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그레이
윌리엄 워즈워드
루시 그레이 얘기는 가끔 들었다.
광야를 건너 가다가 우연히
동 틀 무렵
그 외로운 아이를 보게 되었다.
말벗도 배필도 아지 못한 채
그녀는 넓은 황무지에서 살았다.
人家의 문가에서 자라는
아름다운 꽃나무처럼.
아직도 볼 수가 있다.
뛰노는 새끼 사슴과
풀밭에서 뛰는 산토끼를
그러나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루시 그레이의 어여쁜 얼굴은.
<오늘밤엔 눈보라가 치겠다.
얘야 호롱불 들고 가서
네 어머니 밤길을 밝혀 주려므나
너는 邑에까지 가야 되겠다>
<아버지 그러겠어요
오후가 된 참이예요
교회 시계가 두 시를 쳤지요
그런데 저기 달이 떴어요!>
이 말에 아버지는 낫을 들고
나뭇단의 새끼를 잘랐다.
그는 제 일에 열을 내었고
루시는 초롱불을 손에 들었다.
사슴보다도 더 신이 났다.
장난치는 그녀의 발걸음이
채이는 눈가루를 날려
연기처럼 오르게 했다.
불시에 눈보라가 불어 닥쳤다.
많은 산을 오르내리며
그녀는 헤매었으나
읍에는 이르지 못했다.
처참해진 부모들은 밤새
고함치며 멀리 찾아 나섰다.
그러나 인도해 줄
소리도 뵈는 것도 없었다.
새벽녘에 그들은 서 있었다.
황야를 굽어 보는 등성이에
자기 집 대문 가까이에
나무 다리가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느껴 울었다.
집으로 향하면서 소리쳤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겠지>
바로 그 때 어머니는
눈 속에 난 루시의 발자국을 보았다.
두 사람은 가파른 산마루를
작은 발자국 쫓아 내려 갔다.
흥이 난 산사나무 울타리를 지나
길고 긴 돌담을 따라.
이어 활짝 트인 들판을 가로 질렀다.
발자국은 여전하였다.
두 사람은 별일없이 따라 가서
나무 다리에 닿았다.
눈 덮인 둑에서부터
하나 하나 발자국을 따라 갔다.
다리의 널빤지 한 복판에서
자국은 이제 끊겨져 있었다!
그녀가 아직도 살아 있다고
지금껏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외진 광야에서
어여쁜 루시 그레이를 볼 수 있다고.
가파르건 순탄하건 가리지 않고
그녀는 길을 간다.
뒤도 돌아 보자 않고
일변 그녀의 노래소리는
바람 속에 한숨 지으며.
[작가소개]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는 1770년 4월 7일 영국 컴벌런드
호수 지방의 북서부 끝자락에 자리한 코커머스라는 유서 깊은 소도시에서 5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워즈워스는 펜리스에서 초등학교(여기서 그는 뒷날 아내가 될
메리 허친슨과 함께 공부했다)를 마친 후 코커머스 그래머스쿨에 입학했지만
채 여덟 살도 되기 전에 어머니가 31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열세 살 때인 1783년, 그의 아버지 또한 세상을 떠났다. 조실부모의 경험과 아끼던
누이동생 도로시와 이별한 경험으로 인해 그는 뒷날 자신의 시에서 빈번히
가족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다.
1787년에 워즈워스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세인트존스칼리지에 입학했지만,
정규 교과과정보다는 선배 시인들의 시를 읽고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일에 더 열중했다.
1790년에 그와 벗 로버트 존스는 프랑스와 스위스를 거쳐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까지 여행했는데,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 여행 경험은
『서곡』 6권에서 상세히 서술된다. 대학 졸업 후 두 사람은 북웨일스를 거쳐 멋진
경관으로 널리 알려진 와이 강 계곡까지 걸어서 여행했다. 1791년 11월 워즈워스는
혁명의 열기에 휩싸여 있던 프랑스로 건너갔다.
혁명 지지자였지만 왕당파 지지자들과도 어울렸고, 아네트 발롱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1792년 10월 말 프랑스를 떠나 12월 말에 영국에 도착했고, 그사이(12월 15일)에
두 사람의 딸 캐롤라인이 태어났다.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선언한 상황에서
워즈워스는 발롱과 결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포기했지만, 이후에도 그들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795년 혹스헤드 그래머스쿨 시절의 벗의 동생인 레이슬리 칼버트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으로 남겨 준 900파운드 덕분에 그의 경제적 여건은 훨씬 나아졌다.
워즈워스와 도로시는 주 레이스다운으로 이주했고, 그는 이미 1793년에
알프스 산맥 도보 여행이 배경이 된 『저녁 산책』과 『소묘』를 발간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쌓아 가던 중이었다. 그는 이 시집들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1772∼1834)와 로버트 사우디(1774∼1843) 같은 시인들과
유니테리언파 출판업자 조지프 코틀을 브리스톨에서 만났다.
1797년 6월 자신들의 집을 방문해 몇 주간 머문 콜리지에게 호감을 느낀 워즈워스
남매는 당시 콜리지가 살던 네더스토이에 가까운 서머싯의 알폭스덴하우스로 이주했고,
두 시인은 『서정담시집』을 합작해 발간할 계획을 세웠다. 1798년 워즈워스는 도로시와
함께 와이 계곡을 다시 찾았는데, 이때의 경험은 널리 알려진 『틴턴 수도원…』으로
결실을 맺었다. 워즈워스가 브리스톨로 돌아온 직후 쓴 이 시가 포함된
『서정담시집』은 1798년 9월 코틀의 도움으로 익명으로 발간되었고, 두 시인의
‘창조적 공생’의 성공적인 결실인 이 시집은 영국 낭만주의 시대의 서막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서정담시집』이 발간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워즈워스 남매는 콜리지와 함께 배를 타고
독일로 갔고, 워즈워스 남매는 작센 주의 고즐라에, 콜리지는 괴팅겐에 머물렀다.
도로시와 함께 혹독한 겨울을 고즐라에서 보내는 동안 워즈워스는 이른바
‘루시 시편들’과 대표작이 될 『서곡』 1∼2부를 썼다.
이듬해 봄에 귀국한 워즈워스 남매는 1799년 12월 그라스미어의 더브코티지로 이주했는데,
이 집이 그가 호수 지방에서 거주하게 될 세 집 중 첫 집이었다. 이곳에서
지낸 8년은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하고 생산적인 기간이었다.
이 기간에 그는 『서정담시집』 2권을 추가했고, 이 시집은 여러 번 판을 거듭했다.
또 1805년에는 13권으로 구성된 자전적 장시인 『서곡』을 완성했고, 또 다른 장시인
『소요』를 쓰기 시작했으며, 1807년에는 『합본 시집』을 발간했다.
1802년에 메리 허친슨과 결혼한 워즈워스는 1803년부터 1806년 사이에 세 자녀를 낳았다.
도로시의 생생하고 매혹적인 일기들은 이 행복했던 더브코티지 시절을 다루고 있다.
1808년부터 1811년까지 3년간 워즈워스 일가는 앨런뱅크에 거주했고, 이곳에서 자녀
두 명이 더 태어났다.
1813년에 워즈워스 일가는 앰블사이드와 그라스미어 사이의 라이덜마운트로 이주했고,
워즈워스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 거주했다.
1814년에 워즈워스는 장시 『소요』를 발간했고, 첫 두 시집의 수준에는 못 미치는
다른 시집들도 뒤따랐다. 1820년대부터 그의 명성은 점차 높아졌고, 성공의 보상들이
잇따랐다. 그는 1838년에는 더럼대학교로부터, 1839년에는 옥스퍼드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옥스퍼드대학교 학위 수여식에서는 “우레 같은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1843년에 사우디의 뒤를 이어 영국의 계관시인으로
임명된 그는 1850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라스미어 교회 묘지에 묻혔다. 그는 13권으로
구성된 1805년 본 『서곡』을 생전에 발간하지 않고 평생 동안 끊임없이 다듬어 14권으로
재편성했는데, 그의 사후 아내 메리 허친슨은 이 1850년 본 『서곡』을 처음으로 독자들
앞에 내놓았다.
[출처] 워즈워드 시모음|작성자 옥토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