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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지으신 집(1)
고후 4:16-5:10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설 교 >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사는가
고후04장 16~18절 / 민경설목사
그처럼 무성했던 초목이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깊은 가을의 계절에 우리는 한번쯤 우리의 생애에 대한 인생계절도 생각하게 됩니다. 한 원로 시인의 마지막 유작 시에서 "지금부터 오늘을 영원처럼 살자"라는 말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깨닫게 됩니다. [전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3:20-21]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성경에서는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적 영광이나 세상적 낙은 다 허무하며 헛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찬란하고 빛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약4:13-14]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그렇다고 기독교가 세상살이나 현재의 삶을 염세적이나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에 대한 눈을 뜨고, 현세적 삶을 영원에 목표를 두고 영원에 연결시킬 때 오늘의 삶이 의미가 있고 긍정적이고 영원히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단12:3]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이제 오늘 본문 속에서 하나님께 가장 은혜를 많이 받고 가장 큰 능력을 체험했으며 하나님의 사역을 가장 복되게 한 사람인 사도바울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본문에서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속사람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성경에서는 속사람이 '진정한 나'라고 합니다. 떡은 겉사람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있는 사람은 말씀이 필요합니다. 누구를 따라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사람을 위해서 설교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양식을 먹지 않고 살 방법은 없습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자라날 수 없습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3-4)
둘째, 우리는 참된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읜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하나님이 주신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주신 영광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요셉은 힘이 들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기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십자가,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통과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수치와 고난을 당했지만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세 번째, 우리는 보이지 않는 진리를 좇아야 합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지구는 돌며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이는 상대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절대적 진리가 있습니다. 이 진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절대적 진리는 영원하지만 상대적 진리는 잠깐입니다. 진리는 실체이며 근원입니다. 많은 사람이 옳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진리는 아닙니다. 또한 적은 사람들이 좇아도 진리인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진리를 쫓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할렐루야.
가장 행복한 사람
고후04장 16~18절 / 손상률목사
현대인들은 대부분 원인 모를 질병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암이나 고혈압, 당뇨, 심장질환 같은 것도 옛날보다 급증하였지만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인 불안도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환경이나 문화적인 조건들은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좋아졌지만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은 심리적인 공허함과 정신적인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현재의 삶에서 보람을 찾지 못한다고 할 때 그 마음속에 평안이나 행복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현재의 삶을 즐겁고 윤택하게 하는 비결을 일러줍니다.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되고 그리스도만이 천하인간에게 유일한 소망이 된다는 사실을 바르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19에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안하고 불확실한 세상을 살지만 소망이 있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1. 꿈이 있는 사람입니다.
1963년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목사는 워싱턴 DC에서 수많은 군중을 향하여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하고 유명한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1968년 4월, 40세의 젊은 나이로 괴한의 흉탄에 쓰러졌지만 혼신의 힘을 다하여 차별당하는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비폭력적 투쟁을 하면서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곤 하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비록 짧았지만 매우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꿈이 자기 한사람에게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더욱 많은 사람과 행복을 같이할 수 있습니다.
옛날 야곱의 아들 요셉은 어릴 때부터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의 꿈을 가족들 앞에서 자랑하곤 하였습니다(창 37:6-11). 그것 때문에 형제들의 미움을 받고 오랜기간 동안 엄청난 시련을 겪었지만 결국 그 꿈이 이루어져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 주인공이 되었습니다(창 50:20).
꿈을 가진 사람은 그 꿈을 가꾸면서 행복을 누립니다. 이제 막 결혼을 하고 새 가정을 꾸민 젊은 부부가 그들이 설계하는 장래의 희망을 안고 차곡차곡 살림을 늘려 나가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아이를 낳고 학교에 보내고 그들을 키우면서 장차 자식들을 통해서 이루어나갈 미래의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우선은 좀 가난하고 어렵더라도 생활비를 쪼개가며 저축을 하는 부부가 나이 많았을 때 따먹게 될 열매를 바라보며 행복한 마음을 가집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는 행복은 확실한 미래의 꿈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삶 자체가 꿈이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모세와 함께 애굽에서 올라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고달픈 광야 여행기간에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하신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장차 반드시 이루어질 가나안 시대를 꿈꾸면서 자기들은 행복자라고 믿었습니다(신 33:29).
사도 바울도 평생동안 세계선교라는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당시의 사회적인 불안과 열악한 교통과 문화와 어려운 환경이지만 그래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꿈을 안고 지중해를 중심한 세계의 모든 대륙을 휩쓸었습니다. 어떤 역경에서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에 찬 미래를 증거 하였습니다(롬 8:35-39).
2. 현세적 소망의 한계를 아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교훈가운데 ‘부자와 나사로 비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6:19-31에 보면 어느 곳에 홍포 입은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매일같이 연락을 하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 문간에는 나사로라는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개들과 함께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부자도 죽었고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동안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낙원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섞여 살고,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가 공존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런 상태로 계속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잠시 잠간 후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에다 희망을 걸고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이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불오나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0:6-8에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뿐이기 때문입니다(요1서 2:15-16).
그것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요한1서 2:17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세상적인 희망은 일시적이고 잠시잠깐 지나가는 것에 불가합니다.
일반적으로 행복의 조건이 된다고 보는 권력이나 재물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인기나 건강이나 아름다운 미모 같은 것도 다 한순간에 무너지거나 없어지고 맙니다. 시편 73:18-19에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 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세상에 있는 것에다 희망을 걸고 거기에 모든 것을 맡기려는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녹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녹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6:19-20).
행복은 행복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이나 육신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에서 행복의 가치를 찾겠다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3. 영원한 소망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5: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 천당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고 하였습니다(요 14:1-2).
흔히들 사람이 세상에 사는 생애(生涯)를 일생(一生)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고 보면 이생(二生)으로 볼 수도 있고 삼생(三生)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어머니 태중에 있는 동안을 일생으로 보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을 이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죽은 다음의 세계인 천당을 믿는 사람은 분명히 삼생으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일생과 이생은 극히 짧거나 제한된 시간이지만 세 번째의 삶이되는 천당의 경우는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기간이어서 가장 완전하고 희망적인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영생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7:3). 여기 “안다”고 하는 말은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옛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아갔지만 그는 하늘나라 영생을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16에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하늘나라 영원한 집을 사모하며 살았던 아브라함은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나그네 생활의 애환을 많이 겪었지만 한 번도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한일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후세를 살고 가는 모든 신앙의 인물들도 다 아브라함처럼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잠시 잠간 세상을 사는 동안 불편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영원하고 완전한 천당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모든 것을 인내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계시록 21:2에는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정한 것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결혼식 날을 앞둔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랑과 함께 예식장에 들어가는 생각을 하며 황홀해 하는 것처럼 하늘나라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비길 수 없이 더 큰 행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로 새로워져
고후04장 16~18절 / 이병일목사
한 해의 교회활동과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일들을 통해서 교회와 교우들의 삶을 나누면서 신앙적인 성장을 하였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더 잘,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만족과 아쉬움이 함께 찾아옵니다. 만족은 기억을 위하여 쓰고, 아쉬움은 내일의 꿈을 위하여 사용하면 되겠죠.
한 해의 교회활동과 교우들의 삶을 통째로 엿볼 수 있는 것이 “2007년 강남향린 10대 소식”을 통해서 돌아봅시다. ①어린이-여신도들의 난타공연, ②좌포교회와의 도농선교협혁, ③대추리 평화잔치, ④약동하는 남신도회, ⑤여름수련회, ⑥타교회와의 축구시합-무패행진, ⑦강북 5산 산행, ⑧살과의 전쟁 한 판, ⑨분가선교 한마당, ⑩뚜벅이의 독일유학과 꼼지락의 결혼
이 외에도 수많은 일들이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있었습니다. 한 없이 기뻐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글픔이 밀려올 때도 있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을 몇 시간 앞두고서 교우들 모두가 아픔은 털고 기쁨은 간직하면서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남에게 받은 상처뿐 아니라 내가 남에게 준 상처도 넘어서 해원상생의 시간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올해를 돌아보면서 하느님과 교우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어떤 행사를 할 때마다 거의 모든 교우들이 참여해서 만들어 가는 모습은 참으로 대단한 힘을 가진 교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올해는 분가 이후 어려웠던 교회의 형편이 조금 안정되어 가는 시기였습니다. 힘들다는 내색 없이 꿋꿋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묵묵히 함께 해주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36호의 기획 주제는 “민주적인 교회”입니다. 모두 11명의 교우들이 민주적인 교회를 만들기 위한 신앙고백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딴지를 걸기도 하고 공감을 표하기도 합니다. 패널들의 글을 몇 번이고 읽어보아도 구구절절이 적절함이 들어 있습니다.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를 위한 직분과 제도를 보완하고, 교우들의 주체적인 참여를 호소합니다. 공동체성의 끈끈함이 자칫 사교를 위한 집단처럼 자기만족적인 공동체로 빠질까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고, 그 자체로서의 끈끈함이 교회생활의 큰 의미를 준다고 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 다양한 목소리에도 함께 하는 열정과 애틋함이 들어 있습니다. 다름을 차별로 만들지 않는 사람들, 차이를 싸움으로 만들지 않는 사람들, 논쟁을 미움으로 몰아가지 않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민주적인 사람, 민주적인 교회의 구성원입니다. 바로 여러분입니다.
우리 교회를 이렇게 만드는 일은 단지 강남향린교회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교회를 위한 일이고, 예수님을 제대로 닮기 위한 일임을 역설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교회를 통해서 하고 있는 일들은 우리만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교회개혁을 위한 세미나나 토론회에 참여해서 토론자나 발제자들이 힘주어 강조하는 것을 가만히 듣다보면, 거의가 우리 교회에서는 자연스럽거나 일반화된 말들이 많습니다. 일반적인 교회에서 하고 싶지만 실현하기 힘든 일을 향린공동체에 속한 교회들이 먼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뿌듯함도 있지만 더 큰 책임이 따르기도 합니다.
또한 교회의 이러한 제도나 분위기는 겉모양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을 건전하게 살아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속사람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날로 새로워짐으로써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어 갑시다. 날이 지나고 달이 지나고 해가 지날수록 나의 마음,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서 몸으로 드러나게 합시다. 지금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네 삶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에 성장합니다. 우리네 삶은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의 문을 닫지 말고 항상 열어두도록 합시다. 고여 있지 마시길... 멈춰있지 마시길... 고민은 어떤 일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생기기보다는 일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데에서 더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 망설이기보다는 불완전한 채로 시작하는 것이 우리를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영혼의 나이테
고후 4장 16~18절 / 홍문수목사
언젠가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졸업 후 처음 만난 친구들 몇이 끼어 있었습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의 모습이 낯선 중년 신사의 모습들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름이 기억나는 대로 어렴풋이 남아 있는 옛 모습을 더듬어가며 서로 인사를 나눴습니다. 그 중 한 친구가 저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네가 000 니? 그런데 왜 이렇게 늙었냐?” 여러분, 제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어땠을까요? 당연히 나빴죠. 그래서 저도 되받아쳤습니다. “그러는 너는 왜 그렇게 늙었니?” 그리고는 서로 마주 보고 웃었습니다. “그래 그래, 세월이 많이 흘렀지. 우리가 졸업한 게 언제니? 그럴 만도 하지.” 세월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금년이 시작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한 달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 달 후면 또 한 해가 지나고 우리는 모두 나이를 한 살 씩 더 먹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이 먹는 것이 반가우면 아직 젊은 것이고, 나이 먹는 것이 반갑지 않으면 늙은 것이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아마 아주 젊은 청년이 아니라면 거의 대부분 나이 먹는 게 반갑지 않을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건대 우리는 모두 늙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늙어간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육신이 쇠약해지고 많은 것 을 상실해 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쾌한 일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점점 더 하나님께 가까워지고, 영원한 본향 천국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얼마 전 빌리 그래함 목사의 임종 준비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전도자로 온 세계인에게 칭송을 받는 그이지만 역시 노쇠하여 인생길을 얼마 남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현재 87세인데 전립선암과 뇌수종을 앓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날을 회고하며 말씀 묵상과 기도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생 가운데 지금이 가장 놀라운 시간이라고 고백합니다. 아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좋다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닥쳐와도 그것이 육신을 떠나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는 것이기에 두렵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늙어도 주님을 가까이 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내용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육신은 나이가 들수록 쇠약해지고 추해질지 모르나 우리 영혼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나이테는 거친 모습일지 모르나, 영혼의 나이테는 곱고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이 드는 것이 결코 불쾌한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나이 드는 것이 반가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또 한 해를 정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이 계절에 우리 각자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의 나이테는 얼마나 곱고 아름답게 새겨지고 있는가?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영혼이 더욱 풍성해지고 아름다워지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세월의 흐름과 겉사람의 후패
16절 말씀을 보면, “ ... 겉 사람은 후패하나 ... ” 그랬습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육체는 겉사람, 영혼은 속사람입니다. 육체는 태어나서 일정 기간 동안(약 25년 내외) 성장하지만, 그 후로는 노화됩니다. 아무리 건장한 사람이라도 20대 후반이 되면 자기도 모르게 노화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예민한 운동선수들의 경우를 보면 30세만 넘어도 벌써 은퇴 소리가 나오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이처럼 육체는 세월이 갈수록 쇠퇴합니다. 후패한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후패하다’는 ‘낡아지다’ ‘닳아서 해어지다’ ‘썩다’ 등의 뜻을 가집니다. 육체가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특히 중년을 넘어가면서 육체의 노화 현상이 확연하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문득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희어지고, 쉬이 피로를 느끼고 신체 기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직감하게 됩니다.
성경에도 보면 인간의 육체가 후패하는 모습이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 노화의 모습을 가장 리얼하게 묘사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전12:3~5입니다.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노화 현상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들입니다. 집을 지키는 자는 손ꡑ을 가리키는데, 늙으면 무기력해지고 손이 떨리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힘있는 자들은 다리ꡑ를 가리키는데, 늙으면 다리에 힘이 없어진다는 표현입니다. 맷돌질하는 자는ꡐ이ꡑ를 가리키는데, 이가 빠져서 씹기 어려워진다는 뜻입니다.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는ꡐ눈ꡑ을 가리키는데, 늙으면 눈이 어두워지는 것을 비유합니다. 길거리 문들은ꡐ귀ꡑ를 가리키는데 청각이 어두워지는 것을 의미하고, 맷돌 소리가 적어진다는 것은ꡐ이ꡑ가 없어서 음식물을 먹을 때 소리도 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새 소리에 잠을 깬다는 것은 잠을 깊이 자지 못해 일찍 깬다는 것입니다. 음악 하는 여자들은 ꡐ성대ꡑ를 가리키는데, 늙으면 소리도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노년이 되면 높은 곳, 길에 마음대로 거동하지 못함을 나타냅니다. 살구나무를 봉오리 때는 분홍빛이다가 만개해서 떨어질 때가 되면 흰색이 됩니다. 이것은 머리칼이 희어짐을 묘사합니다. 메뚜기도 짐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몸이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원욕이 그친다는 것은 식욕이 없어지고 매사에 의욕이 없어짐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육체가 후패하니까 자연히 외모나 건강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요즘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노화 방지를 위한 식품이나 약품, 화장품 등이 인기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늙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가는 세월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육체의 후패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좋습니다. 성경은 육체를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선물입니다. 건강관리 잘 하고 최대한 아름답게 관리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만을 전부로 알면 오히려 낙심하게 됩니다. 너무 육체의 후패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주목 대상이 아닙니다. 18절 보면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게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돌아보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스코페오’인데 목표(스코포스)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그래서 돌아본다는 것은 곧 주목하는 것,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날로 후패해가는 겉사람을 너무 신경 쓰며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2]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
인간의 가치는 영혼에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육체도 귀합니다. 기독교는 육체를 죄악시하거나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육체보다 영혼이 중요합니다. 삼상16:9 보면,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영혼을 더욱 중시하신다는 뜻입니다.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릇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물입니다. 똑같은 그릇이라도 내용물에 따라 달라집니다. 밥그릇, 국그릇, 반찬 그릇 등 ... 똑같은 상자라도 내용물에 따라 보물 상자도 되고, 쓰레기 상자도 됩니다. 그래서 영혼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육체는 후패하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
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도 우리가 잘 하기만 하면 영혼이 더욱 풍성해지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신실한 신앙인들은 한결같이 영혼에 큰
관심을 갖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갈4:19에서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자녀
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
노니 ... ” 그는 성도들의 영혼이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수 있도록 얼마나 기
도하며 수고하는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표현합니다. 베드로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벧전3:3~4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비록 우리 육체가 후패해져도 영혼이 이렇게 새로워지면 됩니다. 본문에서도 강조합니다. 17절~18절.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겉사람 육체가 쇠하는 것만 보면 낙심이 되지만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영원한 천국에 있음을 생각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3] 속사람을 가꾸는 사람이 받는 축복
속사람을 가꾸어감으로 날로 새로워지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① 영생의 기쁨 : 우리 영혼 가운데 예수를 모시고 있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데 영생은 장차 천국에 가서 사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를 모심으로 이미 우리 영혼에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돈 생기는 일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더 풍요로운 것입니다. 영생을 얻으면 이 세상에서도 환경을 초월해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평안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합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니다 하늘나라!”
② 천국의 소망 : 천국은 육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통해서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맑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영혼이 새로워질수록 천국은 가까이 명료하게 보입니다. 그것이 곧 천국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넘치면 이 세상에서 겪는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영광을 보면 그 엄청남이 세상의 고난을 가볍게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③ 육체의 건강과 아름다움 : 영혼이 새로워지면 그것이 육체에도 영향을 줍니다. 외모가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 말 얼굴은 본래 ‘얼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얼’은 영혼을 의미하고 ‘꼴’은 모양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얼굴은 영혼의 모양이란 뜻입니다. 우리 영혼이 강건하고 아름다워지면 외모도 좋아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기 좋게 늙을 수 있습니다.
어느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항상 밝은 표정입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나이를 알고 나면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10년 이상 젊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위에서 자꾸 묻습니다. “매력을 유지하는 비결이 뭡니까?” 그분은 겸연쩍어서 대답을 못하다가 하도 성화를 부리니까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쎄요. 저는 특별히 외모를 많이 가꾸지 않습니다. 영혼을 위해 살았습니다. 입술을 위해서는 진실을 말하고, 음성을 위해서는 찬양을 하고, 눈을 위해서는 긍휼을 품고, 손을 위해서는 자선을 베풀고, 얼굴을 위해서는 정직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흔히 자주 분노하는 사람은 인상이 험하게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찡그리면 안면 근육 72개가 움직이고, 미소를 지으면 안면근육 14개가 움직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웃으면 주름이 덜 생기고, 생겨도 곱게 생긴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연로해서 주름이 생긴 분들을 가만히 보면 어떤 분은 주름이 웃고 있고, 어떤 분은 주름이 화내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인상이 달라진 것입니다. 영혼에 평안과 기쁨이 있으면 분명히 얼굴이 좋아집니다.
건강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건강은 유전적인 요인이나 환경적인 요인이 있으므로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영혼의 상태가 육체의 건강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④ 부활의 소망 :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의 소망입니다. 영혼이 새로워지는 것도 좋지만 육신도 완전히 새로워지는 소망이 있습니다. 썩어지고 흙으로 돌아갈 육신이지만 반드시 부활할 때가 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바로 그때입니다. 빌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4] 속 사람을 가꾸는 방법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의 속사람 영혼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을까요?
① 마음의 문 통제 : 우리 마음 속에는 세상의 악한 것들이 밀고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의 문을 잘 통제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집에 있을 때 함부로 문을 열지 않습니다. 벨이 울리면 신원을 파악하고 유익한 사람만 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속에 좋은 것들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움, 질투, 의심, 교만, 불안 등 무익하고 악한 것들을 절대로 들여보내면 안 됩니다. 그럴 때 우리 속사람을 순결하게 보존할 수 있습니다.
② 죄악의 잡초 제거 : 마음의 문을 통제하는 것과 더불어 중요한 게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죄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밖에서 밀고 들어오는 악한 것들을 잘 막아도 우리 속에서 죄악의 잡초가 자꾸 돋아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갖고 사는 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농사하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오뉴월 같은 때는 정말 바쁘고 힘들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잡초를 뽑고 돌아서면 금세 돋아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계속 돋아나는 잡초를 제거하다보면 너무 힘들다는 겁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서 죄성의 잡초가 돋아나는 것을 계속 뽑아줘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속사람이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③ 기도와 말씀으로 성령 충만 : 마음에 악한 것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마음 속에서 죄가 솟아나는 것을 조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것입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란 말이 있듯이 신앙도 공격적인 게 좋습니다. 우리는 죄악을 막아냄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할 때 세상의 죄악이 감히 우리에게 엄습해오지 못합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꾸준히 교제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고, 거룩한 주의 형상이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각자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의 영혼의 모습은 어떠한가? 육체의 나이테는 세월이 가면 저절로 새겨집니다. 그러나 영혼의 나이테는 저절로 그려지는 게 아닙니다.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해도 그냥 한 살, 두 살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계속 경건의 연습(딤전3:7~8)을 해 나아갈 때 비로소 영혼의 나이를 먹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영혼은 육체와 달리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영혼의 나이테는 곱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 둘 새겨지게 됩니다. 부디 우리 영혼에 나이테가 곱게 새겨져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 자신도 풍성한 삶을 살다 천국에 들어가기를 축원합니다!
고난과 신앙생활
고후04장 17~18절 / 조용기목사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고난과 신앙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고난이나 고생을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고생하고 싶지 않아요. 고난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평안과 안락한 삶을 원합니다. 또 하나님도 할 수만 있으면 평안과 안락한 삶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다 아시다시피 원만한 인간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기를 때도 너무 오냐 오냐 하고 길러 놓으면 행실이 없는 고약한 자식들이 되고 말 때가 많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변화를 받아야 훌륭한 인격자로써 성장할 수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장성한 천국인이 되기 위해서는 고난은 필요 불가결 합니다. 어느 정도의 고난을 당해야 영적으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로써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우리 조상 아담 하와로부터 전해 받은 교만과 오만이 마음에 꽉 들어차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보통 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다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아담으로부터 받은 교만과 오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해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 자손들은 똑같은 유전을 받아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DNA가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나의 수단과 방법과 노력으로 살겠다는 그러한 습관이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허약과 무력과 절망적인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고난이 다가와서 그 허위의 가면을 벗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가면 만드는 것이 발달이 되어서 고무로써 얼굴을 잘 덮어씌우고 가발을 쓰면은 다른 사람이 되 버리고 맙니다. 제가 텔레비전에 보니까 남자 아들이 여자로 가면을 쓰고 어머니 찾아 왔는데 어머니가 몰라봐요. 내내 다른 사람인줄 알고 있다가 나중에 가면을 벗어 버리니까 어머니가 기절초풍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교만과 오만의 가면을 쓰고 있는데 이 가면을 무엇으로도 벗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와야 가면이 벗겨지고 자기의 진실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고난을 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시편 31편 23절에 야훼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것이 교만인 것입니다. 교만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에덴을 떠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교만이 마귀를 만들었고 마귀가 들어가면 영락없이 교만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만드는 원인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만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교만한가를 주님께서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난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이 드러난 이후에도 고난을 깨뜨리는 망치로써 고난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집과 자기중심과 자기 의지를 무엇으로 깨뜨립니까? 교육을 해서 깨뜨려지지 않습니다. 좋은 환경을 통해서 인간의 고집과 자기중심과 자기 의지가 깨어지지 않습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깨어지는 것입니다. 고난의 망치로써 때리고 몽둥이로 때리면 교만이 깨어지고 자기 중심이 깨어지고 자기를 의지하던 것이 깨어지고 두손들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고 주님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만큼 우리를 깨뜨리는 힘을 가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욥기 33장 16절로 17절에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고 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도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바로 고난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무너뜨리는 방망이가 되고 우리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라고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는데요. 한 사람이 C. S. 루이스에게 왜 인간에게 고난이 주어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잖아도 타락한 인간이 고난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교만하겠는가?" 그러면서 "인간은 어려운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는 습성이 있다. 고통은 귀머거리와 같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해주는 확성기와 같다." 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요번이 부산에 가서 성회를 했는데 저의 마음속에 감회가 깊었습니다. 17살 때 폐병 걸려서 고난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하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폐병 들려 죽게 되고 병원에 의사들이 살 가망이 없다는 선언을 내리고 난 다음부터 시작해서 나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구원을 생각하게 된 것이고 그럴 때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와서 믿음의 씨앗을 뿌리니까 마음에 완전히 믿음의 씨앗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제가 부산에 내려가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 때 폐병 걸리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목사가 되어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부산에 내려와서 대성회를 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감개무량한 것입니다. 고난은 그당시에 괴로우나 그것이 와서 교만을 깨뜨리고 눈에 꺼풀을 벗겨 주고 가면을 벗겨 주고 자기가 얼마나 허무하고 무의미하고 절망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 만들어 주는 안내자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2.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함
고린도후서 1장 8절로 10절에 "형제들아 우리가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나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바울선생과 그 일행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엄청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언도를 받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을 의지하지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지팡이 하나라도 의지할 수 있으면 그것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의지할 수 없으면 하나님께 나와서 손들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력함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고난인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와야 내가 얼마나 힘이 없고 무능력하고 내 힘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보통 때 자기 생명이 안개라고 생각합니까? 아니지요. 천년만년 살 것으로 생각하지요. 고난이 다가와서 건강을 잃고 의지하던 생활에 낭패를 당하게 되면은 인간이 허무맹랑하고 안개와 같은 것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고 두손 들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찾고 구하게 하고 기도하게 만드는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 받기 전에는 하나님 이름을 부르지도 아니하고 교회도 나오지 아니하고 기도는 절대로 안 하던 사람이 고난당하면 하나님을 찾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별도리 없이 고통스러우니까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그 길을 찾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34장 17절로 19절에 의인이 부르짖으매 야훼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야훼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 하시는 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야훼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니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환난에서 건져 주시고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셔서 부르짖을 때 통회하는 자를 구원해 주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고난이 아무리 많아도 회개하고 주님을 찾고 부르짖고 깨어지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손길은 지금도 나타나서 건져 주시고 도와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에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라고 말한 것입니다.
평소에 새벽기도 안 나온 사람도 고난당하면 새벽기도 하고 더 괴로우면 산기도 하고 철야기도 하고 금식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가 고난을 통해서 체험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동리 아이들에게 얻어맞고 울고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가 부엌에서 뛰어 나와서 치마로 눈물을 닦아 주시고 품에 품으시고 등허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얻어맞는 것보다 더 기분이 좋더라구요. 우리 어머니가 치마폭으로 나를 감싸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나를 쓰다듬어 주던 그 기억이 오늘날도 남아 있는 것은 내가 동리 애들에게 얻어맞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안 얻어 맞았으면 어머니가 그렇게 해주지 않아요. 얻어맞아 울고 오니까 그렇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고난을 당할 때 그렇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넘어지고 고통당하고 괴롭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절망해서 주님께 울고 나오면 주님의 위로가 하늘에서 성령으로 임하여서 마음을 푸근하게 하고 사랑을 느끼게 하고 큰 힘과 용기를 얻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해야 주님의 위로를 체험할 수 있게 되고 위로를 받아야 신앙에 깊이를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절로 5절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이 넘치면 위로도 넘친다는 것입니다. 환난이 넘치면 하나님의 위로도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해서 주님께 부르짖고 깨어져서 기도하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온다고 나올 때 하나님은 와서 우리를 품어 주시고 하나님은 그 옷자락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우리 등허리를 두들겨 주시고 어루만져 주셔서 위로하여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를 체험하게 하는 길은 고난 받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세상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함
그러나 고난이 또한 육체를 따라 세상의 노예가 되지 못하게 우리를 도와주는 큰 역할도 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은 악한 자에게 속하였으므로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악한 자의 손아귀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는 우리에게 와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잔뜩 넣어 주고 하나님을 생각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 근처에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원수 마귀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러한 마귀의 진을 물리치고 마귀가 친 그물을 잘라내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또한 고난인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서 사람은 살게 되어 있어요. 영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육체로 만드시고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른 영혼을 만들어 주었는데 영혼은 영원이 살든지 영원히 지옥가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세상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영혼의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만 생각하고 먹고, 입고, 마시고, 쾌락을 누리는 것만 생각하고 속에 있는 영혼이야 죽든, 살든, 무관심한 것입니다. 육체가 깨어지고 허물어지고 고난을 당해야 우리는 비로소 육체를 바라보던 눈을 돌이켜 우리 속에 있는 영원한 영혼을 바라보고 영혼을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들어오면 하늘나라는 멀어지고 하늘나라가 들어오면 세상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에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 세상 자랑은 육체를 꽉 들어 잡고서 절대로 영혼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영혼과 분리시키고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분리 시켜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쫓아내고 우리 영혼이 살아 일어나서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은 고난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우리가 육체를 떠나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매가 정신을 차리게 하지요. 정신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죄 있는 사람에게 고난의 매가 와서 때리면 세상이 허무한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어릴 때는 원족 가는 것을 좋아해서 원족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선생님이 원족 가는 날을 발표하면 점심 도시락 싸서 애들 다 함께 줄을 지어서 산으로 들로 바닷가로 원족을 가는 것입니다. 한 학생들이 선생님을 따라서 바닷가에 원족을 가서 그들이 너무나 기뻐해서 노래를 부르고 점심을 잘 나눠 먹고 자유시간이 되자 모래 가에서 땅 따먹기를 한 것입니다. 너 땅, 내 땅 그래서 가위, 바위, 보해서 땅을 따먹고, 땅을 따먹고 서로 밀고 당기고 하다가 나중에는 니 땅, 내 땅 싸움이 나서 그냥 밀고 당기고 단추가 떨어지고 옷고름이 떨어지고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갑자기 호루라기를 호루루루 부니까 싸움을 하다가 말고 전부 선생님을 보니까 "얘들아 돌아갈 시간이 있다. 다 모여라!" 다 모였습니다. 줄을 딱 세워서 "앞으로 갓! 하나 둘 하나 둘.." 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너 땅 내 땅은 다 사라지고 모래땅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것이 땅따먹기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영광을 얻기 위해서 밀치고 당기고 밀고 당기고 싸우고 할퀴고 하다가 주님께서 호루라기 한번 부시면 모든 것 다 버리고 이 땅을 등지고 떠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인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잠깐 후에 이 땅에서 떠나가서 주님 만나야 될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이 땅에 붙어서 이 땅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서 눈을 돌이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려고 고난을 보내어서 고난이 우리를 징계해 주는 것입니다. 고난의 매가 때리면 정신을 차려요.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정신이 빠져 있어요. 고난의 매가 들어오면 정신을 버쩍 차리고 그 때야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옛날에는 성경 창세기부터 계시록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내게 아무 가치가 없어요. 성경 갖다 놓아도 보지도 않아요. 그러나 고난당하여 괴로워지면 성경을 찾아서 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하와이에서 집회할 때 나를 집회 장소에 왔다 갔다 운전하던 부목사 한 사람이 차 안에서 내게 이야기를 합니다. " 목사님, 나는 정말 죽음의 문턱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학생 시절에 아편을 맞아 가지고서 아편 중독자가 되어서 대학을 졸업 맞고는 전문적으로 아편 장사를 했습니다. 하루는 길거리를 걸어가는데 목사님이 길거리에서 예수 믿고 천당 가자고 고함치기에 콧방귀을 끼었는데 전도지를 전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전도지를 받아서 포켓트에 구겨 넣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아편 장사를 했는데 하루는 내 스스로가 아편을 너무 많이 맞아서 정신이 아뜩하고 숨이 턱이 작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완전히 죽음의 공포가 꽉 들어찼습니다. 의지할 곳 없고 당장 죽게 되어서 이리이리 살펴 보니까 방구석에 내가 전도지를 내 던졌는데 그 전도지가 구겨져 있길래 그것을 가서 조금씩 치워서 읽어 보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주의 말씀에 기록되어서 "주님, 주님 내가 주를 믿겠사오니 나를 중독에서 살려 주시고 지금 심장이 멎을 것 같은데 살려 주십시오. 주님 나를 살려 주십시오 " 고함을 치니까 몸 속에 팡 하는 소리가 나더랍니다. 그래서 쳐다 보니까 마귀 세놈이 천장에 올라가서 딱 달라 붙더랍니다. 몸에서 마귀 세 놈이 터져 나가서 천당에 들어왔다가 새까만 눈으로 자기를 두리번 두리번 살피는데 도로 들어 오려고 만발의 자세를 취하고 있더랍니다. 노무나 고통스럽고 놀라워서.. 주님이시여 살려 주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고함 고함을 치니까 얼마 있지 않다가 휙 하고 마귀 세 마리가 떠나 가더랍니다. 그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편 중독에서 해방을 얻고 그는 세 사람이 되어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그 때로부터 회개하고 신학교 들어가서 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어 하와이에 복음 증거 하러 왔다가 그 교회 부목사가 되어서 일하고 있다는 말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말로 다할 수 없는데 자기가 당하는 고난이 아니었으면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지 아니했다는 그런 말을 들은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 보면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온전하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를 더 굳세게 만들어 주시고 강하게 만들어 주시고 터가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완전히 나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고난은 우리에게 큰 축복도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요. 고난이 없을 때는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을 따라서 마귀를 닮아 가다가 고난을 당해서 내 깝질이 벗겨지고 내가 깨어지고 변화 받으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닮게 함
조각가가 돌이나 나무를 찍어내어서 형상을 만드는 것처럼 고난이 끌이 우리를 찍어 내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9절로 10절에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어떻게 벗습니까? 고난이 다가와서 옛사람의 껍질을 벗겨내고 옛사람의 낡은 의복을 벗겨 내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신앙생활 하는 동안에 예수 보혈을 믿고 구원 받으면 성령이 오셔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변화시키고 고난이 와서 고난의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켜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살면서 고난을 안당하고 살면 참 좋겠지요. 그러나 고난이 와야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을 얻고 예수님의 믿음, 소망, 사랑을 얻고, 예수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우리가 마음속에 얻기 위해서는 고난을 통해야 예수님을 끌어 안고 예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끌어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 지낸바 되고 함께 부활한 신앙의 체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통을 우리고 같이 걸머지면 예수의 부활한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내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예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
그냥 하나님의 영광을 주면 좋겠는데 예수와 같이 고난을 받으면 예수와 같이 영광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 가는데 고난은 반드시 필요 불가결하게 통과 되야 될 과정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 나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포도나무인데 우리는 접붙인 가지입니다. 고난이 와서 우리를 세상에서 찍어 내어서 예수님에게 접붙여 주는 것입니다. 나무가 다 죽어가더라도 좋은 나무에 접붙이면 곧 생기가 나서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다 죽어가는 우리들을 고난이 와서 찍어 내어서 예수님에게 접붙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부르짖고 끌어안고 의지하게 만들어 주어서 예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들어오고 예수님의 거룩함이 들어오고, 예수님의 치료가 들어오고, 예수님의 축복이 들어오고, 예수님의 부활, 영생이 들어와서 우리가 예수께 접붙임을 받아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어 행복과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접붙여지지 않아요. 고난이 와서 우리를 세상에서 찍어 내어야 예수님께 접붙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약하고 병들고 힘없고 낭패와 실망을 당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이 주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접붙이기 위하여 여러분을 세상에서 잘라 내어서 예수님께 접붙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여러분을 받아들일 준비를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접붙일 때 보면 날카로운 칼로써 나무를 잘라 가지고서 접을 붙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여러분에게 접붙임을 받기 위해서 피를 흘리고 몸을 찢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통해서 깨어지고 주님께 나와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 들이고 끌어안으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고난을 통해서 회개하고 자복하면 날로 여러분 속사람이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속사람은 잠들게 되고 죽게 되지 않습니까? 고난이 오니까 자꾸 하나님을 찾게 되고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니까 속사람이 살아나고 새로워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게 많은 고난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 잘 믿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데 저런 고난이 다가 오느냐. 하나님은 더 새롭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채워주기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하고 회개하고 주님께 의지하게 만들려고 하니 고난의 채찍을 때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버려 놓으면 세상으로 나갑니다. 그냥 평안하고 배부르고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기도하는 것 그치고 성경 읽는 것 그치고 주님 찾는 것 그치고 세상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늘 고난이 있어야 회개하고 부르짖고 기도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고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다고 하는데 나는 그 은혜를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옛날에 종로에서 큰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6.25사변 난 이후로 서울이 불타고 아직 복구 안 되었을 때 종로 네거리에 불탄 자리가 많은데 거기에 천막을 치고 부흥회를 열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왔고 회개하고 병든 자들이 나아서 간증을 하고 뛰고 구르고 좋아하니까 목사님이 한 분 설교를 마쳤는데 나를 찾아 왔어요. 날보고 "목사님, 안수 좀 해주십시오."그래서 무슨 안수냐고 하니까 "나도 목사님처럼 폐병 걸리도록 안수 좀 해주십시오. 폐병은 걸려서 피를 토하되 죽지는 않도록 안수해 주십시오." "무슨 그런 망발된 소리를 합니까?" "목사님, 저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우리 아버지 어머님이 예수를 잘 믿어서 나는 아무 고생함이 없이 자라서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돈을 대어서 교회를 지어 주어서 목사가 되었는데 목사가 되고 난 다음에 이론만 알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도 모르고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한 적도 없고 마음이 뜨거워 진 것도 없고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도 안 나오고 눈물도 흘려 본적이 없고 나는 예수님의 은혜를 모릅니다. 그런데 목사님 가만히 보니까 폐병 걸려서 피를 토하고 죽게 되었으니까 하나님을 찾다가 불도 받고, 성령도 받고 병도 고침 받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체험도 얻게 되니 얼마나 설교가 힘이 있는지 몰라요. 나도 힘있는 설교가 되기 위해서 폐병 걸리게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 고난이 있어야 영광도 체험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배가 고파 봐야 밥이 좋은 줄 알고 추워 봐야 옷이 좋은지 알고, 고생을 해봐야 평안이 좋은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고난 안 당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병들어 봐야 신유를 체험하고 사업을 망해봐야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외로워 봐야 하나님의 위로를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항상 죽음에 넘기우면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위해서 병들고 예수 위해서 가난해지고 예수 위해서 고난당하는 것은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어두워져야 빛이 영광이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옷이 얼마나 좋은 것을 깨닫게 해주려면 추울 때 옷을 벗겨서 밖에 내보내야 옷이 얼마나 좋은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밥이 얼마나 좋은 것 알기를 원하면 여러분 굶어봐야 밥이 얼마나 좋은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애들이 어릴 때 우리가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를 하는데 사흘 되니까 우리 둘째 애가 하는 말이 엉엉 울면서 "밥 줘. 밥 줘." 그래서 "금식하는데 밥을 주냐?" 그러니까 "그러면 나 죽어서 밥 될래. 밥 될래." 배가 얼마나 고팠던지 죽어서 밥 되겠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밥이 귀한 줄 알아요. 저는 요사이도 밥을 먹으면 조그마한 밥풀도 다 주워 먹습니다. 그것 왜 그러느냐. 6.25때 하도 배가 고파 고생을 했기 때문에 지금 잘 먹고 잘 입어도 그 옛날에 체험한 것이 뼈 속에 사무쳐서 잊어지지 않아요. 언제나 밥상만 받으면 6.25가 생각나고 그 때 헐벗고 굶주리던 것이 생각나서 밥풀 하나도 너무나 아까워요. 그러나 6.25를 경험하지 않은 젊은이들은 한 숟가락도 그냥 내버려요. 밥을 그냥 흩어 놔요. 아깝게 생각하지 않아요. 배고픈 적이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 있어야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반드시 원수가 아닙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허락하셔서 여러분의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를 체험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18절 우리 다같이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인데 영원한 것을 우리가 어떻게 찾아가는 것입니까? 보이는 세상 것이 고난으로 말미암아 떨어져 나갈 때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 우리 눈에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은 고난은 우리에게 적은 신앙을 허락해 주는 것입니다. 큰 고난은 큰 신앙과 헌신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은혜 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적은 은혜 받기 위한 사람은 적은 고난 체험하고 큰 은혜 받기 위한 사람은 큰 고난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게 들어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고난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적은 그릇은 적은 고난을 큰 그릇은 큰 고난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그곳에 채워질 수 있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이 너무나 너무나 고난이 심하고 고통스러워서 고난을 면해 달라고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네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네가 약할 때 네가 강하여 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약해져야 의지하지요. 내가 강하면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습니다. 내가 약하니까 하나님께 의지하지요. 내가 강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약하니까 기도하지요. 내가 답답하면 기도하지 마음이 평안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가 슬프니까 기도하지 기쁘면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고난은 우리에게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되다는 것을 알고 고난당할 때 원망하고 탄식하고 불평하지 말고 기도하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주께 기도하라. 기도하면 반드시 주님께서는 고난의 반대 급부로써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보다 더 깊은 영광을 얻게 되고 신앙이 깊어지고 더 행복해지고 더 놀라운 영광을 얻게 되고 세상을 이기게 되고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특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론>
현세는 눈에 보이나 천국은 우리 안에 있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 유혹을 받고 끌려갑니다. 그러나 고난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허물어지고, 허무한 것을 깨닫게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을 주목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잠깐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원한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영혼은 영원하고 육체는 잠깐입니다. 7~80이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영원히 천국에 가든지 지옥에 가는 것은 여러분 눈에 안 보이는 속에 있는 영혼인 것입니다. 이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깊어지기 위해서는 깊이 기도해야 되고 깊이 믿어야 하고 깊이 헌신해야 되는데 이렇게 하는데 도와주는 것이 고난의 손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 기쁨 되기 원하네
고후 5장 9~10절, 엡5:10 / 김명혁목사
기쁨은 인생의 행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돈 보다도 건강보다도 명예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입니다. 기쁨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를 기쁨의 종교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쁨이라는 말이 수 없이 많이 나옵니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임이니라”(사62:4).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2).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항상 기뻐하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
오늘 아침 “나 기쁨 되기 원하네”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기쁨이 되는 것은 더욱 더 중요합니다. 내가 주님의 기쁨이 되고 내가 다른 사람들의 기쁨이 되고 내가 주님의 종들의 기쁨이 되는 것은 더욱 더 중요합니다. 복음 찬송가 중에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저는 2절의 가사를 다음과 같이 만들어서 부르기를 원합니다. “나 사람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사람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사람의 기쁨이 되는 것.” 저는 또한 3절을 다음과 같이 만들어 부르기를 원합니다. “나 종들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종들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종들의 기쁨이 되는 것.”
그것이 사도 바울의 삶의 목적이고 자세이고 소원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삶의 목적이고 자세이고 소원이기도 합니다. 저는 매일 새벽 이승일 김혜원 동혁이 수혁이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의 내용은 저들이 모두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들이 세 가지 종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의 기쁨이 되고 사람의 기쁨이 되고 종들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기뻐야 합니다. 내가 기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어제 아침 정토회에서 일하는 정안숙씨와 카메라맨 한 사람이 와서 저의 축하의 메시지를 녹화한 후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갔습니다. 그런데 정안숙씨가 계속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참으로 기쁘게 사시네요. 여기 오면 마음이 푸근하고 기뻐요. 참 좋아요” 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대로 주님 안에 있으면 기쁩니다. 다윗이 고백한대로 주님 앞에 있으면 기쁩니다. 십자가 앞에 있으면 기쁘고, 회개의 기도 앞에 있으면 기쁘고, 봉사와 전도의 사역 앞에 있으면 기쁩니다. 우리는 바자회를 하면서 모두 기뻐했습니다. 어제 오후에는 박정희 집사님, 김은희 집사님, 김영경 집사님, 김성수씨가 커피와 과자 등을 들고서 양재천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모두 얼굴과 마음에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양재천으로 가기 전에 제가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 기쁘고 주님의 사랑 안에 있으면 기쁘고 주님 섬김 안에 있으면 기쁩니다. 우리 철원이는 아픔과 고통 중에서도 기뻐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을 주고 받곤 했습니다. “철원아 네 마음이 슬프나 기쁘나?” “기뻐.” “왜 기쁜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니까 기쁘지!”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 기쁘고 주님의 사랑 안에 있으면 기쁩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를 보시고 헵시바와 쁄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기쁨과 사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세 가지 종류의 기쁨이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첫째,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자기 삶의 목적이고 자세이고 소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저 소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런 삶을 살기를 애쓰고 힘쓴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보라”(엡5:9). 그저 소원하고 힘쓰는데 그치지 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보고 심혈을 기울이며 시험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해서 죄송합니다. 암만해도 저는 왕자 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사실 사도 요한도 왕자 병에 걸렸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한평생의 삶에 부족하고 부끄럽고 죄 되고 허물 된 일이 너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도 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가지를 간단간단히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제가 열한 살 때 믿음으로 살기를 소원하는 단 한 가지 소원을 가지고 집과 고향을 떠나 38선을 혼자 뛰어 넘었을 때 아마 하나님께서 저를 보시고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제가 6.25 전쟁 중 중학생 때 대구에 가서 3년 동안 살았는데, 그때 조그만 한 칸 방에서 7명이 함께 살았는데, 새벽마다 몰래 방에서 나와서 대문을 조용히 열고 대구 제일교회를 향해 기도하러 달려 가는 저를 바라보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저는 한 평생 죄를 많이 지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때마다 회개의 기도를 하느라고 애를 썼습니다. 삼각산에 가서 관악산에 가서 주암산에 가서 회개의 기도를 하느라고 애를 썼습니다. 귀국 후에는 철원이 때문에도 삼각산에 가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느라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저의 회개의 기도가 너무 부족했지만 아마 하나님께서 저를 보시고 기뻐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제사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저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북한과 중국과 아프리카와 방글라데시와 아프가니스탄 등지의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게 조그만 사랑의 손길을 펴느라고 여러분들의 사랑의 헌금을 가지고 이곳 저곳으로 왔다 갔다 하는데 아마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는 저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저는 저의 남은 삶과 저의 몸과 저의 생명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릴 수 있기를 소원하고 있는데 그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소원을 이루어주실지 모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고 하나님께서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람들의 기쁨이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과 사람들의 기쁨이 되는 것이 별개의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기쁘게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됩니다. 물론 순서는 있습니다. 먼저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리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을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롬15:1,2). 사도 바울은 또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자기의 삶의 목적이고 소원이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도 자기처럼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삶의 목적과 소원으로 삼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우리가 이웃에게 관심과 위로와 격려와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이 이웃을 기쁘게 하는 길입니다. 중국 고아 학생들을 돕고 있는 이영숙 회장이 최근에 저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언제나 사랑의 빛으로 밝혀 주시고 모든 눈물과 상처를 씻어 주시는 한량없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탕자처럼 방황하던 우리들에게 거룩한 목사님의 영원한 사랑을 주었구요! 외롭고 쓸쓸한 우리들이 목사님을 의지한 그날, 그 시각부터 쓰리고 이 아픈 상처를 치료하여 주셨고 고통과 서러움을 당한 우리들을 위로하여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민족의 훌륭한 인재로 배양될 어린 고아들은 어버이 목사님께 의지하고 기대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버이 사랑의 손길을 손꼽아 기다리던 80여명 애들은 사랑의 후원금을 받아 쥐고 감사의 기쁨과 행복의 눈물을 진정 삼켰습니다. 동아려 학생은 학교중단 위기에 처해 있다가 어버이가 보낸 6천원의 학비를 받아 쥐고 안도의 숨을 내 쉬고 목사님! 아버님! 감사 드린다고 몇번이구 웨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사님이 아니면 그 고아 애들이 어찌 학교 문전에 다 달을 수가 있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목사님의 따뜻한 사랑은 그들이 활기를 띄고 무럭무럭 성장하게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여러분들의 심부름을 했을 뿐이고 사랑의 손길을 편 것은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관심과 위로와 격려와 사랑의 손길을 폈을 때 여러분들은 수 많은 고아 학생들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상당수의 학생들은 교회에 나가면서 믿음의 생활을 하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저는 선교지를 여행하면서 그곳 현지인들과 그리고 그곳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과 저들의 자녀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기쁨이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10여년 동안에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설교나 강의나 훈계가 반드시 저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도움과 힘과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그저 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고 때로는 함께 놀아주는 것이 저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도움과 힘과 기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2년 전 브라질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강성철 선교사와 몇몇 제자들을 반갑게 만났습니다. 그때 최광혁군도 반갑게 만났습니다. 이틀 동안 밤마다 강성철 선교사와 총신 제자 한 사람과 젊은 선교사 한 사람과 함께 볼링을 친 일이 있습니다. 아주 재미가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모두 이겼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지도 못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강성철 선교사를 통해서 며칠 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젊은 선교사가 많은 스트레스와 좌절을 경험하고 있었는데 저하고 이틀 동안 볼링을 치고 나서 위로와 격려와 힘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스승 되는 사람이 자기와 열심히 놀아준 것이 그에게 많은 위로와 격려와 힘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선교에 임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5년 전에 불라디보스톡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거기 모인 20여명 선교사 자녀들과 서너 시간동안 열심히 논 일이 있었습니다. 게임도 하고 제가 시장에 가서 사온 선물도 나누어주고 농구도 같이 하고 그네도 같이 타고 씨이소도 같이 타며 신나게 놀았습니다. 제가 어린이들과 몇 시간 동안 신나게 노는 것을 보고 선교사들이 모두들 놀라는 기색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저를 너무 좋아했고 모두 너무 기뻐했습니다. 유치부 나이 정도의 어린 아이 하나는 제가 떠날 때 공항에서 예쁜 상자 선물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네를 함께 탄 어린 아이였습니다. 그 상자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정예찬 2000.6.10” 내일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데 예찬이와 다른 어린이들을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래서 스티커를 20개 가지고 갑니다. 하루 오후에는 선교사 사모들 대 여섯 명을 데리고 바다 가에 가서 놀다가 왔습니다. 맛있는 바다 가제도 사 주었습니다.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가 스승이 되는 제가 그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가서 함께 놀아준 것이 그들에게 많은 위로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과 마음만 있으면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고아 학생들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구룡 마을 이웃들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노숙자들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구역 식구들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새 신자들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사는 것이 사도 바울의 삶의 자세와 목적과 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보고 자기처럼 그렇게 살라고 분부했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셋째, 주님의 종들의 기쁨이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직설적으로 자기를 기쁘게 하라고 분부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는 그렇게 하라고 격려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4). 그리고 자기를 기쁘게 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라”(빌4:10). 그래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가리켜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요 사랑” 이라고 불렀습니다. 루디아가 사도 바울에게 기쁨이었고 에바브로디도가 사도 바울에게 기쁨이었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한 오네시보로를 위해서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오네시보로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딤후1:16). 여기 유쾌케 했다는 말은 기분 좋게 했고 기쁘게 했다는 말입니다. 알렉산더는 자기에게 해를 많이 끼쳤지만 오네시보로는 자기를 유쾌하게 하고 기쁘게 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의 종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제가 한경직 목사님을 이따금씩 찾아 뵙곤 했습니다. 97세 생신 날에 한 목사님을 찾아 뵈온 일이 있었습니다. 저를 보시고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을 항상 곁에서 돌보시고 계시던 백운경 장로님이 저를 보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한 목사님이 김 목사님 오시면 제일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부족한 사람이 한 목사님의 기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남한 산성을 떠난 우리는 박종렬 목사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박 목사님도 저를 보고 너무 좋아하시면서 몸이 불편하셨지만 말씀을 하시고 또 하시고 또 하셨습니다. 옆에 계시던 사모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목사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아무 말씀도 못하셨는데 김 목사님이 오시니까 이렇게 말씀을 잘 하시네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주님의 종들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이고 축복입니다. 그 길로 정진경 목사님을 찾아 뵈었는데 정 목사님도 마찬가지로 너무 좋아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박윤선 목사님에게도 교수님들 중에서 아마 제가 제일 큰 기쁨이 되었었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황송한 일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이중표 목사님에게도 제가 기쁨이 되었었다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전화를 걸면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어떤 때는 토요일에 전화를 걸고 설교 준비하는 시간에 전화를 걸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 아니라고 말하면서 제가 전화를 했기 때문에 설교준비가 더 잘 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이 성탄절에 저에게 이런 글을 써서 보낸 일도 있습니다. “성탄절이 오면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나는 성탄절이 오기 전 머리 속에는 김명혁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김 목사님을 좋아하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즐거움입니다. 오늘도 하늘 아래 가까운 곳에 김 목사님이 있다는 마음으로 하루가 잘도 지나갑니다. 지난 해와 같이 서로 기뻐하면서 또 새해를 살아갑시다.” 서로 기뻐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서로에게 기쁨이 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특별히 주님의 종들에게 기쁨이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새벽을 깨우는 새벽 성도들은 모두 저의 기쁨입니다. 신앙이 자라고 삶이 변화되는 새 신자들은 모두 저의 기쁨입니다. 전도와 봉사에 힘을 쓰는 성도들은 모두 저의 기쁨입니다. 말없이 조용히 선교에 힘껏 참여하고 있는 성도들은 모두 저의 기쁨입니다. 가슴을 열고 눈물로 은혜를 받으며 기뻐하는 성도들은 모두 저의 기쁨입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주님의 종들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섭섭함이 되는 대신 모두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근심거리가 되는 대신 모두 즐거움과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그것이 여러분들과 여러분들 자손에게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나 기쁨 되기 원하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귀하고 가장 보배로운 것은 기쁨입니다. 가슴과 얼굴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가슴과 얼굴에 기쁨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서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 있으면서 기쁨을 누리시고, 회개의 기도 앞에 있으면서 기쁨을 누리시고, 봉사와 전도의 사역 앞에 있으면서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시고, 사람들의 기쁨이 되시고, 그리고 주님의 종들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시고 기쁨을 베푸시는 기쁨의 사람들 행복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봉사의 기쁨
고후05장 8~10절 / 김태복목사
금년에도 많은 교육 행사를 치르면서 많은 봉사자들의 수고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 목이 쉬어 가며 가르치는 교사들, 앞장서서 구진 일을 마다 않고 수고하는 각 기관의 임원들, 뒤에서 온통 땀으로 목욕을 하면서 식사 봉사하는 여성도들의 숨은 노고들, 많은 짐들을 싣고 그 먼 거리를 오가며 수고하는 차량 봉사자들에 의해서 교육 행사가 은혜 가운데 치러지고 귀한 인재가 양육되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뒤에서 음으로 양으로 물질로 돕는 손길들, 또는 아침저녁으로 전력을 다해 기도하는 기도 봉사자들이 있기에 금년에도 은혜 중에 마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사와 찬양대원들, 구역과 각 기관 임원들, 주차관리위원들과 식당봉사자들, 아울러 제3남선교회원들의 식당봉사, 전도대원들과 양육부원들, 상조위원들과 청소를 돕는 봉사자들, 그리고 이웃사랑회원들과 앞장서서 기도하는 분들, 헌금하는 분들이 있기에 성장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한 마디로 봉사요, 섬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청지기란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인데 이는 ‘관리자, 지키는 자’란 뜻입니다. 우리의 가진 것은 우리의 것이 하나도 없고 전부 하나님이 우리 생전에 관리하라고 맡기신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살다가 갈 때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가는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 몸뚱이도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만찬회에 연사로 초대된 분이 너무 서둘러 가다 보니 ‘틀이’를 빼놓고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음식을 먹으려니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 사정을 말했더니 그 사람이 “염려할 것 없습니다.”라고 하더니 주머니에서 ‘틀이’를 하나 꺼내 주었습니다. 끼워 보니 너무나 헐거워서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것을 꺼내 줍니다. 이번에는 너무나 작아서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것을 주었는데 꼭 맞아서 음식도 잘 먹고 만찬 후에는 연설도 잘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끝 난 후에 너무나 감사해서 인사하기를 “어디에 계시는 치과의사입니까? 저는 줄곧 선생님 같은 훌륭한 치과의사를 찾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자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저는 치과의사가 아닙니다. 어느 치과의사가 그렇게 많은 ‘틀이’를 가지고 다닙니까? 저는 장의사 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이 빌려서 사용한 ‘틀이’는 죽은 사람들에게서 빼낸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 즉 생명과 시간, 재산과 재능, 가족과 직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시로 잘 관리하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생전 동안 이것들을 잘 관리하면서 봉사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데 우리가 봉사할 곳은 세 군데입니다. 첫째는 가정이요, 둘째는 교회요, 셋째는 직장과 사회입니다. 어느 분은 우리 기독교인이 봉사할 곳은 교회 만이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가정도 일터로 주시고 직장도 일터로 주신 것입니다. 너무 가정에만 매여서 교회를 위해 아무 것도 봉사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한다는 핑계로 남편이나 자녀, 부모를 소홀히 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또한 내 가정과 교회만 알고 내 이웃, 내 사회를 위해 아무 봉사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많은 난관에 봉착해 있습니다. 교회마다 교인 수가 감소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생활수준이 점점 높아지니까, 아쉬운 것이 없어지고 오히려 주일날을 자가용을 몰고 야외로 나가기에 바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일반 사회가 교회를 보는 시각이 점점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 아프가니스탄 무장단체에 의해 억류된 21명의 귀한 젊은이들과 순교한 두 분으로 인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지만, 비기독교들 중에는 너무나 가혹할 정도로 그들을 혹평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그들 중에는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고 ‘목사’를 ‘먹사’로 공공연히 부르기도 합니다. 어쩌다가 기독교가 이런 나쁜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기는 오히려 악취를 풍기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광성교회 같은 대형교회들의 싸움질과 목회자 세습 행태, 우리 교인들의 큰 자랑거리였던 이랜드가 온 국민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이미 도덕적으로 이미 먹칠을 당한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가 지난주일 설교시간에 “남북정상회담을 하지 못하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두 정상이 회담을 하면서 ‘자 우리 이제부터 고려연방제로 통일합시다.’ 하고 선포해 버리면 대통령 선거도 못할 뿐 아니라, 이 땅이 적화되면서 많은 교회들이 다 파괴될 것이고, 천만 명이나 되는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다 살육을 당할 것이다”고 터무니없는 주장함으로 온 매스컴으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지도자가 판을 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서 누가 호감이 가겠습니까? 또한 많은 교회들이 자기 교회를 비대하는 데만 집중할 뿐 사회봉사에 너무 외면하고 있습니다. 더 나가서는 사회를 무조건 마귀의 세상으로만 정죄한 것이 사회로부터 비판 받게 된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는 한국 교인들 각자가 가정과 교회, 직장에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살도록 힘쓸 뿐 아니라. 한국교회는 사회를 향해 무엇인가 선한 봉사를 과감히 시작해야 할 전환점에 와 있습니다.
1. 그러면 가정과 교회, 사회를 향한 진정한 봉사 자세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봉사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많은 열매를 맺는 봉사가 됩니까? 세 가지로 말씀 드립니다.
(1)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맡기는 일을 주로 하는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맡겨 주시는 것을 잘 관리하고 그것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몸을 주셨습니다. 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몸”이라고 하였으니 이 몸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8-9절에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몸을 내 육신의 욕망과 식욕, 정욕과 오락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그것은 악하고 게으른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본문 9절의 말씀대로 선악 간에 반드시 심판 받는 날을 만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몸을 하나님 것으로 구별하여 드릴 때 그 몸은 거룩한 몸으로 인정받아 거룩한 산 제물로 받으시지만, 똑같은 봉사라도 자기의 자랑, 자기의 과시,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한다면 하나님이 기뻐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간호사의 성녀(聖女)라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병원의 마루를 닦고 있었습니다. 전쟁 중이어서 병실은 몹시 더러웠습니다. 모두가 지쳐 있는 시간에 혼자 마루를 닦는 나이팅게일을 보고 의사 한 사람이 딱해서 말하기를 “시간이 있으면 쉬어야 하오.”라고 하자 그녀는 대답하기를 “이 손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내가 대신하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진정한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또한 내게 주어진 물질로 봉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흔히 재물이나 돈을 무슨 죄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똑같은 10만 원 짜리 수표라도 도박과 음란을 위해서 써진다면 더러운 것이지만, 그 수표를 하나님과 불우한 사람을 위해 쓴다면 거룩한 제물이 됩니다. 우리는 어느 때, 재벌들이 모두 나쁜 자들처럼 판단할 때가 있는데 그것도 잘못입니다.
어느 사람이 성실하게 땀 흘려 재벌이 되고 그 돈을 하나님이 맡긴 것으로 알고 바르게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업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또한 몸이 건강한 데도 불구하고 땀 흘리지 않고 빈둥거리면서 놀고먹음으로 가난하게 산다면 하나님이 볼 때는 악하고 게으른 청지기로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가 가진 몸, 재물, 재능, 직책들을 하나님이 맡긴 것으로 믿고 그것을 잘 선용하여 봉사하는 자들이 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청지기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봉사는 섬기는 자세로 해야 합니다.
청지기는 종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종의 자세는 언제나 섬기는 태도가 필요하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은 종으로서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눅 17:7-9절에 보면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주인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시중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한 대로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종의 자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저 주인이 수고했다고 칭찬하든지, 기껏 일하고 지치어 돌아온 사람에게 ‘왜 이렇게 꾸물대는가? 빨리 음식을 만들어 나로 먹게 하라.’고 매정한 말을 하든지 섬김의 자세를 잊지 않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진정한 종의 모습을 예수님이 먼저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마20:28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많은 성도들이 봉사할 때 주장하는 자세로 하기 일 수이고, 조금 일하고는 그것을 과시하거나 자기를 높이는 자세를 나타내므로 시험에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교회에서는 높은 자리가 없습니다. 중직일수록 더 많이 섬기라고 ‘종’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무슨 중직이 되려는 이유가 높은 자리에 앉아서 섬김을 받으려는 욕심이 많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래서 쩍하면 ‘당회장을 무시한다.’ ‘장로를 무시한다.’ ‘내가 권사인데’라는 말이 교회마다 판을 칩니다. 아니 됩니다. 교회에서 중직의 자리에 있을수록 더 섬김의 낮은 자리에 앉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의 됨됨이는 어느 만큼 낮은 섬김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가로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언제도 말씀 드린 예화입니다. 과거 흑인들이 백인들로부터 무서운 핍박을 받던 시대에 이야기입니다. 흑인 교회인 시온교회에서 수난일에 발을 서로 씻겨 주는 세족식을 거행하면서 목사님이 광고하기를 누구든지 자기가 가장 고마워하는 자의 발을 씻기어 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세족식에 존경을 받는 백인이 대법관원장의 물망에 오른 올리버 판사가 나타나서 자기는 이 교회에 다니는 흑인 여자인 마르다 포트윈의 발을 씻기어 주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간증하기를 “마르다는 내 집 종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 내 아들 딸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으며, 내 자식들의 발을 씻어 주는 모습을 나는 수백 번 보았습니다. 정말 고마운 여인입니다.”라고 하더니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발을 씻겨 주었을 뿐 아니라, 그 검고 더러운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백인들이 화가 나서 판사직에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나 그를 기뻐하셨겠습니까?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교회 중직들부터 온 교인들이 이런 섬기기 위해 겸손의 자리에 앉으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봉사의 방법은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많은 봉사자들이 선을 행하다가 쉽게 피곤해지는 이유는 자기가 하는 봉사에 대한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일이 잘될까?’ ‘내가 하는 일이 실수가 없을까?’ ‘남들이 이러한 봉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피곤해지는 이유는 일의 과로도 있으나 무엇보다도 교회가 빨리 성장하지 않는다는 안타까움입니다.
교인의 모이는 숫자가 별로 증가하지 않을 때 심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구역장들이나 교사들도 자기가 맡은 파트가 열매가 많지 않을 때에 대단히 피곤함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봉사자는 모든 결과는 다 주께 온전히 맡기고 하나님 중심으로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교회를 운영하시도록 해 드리고 우리는 오직 그 분의 종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주님이 친히 모든 것을 맡으셔서 역사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한나 W. 스미스라는 분은 말하기를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성공적인 인물들은 그들의 일에 대해서 공연히 근심이나 걱정은 조금도 느끼지 아니하고 그것을 주님께 의탁하면서 순간순간 모든 것을 주님께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하여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았던 분들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봉사에 대한 근심과 두려움 대신 봉사하기 전에 충분히 기도를 통해서 능력을 받을 뿐 아니라 봉사한 다음에는 기도로 전적으로 맡기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루의 많은 사업을 하기 전에 새벽을 하나님을 향해 여셨고 모든 수고를 마치신 후에 한적한 산에 가셔서 기도로 하루를 닫으셨습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하루에 두 시간이나 세 시간씩 기도를 하면서 고백하기를 “일이 바쁘면 기도를 더 많이 해야 승리하지,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승리한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봉사를 하기를 원하신다면 기도하십시요. 봉사할 능력을 주십니다. 봉사한 후에 기도로 맡기세요.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봉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자기중심으로 힘을 다해 봉사하는 자에게 두 가지 축복을 주십니다.
(1)봉사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기쁨을 주십니다.
마 25:14-30절에는 달란트 비유가 나오는 데 달란트를 남긴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시 126;5-6절에서 보면 “눈물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봉사할 때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힘에 겨웠으나 나중에는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이야기에서 강도를 만나 다 죽어가는 사람을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던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은 살려 달라는 애원을 외면하고 지나갔지만 오히려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 응급치료를 하고 나귀에 싣고 와서 끝까지 치료해 주었습니다. 아마, 장사하는 입장에서는 엄청난 시간과 돈의 손해를 보았을 것이나 그에게는 남이 알지 못하는 큰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피해 갔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예배드릴 때나 기도할 때마다 그 장면이 떠올라 깊은 죄의식에 싸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봉사를 피해 배 밑창에 숨어 있을 때는 죄의식의 잠으로 시달렸으나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로 결단할 때 고래 뱃속에서도 감사가 흘러넘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것을 가지고 희생하면서 봉사하는 자에게 하늘의 기쁨을 소유하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기회가 주어지는 봉사를 피하는 자에게는 기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미국 심리학회인 APA에서 여성의 심한 우울증인 디프레션을 3년 동안 조사해 보았더니 미국 여성의 약 700만이 이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여인들 중에 연간 3만 명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 중에 대부분이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고 시간의 여유가 많은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병을 고치는 비결은 자원 봉사라는 단순한 치료법입니다.
심지어는 노인들도 은퇴 후에 자원 봉사를 많이 하는 노인일수록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그러한 기쁨이 있을 때 혈액, 피부와 기타 기관에 활력을 준다는 것이요, 반대로 아무 봉사도 하지 않은 채 집안에 박혀 있으면 정신 상태가 축 늘어지고 근심과 슬픔, 미움과 오기, 질투와 경쟁, 무의미와 허탈 속에 빠지면서 육과 정신의 질환이 깊어 간다는 것입니다.
(2)봉사하는 자에게는 더 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는 날이 온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마20:26-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주는 자가 받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두개의 거대한 호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호수로 맑은 물이 가득 차서 이스라엘의 모든 식수와 농업용수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많은 고기가 서식하여 많은 어부들이 갈릴리 호수를 기반으로 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호수는 사해로 완전히 죽은 물이어서 산고기를 넣어도 5분도 못되어 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갈릴리 호수는 헬몬산에서 물을 받았다가 아래로 자꾸 흘러 보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해는 요단강에서 받기만 하지 주지 않기 때문에 고여서 죽은 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주는 자에게 더 큰 지혜를 주시고 물질을 주는 자에게 더 큰 물질을, 사랑을 주는 자에게 더 큰 사랑을 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움켜 주고 주지 않는 자에게는 결국 가지고 있는 것이 사해처럼 죽은 것으로 만드십니다. 여러분이여, 손을 펴고 주어 보십시오. 주는 대로 하나님은 은혜로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체험할 것입니다. 외국의 어느 갤럽 조사기관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교회를 위해 열심히 헌신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 비교해 보았더니 네 가지 면에서 다른 점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1)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행복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 중 60%가 행복하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2)헌신자들의 가정생활이 견고하여 이혼율이 월등히 낮다는 점입니다.
(3)헌신자들은 다른 인종이나 다른 종교를 가진 이웃과 살 때에도 훨씬 관용과 이해도가 높다는 점입니다.
(4)헌신자들은 지역 봉사에 있어서도 훨씬 많은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고 있는 데 그들 중에 45%가 가난한 자, 집 없는 자, 노인과 심신장애자들을 돕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서울 어느 교회에 차량 안내를 담당하는 어느 집사님의 간증을 읽어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간암 말기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판정을 받고 그분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병원에 있어도 어차피 죽어야 하는 것이라면 최후까지 교회를 위해 봉사하다가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차량 안내 봉사를 자원했습니다. 그의 배속에는 점차 복수가 차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배가 임신 9개월 된 임신부와 같이 크게 부풀어 올랐습니다.
움직이기도 힘들고 배가 너무 나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예배 때마다 차량 안내를 위해 그가 맡은 자리에 꼭 나가서 안내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속으로 염려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교인들이 저 모습을 보고 불평을 함으로 시험에 들면 어떻게 하나?” 그러나 다행히도 그 교회 교인들은 어느 누구 하나 그 문제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날부터 그 집사님의 배가 작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충성 봉사한 결과 하나님이 기적가운데 간암을 치료해주심으로 지금도 그분은 그 교회에서 아름다운 헌신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주는 자가 받고 심는 자가 거두게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후반기에는 가정과 교회, 사회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으로 받은 것 중에 몸이나 재능이나 물질이나 직책으로 섬기는 자세로 무엇인가 봉사해 보십시오. 그 때에 하나님이 더 큰 기쁨과 더 큰 능력, 더 큰 물질과 더 큰 사랑을 채워 주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
고후 5:8~10 / 김광일목사
덴마크 역사에 위대한 인물로 알려진 그룬트비(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덴마크의 비극적인 역사를 가슴 아파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을 향해 간절한 소원을 품었습니다. 그룬트비가 목사고시를 치룰 때 설교 제목을 ‘덴마크 교회 지도자들이여 회개하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자 시험관들이 건방지다는 이유로 그를 섬 교회로 발령하였습니다. 덴마크 교회는 국교회인지라 목사들은 정부에서 월급을 받고 발령을 받았습니다. 교회를 개혁하고 나라를 살리겠다던 그룬트비는 섬으로 갈 수 밖에 없자 절망하고 낙심하였습니다. 장래가 캄캄하였고 처해진 현실을 바라볼 때 암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잠도 못 자고 헛소리까지 하면서 불면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렸습니다. 그때 그룬트비는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눈물로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로 뜨겁게 하셨습니다. 그룬트비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체험하면서 신경쇠약과 불면증이 사라지고 도리어 용기 있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담대해진 그의 입에서 강력한 말씀들이 쏟아졌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마다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가 부르짖었던 것은 세 가지 사랑입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나라 사랑’입니다. 그룬트비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뜨거워진 국민들은 하나님 사랑하는 일, 이웃 사랑하는 일, 조국 사랑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각 계 각 층에서 일꾼들이 나왔습니다. 결국 그룬트비로 인해 뜨거워진 사명자들로 말미암아 덴마크가 달라졌습니다. 그의 간절한 소원이 덴마크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덴마크에 가면 곳곳에 그룬트비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한 사람이 낭패와 좌절을 딛고 하나님 앞에 간절한 소원을 가졌을 때 위대한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만약 그룬트비가 암울한 현실만 바라보고 절망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을 원망하며 증오심의 노예가 되었을 것입니다. 섬에 유배당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신이상에 걸렸을 것입니다. 덴마크도 선진국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원을 가졌을 때 현실을 뛰어넘는 밝은 미래가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엄청난 기적도 볼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위인들은 누구입니까?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에 따라 행하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향해 소원을 품었던 자들입니다. 현실을 극복하고 담대히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소원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본 장을 통해 종말론적인 표상들을 사용하여 지상에서 겪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하늘의 영원한 영광을 대조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는 장차 영광스러운 몸, 즉 영생의 몸으로 변형될 것이라는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현재 당하는 고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담대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친밀한 영적교제를 나눔으로 생명의 삶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 살 것인가 소원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 속에서 성도들이 가져야할 소원을 본문을 통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은 우리가 ‘간절하게 가져야 할 소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의 소원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주와 함께 있는 것
간암이 뇌에 전이되어 시한부 판정을 받는 지미 카터 (Jimmy Carter) 전 대통령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환한 미소를 띤 얼굴로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하게 나에게 어떤 일어나더라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 무슨 일이 닥쳐오든 나는 완전히 평안합니다. 이제 나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느낍니다. 그 동안 멋진 삶이었습니다. 수천 명의 친구를 사귀었고, 신나고 흥미진진하고 기쁜 삶을 살았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외신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에 타계한 우리나라의 뛰어난 소설가 최인호 (崔仁浩) 작가는 “나는 물론 알고 있다. 내 인생의 고갯길 저 너머에는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영혼의 하나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음을”이라고 했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딸에게 남긴 말은 “주님을 봤다. 됐다, 가자”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죽음이 찾아 왔을 때, 죽음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주님과 함께 있을 소원 때문에 환한 미소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8절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사도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기를 소원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어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주와 함께 거하는 것뿐입니다. 칼빈은 “진정한 믿음은 죽음을 경시할 뿐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소원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이 신앙에 도움이 되고 죽음 너머에 천국이 있음을 확신한 신앙인들의 거룩한 모습인 것입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살아있는 육체를 가지고 주의 재림을 희망했으나 점차 죽음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죽음이 오히려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깨달아 가는 변화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고 죽게 되는데 언제나 주를 뵙고 주와 함께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생애가 되어야 합니다. 사는 것 때문에 기뻐하거나, 죽는 것 때문에 슬프다면 최고의 성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생사를 초월하여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진정한 소원이 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주의 기쁨이 되는 것
제임스 매콘키 (James H. McConkey) 목사가 쓴 글입니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우리 과에는 나보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한 명 있었다. 우리는 그를 톰이라고 불렀다. 그는 온화하면서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그를 아는 학생들은 톰이 장차 사회에 나가면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말했다. 졸업하고 35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톰이 내가 사는 도시에서 강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강연회에 참석하러 가보니 4천여명의 청중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의 말은 힘이 있었고 화술은 뛰어나 청중들의 혼을 빼앗아갔다. 강연이 끝난 후 나는 그를 찾아가서 대학생활을 회상하며 기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 난 후 내 친구 톰은 돌아갔고, 나는 10층에 있는 작은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친구는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으나 내게는 부럽다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또 비록 나는 세인들의 시선도 끌지 못하면서 조용히 생활하고 있었으나 그의 지위가 탐나지도 않았다. 나는 톰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내 속에 없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발견해냈다. 그것은 내가 주님이 주신 봉사의 장소를 발견한 후 그곳에서 일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려는 소원을 품었을 때 우리는 그 무엇도 부러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 있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여기서 ‘몸에 거하는 것’은 사는 것이며 ‘몸을 떠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즉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에 힘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살아서는 선교하여 주를 기쁘게 하고 죽을 때는 순교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겠다는 담대한 소원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부활하신 주를 만난 이후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투옥되기도 했고, 죽을 고비를 수차례나 넘겼습니다. 또한 순교의 제물이 되어 주를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힘쓰노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절제하여야 합니다.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희생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유익을 위하여 손해를 감수하면 하나님이 친히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소원을 두고 행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부어 주사 만족한 인생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담대히 소원을 두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주께 상급 받는 것
파나마 운하는 건축가 조지 위싱턴 괴델스(George W. Goethals)에 의해 건설되었습니다. 그는 기후와 토양과 수질을 심도 있게 연구한 후 운하 건축을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주위사람들은 신랄하게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파나마 운하 건축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미숙한 건축가가 엄청난 국고를 낭비하고 있다. 당장 공사를 중단시켜라” 온갖 중상과 모략이 난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공사를 계속했습니다.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었습니다. 주위의 비난에 대해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답답한 마음으로 곁에서 지켜보던 직원이 괴델스를 향해 물었습니다. “당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왜 응답하지 않습니까?” “때가 되면 하려고 합니다” 직원이 다시 묻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위대한 건축가의 대답은 간단하지만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운하 건축이 완공된 후에요.”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도 아니요, 다 이해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께서 심판의 날에 선명히 밝혀주실 줄 믿습니다. 모든 상급도 그 날에 주실 것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기에 나오는 ‘심판대’는 원어로 ‘베마’입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한 종목의 경기가 끝난 후에 선수들은 심판관 앞에 섭니다. 그때 선수들은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치른 경기에 대한 평가인 상급을 받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 신앙의 깊이나 열정의 정도, 혹은 헌신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평가도 다양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평가가 더욱 중요함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잘했다 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판단하실 분도 하나님이시요 상급 주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주 앞에 서는 날, 어떤 모습으로 서기를 원합니까?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다면 결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답게 살지 못했다면, 주 앞에 서는 일이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는 삶이 되기를 담대히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백범(白凡) 김구 선생의 말입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라고 할 것이오, 또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 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칠십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성도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소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은 비록 죽음과 핍박 가운데 살고 있다 하더라도 생명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신앙으로 담대하게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의 소원처럼 죽음 앞에서도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진정한 소원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하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소원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이 세워져 상급을 얻는 소원을 품고 살아가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화상
고후 05장 07절 / 박인걸목사(수주중앙교회)
‘윤두서의 자화상(尹斗緖 自畵像)은 우리나라 국보 제240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2번지 윤씨 종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는 이 그림은 안면의 붓질이 많이 몰리는 곳에서 어두운 분위기가 형성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양감을 느끼게 합니다. 가는 선으로 처리된 수염은 안면을 보다 부각해서 예리하게 응시하듯 그려진 눈동자와 함께 강한 힘과 생기를 느끼게 하며, 거짓 없는 외모와 그의 정신세계를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동양인의 자화상으로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윤두서는 호가 공재이며 윤선도의 증손자이고, 정약용의 외할아버지입니다.’(네이버) 자신을 자신이 그린 그림을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세계적으로는 테니르스(Teniers, David), 라투르2 (La Tour, Maurice Quentin de),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 van Rijn), 고흐(Gogh, Vincent Willem van), 반다이크 (Van Dyck, Sir Anthony)와 같이 유명한 화가들이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서정주의‘자화상’이란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 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중략,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이 작품은 작가 23세(歲) 되던 1937년 중추(中秋)에 지은 것입니다. 20대 젊은 청년의 짧은 인생살이가 사회의 제도와 가난 속에서 고통과 아픔을 겪으면 살아온 자화상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화상이란 자아 개념을 의미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자신이 평가하는 자기 모습입니다. 자신에 대한 모습이 긍정적으로 설정 된 사람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고 성공적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에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자화상은 자신에 대하여 자신이 수집한 자신의 역사와 삶의 과정들, 그리고 모습과 감정들을 종합해 놓은 정신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자화상은 자신의 성격과 철학, 더 나아가 삶의 방향까지 바꾸게 하며 그의 언어와 행동으로 표출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 즉”(잠23:7)이라고 했습니다.
자화상은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릇된 자화상을 갖게 되면 열등의식, 패배주의, 비관주의, 원망과 시비, 배타와 비판적인 의식으로 세상과 사람을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며 매사에 자신감을 잃고 체념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인생 실패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자화상을 갖게 되면 희망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화상을 바꾸어 주신 분입니다.‘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모두 지나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것이 된 것입니다. 오늘은 자화상이란 주제로 함께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부정적 자화상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에 대하여 부정적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온 민족의 역사가 어둡고 험해서 그럴 것입니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자화상이 어두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얼굴표정, 언어와 사고, 가치관도 어둡습니다. 사탄은 자화상을 공격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나쁜 자화상을 갖게 합니다. 그래야 인생을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무기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열등의식, 무력감, 비교의식, 혹은 잘못 된 우월의식을 넣어서 스스로 고립감에 빠져들게 합니다.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합니다. 어딜 가든지 튀게 행동하거나 아니면 배타적인 행동을 합니다. 또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거나 자포자기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신세타령을 하거나 누군가를 원망하며 삽니다. 더 나아가 반성과 참회가 없고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시도하지 않습니다. 체념적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부정적 자화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들이 많습니다.
① 고립감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건전한 만남과 즐거운 교제를 갖지 못합니다. 우정이나 교제의 가치를 모릅니다. 인격적 교류가 안 되며 상대방에 대하여 냉소적이거나 비판적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대하기 꺼려합니다. 이는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② 성격에 문제가 생깁니다. 초조합니다. 성급합니다. 불안합니다. 내면의 아름다운 모습이 깨졌습니다. 감정이 망가진 것입니다. 의지도 망가졌습니다. 판단능력도 상실되었습니다. 자신의 잘못도 모두 남의 잘못으로 돌립니다.
③ 망상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이 어디서도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피해망상입니다. 그래서 반감이나 분노가 지나친 적개심과 보복으로 이어집니다. 파괴적인 사람이 됩니다. 더 발전하면 반사회적인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④ 정체성과 집중력의 상실을 가져옵니다. 진리를 말해도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사실을 사실로 믿지 않으려는 의도를 가지게 됩니다. 자신이 설정해 놓은 폼에 맞지 않으면 누가 어떤 말을 해도 그 말이 거짓이라고 합니다. 콩을 아무리 콩이라고 해도 팥이라고 우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사물에 대하여 그렇게 정리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을 하셔도 안 믿습니다.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주님이 오죽하면“너희 아비는 마귀니라.”(요8:34)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 침체가 옵니다. 마치 블레셋 사람들에게 머리를 깎인 삼손처럼 영적 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더 이상 영적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눈을 뽑히고, 연자 맷돌을 돌리고, 재주를 부리며,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자화상이 마귀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지 않는가 살필 일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부정적 자화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하고 자신의 가정과 교회와 더 나아가 사회를 어둡게 하고 파괴합니다. 고쳐야 할 모습입니다. 민수기 13장과 14장에 열 두 정탐꾼 이야기기 나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 자화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패배주의, 열등의식, 무력감, 비교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을 블레셋에 비교하여 메뚜기 같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서는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과 신앙심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불신앙 수준이었습니다. 사단이 그들에게 부정적 자화상을 넣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 사울임금, 이세벨과 아합, 여로보암이 대표적인 부정적 자화상의 인물들일 것입니다.
부정적 자화상은 불행한 인생을 살게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 반대의 자화상은 무엇입니까?
(2) 긍정적 자화상입니다.
똑같이 민족이 겪던 시련의 시대에 부정적 자화상이 아닌 긍정적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입니다. 그는 독립운동을 단순한 정치 외교적 차원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정신문화의 개조를 통한 한국 민족의 새로운 자화상 추구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20대의 약관으로 미국에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 동포들의 기막힌 생활상을 보고 독립운동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당시 동포들의 생활상은 불결한 모습과 싸움질이었습니다. 동포들의 집은 실내가 불결하고 문 앞이 지저분했습니다.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패배의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이 싫어하는 데도 큰 소리로 떠들고 싸움질을 해댔습니다.
한국인 거리에는 한국 사람들끼리 상투를 마주잡고 소리소리 지르고 싸우는 모습이 자주 띄었습니다. 그 광경을 미국인들은 닭싸움 보듯이 재미있게 보고 있었습니다. 도산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 한국인의 정신 개조를 통한 자화상 쇄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 앞마당을 매일 쓸고, 이민자들의 의식변화에 힘썼습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의식의 후진성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의식의 선진성만이 독립할 수 있고 잃은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함께 우리 민족이 일본을 이기고 독립하여 그들 보다 더 잘 사는 자화상을 갖도록 의식 개혁과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그 결과 오늘의 우리나라가 된 것입니다.
긍정적 자화상을 가진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언제나“할 수 있다”는 자화상을 갖습니다. 언제나“해야 한다”는 자화상입니다. 언제나“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자화상이다. 이런 자화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자화상은 그 사람을 자화상대로 행동하게 합니다. 매일 자화상을 위하여 기도하게 합니다.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열 두 정탐꾼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긍정적 자화상을 가졌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입니다. 그들은 최악에서도 최선을 생각했습니다. 불가능에서 가능을 찾았습니다. 불신앙에서 신앙을 찾았습니다. 블레셋의 거장들 앞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았습니다. 열 명은 쫄았지만 두 사람을 쫄지 않았습니다. 열 사람은 두려워했지만 두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 땅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땅으로 보였습니다. 축복의 땅으로 보였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의 자화상이 밝았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부정적인 자화상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결국 의식의 차이입니다. 생각의 차입니다. 사실은(팩트)는 변화가 없는데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서울 정도로 달랐습니다. 두 사람 외에는 그 땅을 밟은 사람이 없습니다. 긍정적 자화상을 가진 사람이 승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한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과 축복의 문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습니다. 그 약속도 변함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말씀을 바라보는 눈의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긍정적 자화상으로 바꾸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3) 자화상을 회복하는 방법
① 자아 인식의 변화가 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화상을 바뀐 사람들입니다. 첫째, 새 피조물입니다. 죄 가운데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고후5:17) 둘째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요1:12)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에 사단이 우리에게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셋째, 거룩한 성령의 전이 되었습니다.(고전3:16) 내 안에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넷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엡1:14)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나라 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죽고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나를 존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천하 보다 귀하에 여기시기 바랍니다.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패배주의, 열등의식, 비교주의, 배타주의, 비판주의, 불평과 원만의식, 미움과 증오의식을 모두 버리시고, 밝은 자화상을 확립해야 합니다.
② 십자가로 자신을 재조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변화 된 사람들입니다. 신분의 변화, 자격의 변화, 위치의 변화, 상급의 변화, 축복의 변화가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죄인이었습니다.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을 운명이었습니다. 저주의 삶이었습니다. 지옥 갈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모든 불행을 일거에 해결하였습니다. 은혜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성령을 보내 주셨고,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모든 어두움의 세력은 내게서 떠나가고 나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영원한 기업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천사도 흠모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③ 영성 훈련으로 자화상이 확립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북한에 살던 사람이 탈북 하여 남한에 귀순하였습니다. 귀순하는 순간 그는 대한민국 사람이 된 것입니다. 국가는 그에게 국적을 줍니다. 정착금을 줍니다. 직업교육을 시켜 줍니다.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정서와 생활습관, 언어, 문화는 아직 대한민국 국민이 못 됐습니다. 북한 사투리, 북한 정서, 북한 생활습관이 모두 바뀐 것이 아닙니다. 상당한 세월동안 남한에 살면서 적응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화상이 바뀌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부정적인 자화상을 모두 지우는 데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지워야 합니다. 긍정적 자화상, 그리스도 중심의 자화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믿음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말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사만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히 12:1)
믿음은 시야를 확보한다
고린도후서 5:7 / 이규헌목사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안개가 많이 낀 거리를 운전해서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맞은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 보면, 비행기가 짙은 구름을 뚫고 갈 때가 있습니다. 그때 기체(機體)가 많이 흔들립니다. 기장(機長)은 계기판을 보고 가지만, 기체가 흔들리면 승객은 불안합니다.
이처럼 무엇을 하든 시야를 확보하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야를 확보하지 않으면, 큰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 시계(視界)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미래를 전망합니다. 미래가 보여야 합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데, 계속 추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미리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갑니다.
시계가 분명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시계가 분명하지 않는 것이 위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 도움을 청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멀리 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에 따라 행동하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낙심하면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멀리 봅니다. 멀리 보는 사람은 삶이 요동하지 않습니다. 삶이 안정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겉모습은 낡아지고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상을 보면, 초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겉모습으로 인해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육체가 쇠퇴하는 것만 본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대감을 가졌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은 겉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을 봅니다. 속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보며 기대감을 가집니다. 이것이 신자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보면,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물과 현상을 주목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일어난 상황이 전부는 아닙니다. 현재 일어난 상황은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은 실상이 아니요 허상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참입니다.
사람은 오감(五感)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봅니다. 이것이 감각입니다.
그런데 신자에게는 새로운 감각이 생겼습니다. 영적 감각이 생겼습니다. 예배드리고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것을 통해 새로운 감각이 우리 안에 살아납니다.
이전에는 육안으로 보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보는 것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본 것으로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종말론적 관점을 가지고 고린도후서를 썼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종말론적 관점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언젠가 이 세상이 끝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이 세상은 재편(再編)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종말론적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본문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보면,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관점으로 시간을 해석해야 합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종말론적 관점으로 해석했습니다. 현재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현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종말론적 관점으로 현재를 해석해야 합니다. 미래의 관점으로 현재를 해석해야 합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종말이 다가오는 것을 생각하며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미래는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미래를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라고 말했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은 마치 미래가 온 것처럼 믿고 행동합니다. 미래를 보는 것처럼 믿고 행동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현재의 상황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섣불리 평가하고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섣불리 결론 내리기 때문에 절망합니다. 그러나 현재 일어난 일이 전부는 아닙니다.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시간이 지난 후 돌이켜보며 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없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균형 감각이 있는 사람은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신 그리스도와 오실 그리스도 사이에서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면,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엘리사와 그의 사환이 적군에게 포위되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엘리사에게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왕하 6:15)”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종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라고 대답했습니다. 엘리사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사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말과 불병거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적군으로 인해 두려워했습니다. 사환이 보기에 엘리사가 황당하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기 때문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사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열왕기하 6장 17절에 보면,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말과 불병거를 보내셔서 엘리사를 이기게 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사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말과 불병거를 보지 못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사환은 보아야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사환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하나님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왕상 6:17)”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여셔서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른 것을 사환이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사를 두른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한 곳에 있어도 전혀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황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황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곳에 있어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완전히 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관점의 차이입니다.
언제 두려움을 느낍니까?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지 못할 때,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보지 못할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엘리사는 상황이 달라지기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는 눈이 열리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사환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은 보는 것을 따라 행하지 않습니다. 보는 것을 따라 판단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모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봅니다. 믿음으로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것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역사를 보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셔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1장 18~19절에 보면,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무엇인가 더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이 많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의 눈이 열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을 볼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에게 많은 것을 이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은 초라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기죽을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의 눈이 열려 하나님께서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신 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알려면,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의 눈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영안이 열리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것을 베푸셨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하나님께 구한 것이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도가 찬양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신 것,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은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영안이 열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깨닫는 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영안이 열리면,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이 얼마나 큰가를 깨닫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합니다.
마음이 쪼그라듭니다. 별것 아닌 것으로 인해 마음이 상합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열린 사람은 감사합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려면,
첫째, 훈련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3장에 보면, 사무엘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자신을 부르는 것으로 생각하고 엘리 제사장에게 가서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삼상 3:5)”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엘리 제사장은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삼상 3:5)”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일어나 엘리 제사장에게 가서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삼상 3:6)”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에게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삼상 3:6)”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은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엘리의 음성인지 하나님의 음성인지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하나님의 음성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사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야 영안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야 영안이 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면, 영안이 열립니다. 성경을 읽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영안이 열립니다. 영안이 열리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영안이 열리면,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손대시지 않은 것이 없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어난 사건과 상황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연인 듯한 일까지도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에 일어난 일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할 수밖에 없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요셉은 원망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셉은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창 50:20~21)”라고 말하며 형들을 위로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영안이 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영안이 열립니다.
영안이 열리면, 사건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속삭이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계십니다. 설교자가 말씀을 전하지만, 성령께서 다양한 형태로 각자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이 최고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눈이 열리고, 우리의 귀가 열려야 합니다. 눈이 열리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귀가 열리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둘째, 욕심을 비워야 합니다.
영안이 열리려면, 마음 상태가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영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영이 깨끗하고 영이 맑아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내적 동기를 확인해야 합니다. 왜 그 일을 하려고 하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내적 동기를 보면, 마음 상태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왜 기도하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욕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닌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욕망, 욕심이 있으면, 눈이 어두워져서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욕심은 끊임없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계속해서 청소하여 욕심을 비우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창문과 거울은 계속 닦아야 합니다. 닦지 않으면, 더러워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제대로 볼 수 없다면, 창문과 거울의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을 계속해서 청소하지 않으면, 영혼이 더러워집니다. 영혼이 더러워지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누가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까?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죄의 충동을 이겨내는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우리 안에 욕심이 생기는 순간, 우리의 영이 흐려집니다. 분노, 정욕, 교만, 미움, 질투, 두려움 등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우리를 흔들어놓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게 합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않다는 것은 마음이 나누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합니다. 쉽게 나누어집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눈앞에 보이는 기름진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롯은 안목의 정욕을 따라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망하는 길이었습니다. 안목의 정욕을 따르면, 눈이 가려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합니다. 망하는 줄도 알지 못합니다.
마음이 청결하려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쓸데없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 쌓입니다. 마음을 비우지만, 다른 것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계속해서 비워야 합니다.
마음을 비워야 눈이 밝아집니다. 눈이 밝아지면 총명해집니다. 분별력이 생깁니다. 판단력이 생깁니다. 확실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눈이 어두운 사람이 보기에는 망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망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눈이 어두운 사람이었습니다. 롯은 탐욕으로 눈이 어두워서 자신이 망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영적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매우 민감합니다. 작은 죄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놀라운 복이요, 최고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 때, 삶이 정화(淨化)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해지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죄는 영안을 가립니다. 죄가 있으면 영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영안이 가려져서 보지 못하면, 영적으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마치 짙은 안개 속으로 빨려드는 듯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물론 죄를 회개해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면 죄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죄에 대해 민감해집니다.
죄에 대한 생각이 잘못된 사람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 둔감한 것, 죄를 짓고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위험합니다.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어둡습니다. 마음이 완악합니다.
시편 51편 10절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윗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에는 마음이 매우 더러웠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안테나를 세워서 하나님과 교신(交信)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영혼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영혼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안이 열려 하나님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보는 것에 따라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합니다.
셋째,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주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주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조명하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조명하실 때, 우리의 영안이 열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우리의 영안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셔야 우리의 영안이 열립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영안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을 공부했다고 영안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영안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영안이 열리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이성의 힘으로 영안이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 5절에 보면,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에게서 난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 우리가 경험한 것, 우리가 쌓아 올린 것이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지성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신학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에 신학자들이 신학 체계를 세운 것입니다.
신학자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도우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조명하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햇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조명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육안만으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성경을 펼치고 있다고 성경을 읽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눈을 밝혀주셔야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조명하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조명하실 때, 우리는 깨닫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조명하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알아가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지각(知覺)을 열어주십니다. 새로운 감각을 갖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지각을 열어주시면,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마귀도 성경을 알았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할 때,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시험했습니다. 이단도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용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눈, 새로운 지각, 새로운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영안이 열리면,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이 열리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눈이 열리면, 믿음으로 행합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은 육안으로 보는 것에 따라 사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단순히 육신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시면, 우리 앞에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구원은 영적으로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하늘에서 빛이 비쳤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사람의 손에 이끌려 직가라 하는 곳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안수하자,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에도 비늘 같은 것이 여러 겹 가리고 있어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설교를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의 눈이 열립니다.
새로운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집니다.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립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롯은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그곳으로 떠났습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 13:14~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할 때, 우리는 영안이 밝아지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영안이 밝아지면, 상황을 재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이 보입니다. 이전에 희미하게 보였던 것이 명확하게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의 눈을 여셔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신령한 것을 보고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시면, 우리는 눈으로 보는 대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따라 살아갑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셔서 우리가 신령한 것을 보고 깨달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따라 살 때,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힘들고 어려우면, 상황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사건을 주목합니다.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면, 우리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지각, 새로운 안목, 새로운 관점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상황을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넉넉히 승리할 것입니다.
주님의 기쁨 되는 교회
고후05장 6~9절 / 조상호목사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이란 단편에 보면, 미국 뉴욕의 허름한 빈민가에 가난한 부부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내 "델라"에게는 유일한 재산이요, 자랑거리인 빛나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있었습니다. 델라의 머리채는 무릎아래까지 자라 한번 흔들리면 마치 황금의 폭포가 물결치듯 아름다웠습니다. 남편은 그 머리카락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남편 "짐"에게는 할아버지 때부터 가보로 물려받은 금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계는 시계줄이 어디론가 사라져, 시계를 볼 때마다 꺼내서 보곤 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이들 부부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왔습니다. 남편 짐은 사랑하는 아내를 어떻게 하면 기쁘게 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가장 소중한, 할아버지 때부터 가보로 물려받은 금시계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그렇게 갖고 싶어 했던 브로드웨이의 진열장에 꽂힌 비녀 하나를 샀습니다. 한편 아내 델라 역시 사랑하는 남편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가장 소중한 재산인 그녀의 머리카락을 20달러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상점을 다 뒤져, 남편의 시계에 꼭 어울리는 백금으로 된 시계줄을 샀습니다. 이제 시계줄을 채우면 ‘남편은 어느 친구 앞에서도 시간을 보면서 창피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남편의 시계줄을 산 그녀는 날아갈 듯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음식을 준비하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시계줄을 꼭 쥐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부디 남편이 여전히 머리가 잘린 나를 예쁘게 여기도록 해주세요." 이윽고 문이 열리고 남편이 들어섰습니다. 머리칼이 잘린 아내를 보았습니다. 그는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보았습니다. 아내는 다가가서 마치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있는 남편에게 말합니다. "여보, 그런 눈으로 절 보지 마세요. 저는 다만 당신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드리고 싶었어요. 머리카락은 곧 다시 자라날 테니까 괜찮아요. 제 머리카락은 아주 빨리 자라는걸요. 여보, 어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해.'라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유쾌한 기분을 가져요. ‘당신은 생각도 못할 멋진, 정말이지 예쁘고 근사한 선물을 마련했어요.’라고 말씀하세요." 남편은 당황하여 말했습니다. "당신 머리카락이 정말 없어졌단 말이야?" 그리고 방안 구석구석을 두리번두리번 합니다. "당신 머리카락이 없어졌단 말이지?" 아내는 말합니다. "찾아볼 필요도 없어요. 팔았다고 했잖아요. 팔았다구요. 오늘은 크리스마스예요.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머리카락은 당신을 위해서 팔았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머리카락은 하나하나 셀 수 있을는지 몰라도, 당신에 대한 제 애정은 누구도 셀 수 없을 거예요." 이들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팔아, 상대방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선물했습니다. 비록 그 선물들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지만, 두 사람은 가장 소중한 것을 서로 선물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크게 네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기 자신의 즐거움과 기쁨을 위해, 술도 마셔보고 많은 재산도 가져보고 또한 많은 아내들을 거느리려 살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둘째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 등장하는 두 사람처럼,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님이나 친구들이나, 나 외에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셋째로, 사단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르지 않고 사단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넷째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 부류에 속합니다. 그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고전10:31). 물론 처음부터 그가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보다,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서, 굉장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할 정도로,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의 기쁨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위해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가두기도 하고 핍박하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는데, 그 때에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이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는 그의 삶의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다같이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5장 6절부터 9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사도 바울은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장차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의 가장 중대한 관심사는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는 "내가 이제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에게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갈1:10)"라고 말하며, 사람을 좋게 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을 좋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처럼 그는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항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힘썼습니다. 그는 인생의 초점을 ‘하나님의 기쁨’에 맞추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인생의 초점을 하나님의 기쁨에 맞추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기쁨 보다, 자기 자신의 만족이나 다른 사람의 기쁨에 인생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주 안에서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쁨을 상실한 세상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 그 무엇보다도 먼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도 필요하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2,000년 전 육신의 몸으로 오신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할까 항상 생각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자 노력하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비록 그 길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길이었기에 주님은 그 길로 가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주님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사셨습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세상과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자기들이 누리던 여러 가지 특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힘쓰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과 같은 기득권 세력들로부터 많은 도전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려고 할 때, 주님처럼 세상으로부터 도전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우리 앞에 손해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의무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기쁘게 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2년 전에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웰링톤순복음교회의 박동수장로님은 뉴질랜드에 도착한 1980년대 초부터 20년이 훨씬 넘는 오랜 세월동안 변변한 집 한 칸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임대주택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공항 근처 미라마라는 지역에서 살 때, 바로 옆집에 사시는 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부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이 연로하신 관계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 박장로님 가정에서 많이 도와드렸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도움은 계속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양로원에 사는 것을 지독히 싫어하셨기 때문에, 혼자 계시다가 위급한 상황이 닥칠 때, 장로님과 부인이신 정윤선 권사님이 엠블런스도 불러 주고, 자주 도움을 주었습니다. 박장로님 가족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후에도 그 도움은 계속되었습니다. 박장로님 가족은 그 할머니와 가족같이 지내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003년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할머니가 살고 있던 집을 박장로님 가족에게 준다는 유언이었습니다. 미라마 지역은 학군도 좋고 공항도 가깝고 바닷가도 가까워서 주택지역으로는 꽤 비싼 동네인데, 그 지역에 있는 자기 집을 준다고 그 할머니가 유언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결국 박장로님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고가의 주택 한 채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1월 초 저희 가족이 휴가차 웰링톤에 방문했을 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2년 동안 가격이 많이 오른 그 집을 팔았답니다. 그리고 그 집을 판 돈으로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Johnsonvill 지역에 집을 장만했다고 합니다.
저는 박장로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기쁘게 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과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구를 기쁘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해도 집 한 채가 주어지는데, 하물며 만왕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하나님께서 못 본체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기쁘게 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초점을 ‘하나님의 기쁨’에 맞출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2005년도를 보내고 새로운 2006년을 맞이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한 달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뉴질랜드의 특수상황 때문에 우리 교회는 매년 1월 첫째 주가 아닌, 2월 첫째 주에 새로운 ‘사역방향’과 ‘사역목표’를 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작년 12월 중순부터 기도하면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생각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성령님께서 저에게 ‘하나님의 기쁨’에 대해 묵상하게 하셨고, 하나님께 기쁨을 돌리는 일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06년도 우리교회의 표어를 “주님의 기쁨 되는 교회”라고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성공적인 예배생활’, ‘전교인 성령충만’, ‘샘모임 활성화’, ‘1인 1사역 참여’, 등 4가지 사역목표를 세웠습니다. 물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들이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우리가,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금년 한 해 동안 달려가야 할 중요한 목표를 4가지로 정했습니다.
1) 성공적인 예배생활
첫째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성공적인 예배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심어린 마음을 담은 인사를 받으면,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인물들의 특징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예배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 우는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자마자 첫 번째로 단을 쌓았습니다. 벧엘 동편으로 이사한 후, 야훼를 위하여 단을 쌓았고, 조카 롯이 요단 동편으로 이사한 후, 마음이 착잡한 가운데에서도 야훼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일에 우선적으로 야훼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야훼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예배를 중요시했고, 항상 예배를 드리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 모습을 기뻐하셨습니다. 노아도 홍수에서 살아남은 다음, 야훼를 위하여 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을 취하여 번제로 드리는 일을 가장 먼저 했습니다. 그는 배에서 나와 할 일도 많았지만, 가장 먼저 예배부터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이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무지개 언약을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도 하나님을 위하여 단 쌓는 일에 프로였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에게 지혜와 부와 장수의 복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원하십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일이며, 예배 시간은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한 가지, 바로 예배였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가인은 살인자가 되었고, 아벨은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리스트에 오르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배가 그들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에도 성공하지만, 예배에 실패하면 인생에도 실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예배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배에 성공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배는 생활과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만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도 항상 예배하는 자세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삶이 예배가 되고 예배가 삶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배당에서 뿐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삶의 예배를 소홀히 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드리는 공예배에 성공할 뿐 아니라, 삶의 예배도 성공하는 2006년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전교인 성령충만
둘째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요즘 인터넷의 발달로 말미암아,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눈 깜짝 할 사이에 세상에 퍼질 정도로, 지식과 학문과 기술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식과 학문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훈련을 받아야 사람이 변화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학문이 사람을 완전하게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사람의 변화는 지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지식이 사람을 완전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감옥에는 대학 졸업장을 가진 사람이나 석사, 박사학위 받은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학문이 사람을 완전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죄를 저지르지 않아야 합니다. 훈련이 사람을 완전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군대 갔다 오면 다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군대에서 제대했을 때는 변한 것 같은데 예비군 훈련 받을 때 보면, 완전히 난장판입니다. 세상 것으로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훈련받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다 보았습니다. 풍랑이는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일, 귀신을 내어 쫓으신 일, 혈루병 여인을 고치신 일, 눈먼 자를 뜨게 한 일, 5병2어로 5천명을 먹이신 일, 죽은 자를 살리신 일, 등 3수많은 기적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완전히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냥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변화된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그는 과거의 직업이었던 고기 잡는 사람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습니다. 밤새도록 잡지 못하던 그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물을 내려 153마리나 되는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육지로 올라가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역사를 체험했으면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해야 할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으로 충만해지자, 그는 비로소 변했습니다. 예수를 부인했던 바로 그 가야바의 법정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행4:19)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으로 충만해지자 베드로가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경험이나 지식이나 훈련으로도 사람은 완전히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은 변화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올 한해에 전 교인의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하고 힘쓰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님들이 성령충만 받기에 앞서 먼저 저와 운영위원회들이 성령충만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수개월 전 운영위원회 모임에서 브리스베인에서 있을 예정인 ‘오순절 성령행전학교’에 운영위원들의 참석을 결정한 적이 있습니다. 오는 27일부터 1일까지 2박3일 동안의 성령행전학교에 저와 한 분의 전도사님과 운영위원들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운영위원들이 각자의 항공료를 부담하고 교회에서는 브리스베인에서 체재할 때 소요되는 약간의 경비를 지원하게 될 것입니다만, 저는 이번 성령행전학교에 참석하는 저와 교회의 리더쉽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리더쉽들에 이어,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이 변하고,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세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3) 샘모임 활성화
셋째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샘모임이 활성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신앙생활과 사역의 모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12명을 제자로 선발하셨습니다. 비록 예수님 주위에는 수많은 무리들이 항상 뒤따랐지만,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을 데리고 산 위에 오르실 때도 있었고, 그들을 포함한 12명을 데리고 다니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식사도 하시고 잠도 함께 주무시고, 여행도 같이 하시면서도,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함께 교제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소그룹을 따로 만들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5,000명을 대상으로도 충분히 말씀을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당신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추진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12명을 따로 구분하여 제자로 삼으셨을까요? 우리에게 신앙생활의 방법을, 사역의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많은 군중들 속에서 얻을 수 없는 유익을, 소그룹에서 진행되는 교제와 사귐과 나눔들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소그룹모임인 샘모임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모임이요, 성경적인 모임입니다. 그 동안 잘 해 왔지만, 올해에는 더욱더 샘모임이 활성화되었으면 합니다.
18세기에 아주 대조적인 두 명의 영적 거장 요한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에 대해서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18세기 당시에는 휫필드가 훨씬 유명한 사람이었고, 영향력도 크게 끼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한 웨슬리는 잘 알지만, 휫필드는 잘 모릅니다. 그 이유는 사역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휫필드는 대중 설교가였습니다. 그가 설교하면 수만 명이 모여 들었습니다. 반면에 웨슬리는 전략가였습니다. 그는 대중 집회 후에 후속조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Holy Club’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 소규모로 모여 서로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삶을 진단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샘모임’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신앙생활하기 힘듭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1년만 혼자 신앙생활 하다보면 믿음이 곤두박질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말씀 안에서 서로 교제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말씀으로 신앙생활을 진단할 때, 건강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힘이 바로 이 교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날마다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교제하며 기도하는 데서 얻었습니다. 우리 또한 샘모임을 통해 고민과 아픔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며 기도해줄 때, 놀라운 치유와 위로와 변화를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샘모임 활성화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샘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여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 세상과의 싸움에서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4) 1인 1사역 참여
넷째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역이든지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성공이 아니라 충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성공하라고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 충성하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주어진 기회, 주어진 조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신실하게 끝까지 충성을 다했는가” 가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 교회 안에 섬기는 분들을 보면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십니다. 눈물을 흘리며 샘원들을 위해 기도하고 많은 물질로 샘원들을 섬기는 샘지기들이 있습니다. 주중에 직장일로, 가사일로, 학업으로 피곤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매주일 아침 일찍부터 나와 섬기시는 찬양팀이 있습니다. 오붓하게 가족과 함께 주말 오후를 보내지 못하고 토요일오후에 나와 섬기시는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매주일 어린이들을 돌보느라 목이 잠기는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또 한 주도 빠짐없이 토요일 저녁에 나와 혼자서 더러운 화장실 변기통을 청소하는 분도 있습니다. 주중에 사업으로 바쁜데도 불구하고 컴퓨터를 고치고, 주차장 청소를 하고, 가든을 정리하고, 사운드 시스템을 고치러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매주일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고 식사 후에는 설거지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 구석구석에 참으로 많은 일꾼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구경꾼처럼 구경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올해에는 그 일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그 일이 겉으로 드러난 일이든 드러나지 않은 일이든 모든 분들이 사역에 동참하셨으면 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은사와 재능이 각기 다릅니다. 어떤 분들은 찬양에 은사를 가졌습니다. 어떤 분들은 악기를 잘 다룹니다. 어떤 분들은 컴퓨터를 잘 다루고, 어떤 분들은 음식을 잘 만들고, 어떤 분들은 아이들을 잘 가르칩니다. 주신 은사를 잘 활용하여 사역에 임할 수 있습니다. 설령 은사가 없더라도 화장실에 매주일 예배 전에 타올 가져다 놓는다든지, 화장실에 좋은 냄새가 나도록 예배 전에 향수 한 번 뿌린다든지, 매주일 10분 정도의 시간을 내서 교회 주차장에 떨어져 있는 휴지를 줍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일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작은 일이라도 그 일에 충성할 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내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23)고 칭찬하십니다. 주님은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구분하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충성했느냐, 충성하지 않았느냐를 구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직까지 <2006년도 봉사희망신청서>를 내지 않으신 분들은 오늘 중으로 내셔서, 올해에는 모든 분들이 다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2006년도에는 그 일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께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어느 사이트에서 읽은 적이 있는 “여자친구 기쁘게 하는 방법"이라는 글을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1) 선물을 한다. 그런데 그 선물은 비쌀수록 효과가 좋다. 2) 각종 기념일을 잊지 않고 챙겨준다. 특히 생일이나 100일 단위의 날들은 잊으면 죽음이다. 3) 매일 전화를 해서 얘기를 들어준다. 그날 있었던 일들 중 시시콜콜한 것까지 관심 있는 척 하고 물어봐야 한다. "자기 오늘 화장실 몇 번 갔어?" 이런 건 말구. 4) 절대 다른 여자에겐 눈을 돌리지 않는다. 눈을 돌리다 들키더라도 "야, 쟤 이쁜 척 하는 거 좀 봐. 너 같은 애도 가만히 있는데. 그치?" 등의 말로 무마한다. 5) 가끔 사랑의 편지를 전달한다. 저작권은 완전히 무시해라. 어디서든 좋은 글은 다 갖다 베껴 써야 한다. 6) 종종 문자에 애정의 메시지를 남긴다. 보고 싶어 죽겠다는 식으로 연기를 가미해야 한다. 7) 어떤 옷을 입고 나오든지 그녀의 센스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오, 너 전공이 의상학이었냐?" 등 과장을 하면 좋다. 8) "세상에서 네가 젤 이뻐" 등의 찬사를 보낸다. 너무 자주 해주면 정말 믿는다. 그러나 조심 또 조심. 9) 그녀의 헤어스타일이나 컬러가 변하면 침을 튀겨가며 추켜세워 준다. 동네 미장원에서 촌스럽게 한 머리라 할지라도 무조건 이쁘다고 해라. 10) 약속장소엔 항상 먼저 나가서 기다린다. 비가 오는 날 비 맞고 서 있으면 효과 짱이다. 11) 그녀가 약속시간에 늦어도 항상 미소 띤 얼굴로 맞이해 준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다. 솔로 되고 싶은가? 12) 헤어질 땐 언제나 집까지 바래다준다. 불만이면 가까운데 사는 여자를 사귀어라. 13)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는 연습해 놓았다가 노래방에 가면 분위기 잡고 불러준다. 자신 없음 하지 말구. 긁어 부스럼 된다. 14) 멋진 장소를 봐 놨다가 데리고 간다. 비싼 곳이면 더 좋다. 돈 없으면 포기해라. 여자 못 사귄다. 15) 까페 같은 곳에 가면 분위기에 맞게 미리 알아둔 곡을 신청해서 들려준다. 길 가다가 마음에 드는 음악이 나오면 꼭 제목을 물어봐 둔다. 16) 잘 나가는 연인용 영화가 있으면 꼭 함께 보러 간다. 헤어지는 내용이면 보지 마라. 영화처럼 살고 싶은 그녀, 따라한다. 17) 여행계획을 세워 함께 여행을 간다. 그녀가 곤란하지 않게 당일여행으로 준비하는 세심함을 보여주면 좋겠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18) 남자 친구들을 만난다고 해도 속 넓은 척 하고 괜찮다고 말해준다. 이렇게 해도 여자들은 "그거야 당연한 거지..." 하고 생각하는 게 억울하다. 19) 무능해 보이지 않게 성적에도 신경을 쓴다. 성적표 보자고 하는 여자는 없으니까 정 안되겠으면 적당히 허풍을 섞어 꾸며대자. 20) 귀찮은 리포트 대신 써준다. 이게 젤 시러. 그래도 솔로는 더 시러. 딜레마다. 21) 방송, 신문을 매일 보고 시사상식을 쌓아 유식함을 과시한다. 누구 말따나마 롯데리아 가서 밀레니엄 버그를 시키는 일은 없도록 하자. 22) 요리를 배워 가끔 직접 요리를 해 준다. 집에서 가족을 실험대상으로 미리 연습을 해야 한다. 23) 아무리 바빠도 그녀를 위해서 항상 시간을 비워둔다. 할 일이 없었더라도 일부러 약속 취소하고 나오는 척. 24) 가끔 친구들을 매수한 다음, 같이 만난 자리에서 친구들로 하여금 그녀를 띄워주게 한다. 잘 생긴 친구는 부르면 절대 안 된다. 기억하자. 25) 그녀의 친구들과 같이 만난 자리에선 젖 먹던 힘을 다해 매너맨이 되어 본다. 이런 자리가 젤 무섭다. 그녀의 친구들이 나중에 뒷말을 하면 좋을 게 없다. 가급적이면 만나지 마라. 26) 아프다면 약 사들고 집 앞에 가서 전해주고 온다. 그것도 버스 끊긴 시간에 택시타고 갖다 주면 뿅 가겠지. 27) 잘 나가는 스타크와 같은 최신 겜 실력도 쌓아 다른 남자들을 물리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리얼타임 전략 시뮬레이션류가 좋다. 머리 좋아 보이자나. 28) 악기를 배워 생음악을 들려준다. 이건 수 십년간 그 효과가 검증된 방법이다. 잘 해 봐라.
이처럼 여자친구 기쁘게 하려 해도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해서는 여자 친구를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해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들이 많이 있지만, 올해에는 ‘성공적인 예배생활’, ‘전교인 성령충만’, ‘샘모임 활성화’, ‘1인 1사역 참여’, 등 4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어 주님을 기쁘시게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유명한 ‘임마누엘 칸트’는 80여 년 동안 살면서 두 가지를 꼭 지켰다고 합니다. 시간 지키는 것과, 모든 생활의 원칙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지키며 살았다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할 때 먼저 칸트는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2005년도를 보내고 새로운 2006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2006년도에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같으면 주저하지 않고 Yes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No를 할 줄 아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2006년도 한 해에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기쁨 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길을 책임져 주십니다.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
이수영목사 / 고린도후서5:1-10
부활과 영생은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항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세무궁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도 우리의 부활과 영생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도 우리의 부활과 영생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 완성되는 것을 가리켜 말할 때 그 의미가 가장 클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다 벌 받아 죽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을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끝내는 것은 다 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과 영생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에 결정적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미 부활과 영생에 대한 그의 믿음을 힘주어 반복적으로 피력한 바 있습니다. 고전15:21-54에서 몇 절을 읽어봅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1-22절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2-44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1-54절입니다.
이상의 글들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믿음에 관하여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육신적으로 죽었다가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부활의 몸은 썩지 않을 것이고 영광스러우며 강하고 신령하며 죽지 않는 몸이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은 단지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죽는 일이 없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전15:19에서는 말하기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했고, 오늘 본문 바로 앞인 4:18에서는 쓰기를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러한 부활과 영생에 관한 그의 믿음을 재확인하며 그 믿음으로부터 오는 그의 삶의 근본적인 자세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밝히는 삶의 근본자세는 단지 그만이 아니라 부활과 영생의 믿음을 가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란 우리의 육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을 장막 집에 비유한 사도 바울의 의도는 그것이 임시적인 처소임을 인식시키는 데 있습니다. 장막은 군인들이나 목자들이나 유목상인들이 들판에서 야영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또한 종교행사나 운동경기가 있을 때 참석자들이 사용하곤 했습니다. 고린도에서는 이 년에 한 번씩 범희랍권의 운동경기가 열릴 때면 그 시 주변에는 장막들이 많이 세워지곤 했습니다. 마치 고린도 시가 장막들로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행사가 다 끝나면 갑자기 그 장막들이 다 철거되어 사라지고 돌로 지은 견고한 로마식 주택들이 들어선 고린도 시가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곤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낯익은 광경으로서 고린도 시 주민들에게 임시 거처로서의 장막과 영구적 석조건물 사이의 대조를 뚜렷이 보여주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통해 일시적인 이 세상에서의 삶보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삶을 더 바라보아야 할 것을 권면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장막 집을 말하며 사도 바울이 옛날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사십 년간의 장막생활을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이동할 때마다 장막이 반복해서 걷혀지는 것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 장막의 임시성과 일시성을 익히 잘 알고 있었을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견고한 집을 짓고 살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었을 것이며 광야에서의 나그네의 삶 속에서는 장막 집이라는 일시적인 처소에 큰 미련을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실에 비유하며 이 세상에서의 삶의 일시성을 상기시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을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초막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옛날 출애굽 한 조상들의 광야에서의 삶을 기념하며 한 주간 동안 초막을 짓고 거기 거하며 명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초막은 참 초라하고 불편하지만 지속적인 거처가 아니고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거처이기에 잘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의 일시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장막 집의 비유를 사용했을 것이라 봅니다.
부활과 영생의 믿음으로부터 오는 사도 바울의 삶의 자세의 두 번째는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더욱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그 삶은 영원하고 죽음이 생명에 삼킨 바 된 삶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본문 2절에서 쓰기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합니다. 그 이유는 1절 하반절에서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알기 때문이며 4절에서 말하듯 거기서는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은 후의 삶이 영원하고 다시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삶이라는 확신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해 할 사람들을 위하여 먼저 그 답을 내놓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사도 바울 자신에게뿐 아니라 다른 모든 믿는 이들에게도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그 확신을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을 통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세상에서의 삶보다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더욱 사모하는 이유는 단지 그 삶이 영원하고 죽지 않는 삶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이유를 사도 바울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기서의 삶은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주님과 함께하지 않는 삶이라면 영원한들 무슨 기쁨과 설레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의 그런 마음을 본문 6-7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다”는 말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몸으로 있을 때”란 이 세상에서 살 때를 말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살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살면 영적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온전히 함께하는 삶은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주와 따로 있는 삶”으로 본 것입니다. 그것이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다”는 말의 뜻입니다. 이 말은 또한 주와 온전히 함께 살게 될 하늘나라야말로 우리의 시민권이 있는 우리의 본 고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임시로 지나가는 이 세상의 삶보다 하늘에 있는 처소에서의 삶을 더 사모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지만 하늘에 있는 처소에서의 삶을 더 사모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의 삶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따라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 뜻으로 쓴 글이 본문 7절의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이미 4:18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한 말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을 주목하는 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부활과 영생의 믿음으로부터 오는 사도 바울의 삶의 자세의 세 번째는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더욱 사모함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몸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을 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부활과 영생의 믿음으로부터 오는 사도 바울의 삶의 자세의 네 번째는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더욱 사모함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더 사모하지만 언제 그 삶에로 들어갈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려는 뜻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말이 본문 9절의 말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것은 언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느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하늘나라 갈 생각만 하는 것은 바른 믿음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늘나라에 갈 것인데 뭐 그리 열심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힘쓸 것 있느냐는 생각을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가 바라는 바를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 10절을 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예수를 믿든지 안 믿든지 모든 사람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반드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우리 각자가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산 이들이 각각 주의 나라에서 누릴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님 기뻐하실 일에 충성을 다한 후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 하였도다. 나의 즐거움에 참여하라.” 하시는 칭찬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의 삶을 사모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행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행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히 복된 삶을 약속받은 이들로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되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백성 되기를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 하였도다. 나의 즐거움에 참여하라.” 하시는 칭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보는 것과 믿는 것
고후05장 1-10 / 엄기호목사
이런 시가 있습니다. “보이는 그대의 모습보다 보이지 않는 그대를 더 사랑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눈은 이미 편견과 오류에 젖어 있으므로,
왜냐하면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므로,
왜냐하면 보이는 것을 사랑하기에는 괴로움이 많아, 작은 내 가슴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므로…”
보통 사람들은 보는 것이 제일 안전한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란 격언도 있고, 백문이불여일견(百聞以不如一見)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요, 무엇이든지 실제로 경험을 해 보고 눈으로 확인해 보아야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와 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본문 7절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치 아니함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며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보이는 것에 관심을 두거나 큰 비중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보이는 것은 실체가 아니요 그림자와 같은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며 참된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1)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름 속에 달이 흘러간다고 “야! 저 달은 참 빨리 흘러간다”라고 말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달이 가는 것 같지만 움직이는 것은 달이 아니라 구름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해가 동쪽으로 떴다가 저녁에 서쪽으로 진다고 해서, 눈에 보는 대로 해가 떴다가 해가 지는 것으로 믿는다면 이 역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물그릇에 젓가락을 넣어보면 눈에는 그것이 구부러지게 보입니다. 하지만 젓가락은 구부러진 것이 아니라 곧은 것입니다. 또 유리상자 속이나 어항 수족관에는 실체의 고기보다 크게 보입니다. 이와 같이 눈으로 보는 것만이 확실한 것으로 알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2) 보이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입니다. 인간의 삶에 중요한 전기나 전파 혹은 공기와 바람 같은 것은 눈으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들여다보고 있는 텔레비전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가 있어야 작동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가 안테나에 잡혀야 만이 화면에 영상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필수품인 전화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가 흘러야만, 사람의 말소리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공기가 없으면 지구 표면은 격렬한 태양광, 태양열, 우주선, 우주진 등에 직접 노출되고, 탄소동화작용과 질소고정작용 그리고 호흡이 이루어지지 않아 생물이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또 소리가 공간에서 전파되지 않고 물체의 연소도 불가능하며 대기압이나 비, 바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히 공기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감각을 통해서 외계의 정보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마음, 믿음, 소망, 사랑, 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같이 참으로 중요한 것, 영원한 것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영이시기 때문에 믿음만으로 그분을 알 수 있지,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영원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입니다.
3) 보이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속기 쉬운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믿기를 좋아합니다. 특히 과학적으로 증명되거나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것은 더 쉽게 믿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대로 믿고 행하는 것이 얼마나 속기 쉬운 건지 모릅니다. 사탄은 보이는 것, 일시적인 것, 쾌락적인 것으로 우리를 속이고 실패하게 하고 멸망하게 합니다. 그래서 보는 대로 판단하고 행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요 속아 사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결코 속지 않습니다. 고귀한 차원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4) 보이는 것은 변하는 것입니다. 여기 아름다운 꽃이 있고, 강대상과 마이크와 의자가 있습니다. 이 같은 것들은 머지않아 다 변해서 쓰레기통에 들어갈 날이 옵니다. 여기 설교하는 엄 목사도 아직 젊어 보이지만, 이가 빠지고 머리는 백발이 되고 얼굴에는 주름살로 변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속사람은 결코 늙거나 변하거나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해 주시고 말씀으로 인도하여 주시기 때문에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캄캄한 죽음의 밤이 와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 볼 수 없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이 다 사라져 없어질 때 육신을 벗는 날이 더욱 기뻐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1절 이하에 “이 땅에 있는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져도 하늘의 영원한 장막이 있기 때문에 탄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믿어야 하나요?
1)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시기 때문에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씀은 우리 육안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전기나 전파나 소리 등은 볼 수 없으나 존재하는 것같이 영이신 하나님은 육체적인 몸이나 공간적인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시간적으로는 시작과 끝이 없으시지만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지금도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살펴보고 계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살아계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만나주시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여 주시고, 믿는 자를 하나님은 구원하여주십니다.
2) 그리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믿어야 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 고등학생이 푸는 미적분이나 인수분해 방정식의 수확문제를 풀라고 하면 풀지를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어야지 따지려고 들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구원의 터널로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믿음으로요 구원받은 것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3)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에 믿어야 합니다(히 11:6).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제일 원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윤리나 도덕보다 착한 행실이나 봉사보다 제일 먼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먼저 순종하는 자세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도 믿음으로 하고, 기도도 믿음으로 드리고, 말씀도 믿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지식과 재주가 아무리 많아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4) 또한 구원도 믿음으로 받습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타락하고 범죄 하였어도, 강도든 창녀든 도적이든, 하나님의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주신 것을 믿기만 하면 다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주십니다.
보이는 믿음이 되자
“믿음”에는 ‘신뢰한다’, ‘확신한다’ 혹은 ‘맡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 믿음이란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에 대한 신뢰”를 의미했고,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 세상의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 아니 내 원죄와 자범죄와 고범죄를 대속해주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그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을 복종시키며, 우리의 삶과 생명과 장래의 모든 소망까지 예수님께 맡기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믿음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행위로 눈에 보이게 나타날 때만 살아있는 믿음이 됩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야고보는 형제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 사람들을 보고 말로만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하고 실제적인 도움을 베풀지 아니하면 그 말은 헛된 말에 불과하다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보이는 믿음 위에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잠자는 믿음, 속에 감추어진 믿음에는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보이는 믿음은, 믿음을 가졌으면 그 믿음을 공개적으로 눈에 보이도록 행동하고 귀에 들리도록 입으로 선포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믿음이 여러분의 입술을 통하여 밖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여러분들의 믿음은 들리는 믿음이 됩니다.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보이는 믿음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그대로 실천할 때 살아있는 믿음, 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여 신사참배를 거절하다 순교 당한 주기철 목사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한 마디를 그대로 실천하여 사랑하는 두 아들을 무참하게 죽인 공산당원을 양아들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 ‘때를 얻든지 못 얻는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생명을 바쳐가며 그대로 실천했던 수많은 복음전파자들이 보이는 믿음, 살아있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믿음, 전진하는 믿음, 창조적인 믿음을 소유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보는 것과 믿는 것
고후05장 1-10 / 엄기호목사
신대륙을 발견하기위해 스페인을 떠난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이야기입니다. 그에게 보이는 것은 사나운 바람과 억센 파도 그리고 끊임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늘뿐 이었습니다. 또한 보이는 환경도 떨어져 가는 식량과 물, 그리고 두려워하는 선원들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콜럼버스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절망하는 선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침반이나 선박의 성능을 믿고 항해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이 나 를 움직이지 못한다. 나의 동력은 꿈과 소망이다. 나는 지금 이사야서를 읽으며 새로 운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다. 참된 능력은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늘 우리 옆에 존 재한다.”
결국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후퇴와 후회가 없습니다. 오직 전진과 성취만 있을 뿐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삶을 운영하고 계신 분을 믿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요, 아이들이 말하는 도깨비 불과 같이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보이는 것에 큰 관심을 두거나 큰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그림자와 같은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이며 참된 것입니다(고후 4:18)
그래서 보이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름 속에서 달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야! 그달이 참 빨리 흘러간다” 고 말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달이 가는 것 같지만 움직 이는 것은 달이 아니라 구름입니다. 또 물그릇에 젓가락을 넣어보면 눈에는 그것이 구부러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구부러진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이렇게 사물이 왜곡될 수 있는 것이 우리 눈입니다. 그런 우리 눈으 로 보는 것만이 확실한 줄 안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② 무식한 사람입니다.
전기나, 전파나, 공기와 같은 것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참으로 중요한 것 , 영원한 것은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영이지 육신이 아니므로 믿음으 로 알 수 있는 것이지 눈으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③ 속기 쉬운 사람입니다.
보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속기 쉬운 사람입니다. 낚시꾼의 낚시 밥을 먹음직스럽게 보인다고 어리석은 물고기가 얼른 삼킨다면 벌써 낚시가 턱에 걸려서 죽게 될 것입니 다. 원수 마귀는 우리 앞에 보이는 것, 일시적인 것, 쾌락적인 덫을 놓고 우리를 속 이고 실패하게 하고 멸망하게 합니다. 따라서 보는 대로 판단하고 행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요 속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결코 속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은 고귀한 차원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입니다.
④ 보이는 것은 변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름답게 핀 꽃도 며칠이 지나면 변해서 쓰레기통에 버려질 날이 옵니다. 젊은 열정에 사로잡힌 청년들도 언젠가는 백발의 노인이 될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속마음은 결코 늙거나 변하거나 죽지 않습니다(고후 4:16). 보이는 현재만 보고 살던 사람은 죽음이 임박해오면 무서워서 벌벌 떱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 후에 일어날 일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 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캄캄한 죽음의 밤이 와도 문제없습니다. 햇빛이 없는 캄 캄한 밤에도 대낮같이 담대히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해 주시고 말씀이 그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 볼 수 없는 것을 믿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혼은 보이는 것이 다 사라져 없어질 때 더욱 기뻐합니다.
그러면 왜 주님을 믿어야 합니까?
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전기나, 전파나 말소리 같은 것은 볼 수 없으나 존재하는 것같이,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은 변하는 물질이 아니라 영이시기 때문에 믿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 은 만나주시고, 믿는 자에게 함께 하시며, 믿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살아 계셔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살펴보고 계십니다.
②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에게 고등학교 3학년이 푸는 미분, 적분 수학 문제를 풀라고 하면 풀 지를 못할 것입니다. 바둑을 둘 때 이제 바둑에 입문한 햇병아리가 조치훈 9단이 두 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 까? 이사야 선지자는 “야훼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 다 높으니라”(55:8-9)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을 구원의 통로로 택했습니 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구원 받는 것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③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므로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제일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 믿음입니다. 윤리나 도덕보다, 착한 행실보다, 봉사보다 제일 먼저 당신을 믿어주기를 원하십니다(히 11:6).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먼저 “믿습니다. 아멘”하는 자세로 나와야 합 니다. 찬송도 믿음으로, 기도도 믿음으로 하고, 말씀 듣는 것도 믿음으로 하는 것입 니다. 지식과 재주가 아무리 많아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④ 구원은 믿음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타락하고 범죄해서 자기 행위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자가 한 명도 없게 되었습니다(롬 32:22-24).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값을 치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하늘 나라를 가 르쳐 주시고, 마지막에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이제는 주님을 믿기만 하면 강도이든, 창녀이든, 도둑놈이든 모두 용서받 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요 3:16).
나아가 보이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은 신비하며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크기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의 행위를 통해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볼 수 있는 믿음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환경을 지배할 수 있는 산 믿음, 곧 보이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내어 놓을 수 있을까요?
① 온 우주와 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입술로 시인해야 합니 다.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자, 물질과 생활에 대한 지배권이 상실 되고 말았습니다. 불순종으로 상실한 지배권을 다시 회복하려면 하나님께서 창조주이 심을 입술로 시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창조의 질서 속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다 시 우리에게 환경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십니다.
②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입술로 시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 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저주를 다 제하여 버리고, 환경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입술로 시인해 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는 믿음입니다.
③ 십일조와 각종 헌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믿음을 보일 수 있습니다.
농부가 가을에 추수를 하려면 봄에 씨를 뿌려야 하는 것같이, 영적인 법칙에 있어서 도 믿음의 씨앗을 심어야 거두게 됩니다. 믿음의 씨앗은 바로 ‘십일조와 헌물’입니 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헌물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온전한 십일조 를 믿음의 씨앗으로 심으면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말 3:10). 이와 같이 믿음이란 신비한 베일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보이는 믿음 위 에 역사하시어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넘치는 복으로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대로 행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서 구 원을 받고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을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 어야겠습니다
최악의 환경에서 최선의 인생으로
고린도후서 5:1-10 / 송기성목사
소크라테스는 말하기를 “사람의 기분은 환경이 아니라 마음에 의해 결정된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사람의 기분이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기분을 결정짓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입니다. 즉 당면한 환경을 어떤 마음으로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기분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기분이 어떠신지요? 사도 바울의 기분은 항상 좋았습니다. 그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역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도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환경은 최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최악의 환경에서 최선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최악의 환경에서 최선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먼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고전15:10).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심지어 죽음 조차도 유익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최악의 환경에서 최선의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1. 우리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줄 알고 살아 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5:1)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란 우리의 육체를 뜻하며 인간의 나약성과 임시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천국을 뜻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영생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장막 곧 우리 육체는 마치 유목민들이 장막을 쳤다가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이동하게 합니다. 그리고 장막이 언젠가는 무너지듯이 우리 육체도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땅에 있는 장막 곧 우리 육체가 무너질 때 우리는 하늘에 있는 장막 곧 천국의 영원한 집으로 옮겨 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것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최악의 환경에서 최선의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는 오늘 본문에 두 번씩이나 ‘탄식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고후5:2)라고 했으며,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고후5:4)이라고도 했습니다. 이는 그의 육체가 짐진 것같이 여러 가지 시련에 눌려 어렵고 힘든 환경에 처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5:2 후반)라고 하였으며,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라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줄을 믿음으로 알고 소망으로 간절히 사모하였기에 최악의 환경에서 최선의 인생으로 나아가게 된 줄 믿습니다.
제리 브리지스(Jerry Bridges)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글에서 그의 간증을 나누었습니다. 1988년, 그의 아내는 오랜 암 투병 끝에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아내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의 마음에 시편 116편 15절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Precious in the sight of the Lord is the death of his saints.). 이 말씀이 떠오르는 순간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녀의 죽음을 귀중하게 여기고 맞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집으로 돌아오는 자녀를 맞아주시고, 아내는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하게 되겠지만 저는 어떻게 합니까?”하고 아뢰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데살로니가전서 4:13 말씀을 주셨다고 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아멘!
브리지스 목사님, 그 역시 아내의 죽음이 슬펐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망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집으로 돌아온 자녀를 기쁨으로 맞아 주셨으며, 아내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리라는 것을 알고 위로를 얻었다고 합니다.
잠언 14:32에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1:3에 사도 베드로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진리를 제대로 알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최악의 환경에서도 최선의 인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짐진 것 같이 탄식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찬송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줄 알아 최악의 환경에서도 최선의 인생으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며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라는 말은 우리가 육체적으로 살아 있든지 죽어 세상을 떠나든지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라는 말은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초연했으며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았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초연해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의 마음이 담대하여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하는 바라고 했습니다(고후5:8). 죽음 앞에서도 그가 그토록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님과 따로 있는 것이지만(고후5:6), 몸을 떠나면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임을(고후5:8)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를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되기”(고후5:10)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최악의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 그의 전심전력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대로 받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최선의 인생으로 나아가게 된 줄 믿습니다.
안양샘병원 원장 박상은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부흥사협의회 초대회장을 지내신 박용묵 목사님의 6남1녀 7남매 중 쌍둥이 막내로 태어난 그는 신앙적인 가정에서 잘 양육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방황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심장질환으로 갑작스레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사의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 합격한 후 그는 주님과 세상을 같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도 모르게 교만의 씨앗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이어온 교회생활의 틀을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나 선교단체 서클을 피하고 일부러 세속적인 서클에 들어가 마음껏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약 3년간을 그렇게 세상 재미만을 찾아다녔던 그에게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질환이 생겨났습니다. 얼마나 극심했던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비늘이 벗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려움도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별의별 약을 다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무려 1년 동안이나 병세가 악화되다보니 그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꺼려하게 되고,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 쓰고 은둔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던 어느 날 그는 누가복음 5장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부르심에 따질 것도 없이 따라 나섰는데…, 나는 왜 이제껏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던가? 나를 의사로 부르시고 쓰시겠다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왜 듣지 못했을까?” 그는 나의 나 된 것이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되면서 회개의 눈물을 쏟아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철저히 무릎을 꿇고 그가 죄인임을 고백했고, 그의 교만과 자만,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던 욕심들과 고집들을 주님 발 앞에 내어드렸습니다.그러자 그렇게도 온갖 치료법에도 듣지 않았던 피부병이 거짓말처럼 깨끗이 나음을 입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대통령 직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도 섬기고 있는 박상은 장로님, 그는 이후 어떤 삶을 살더라도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뿐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너무 고통이었지만, 피부병은 주님께로부터 온 온전한 축복이었음을 지금도 매일 묵상한다면서 그는 질병을 통해서라도, 고난을 통해서라도 그를 깨우치시고 옳은 길로 인도하시며 마침내 이루시는 주님의 크신 은혜에 오늘도 감사드린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4:8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0:31에 그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도 했습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리고 죽음 후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하실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는 사람은 담대하게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쓴 사람은 반드시 주님께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씀으로 최악의 환경에서도 최선의 인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심판대 앞에 담대히 설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미국의 대학생 1,500명을 대상으로 전공을 선택한 이유를 조사한 결과, 무려 1,225명(80여%)이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답했습니다. 적성에 맞아서 혹은 흥미에 따라 전공을 정한 학생은 고작 245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것 같으냐는 질문에 후자는 자신있게 자기 의견을 피력한 반면, 전자는 대부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행복은 돈에 있다기 보다 마음에 있습니다. 행복은 환경에 있다기 보다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에 어떤 자세와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가 좌우됩니다. 그 마음에 욕심을 비우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채우는 사람은 돈이나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최악의 환경에서 최선의 인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행복하고 명예로운 삶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줄 알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몸에 있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기까지 최선의 인생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고후05장 1-7절 / 김영준목사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 주인공은 IQ가 75가 되지 않는 사람인데 그렇지만 그는 베트남전에 나가서 전쟁영웅이 돼서 돌아오고 또 미국 최고의 탁구선수가 돼서 핑퐁외교를 하러 중국에 가기도 하고 멕시코 만에서 새우 잡이로 갑부가 됩니다. 그리고 대통령도 여러 번 만납니다. IQ가 평균보다 낮은 사람치고는 상당히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 ‘내 인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내 인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미 거둔 성공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입니까. 그러니까 그런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아마 보통 어른이라면 민망해서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레스트 검프이기 때문에, 순수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질문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정말로 자기가 물어보고 싶은 것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않습니다. 아내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부모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마음속에만 그것을 간직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사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닙니다. 어머니가 답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어머니도 알지 못하고 아버지도 알지 못합니다. 인생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만이 답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면도 있지만 인간을 알게 되는 면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인간을 알게 되고 인생을 이해하게 되고 왜 살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알게 되는 면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이었던 제 아이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캐나다에 갔다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참 불쌍해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왜 불쌍하시니?’
‘할아버지는 이제 맛있는 것도 못 드시고 재미있는 일도 못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아, 나는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참 행복해!’ 그러면서 먹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인생을 실감합니까? 그럴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제 신학교 친구 하나는 여자 친구와 디즈니랜드에 갔다가 거기서 서로 갈라섰습니다. ‘The happiest place in the world-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이다’ 그게 디즈니랜드에요. 그런데 거기서 서로 싸워서 거기서 갈라섰으니… 인간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인생마저도 맛있어지는 것이 아니고 재미있는 일을 한다고 인생마저도 재미있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것이 의식주라고 하는데 아무리 배부르게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자동차를 굴리더라도 그것으로 존재의 해답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은 아닙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을 찾는지도 몰라요. 세계적인 음악가인 에릭 클랩톤이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세계적인 스타이고 돈을 엄청 벌고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내 옆에 두어도 나는 늘 죽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 그래서 그는 마약 중독자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에릭 클랩톤에게 우울증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가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에 인생의 고민을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느낀 것입니다. 인생의 고민을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면서도 그냥 넘어갈 것을 에릭 클랩톤은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에 더욱 거기에 대해서 깊이 정직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그야말로 인생을 더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번민 자체는 괴로운 것이지만 거기에는 부수적인 유익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애통하는 것이 뭐가 복입니까. 그러나 애통해봤기 때문에 위로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애통해봐야 위로라는 것이 있고 나아가서 위로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설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현상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스스로 찾을 수 없는 해답을 인간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고 그게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클렙톤은 그래서 자기와 같은 중독자를 위해서 갱생센터를 짓기도 했습니다.
세상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하느냐?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람들 중에는 별로 심각한 생각을 하지 않고 고민도 하지 않고 관심도 갖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교회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발로 오든 누구에게 끌려서 오든 간에 사람이 교회에 오고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육신적으로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교회에 오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아무리 친구가 많고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허전하다는 사실, 고독하다는 사실, 뭔가 채워지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것이고 신앙을 찾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뭔가 해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언제 가장 확실하게 느끼느냐면 우리가 추구하던 것을 얻을 때입니다. 소원을 이루고 성공을 거두고 원하는 것을 갖게 될 때, 그때 오히려 허무감을 느낍니다. 이게 다란 말인가. 이것을 얻기 위해 내가 그동안 그렇게 애를 썼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허무함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제가 한번은 새벽기도 시간에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 목회에 성공을 가져다주십시오.’ 좀 부끄러운 기도입니다. 그러나 제 솔직한 생각이 그랬으니까 제 목회에 성공을 가져다 달라고 기도했는데 바로 그날 저녁에 다른 교회 장로님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그분이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면서 ‘아, 목회에 그렇게 성공하셨으니 축하드립니다.’ 그러더라구요. 하나님의 응답이 즉각 임한 것입니다. 그날 새벽에 성공을 달라고 했는데 그날 저녁에 어느 장로님이 성공하셨으니 축하드립니다, 그 순간에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면 ‘하나님이 네가 성공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남의 입으로 네 성공을 확인하게 했으니 됐지 않았느냐’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아, 인생의 성공이라는 것이 이렇게 잠깐 왔다가 가는 것이라면 우리가 이런 것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쓴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생각이 들면서 적어도 남의 눈의 성공은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이것을 성공적이라고 생각해야 되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이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내가 봤을 때 성공이어야 되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성공이라고 여겨주시는 것,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그것을 그냥 보면 예수님은 실패자입니다. 버림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믿지 않는 사람,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의 이야기이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성공이고 순종이고 그게 의와 율법을 이룬 것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켰다는 거기에 최종적인 그 판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까지는 우리 인생을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내가 돈을 얼마나 벌었든 내 소원이 얼마나 이루어졌든 간에 결국 우리에게 주어졌던 이 시간, 우리 인생을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까지는 다 알 수 없어요. 하나님의 입으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시든 아니면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말씀하시든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부분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도 노력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인들에게도 기뻐야 되지만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어야 됩니다. 내 삶이, 내 자식이, 우리 가정이, 내가 하는 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쁨이 될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올 때 한 별이 그들을 앞서서 인도했다고 했습니다. 그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별에게 간 것은 아닙니다. 베들레헴으로 갔지, 별의 인도를 받는다고 별을 향해서 간 것은 아닙니다. 베들레헴을 향해서 간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도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는 것은 아니에요. 이 땅에서 우리의 갈 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백성이 된다고 해서 당장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의 갈 길을 알고 우리가 해야 될 일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이 땅에서 천국백성으로 산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이 자라고 또 성령을 좇는다고 해서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여전히 사람입니다. 다만 좀 더 참된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인간답게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신 인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기뻐하고 또 서로 나누고 또 사랑하고 사랑을 주고받고 감사하고 섬기고 창조적이고 이러한 삶을 사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날수록 우리는 좀 더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고 복되고 보람 있고 의미 있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사람답게 사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이것은 신명기에 있는 말씀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것인데 예수님이 그것을 말씀하심으로써 더 새롭고 큰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떡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떡이 필요합니다. 떡만 필요한 게 아니에요. 고기도 필요하고 좋은 옷도 필요하고 편안한 집도 필요하고 다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그 필요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연연해 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만 연연하게 되면 이멜다 마르코스처럼 됩니다. 이멜다 마르코스가 도망갈 때 구두만 삼천 켤레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삼천 켤레, 도대체 이멜다 마르코스의 발이 몇 개인지 알고 싶어요. 도망갈 때 신은 구두를 빼고 삼천 켤레를 놓고 도망갔어요. 도대체 사람에게 몇 켤레의 구두가 있어야 족하다는 얘기입니까. 이멜다 마르코스가 누구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많은 구두를 가졌다는 얘기입니까. 그러니까 가져도 그게 충분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가져도 충분하게 생각되지 않은 것입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입니다. 가져도, 가져도 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입니다. 이게 인생이에요. 육신을 좇아 살게 되면 이렇습니다. 가지고 즐기고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점점 더 그 기준이 올라가서 전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똑같은 쾌감을 얻게 되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데 여기에는 끝이 없습니다. 어느 억만장자에게 신문기자가 물었습니다. ‘사람은 얼마만큼의 돈을 가지면 족합니까?’ 그랬더니 억만장자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져야 된다.’ 그러니까 영원히 거기에 이르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다가 하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인생을 하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every word that comes out of the mouth of God’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대부분의 말씀이 아니고 적당한 양의 말씀도 아니고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전문적으로 배워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마추어 식으로 배워서는 안되고 구약과 신약, 66권을 우리의 영혼의 양식으로 만들어서 이 말씀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필적할 만큼,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떡은 육신의 양식입니다. 떡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육신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이 있습니다. 이것은 두 단어를 합친 단어인데 영과 혼, 영은 spirit 혼은 soul, 그런데 우리는 무속신앙의 영향으로 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영적이고 꿈을 꾼다든가 예언을 한다든가. 그러나 혼은 인간의 양심, 인격을 포함합니다. 사람을 사람 만드는 것은 그가 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양심, 그래서 양심이 나를 정죄하든 칭찬하든 그런 것입니다. 파우스트가 마귀에게 자신의 영혼을 판 것처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팔았어요. 인간은 영혼에 대해서 정직하고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되지만 먼저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남은 속일수가 있어도 자신의 영혼은 속일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 자신을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을 속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든가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든가 이게 다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을 하면 마음이 기쁘고 나쁜 일을 하면 괴롭고 그게 다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이 온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여기에서 장막을 거둔다고 하지 않고 장막이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장막을 거두는 것처럼 그렇게 할 수 없고 무너집니다. 기대하지 않던 날에 기대하지 않은 방법으로 급작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에 장막을 거두는 식으로 여유 있게 세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건 무너지는 식으로 갑자기 일어나는 것입니다. 학교도 방학하는 날이 오고 백화점 세일도 끝나는 날이 오고 또 TV 드라마도 종영하는 날이 오는 것처럼. 학교가 방학하면 그전까지 와글와글하던 학교가 적막강산이 됩니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도 마찬가지에요. 적막해집니다.
학원이 밀집돼 있는 동네에 가면-저도 제 아이 때문에 갈 때가 있는데- 학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자동차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자녀들을 데리러 온 부모들입니다. 아이들이 학원이 끝나면 건물 밖에 나와서 두리번거리다가 엄마 자동차를 보면 신나서 뛰어갑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한참 서서 두리번거립니다. 부모가 늦었거나 잊어버렸거나. 그러면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면 되지만 만약에 돌아갈 집이 없는 아이라면, 그리고 집에 돌아가도 밥을 해줄 어머니가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처량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기다려 주는 사람이 없고 마중 나오는 사람이 없을 때 처량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 아무도 우리를 맞아주지 않고 기다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처량한 인생이고 고독한 영혼이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갈 데가 없다면 무서운 것을 떠나서 그건 고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다시 오리라’ 할렐루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welcome, 어서 오너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예수님을 영접해서 환영하고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 예수님, 어서 들어오십시오.’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예수님이 ‘어서 오너라.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하고 우리를 영접해 주십니다. 지옥은 궁극적인 고독을 뜻하는 것이고 천국은 사랑의 완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