나 슬퍼하시지 않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늘 깨어 말씀과 기도에 힘쓰며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 시편 23편을 날마다 읽으세요. 고3들 날마다 시편 23편을 읽으면서 불안 두려움을 극복하세요.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3. 날로 새롭게 사는 삶
우리는 이제 날로 새롭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하루 정체되지 말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겉사람은 낡아진다. 나이 한 살 더 먹으니 주름살 하나 더 지고 허리도 조금 더 구부려지고 말도 좀 더 천천히 할지 몰라도 그것 걱정할 것 없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로워진다.
왜 말씀이 있으니까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계시니까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기도가 있으니까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로 속사람이 새로운 생명으로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같이 우리는 죄와 허물을 벗어버리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었다고 해서 한번에 천사가 안됩니다.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어른이 안됩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6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날마다 전쟁입니다. 날마다 싸움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일생은 겉사람과 속사람의 싸움인 것입니다. 바울 선생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는 서서히 변화되는 것이니 신앙은 어린 아이가 자라는 것처럼 많은 실수를 하면서도 말씀과 성령으로 날마다 자라고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이루어지고 창조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계속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같지 않습니다. 내일이 오늘과 같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매일 좋은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매일 창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옛생각에 묶여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옛날 미움에 묶여 있지도 말고 옛날 원한에 묶여 있지도 말고 옛날 잘한 것도 자랑하지 말고 옛날 못난 것도 낙심하지 말고 앞으로 예수님 더 좋은 세계를 예비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더욱 영혼이 잘되고 더욱 범사에 잘되고 더욱 강건하고 더욱 생명을 얻되 더욱 넘치게 얻고 더욱 천국을 예수님 예비하고 있기 때문에 내일을 바라보고 늘 변화받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 변화가 말씀을 통해서 오고 성령을 통해서 오고 기도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고 성령이 있고 기도가 있으면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기적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6절에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날로 새로워지는 인생
>성경본문|
고후04장 16절 ~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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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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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필재목사
>비 고|
갈보리교회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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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16~18
벌써 2012년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내일이 지나면 금년을 마감하게 됩니다. 어렸을 때는 이때가 제일 좋았습니다. 이 새해 아침이라는 흥분이 너무나도 행복감을 주었고 나이가 한 살 더 많아졌다는데 대해서 굉장히 자부심도 있었고 아무리 가난한 집도 이때가 되면 아이들에게 깨끗한 옷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것을 ‘설빔’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음식도 풍부해집니다. 가래떡을 만들고 엿을 만들고 다식이라는 간식거리가 생겼고 동네 어른들 찾아가 세배를 하면 세뱃돈을 받아서 용돈을 마련하고 떡국, 만둣국을 먹어보는 기쁨도 무시 못 하는 행복이었기 때문에 꼬박꼬박 새해 아침을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에 대한 노래가 있었습니다.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또 그때는 신발도 새로 얻어 신습니다. 그래서 “곱고 고은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옛날 글에는 이 나이를 의미적으로 해석하는 말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10살이 되면 ‘충년(沖年)’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어린 나이라는 뜻입니다. 15살이 되면 ‘지학(志學)’이라고 했습니다. 학문에 뜻을 둘 나이라는 뜻입니다. 20세를 ‘약관(弱冠)’이라고 했습니다. 신체적으로 성숙했다는 뜻입니다. 30세가 되면 ‘이립(而立)’이라고 했습니다. 완전 어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40세가 되면 ‘불혹(不惑)’의 나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일에 쉽게 흥분하지 않고 유혹 당하지 않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50세가 되면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 나이라는 것입니다. 60세가 되면 ‘이순(耳順)’이라고 해서, 세계관이 넓어져서 이해력이 생기고 관용의 덕이 생기는 나이라는 것입니다. 굉장한 지혜자가 될 나이가 60세입니다. 61세가 되면 ‘환갑(還甲)’으로 이 환갑은 “많이 살았습니다.”라는 뜻입니다. 70세가 되면 ‘고희(古稀)’라고 해서 “이때까지 산 사람이 드물다. 오래 살았다.”라고 해서 ‘고희’라고 했습니다. 77세가 되면 ‘희수(喜壽)’라고 해서 한문을 초소로 쓰면 ‘七十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뜻이 뭐냐 하면 “아주 장수했다”는 뜻입니다. 80세가 되면 ‘산수(傘壽)’라고 합니다. ‘산수(傘壽)’의 한문 ‘산(傘)자’의 약자가 팔(八)을 위에 쓰고 십(十)을 밑에 쓰는 것에서 유래했는데, “고령의 나이가 되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88세가 되면 ‘미수(米壽)’라고 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 “초고령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90세가 되면 ‘졸수(卒壽)’라고 했습니다. “너무 오래 사셨습니다.”라는 뜻입니다. 99세가 되면 ‘백수(白壽)’라고 해서 ‘백(百)’에서 하나를 빼면 ‘99’ 아닙니까? 그래서 ‘백(百)’에서 ‘일(一)’을 떼어 버리면 흰 백자(白)자가 됩니다. 그래서 “백수(白壽)로 사셨습니다. 하얀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만약에 100세를 살면 ‘천수(天壽)’라고 해서 “하늘이 준 나이다.” 이렇게 정하고 우리가 불렀습니다. 유명한 심리학자 스틸은 인간의 연령별 기능을 발표했습니다. 기억력의 절정은 10~23세입니다. 상상력은 20~30세, 창조력은 30~55세, 판단력은 55세 이상, 체력은 18~28세가 절정, 정력은 25세~35세, 성취력은 38세~48세가 가장 절정을 이루고, 인내력은 50세 이후라고 합니다. 이렇게 나이별로 사람을 평가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모두 똑같지는 않습니다. 대략적인 연구가 그렇게 판단이 되는데 이 시간에 대한 과학적인 논리가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창세기 1장 1절이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했는데 거기서 말하는 “In the beginning”을 과학자들은 “시간의 시작이다. 이때부터 시간이 생긴 것이다.” 이런 해석을 하는데 신학자들은 또 다릅니다. “하나님 시간의 시작이 아니고 하나님 일의 시작이다. 이때부터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데 두 가지다 해석해도 괜찮습니다. 아무 상관없습니다. 과학적으로 우리는 “빅뱅으로 우주가 시작이 되었다.” 이런 정서를 가지고 있는데 어떤 형태를 알 수 없는 대폭발로부터 우주가 팽창해 나가기 시작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팽창해 나간 우주의 넓이를 200억 광년이라고 계산해 나가고 있습니다. 1초에 30만 킬로 빛의 속도로 팽창하고 날아갑니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200억년을 갈 수 있는 넓이를 지금 우주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빅뱅 이전에는 시간이나 공간이 전혀 의미가 없었습니다. 빅뱅 이후 우주에는 두 가지가 생겼는데 공간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또 하나는 시간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시간이 무엇인가? 과학적으로는 “흔들리는 물체의 측정이다.” 그래서 시계추를 만들어서 계속 똑같이 흔들어서 시간을 측정하는 기술을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루 24시간이 지나고 1년 365일이 지나면서 인간은 그 시간의 흐름의 영향을 받아서 오늘 말씀과 같이 겉사람은 낡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시간 밖에 계십니다. 초월자이십니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한 시간, 두 시간, 1년, 2년이라는 이 시간이 하나님께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의 초월적 존재가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간의 제한성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시간의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이 시간의 제한을 받는 것이 물질입니다. 우리 육신은 다 물질로 이루어졌습니다. 철분, 수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물질은 낡아집니다. 시간에 따라 낡아질 수밖에 없고 옛날 성경에는 “후패하여 간다.” 이렇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했는데 바로 그 속사람이 하나님과의 동질성을 말하는 영적 존재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시간의 초월적 세계에 갈 수 있는, 하나님과 동질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시간의 초월성, 영원으로 가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시간이 가고 일 년이 지났다는 이 개념은 바로 우리의 속사람이 그 세계로 더 가까이 갔기 때문에 ‘더 새로워졌다. 날로 날로 더 새로워지는 도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속도가 우리 곁에 하나 존재합니다. 빛의 속도입니다. 이 지구상에 어떤 물체도 따라갈 수 없는 가장 빠른 속도를 지닌 것이 빛이라는 것인데 사람이 이 빛의 속도와 같이 빠르게 갈 수 있다면 다 늙지 않습니다. 시간의 개념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합니다. 성경대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기초를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빛이 있으라. 이것이 기초이다. 이것 위에서 모든 것이 다 창조가 될 것이다. 이것이 기준이다.” 빛을 잃으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우리가 눈을 가지고 있지만 빛이 있으므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지 빛이 없으면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안보이지 않습니까? 모든 빛, 만물의 기초,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영원성의 존재라는 말입니다. 한해가 지나가고 또 한해가 지나가면 이 물질은 낡아집니다. 그러나 영혼은 초월적 세계로 그만큼 더 가까이 갔기 때문에 날로 날로 그 시간이 다가오는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사람이, 믿음 있는 사람만이 생각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 세상 사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 소원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젊음을 오래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늙었다는 소리입니다. 그 목사님 팍삭 늙으셨습니다. 그러면 원수 갚는 게 있습니다. “피장파장이요.” 아주 즐거운 인사는 “그대로 계십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거짓말이지만 즐겁게 받아들입니다. 요즘 우리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되는 사업은 피부과와 성형외과라고 합니다. 바로 그러한 심리적 상태에 만족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그게 잘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은 바로 그 젊고 늙음에 대한 우리의 마음 자세의 교훈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언제부터 늙기 시작하는가? 여자 24세, 남자 26세로 의학적으로 판단합니다. 절대로 더 젊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예쁠 때가 언제인가? 낙랑 18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이 이상 더 좋을 수 없다고 해서 18세를 성인 기준으로 삼아서 그때부터 성인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젊음의 시간이라고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겠고 확실히 젊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시간이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한 재벌이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나에게 20년만 젊게 해 달라. 그러면 내가 평생 모은 이 많은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 사실 그 사람의 말은 솔직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럴 거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이 젊음을 오래 유지하려는 끝없는 노력을 하게 된 것이 의상문화라든가 화장품 발달이라든가 의학 발전, 현대 문화권의 모든 사람의 제일 큰 관심이 젊은 건강을 오래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에 좋다는 것도 많이 나오고, 좋은 것이 있다면 지구의 끝을 찾아가서도 그것을 구해다 먹고 싶고, 아무리 혐오 동물일지라도 건강 약속만 확실하면 거침없이 먹는 것이 다 그 이유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좋아하는 말은 젊어 보인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젊은 사람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 처음 듣는 순간 충격 받습니다. 다들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LA에서 목회할 때 다른 목사님이 우리 교회 오셔서 설교하시는 중에 이야기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어느 날 설교하러 단상에 올라가셨는데 여 집사님이 그날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기도 중에 “오늘도 노종을 단에 세우셨사오니 주께서 붙들어주사 피곤치 않게 하여 주시고….” 그렇게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속으로 ‘내가 언제 피곤하다고 했냐? 내가 쓰러지냐? 붙들어주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설교는 했는지 말았는지 기분 나쁘게 기도 소리를 들어서 예배 끝나고 복수를 하셨답니다. “노집사님 기도하시느라고 수고 하셨습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혈관이 줄어들지 않습니까? 또, 세포가 많이 죽어가니까 건강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가지고 다니는 장비가 많아집니다. 약봉지 챙겨야 하고 안경 가지고 다녀야 하고 보청기, 지팡이, 틀니 빼놓지 않고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 사진 찍기 싫고, 거울보기 싫고, 모임에 나가기조차 싫고, 찾아오는 거조차 귀찮고, 인사 받기도 귀찮고, 맨 나중에는 혼자 있는 것이 제일 편해서 영감, 할머니도 각자 각방을 씁니다. 젊어서는 몸에 향기가 났는데 나이가 많아지면 무슨 냄새가 난다고 하고 젊어서는 길만 걸어가도 행복하고 이런 눈 오는 날에는 너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경치 좋다는데 가도 즐겁지가 않게 되는 것은 낡아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도서 읽을 때 은혜스럽게 생각되시는 분은 “아멘” 해보십시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살아있는 자보다 죽은 자가 복되며 출생하지 않은 자가 더 복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하는 모두 수고가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이런 말씀이 너무 은혜롭게 들리는 사람은 사실 요단강 쪽으로 가까이 온 것입니다. 열왕기상 1장에 보면 늙은 다윗왕의 모습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젊은 다윗은 얼마나 에너지가 많았는지 성경에 보십시오. 공식적인 부인만도 10명을 데리고 살았고 수없이 많은 궁녀들, 나라의 예쁜 여자들을 다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부작용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늙은 다윗 왕을 위해서 신하들이 나라 안에서 제일 아름다운 처녀, 10, 20대나 되었을까 하는 수넴 여자 아비삭을 데려다가 기쁨조로 넣어드렸더니 “왕이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라.”라고 했습니다. “필요 없다. 에너지가 다 없어졌는데 그게 나한테 무슨 기쁨이 되느냐? 다 귀찮다.” 그런 다윗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말에 정확한 말이 있습니다. 늙으면 귀가 입으로 모인다고 했습니다. 그게 맞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아지면 두 가지만이 즐겁습니다. 하나는 말하는 것, 하나는 먹는 것입니다. 한 말을 또 하고 그 이튿날 또 하고 그만하라고 하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 하고 또 하고 효과가 있든지 없든지 상관이 없고 계속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여 앉으면 좌중에 이야기 50퍼센트 이상을 혼자 말하고 싶어 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저를 포함해서 우리 환갑 넘으신 분들은 어디 가서든지 말수를 줄여야 그나마 참여를 하지 그다음부터는 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노년은 옛날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노자는 비육불포라. 고기가 아니면 배가 부르지 않는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당연히 우리 육신이 가는 길이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노년은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이 현실인데 오늘 성경말씀에는 반대로 말합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더 희망적으로 “우리가 더 좋아해야지?” 이렇게 더 권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가? 모든 인류가 똑같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늙어 가면 억울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러면 너만 늙지 마라.” 하시면 여러분은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들, 딸이 나보다 더 늙어지는데 어떡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다 똑같이 늙게 하시는 겁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라. 다 똑같이 간다.”
우리 기독교의 성격은 미래 지향적 종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설교의 초점은 종말론적 교훈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 설교, 추수에 관한 설교, 인생의 마지막 부분에 얻을 영광을 조명하는 설교로 꽉 차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 신학에 와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뒤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나는 달려가노라.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그러지 않습니까? 미래지향적입니다. 무엇이 있느냐? “의의 면류관이 나를 위해서 예비되었으므로 보상이 있으므로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그게 언제입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다. 그래서 더 좋아하라.” 기독교는 미래지향적, 종말론적 진리입니다. 시편 92편 12절에 보십시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이것은 “늙어갈수록 믿음이 있기 때문에 더 기뻐할 수 있는 영적인 충만함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늙어 가는데 한탄스럽고 한숨을 쉬지 우리가 초월적 세계로 한걸음씩 더 가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슬프냐? 시간의 제한성이 있는 물질인 우리 물질은 낡아지지만 시간의 초월자이신 하나님께로 우리가 가노니 기뻐하라. 영원 속에 영생이 주어짐을 기억하라. 믿음이 다 어디로 갔느냐?” 이런 말로 권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서에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인물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모두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하나님 섭리에 쓰임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다 안한다고 했습니다. 하기 싫어했습니다. 요나도 도망갔고, 모세도 안한다고 떼를 썼고, 예레미야는 울었다고 했고, 엘리야는 죽여 달라고 호렙산에서 소리쳤습니다. 어떤 때는 그분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실수와 죄도 나타나고 그러한 젊은 시절의 모든 과정을 다 끝내고 나중에 나이가 많아져서는 완숙한 자기 사명의 종말적 빛을 발하고 마지막을 장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다 그랬잖아요? 옛날 우리나라 김삿갓 시 가운데 “청운난력치비원(靑雲難力致非願) 백발유공도부비(白髮惟公道不悲)”라는 말이 있습니다. “청운의 꿈은 억지로 이룰 수 없으니 바라지 말고 백발은 누구나 맞는 것이니 슬퍼하지 않으리.”라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한 가지 유익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상의 좋은 것은 하늘나라로 가져갈 수 있는 유익이 진리로 공식화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라는 말이 있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뜻인데, 이 말은 일반적 진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빈손으로 왔다가 많은 것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바울도 보십시오. “그 날에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 그러므로 면류관을 내게 주실 것이다.” 거기 가서 받을 것이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어느 날 주인이 어떤 이에게는 한 달란트를, 어떤 이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다섯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기간이 우리의 일생이라고 하는 시간입니다. 일생을 결산했습니다. 자신이 수고한 것을 주인이 가져가는 줄 알았는데 “네가 가져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 가졌던 사람은 열 달란트가 되어서 그것이 자기 것이 되고, 두 달란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좋은 세계의 기대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진리로 약속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내 인생은 그야말로 요단강은 다가왔는데 내 마음의 기쁨이 될 만한 준비된 일이 영혼 가운데 비어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슬픈 사람입니다. 마지막 종말 결산대 앞에서 한 달란트를 그대로 내민 자를 주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이것 하나를 빼앗아서 열 개 가진 자에게 주어라. 있는 자는 받아 더 많아질 것이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그냥 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놈을 바깥 어두운 데 내어 좇으라.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런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겉사람은 낡아져도 하나님의 백성된 자는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뜻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진리의 약속, 영혼의 요청이 우리에게 분명히 있음으로 그것을 기뻐하라. 믿음이 없으니까 그렇지 나이가 많아진다고 뭐가 슬프냐? 더 즐거워야지!”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뭐라고 합니까?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 백성된 사람들은 늙어가는 것이 축복의 한 초대입니다. 사실 젊어서 정욕이 넘칠 때는 죄지을까봐 걱정스러운 것도 많았는데 나이가 많아지면 영혼이 편안해지고 ‘아! 내 인생의 이제 위험한 38선은 다 넘었구나.’ 안도의 느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시간을 정해서 60~90세 되신 분들은 승리의 노래를 부르시면서 행복하게 사십시오. 영국의 조지 뮬러는 영국이 존경하는 유명한 인물입니다. 65세에 은퇴하면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내 인생은 이제부터이다. 그동안 나는 제도 속에 갇혀서 감옥과 같이 살았다. 자녀들, 사회, 나의 책임, 교회에서 목회하느라고 교회라는 제도, 여기에서 목회하느라 여기에 신경 쓰고 정말 힘들었다. 이제 나는 모든 짐을 벗었다. 이제는 자유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그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을 내가 이제 하겠노라. 누구의 간섭도 이제 받지 않고 내가 결정하면 내 마음의 기쁨을 찾아서 살겠노라.” 그 65세부터 시작해서 17년 동안 세계 일주를 8번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선교를 다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이 자랑하는 선교 박애가가 된 것을 우리가 기억하지 않습니까? 나이가 많아지면 활동의 맥박은 다소 느려지게 되지만 오랜 경험 때문에 실수 없는 성취가 가능하고 능력은 다소 작아졌지만 영혼의 세계는 훨씬 더 넓어집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기 사명의 연세가 103년이라고 회고하는 말을 남겼지 않습니까? 모세는 자기 사명의 완수를 마칠 때가 120세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해가 바뀌고 이 시간이 저 영혼의 세계로 내 인생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해야 그게 믿음 있는 생활이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지 ‘아이고! 좋은 시절 다 갔다.’ 한숨 쉬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30~40대 우리 후배 목회자 수련회에 자주 나가서 강사를 합니다. 거기 가서 같은 목사들끼리니까 이야기합니다. “후배들 가운데 나보다 설교 잘하는 사람 나와 봐! 나와 시합해!” 당당하게 말합니다. “나와 팔굽혀펴기 시합할까?” 그러면서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고령화시대를 만났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늙어도 결실하고 진액이 풍족하고 잎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고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더 새로워졌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힘 있게 나아가야 이 새해가 기쁘지 ‘아이고! 또 갔구나. 이거, 어떡하냐? 왜 세월이 빠르냐?’ 이러면 누구나 가는 길인데 괜히 인생이 슬프지 않습니까? 슬퍼하지 마십시오. “슬퍼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왜? 겉사람은 낡아졌지만 날로 새로워지는 속이 있는데 이 보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믿음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늘나라 가기 싫습니까? 떠오르는 아침 해는 희망의 상징으로 용기를 줍니다. 그러나 석양의 지는 해는 장엄한 종말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을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셨던 2012년 오늘과 내일 다 마치고 송구영신의 새해 아침을 맞이하면서 ‘아! 하나님이 또 나에게 새로운 해를, 2013년이라는 시간 속에 나를 인도하셨다.’ 이렇게 생각해야 우리가 기쁘고, 즐겁고, 해가 바뀌는 것이 장엄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큰 은혜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겉사람과 속사람
>성경본문|
고후04장 16절 ~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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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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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조용기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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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장 16~18)
여러분 제 신앙고백을 한번 따라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예수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쁩니다. 즐겁습니다. 평안합니다. 건강합니다. 형통합니다. 축복받았습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서론>
오늘 저는 “겉사람과 속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은 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속사람이 지음을 받고 속사람이 겉사람인 육신 속에 살도록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께 에덴에서 쫓겨나올 때 속사람이 죽어버렸습니다. 육신의 사람은 살아있는데 영혼의 사람, 속사람은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영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했는데 영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 모르지요. 하나님 세계 무엇이든지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더구나 더 모릅니다. 여러분 길거리에 가서 안믿는 사람 붙잡고 난 다음 하나님 아냐고 물으면 당신 하나님 보았냐고 그러고 오히려 반문을 하며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이 죽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보고 아무리 질문을 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주장한 무신론자 니체는 이렇게 말했어요. “현대인은 두 가지 병(病)을 갖고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인간의 비극이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염세주의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는“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행복인데, 태어났으니 별도리없이 빨리 죽는 것이 제일 좋다.”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겉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니까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된 것을 보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담 이후 영이 죽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자신이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 마음에 죄책과 정죄에 눌려 있고 허무와 무의미에 고통 당하고 죽음과 절망에 탄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속사람이 없으면 겉사람은 70이요, 강건하면 80을 살고는 너나 할 것 없이 이 세상을 떠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 속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의 복음을 듣고나면은 그리스도가 구주로 마음 속에 들어와서 속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속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래뵈도 다 하나님의 형성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속사람이 살아나면 엄청난 존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본론>
1. 속사람의 탄생
한번은 니고데모라는 유대인의 학자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낮에는 겁이 나니까 못오고 밤에 사람의 눈을 피해서 예수님께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선생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이 거듭난다구요? 저같이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도로 나온다 말입니까? 영이 죽은 사람이니까 예수님이 신령한 말씀 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해석이 안되니까. 예수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혀 여러분과 나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청산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구주로 모셔들이면 성령이 임하여서 여러분과 제가 거듭나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아나서 비로소 그리스도를 향하여 주로 부르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로 속사람이 살아나면 영적인 세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말씀을 들어서 무슨 말인지 깨달아 알고 성경을 읽어서 마음에 은혜가 되고 사람들에게 영적인 세계에 대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3절로 6절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오늘 여러분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와서 앉아계시지만 영적으로는 예수가 더불어 죽고 장사지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해서 함께 승천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천사는 절대로 하나님 보좌에 앉지 못합니다. 마귀가 하나님 보좌에 앉겠다 하다가 타락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속사람이 살아나면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와 이미 하늘보좌에 함께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여기에서 방황할 이유가 없어요. 직행으로 하늘보좌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미 내가 그곳에 가 있는 자리니까 내게 주신 자리에 직행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높은 자리가 아니고 보통 위대한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으니 모든 세계 만물보다 크고 천군 천사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9절로 10절에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 믿으면 예수 믿는 증거로써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넣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사람이 아바 아버지라고 하나님 부르는데 하나님은 여러분의 친아버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아버지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하십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다 지으셨습니다. 저 별들 세계에 무궁무진한 세계를 하나님 전능하신 능력으로 지으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또 여러분에게 무서운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정죄하는 하나님, 심판하는 하나님, 쥐어박는 하나님, 꾸짖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좋은 하나님이 전지전능, 무소부재 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나가서 무엇이든지 하나님 뜻에 따라 구하면 응답받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시시한 것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별들을 만드신 하나님이 별들 같은 응답을 주실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큰 것을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큰 것도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령을 부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속에 와 계신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은 여러분 속에는 지금 모두다 성령이 여러분과 영을 더불어 속에 와서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몸은 성령이 거하는 전이 된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 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해보십시오. 아버지라고 안 부릅니다. 왜, 성령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면 기쁘게 하나님 아버지로 부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속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내 속에 성령께서 들어와 계십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때문에 성령이 여러분을 이제부터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여러분 가운데 계셔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와 축복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은 자기가 누군지를 알게 되고 자기가 누군지를 알게 되면 당당하게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16절에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신다.
성령이 오셔서 여러분 속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같은 영적인 사람을 강하게 만드십니다. 성령이 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고 성령을 바라보면 성령이 손잡아 여러분을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부모와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길거리를 걸어가듯이 성령이 여러분 손을 잡고 이 미로와 같은 인생을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이 육체의 조상은 아담과 하와지요. 그러나 영적 사람의 조상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세상에 안믿는 사람들은 육신의 조상인 아담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어 거듭나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고 장사지내고 부활승천하시므로 우리의 두 번째 조상이 되어서 영적인 아담이 되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로 47절에 “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첫째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서 취하여 받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사람 예수님은 하늘에서 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땅에 오셨다가 여러분과 나를 하나님 자녀로 구속하시고 하늘로 승천해 올라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땅에 흙으로 돌아갈 사람들이 아니요, 영생을 얻을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하늘에 올라가서 여러분 있을 처소를 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리라. 여러분의 처소는 얼마정도 지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앉아 계시지만 90% 지어진 사람은 오늘 저녁에 100% 지어져서 오너라! 오늘 저녁에 갈런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육신의 천막집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땅에 육신은 성경에는 장막집, 천막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이 있는 곳은 천막집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이 있을 곳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가서 살 곳이 훨씬 여기보다 좋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인연을 두고 연연해서 발버둥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살 기약이 다 끝나면 부르시면 기쁘게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저도 기쁘게 갈테니까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으나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만 믿으면 영이 살아나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남녀, 노유, 빈부, 귀천 할것 없이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멸망이 안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영원한 생명이란 것은 여러분, 살기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영생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똑같은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사람의 영생을 얻고 쥐나 다람쥐에서 태어나면 쥐나 다람쥐의 생명을 얻지 않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은 영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 속에 갖고 있는 것입니다.
2. 속사람의 생명
그러면 우리 속사람의 생명은 무엇으로 사느냐. 십자가 대속의 은혜와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사람이 가장 오랫동안 안먹고 산 것은 40일 동안 금식한 것입니다. 모세도 40일 동안 금식했고 예수님도 40일 동안 금식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 가운데도 40일 금식한 사람이 간혹 있어요. 저는 열흘도 금식 못합니다. 어지러워서 못해요. 금식을 하면은 하늘이 빙빙 돌아서 설 수가 없어요. 그래도 하나님이 금식하라고 하면 일주일은 기를 쓰고 하지만 그 이상은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 육신의 사람도 안 먹으면 힘이 없어서 못살아가는데 영의 사람도 안먹으면 못살아요. 속사람도 먹어야 되고 겉사람도 먹어야 돼요. 겉사람의 양식은 오곡백과요 혹은 동물들이지만 속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돼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니라고 말씀을 먹어야 속사람이 힘이 있어요. 그리고 살아갈 수 있어요. 말씀을 먹지 아니하면 영혼의 사람이 기운이 없어져서 점점점 세속에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우리는 새것이 되었으므로 새 양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낡은 피자가 아니라 새로운 하늘 양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는 것은 꼭 알아야 될 것은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여기 계시고 우리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으로 여러분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고 여러분도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너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습니다. 신비한 결합으로써 주님과 떠나지 않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2절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한다. 우리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말씀으로 태어났으므로 여러분 말씀을 먹지 않으면 안돼요. 언제나 성경을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그렇게 달고 오묘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매일같이 일독성경을 읽습니다. 이 성경은 너무 들고 다니기가 크기 때문에 일독성경 하루하루 구약, 신약, 시편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매일매일 읽으면 마음에 양식이 되어 영적으로 하늘나라가 마음에 뚜렷하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라도 거르고 읽지 아니하면 하늘나라가 그만큼 멀어지고 세상이 마음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나라 가깝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을 늘 먹어야 생명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도 말씀을 먹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이 들어와야 믿음이 생산되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뿐 아니라 우리는 항상 기도를 해야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밥만 먹고 사는 것 보았습니까? 숨 안쉬고 삽디까? 4분만 숨 안쉬면 죽어요. 여러분은 모르는 사이에 숨을 쉬고 있지만 다 하나님이 공기를 주셔서 공기중에 산소 때문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숨 안쉬면 4분 만에 죽어요. 우리는 영적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면 영적으로 호흡이 중지되기 때문에 죽어요. 말씀 먹을 뿐 아니라 기도를 늘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 호흡은 기도인데 기도는 시간 내어서 물론 새벽기도도 하고 철야기도도 하고 산기도도 하고 또 구역예배 기도도 하고 주일날 기도도 하지만 24시간 일하면서 깨어있을 때 늘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길게 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시간을 내어서 할 때는 기도를 길게 해도 좋은데 시간이 없을 때는 부엌에 일하면서 공장에서 직장에서 일하면서 늘 기도를 해야 되면 짧은 기도를 계속 반복하면 좋습니다. 하나님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행복을 주옵소서. 행복을 주옵소서. 행복을 주옵소서. 행복을 주옵소서. 기쁨을 주옵소서. 기쁨을 주옵소서. 우리 가족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짧은 기도를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계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굉장히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긴기도 하려고 자꾸 마음을 지어내어가지고서 쓸데없는 소리 많이하면 하나님이 아이구 귀찮다 귀찮어. 좀 간단히 해라. 간단히 해라.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긴 기도를 하려면 상당히 연구를 하고 쓸데없는 말 굉장히 해요. 우리가 스스로 기도하기에도 복잡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짧은 기도가 굉장히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짧은 기도를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어떻게 기도하시는지 가만히 연구를 해보았는데 방언기도를 저는 많이 하잖아요. 방언기도하면 방언기도를 어느 정도 성령께서 하시다가 그 다음에는 성령께서 방언기도를 한가지 똑같은 기도를 계속하고 계속합니다. 내가 입에서 나오는 기도를 내가 듣거든요. 자꾸 반복을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이여 반복하지 말고 좀 복잡하게 다른 말로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조금 다른 말로 하시다가 또 방언 똑같은 기도를 계속해요.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같은 기도를 하면서 성령께서 하신 말씀이 복잡한 기도 필요없다. 필요한 기도를 계속해서 믿음이 생길 때까지 반복하라. 그러므로 반복하는 기도가 굉장히 좋습니다. 여러분께서 매일 같이 하나님 나에게 행복을 주옵소서. 기쁨을 주옵소서. 즐거움을 주옵소서. 평안을 주옵소서. 소망을 주옵소서. 뭐 그럴 정도를 가지고 계속해도 여러분 그 기도가 하늘에 응답되고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으니 쉬지 말고 기도는 바로 그러한 단순한 기도를 반복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8절에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어떻게 성령 안에서 기도하느냐. 성령님을 의지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고 난 다음에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으로만 하지 말고 성령은 꼭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해야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도해야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응답 안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응답할 은혜를 가지고 계시나 너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리라 우리가 매고 푸는 것을 먼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33장 3절에도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리라고 해서 먼저 여러분이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적으로 우리가 숨쉬는 것일뿐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는 수단인 것입니다. 깨어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저는 영국에서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는 기독교 인이 불과 2%에 불과하다는 것과 영국의 대주교가“영국 교회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고 도움을 요청한 사실을 말씀한 적이 있는 것입니다. 영국이 이렇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말씀을 읽지 않고 모르기 때문에 신앙이 식었습니다. 기독교의 고장인 영국이 주일날 교회 출석이 2%밖에 안되니 거의 국민 전체가 교회를 안나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말씀을 등한이 하기 때문에... 지난 2009년에 영국 더램 대학(Durham University)의 성 요한 학교는‘영국성경교육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BBC 뉴스는 연구 결과를 보도했는데, 영국의 수많은 젊은 세대가 성경에 관심이 없거나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조사 응답자 중에, 특히 10대에서 20대 청년들은, 성경은“성경요? 케케묵은 책”,“성경요? 엉뚱한 소리만 하는 책”“성경요? 촌놈들만 읽는 책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합니다. 응답자 가운데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60%나 되고, 누가복음에 나오는“돌아온 탕자”에 대해서는 62%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십계명을 정확히 외우는 사람은 5%에 불과했고, 심지어 응답자 중에 “솔로몬”과“골리앗”이 누구냐고 하니까 “선박 이름입니까?” 배가 요사이 여러 가지 사람 이야기를 따지 않습니까? 루즈벨트니 에이브라함 링컨 이라든지 그러니까 골리앗이나 다윗이나 솔로몬이라고 하니까 배이름인줄 알고 있어요. 그런 정도로 성경에 무식한 것입니다. 속사람의 생명은 오직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의 말씀과 기도의 호흡으로 살아나고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멀리하고 기도하지 않을 때 속사람이 살아갈 재간이 없습니다. 굶어서 영양실조가 되어 비실비실해 쓰러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힘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속사람은 기도를 통해서 호흡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특별히 저는 해외 선교를 많이 다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자꾸 저보고 해외를 그렇게 많이 다녀서 지구를 115바퀴를 돌았으니까 구경 많이 했겠네요? 그런데 놀랍게도 저는 해외 구경을 못했습니다. 놀러가면 구경을 하는데 전도하러 가기 때문에 기도 안하면 박살나는 것을 앎으로 아침부터 저녁 나갈 때까지 방안에서 기도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많이 다닌 영국, 불란서, 독일,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 아프리카, 북남미, 동남아에도 지금 머리에 기억나는 것은 호텔하고 집회 장소밖에 기억 안나요. 그것 왜냐, 기도하지 않고는 못견디는 것이 얼마나 정신적인 압박과 육체적인 압박이 다가오는지 정신적인 고통과 육체적인 괴로움이 다가와서 기도로써 물리치 않고는 절대로 저녁에 복음증거에 성공할 수 없어요. 적어도 저녁에 가면 몇만명, 몇십만명, 몇백만명이 모이는데 어머니가 젖이 있어야 아기에게 젖먹이는 것처럼 내게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해야 강단에 서서 감당을 하지 안그러면 목소리가 안나와요. 억압이 되어서... 그러므로 기도는 정말로 여러분 호흡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제게 늘 말을 했어요. 야~ 기도 그렇게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기도 안해도 그냥 네가 늘 하던 설교하면 된다. 구경하러 가자! 구경하러 가자! 구경할데 얼마나 많나? 이 북구라파 이런데 가서 구경하러 가면 참 좋으니까 구경가자! 그리고 또 같이 여행하는 우리 장로님들 다 구경가자고 그러는데 참 장로님들조차 구경 못가게 하는게 참 괴롭습니다. 내가 안가니까 장로님들도 못가고서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지요. 그러나 기도의 힘으로 마귀의 훼방을 이기고 복음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을 드립니다. 사람이 숨을 안 쉬면 4분만에 죽는 것처럼 매 순간 기도하지 않으면 즉시 속사람이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앉으나 서나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들리도록 하는 것도 참 좋고 제일 좋고 속으로 묵상으로 기도해도 좋고 글로 쓰는 기도도 참 좋습니다. 시간이 많으면 여러분 노트에다가 기도를 적으십시오. 친애하는 아버지 하나님, 저는 오늘 아버지께 간구합니다. 적는 거에요. 거짓말 하지 말고 정직하게... 정직하게 다 내 잘난 것도 못난 것도 내 소원하는 것도 정직하게 적고 적고 난 다음 나중에 그 기도를 읽어요. 소리내어서 한 두서너번 읽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 보기 민망한 것이 있으면 찢어서 쓰레기통에 집어 넣어 버리면 돼요. 저는 아침에 출근해서 중요한 편지 답장을 쓰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적어요. 그러면 쓸데없는 소리를 안하게 됩니다. 편지 적는 사람이 쓸데없는 말 합디까? 정직하게 하나님께 할 말만 아뢰고 질서있고 아뢰고 그런 기도는 내 마음에도 뚜렷한 기도가 되고 하나님도 기쁘고 받아주시고 적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응답을 많이 받았어요. 꼭 하라고는 하지 않지만 시간 있으면 해보세요. 축복이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소리내어서도 기도하고 묵상으로도 기도하고 그리고 적으면서도 기도하고 어떻게 하든지 기도는 많이 할수록 여러분 좋은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3. 속사람의 삶의 방식
그런데 우리가 속사람이 살아나면 이 세상에는 속사람이 살아나는 방식이 있습니다. 육신의 사람하고는 달라요. 세상 사람은 육신의 사람으로 육신적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을 따라 살지만 속사람은 그런 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속사람은 속사람이 사는 방식이 있어요. 영적인 생각은 속사람이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야 돼요.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쫓아 생각하지 않습니까? 속사람은 영적인 생각을 해야 돼요.
성경에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이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인데요.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 생각, 어리석은 생각, 촌놈들이 보는 책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생각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역사하기 때문에 영적인 생각을 마음 속에 채우기 위해서 성경공부를 하고 성경을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각을 늘 해야 돼요. 모든 일이 생겨날 때도 영적으로 우리는 생각해서 해결방책을 얻어야지 육신의 생각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다가와서 낙심되면 세상 사람은 이제 못살았다. 이제 못죽겠다. 절망이다. 그러나 영적인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같이 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얼마전에 저에게 인터넷 편지가 왔는데 자매님 한분이 애들이 중학교, 초등학교 다니는데 그 남편이 큰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은퇴를 했는데 은퇴자금을 받아서 스스로 사업을 했다가 사기를 당해서 돈 다 날려 버렸어요. 돈도 다 날리고 자기가 살던 집도 다 저당 잡히고 아주 절망상태가 되니까 부인에게 유서를 써서 자식들 부탁합니다 하고서 그만 가버렸어요. 그 부인이 하는 말이 자기는 죽었으니 편안하지만 나는 이 자식을 데리고 이 세상에 어떻게 삽니까? 남편만 쳐다보고 살았는데 직장도 없고 무슨 일을 할줄도 모르고 애들은 고등학교, 초등학교 다니고 나는 어떻게 삽니까? 죽고 싶은 생각이 머리까지 꽉 들어차는데 자식들이 불쌍해서 못 죽으니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살 길이 막연하지요. 직장도 없고 모아 놓은 돈도 없고 빚쟁이들은 악어와 같이 달라들지요. 무슨 배운 기술도 없고 어떻게 삽니까? 세상적인 생각으로는 못살지요.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생각을 하면 하나님을 통해서 생각하면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항상 같이 하리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선물로 주지 않겠느뇨.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면 용기가 생기거든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모든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매님께 자매님, 어둡고 캄캄할 때 하나님이 빛을 예비하듯이 자매님의 인생을 하나님이 다 예비해 놓았기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감사만 드리십시오. 내게 고통과 괴로움이 다가온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위한 징조이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환난과 고난은 그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믿고 감사하고 성경말씀대로 생각하고 살다가 안되거든 내게 쌀 달라 옷 달라 편지 내세요. 내가 쌀 보내주고 옷 보내 줄 테니까. 반드시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세상 생각으로 낙심하지 말고 영적인 생각을 가지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꿈을 꿔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 꿈을 꾸고 낙심한 꿈을 꾸고 절망적인 꿈을 꾸면 안돼요. 꿈이란 것은 상상력을 말하는 것인데 여러분 이 세상에 부정적인 상상을 하면은 우리는 한없이 어둠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지만 영적인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영적인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쳐다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위해서 몸찢고 피를 흘렸으니 용서받는 꿈을 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위해서 마귀와 세상을 이기셨으니 더러운 세상을 다 이기고 승리한 여러분 자신을 꿈꿀 수가 있구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으므로 병든 사람은 고침받는 꿈을 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자꾸 죽는 꿈만 꾸면은 죽어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이 내 병을 짊어지고 가셨으므로 병 나은 내 모습을 꿈꾸어야 돼요. 십자가는 그 때문에 여러분 인생을 새롭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여러분의 가난과 낭패와 실망과 저주를 청산했고 아브라함의 복을 주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하여 잘되는 것을 꿈꿔야 돼요. 잘먹고 잘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꿈꿔야 돼요. 꿈을 꼭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이 우리를 영생 복락 천국을 준 것을 꿈꿔서 예수님과 함께 천국 보좌에 앉은 내 모습을 꿈꿔보아야 해요. 꿈이 있으면 주님은 꿈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제일 먼저 뭘합니까? 젊은이에게는 환상을 늙은이에게는 꿈을 꾸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역사하기 위해서는 환상과 꿈이 필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세계를 살기 위해서는 신령한 꿈을 늘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꿈이 없으면 여러분 미래가 없어요. 가정에 꿈이 없으면 여러분 가정은 내일이 없어요. 사회가 꿈을 잃어버리면 그 사회는 망해요. 정말 꿈은 여러분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위대한 힘이 되는 것이므로 성령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바라보면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통해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꿈을 꿀 수 있는 재료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온통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꿈을 꿀 수 있는 재료를 허락해 준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화학물질에 중독이 되어 신체의 면역체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5년 동안 유리로 만든 진공 상태에서 살아야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공기와 부딪히면 병균이 들어오기 때문에 진공상태에서 산소를 코에 꼽고서 사는데 하루 이틀이 아닌 5년입니다. 왜냐하면 백혈구 속에 저항력이 생겨나도록... 보통 사람 같으면 못견뎠습니다. 그런데 그는 꿈을 가졌었습니다. 그 진공상태의 병실에 들어있으면서 자기가 나아서 나가면 장애인들을 위해서 평생을 바쳐서 일하는 꿈을 꾸었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는 이 진공상태에서 살아난다. 그리고 장애인을 위해서 남은 여생을 바친다. 그 꿈을 꾸고 그 꿈이 그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진실로 5년이 지나고 난 다음에 백혈구가 다시 살아나서 진공상태에서 나와서 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꿈꾼데로 꿈이 이끄는데로 오늘날 장애인들을 위해서 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꿈이 여러분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속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살아났으면 이제는 믿음으로 살아야 돼요. 우리는 지금까지는 세상에서 보는 것으로 살고 듣는 것으로 살고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경험, 인간의 이성과 과학 이런 것으로 살았는데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은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영적인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야 돼요. 믿으면 하겠네. 무엇을 믿느냐.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을 믿어요. 우리 사람들도 서로 믿지 않습니까? 아내는 남편의 말을 믿고 남편은 아내의 말을 믿고 자식은 부모의 말을 믿고 그러나 세상적인 믿음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낭패를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본 사람이 없으되 말씀 속에 계신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하나님의 말씀 속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말씀을 믿으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좀 베짱있기 믿으라구요. 여러분 성경에서 가장 베짱있게 믿은 사람이 누굽니까? 가장 베짱있게 믿은 사람. 여호수아입니다.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갈 때 가나안 전쟁 때 하루는 싸움을 한참 하는데 해가지면 전쟁을 마치지 못하겠으므로 그가 해를 보고 태양아 지지 말고 공중에 중지하라. 달아 중지하라. 보통 간이 배밖에 나온 믿음이 아닙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태양을 어떻게 중지시킵니까? 태양을... 달아 중지하라고 하는데... 성경에 보면 태양이 공중에서 중지하고 달이 중지하고 더 내려가지 않고 여호수아가 전쟁을 끝마칠 때까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았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짱있는 믿음으로 나가면 태양도 세우고 달도 세우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과 여호수아가 뭐가 다릅니까? 다같이 하나님의 자녀요, 다같이 거듭난 사람이요, 성령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쫓아서 명령하십시오 여러분 명령을... 믿음으로 명령하십시오. 이 산들에 명하여 저 바다에 던져라 말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양도 서고 달도 서는데 뭘 병을 명령하면 병이 안물러갈 수가 있어요. 가난을 명령하면 가난이 안쫓겨 나갈 수가 있어요.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을 나가라고 하면 안나갈 수가 있어요. 해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그래요. 대다수의 사람들 마음에 수줍어서 명령도 못해요. 겁을 집어먹고... 내가 이런 것 했다가 안된다 하면 창피해서 어떻게 하노. 이판저판 사판으로 생각하십시오. 밑져야 본전인데...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사용하라구요. 믿음은 여러분 속에 예수 믿을 때 이미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큰 믿음이 없을지라도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으면 돼요. 산더러 명하여 바다에 던지라는 것은 예수님이 장난삼아 한 말이 아닌 것입니다. 실제로 필요하거든 산보고 물러가라고 해보셨어요? 산이 물러가든지 여러분이 물러가든지 둘 중에 하나가 물러갈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선택인 것입니다 여러분. 안믿는 것하고 믿는 것하고 중에 믿는 것을 선택하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자꾸 의심이 따라 다니기 때문에 안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게만 의심이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도 의심이 늘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50년 동안 저는 목회를 했지 않습니까? 온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해도 언제나 기도할 때마다 의심이 따라와요. 기도할 때마다 마귀가 와서 안돼 안돼~ 쓸데없는 거야. 너는 못해. 믿음이 약해. 그러나 그 말 듣고 따라가면 안 믿는 사람이 되고 말지요.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나는 믿음을 따라가니까... 선택이지요. 불신앙을 선택할 것이냐. 믿음을 선택할 것이냐. 어느 것을 선택 하겠습니까 여러분? 그러면 믿는 자에요.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언제나 믿음을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믿는 자요,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여러분 보시고 이미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금자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순자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용기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믿음이 여러분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고 말하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했으며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왜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말하느냐. 사업이 안된다. 경기가 나쁘다. 형편이 좋지 않다. 그런 말을 왜 하느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여러분은 믿는 자들입니다. 안믿는 자가 아닙니다. 오늘부터 믿는 자인줄 알고 할 수 있다고 믿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영적인 생각이나 영적인 꿈이나 영적인 믿음을 강화하는 것은 영적인 말인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계속해서 입으로 시인하면 굉장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입으로 말씀하면 하나님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습니다. 우리 말씀이 환경을 지배한다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애모도마사로 박사는 일본에서 말을 하면은 물이 변화되는 것을 증명하고 생각을 해도 물이 변화된 것을 증거했지요. 물을 보고 욕을 하면 물 분자가 다 파괴되어 버리고 물을 보고 칭찬하면 물분자가 완전히 육각형으로 아름답게 살아난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서 책을 발행한 것을 제가 읽어 보았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전부다 물입니다. 여러분 전부 물이에요. 왜냐하면 과학적으로 한 사람의 육체는 60%에서 70%가 물이에요. 그럼 물이 여기 전부다 앉아 있어요. 여러분 물단지에요 물단지... 여러분 입으로 못한다 안된다 할 수없다면 여러분 전체가 속이 다 파괴돼요. 다 부정적이고 파괴되고 절망적이고 영육간에 병들어요. 그런데 된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하면은 온 몸이 아름답게 건강하게 질서있게 돼요. 그러므로 언제나 여러분께서 아름다운 생각을 하고 아름다운 말을 하고 듣고 긍정적으로 말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은 여러분 말씀을 긍정하면은 믿음이 크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말이 여러분 죽고 사는 권세를 가지고 여러분에게 다가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으니 여러분도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세요. 보통 사람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는데 어떤 때는 헛소리 해가지고서 안될 때도 있지만 사람이니까 헛소리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중에 참말로 하는 말도 많이 있으니까 말씀을 통해서 말하면 그 말이 나가서 창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활 환경과 운명을 입술의 말로써 만들어 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속사람과 겉사람의 삶의 주도권 싸움
속사람과 겉사람의 삶의 주도권 싸움이 늘 있습니다. 겉사람은 감각과 경험과 지식과 이성과 과학적 사고방식을 통해서 여러분 속사람을 압박을 합니다.
로마서 8장 7절로 8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보십시오. 육신의 사람은 육신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말씀을 믿고 사는 삶인데 속사람은 하나님과 친자식이요, 친아들이요, 친친구가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겉사람과 속사람이 늘 싸워요. 여러분 속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성령과 같이 하지만 겉사람은 자꾸 세속적이고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속사람을 점령하려고해요. 싸움이 붙어요. 늘 싸움이... 한번도 안싸운 때가 없어요. 내가 영적으로 뭘 하려면 겉사람이 자꾸 훼방을 놓아요. 부부싸움 하는 것도 가정이 괴로운데 개인의 속사람과 겉사람이 싸우니까 괴롭지 않아요? 속사람이 강해지면 겉사람을 억압하고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히 영적인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서 육신의 사람인 마르다와 마리아하고 다투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가에 와서 무덤에 돌을 옮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기적을 행하려고 하는데 마르다가 예수님께 저항을 했습니다. 주님, 못 옮겨 놓습니다. 오라버니가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어 이미 썩은 냄새가 납니다. 돌문을 옮겨 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정면을 바라보면서 마르다여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마르다가 입실갱이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이 여러분과 입실갱이 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이 십일조 내라! 아이구 요사이 생활이 어려워서 못냅니다. 십일조를 내면 쌓을 곳이 없도록 붓는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고 내 생각은 틀립니다. 속사람과 겉사람의 싸움이지요. 너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으니 나았다고 생각하라! 그래도 아픈데요. 주저 앉아있지 말고 일어나서 운동도 좀 하고 산책도 좀 하라. 어지러워서 못해요. 다리에 힘이 없어서... 끊임없이 예수님과 싸웁니다. 예수님은 속사람을 통해서 여러분을 이끌어 가려고 하는데 마귀는 겉사람을 통해서 저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언제나 겉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예수 믿는 사람은 속사람의 말을 듣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겉사람은 세월이 흘러가면 낡아지고 속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점점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결론>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18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속은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지난 2005년 국민일보는 파키스탄 지진 현장의 기적을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파키스탄의 지진 피해지역에서 이재민들을 돌보던 기아대책긴급구호팀이 흙더미에 깔려 있는 청년을 흑더미에서 끌어냈어요. 보니까 숨도 그치고 맥박도 없고 싸늘한 시체에요. 그래도 살려 보겠다고 피를 뽑기도 하고 인공호흡도 시키고 코속에 생기를 불어놓고 해도 안돼요. 그래서 그 중에 목사님 한분이 우리 이러지 말고 다같이 기도하자. 그래서 안수를 하고 전부 다 이 청년의 영혼이 돌아와서 살게 해달라고 해도 꿈쩍도 안해요. 그래서 목사님이 청년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그것 왜 그랬냐고 나중에 물으니까 에스겔서에 보니까 뼈다귀를 보고 에스겔이 명령하여 말하기를 생기야! 뼈속에 들어가라! 명령하니까 생기가 들어가서 전부 사람이 되어서 일어나니 큰 군대가 되더라는 그 말씀이 기억나서 한번 외쳐보자고 해서 청년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그러니까 휴~ 하더니만 일어났어요. 그래서 거기에 있는 사람이 다 놀라고 제일 많이 놀란 사람이 청년아 일어나라고 한 목사가 제일 많이 놀랬어요.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일어났냐고 목사가 물으니까 자기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는데 하나 들리는 소리는 어디에서 청년아 일어나라고 고함을 치는데 고함소리가 날 때마다 몸에 힘이 확확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더니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면 하나님의 생기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으로 많이 명령하십시오. 귀신도 많이 쫓아내고... 예수 이름으로 죄야 물러가라! 예수 이름으로 세상아 물러가라! 예수 이름으로 병아 물러가라! 예수 이름으로 저주야 물러가라! 예수 이름으로 사망아 물러가라! 영혼은 잘되라! 범사는 잘되라! 강건하라! 생명을 얻을지어다! 평안하라! 많이 명령하십시오 여러분, 기도만 할 뿐 아니라 명령을 하면 명령을 쫓아서 창조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태양아 빛이 생겨나라! 궁창아 생겨나라! 생물은 생겨나라고 명령한 것처럼 명령하면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사람은 그와 같은 힘이 오늘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겉사람과 속사람이 싸움을 하지만 어찌하든지 속사람은 영의 사람은 말씀을 의지하여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겉사람은 점점 노쇠해지고 무능력해집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지요. 저도 돌아보면,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까지는 펄펄 날랐어요. 69살 때까지 높은 산꼭대기 올라가서 스키 탔으니까요. 그런데 70이 되고난 다음부터는 다리가 흔들흔들해서 할 수 없어요. 아무리 큰소리해도 다리가 흔들거려요. 많이 흔들렸다가 여러분이 많이 기도해주셔서 이제는 좀 꼿꼿하게 되었어요. 제가 생각해봐도 신기해요.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여러분 앞에 서서 1시간 넘게 설교할 수 있으니 좋지 않습니까? 그러나 겉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세월이 흘러가면 후패해져요. 그러나 속사람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세상과 멀어지고 말씀이 가까워지므로 점점 더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되고 낡은 겉사람을 벗어버리는 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 춤을 추며 영광의 영원한 처소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고 놀라지 말고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더 나아지는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 동안에도 우리는 사차원의 영적인 세계에 속사람이 들어가서 살면 겉사람을 지배하고 환경을 지배하고 살다가 나중에 영원히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극복하는 세 가지 길
조용기목사 / 고후 4:16~18
<서론>
“고난을 극복하는 세 가지 길”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곡의 울음소리를 내고 어머니 배총(배꼽)에게서 떨어져 나올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고난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고난은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는가 생각하고 보면 그 배후에는 고난이 있고 고난밖에 없는 줄 생각하고 보니 좋은 일도 있고 항상 밤낮이 바뀌는 것처럼 좋은 일과 고난은 바뀌면서 수레바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문제지 고난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다 당하는 것이니까.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되겠습니까? 고난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에 걸려서 넘어지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혹은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고난의 돌인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걸림돌이 되고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면 디딤돌이 되어서 더 나은 길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오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고난을 다 겪어보았습니다. 고난이 삶을 파멸시킨 일도 있고 고난을 잘 이겨내서 고난 동등 이상 혹은 큰 축복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대개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본론>
1. 고난에 대한 인본주의적 태도
첫째로, 고난에 대한 인본주의적인 태도인데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가지는 태도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동등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저나 똑같다고 하나님이 홀로 선악과를 구별한 것처럼 저도 홀로 선과 악을 구분하고 살아가겠습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려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와 같이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어서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 사람 말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고 나쁜 것을 결정한다. 인간의 능력으로 고난과 대결하여 이겨도 상처투성이고 지면 패가망신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신론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자기가 자기 주인이 된 사람, 이러한 사람은 자기의 능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하다가 패가망신 당하는 사람입니다. 고난을 자기 이외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항상 원망, 불평, 분노, 정죄가 따릅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믿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된 사람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입니다. 왜,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 하나님이 지어주신 하와가 먹으라고 하니 내가 따먹었습니다. 그러므로 책임은 내게 있지 않고 하나님이 하와를 만들어서 내게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있고 하와가 나를 꾀어서 먹였기 때문에 하와에게 있고 나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하와야!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 ‘뱀이 나를 꾐으로 먹었습니다.’ 자기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습니다. 마음이 깨어진 사람은 자기를 뒤돌아 보고 자기의 책임을 느끼고 회개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다 돌리는 것입니다. 너 때문에 그렇지 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너 때문’이 굉장히 힘든 말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다가올 때 그 고난이 나 때문에 다가오지 않았나 깊이 살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자기가 아무 일을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나빠서 그렇다고 교만을 부리면 결국 교만으로 말미암아 자기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고난에 대처하는 낮은 신앙의 단계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낮은 단계의 신앙이 있고 높은 단계의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하여 낮은 단계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해결하려고 하되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일은 내가 해결하겠습니다.’
D. L. 무디 선생이 늘 이야기할 때 그 말 했습니다. 키가 굉장히 크고 몸이 거대한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딸내미를 데리고 얼음을 지치러 가면 딸내미 손을 꽉 잡으면 자꾸 손을 틀어버려요. “내가 걸을 수 있는데 아버지가 왜 자꾸 손을 잡느냐. 내가 걷는다.” “아버지가 붙잡아 주면 좋지 않으냐.” “필요 없다.” 그래서 얼음 위를 걸어가다가 미끄러져서 꽝 엉덩방아를 찧으면 그다음에는 엉엉 웁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손을 잡고서 “봐라! 아버지가 곁에 있어서 잡아 주겠다고 하는데 왜 고집을 부리고 가다가 넘어지느냐. 손 내놔!” 그러면 손가락 하나 딱 내놔요. “이것만 잡으면 돼!” 그래서 손가락 하나를 잡아서 미끄러지니까 또 엉덩방아를 찧습니다. 그래서 상처투성이가 되어야 비로소 그때는 울면서 손을 내놓는데 그러면 아버지가 손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몸통을 안아서 얼음 위를 걸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이 아니고 자기 힘을 의지해서 나가는 사람은 기도는 합니다. “하나님 이 고난에 나를 붙들어 주시고 지켜 주십시오.” 기도는 하면서 맡기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도움은 받았지 하나님께 맡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고난에 대하여 인간적인 힘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니까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우려고 해도 내 뜻대로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하나님 뜻대로 나를 끌어가지 마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을 자기 보조로 삼았지 하나님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고난에 대처하는 낮은 신앙의 단계는 자기 인본주의가 꽉 서서 하나님을 보좌관으로 삼지 하나님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보좌관이 되지 않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신앙적인 시련을 겪고 깨어졌습니다. 낡은 사막의 잡초 가시넝쿨 안에 불이 활활 붙었을 때 모세가 그 앞에 가니까 그 불길 가운데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신발을 벗어라.” 그 말은 뭐냐면 신발은 자기가 신고서서 걸어가는 자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 중심을 벗어서 하나님께 던지고 의지하라. 자기 신발을 신고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같이 서서 대화하려면 하나님이 상대해 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들은 신발을 신어도 종은 신발을 벗습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의 주권을 넘긴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어서 던지니까 그때부터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서 모세를 이끌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여리고 평지에 여호수아가 났을 때 한 군대장군이 칼을 뽑고 여호수아 앞에 섰습니다. 여호수아가 “당신은 우리 원수 편입니까? 우리 편입니까?” 장군이 말하기를 “나는 편들러 온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파견되어 나온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다. 네 발의 신을 벗어라.” 하나님의 군대 장군이 왔어도 여호수아가 신발을 벗고 자기 주권을 내어 놓았었을 때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모든 정치적인, 군사적인 방법을 말씀해 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전체 다 맡기든지 아니면 전체 여러분이 다 책임지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반쯤 맡기고 반쯤 안 맡기고 하는 엉거주춤한 그러한 생활은 원치 않습니다. 오늘 주님은 여러분에게 와서 말씀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네 신발을 벗어라. 네 주체성, 네 중심의 생각을 벗어서 내게 맡겨라.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내게 맡겨라. 그러면 여러분 스스로 맡기면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하나님, 내가 할 테니까 와서 도와만 주십시오. 나는 보좌관 하러 오지 않았다. 네 마음대로 하라. 네가 충분히 깨어졌을 때 다시 오마.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깨어지면 신발을 벗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반드시 나쁜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3. 고난을 극복하는 높은 신앙의 단계
고난을 극복하는 높은 신앙의 단계를 우리는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모든 고난이 올 때 내 인생을 하나님께 내어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물에 뛰어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맡기면 물이 그 사람을 띄워주는 것처럼 자기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쇠하든지 하나님께 내어 맡겨버립니다. 맡겨버리면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모든 고난도 하나님께 맡겨버리자. 편안할 때는 참 아멘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진짜 고난이 다가와서 불길이 타오르는데 내어 맡긴다는 것은 참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택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3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홍해가에 왔는데 군인도 없고 배도 없고 빈손 들고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맡길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돌아서서 애굽 군대에게 항복할 것이냐. 기로에 서 있습니다. 백성들은 다 모세야, 이곳에서 우리는 전멸 당한다. 돌아서서 애굽에게 항복하고 나가자. 그러나 모세는 서서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자. 오늘 네가 본 애굽 군대를 다시는 안 볼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 맡긴 것입니다. 엄청난 담력을 가지고 하나님께 내어 맡긴 것입니다. 모세는 정말 자기 자존심을 다 벗어버리고 자기를 의지하는 모든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지식과 재능을 벗어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홍해수를 갈라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 절대 쉽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엄청난 결단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죽을 각오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각오를 하고 하나님 앞에 인생을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에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얼마나 십자가 걸머지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주님은 하나님께 그 잔을 옮겨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잔을 받아 마셨습니다. 먼저 죽음을 내놓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당할 때 주님의 도움을 구하면 주님이 우리 자신을 내놓을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9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자기가 선한 일을 선택하고 도모하면서 생명을 하나님께 맡겨라. 하나님께서 영혼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55편 22절에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맡기는 것은 전적으로 내어 맡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은 맡은 것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맡은 것을 책임 못 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일단 맡기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 해 보시라고요. 여러분이 어려운 고비에 당했었을 때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세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책임을 져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극복하는 높은 단계의 신앙에는 항상 고난이 다가오면 마귀가 그 앞에 서서 춤을 추고 야단법석을 하더라도 우리 믿는 사람은 그 고난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조차도 우리에게 유익 되게 하시지 손해되게 안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 잔이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다가오면 우리에게는 고난과 마귀가 보이지만 한 단계 더 멀리 바라보면 하나님이 고난을 이용해서 우리에게 유익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좋은 일, 어려운 일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러므로 고난은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축복을 반드시 가져오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크면 큰 만큼 영광도 다가오고 고난이 적으면 적은 만큼 하나님의 은총도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하게 왔다가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고난은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축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고난이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손해를 가져오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멀리서 바라보면 굉장한 유익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선생은 고린도후서 12장 7절로 9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선생이 얼마나 계시를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받고 사람으로서 셋째 하늘까지 올라가서 하나님과 대화한 사람입니다. 사람이니까 교만해지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래도 셋째 하늘까지 올라갔다 온 사람인데 무슨 잔소리냐? 교만해질 수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사탄의 사자를 보내서 가시 채처럼 몸을 찌르게 했습니다. 바울 선생은 몸에 지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굉장히 고통스럽고 괴로웠습니다. 그 병이 떠나기 위해서 세 번 기도했으니 바울 같은 위대한 신앙인이 세 번 기도 드렸으니 얼마나 깊은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무나 내게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네가 교만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가시 채를 보내어서 사탄이 너를 괴롭히므로 네가 교만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고난을 보내어서 나를 약하게 만들므로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고 더욱 하나님께 바라보게 해서 하나님이 사용하는 귀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그랬다고 하나님 대답하시므로 고난이 오히려 고맙게 느꼈다고 했습니다. 고난 때문에 내가 더 은혜를 받고 더 큰 능력과 계시가 오는 것이니까 오히려 하나님 더 많은 고난을 주셔도 좋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받는 고난이라면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겸비하게 낮아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려운 고난이 다가오면 반드시 고난이 여러분에게 괴로움만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길을 가르쳐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무슨 길이냐. 금식기도 해라. 고난이 내게 다가와서 괴로우면 고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고난 없을 때는 아무 말 해도 소용이 없는데 고난이 다가오면 금식기도 해라. 금식기도를 하다니요? 오산리기도원으로 가라. 그래서 금식기도를 하게 되고 고함을 쳐 하나님께 부르짖기도 하고 헌신적인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편안하면 금식기도하고 기도원에 가서 철야기도하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 좀처럼 없습니다. 고난에 고통을 당하면 고난을 이기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신령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다가올 때 하나님이 이 고난을 통해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가 그것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 의미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반드시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고난은 의미가 있습니다. 의미 없는 고난이 여러분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이 다가오면 제일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내가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징계를 받은 것이 아닌가 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잘못하면 부모가 꾸짖지 않습니까? 옛날에 우리 어릴 때는 우리 어머니 부지깽이가 징계의 채찍입니다. 들어오라고 해서 부엌 앞에서 부지깽이로 장딴지를 얻어맞은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때 이것은 네가 받아야 될 징계라고 하면 회개하고 우리가 변화돌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8절로 11절에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아버지가 너희들 잘되라고 징계하는데 영의 아버지가 영원히 잘되라고 징계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훗날에 의롭게 되고 더 평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인격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채찍을 들어 때리고 몽둥이로 종아리를 때린다는 것입니다. 징계는 우리가 그를 통해서 회개하고 변화받기 위해서 주는 징계라는 것입니다. 징계를 안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학교에 가서 공부할 때도 선생님에게 징계를 받아야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학교에서 선생이 징계를 못 한데요. 학생이 선생님에게 막 달려들기 때문에 징계를 못 하는데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이 당연히 징계하면 벌벌 떨고 꿇어앉습니다. 제가 중학교 공부할 때는 중학교에 우리 영어 담당하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선생님의 이름이 콩코드입니다. 콩코드라는 것은 문장의 시차가 같도록 만드는 것을 콩코드라고 하는데 이만한 대나무 장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교실에 들어와서 숙제 내놓고 콩코드가 맞지 않으면 나오라고 해서 때리는데 대나무 막대기로 때리니 얼마나 아픕니까? 그러니 그 선생님 시간에는 죽도록 외워요. 죽도록... 당장 잊어버릴 지라도 죽도록 외워요. 그래서 그 선생님 앞에서는 통과가 되었어요. 요사이 돌아보면 그 선생님이 대나무로 때렸는데 그때 외운 것 지금도 알아요. 안 잊어버렸어요. 징계는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발전을 할 수 있고 향상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징계로써 어려움을 주실 때는 회개하고 도와달라고 하면 평강의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욥기 5장 17절에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와서 고통당할 때 업신여기지 말고 그 징계를 받아들여서 변화 받기를 구하면 내게 큰 유익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매를 맞을 때 하나님은 회개하라고 때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온전히 다 의롭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의만 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야훼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야훼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8-19)
많은 고난이 있으나 하나님은 그 고난에서 건지기도 하시고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잘못해서 당하면 징계를 내리시고 회개하도록 꾸짖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를 맞을 때 회개를 합니다. 평안할 때 좀처럼 회개하기가 곤란합니다. 고난은 아플 때 회개하고 변화를 받으려고 애를 많이 쓰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 신앙이 자랄 때 더 고난을 주셔서 회개케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자라는 것이 그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있으면 하나님이 아직까지도 인격적으로 변화 받으라고 회개를 시키는 것이므로 오히려 장성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엘서 2장 13절에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야훼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재앙을 안 내리기 위해서 재앙 오기 전에 변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비가 와서 언덕이 무너지기 전에 복구하고 수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격적으로 무너지게 된 것을 회개하고 수리해 놓으면 어려움이 다가와도 극복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기 위해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인내의 훈련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참지 못하면 이기지 못합니다. 어떠한 고난도 참고 어려움도 참고 견디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하는 것이 굉장히 괴로워도 이를 참고 계속해서 노력을 하면 거기에 통달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내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인내를 가진 인격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3절로 4절에 보면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삶에 참는 마음 이것이 신앙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면 신앙이 온전하지 못하게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해도 참고 좋을 때도 참고 넘치지 않게 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인내를 가르쳐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정 참지 못하고 아이고 나 못 견디겠습니다. 나 내려가야 되겠습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버렸으면 우리는 구원을 못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다 청산할 때까지 참으셨습니다. 마지막 우리의 빚을 다 갚으셨을 때 내가 다 갚았다. 그리고 주님이 세상을 뜨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갚아진 거예요. 예수님이 인내가 없었으면 중도에 포기하고 나 내려가야 되겠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셨으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가 다 갚아졌어요. 허물도 다 청산되었어요. 여러분의 질병과 고통도 다 청산되었어요. 저주도 갚았어요. 낭패와 실망도 갚고 죽음과 지옥도 갚았어요. 주께서 다 갚아놓고 난 다음에 내 영혼을 주께 맡기나이다. 청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청산할 수 있는 인내를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 시련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서 여러분 인내가 되면 여러분이 비로소 지역장도 구역장도 장로도 집사도 목사도 책임을 지고 일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책임자는 온전히 구비하여 모자람이 없게 위해서 인내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내 없이 성격이 급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자가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신앙이 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시련을 겪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소련 소치 땅에서 올림픽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올림픽 때문에 잠을 못 자는 우리 성도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 올림픽 하면 단거리 선수들이 뛰는 것 그렇지 않으면 올림픽 거기에서 춤을 춘다고 말합니까? 뭐라고 말합니까? 그것을 볼 때 얼마나 다리 힘줄이 강한지 몰라요. 그 다리의 힘이 그렇게 붙어야 단거리도 뛰고 장거리도 뛰는 데 그 힘이 하루 만에 붙습니까? 하루 만에 힘이 생기지 않아요. 꾸준하게 열심히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병원에 신체검사 하러 가면 제 담당 의사선생님이 항상 나를 보고 다리에 힘을 실으십시오. 다리에 힘을 기르십시오. 그래서 다리에 힘을 어떻게 기릅니까? 매일 만 보를 걷든지 안 그러면 아령을 들고 세수하고 난 다음 이것을 매일같이 하십시오.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람은 다리에서 힘이 생기고 다리에서 힘이 빠집니다. 다리의 근육이 힘이 빠지면 저항력이 없어서 다른 병도 다 걸립니다. 그리고 난 다음 나하고 같이 서서 나를 밀어서 자기가 뒷걸음질 치는지 내가 뒷걸음질 치는지 보자고. 그런데 지금은 자기가 뒷걸음질 치지요. 왜냐하면 아직은 내가 젊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내가 뒷걸음을 치게 되면 곤란하지요. 그러므로 세수할 때 항상 앉았다 일어났다를 항상 30번 하라고 합니다. 30번 하면 다리가 굉장히 힘줄이 서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 대신 근육이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다리가 튼튼해지면 감기도 안 걸린대요. 모든 저항력이 생겨서 튼튼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한가지입니다. 연단을 받아야 돼요. 어려운 일을 당해서 기도와 믿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연단을 받아야 나중에 어려운 문제도 척척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절로 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이 연단을 받게 되면 환난 같은 것 다가와도 능히 이겨낼 수 있고 소망을 가지고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이기고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로 14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즐거워할 수가 없지요. 시험과 고난이 다가오면 즐거워 안 합니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고난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우리가 고난을 당해도 예수 이름으로 꾹 참고 이겨나가면 그 영광이 주님 앞에 설 때 상급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우리가 고난을 참는다는 것은 신앙이 그만큼 자란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조그만 일만 해도 성을 내고 화를 내고 발버둥을 치면 그것은 신앙이 자라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에 연단을 받으면 많은 은구슬, 금구슬 많은 영적인 구술을 마음속에 보배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장에 가서 보면 진주가 있지 않습니까? 진주가 아름다운데 그 파란 색깔이 흰색에 섞여서 있는 것을 보면 굉장히 아름답게 보이는데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자연적으로 진주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진주는 광물성 보석과는 달리 생명체가 만들어내는 보석인데 진주조개 혀 밑에 모래알을 넣어주면 혀를 갉아 먹으니까 아프잖아요. 그러니까 혀에서 물질이 나와서 그 모래알을 감싸요. 자꾸 감싸고 감싸고 감싸고 감싸니 나중에는 동글동글하고 아름답고 영롱한 진주가 되어서 진주조개 혀 밑에 저렇게 되어서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보석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의 신앙이 진주조개같이 되는 것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볼 때 야! 빛난 진주가 반짝거리는구나. 저것 내가 가지고 사용해야 되겠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여러분이 참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는 것을 전부 다 참지 않고 변명을 하고 싸우고 원수를 갚고 하면 진주가 될 시간이 없어요. 그러나 고난을 내가 받아들여서 참고 견디면 내 속에서 진주가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고난을 참는 것보다 더 위대한 신앙은 없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존귀롭고 아름다운 것은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탓이요.’라고 하고 내가 깨어지고 내가 참는 것 이것이 보배입니다. 가정생활도 한가지입니다. 남편이 조금만 참으면 아내를 수용해주고 가정에 불화가 없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내는 남편을 조금만 참고 이해해 주면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 견딘다는 것, 이것이 가정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절대적인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깨어지지 않는 사람은 참지 못합니다. 대항합니다. 싸웁니다. 깨어져야 마음속에 진주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진주는 광물성 보석이 아니라 생명체가 만들어내는 보석이므로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래 깨어지고 참으면 아름다운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인해 고통과 아픔을 겪지만, 그 고난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인정하고 잘 극복하면 오히려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이 다가오면 고난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긍정적인 태도를 취합니까? 고난이 다가오는데 긍정적인 태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이 내게 좋게 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이 긍정적인 태도인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올 때 일부러 좋은 일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고서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태도라는 것은 많은 고난이 다가오는데 사람들은 고난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울고 가슴을 쳐야 될 곳에 여러분 기도할 때 이 고난조차 하나님이 내게 유익되게 할 줄 믿습니다. 고난을 하나님 통해서 내가 더 나은 내일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인 것입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유익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부어 잔이 넘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인내하고 참으면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일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한 이태(두 해) 동안에 저는 50년의 목회생활을 해오는 중에 가장 어려운 고난을 겪었습니다. 시련을 겪고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만 제가 여태까지 신앙해 온 중에 가장 하나님이 제게 유익된 날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많은 고통이 다가오고 내가 변명을 하고 싶고 사람이니까 대항하고 싶고 복수를 하고 싶고 여러 가지 착잡한 잘못된 생각들이 마음에 많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회개할 수 있고 성령의 변화를 받을 수 있고 그리고 진주조개가 되는 것을 바라볼 수도 있고 좋은 일이 많았었습니다. 제가 고난을 당할 동안에 우리 성도 여러분들께서 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신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저를 사람으로 만들고 주의 종으로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 배운 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오늘이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주의 나라에 갈 것인데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돈도 건강 이외에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길에서 조그마한 일도 하나님께서 다 좋게 만들어 주실 것이니 이 시험과 환난도 제게 크게 좋게 만들어 줄 줄 믿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당회장으로 들어온 이영훈 목사 좋은 사람입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보고 길러 온 사람인데 성격이 착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자기 혼자 힘으로 안 돼요. 여러분이 기도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많이 해주시고 또 선배 된 제가 끌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여러분께서 우리 당회장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제가 선배로서 잘 끌어줘서 훌륭한 주의 종이 되고 한국을 세계에 나타내는 일꾼이 되게 만들어 주십시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은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유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난은 반드시 그 배후에 영광을 주는 것입니다. 영광은 고난보다 견줄 수 없이 큰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국무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비관론자는 매번 기회가 찾아와도 고난을 본다. 그러나 낙관론자는 매번 고난이 찾아와도 기회를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면 고난이 오히려 유익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이 다가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춤추고 즐거워하고 고난이 다가오면 하나님께 엎드려서 주님이시여 이 고난이 좋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나쁘게 될 것을 믿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좋게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는 기쁨이 될 줄 믿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이를 받아서 좋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점점 육신의 세계가 멀어지고 천국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육신의 모든 것이 허무하기 짝이 없거든요. 하루아침에 재산 다 날아갈 수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벌어 놓은 것 다 놓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지고 있는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영원한 세계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므로 고난은 육신의 세계를 이기고 천국을 마음속에 깊이 모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18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겉사람이 고통으로 찌그러지고 낡아지면 속사람이 더 새로워지고 생기발랄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모하기 때문에 변화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이 지극이 크고 중한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게 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는 세상 것은 잠시 있으면 다 지나가고 안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영원히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시고 굳건하게 만드시고 강하게 만드시고 견고하게 만드셔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좋은 일은 좋아서 좋고 나쁜 일은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니 좋습니다. 이것이 긍정적인 태도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나쁜 것은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니 좋다. 그러므로 감사와 찬양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크게 기뻐하시고 여러분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결론>
고난은 피할 수 없으나 고난을 대하는 태도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보았습니다. 옳은 태도를 가지면 고난은 크게 유익된 훈련이 되지만 잘못된 태도를 가지면 심신의 깊은 상처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감사로 약으로 변화시키든지 불평으로 독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좋은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태도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크고 작은 고난은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디딤돌이 되기도 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하나님이 같이 일해 주셔서 그 고난을 통해서 영혼이 더 잘되고 더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원망, 불평, 탄식을 하면 더 나빠지고 더 고약해지고 더 고난이 거세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내일을 변화시키는 것인데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지 옆에서 보고 계시고 도와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은 좋습니다. 좋은 것을 가져오기 위해서 인격적으로 연단해 주시고 징계해 주시고 강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고난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을 통해서 좋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은 좋은 것입니다. 좋은 것은 더 좋은 것입니다. 아멘.
날마다 새로워지는 생활
고후04장 16절 / 박조준목사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새 번 역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고 있으나 속사람은 나 날이 새로워 지고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체험을 말하고 있 습니다. 사실 그의 겉사람, 곧 육체는 점점 후패하여 갔습니다. 그 원인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우선, 그는 항상 과로하여 그 몸이 지쳐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몸에 가시 곧 그 를 괴롭히는 병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위에 그는 종종 핍박을 받아서 그 몸에 상처를 입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생각한 대로 고린도후서 1장 8절 이하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 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 고 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11장 23절 이하에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 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 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았다 고 했습니다. 그러니 말하자 면 그 몸이 골병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점점 늙어가니 쇠약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사도 바울뿐만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이 자리에 할머니 들도 눈에 띄는데 아마 50년 전에는 아주 젊은 부인들로서 허리가 곧고, 탄력이 있고, 시력도 좋고, 목소리가 아름답고 활기가 넘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곧던 허리는 굽어지고, 머리는 희어지고, 얼굴엔 주름살이 생기고, 눈은 어둡고, 귀는 멀어져 보는 것, 듣는 것이 불편해지고 자신의 몸 하나 가누기도 귀찮아집니다. 제가 스물 일곱 살에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를 담임하고 나니까 너무 어려서 좀 나이가 들어 보였으면 하여 옷을 입어도 나이 든 사람처럼 입어 보려 애썼습니다. 성도들이 기도할 때도 저 를 위해 기도하면 젊은 종 박목사님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는 동안 언제인지 는 모르겠지만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저더러 젊은 종 이라고 하는 분이 안 계십니다. 그런데 이 제 좀더 있으면 아마 노종 이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요, 세월이라는 것입니다. 아직은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은 합니다. 그러나 얼마 더 지나노라면 마음은 하고 싶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이것을 막을 길은 누구도 없습니다. 현재 젊은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이제 앞으로 30년, 40년 후에는 분명히 다 노인이 될 것입 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 육신 늙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 다. 그러나 그렇다고 늙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사도 바울의 말대로 겉사람은 후패하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의 속사람, 그의 심령이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여기 사도 바울은 날로 후패해지는 육신 가운데서도 날로 새로워지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은혜를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첫째로, 이 새로워진다는 말은 생명을 연상케 합니다. 살아있는 것은 언제나 새로워집니다. 산 나무에 새잎이 돋아납니다. 산 풀에 새싹이 납니다. 산 꽃이 더 아름답습니다. 죽은 것이 새 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날로 새로워지려면 먼저 죄와 허물의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영적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2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 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 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워지는 은혜는 먼저 온전히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고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됨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 날로 새로워지는 은혜를 받으려면 먼저 과거의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 나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날로 새로운 은혜를 받는 첫단계입니다. 둘째로, 이 새롭다는 말은 아침을 연상케 합니다. 아침에는 만물이 새로워집니다. 그것은 아 침 햇빛이 비취는 까닭입니다. 동편에 아침해가 돋을 때 어둠의 그늘은 사라지고 만물이 빛나고 새롭게 됩니다. 시편 27편 1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요 했습니다. 하나님은 빛의 근본이 십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비추는 빛이십니다. 예수님도 나는 세상의 빛이라 고 말씀하셨습니 다. 이처럼 하나님의 빛, 우리 주님의 빛이 우리 심령의 지평선 위에 솟을 때 우리의 심령은 새 로워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새 마음, 새 기쁨, 새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사 야 40장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 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우리 심 령 위에 날마다 하나님의 빛, 진리의 빛, 생명의 빛이 비칠 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 니다. 그래서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창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빛이 우리 속사람을 비출 때 우리의 속사람은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이 새롭다는 말은 샘물을 연상케 합니다. 더운 여름 사막 길을 걷던 나그네가 길가의 오아시스를 만나 그 맑은 샘물을 마시게 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새로운 원기를 회복하게 됩니다.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주님은 일찍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고 하는 동네, 야곱의 우 물가에서 마침 물 길러 나온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 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 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 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세상은 사막과 같이 메마른 곳입니다. 이런 곳을 지나가는 인간들은 다 피곤하고 쇠약해집 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기도를 통하여 그와 항상 교통하는 이들은 시원한 생명수 곧 성령을 충만히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심령은 아무리 피곤한 인생 행로를 걸어도 그 심령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새 힘과 새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샘은 흐려지게 해도 한참 후에 다시 맑아집니 다. 샘은 언제나 맑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새롭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샘 물 같은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새로워진다는 말은 안식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가 피곤하고 지칠 때 평안히 쉬어야 육체가 새로워집니다. 피곤한 몸이 하룻저녁 잠을 푹 자면 그 이튿날 아침 새로운 건강을 가지 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 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에 편지할 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너희의 염 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했습니다. 우리가 무거운 짐들을 우리 스스로 지려고 하지 않고 믿음으로 다 주께 맡기고 우리 심령이 편히 쉬게 될 때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이 쉴 때 더 아름다워집 니다. 장성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동산,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에서 편히 쉴 때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우리가 새로워집니다. 다섯째로, 새롭다는 말은 영양이 좋은 것을 연상케 합니다. 꽃은 물과 비료를 주어야 날로 새 로워집니다. 곡식도 옥토에 심고 좋은 비료를 주어야 날로 새로워집니다. 어린애들도 영양 있는 음식을 먹어야 잘 자라고 새로워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에도 날마다 새로운 양식이 필 요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만나를 날마다 새롭게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 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먹어야 심령이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날마다 읽어 서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항상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읽는 습관, 말하자면 거룩한 습 관을 가져야 신앙 생활을 바로 할 수가 있고,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새 힘을 얻어 맡은 바 책임을 바로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사실 믿음 있는 사람은 겉사람이 후패하여질수록 반비례로 속사람은 더욱 새로워집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겉사람 인 육신이 점점 후패하여 허약하게 되면 이 육신을 근거로 하던 여러 가지 추한 욕심이 사라지 게 됩니다. 정욕, 물욕, 권세욕, 명예욕 같은 것이 사라집니다. 세상에 붙은 온갖 허영심이 없 어지게 됩니다.그래서 남에 대한 시기, 분노, 증오심 같은 악한 감정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 서 자연히 남을 용서하게 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옛말에 인지장사에 그언야선 하 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그 말이 선하게 됩니다. 죽으면서까지 나쁜 말하고, 욕하고, 악담 하고, 저주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소망이 끊어지게 되니 자연히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보 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겉사람이 아주 후패하여질 때, 육신의 눈이 어두워 지나 심령의 눈이 더욱 밝아져서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육신의 귀는 어두워 세상의 소리 듣지 못하게 되나 신령한 귀는 더욱 밝아져서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처럼 겉사람이 후패할수 록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겉사람인 육체가 아주 무너질 때면 새로워진 그 심령은 옛 집을 버리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같은 사람을 보세요. 그가 밧모섬에 유배 되어 홀로 굴 속에 앉아 있을 때 그의 겉 사람은 늙고 병들어 후패하여 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속사람은 아주 새로워졌습니다. 그의 신령 한 눈은 아주 밝아져서 영원한 장래를 미리 볼 수 있었고 지극히 높은 하늘 나라의 영광을 분명 히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신령한 귀는 아주 밝아져서 천군 천사들의 노래와 구원받은 수없 이 많은 성도들이 화답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신앙 생활이란 날마다 새로워지는 생 활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새로워지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7절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 에게 이루게 함이니 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받는 어떠한 환난도 다음 세상에서 기쁘게 누릴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하늘에서 누릴 영광 속에서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7장 마지막에 보면 하나 님의 보좌를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했습니다. 그 래서 로마서 8장 18절에도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습니다. 모든 복음서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그의 부활을 전제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위 해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명예가 그것 을 보증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 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했습니다. 우리의 눈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것,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것은 한 때뿐이 며 사라질 날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 하늘에 있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보 이는 것만을 생각하면 우리는 인생을 그렇게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방법이 있습 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알고 사는 생활입니 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4∼25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 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했 습니다. 사람이 보는 것과 그 삶은 큰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볼 줄 알아야 바른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바로 보고 바로 보지 못하는가에 따라 일생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것입 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보려고 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고 권면했습니다. 얼른 듣기에는 모순된 말 같지만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물질 가운데 보이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 는 것이 있습니다. 가령,우리가 물을 한 잔 떠왔다고 합시다. 우리 눈으로 맑은 물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물 한 방울을 떠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물 가운데 여러 가지 미균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아니하는 물질을 보기 시작하기 전에는 위생에 신경을 쓸 줄 몰랐습니다. 그러 나 물질 가운데 보이지 않는 미균을 볼 줄 알게 되면서부터 차츰 의학이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통 물질은 다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는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자와 양자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기 전에는 이 물질 속에 내재하는 힘을 사용할 줄 몰랐습니다. 보이지 않는 물질을 볼 줄 알 때부 터 원자를 사용하게 되었고 원자탄까지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까이 있는 것은 잘 보지만 먼 데 있는 것은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먼 데 있는 것을 볼 줄 알아야 바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발부리에 있는 것만 보지 말고 먼 장래의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지구 위에 산다고 해서 땅만 보면 안 됩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볼 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광범한 세계를 신령한 눈으로 볼 줄 알아야 우리가 바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볼 때 흔히 외모를 보기 쉽습니다. 그래서 결혼 상대를 택할 때도 얼굴 생긴 것부터 보게 됩니다. 서양 속담에 Beauty is a skin deep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인은 피부 한꺼풀 이라는 말입니다. 겉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속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또 현재는 보지만 장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래까지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승리했다고 즐거워할 것이 아닙니다. 장래가 어떻게 될지 미리 보아야 합니다. 특히 정치에 관 계하는 이들은 장래의 역사를 미리 보고 행동을 조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물질적 세계는 육안으로 보이나 영적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사람, 영혼의 가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보이지만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줄 알아야 삽니다. 세상 나라는 육안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볼 수 없는 나라를 바로 볼 줄 알아야 우리가 삽니다. 현세는 보이지만 내세는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내세를 미리 보고 살아야 바로 삽니다. 천당과 지옥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미리 보아야 이 다음에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심판의 자리도 미리 보아야 이 다음에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러면 모든 것을 바로 보기 위해서 갖출 조건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예수 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 를 볼 수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상보훈에서도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높은 산에 올라야 시야가 넓어져서 모든 것을 바르게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 40장 9절에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고 상한 수준에 이르러야 그리스도의 도덕적 수준에서 모든 것을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결과 의와 진실과 양심과 공명정대의 수준에 올라가게 될 때 모든 것을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전에 사도 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자기의 육신적인 조건이 굉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회개하 고 난 후에는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고 분토같이 여기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모든 고난을 참았다 고 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알고 경외하면서, 육신의 명령을 거절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돌아볼 줄을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 님을 경외할 줄을 모릅니다. 현재 눈 앞에 영달만 보고 장래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우 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생활을 올바르게 해서 이런 세상 에서 일어나 빛을 발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덧 입는 생
고후 4:16~5:10 / 임영수목사
저는 이 시간에 먼저 본문의 말씀을 한 사람의 생의 이야기로 극화시켜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휙션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 생활을 하지 않다가 특별한 기회에 부활의 메시지를 듣고 생에 극적인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그에게 그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 새롭게 형성되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기 전에만 해도 그의 생활은 수평적 관계에서 맺어진, 직장생활, 때때로 직장 동료들과 함께 하는 골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가는 술좌석,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두 남매와 함께 하는 가정 생활이 전부 다 였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건강해서 직장에서 잘 승진하고 그리고 좀더 넓은 사교 생활로 인간 관계를 넓혀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에 들어서면서 그전에 경험하지 못하던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해가게 되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교제를 갖는 하나님, 그리스도는 전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대상인데도 눈으로 직접 보는 대상들과 갖는 교제에서 보다 더한 기쁨, 평강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사랑하는 아내나 자녀들에 대해서 보다 더 깊어져 갔습니다.
그러면서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더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현실 도피적이 되어 가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전에 그렇게 자기 중심적이었던 그가, 이제는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고, 배려하며, 이타적인 사람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전에는 골프, 술좌석, 직장 동료가 없으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후부터 그는 그러한 대상들이 절대적이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에게는 그전과는 다른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의 삶이 형성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전에 수평적 관계에서 맛보던 것들이 이 새 차원의 삶에서 다 상쇄되어 갔습니다.
이제부터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루라도 주님과 함께 하는 교제의 시간 즉 기도, 말씀 묵상을 빠뜨릴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전에는 이 현실의 삶을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였는데 점점 이 현실의 생은 매우 잠깐이라는 것을 깨달아가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자기가 붙잡고 있는 현실의 생이 지나가는데 대한 아쉬움 두려움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두려움 대신에, 어느 때에라도 이 현실의 생이 끝나면 그것으로 자신의 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체의 몸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달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잠을 잘 때나, 일을 할 때 때때로 현실을 벗어나서 그 영원한 세계에서 되어질 그 변형된 삶에 대해 깊은 동경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현실에서 그의 삶은 점점 자유로워지며, 현실에서 집착이 점차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져 갔습니다. 그의 소원은 그에게 그러한 새로운 삶을 허락해 주신 주님과 온전한 연합 가운데 살고자 하는 열망이 더욱 커져 갔습니다. 현재라는 삶의 모든 여건이 주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어 가는데 방해가 될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의 변화되어가는 삶에서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신앙의 본질적 요소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사람에게는 새로운 "속사람"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겉사람', '속사람'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겉사람은 우리의 피부조직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주님을 알기 전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현실에서 맺어가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즉 수평적 관계입니다. '속사람'은 주님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어 가고 있는 영적 차원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는 그 영적 차원의 삶에서 이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그에게 절대 소중한 것은, 돈, 진급, 골프, 직장, 성공이었습니다. 그것을 목표로 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부터 그에게 소중한 것은 그리스도, 하나님, 영원, 평화, 사랑, 정의와 같은 것들이 더 소중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 사람에게는 '장막'과 '영원한 집'이 생겨났습니다. 본문에 장막과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여기서 영원한 집은 사후에 영혼이 가서 머무를 장소가 아닙니다. 영원한 집은 부활의 새 삶을 의미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그 전에는 이 현실이 모두였고, 그곳이 자신이 영원히 거할 집으로 알고 그 집을 보존하고 가꾸는데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본 현실은 그것은 임시적으로 머무르게 될 텐트로 세운 장막과 같은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영원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장차 약속되어 있는 부활의 새 삶입니다.
그가 바라보게 된 그 변형된 삶이란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되고, 받아 들여지고, 그 분과 화해되고, 그분에 의해서 치유되고, 보상된 자신으로서 그분의 보좌에 함께 하는 새로운 현실이었습니다. 그로서는 그것이 매우 동경이 되고 그리웠습니다.
다음으로 그의 삶에서 일어난 다른 하나의 변화는 그 전에 그의 목적은 사회적 성공이었습니다. 이후부터 그의 목적은 주님과 온전한 교제의 삶이었습니다. 그에게 제일 두려운 것은 현실에서 소유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제일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은 주님을 떠나게 되는 것, 주님이 없는 삶입니다. "그에게 있어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12)는 말씀이 그의 생의 좌우명처럼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있어서 생의 지평은 현실을 넘어서 저 영원한 시간으로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현실의 시간이 영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에는 이 세상에서 사는 시간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후로는 그의 생의 지평은 영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전에는 생의 마지막 종착 지점이 무덤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보좌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겉사람, 즉 이 세상에서 맺고 있는 관계는 영구한 것이 아니므로 시간이 경과 할수록 낡아갑니다. 낡아간다는 것은 나이가 더해가면서 육체도 쇠하여지고, 현실에서 맺은 관계도 점점 끓어지게 됩니다. 결국 죽음의 시간에 모든 관계가 끓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과의 관계와는 반대로 더욱더 새롭게 되어갑니다.
이 이야기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삶은 죽음에 의해 폐기되지 않고 변형됩니다."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시간적으로 제한된 삶에서 불멸의 삶으로 변화되며, 제한된 현 존재에서 시간적 제한과 공간적 제한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본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4)
바울은 삶의 변형을 "덧 입는다"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부활의 삶은 내세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현실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삶이 이 현실에서는 완성되지 못하고 영원의 시간에서 완성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됩니다. 죽음은 그 완성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인간의 삶이 죽음에 의해 폐기되지 않고 변형되어 간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폐기되지 않는 삶은 덧 입던가(변형), 그렇지 않으면 벌거벗은 상태(변형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게 됩니다. 덧 입지 못하고 벌거벗은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범죄하고 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찾아와 그들을 부르셨을 때 자신들이 벌거벗은 상태임을 깨닫고 무화과 나무 잎으로 그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죄 가운데 있는 상태,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상태,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본문에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3)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용서 받지 못한 상태, 하나님의 은혜밖에 있는 상태, 부활의 새 몸을 입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벗은 자로 발견될 때 우리의 수치를 가리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손수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우리의 수치를 가리울 수 있는 단 한가지는 하나님이 지어주시는 옷입니다. 그 옷은 하나님의 용서, 그분의 사랑, 그의 치유, 그분으로부터 오는 모든 상실된 것들의 보상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입어야 할 옷으로 새로 디자인 한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3-17)
이 옷은 겉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속사람을 위한 옷입니다. 세상 디자이너들은 겉사람을 위한 옷은 만들어도 속사람을 위한 옷은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 앞에서 벗은 자들로 가 아닌 덧 입은 자로 발견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이 만든 옷이 아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그 옷을 덧입기를 사모합니다. 그 옷을 입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미래가 약속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이 현실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바라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 가운데서 바라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부활의 생은 덧 입는 생입니다.
인생 3대 낙심에서 해방되는 길
고후04장 16~18절 / 김필곤목사
미국 경영학회로부터 '20세기 최고의 경영인'으로 선정된 GE의 전회장인 잭 웰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입사 첫해에 1만 5천달러(약 2천만원)였던 그의 연봉은 41년이 지난 지난해(2001) 1천 6백만달러선(약 2백 10억원)으로 뛰었습니다. 그동안 그가 개인적으로 번돈은 재산총액 6억 8천만달러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사람 잘 자라내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별명이 '중성자탄'(82년 뉴스위크), '미국에서 가장 무자비한 경영자'(84년 포천)입니다. 처음 5년간 직원 다섯명 중 한명꼴인 8만여명을 내보내었다고 합니다. 그의 인사관리는 탁월했는데 직원을 세 그룹으로 구별하여 관리했다고 합니다. 첫째 20%는 아주 탁월한 A급으로(열정과 비전), 두 번째 70%는 회사의 중추이자 성공적인 업무수행에 필요한 B급(헌신과 성실성), 나머지 10%는 업무수행을 할 능력이 없는 C급(계산하고 안주해)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는 A급과 B급의 차이를 열정이라고 했습니다. 기업의 유지에는 B급의 인재들이 중요하지만 기업의 성패를 위해서 A급을 발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C급의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찾아내서 내보내었다고 합니다. 사단이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하지 못하게 하고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인사정책을 쓴다면 무슨 방법을 쓰겠습니까? 열정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낙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사단이 악령과 함께 성도를 무찌르고 넘어지게 하는 무기 전시회를 열었답니다. 무기 밑에 가격표가 붙어 있었는데 가장 비싼 무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악령들이 대장인 마귀에게 물었답니다. "왜 이 무기는 다른 것에 비해 크지도 않은데 이렇게 비싼 가격이 매겨져 있습니까?" 마귀가 대답했답니다. "이 무기는 백발백중 서서히 넘어지게 하는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무기지." 그 무기는 쉽게 구할 수있고 도처에 널려 있는 낙망이라는 무기였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 중의 하나가 낙심입니다. "나같은 것이, 이제 도무지 할 수 없어, 이제 끝이야, 교회에 나가서 기도해도 소용없어, 이 나이에 무엇을, 우리 가정은 어쩔 수없어, 우리 아이들은 , 우리 남편은, 우리 나라는, 우리 교회는 별수 없어" 낙심합니다. 낙심은 무서운 정신적인 전염병 중의 하나입니다. 한 사람이 낙심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염이 됩니다. 그래서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낙심하면 자신의 가치를 평가 절하합니다.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평가 절하합니다. 낙심이라는 말은 우리말 큰 사전에는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풀어짐"이라고 해설해 놓았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완전히 분쇄된다. 용해된다."라는 뜻이 있고, 헬라어로는 "무가치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낙심이라는 것은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생각하게 하고 결국은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고 인생을 황폐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낙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3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가지 낙심으로부터 해방되면 우리는 인생을 좀더 열정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그 세가지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그것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소유의 상실에서 오는 낙심(16)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어버릴 때 낙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명예를 잃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 인기, 재물, 친구, 건강을 상실할 때 낙심하게 됩니다. 대기업 회장으로 있었는데 어느날 회사가 부도나서 도망자의 신세가 된 사람 얼마나 낙심하겠습니까? 일년 전만 해도 부하 수 천명을 거느리는 연대장으로 있었는데, 일년 전만해도 대기업 부장으로 있었는데 옷을 벗고 나니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누가 받아 주는 곳이 없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점점 힘이 빠져 갑니다. 머리카락이 희어집니다. 몸은 점점 말을 듣지 않습니다. 건강이 상실됩니다. 이럴 때 낙심이 되는 것입니다. 의욕이 상실됩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인생이 허무해집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어느날 자식들이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 헛살았구나 라고 생각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 역시도 늙어서 건강도 상실하고 자식도 없고 재산도 없고 그렇다고 노후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사랑했던 제자들도 떠나버리고 자신이 개척한 일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일관성이 없다고 배척을 받고 사도적 권위를 인정받지도 못하고 글을 잘 쓰는 데 설교는 시원찮다고 비난 받기도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바울은 상실의 대표적인 건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겉사람의 후패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상실로 인해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겉사람은 질그릇(7), 몸(10), 죽을 육체(11) 옛사람(롬6:6; 엡4:22)을 말합니다. 즉 피조물로서 죽을 운명에 있는 인간 존재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속해 살아가는 육체를 말합니다. 육체는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후패한다는 말은 사전적 용어로는 "썩어서 못쓰게 됨. 썩어 문드러짐. 또는 철저하게 부패하다. 파괴하다. 전적으로 썩다."라는 뜻입니다. "후패" 자신이 늙어 간다는 것을 느끼는 세대들만이 느낄 수 있는 "비애감"입니다. 건강하고 탄력있던 육체가, 촉촉하고 그렇게도 아름답던 육체가 쪼글쪼글해져 갑니다. 아무리 좋은 화장품을 사서 바르고 오이 맞사지를 하고 몸에 좋다는 보약을 먹어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지탱하는 기력이 썰물처럼 밀려 갈 때 낙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서히 죽음이 밀물처럼 다가옴을 느낄 때 이제 끝났구나 낙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힘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상실감으로부터 오는 낙심에서 해방되는 길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속사람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속사람입니다.
2) 바울은 속사람이 날로 새롭게 되는 것을 확신하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속사람은 새로운 피조물(고후5:17) 새사람(골3:10)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 종말론적으로 올 세대에 속한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새롭다는 것은 "갱신된다. 거듭난다."는 의미입니다. 겉 사람은 끊임없는 고난과 수고로 인하여 닳아 없어지고 쇠약해지지만 속 사람은 마치 씨앗이 썩어짐으로 그 속에서 새 싹이 터 나오는 것 같이 날마다 새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장되고 인격인 성숙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인격의 분량까지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3)우리는 겉사람의 상실감으로 낙심하지 말고 속사람의 새로워 짐으로 소망을 갖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쇠퇴를 보면 낙심할 수 밖에 없으나 우리 인생은 속사람 영혼이 있습니다. 속사람의 성숙을 보며 새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육신의 쇠퇴는 결코 속사람의 성숙을 막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쇠퇴하는 것을 보면 더욱 우리는 속사람이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80살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는 소망을 가지고 살다가 120세때에 자기 민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75세에 이민을 갔습니다. 갈렙은 85세에 약속의 땅을 차지 하기 위해 사령관이 되어 전투에 임했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노년에 새로운 가문을 이루어냈습니다. 건강잃었다고 재산 잃었다고 직장잃었다고 가까운 사람들 잃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상실은 우리의 겉사람에서 속사람으로 관심을 돌리라는 신호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속사람이 날로 날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겉사람의 상실은 오히려 속사람을 더욱 새롭게 하는 개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소유한 모든 것은 결국 다 상실하고 말 것들입니다. 한 가지도 가지고 갈 것이 없습니다. 진정한 가치는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인격의 분량에 이르도록 성숙되어야 합니다(엡 4:15;골 3:10). 아무리 아름답고 건간한 사람일지라도 '겉사람'은 죽어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제한된 육체입니다. 그러나 속사람 우리의 영혼은 영원토록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살 존재입니다. 상실이 결코 상실이 아닙니다.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의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2. 목표 달성의 장애물로 오는 낙심(17)
사람이 낙심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애를 썻는데 커다란 장애물이 앞에 놓여 목표를 이룰 수 없을 때입니다. 대학진학을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실패하여 낙심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그것뿐입니까? 연애를 하다 장애물을 만나 낙심한 사람들, 사업을 하다 장애물을 만나 낙심한 사람들, 신앙생활을 하다 장애물을 만나 낙심한 사람들 우리는 주변에서 종종 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이룰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나면 낙심해 버립니다. 상담학자 로렌스 J. 크렙은 장애물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 필요를 느끼게 되어 동기가 유발되면 그 일을 이루기 위해 기본적인 가정들을 만들을 목표를 향한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어느날 아버지가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보고 법관이 되어야하겠다고 생각한 학생은 법관이 되기 위해 법대를 목표해 놓고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다가 옵니다. 이 장애물의 그는 법주를 세가지로 말을 합니다. ①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말합니다. 처음부터 목표 자체를 잘못세우는데서 오는 장애물입니다. 장애물 때문에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사람은 죄책감(자기 능력에 맞지 않는 목표)이 생기고 낙심하게 됩니다. ②외부적인 환경입니다. 장애물이 부모님의 가난 때문에 공부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이때는 이학생은 부모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역시 낙심합니다. ③장애물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미리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겁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장애물 때문에 불안해 하고 결국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장애물이 온다하여도 낙심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1) 바울은 장애물로 다가온 환난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많은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그정도 주를 위해 수고했으면 나이들어 이제는 조금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늙어서도 로마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그는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로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고후 1:8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 1:8)" 고후 11:23-27절에는 바울이 당한 환난에 대하여 더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 이 정도의 환난, 이 정도의 장애물이면 낙심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고후 4장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8)"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도 주를 위해 일했는데 댓가가 이런 것입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저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주를 위해 고생했다면 늙어서는 조금은 편안히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얼마든지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2) 바울은 오히려 이런 고난을 경한 것,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래에 받을 영광에 비하면 그 환난은 오히려 가볍다는 것이다. 이것은 '잠시'와 '영원' 그리고 '경한 것'과 '능한 것'의 극명(克明)한 대조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현재의 환난은 가볍고 일시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왜 이런 환난을 낙심하지 않았습니까? 17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영광에 비해 현재의 환난은 가볍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3) 환난을 당하나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현재 받는 환난이 장차 누릴 영광의 원인이 된다고 행각했습니다. 주를 위해 환난을 당한 만큼 영광도 크다는 말입니다.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환난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고 그 환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영광이 달라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4) 우리는 장애물을 만날 때 그 장애물을 거침돌이 되어 낙심되는 것이 아니라 디딤돌로 삼고 영광스러운 일을 이루어내는 소망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장애물이라는 낙심에서 해방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장애물에 부딪쳐 넘어져 낙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애물은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급의 도구로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지극히 큰 영광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주신 기회로 생각하는 것입니다.파도를 타는 사람은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파도를 즐기는 것입니다. 환난은 영광스러운 축복에 참여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믿는 사람에게 주는 환난은 환난도 우리에게 준 은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더욱 뚜렷하게 바라봅니다. 환난을 당할 때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합니다. 환난을 당할 때 기도합니다. 환난을 당할 때 더욱 순결해 지고 강해지는 것입니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고 시련없이 훌륭한 작품이 만들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훌륭한 작품은 그만큼 더 많은 시련을 거친 결정체인 것입니다. 폭풍우는 참나무의 뿌리를 더욱 깊게 박히게 하고 쇠붙이는 달구지 않고는 좋은 연장을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웅은 전쟁 중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장애물없이 어떻게 아브라함이, 모세가, 야곱이, 요셉이, 욥이, 느헤미야가, 바울이이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영향력을 미치겠습니까? 그들은 장애물을 디딤돌로 삼고 더욱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장애물이 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그마한 장애물이 와도 낙심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장애물이 오면 하나님께 기도하여 더 큰 능력을 체험받고 더 많이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어떤 장애물일지라도 디딤돌로 삼고 일어나 장애물로부터 오는 낙심으로부터 해방되는 성도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장애물은 낙심의 도구가 아니라 더 큰 상급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3. 기대치에 못미치는 대가로 인해 오는 낙심(18)
사람들이 낙심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기대했는데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대가를 받을 때입니다. 열심히 일했는데 그 대가가 결국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나가야 한다면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밤새워 공부했는데 60점을 맞았습니다. 불철주야 기도하며 목회했는데 10년이 지나도 교회가 성장되지 않습니다. 밤잠 자지 못하며 회사를 일구었는데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먹을 것 먹지 못하고 입을 것 입지 못하고 자식들을 가르쳤는데 결국 자식들이 탈선하였습니다. 이럴 때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때 우리는 낙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으로부터 오는 낙심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성숙하고 우리의 인생이 행복해 집니다.
1) 사도 바울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 보이는 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열심히 목회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입니까? 자신이 개척한 고린도 교인들은 우상숭배를 합니다. 파당을 지어 싸웁니다. 은사를 잘못 사용합니다. 심지어는 근친 상간을 하는 성도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돌아 온 것은 무엇입니까? 아들이 있습니까? 집이 있습니까? 재산이 있습니까? 명예를 얻었습니까? 무수히 많은 제자들이 따랐습니까? 노년까지 집한채도 없이 감옥살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출세한 아들 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존경하며 따른 것도 아닙니다. 다들 바울이 어려움을 당하자 떠나 버렸습니다. 질병에 거려 있습니다. 세상에 나타난 결과를 보면 얼마나 낙심할 상황입니까? 사도행전 28장 30절을 보십시오. 셋방살이 목회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기대치로부터 오는 낙심에서 해방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성경 18절을 보십시오.
2) 사도 바울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안는 영원한 것에 기대를 걸고 살았습니다.
돌아 본다는 말은 '주목하다', '소망하다'의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궁극적으로 이세상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소망을 두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은 보이지 않은 영원한 세계였습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입니다.
3) 우리는 이 세상 기대치를 바라보며 낙심하지 말고 영원한 하늘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며 기대치에 못미치는 대가로 인해 오는 낙심으로부터 해방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살면 누구나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충족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식들 기르면 기른 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그것 대가 받으려고 하면 실망합니다. 대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해요. 결혼 해보십시오. 자기들 좋다고 합니다. 부모님 오는 것 꺼립니다. 짝사랑 하지 말아요. 김치 가지고 가면 아파트 경비실에 맡겨 놓고 가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서운생각 할 것없습니다. 실망할 것없어요. 인간 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안 그랬습니까? 부모님 얼마나 서운하게 했습니까? 그저 이 땅에서 수고하고 봉사한 것 다 누릴려고 하면 남는 것은 실망 밖에 없습니다. 개혁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것, 가난한 사람을 위해 구제하는 것, 어려운 사람을 위해 돌보는 것,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헌신하는 것, 늙으신 부모님 위해 희생하는 것 너무 대가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으로 끝내야합니다. 너무 대가를 받으려고 하면 낙심합니다. 오늘 성경 보십시오. 보이는 것 잠깐입니다. 이 땅 잠깐 살다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관심 갖는 것 잠깐입니다. 수시로 변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야 이 땅에 일어나는 일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세상 끝날 까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물을 주님이 닦아 주십니다. 이 땅에서 다 대가 받지 말고 닦아줄 눈물 가지고 가야합니다. 계7:17을 보세요.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7)" 계21:4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께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낙심 사단이 사용하기 가장 편리하고 가장 흔하고 가장 치명적으로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우리를 서서히 썩어가게 하는 도구입니다. 보이지 않게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싹을 잘라버리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소유의 상실에서 오는 낙심(16), 목표 달성의 장애물로 오는 낙심(17), 기대치에 못미치는 대가로 인해 오는 낙심(18)의 늪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겉사람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에 관심을 가지므로서 소유의 상실에서 오는 낙심으로부터 우리는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목표 달성의 장애물을 만날 때 그 장애물을 디딤돌로 삼아 환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을 기대할 때 장애물을 통해 오는 낙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대에 못미치는 대가에서 오는 낙심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 나라에 기대를 걸어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4장에서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가 비아냥 거리고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해도 주님께 받은 직분임으로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8절을 보십시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6절을 보십시오. 다시한 번 낙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라는 말을 보면 앞의 말을 받는 것같습니다. '그러므로'라는 표현은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앞에서 제시되었음을 암시합니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언약을 전하는 고귀한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1절).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리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14절)에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낙심하지 않고는 못살겠지만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속사람 바라보며,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상급 바라보며 낙심으로부터 해방되는 삶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절망은 없다
고후04장 16~18 / 엄기호목사
요즘 뉴스와 각종 언론에서는 경기회복에 대해 낙관적인 보도들을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상황은 여전히 부정적이고, 절망적입니다.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것들은 신바람 나는 이야기들 보다는 메마르고 거친 소식들뿐입니다. 현실은 보이는 것마다 절망이요, 들리는 소리마다 절망이요, 나타나는 현상들이 모두 절망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마음에는 절망이 가득하고, 우리의 생각 속에는 낙심이 가득합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그의 서신에서 여러 차례“낙심하지 아니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낙심이란 ”바라던 일을 이루지 못하여 맥이 빠지고 마음이 상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용기를 잃고 마음에 힘이 없어서 그 마음을 자기가 원하는 목표대로 지탱하지 못하고 그 마음이 곤경에 떨어져 버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바울은 많은 적대자들로부터의 비난과 환경적인 고난에 처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낙심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절망이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바울을 절망하지 않게 했을까요? 나아가 우리는 왜 절망할 수 없고 절망해서도 안 될까요?
우리가 받은 사명(직분)이 있기에 절망은 없다.
고린도후서 4장 1절에서 바울은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했습니다.
사도와 성도, 혹은 제직의 직분을 받고, 또한 교회의 각 기관 등에서 일을 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명(직분)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갈 1:1, 고전 4:1)
언제나 바울은 사명 곧 직분의 출처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에게는 절망이 없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 가운데 낙심될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 인간을 절망케 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에게 받고 배우고 얻은 것들 중에는 낙심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절의 말씀처럼 “인간의 유전은 망령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직분)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에 땅의 것들로 인하여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명(직분)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지원을 받습니다(고후 4:1). 즉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는 사랑, 그분의 뜨거운 사랑,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 주님의 위로의 사랑과 격려의 사랑, 그리고 약속과 보호의 사랑으로 사명을 받은 우리를 지원하여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라는 보배를 가졌으니 낙심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고후 4:7~8). 예수님의 십자가는 생명과 용서, 사랑과 부활, 영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으며, 그 믿음으로 행하고, 믿음으로 직분을 감당하는 자는 곧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이기에 낙심이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영의 직분(고후 3:8), 의의 직분(고후 3:9), 길이 있는 직분(고후 3:11)을 받은 성도는 그의 긍휼하심의 지원을 받기에 어떤 환경에서도 낙심해서도 안 되며 낙심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기에, 능력의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귀한 보배를 우리 안에 가지고 있기에 우리에게 절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할 때 절망은 없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고, 데살로니가후서 3장 13절에서는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모든 선행 그 자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것이요, 주님 자신의 것이기에 선을 행할 때 우리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곧 믿음의 증거입니다.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고 했습니다. 선행은 곧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에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그 나무의 좋고 나쁨은 열매로 안다고 말씀했습니다(마 7:16~20).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입니다. 따라서 환경이 어려워도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선을 베푸는 것, 주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은 장차 다가올 미래의 열매를 위한 것이기에 절망이 아니라 소망인 것입니다.
한편 선은 악을 이기는 비결입니다(롬 12:21).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선을 행할 때 우리 삶에 사단이 틈 탈 기회는 없어집니다.
선을 행할 때 절망은 없다. 왜냐하면 선은 아름답고 유익한 일이며(딛 2:8) 악을 이기는 길이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소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하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구제에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겉사람이 후패해도 속사람으로 인해 절망은 없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 이하에서 5장 7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바울은 겉사람 즉 육체는 약하여 썩어질 운명에 놓여있으며 곧 노쇠하여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겉사람은 후패하는 것, 가벼운 것, 보이는 것, 잠깐 동안의 것, 땅에 있는 것, 무너지고 말 것, 손으로 지은 것, 탄식하는 성질의 것, 짐 진 것같이 무거운 것, 죽을 성질의 것, 주와 따로 거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이 모든 겉사람의 것들은 다 절망할 성질의 것이요 믿을 수 없는 일이며 소망을 기대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속사람은 새로워지는 것, 새로운 피조물로서 지극히 큰 것, 영광스러운 것, 무거운 것, 보이지 않는 것, 영원한 것, 하늘에 있는 것,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성도에게만 있는 것, 성도만이 아는 것, 모든 성도가 간절히 사모하는 것, 덧입고 싶은 것, 성령의 보증으로 알 수 있고 가질 수 있고 즐길 수 있고 만족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겉사람은 후패하지만 날마다 새로워지는 속사람으로 인해 담대하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고후 4:8)고 고백하고, 전도자로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핍박을 받았으나 그는 결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의의 병기로 나타나 버린바 되지 않았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가정과 집안에서, 또는 교회와 사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소란, 배신 증오 속에서 마음에 번민이 생기고 찌르는 육체의 가시는 괴롭기 한이 없습니다(고후 12:7). 그래도 우리 안에 가진 보배인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오직 야웨를 앙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절망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절망이란 성도의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직분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절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끝없는 절망, 아픔과 고독, 얼룩진 고뇌들은 이 세상의 생리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고(요 16:33), 성도는 이미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 예수 통해 세상을 이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요일 5:4-5).
예수 그리스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의 절망에서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게 절망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그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긍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불어 선을 행함으로 장차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으며,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날마다 새로워지는 속사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우리의 소명을 기억하며,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축복,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토록 함께 하는 축복을 바라보며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삶을 누리는 성공자가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