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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하게 하는 말씀
고후 5:11-21
11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11-21 / [화해의 임무]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언제나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며,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들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알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12) 우리가 또다시 새삼스럽게 자랑을 늘어 놓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우리의 의도가 바르고 성실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좋은 무기를 제공하려는 것뿐입니다. 이 무기가 있으면 불성실하고 진실하지 않은 설교자들을 대항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13-14) 자신의 일을 이렇게 늘어놓는 우리가 정신 나간 사람들일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온전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역시 과거에 살아오던 옛 생활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15) 그리스도께서는 전 인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받아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자신을 위해서 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6) 그러므로 세상적인 생각이나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을 평가하는 일은 그만두십시오. 나 역시 과거에는 그런 생각으로 그리스도를 단순히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사람이 됩니다. 더 이상 전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18) 이 새로운 일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19)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과 화해하시고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할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나님께서는 죄 없으신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죄를 지우셨으며 그 대가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과 화목하게 하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11-15)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이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께 미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고린도의 성도들을 위해 온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고, 우리는 그의 죽음으로 살아났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살아난 자는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16-17) 바울은 이제부터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부터”라는 말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시점 이후를 의미합니다(17).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행동이 순화되었다거나 말이 세련되게 변하여 사람들에게 존경받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후 그리스도인은 판단 기준이 변하고,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인식의 기준을 갖게 됩니다. 삶의 방향과 방식도 달라집니다. 새로운 목적과 방향이 생깁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18-21)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것은 불화를 전제로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불화는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뜻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화해를 이루셨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합니다(18, 19, 21).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목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의롭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적용: 당신 자신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된 것을 확신합니까? 더 나아가 화목하게 하는 말씀과 직분을 주신 것을 믿고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
갑자기 마을 전체가 정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더듬거리며 양초를 찾고 있었을 때, 현관 벨소리가 들렸습니다. 현관문을 열어보니 한 아이가 서 있었고 인사와 함께 말을 건넸습니다. "아저씨 양초 있으세요?" 나는 ‘지금 양초를 빌려주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것저것 빌려 달라고 하겠군.’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곤 양초가 없다고 말하며 문을 닫으려는 순간, "잠깐만요, 아저씨! 정전 때문에 불편하실 것 같아서 양초를 드리려고 왔어요!" 이 말과 함께 아이는 양초 2개를 내밀었고 자신의 생각했던 것들이 부끄러워져 아이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 설 교 >
화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고후05장 11~21절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을 우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 부분은 11절부터 14절 상반절까지로서 사도 바울의 사도직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적대자들의 비난을 의식하며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당부하는 말입니다. 둘째 부분은 14절 하반절부터 17절까지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서 이루시는 변화를 말합니다. 셋째 부분은 18-21절로서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과 그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부분입니다.
먼저 11절을 봅니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주의 두려우심을 안다”는 말은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하시고 모든 사람의 모든 행실을 심판하실 것임을 안다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의 모든 행실을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경외함 때문에 매사를 바르게 행할 때는 그로 인해 염려하거나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당부하기를 자기를 스스로 자기자랑을 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잘 알고 계실 것이기에 그가 하나님께 알려진 그대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도 알려지기를 바랄 뿐이라는 것입니다.
보태지도 않고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사도 바울의 뜻은 이어지는 12절에서도 드러납니다: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여기서 “자천한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는 것을 뜻하는데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임을 스스로 판단하여 그를 자랑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이란 외적이고 피상적이며 일시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전파한다 하며 돈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마음으로 자랑한다”는 것은 내적이고 본질적이며 영원한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외모도 신통치 않고 말도 어눌하다는 적대자들의 비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주님의 사도는 외모로 판단할 것이 아니고 그가 전하는 말이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진리인지 아닌지를 보고 판단해야 할 것임을 권면하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자기로부터 받은 복음과 그 진리를 확신하고 그것으로 인해 자랑하며 적대자들의 중상과 비방을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전한 말씀 중에는 그가 황홀경적인 상태에서 경험한 특별계시도 있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선포한 것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적대자들은 그런 것들을 가지고 문제를 삼았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경험한 황홀경적인 상태와 특별계시, 그리고 그에게서 발견하는 비합리적이어 보이는 모든 것들을 가리키며 그를 미쳤다고도 하고 순수하지 못한 의도와 수단으로 사람들을 얻으려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답하기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합니다. 사도 바울은 때로는 그가 경험한 황홀경과 특별한 계시를 전하고 때로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선포하는 데 대해 그의 적대자들이 뭐라 하든 그것은 그 자신의 의사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하는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위한 것임을 밝힙니다. 사도 바울이 신비한 말을 쓰든 평범한 말을 쓰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하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위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본문 14절 상반절의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사도 바울이 전하고 가르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강권하시는 것이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을 지배하는 근본 동기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적대자들의 비난을 일축한 사도 바울은 다시금 그가 다루어야 할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변화입니다. 본문 14절 하반절과 15절을 봅니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곧 모든 사람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살리시기 위하여 대신하여 죽으셨으면 우리 모두가 살아야지 왜 다 함께 죽는다는 말입니까? 그 죽음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삶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하여 사는 새 삶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변화는 또 다른 변화를 동반합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을 보는 우리의 관점의 변화입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을 육신을 따라 보고 그리스도조차도 육신을 따라 알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알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육신을 따라 안다”는 말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람을 더 이상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고 성령께서 뜨게 하시는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일어나는 변화를 본문 17절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이룩하신 새 삶에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으며 그를 따르는 삶을 살게 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새 역사 창조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로 보는 믿음의 눈이 떠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새 피조물임을 선언한 사도 바울은 그 새 피조물의 본질이 무엇이며, 새 피조물이 지켜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를 또한 밝힙니다. 먼저 본문 18절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합니다. 새 피조물의 본질은 하나님과 화목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가 할 일은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하나님의 노를 풀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큰 죄인이고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속죄의 제물로도 우리의 죄를 다 씻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을 화목의 제물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셨습니다. 그보다 더 크고 귀한 제물은 없습니다. 그보다 더 확실한 속죄의 제물은 없습니다. 말로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입은 우리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백성에게는 당연히 해야 할 도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여기서의 화목하게 하는 직분은 아직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없는데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는 것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첫째로는 우리가 직접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일방적으로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신 사실을 깨닫고 그 화목의 은혜를 입은 사람답게 살아야 할 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 놀라운 화목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화목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 들어오게 해야 할 사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전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본문 19-21절을 봅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돌리시며 그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와의 화목한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놀라운 화목의 소식을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알리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소식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어 그리스도 대신 널리 전함으로써 그 복된 소식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으니 이제는 우리 또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서게 된 백성답게 살 뿐 아니라 그 복된 소식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으로 삼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들이 되게 하셨다는 놀랍고 기쁜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전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와의 화목함을 얻은 사람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극히 마땅하고도 고귀한 직분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배은망덕한 행실입니다. 우리는 배은망덕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본문 20절에서 보는 대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간청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간청은 오늘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본문 19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친히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힘껏 받들어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장 11~19절 / 이성우목사(왜관감리교회)
어느 목사님이 쓴 글을 보니까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설명해 놓았습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행복해졌으면 하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로 인해 행복해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에 충실한 것입니다.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정작 시간이 지나도 자신의 삶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주님의 마음과 감정에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정의하여 증거 했던 사도 요한은 실제로 성질이 급하고 난폭하여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은 어쩌면 자신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사랑에 감동하여 그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었습니다.
요즈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던지, 교회의 모습을 보면, 참 부끄러운 우리 신앙인의 모습, 교회의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과 십자가를 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면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에서 ‘주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더 성숙해지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인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좋아하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생살이의 결정적인 전환점의 계기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멋진 사람과의 결혼일까요?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취업하는 일일까요? 자기가 일하는 부서에서 승진하는 일이나 어떤 일에 성공하는 일일까요? 이런 일들도 우리 인생살이에서 어떤 면에서는 전환점이 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인생을 근본적으로 뒤바꿔놓을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찾게 된 일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게 되고, 천국을 상속받을 권리를 가진 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러한 삶이 정말로 우리에게 더 없이 소중한 삶이 되었다면, 우리의 삶은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원하시고 기대하시는 삶의 모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서 평화와 자유, 참된 기쁨과 천국 소망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이러한 삶의 자리로 초대하고, 이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소개하면서 출 애급의 하나님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신5:6).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능력으로 출 애급하게 됨으로써 종살이를 청산하고 해방의 기쁨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기회와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출 애급의 역사는 여기까지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만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을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람들답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힘써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구원받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복해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행복해하실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생의 과업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실천 과제는 바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해하게 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 사 세상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해하고자 하는 일에 도우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오늘 본문 말씀인 고린도후서 5장 19절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 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시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 인간은 본래 죄인이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원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9절 말씀과 21절 말씀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파트너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화해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4절 말씀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 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라도 어떤 차별도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7절 말씀에서 이렇게 구원의 은총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을 가리켜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하신 화해 선언, 이것은 그야말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특별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임을 본문 18절 말씀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본문 18절 하 반절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화해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은 그 은총에 대해서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며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또한 화해자로 부르셨음을 깨닫고 고백하게 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먼저 화해를 시작하시면서 이제 우리에게도 화해의 사신이 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면, 곧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불화를 해결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 곧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해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신실한 사랑의 파트너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우리의 이웃들을 위하여 “하나님과 화목 하라”고 간구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것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인데, 사도 바울은 본문 14절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직분을 감당함으로 이 땅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죄를 청산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해하게 하는 일, 이것은 구원받은 백성의 사명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의 특권으로서 하나님을 가장 확실하게 사랑하는 삶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은총으로 받게 되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찾아내어 그것을 자백하고 회개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과의 진실한 화해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전 교회적으로, 그리고 전 민족적으로, 온 세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에게는 참된 평화가 깃들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써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이유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하나님과의 참된 화해는 네 가지 단계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라는 의미를 가진 “리(Re)”로 시작되는 네 개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리펜턴스(Repentance)” 즉, ‘회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죄가 없다고 인정해 주셨지만, 우리는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과 온전히 대면해야만 진정한 평화와 기쁨, 그리고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리컨시리에이션(Reconciliation)” 즉, ‘화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 자신과 더불어 화해하셨을 뿐만 아니라 20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화해의 사신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로서 화해의 직분, 곧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되는 직분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해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마다 화해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이 기록되어 있는 마태복음 5장 9절 말씀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져 있는 사명을 분명하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리뉴얼(Renewal)” 즉, ‘거듭남’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 인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과 더불어서 거듭난 존재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들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거듭난 존재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새로운 피조물로써 새로운 삶의 모습을 가지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본문 17절 말씀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리바이벌(Revival)” 즉, ‘부흥의 단계’입니다. 철저한 죄의 회개와 하나님과의 화해, 새로운 생명으로의 거듭남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새 생명의 기운을 가진 사람으로 생기 있는 삶을 살아야 하며,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줌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살려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 모두의 진정한 희망이 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 또한 이 세상의 소망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과 관련해서 사도 바울은 본문 18절~19절 말씀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 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 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화해함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생명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들이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문 15절 말씀처럼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흥을 위해서 헌신하는 자들이 되셔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성도들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화해를 이루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됨을 이루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더 나아가서 썩어져 가는 과거의 습관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 사람을 입으시는 신앙적인 성숙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새 사람을 입고 살아가고 있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더불어서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가 된 든든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인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인생,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까?
고후 5:11-19 / 송기성목사
‟아 하나님의 은혜로”
해마다 유서를 쓰는 박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올해 86세인 그는 1990년 58세 때 명예퇴직을 하면서부터 처음 유서를 썼습니다. 그 후 매년 연말이면 이미 쓴 유서를 새로 수정하기를 28번째 반복한 그는 “매년 죽음을 준비하는 유서를 쓰면서 오히려 더 준비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매년 유서를 쓰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해마다 더욱 새로운 마음으로 가치 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실 매년 유서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해마다 유서를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단언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 (I face death every day! 고전15:31) 고 하였습니다. 날마다 죽음을 대면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날마다 유서를 남기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인생,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까? 고린도후서 5:11-19에 그 답이 있습니다. 날마다 죽음을 대면하며 살았던 사도 바울은 그의 간증적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가던 중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핍박하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 그는 무엇보다도 ‘주의 두려우심을 알게’ (고후5:11)되었습니다. 그는 그가 알게 된 주의 두려우심 곧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권면하여 그들을 설득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진 것처럼 그들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들에게 자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그들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수 있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정신이 온전하여도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울 자신이 결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일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주님의 두려우심을 안 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5:14-15에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체험을 계기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는 대로 곧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혀 그 사랑이 이끄는 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고, 주님의 사랑이 강권하심을 따름에 있습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죽으심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독일의 경건주의자로 모라비안 공동체를 이끈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Nicolau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 백작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720년 학업을 마치고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유럽 각지를 여행하였습니다. 어느날 그는 뒤셀도르프 (Dusseldorf) 박물관에서 이탈리아의 화가 도메니코 페이티 (Domenico Feiti) 가 그린 “에케 호모”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라는 그림을 보았습니다. 이 말은 총독 빌라도가 재판석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한 말이었습니다. 그림은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리스도의 초상화였습니다. 그 그림 밑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내 생명을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주었느냐?” 진젠도르프는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사랑해 왔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위하여 한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여생을 오직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마침내 모라비안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뜨거운 경건운동과 선교운동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의 경건과 부흥은 존 웨슬리의 회심으로 이어졌고 감리교의 경건과 부흥을 이끌어냈습니다. 28년간 226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까지 자신 앞에 놓여 있는 번영의 길을 버리고 평생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좁은 길을 걸어간 하나님의 사람 진젠도르프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마음에 새겨 듣도록 강조한 고백이 있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신조가 아니라 경건에 있다.” “나에게는 단 한 가지 열망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님, 오직 그분뿐이다.” 아멘!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7-8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인생,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까? 사도 바울은 주의 두려우심을 알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심을 알게 된 후부터는 결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난 그 이후부터는 오직 그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는 실로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았으며,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인생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이제부터는 더욱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감으로 주님의 즐거움에도 참여하게 되시기를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따라 화목하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는 물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완전히 바뀌어졌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5:16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로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육신을 따라’ 라는 말은 ‘육신의 잣대대로’,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두려우심과 사랑을 체험하기 이전에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도 육신의 잣대대로 알고 판단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두려우심과 사랑을 체험한 이후부터 그는 어떤 사람도 육신의 잣대대로 알지 않고 판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두려우심과 사랑을 체험한 이후부터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5:18-19) 라며 화목하게 하는 직분과 말씀에 대한 사명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어떤 사람도 더 이상 육신의 잣대대로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도리어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1931.10.7-) 성공회 대주교의 이야기입니다. 감리교에서 세례를 받은 그는 1943년 12살 때 온가족과 함께 성공회 신자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 신부 복장을 한 백인이 지나가다가 자기 어머니에게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백인이 흑인 여성 노동자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난으로 의대를 포기하고 성직자의 길로 들어 선 그는 1975년 44세 때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주교가 되었고, 이후 케이프타운의 대주교로 활동했습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의 의장으로 중책을 맡은 그는 남아공의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모든 인종 집단의 평화적 공존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무지개 백성입니다’라며 ‘무지개 국가’ (Rainbow Nation)를 주창하고 용서와 화해를 역설했습니다.
1984년 53세 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그는 백인 화란 개혁교회 지도자들과 반인종차별정책 교회 지도자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인 1990년 루스텐버그 교회 회의 (Rustenberg Church Conference)에서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화해가 이루어지려면 그리스도의 사신인 우리, 화해의 복음을 맡은 우리, 분명 우리가 그리스도의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화해해야 합니다. 불의와 억압의 희생자들도 이제 용서할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명령입니다. 하지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우리가 불의를 행함으로‧‧‧(중략)‧‧‧여러분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여러분의 기본권을 짓밟음으로써 상처를 입혔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리를 용서해주십시오’ 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아멘!
예수님은 마태복음5:23-24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후부터는 결코 더 이상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그 이후부터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따라 화목하게 하는 피이스 메이커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신 (고전1:24)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이제부터는 더욱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판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따라 화목하게 함으로 화평하게 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마5:9) 되시기를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프 타임>의 저자 밥 버포드 (Bob Buford)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99년 은퇴할 때까지 미국 최고의 유선 텔레비전 방송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물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만 성공에 지나치게 중독되지 않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러던 중 44세 때 성공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 아니면 돈, 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하프 타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택하고 예수님께 최고의 충성을 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후 그는 그의 인생의 후반전을 그의 시간과 돈 대부분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바치기로 하고 이타적 개인주의를 실천하는 데 전념하며 뛰기로 했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의 전반전을 ‘성공지향적 삶’(success oriented life)이라 하였고, 후반전을 ‘의미지향적 삶’ (significance oriented life) 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생,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까?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이제부터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 바울,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그의 인생의 후반을 아주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는 더 이상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판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따라 화목하게 하는 말씀으로 섬겼습니다.
인생의 후반, 또는 인생의 중반, 뛸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결코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라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신앙의 경주, 인생의 승패는 아직 속단할 수 없습니다. 아직 달려갈 길과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는 사도 바울처럼 더욱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친 후에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대신 죽으신 이유
고후05장 11~15절 / 지용수목사
오늘 본문은 아주 원론적이고 교리적인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한 절 한 절 읽으면서 설명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구원을 받았고 영원히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집을 덧입을 것도 알고, 하늘나라에 가서 큰 상을 받을 것도 알았지만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두려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심판대는 우리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정죄하는 심판대는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우리가 생활한 대로, 충성한 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대가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열심히 충성하고 수고한 자는 큰 상을 받고 큰 저택에서 살게 되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며 수고하지 않은 자는 부끄럽게 구원을 받고 천국의 오두막집에서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학생은 언제나 성적표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학기 중에는 성적을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자기가 학교에서 몇 등 하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성적표를 받으면 ‘내가 몇 점 받았구나. 내가 몇 등 했구나.’하고 정확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성적표가 조금은 두렵습니다. 몇 점을 받아야 되는데, 몇 등을 해야 되는데, 상을 받아야 되는데, 그렇지 않을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런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심판대에 서게 될 때 두려움이 없어야 되는데……. 그때 정말 큰 상을 받고 칭찬을 받아야 되는데…….’하는 두려움을 갖고 충성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저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판단 받게 되는 것을 생각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평소에는 성적표를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성적표를 늘 생각하며 공부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잘 하려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됩니다.
바울과 사도들의 생활이 하나님께는 다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도 하나님께는 다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것, 충성한 것을 사람은 몰라주어도 하나님께서는 다 알아주십니다. 마지막 판단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시장이 4천 몇 쌍의 동성연애자들에게 동성결혼 허가증을 발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미국 전역의 동성연애자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결혼 증명서를 받아갔습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대법원에서는 그것이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만 성립되는 것이니 동성결혼은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에게 존경받고 높임 받는 것, 그것은 별것 아닙니다. 사람에게 비난받고 손가락질 받는 것도 별것 아닙니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됩니다. 언젠가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모든 것을 행한 대로 심판 받을 것을 생각하고 하루하루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 12절,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아프게도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을 비판하고 바울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입니다. 온전히 예수님을 위해서 산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그의 손수건에까지 은혜를 주셔서 병든 사람에게 그의 손수건만 얹어도 병이 나았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에게 그가 천막을 지을 때 사용하던 앞치마를 갖다 얹어도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갔다 내려온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8절에 보면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겸손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닮은 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겸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쏟아서 고린도 교회에 헌신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비난하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미쳤다. 바울의 설교가 신통하지 않다.”라며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아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비난하는 자들이 바울의 설교에 은혜를 받겠습니까? 바울을 비판하고 바울을 비난하는 그들의 귀에 바울이 천사의 말을 한들 그 말이 들어오겠습니까? 결국 비난하는 자는 자기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사모님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주의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마라. 주의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자기도 아프게 된다.”라는 유언을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는 주의 종들을 비판하지 말고 기도해 주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이 욕먹는 것보다 자신을 욕하는 교인들이 손해를 본다는 사실이 더 마음 아팠습니다. 누룩 서 말이 온 가루를 부풀게 하듯이 몇몇 교인이 바울을 계속해서 욕하면 새로 들어오는 새신자들도 그들처럼 “바울 목사님은 미쳤다. 설교도 못한다.”하며 바울을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을 먼저 욕했던 교인들은 물론 새신자들까지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것을 그냥 두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라는 말은 ‘그들의 말에 받아칠 수 있는 말을 너희에게 주기 위해서 말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는 말은 ‘그들이 말한 대로 우리가 미쳤어도 예수님께 미쳤고, 우리가 온전해도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를 위해 미친 듯이 일하는 것이 어찌 비난을 받을 것이냐? 그러니 나를 비난하는 자를 그냥 두지 말고 ’우리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미친 듯이 일하는데 왜 너희가 바울을 비난하느냐?‘라고 말해서 그들의 비평과 비난을 막으라.’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사탄이 들어와서 주의 종을 헐면 교회가 헐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통해 성령의 감동으로 말합니다.
“그들을 그냥 두지 마라. 말대답을 해서 그들의 입을 막으라.”
주의 종에게 부족한 점이 보이면 기도해 드리고, 좋은 점은 자랑해서 교회가 더 발전하고 성장하게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독일의 어느 왕이 한 신하에게는 독일에 잡초가 얼마나 많은지, 잡초가 몇 가지나 있는지 조사해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신하에게는 꽃이 몇 가지나 되는지 조사해 오라고 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 잡초를 조사한 신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여, 우리나라는 잡초의 나라입니다. 온 땅이 수많은 잡초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꽃을 조사한 신하는 “왕이여, 우리 독일은 꽃동산입니다. 수많은 아름다운 꽃이 독일을 뒤덮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한 나라에서도 잡초만 보면 잡초의 나라가 되고 꽃만 찾으면 꽃나라가 되는 것처럼, 같은 목사, 같은 교회라도 장점을 보면 좋은 목사, 좋은 교회가 되고 단점을 찾으면 나쁜 목사, 나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눈이 긍정적이고 복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미쳤다고? 미쳐도 예수님께, 하나님께 미쳤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미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전방에서 군대 생활을 하다가 제대를 하고 고향 대구로 돌아가던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건성으로 예수님을 믿었지만 2년간 군복무를 잘 마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결혼을 해야 하니 고속버스 옆자리에 결혼 상대가 될 예쁜 아가씨가 앉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평소 휴가 갈 때 보던 삼류 잡지를 사지 않고 고상한 잡지 한 권을 샀습니다. 그리고 고속버스에 앉아서 “오, 하나님이여 제가 군 생활을 성실히 했으니 좋은 아가씨를 붙여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눈을 뜨니 아주 괜찮은 아가씨가 옆에 앉습니다.
“오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주셨군요. 이제는 제가 이 아가씨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는지 구경하십시오.”
그리고 그가 아가씨에게 접근하려고 하는데 아가씨가 휴대폰을 꺼내어 전화를 했습니다. 그는 아가씨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의 통화는 원주까지, 안동까지 와도 계속되더니 버스가 대구 터미널에 도착하니 끝났습니다. 제대병은 결국 아가씨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내가 군대 생활하는 동안에 세상이 미쳤구나.”하며 버스에서 내렸다고 합니다.
휴대폰 통화를 어떻게 그리 오래 할 수가 있습니까? 사람들은 나름대로 어떤 것에 미쳐서 삽니다. 어떤 사람은 등산에 미쳐서, 어떤 사람은 술에 미쳐서, 어떤 사람은 쾌락에 미쳐서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미치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미쳐도 예수님께 미치고 교회에 미치고 은혜에 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온전해도 교회를 위하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교인들에게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으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에 대해 비난하지 마라. 바울 사도는 그런 분이 아니라 이런 분이다.”라고 받아쳐서 바울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으라고 했습니다.
주의 종에 대해 비난하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의 종에 대해 비난하는 누룩이 퍼지지 않고 좋은 누룩만 퍼지는 복된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따라 합시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것은 굉장히 원론적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핵심 교리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흠도 점도 티도 없는 의로우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 것도 있지만 모든 사람도 죽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대신 죽었으니 너희도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이제 너희의 옛사람은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대신 죽었으니 이제는 네 안에 내가 살자.’라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의 교훈은 ‘나 ○○○는 나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는 주님께서 내 안에서 사신다.’라는 의식을 갖고 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따라 합시다.
“내가 죽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이 고백, 이 신앙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그렇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고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사신다.’라고 고백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 이름을 대고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 ○○○는 죽었고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사신다.”
우리가 살아 있으니 좋지 않은 말이 퍼지고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누가 나를 푸대접한들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죽은 자는 비단 이불을 덮어준들 거적으로 덮어준들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불평하며 자신을 몰라준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다 자신이 살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죽고 예수님께서 사시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뮐러 목사님은 거룩한 분으로 기도의 성자입니다. 사람들이 그분의 얼굴을 보면 마치 주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고 그분과 함께 있으면 주님과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분이 목사님께 물었답니다.
“목사님, 당신도 사람인데, 어찌 그리 귀하게 살 수 있습니까?”
그때 뮐러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언젠가 뮐러는 죽었습니다.”
뮐러는 죽었고 이제 예수님께서 사신다는 뜻입니다. 뮐러 목사님이 예수님처럼 사니 그분을 보는 사람들이 그분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온전히 죽으면 누구처럼 설교하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설교할 것입니다. 찬양대원들이 온전히 죽으면 누구처럼 찬양하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학교 교사들이 죽으면 예수님 같은 교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사가 되시면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으로 잘 가르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장로님이 되시면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롭고 귀한 장로님이 되시겠습니까?
장로가 되고 교사가 되고 목사가 된 다음에도 자신이 살아 있으니 좋지 않은 냄새가 나고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내가 살아 있으니 남편이 무슨 말을 하면 열을 받고 아내가 무슨 말을 하면 열을 받지, 내가 죽고 예수로 살면 무슨 말을 들은들 열을 받겠습니까?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는 나는 잊어버리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다는 마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맞습니다.
제가 언젠가 병원에 심방갈 때, ‘내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함께 가신다.’ 싶으니 ‘내가 병원에 가면 환자들이 다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병원이 망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또 일찍 돌아가신 분의 장례식을 집례할 때는 ‘주여, 이 사람이 살아나면 좋겠습니다.'하며 일부러 관을 만져보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내가 죽고 예수님께서 사신다.’라는 생각을 할 때 우리가 가는 곳에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 살아나니 문제입니다. 우리는 죽고 예수님께서 살게 해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 작은 교회에서 교인들이 서로 싸워 교회가 늘 시끄러웠습니다.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괴로워서 깊이 생각하고 기도한 후 하루는 말씀을 전하기 전에 강단 앞에 시신을 담는 관을 준비해 놓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앞으로 나오셔서 말씀을 받기 전에 이 관속에 누가 들어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모든 교인들이 나와서 그 관을 들여다보고는 놀랐습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그 관에 자신의 모습을 다 볼 수 있는 큰 거울을 넣어 놓았던 것입니다.
교우들이 관을 다 본 후에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저 관에 들어갈, 죽을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죽고 예수님이 살아야 됩니다. 교회가 이렇게 시끄러운 것은 우리가 살아서 이렇습니다.”
그 말씀에 은혜를 받은 교우들이 “그래, 나는 죽었다. 주님으로 살자.”하며 그렇게 살게 되었답니다. 그 후로 그 교회가 조용하고 화목했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는 죽었고 내 안에 주님께서 사신다.’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 했으니, 여러분과 제가 주님께서 살아 움직이는 것같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아주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여러분과 저를 대신하여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 자신은 다 죽고 예수님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천국에 가는 그 날까지 이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대신 돌아가신 주님만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한 방울의 땀을 흘려도 주님을 위해, 일초의 시간을 써도 주님을 위해, 노래를 불러도 주님을 위해 하라는 것입니다. 운동을 해도 음식을 먹어도 주님의 일을 더 많이 하기 위해 운동하고 음식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옷을 입어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무슨 일을 해도 오직 주님을 위해 하라는 것입니다.
여름이 되면 각 교회에서 수련회로 강에도 가고 바다에도 가는데, 물이 있는 곳에는 될 수 있으면 가지 않아야 됩니다. 물이 있는 곳에서는 사고가 나기 쉽습니다. 그런데 교회 이름으로 물가에 갔다가 사고가 나면 교회 전체가 어렵게 됩니다. 개인이 잘못해서 사고가 나도 마귀가 그것을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름성경학교가 시작되면 행사가 끝날 때까지 긴장해서 손들고 기도합니다. 수련회 장소로 가장 좋은 곳은 교회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K시에 있는 한 교회의 중고등부는 바닷가로 수련회를 갔습니다. 학생들이 바다에 들어가 놀고 있을 때 갑자기 큰 파도가 밀려왔습니다. 그 파도에 고등학교 3학년인 한 여학생이 휩쓸렸습니다. 그것을 보고 후배 남학생 두 명이 함께 사력을 다해 여학생을 해변으로 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학생은 해변으로 나와 살게 되었는데, 힘이 빠진 두 남학생은 죽고 말았습니다.
신앙심이 좋은 그 남학생의 아버지가 “내 아들이 죽은 것은 큰 아픔이지만 그래도 선한 일을 하고 죽어서 감사하다.”고 말했지만, 얼마나 아픈 일입니까?
그 두 남학생 때문에 산 여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후배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귀하게 살겠습니다.”
이것이 의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으니 나도 주를 위해 살겠다.’
이것이 의리입니다.
의리일 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해서 우리가 주를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본문 14절)
우리가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주님을 위해 살지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히셨듯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해서 사랑 때문에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주님을 위해 일하고, 그 사랑 때문에 충성하고,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을 위해 사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창세기 29장 20절에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니 칠 년 동안의 힘든 머슴살이를 며칠처럼 기쁘게 사랑에 취해서 한 것입니다.
목회자가, 장로님이, 찬양대원이, 교사가, 차량 안내원이,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에 취해서 섬기고 봉사하면 그 교회가 얼마나 행복하고 잘 되겠습니까?
회사를 경영해도 주님을 위해서, 병원을 경영해도 주님을 위해서, 공부를 해도 주님을 위해서, 자동차를 사도 주님을 위해서, 빌딩을 지어도 주님을 위해서일 때 그 삶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자를 하나님께서 절대로 그냥 두지 않으시고, 높이 세워주시고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신앙생활은 널뛰기입니다. 널뛰기는 이쪽에서 저쪽을 굴려주면 저쪽도 이쪽을 굴려주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만 위해 살면 주님께서도 나를 위해 살아주십니다. 내가 주님을 높여 드리기 위해 살면 주님께서도 나를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게이트 스미스라는 미국의 한 교회학교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예수님의 사랑에 취해서, 예수님이 좋아서 노래를 자주 불렀습니다. 노래를 자주 부르고 잘 부르는 그를 사람들이 방송국에서 개최하는 어린이 노래 경연대회에 내보냈습니다. 그 아이가 거기에서 입선하여 상으로 5달러를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 오디션에 참가했는데 거기에서도 합격하여 매주 3,000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3,000불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음성에 감사하며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기쁘게 살았습니다. 10년 후에는 그의 노래가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매주 13,000불을 주었습니다. 당시 13,000불이면 지금의 5천만 원입니다. 그러니까 한 달에 2억을 받은 셈입니다. 미국 정부에서는 그가 최고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 해서 그에게 ‘하나님은 미국을 축복하신다(God bless America)’라는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 음반이 수백만 장이 팔렸습니다.
그는 음악학교에 입학도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 사랑에 감격해서, 또 그에게 좋은 음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서 계속하여 노래를 부르고 찬양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도 결국 미국 최고의 가수가 된 것입니다.
잠언 8장 17절에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장 21절에는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영혼과 믿음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몸도 은혜를 받고 가정도 은혜를 받고 부부 관계도 은혜를 받고 자녀도 은혜를 받습니다. 또한 우리 사업도 손이 수고한 대로 은혜 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것을 보시고 우리가 정말 주님을 위해 살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십니다.
여러분의 일생을 되돌아볼 때, ‘내가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죄인이지만, 그래도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이것은 했는데’하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옥합을 깨뜨린 적이 있습니까? 10년, 20년, 50년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남이 하는 대로만 합니까?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시고 발길을 멈추셔서 “아! 쟤가, 쟤가…….‘하시는 그런 충성을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실 그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심은, 우리가 이제 다시는 우리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산다면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한 할머니가 사랑하는 손녀를 위해 이불을 만들었습니다. 이불을 만들 때 한 땀 한 땀 이불을 꿰매면서 손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손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손녀에게, 이 할머니가 너를 사랑해서 바늘 한 땀 한 땀을 뜰 때마다 너를 위해 기도했다. 이것은 기도의 이불이란다.’
그리고 그 이불을 손녀의 생일날에 선물했습니다. 손녀는 할머니의 이불을 덮을 때마다 할머니의 사랑을 느낍니다. ‘할머니, 사랑해요. 고마워요.’ 그 이불은 사랑의 이불이요, 기도의 이불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이불을 덮고 은혜의 이불을 덮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우리는 항상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주님의 모든 것을 다 쏟으시고 우리도 주님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쏟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어떻게 살아왔든, 오늘 이 성전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가족을 대할 때도, 친구를 대할 때도 ‘나는 예수님인데…….’하며 예수님처럼 대하고, 그리고 우리의 삶이 주님을 위한 삶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우리의 삶은 피어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고후05장 11 17절 / 손상률목사
그리스도에게 미쳐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제 정신이 아닐 정도로 거기에 완전히 빠져 버린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13-14절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이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미쳤다고 할 만큼 그 행복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I. 예수님이 좋은 이유
흔히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부모와 자식관계, 형제나 친구 또는 이성간의 사랑도 그것이 순수한 사랑일 경우 거기에 무슨 이유나 조건이 전제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무조건 좋고 행복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는 성도의 경우 「예수님」의 이름만 생각해도 마냥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1) 가장 이상적인 분입니다.
술람미가 예루살렘 여자들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솔로몬의 매력적인 부분을 소개한 것을 보면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 같이 검구나”로 시작하여 비둘기 같은 눈, 향기로운 뺨, 몰약이 떨어지는 입술, 황금노리개 같은 손,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 한 몸, 화반석 기둥 같은 다리, 백향목처럼 보기 좋은 입까지 최상의 것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로 “그 전체가 사랑스럽다”고 하였습니다(아 5:10-16).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주의 능력과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지혜와 권능과 영광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며 자연과 삼라만상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나 죄가 없는 분입니다(히 4:15).
(2) 나를 알고 인정해 주십니다.
옛날 술람미는 신분상으로 솔로몬 왕과 비교가 될 수 없는 천한 여인이었습니다. 아가 1:5-6에 보면 그의 외모는 게달의 장막처럼 검고 못생겼으며, 집안에서는 오라비들의 구박에 포도원지기로 험하게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솔로몬 왕이 그를 불러 연인으로 삼고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불러주었습니다. 아가 2:2에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고 하였습니다. 아가 2:10에는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하고 그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비록 신분이 다르고 환경이 달라도 사랑으로 이해하며 아껴주고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최상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하였습니다. 아가 8:3-4에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악마가 들끓는 죄악 세상에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기도하며 붙들어 주십니다(눅 22:32).
(3) 나를 위해 희생해 주셨습니다.
본문 말씀 14절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지시고자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5:8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희생을 뜻하는 아가페사랑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남다른 감회와 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않는 자를 위한 죽음이라는 것과 죄인을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셨다는데 의미를 두었습니다(롬 5:6, 갈 1:4).
그 자신의 경우 본래 그리스도를 훼방한 자요, 교회를 핍박한 자요, 주의 종들을 폭행한 자였습니다(딤전 1:13). 그런 자기가 형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오히려 용서를 해주시고 자기를 위하여 예수께서 죽어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5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
Ⅱ. 예수님이 좋아서 행복합니다.
사람마다 기쁨이나 즐거움, 또는 행복을 느끼는 양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아름다운 꽃이나 자연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를 보고 즐기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자기 욕심대로 훼손 하고 이용을 하므로 만족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행복하고 언제나 즐거움과 감사의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1)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사모한다는 것은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대상을 마음에 담아 두고 항상 그리워하며 즐기는 태도를 뜻합니다. 이런 것은 육체적이거나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뜻하며, 현세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내세적이며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18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전 3:11). 잠시잠간 살다가 끝나는 세상살이에서도 영원한 세계의 실제를 알고 그것을 그리워하면서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한 평생을 나그네로 지냈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성을 사모하며 살았더라고 하였습니다(히 11:16).
선지자 이사야는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라고 하였습니다(사 26:9). 우리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히 사모할 대상이기 때문에 항상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가까이 다가가면서 최상의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히 12:2).
(2)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성숙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예수님의 성품으로 닮아가며 그의 삶에 동화되는 것입니다. 간혹 개성이 강하고 자기중심의 삶을 고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가지 못하는 문제로 인하여 깊은 회의와 갈등을 가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그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그의 겉사람이 육신의 법을 좋아하여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멀어지게 한다고 하였고, 이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라고 탄식하였습니다(롬 7:22-25).
그러나 신앙적 의지를 가지고 매진하는 사람은 성령의 강권적인 은사에 힘 입혀져서 점차 예수님을 닮아가며 그리스도로 행동하게 됩니다. 빌립보서 2:5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13에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14절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의 비결이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에 의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3)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생태계에서 애벌레가 자라 성충이 되고 번데기가 되면 거기서 꺼풀을 벗고 나방이 되어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랍비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중생(重生)의 도리를 말씀하셨습니다(요 3:5-7). 본문 말씀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을 뜻합니다. 육신의 사람이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의미입니다.
이 경우 지금까지 육신에 얽매여서 자기의 정욕대로 살던 사람이 이제부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에 맞도록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롬 7:8-14). 그뿐 아니라 예수님과 호흡을 같이 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며 거기서 최상의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Ⅲ.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자기를 위하여 살았던 사람이 이제부터 나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1) 주와 복음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그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분부하신 지상명령(至上命令)이 모든 족속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마 28:19-20).
사도 바울은 평생 동안 예수 그리스도에게 빚을 갚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로마서 1:14-15에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좋은 만큼 그를 위하여 전도하는 열정도 대단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6:24-29에 보면 그가 베스도 총독과 헤롯 아그립바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논증하자 총독은 바울을 향해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전도의 사명을 인식하는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누구 앞에서나 입만 벌리면 예수를 전하곤 합니다(딤후 4:2). 다른 사람이 볼 때 제 정신이 아니거나 「예수에 미친 사람」정도로 취급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 자신은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하였습니다(13-14절).
(2) 몸된 교회를 위하여
골로새서 1:24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여인이 유복자(遺腹子)를 키우면서 남편에 대한 애정을 거기에다 쏟는 것처럼 예수의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모든 정성을 쏟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당부한 말을 보면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행 20:19-20).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멸시나 수모도 감내하면서 교회를 위하는 일념으로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재판에 나오는 산 아이의 어미가 자식의 생명을 위해서 자기의 옳은 것을 주장하지 않고 권리마저 포기해 버리듯이(왕상 3:16-28), 교회에 유익되는 일이라면 자존심과 명예를 다 내어 놓는 자세로 살아갑니다.
(3)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 위하여
자기가 죽도록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자기에게 가장 큰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이라면 그를 위해서 몸을 던지고 헌신하는 것을 더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위나라의 장수 오기(吳起)는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에게 다가가서 직접 입으로 고름을 빨아주고 살려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병사의 어머니는 ‘이제 내 아들이 장군에게 충성을 바치다가 전쟁터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존귀하신 예수님께서 크신 사랑을 베푸시고 자기 생명을 희생하여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도 또한 주님을 위하는 일에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빌 1:20-21).
사람을 근사하게하시는 하나님
고후05장 11~19절 / 김동호목사
우리는 요즘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환경이 바뀌는 것을 복(福)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좋지 못한 환경이 좋은 환경으로 바뀌는 것을 복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은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좋지 못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으로, 형편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복 중에 최고의 복은 환경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는 복입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었습니다. 모양은 물론이고, 하는 생각과 행동 그리고 삶 전체가 하나님을 닮아 참으로 근사하고 훌륭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는 순간 그 놀라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우리 사람처럼 악하고 추하고 더러운 것이 없다하리만큼 우리 인간은 타락하고 부패하였습니다. 근사하고 훌륭하다는 말을 감히 쓸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겉으로는 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비겁합니다. 정직하지 못합니다. 야비합니다. 욕심 사납습니다. 악합니다. 추합니다. 부끄럽습니다. 우리의 은밀한 생각과 삶들이 만일 드러나게 된다면, 들통 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수치 때문에 잠시도 견디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성경에 보니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미처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못한 죄인들이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이 너무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워서 산과 바위에게 무너져 자기를 덮어 달라고 소리 지르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비하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가리워 주시고 덮어 주셔서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수치 때문에 한시도 얼굴을 들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고사하고 사람을 마주 대하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말씀이 옳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우리는, 저와 여러분들은,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될 가능성과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복음 중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함 받게 되었습니다. 주홍 같이 붉은 죄가, 진홍 같이 붉은 죄가 흰 눈 같이, 양털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옮기어 졌습니다. 하나님조차 기억치 못하시게 되었습니다.
시험을 보다가 답을 잘못 적으면 선생이 다시 해 시험지를 주시듯, 그림을 그리다가 망친 학생에게 선생님이 다시 새 도화지를 주시듯,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망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새 도화지를 주시며 다시 시작하라 하십니다. 내가 너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씻어 주고 사하여 주었으니, 그리고 시간도 다시 충분히 줄 터이니 용기를 내어 다시 아름답고 근사한 인생을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아 그 값을 치루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학생 때 읽은 소설 중에 아주 감동적으로 읽은 소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미우라 아야꼬’라는 여류 소설가가 쓴 ‘양 치는 언덕’이라는 소설입니다. 소설의 여 주인공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목사의 딸입니다. ‘료오이찌’라는 사람과 눈이 맞아 부모를 버리고 집을 나갑니다. 한 일 이년 정도를 함께 살았지만, 술버릇이 나쁘고 바람 끼가 심한 남편과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어서 도망을 나와 다시 친정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료오이찌가 폐병에 걸려 나오미에게로 옵니다. 나오미는 받아주려 하지 않았지만 친정 부모의 권면으로 받아 주게 됩니다. 처갓집에서 투병 생활을 하던 료오이찌는 장인 장모의 믿음에 감동을 받아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서 점점 몸과 마음이 건강해 져 갑니다. 료오이찌는 투병생활을 하면서 매일 다락방에 올라가 그림을 그립니다. 나오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기 위하여 그리는 그림이었지만 그는 자기가 그리는 그림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언제나 하얀 천으로 덮어 놓습니다. 나오미에게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전에 사귀던 전에 사귀던 좋지 못한 여자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할 수 없이 나가서 만납니다. 그 여자가 술을 권하지만 사양합니다. 하룻밤 함께 지내자며 유혹하지만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 여자가 몰래 술에 수면제를 타 넣은 후 이 술 한 잔만 마시면 보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모르는 료오이찌는 그 술을 받아 마십니다. 그리고 잠이 오지만 그곳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나왔다가 길거리에서 잠이 들어 동사합니다.
그 소설의 클라이막스는 료오이찌를 장례한 후 료오이찌의 그림을 벗겨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는 예수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료오이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읽다가 받은 충격과 감동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때 저는 속으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료오이찌는 깨끗하다. 료오이찌는 아름답다. 료오이찌는 구원 받았다.>
그리고 그때 마음에 떠오른 찬송 하나가 있었습니다. 202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이라는 찬송이었습니다. 그 찬송 중에 강하게 내 마음을 때린 가사는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는 가사였습니다. 저는 그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깨끗케 하시는가를 100%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던 사람입니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밧세바의 남편이요 충성스러운 부하였던 우리아를 비열한 방법으로 죽이게 합니다. 요즘도 그와 같은 죄를 짓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게 된다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죄를 지은 다윗이 다시 성군이 되고, 믿음의 조상이 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던 것도 십자가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윗은 십자가 이전의 사람인데 어떻게 십자가 때문에 다윗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십자가는 역사적이면서 동시에 초역사적인 사건입니다. 2,000여 년 전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그 능력과 의미는 초역사적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보혈의 능력은 역사적인 십자가 사건 이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십자가 사건 이전에도 동일하게 역사한다는 면에서 십자가의 사건은 초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전부터 있었던 것을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죄 사함을 받는 것이고, 십자가 사건 이전의 다윗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비열한 짓을 한 다윗이 료오이찌처럼 깨끗해졌습니다. 아름다워졌습니다.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워서 시편 32편 1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 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 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아멘. 다윗의 죄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죄의 사슬과 결박을 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돈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왕의 권력으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와 같은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죄를 가지고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다윗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습니다. 완벽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다윗은 그 기회를 잡고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는 이와 같은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신약의 사도 바울에게서도 그와 같은 다윗의 은혜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시편 32편 1절과 같은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중에 나오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아멘.
사도 바울이 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 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서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딸 받으려 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 모든 사람의 죄가 그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사실을 오늘 본문 14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의 죄가 함께 죽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복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되고, 예수를 믿으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낫고, 기도를 통하여 자기의 소원을 이루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축복입니다.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할 때,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고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를 하며 모세의 이야기를 할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그 설교를 들으셨습니다. 혹시 여러분과는 상관없는 말씀으로 듣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이니까, 모세니까, 요셉이니까 되었지 나는 그와 같이 훌륭한 사람이 못 되.’ 이렇게 생각하며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같이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신 이유가 여러분과 하나님만이 아시는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요셉되고, 야곱이 야곱되고, 모세가 모세된 것은 다 저들이 요셉과 야곱과 모세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들을 깨끗케 하시고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도 우리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훌륭해서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훌륭하지 못해서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못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가리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게 하시고 새것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 은혜와 축복을 알게 되면 다른 축복에는 별로 관심이 없게 됩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하나입니다. 나 중심적인 삶을 살 때는 사는 것이 좋고 죽는 것은 싫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알아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게 되면 사는 것도 주를 위하여 죽은 것도 주를 위하여가 됩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매 일반입니다. 가난과 부함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얼마든지 가난해 질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된다고 하여도 부자의 의미는 부에 대한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주를 위하여 더 많이 쓸 수 있음에 있습니다.
다윗과 바울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던지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털어 하나님의 전을 짓고 싶어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도 오늘 본문 속에 평생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고 싶어 하는 열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시는 도다.>(14절)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13절. 바울은 정말 주를 위하여 미친 사람처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십자가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를 위하여 죽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그와 같은 마음을 오늘 본문 15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아멘.
여러분 부자와 가난한 자를 어떻게 구별하시는지 아십니까? 누가 부자이고, 누가 가난한 사람입니까? 부자와 가난한 자를 어떻게, 어떤 기준으로 구별할 수 있으십니까? ‘이만하면 충분하다. 더 모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자랍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과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아직은 충분하지 않다. 조금 더 모아야 하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랍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진정한 의미에서 부자였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왕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 부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솔로몬의 그의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모든 강물을 바다로 연하여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부자고 솔로몬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과 은혜를 안 바울은 다른 축복은 그에 비하면 마치 배설물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강함과 부함을 부정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세상적인 강함과 부함은 더 이상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될 수 없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누구이시든지 간에 아무 상관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허물과 죄가 얼마나 크던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가 다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허물과 죄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와 축복이 너무 커서 평생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살고 죽는 것의 의미와 목적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두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그리스도인의 삶
고후 05장 11~19절 / 박조준목사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고마운 뜻을 표합니다. 부족한 사람은 지 난 두 주간 동안 미국 뉴욕 지구 장로교 연합 전도대회와 구암도 전도집회를 위하여 다녀왔습 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셔서 전도 집회가 퍽 성황리에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뉴욕에서 10여 차례 연합 집회를 가진바 있었지만 이번 집회가 가장 크게 은혜 중에 이루어졌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저의 배후에서 기도해 주시는 여러분의 기도 때문이라고 믿어집니다. 그리고 뉴욕에만도 우리 영락의 식구가 수백 세대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그 분들은 한국에 계실 때보다 물질적으로는 넉넉하게 삽니다. 기름진 음식을 잡숫고 좋은 옷을 입고 큰 차를 타고 다니십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언제나 본국의 영락 교회가 그리워 향수에 젖어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람의 사는 것이 떡으로만 사는 것 아니요 가산의 넉넉한데 있지 않 다 는 진리가 너무 실감이 있었습니다. 만나시는 분마다 본 교회의 여러분에게 문안을 부탁하셨는데 너무 여러분이시기 때문에 일일 이 말씀드리지 못하고 그저 이 자리를 빌어서 몰아 문안을 전합니다. 본국에 계실 때는 그저 예배당에나 겨우 따라 나오시던 분 중에 미국 가셔서 깊은 신앙생활 을 하고 교회를 충성다해 섬기시는 분들도 여러분 만나뵙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지난 주간에는 우리 교회 제2부 여전도회에서 선교사로 파송한 주선동 목사님이 일보 시는 구암도에 들렸었습니다. 무더운 여름 날씨만이 계속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열심히 일하 고 계셨습니다. 주 선교사님 가정도 다 평안하시고 선교사역도 성공적으로 하시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더구나 구암에서는 한국에서 취업차 가신 분이 많기 때문에 공사 현장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 노라고 애쓰고 특히 외지에서 외로워하고 좌절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통해서 위 로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가지는 집회가 구암 연합교회가 시작된지 6년만에 처음으로 가지는 집회였기 때문에 온 교우들이 얼마나 열심히 즐거운 마음으로 집회를 준비하고 진행해서 기대하던 것 이상의 좋 은 성과를 보고 즐거워들 하시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교회에는 우리 교회에 계시던 현수길 장로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서울의 영락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특별히 제2부 여전도회와 선교비를 부담하시는 김 집사님 가정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저 우리 한국 동포들이 어디 가나 교회 설립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축복 받은 민족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에서는 총동원 전도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여러분께서 이 일에 적극 협 력하여 주셔서 새 교우를 많이 모시고 나오시는 것을 볼 때 감사합니다. 오늘 뿐만 아니라 앞 으로 계속 잘 인도하셔서 완전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 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 : 17)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며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할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생활을 하도록 부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창조적인 생활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돌아와 중생을 체험할 때 하나님은 그를 위해 일하시고 또 그의 마음 속에 들어와 일 하십니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된다는 말은 마음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래 서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을 통해서 완전히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 에스겔 36장 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 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하였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의 영에 참예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잡혀 성령의 역사에 내맡겨질 때 하나님은 그의 생활 속에서 무슨 일을 해내실 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가능성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독특한 점은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지배 를 받을 때 인간의 능력은 창조적인 구속 사업에 쓰여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서 떠날 때 인간은 그의 재능과 특권을 잘못된데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위대한 기계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을 때 파괴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게 됩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장수하는 법을 연구해 냅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평안과 영적인 안정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늘어난 수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하 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도했던 대로 창조력을 발휘하지 못 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의 자유임을 깨닫지 못한데서 생긴 것입 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으 로부터 자유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무한한 존엄성과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창조적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해서 그럽니다. 그래서 신앙과 영력에 지장 을 가져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성령이 들어와 역사하실 주님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초대 교인들을 보세요. 저희들은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후에 그들의 생활 속에는 창조 의 원동력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령은 사람들에게 꿈을 가져다주며 그 꿈을 현실로 바꿔 줍니다. 아마 오늘 우리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 환상을 보고 꿈을 꾸 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지 못합니까?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배하게 하지 않을 때 우리를 통해 일하실 수 없습 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누가복음 11장 28절에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 니라 하였습니다. 인간의 복종은 하나님의 축복과 직결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3 - 24절에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 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내려 주십니다. 주님에게 순종할 때 주 님의 임재하심을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성령이 충만히 임해서 창 조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신학상의 혼동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바르지 못하면 행동도 바르지 못한 것이 당연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머리 속에 나타나는 혼동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책임만을 너무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역사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쪽이던 인간 쪽이던 어느 한 쪽의 역할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불균형과 실 패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사실 동역자입니다. 창조적인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결코 잊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나 내 자신이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더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달려 있고 인간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처럼 생 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오용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게 할 위험이 있습 니다. 성경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롬 12 : 1) 하였습니다. 우리 자신을 매일 사용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사람은 창조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 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모든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내어놓기를 바라십니다. 로마서 6장 13절에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고 하 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자기의 몸을 하나님의 도우심에 맡길 때 그들은 하 나님과 함께 창조적인 일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창조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셋째 이유는 믿음이 약해서 그럽니다. 믿음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내 생활 속에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관계를 나타내는 것 다시 말하면 누군가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누구라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야말로 믿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창조의 활동을 펴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창조의 능력을 받을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많 은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더 놀라운 일을 하게 되실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구하여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업에 대하여 이것은 전혀 우리 의 믿음에 달려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29절에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셨고 마태복음 21장 22절에는 너희가 기도할 때 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 노니 하셨고 말세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 셨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믿음을 실천하는 자들에게 응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믿음은 하 나님의 창조력을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불러들여 큰 능력을 발휘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창조적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창조적이란 말은 자기 자신을 극히 독특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적인 계획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계 획에 따라 각 개인은 자기의 개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개성을 계획하심에 있어서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하 나님은 어떤 그리스도인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한 가지 재능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다섯가지 재능을 가진 사람보다 더 큰 능력을 나타 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의 개성을 찾고 그 개성을 발휘하여 창조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줄 때 가장 훌륭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직업에 관계없이 창조적인 생활을 하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창의성이란 교향곡을 작곡하거나 시를 쓰거나 미술 작품을 만드는 것같은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적 생활이란 그 이상의 것을 포함합니다. 작곡이나 글을 쓰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것만이 창조 생활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거의 모두가 창 조적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의 생활을 통해서 창조적 생활을 하며 개성을 발휘하게 하십니다. 창조란 좋지 못한 것을 좋은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도 그의 제자인 그 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그 생활 속에서 창조적인 생활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친구로 만드는 것도 창조적인 생활입니다.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힘든 하루를 맞이하는 것도 창조적 생활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것도 창조적인 생활입니다. 가정 부인이 무질서한 가구를 정돈해 놓는 것도 창조적인 것입니다. 교사가 학급에 들어가 공부하는 일에 흥미없어 하는 학생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도 창조적 생활입니다. 사업하는 분이 다른 사람의 이익에 도움을 줄 때 그는 창조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문제 중에 하나는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데만 관심의 초점을 두다 보니까 그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무관심하는 경향이 있습 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됨됨이를 가지고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우리의 사람됨이 모든 생활 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 고 하였습니 다. 창조적인 생활은 자기의 삶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바꿔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얼른 생각할 때 그리스도와 같은 덕성은 여러가지 면에서 현대 가치 기준에 맞지 아니합니 다. 우리는 지배하는 요령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섬기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주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엇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 판단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은 진 리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 바로 살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제공해 주십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조언자요 표본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창조적인 삶이란 우리 인간성을 온전히 개발하는 것이며 생활 속의 기쁨,슬픔, 좌절 그리고 기회들을 그리스도다운 방법으로 말할 수 있을 때 창의력이 가장 의미깊게 나타나 는 것입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인의 창의적인 삶은 종의 자세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예나 지금이나 그 제자들을 통해 역사하셔서 다른 사람을 섬기게 하십니다. 그리 스도의 정신으로 대접한 냉수 한 그릇도 치유와 화해의 창조적 행위에 따른 것입니다. 주님에게 충성하는 삶을 살 때 주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능력을 여러 갑절로 확대시 켜 다른 사람에 대한 축복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주님에게 굴복시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내 마음 속에 들어오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 분을 닮아 그분처럼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이 시간도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에게 완전히 지배권을 넘겨 주기만 하면 나는 너를 복주어 가장 귀한 사람이 되게 하겠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기꺼이 주님에게 내어놓을 때 우리의 헌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의 전부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의지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우 리로 하여금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적인 생활은 개인의 완성을 가져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 신 8복에 보면 복이 있다 는 말씀이 거의 매절에 나타납니다. 주님은 이렇게 복된 것에 대해서 많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축복을 피하여 다니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은 미래에 주실 축복의 약속이나 장차 서서히 이루어질 선물로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현재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행복이란 환경이나 소유불에 의한 것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에게 있어서의 행복은 우연이나 운명의 변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 각자에 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기쁨과 축복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인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6장 2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행복의 길입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뿌리박은 행복은 그 제자들의 창 조적인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역대하 16장 9절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 하여 능력을 베푸신다 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그러한 축복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창조적인 생활을 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 서의 참 기쁨을 맛보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리스도인의 창조적 생활을 하며 참 복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고후05장 13~19절 / 김광일목사
‘하프 타임(Half Time)’의 저자 밥 버포드 (Bob Buford)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99년 은퇴할 때까지 미국 최고의 유선 텔레비전 방송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한 사업가였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승승장구하여 실패를 몰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성공에 지나치게 중독되지 않고자 노력했을 뿐입니다. 그러던 중 44세 때 아들이 친구들과 캠핑을 하던 중 급류에 휩쓸려 실종되었습니다.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미친 듯이 아들을 찾으려고 강가를 헤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머리를 스쳐 지나간 단어가 ‘하프 타임’이었습니다. 그동안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사업을 하느라 아들하고 대화도 제대로 못하고 모든 것을 성공에 올인하며 살았습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아들을 찾았지만 4개월 만에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동안 나는 무얼 위해 살아왔나?’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삶이야말로 의미있는 인생을 살겠노라 결심하고 책을 저술했습니다. 바로 ‘하프 타임(Half Time)’입니다. 축구 경기를. 보면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에 15분의 하프 타임이 있습니다. 하프 타임이 승리의 열쇠입니다. 15분의 하프 타임을 잘 보낸 팀은 후반전에 역전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축구 전문가들은 하프 타임을 ’기적을 만드는 15분‘이라고 말합니다. 하프 타임은 ’전반전에 무엇이 문제였나? 뭘 잘못했나? 왜 이기지 못했는가?‘를 점검하며 후반전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인생에도 전반전이 있고 후반전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하프 타임이 있습니다. 밥 버포드는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생의 밑 그림을 다시 그렸습니다. 하나님 아니면 돈,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인생의 후반전에 시간과 돈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기로 하고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 전반전이 ‘성공지향적 삶’(success oriented life)이었다면 인생의 후반전은 ‘의미지향적 삶’(significance oriented life)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생,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까?’ 인생의 전반전에 무엇이 문제인가? 무얼 잘못했나? 과연 의미있는 삶을 살았는가? 철저히 점검하는 하프 타임을 가져야 합니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함께 ‘신실하게 진실하게’ 찬양합니다.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기도 들어주소서 하나님 주의 길로 인도하소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사랑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살리고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으로의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바울은 삶의 변화를 가져온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였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사람들의 가치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육체적 시각으로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알아가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리라고 말합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리라
국내 최초로 호스피스 제도를 도입한 전 이화여대 간호대학장 김수지(金秀智)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1948년 여순 반란 사건 때 총살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남성을 돌봐주던 간호사에게 감동을 받고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화여대 간호학과에 들어갔고 1978년 미국 유학을 통해 보스턴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왜 간호사가 되셨어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김 박사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간호사로 부르셨다. 간호사는 돌보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나를 돌보셨다. 그 하나님의 돌보심이야말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돌보아야 할 분명한 이유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군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심으로 생각과 삶이 변하고 주위까지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신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만난 하나님, 그 분은 돌보시는 분이시다. 나를 돌보셨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돌보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내게 성공은 예수처럼 돌보며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나는 죽는 날까지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본문 13절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여기의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는 원어로 ‘데오’인데 ‘자기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살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신으로 인하여 살게 된 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목숨을 내어주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오해와 비판을 듣습니다. 그러나 미친 사람이란 소리를 들어도 낙심치 말고 더욱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리라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마땅히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새로운 피조물로 살리라
김형국 목사는 ‘만남은 멈추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예전에 선교 단체에서 함께 사역했던 여학생의 이야기를 합니다. 대안 학교 교장이 되었다는 그녀를 오랜만에 만난 그는 충격적인 고백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저 솔직히 마흔 살에 예수를 만났어요.” “아니, 전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같이 하며 찬양곡도 만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자 그녀가 대답합니다. “교회 생활은 열심히 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았어요. 그런데 그게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때 제 모습은 마치 오물을 실크 스카프에 둘둘 말아서 가지고 다니는 형국이었을 거예요. 남들은 그게 고급스러운 스카프인 줄 알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배설물밖에 없었어요. 나이 마흔에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야 지금껏 저 자신을 속이고 꾸며 온 죄를 깨달았죠. 그제서야 제가 하나님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께 인생을 온전히 의탁하게 되었어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기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원어로 ‘카이네 크티시스’인데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본성을 지닌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새 생명을 얻은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재창조로 새로운 본성을 지니게 된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새로운 피조물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혹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외치고 다닌다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이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더욱 주님을 경외하며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하늘의 가치관으로 일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화목의 직분으로 살리라
남아 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 (Desmond Mpilo Tutu) 성공회 대주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43년 12살 때 가족과 함께 성공회 신자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 신부 복장을 한 백인이 지나가다가 어머니에게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것을 보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백인이 흑인 여성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당시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난으로 의대를 포기하고 성직자의 길로 들어선 그는 1975년 44세 때 처음으로 흑인 주교가 되었고, 이후 케이프타운의 대주교로 활동했습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 의장의 중책을 맡은 그는 남아공의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모든 인종 집단의 평화적 공존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무지개 백성입니다’라며 ‘무지개 국가’(Rainbow Nation)를 주창하고 용서와 화해를 역설했습니다. 1984년 53세 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그는 백인 개혁교회 지도자들과 반인종 차별정책 지도자들과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인 1990년 루스텐버그 교회 회의 (Rustenberg Church Conference)에서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화해가 이루어지려면 그리스도의 사신인 우리, 화해의 직분을 맡은 우리가,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화해해야 합니다. 불의와 억압의 희생자들을 용서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명령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우리가 불의를 행함으로 여러분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기본권을 짓밟음으로 상처를 입혔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8절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여기의 ‘화목하게 하는 직분’은 원어로 ‘디아코니안 테스 카탈라게스’인데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직책’을 의미합니다. 죄로 발생한 하나님과의 불화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으로 다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죄인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이 화해의 복음을 전하도록 우리에게 부탁하셨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화목을 전하는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십자가 화목의 은혜를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과 화목하게 되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독일의 경건주의자로 모라비안 공동체를 이끈 진젠도르프 (Nicolaus Ludwig von Zinzendorf) 백작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720년 학업을 마치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유럽 각지를 여행하였습니다. 뒤셀도르프(Dusseldorf) 박물관에서 ‘에케 호모(Ecce Homo-이 사람을 보라)’는 그림을 보았습니다. 이 말은 총독 빌라도가 재판석에서 예수를 가리켜 한 말이었습니다. 박물관에 걸린 그림은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리스도의 초상화였습니다. 그림 밑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내 생명을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주었느냐?” 진젠도르프는 그림 앞에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사랑해 왔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위하여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남은 여생을 예수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그 후 모라비안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경건운동과 선교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의 경건은 요한 웨슬리의 회심으로 이어졌으며 감리교 부흥을 이끌어냈습니다. 28년간 226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까지 자신 앞에 놓여 있는 번영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진젠도르프가 강조한 말이 있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신조가 아니라 경건에 있다. 나에게는 단 한 가지 열망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 오직 그 분을 위하는 것뿐이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힘이 있고 기회가 있을 때에 헌신해야 합니다. 날이 저물 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저물어 우리의 생명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전해야 합니다. 부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답게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화목의 직분을 감당하여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미쳐라
이성희목사 / 욥기 36:1-2, 고린도후서 5:13-15
서론
얼마 전에 눈길을 끈 광고가 있었습니다. ‘아픔 없이 성공 없다’, ‘1년만 미쳐라’는 광고입니다.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앞만 보고 나가라는 희망을 주는 광고입니다. 최근에 ‘미쳐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들이 많습니다. ‘공부에 미쳐라’, ‘건강에 미쳐라’, ‘자기계발에 미쳐라’, ‘20대, 인테크에 미쳐라’, ‘서른 살, 만남에 미쳐라’ 등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하는 어떤 일에 미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미친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돈에 미친 사람도 있고, 사랑에 미친 사람도 있고, 도박에 미친 사람도 있고, 사업에 미친 사람도 있고, 공부에 미친 사람도 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친 자가 대가를 얻게 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미치다’라는 말에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니아’인데 포악하고, 거세어지는 광기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쫓아내어 돼지에게 들어가게 하신 군대귀신이 쇠사슬에 매어 있는데 이것이 ‘마니아’입니다. 다른 하나는 ‘맬랑콜리아’인데 조용하고 우울한 귀신입니다. 흔히 말하는 우울증을 일으키는 것이 ‘맬랑콜리아’입니다. 요즘에도 흔히 어떤 일에 광적으로 빠져 좋아하는 사람을 ‘마니아’라 합니다. 우울한 증세를 ‘맬랑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미치는 것은 ‘마니아’도 ‘맬랑콜리아’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미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하나님을 위한 열정과 열광을 의미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사람을 미쳤다고 합니다. 이런 미침은 참 좋은 것입니다.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선지자와 갈멜산에서 참 신을 가립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응답하시자 엘리야는 450명을 다 죽였습니다. 바알선지자가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아합 왕의 왕비인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합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을 피하여 산으로 도망합니다. 열왕기상 19:10에는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유별했습니다. 하나님께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 고소를 당하여 총독 베스도 앞에 섰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일을 간증하였고, 사도행전 26:24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은 예수님과의 신비한 만남을 간증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비한 체험을 알지 못하므로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열정’이란 말의 헬라어 어원은 ‘en’이란 하나를 뜻하고, ‘theos’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엔테오스/엔테우스(entheos/entheus)란 하나님과 하나 됨을 의미하며, 열정이란 하나님 즉 초인적인 존재가 가진 힘이라는 뜻입니다. 열광하는 자(enthusiasm)란 하나님과 하나가 된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친다는 것은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대상에게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을 미친다고 합니다. 미친다는 것은 자연에 몰입하는 것이며, 자기 목숨을 태우는 것입니다.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치다’는 말은 ‘다다르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다다를 수 없다’(不狂不及)는 말도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미친다고 합니다. 바울이 가졌던 하나님을 위한 열정을 엿볼 수 있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열심을 표현한 말입니다. 이런 그의 미침이 하나님께 다다르는 힘입니다. 우리도 이런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미치는 열정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자신의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임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13 상반절에는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하는 일이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일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은 죽었고 하나님만 계십니다.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의 일’이며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미쳤어도’라는 말은 헬라어 ‘엑세스테멘’인데 황홀경(ecstasy)이란 뜻의 ‘엑스타시스’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이 말은 종교적 무아경의 상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정신이 나간 상태를 의미합니다. 바울에게는 하나님께 정신이 빠진 무아경의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께 미친 자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한 바대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자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유익을 구하며 삽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꾼은 하나님을 위해 미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말로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실망하고, 자기 일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 일에서 떠나기도 합니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주를 위하여 거하실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라고 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일꾼을 찾으시고, 이사야는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며 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주를 위하여 갇힌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일은 모두 다 자신이 아니라 주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로마서 14:8에서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며 나아가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한 바울을 보면 미쳐도 단단히 미쳤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불꽃을 피우는 열정으로 일했습니다. 그의 생각과 삶이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향해 있었습니다. “열정 없이 성취된 위대함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식지 않고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위대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은 종교 개혁가들의 개혁의 모토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개혁가들이 아니라 바울이 이미 말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먹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마시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열정은 하나님께 미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열정을 가질 때 가능한 일입니다. 열정은 모든 일에 챔피언을 만듭니다.
철학자 안병욱교수님의 ‘인생사전’에는 ‘미치다’는 말은 미칠 광(狂)과 미칠 달(達)이 있는데 우리는 미칠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미치되 올바로 미치고 오래 미쳐야 한다고 합니다. 미친다는 말은 도달하고, 통한다는 뜻인데 올바로 미치는 사람만 올바른 목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미치지 못하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미치려면(及) 미쳐야(狂)합니다. 미쳐야(狂) 미칠(及)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일에 미쳐 삽니다. 도박장은 3무(無)의 세계입니다. 거울과 시계와 창문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보지 못하게 하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하고,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게 하고 도박에만 열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어떤 이는 일 년 내내 쉬는 날이 없이 미친 듯이 일을 합니다. 새벽에 우유배달하고, 낮에 퀵서비스 하고, 밤에는 다시 슈퍼마켓에 가서 ‘알바’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봐도 그 정도 일을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그 외에도 세상일에 미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일에 미친 사람은 성경은 귓전에 흘리고 세상 말은 귀에 속속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잘 안 듣지만 의사의 말은 목숨 걸고 지킵니다.
찬송가 가사에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삶에 주님만 보이는 것, 이런 삶이 하나님께 미친 삶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찬송은 그렇게 하면서 “구속한 주는 간 곳 없고 세상의 일만 보이도다”로 살아갑니다.
“움직이게 하는 것은 피스톤이나 기계가 아니고 증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를 움직이는 것은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라는 에너지입니다. 미친 듯한 하나님께 대한 열정이 격렬한 힘의 원천입니다. 이런 열정을 가지고 살아야 교회가 살고 우리의 신앙적 삶이 삽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지만 미친 것이 아니라 온전한 정신으로 말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친 듯이 보일 것입니다. 미친 사람은 미친 사람을 알아보는 것 같습니다. 미친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귀신들끼리는 안 싸우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우리가 미칩시다. 미쳐서(狂) 하나님께 미치고, 하나님의 나라에 잘 도달하는(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신의 일이 다른 사람을 위한 일임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13 하반절에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일은 다른 사람을 위한 삶입니다. 본회퍼가 말한 대로 우리는 ‘타자를 위한 존재’입니다.
“정신이 온전하여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소프로누멘’으로 ‘분별력 있는’, ‘자제하는’의 뜻입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이성으로 깨달은 바를 말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은 잠시도 정신 줄을 놓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쳤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바울은 이전에 율법중심, 자기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중심, 타인중심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타인중심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19세기 벨기에의 성자 다미안은 하와이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는 작은 섬 몰로카이에 한센환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한센환자들을 섬기기 위해 몰로카이로 갔습니다. 다미안 한 사람이 600명의 환자를 돌볼 만큼 환자는 많고 섬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건강한 몸으로 환자들을 섬기는 일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도 한센병이 걸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결국 자신이 감염되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다미안은 49세에 몰로카이에서 한센환자들을 섬기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도의 성자 스탠리 존스는 선교지에서 89세에 뇌일혈로 쓰러졌습니다. 미국 선교본부에서는 그를 강제 송환하여 입원시켰습니다. 그는 치료를 받은 후에 일어나 90세에 다시 인도로 돌아가 선교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종지부(period)를 찍기 전까지는 절대로 자기가 쉼표(comma)를 찍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20세기 초 미국 의사 클라우드 H. 바로우(Claude H. Barow)는 중국 샤오싱에서 의료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치료법을 알지 못하는 괴질이 창궐하여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바로우는 수백 가지 질병의 특징을 관찰한 것들을 노트에 빽빽하게 기록하고, 병원체를 작은 약병에 넣어 미국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미국에 도착하기 전 그는 병원체를 자신의 몸에 넣고 존스홉킨스 대학병원으로 갔습니다. 바로우는 심한 병을 앓는 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교수들에게 괴질에 관한 연구와 실험을 위한 실험재료로 자신을 맡겼습니다. 드디어 치료방법을 발견하여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서 수많은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병원체를 몸에 투입한 자신의 경험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누구라도 이러한 일을 했을 것입니다. 난 단지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나의 몸을 제공할 기회를 가졌을 뿐이지요”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이런 사람을 세상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네팔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강원희선교사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로서 광주제중병원과 전주예수병원에서 좋은 두 의사선교사를 만나 선교사의 꿈을 키웠습니다. 두 미국인 선교사는 그의 롤 모델이었고 자신도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해 준 분들이었습니다. 49세에 네팔로 파송을 받아 지금껏 그곳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히말라야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라는 찬양이 이들에게 알맞은 찬양입니다. 타인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질 줄 아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며 하나님께 미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 몸을 던질 줄 아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 몸을 던질 줄 아는 것은 사랑 때문이며 이것이 복음증거입니다.
야구에서 희생번트와 희생타는 또 다른 작전이며 기술입니다. 나는 죽지만 나의 팀을 살리는 것이 희생번트이며 희생타입니다. 희생번트나 희생타를 잘 치는 사람은 팀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입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팀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욕심으로만 치는 사람은 병살타를 치기 일쑤입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은 이기적이지만 그 사람의 멍에를 지기를 원하는 것은 이타적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해야 멍에를 져주고, 자기를 온전히 주는 희생이 가능합니다. 이런 사람은 잘 미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5:13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고린도전서 9:22에는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영혼사랑의 모범을 보인 희생적 발언입니다.
열광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열광한다면 무엇에든 성공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나 미치면 힘이 있고, 미쳐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선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온전한 삶이란 거룩한 열망을 갖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일에 미치고 열망을 가지고 하면 성공할 수 있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사색전’이란 걸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색하면서 쓴 글들을 정리한 전시회입니다. 저는 ‘이타심 즉 이기심’이란 글을 써서 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든지 의롭게 대하면 그것이 내게 돌아와 결국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타인을 위한 것이 진정 자신을 위한 일이 됩니다. 이타심은 이기심이 되어 내게로 돌아옵니다. 사랑은 부메랑 효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미쳐야 사랑에 미치고, 타인의 영혼에 가슴 저미는 관심을 가집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타인의 영혼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예수를 전하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 론
아들의 방탕을 염려한 아버지가 랍비에게 “랍비님, 내 아들이 미쳤나 봅니다. 돼지고기를 보면 미친 듯이 먹어치우고 기독교를 믿는 여자에게 입을 맞추니 어쩌면 좋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아들도 “랍비님, 제 자신이 생각해도 머리가 돌았나 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랍비는 “머리가 돌다니? 네가 만일 돼지고기에 입을 맞추고, 기독교를 믿는 여자를 마구 먹어치운다면 그건 잘못된 거야. 네가 하는 행동은 당연한 거야”라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사람은 제대로 미쳐야 합니다. 어디에 미쳤나 라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며 수준입니다. 세상에는 잘못 미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의 일에 미치고, 세상의 것에 미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원하지 못하고 잠시 있을 일에 미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죽음에 이를 것에 미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과 바울과 그리고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미쳤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적어도 예수님을 믿으면서 미쳤다는 말을 한 번 정도는 들어야 제대로 예수 믿는 것이고, 제대로 미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타인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잘 미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사랑
고후05장 13~15 / 박덕기목사
오래전 어떤 고명한 목사님이 고난주일 낮 예배 시간에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오늘 저녁 예배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특별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미리 깊이 묵상하고 오시기 바랍니다." 저녁 예배 시간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은혜를 사모하면서 예배당에 모였습니다. 목사님은 촛불을 켜들고는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그림 앞으로 다가 갔습니다. 그는 먼저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이마에 촛불을 비추었습니다. 한참 뒤 그는 말없이 못 박힌 예수님의 손과 발을 촛불로 비추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에 찔려 피흘리시는 예수님의 옆구리로 촛불을 옮겼습니다. 이것이 그의 설교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참석한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번 주간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신 수난 주간입니다.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항상 십자가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복음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일대기가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를 주의해서 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체 분량의 1/3 가량이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인 고난 주간, 십자가, 죽음 등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주석가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복음서란 무엇인가? 복음서란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에 관한 모든 사건과 말씀을 기록한 연대기요, 그 나머지 모든 부분은 서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의미가 깊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려 죽으신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십자가는 나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의 대가입니다.
우리가 죄 값으로 고통 받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형벌이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여러분들도 이미 자주 들어서 잘 아시지요? 손과 발에 5-7인치나 되는 대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은 천인공노할 가장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 시대에 미리 내다보고 예언한 다윗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주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을 더 이상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고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인에게는 형벌이 따라옵니다. 형벌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만약 우리의 죄 값을 그대로 받는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을 피할 수 없고, 그 형벌에는 무서운 지옥의 고통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을 주님이 대신 짊어져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실 훗날을 내다보면서 이사야서 53:5절에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왜 찔렸습니까? 예수님이 왜 상했습니까? 예수님이 왜 징계를 받았습니까? 내가 받아야 될 징계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고통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아픔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2. 십자가는 내 대신 주님께서 담당하신 수치의 대가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다음에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취하여서 네 깃으로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군병들은 주님의 옷을 제비뽑기 하여 나눠가졌습니다. 주님은 완전히 발가벗겼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매질을 당하셨습니다. 얼굴에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으시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다윗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왜 주님께서 이 같은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죄는 수치를 수반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도 죄를 범하자마자 금방 부끄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나뭇잎을 엮어 가지고 하체를 가리고도 너무나 부끄러워 나중에는 숨어 버렸습니다.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다 줍니다. 아무리 철면피한 인간도 쇠고랑을 차고 포승에 묶이게 되면 차마 얼굴을 바로 들지 못합니다. 그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굴에 옷을 뒤집어씁니다. 이렇듯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다줍니다.
만약에 지금이라도 우리가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천국 문을 활짝 열어놓고 천사들을 동원해서 아무리 오라고 초청하셔도 우리는 절대 못 들어갑니다. 왜 못 들어갑니까? 부끄러워서 못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에 억지로 끌어다가 천국 안에 넣어 놓는다면 잠시 후에 미쳐버릴 것입니다.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가 가져다 준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말끔히 제거해 주시는 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수치와 모욕을 다 담당하시므로 우리가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3. 십자가는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의 사랑의 대가입니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남을 대신하여 죽어 준 사람이 있습니다. 독일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사람들이 차례차례 가스실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이름이 불린 가요니체크는 독일군의 발에 매달려 사정했습니다. 자기는 젊은 아내와 갓난아이까지 있으니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한 신부가 나서서 군인에게 말하였습니다. 자기가 끌려 갈 예정일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이 청년과 순서를 바꿔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독일 군인도 신부의 청을 받아들여 그날 신부는 죽었고, 가요니체크 씨는 연합군이 해방시킬 때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후일 이 신부를 성자로 추대하기로 했습니다. 1972년 10월 그 자리에 가요니체크씨가 초청돼 짧은 간증을 했습니다. "그 잊을 수 없는 아침 신부님이 나에게 미소를 보내며 끌려가실 때, 나는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왜 예수를 믿는지 알았습니다. 그 때 나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곁에 서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은 몇 년 전 화재 사건을 목격한 어떤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얼마 전 화재가 난 현장에서 소방관 6명이 아까운 목숨을 던져 순직하는 장면을 TV를 통해 지켜보면서, 우리 모두가 가슴을 치며 괴로워 한 일이 있습니다. 방화범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정신적으로 약간 온전치 않은 사람인데, 정신병원이나 기도원을 전전하면서 치료를 받은 경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 날도 새벽 2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다투다가 어머니를 때리고 홧김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이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급히 밖으로 뛰어나와서 소방관을 붙들고 아들이 아직 못 나오고 있으니 살려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소방관 6,7명이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우르르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불길에 힘없이 쏟아져 내리는 벽돌더미 아래 그 고귀한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TV를 보면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보니 방화범은 오히려 멀쩡하게 살아서 밖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죽어야 될 사람은 저 사람인데 너무나 아까운 사람들이, 처자가 딸린 6명이 희생을 당했구나. 저 사람이 평생 살면서 자기가 6명의 소방관의 생명을 대신해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빚진 감정을 가지고 살까? 정말 사람이 좀 달라질까? 인간다운 존재로 바뀔 수 있을까? 자기를 위해 희생한 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던져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애를 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 방화범과 저 자신을 비교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람은 사람 같지도 않은 인간이지만 6명의 생명을 희생하고 대신 살아남았다. 너는 어떤가? 너는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덕분에 지금 살고 있지 않는가? 지금 저 사람을 속으로 욕하면서 차라리 저 사람이 죽었으면 하고 있는데, 진짜 죽어야 될 사람은 너야. 너는 얼마만큼 떳떳한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 받은 사람답게 살고 있느냐?' 그러다 보니 남을 욕 하던 것이 결국은 나를 욕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남을 탓하는 사람이 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고후 5:14에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모든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선택한 모든 사람을 뜻하고, 전 인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 안에서 죽었고,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죄 가운데서 죽었고, 허물로 죽었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우리들의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죄 가운데서 완전히 죽고, 망하고, 영원히 파멸되었을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힘이란 대단합니다. 야곱은 라헬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7년간의 고달픈 머슴살이를 불과 수일밖에 안되는 것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고백하기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를 미쳤다고 하던지 온전하다고 하던지 상관치 않고 주님을 위해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주님께 그의 몸을 드리고, 재산을 드리고,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드려서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사랑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사랑이 아니고, 바울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 때문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믿음이 자랄까요? 벧후 3:18에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믿음이 자랄 수 있습니다. 또한 엡 3:18-19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헌신, 우리의 충성은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얼마만큼 깊이 느끼고 깨닫느냐는 문제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가 작시자 E. 하윗(Hewit)은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의 사랑, 주님의 은혜에 우리가 어떻게 보답하며 살아야 합니까?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산 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인 우리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우리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곧 나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주님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혹 우리 가운데 주일 날 한 두 시간 내어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도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되는 분은 없습니까? 그는 아직도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세례를 받고 제직까지 되어서도 십일조 헌금 하나 아까와서 바치지 못하는 신자가 있다면, 그는 아직도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헌신해야 될 일을 빤히 보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도 마음에 가책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아직도 구속의 은총을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아직도 사로잡히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히면 절대로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이것이 바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은 성도의 고백이요, 다짐이요 결단일 것입니다.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포로가 되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미칠듯이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께 헌신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
고후05장 13~21절 / 김태환목사
어느 저명한 신학자가 21세기 목회에 대한 글을 쓰면서 “21세기 목회의 화두(話頭)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가족(家族)이다.” 이렇게 말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미 선진국들은 고도 이혼사회가 되어 버렸고, 후진국에서는 이주(移住) 노동인구가 급증하면서 가정이 파괴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신학자의 글이 이해가 됩니다. 우리 한국도 선진국이 되었는지 세계에서 이혼율이 2위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가정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종 가정 사역 세미나가 열리고 있고, 최근에 인기 있는 세미나 중에 「아버지 학교」라는 것이 있는데 아버지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화두는 무엇일까?” 저는 그 화두가 오늘 말씀에 17절에 나오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주 충격적인 말씀 하나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15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이 말씀입니다. 현대어 성경에는 이 말씀의 뜻이 보다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이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참으로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율법을 존중하는 유대 사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하는 것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만큼 할례 문제는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할례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 믿음생활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예배, 기도, 성경공부, 봉사, 헌금, 헌신, 사명 모두 중요한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봉사해도 새 사람이 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 자신의 내면 세계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겉으로 드러난 이런 종교적인 행위(行爲)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화두는 새로운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어떻게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야말로 우리들의 영원한 화두인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밤에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熱望)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갔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유명한 랍비였습니다.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지만 그 길을 몰랐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니, 이상한 말씀이 아니라 차원(次元) 높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욱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이와 같다(요한복음 3:6-8).” 풀어서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이기 때문에 너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 준들 알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 흔적이 남듯이 새로와 진 사람에게도 흔적(痕迹)이 남게 된다.”
오늘 새해 첫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에게 새로와 지고자 하는 열망들이 있습니까? 송구영신 예배 드리고 축복 기도하는데 의외로 기도 제목 중에 “새해에는 하나님을 깊이 알고 싶다.” “성령충만한 믿음생활을 하고 싶다.” 이런 기도 제목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새로와질 수 있습니까? 중국 은나라의 탕왕은 자신의 욕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두고 목욕을 할 때마다 그 뜻을 음미했다고 합니다. “날마다 그대 자신을 새롭게 하라.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하고, 영원히 새롭게 하라.” 상당히 의미 있는 말같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아무 내용이 없는 공허한 말인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날마다 그대 자신을 새롭게 하라니요? 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누가 새로와지고 싶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욕조에 그 글을 새겨 놓고 음미(吟味)한다고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단서(端緖)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if anyone is in Christ)” 이라는 말입니다. 새 사람이 되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말 속에 몇가지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believe in Christ)"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through Christ)"라는 뜻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노력이나, 고행(苦行)이나, 수련(修練)을 통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 사람이 됩니다.
이 말 속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항복(降伏)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넬슨(Nelson) 제독(帝督)은 자기에게 항복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관대했다고 합니다. 그 소문이 적군들 사이에 퍼졌습니다. 한번은 넬슨이 프랑스 함대를 크게 무찔렀습니다. 그러나, 상대편 장군은 넬슨이 항복하는 사람에게 관대하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싸움에서 졌지만 허리에 칼을 찬 채 부하들을 거느리고 의기양양 하게 갑판으로 올라와서 넬슨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랬더니 넬슨이 악수를 거절하면서 "먼저 그대의 허리에 찬 칼을 내려 놓으시오. 그것이 나에 대해 그대가 갖추어야 할 예의입니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때서야 그 사람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허리에 찬 칼을 내려 놓고 패장의 예(禮)를 갖추었다는 유명한 일화(逸話)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의 무장(武裝)으 해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주장(主張), 우리들의 고집(固執), 우리들의 생각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되고 용납(容納)되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聯合)되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와 함께 미국이 자랑하는 신학자 중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라는 하바드 신학대학의 교수가 있었습니다. 이 신학자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지금도 하바드 신학교의 도서관에 가면 틸리히의 사진과 책들이 입구에 전시(展示)되어 있습니다. 틸리히의 책 중에「새로운 존재(The New Being)」라는 설교집이 있는데 그 설교집 안에 "새로운 존재"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습니다. 이 설교는 고린도후서 5:17절을 본문(本文)으로 한 것입니다. 그는 이 설교에서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다(We are accepted as we are by Jesus Christ)."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받아 들이고,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의 과거가 모두 용서받고, 모든 상처가 치유(治癒)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모든 과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것은 하늘의 일이지 땅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늘 말씀에는 새로운의 사람에 대한 흔적들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은 이런 흔적들을 남기는 것입니다.
첫째로, 새롭게 된 사람은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强勸)합니다(14절). “강권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그렇게 하도록 속에서 push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그렇게 하기 싫은데 그 사람의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그 사람을 그렇게 하도록 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 사람의 흔적입니다.
2004년은 원숭이 해라고 합니다. 원숭이 하면 손오공이 제일 먼저 생각나지요?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원숭이는 정직하고 의리있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결코 교활하지 않고, 남을 배려하는 이타심(利他心)이 남다른 동물이라고 합니다. 올 해로 16년 동안 원숭이를 조련해 온 한 전문가는 가장 감동적이었던 일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오랫동안 원숭이를 관찰하면서 제일 큰 감동으로 다가왔던 건 원숭이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모습이었습니다. 말썽을 많이 피운 녀석한테는 벌로 식사를 주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 때는 옆에 있는 친구 원숭이가 제가 안보는 틈에 자기 몫의 음식을 슬쩍 나눠준다니까요. 정말 사람보다 낫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원숭이 같은 것들도 자기 것을 나누어 주면서 사랑하면서 사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속에서 강권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의 핵심(核心)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 사실을 잃어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낭만적인 사랑으로 끌어내려 버립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달콤한 낭만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용기요, 희생이요, 아픔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한일서 4:11).”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利己的)인 세대 속에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사람의 흔적입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은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삽니다. 그 말씀이 1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오래 예수를 믿었어도 조금도 가치관이 바뀌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들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삽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나 사물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한 때 한국에서는 결혼 조건을 따질 때 A, B, C, D, E, F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A는 나이(age), B는 용모(beauty), C는 성격(character), D는 학력(degree), E는 경제력(economy), F는 가문(family)이라고 합니다. 결혼 상대자를 찾을 때 이 기준에 맞는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나 그 사람의 마음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바울 자신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는 과거에 이런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종교적인 이단자(異端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서기 33년 어느날,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는 지금까지 붙잡고 있었던 세속적인 가치관을 버렸습니다. 그러자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삶의 근본적인 질문에 해답이 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새로운 분으로, 그에게 구원의 주님으로 다가 왔습니다.
헨리 나우엔(Henri J.M. Nouwen, 1932-1996)이란 사람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가 하바드의 고고한 학자로서의 지위를 버리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라르쉬라는 공동체로 들어가 장애자들과 함께 살기로 결심했을 때, 세상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고 보지 못했던 것들이 새로운 각도에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가 발견한 것들을 쉬운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딱딱한 교리(敎理)와 편견 속에 갇혀 있던 기독교의 진리들이 굴레를 벗고 보통 사람들에게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가 쓴 책들은 모두 베스트 셀러가 되어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 세상을 새롭게 산 감동적인 이야기는 이제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계속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살았던 자리에 그런 흔적을 남겨 놓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화해의 삶을 삽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사뭇 도전적인 말씀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18절)” NIV 성경에는 “God gave us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사역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20절), 사람들과 화목하게 하는 사역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화목을 선포해야 하는 하나님의 사절단들입니다(20절).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나와 너(I and Thou)」라는 책으로 유명한 유대인 철학자이자 신학자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현대인의 인간 관계를 세가지로 진단했습니다. 하나는 "그것과 그것과의 관계(it-it relationship)"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치 물건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합니다. 친구 간에도 그렇고, 심지어 부부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또 하나의 관계는 "나와 그것과의 관계(I-it relationship)입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내가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으로 대할 때 "나와 그것과의 관계"가 성립합니다. 끝으로, "나와 너의 관계(I-Thou relationship)입니다. 나는 당신을 인격으로, 당신은 나를 인격으로 대하는 관계입니다. 부버는 이 세가지 관계를 말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가 당신을 인격으로 믿어 주고, 당신이 나를 인격으로 믿어 준다고 해도 그 관계는 깨어질 위험성이 있다. 이것이 우리 인간성의 연약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너 사이에는 하나의 촉매자(觸媒者)가 필요하다. 이 촉매자는 "영원한 당신(eternal Thou)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러데요. "Good-bye." 라는 말은 원래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God be with you.)." 라는 말의 축소형(縮小形)이라고요. 우리가 무심코 하는 인사 속에 이와 같은 마음을 담아서 "Good-bye." 하고 인사한다면 얼마나 훌륭한 화해의 메세지가 되겠습니까?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바 있는 스웨덴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인 함마슐드(Hammarskjld)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세계 평화를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하다가 1961년 9월 비행기 사고로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색대원들은 비행기가 추락한 사고 현장에서 그의 서류가방을 찾아냈습니다. 그 가방을 열어 보았더니, 그 안에 마틴 부버의 「나와 너」를 자기 나라 말로 번역하던 원고 뭉치가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세계 평화의 원대한 목표를 이루는 길이 바로 "나와 너"의 화해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화해의 삶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증거해야 할 메세지이고, 교회가 이 세상에 전파해야할 하나님의 궁극적인 메세지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9)”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2004년 새해에는 여러분이 있었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흔적들을 남기십시오. 사랑의 흔적을 남기십시오. 가치관이 변화된 흔적을 남기십시오. 그리고 화해의 흔적을 남기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때문에 사람들이 행복해 지는 그런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십시오.
십자가에 담긴 비밀
고후05장 14~17절 / 문기태목사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4-17)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보기 전까지는 그분을 진정 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길가의 그리스도, 해변가의 그리스도, 회당에서 가르치는 그리스도를 거의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항상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항상 기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과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시면서 예수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살이다.' 하시고 포도주를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피다.' 하시며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모든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달려 죽으신 십자가에는 어떤 중요한 비밀이 담겨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연히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비참하고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우리의 죄를 처리하시기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피할 수 있음에도 피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입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셨을까요? 본문에는 주님이 달려 죽으신 십자가의 비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우리를 살게 하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14) 대신하여 죽으셨다.
지금 세계는 일본 원전사고로 인해 방사능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방사능에 노출되면 갑상샘암이나 온갖 암에 걸릴 수 잇다고 합니다. 당대에 무서운 질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다가 죽을 뿐 아니라 불임이나 기형아를 낳게 될수도 있다고 합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후 유럽을 비롯해 주변 나라에서 갑자기 암과 같은 질병의 발생율이 급상승했다는 보고도 잇습니다.
그러나 방사능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죄가 우리안에 들어오면 육체뿐 아니라 정신과 영혼까지 병들게 합니다. 병들게 할 뿐 아니라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죄는 영원한 자주아래 우리를 가두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여 저주아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 있고 어떤 사람은 한 발자국 더 떨어져 있다는 차이 밖에 없습니다. 결국 다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 해서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신 죽었으므로 우리가 다시 죽을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벧전3:18에도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 라고 말씀합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불의한 나를 대신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대신 죽어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살 길을 열어 주실려고 죽지 않아도 되실 분이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죄인처럼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 중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함 받게 되었습니다. 주홍 같이 붉은 죄가, 진홍 같이 붉은 죄가 흰 눈 같이, 양털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우리 죄가 옮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치 않으시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다가 망친 학생에게 선생님이 다시 새 도화지를 주시듯,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망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새 도화지를 주시며 다시 시작하라 하십니다. 내가 너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씻어 주고 사하여 주었으니, 그리고 시간도 다시 충분히 줄 터이니 용기를 내어 다시 아름답고 근사한 인생을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아 그 값을 치루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전의 사람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다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 새롭게 다시 지으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그분을 통해서 영원히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인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예수님은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사는 길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심령에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생명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2. 우리로 예수를 위해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15) 자신을 위해 살지않고 대신 죽으신 이를 위해 살게 하려고..
사람들은 모두 이기심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선을 베풀때에도 그 속에는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계산하고 자신의 손해와 유익을 저울질하는 이기심과 자기 만족을 앞세우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사람들의 이기심을 이용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지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색 정욕에 종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육체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죽음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얻고 생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그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지배했던 나쁜 주인들을 모두 패배시키고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자신을 위해서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시금 사단은 우리의 이기심과 정욕을 자극하여 죄의 노예로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최선의 길은 우리 자신을 위해 살려 하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이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세상의 유혹을 이기게 됩니다. 죄의 권세를 계속 깨뜨려버리고 흠없고 점없는 순전한 자로 하나님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한 젊은 피아니스트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잘 훈련된 그의 손가락을 통하여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올 때, 청중은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마지막 음이 사라지자 청중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터뜨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맨 앞 줄에 앉은 한 노인만은 예외로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그피아니스트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무대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무대감독은 그의 연주를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대답했습니다. "전 잘하지 못했습니다. 실패한 거예요." 무대감독이 말했습니다. "저 청중을 보세요, 한 늙은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어서 있지 않습니까?" 그 젊은이는 침통하게 대답했습니다. "바로 저 노인이 나의 선생님이십니다."
이 피아니스트가 갈망했던 것은 스승의 단 한마디, 잘했다는 칭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스승은 연주가 다 끝나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칠 때 침묵했습니다. 스승의 부동의 침묵 속에서 이 제자는 자신의 연주가 시원치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풀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희망이 보이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자신이 누구의 기대를 만족시켜야 하는지 바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겉으로는 번지르르 하지만 실상은 질낮은 기교밖에 낼 줄 모르는 연주자와 인기에 편승하지 않더라도 진정으로 심오한 음을 낼 줄 아는 연주자를 판별해 낼 줄 아는 스승의 갈채,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러한 자세가 요구됩니다. 이 피아니스트가 자기 선생님의 칭찬을 갈망했던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열망하고 있습니까? 진정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몸을 다 주셨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여러분도 십자가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날마다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며서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일본의 '미우라 아야꼬'라는 여류 소설가가 쓴 '양 치는 언덕'이라는 소설입니다. 소설의 여 주인공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목사의 딸입니다. '료오이찌'라는 사람과 눈이 맞아 부모를 버리고 집을 나갑니다. 한 일 이년 정도를 함께 살았지만, 술버릇이 나쁘고 바람 끼가 심한 남편과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어서 도망을 나와 다시 친정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료오이찌가 폐병에 걸려 나오미에게로 옵니다. 나오미는 받아주려 하지 않았지만 친정 부모의 권면으로 받아 주게 됩니다. 처갓집에서 투병 생활을 하던 료오이찌는 장인 장모의 믿음에 감동을 받아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서 점점 몸과 마음이 건강해 져 갑니다. 료오이찌는 투병생활을 하면서 매일 다락방에 올라가 그림을 그립니다. 나오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기 위하여 그리는 그림이었지만 그는 자기가 그리는 그림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언제나 하얀 천으로 덮어 놓습니다. 나오미에게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전에 사귀던 전에 사귀던 좋지 못한 여자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할 수 없이 나가서 만납니다. 그 여자가 술을 권하지만 사양합니다. 하룻밤 함께 지내자며 유혹하지만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 여자가 몰래 술에 수면제를 타 넣은 후 이 술 한 잔만 마시면 보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모르는 료오이찌는 그 술을 받아 마십니다. 그리고 잠이 오지만 그곳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나왔다가 길거리에서 잠이 들어 동사합니다.
그 소설의 클라이막스는 료오이찌를 장례한 후 료오이찌의 그림을 벗겨 보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는 예수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료오이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희생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이를 믿음으로 참 생명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으로 예수님을 위해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자신을 위해 살며 인생을 낭비 하지않고 예수님께 자신을 드리며 살아 존귀한 인생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이 땅의 평화입니다
고후05장 14~21 / 이윤재목사(한신교회)
교회는 이 땅의 평화입니다
오늘은 11월 첫 주일, 그동안 13주 계속되어 왔던 비전 설교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크고 아름다운 비전은 무엇일까? 그것은 교회의 사명에 대한 비전입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교회는 이 땅의 평화입니다”. 저는 이번에 목회자들과 함께 독일을 다녀왔습니다. 독일 통일의 현장에서 통일에 대한 교훈과 비전을 배우며 우리도 어떻게 통일과 평화를 이룰까를 생각했습니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베를린 장벽이었습니다. 1961년 8월 12일 밤, 서독으로 탈출하는 수많은 난민들을 막기 위해 설치한 장벽, 높이가 5m의 콘크리트에, 고압선을 설치했고, 그 길이가 동서독 베들린을 나누며 무려 120㎞의 장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육중한 철옹성같은 장벽이 1989년 11월 9일, 동독에 의해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90.10.3, 독일은 역사적 통일을 맞이했습니다. 장벽은 이미 무너졌지만 후대의 역사를 위해 조금 남겨놓은 장벽에 손을 대고 기도했습니다(사진1). 얼마나 높은지 손을 쭉 펴보았습니다(사진2,3). 그 육중한 장벽을 보면서 이 장벽이 어떻게 무너졌을까? 45년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살던 두 나라가 어떻게 극적인 통일을 이루고 지금은 세계 4위의의 경제력과 힘을 가진 나라가 되었을까? 155마일 휴전선 철책선 뿐아니라 남과 북사이에 쌓여온 수많은 장벽들, 그 장벽들은 언제 무너져 우리도 독일처럼 하나된 민족으로 살 수 있을까? 그리고 교회는 무슨 일을 해야 하고 우리는 또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해답입니다. 같은 말씀도 어디서 읽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집니다. 독일 분단과 통일의 현장에서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18절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고후5:18,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여기에 “화목”이란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여기서 바울은 두 종류의 화목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화목,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우리와 화목하셨습니다. 다음 우리가 이룰 화목,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 세상에서 화목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둘을 합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이미 하나님과 화목했다. 그러므로 이제 세상과 화목해라”. 어떻습니까? 오늘 찟기고 부숴진 세상에 “화목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그 화목이 자라 민족의 통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까? 우리는 그 역사적인 사명을 띠고 여기 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사명을 이루기 위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평화가 통일보다 먼저입니다.
우리가 통일에 대해 생각할 때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통일이 최선의 선이다. 통일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소위 통일 지상주의입니다. 물론 이 생각은 통일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슴을 알아야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평화입니다. 통일에는 보통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국토의 통일입니다. 남과 북이 휴전선의 철조망을 걷어내고 하나의 땅, 하나의 국가, 하나의 정부를 이루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상적 통일입니다. 남쪽의 자본주의와 북쪽의 공산주의가 대화를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경적 통일입니다. 그것은 당장 휴전선 철조망이 걷워내거나 두 나라의 군대를 없애지는 않지만 우선 하나님안에서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화해“라고 말합니다. 통일을 정치적으로 접근하면 ”국토통일“이 됩니다. 사상적으로 접근하면 ”이데올로기의 통일“이 됩니다. 그러나 통일을 성경적으로 접근하면 ”화해“가 됩니다. 세계 역사에서 볼 때 화해가 동반되지 않은 통일은 언제나 “적과의 동침”이었습니다. 베트남처럼 군사적으로 통일할 수도 있습니다. 유고처럼 정치적으로 통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화해가 전제가 되지 않으면 구 소련처럼 결국 갈라서고 맙니다. 성경이 말하는 통일은 화해가 전제가 되고 그 기초위에 통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고후5:14-15을 보겠습니까? “우리가 생각컨데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우리가 할 화해의 사명을 말하기 전에 이미 화해를 이루신 분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입니다. 화해의 시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커서 그의 아들을 화해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이셨습니다. 14-15절의 핵심은 “대신하여”입니다. 14절, “예수님이 우리 대신하여 죽고”. 15절, “예수님이 대신 죽음으로 우리가 대신 살고”, “대신 죽었다”는 말은 자기 죄 때문에 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대신 살았다”는 것은 실제 산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화해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어서 우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17절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 무엇입니까? 죽고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사람은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해야 일은 무엇입니까? 세상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입니다. 고후5:18,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누가 세상과 화해를 이룰 수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과 화해한 자입니다. 자신이 먼저 용서받아야 남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화목되어야 다른 사람과도 화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통일만 하면 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될 수 있습니다. 통일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지지 말고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가족과 민족은 헤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함께 살아야 합니까? 싸우려고 함께 삽니까? 불행하려고 함께 삽니까? 아닙니다. 행복하게 살려고 함께 삽니다. 사이좋게 살려고 함께 삽니다. 그것이 “평화”입니다. 통일이 함께 사는 것이라면 평화는 함께 사는 이유입니다. 통일이 평화의 옷이라면 평화는 통일의 몸통입니다. 통일을 위해 통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통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통일을 했어도 평화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무력통일이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어떻게든 통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가 함께 사는 나라입니다. 동시에 평화로운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면 평화롭습니다. 통일보다 중요한 가치가 평화입니다. 그래서 만일 지금 통일해서 평화롭지 않겠다 하면 때를 기다려서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통일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통일은 목적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합니다. 통일의 목적도 평화요 통일의 과정도 평화입니다. 이런 점에서 산상수훈이 중요합니다. 마5:9에서 예수님이 평화의 원칙을 말씀합니다.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리고 9절에서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했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청결이 평화보다 먼저입니다. 청결은 하나님과 관계이고 평화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선행되어야 평화도 아뤄집니다. 약3:17이 이 순서를 보여줍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야고보는 화평보다 성결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이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됩니다. 시85:10도 그렇습니다. 시85: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평화의 출발이 인애와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의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통일은 운동이 아닙니다. 평화는 운동권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니까 평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는 통일로 나아가게 합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가 통일되기 바랍니까? 먼저 평화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하여 통일해야 합니다.
통일은 기도로 시작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평화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 마음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통일을 위해 반드시 할 일이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고후5:18-19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나님과 화목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화목의 사명, 화목의 직책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세상과 화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이번에 독일에서 독일 통일의 힘과 원동력이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가 일어난 진원지가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였습니다(사진4). 니콜라이 교회는 1165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960년 된 교회입니다. 대단합니다. 이 기도회를 인도한 목사님은 크리스쳔 퓌러 목사, 이 교회의 122대 담임목사입니다. 이 교회는 음악가 바하가 27년간 음악 책임자로 있던 교회로 유명한 교회입니다. 1945년에 동독이 공산화되고 1961년에 동서독에 장벽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1981년, 분단된지 35년이 된 해에 이 교회 신자 몇 명이 모여서 “우리가 통일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지 않으냐?” 해서 기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매주 월요일 오후 5시,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1986년도까지, 5년간은 6명에서 15명 정도 참석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뒤에 청년들이 참여하기 사작했습니다. 18살에서 25살의 젊은 청년들이 참여하면서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5년이 지난 1986년부터 수백명이 참석했습니다. 신자들도 있었고 비신자도 있었지만 그들은 오직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사람이 많아지자 동독 공산당이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비밀 경찰들이 교회에 상주하면서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담임목사였던 크리스챤 휴러에게는 28명의 비밀경찰이 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퓌러 목사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설교를 시작할 때는 이렇게 말하고 시작했습니다. “여기 정부 당국자들이 많이 참석하셨습니다. 제가 일일이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데 여러분이 직접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람들은 모두 웃었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을 설교했습니다. 산상수훈은 비폭력 평화운동을 가르치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밀경찰에게 퓌러 목사는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지만 그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목회자의 인사권은 교회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법을 행한 경우에만 목사를 체포할 수 있었으나 퓌러목사는 불법을 행하지도 않았으니 잡아 넣을 수도 없었습니다.
1989년부터는 아예 교회로 들어오는 길을 바리케이트로 막고 한 사람씩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도와 고속도로등에서 라이프치히로 들어오는 차량들을 아예 통제했지만 단속이 심할수록 기도의 열기는 뜨거워졌습니다.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최대 인원이 2천명인데 기도가 시작도 되기도 전에 자리는 이미 가득찼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는 데 깜짝 놀랐습니다. 미쳐 교회 들어오지 못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우리는 한 민족, 독일은 하나”를 외치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손에 촛불을 든 수만의 사람들이 평화적인 기도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행진은 철저하게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989년에는 그 촛불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이 7만명이나 되었습니다.
수많은 동독사람들은 공산당 때문에 못살겠다고 목숨걸고 탈출하고, 교회에서는 수만명의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기도하니 동독정부로서는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느날, 동독 정부 대변인이 “동독시민들이 자유롭게 서독을 여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되냐고 묻자 “곧 바로 당장”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말은 실제 그렇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동요하니까 덮으려고 한 말인 데 그날따라 대변인이 술을 너무 많이 먹고 실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방송을 들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날 수만명이 달려가 베를린 장벽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아무 계획에도 없는 일이 동독시민에 의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랬으면 공산당 정부가 무력으로 막았어야 하는 데 당시 러시아 고르바쵸프가 무력진압을 허락하지 않아 진압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동독은 총 한방 쏘아보지 못하고 1990년, 45년만에 무너져, 독일은 꿈에도 그리던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무슨 힘입니까?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기도할 때 손을 들면 하나님이 그 손 붙잡아 주시는 것을 아십니까?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졌습니다. 이기고 진 원리가 기도의 손이었습니다. 그것을 출17:1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의 보좌를 향해 손이 들렸으니”. 하나님께 손을 들면 하나님이 그 손 붙잡아 주십니다. 지금도 니콜라이 교회에 들어가면 그때의 기도의 불이 타고 있습니다(사진5). 올리브 기름으로 불을 밝히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했던 기도의 불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시나요? 통일에 대하여 국민들의 생각이 점점 부정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IMF이전인 1996년에 국민들에게 물었더니 습니다. 35%가 “반드시 통일되어야 한다”, 47%가 ,“가급적이면 통일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83%가 통일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다가 2010년에 물었더니 “반드시 통일되어야 한다”. 34.2%, “가급적 통일되는 것이 좋다”가 36.5%, 무려 10%이상이 통일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돌아섰습니다. 심지어 22.1%의 사람들은 "현재 이대로가 좋다“고 하여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통일에 대해 더 큰 문제는 우리에게 통일에 대한 기도가 식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독일에서 들은 감동적인 소식이 있습니다. 독일의 교회들이 한국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기도해서 기적적으로 통일을 이루고 보니까 같은 고통을 가진 나라가 세게에서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사진입니다(사진6). 어떻습니까?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다른 나라가 기도하니 우리도 이제 기도를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면 하나님이 역사합니다. 독일 크리스쳔들도 무릎꿇고 기도했더니 동독이 스스로 무너져 죽거나 다친 사람 하나 없이 통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동독이 망한 뒤 동독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계획했고 모든 상황을 준비했다. 그러나 촛불과 기도는 미쳐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날 사람들이 모여 촛불을 켜고 기도하기 사작하자 우리의 모든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저는 먼 훗날 북한 공산당 간부도 같은 말을 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계획하고 모든 준비를 다 했다. 미사일도 준비하고 핵도 쥰비했다. 그러나 남한 기독교인들이 기도하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아멘. 기도가 능력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으는 것이야 말로 무질서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서는 하나님 자신의 손이다”. 기도가 곧 기적입니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통일을 위해 우리는 희생하고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통일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기도만이 아닙니다.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모델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빌2:7-8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평화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희생하고 죽어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이것이 예수님의 모델입니다. 마10:34에서 예수님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니 반대로 말씀하신 것 아닌가?” 이런 뜻이 아닙니다. 평화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대가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더 좋은 것을 위해서 좋은 것을 버려야 좋은 것입니다.
동독을 평화로 끌어내기 위해 서독교회가 한 일을 보면 눈물겹습니다. 우선 자주 방문했습니다. 동독과의 대화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서독교인들은 시간만나면 동독을 방문했습니다. 동독사람이 서독에 가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서독사람이 동독가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었습니다. 자주 방문하고 얼굴을 마주대했습니다. 서독의 모든 교회가 동독의 교회와 일대일 자매결연을 맺었습니다. 서로 기도하고 왕래했습니다. 동독에서 정치범으로 수용된 사람이 있으면 동독 정부에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하게 했습니다. 특히 서독의 목회자중 스스로 동독지역에 들어간 목회자가 많았습니다. 자유로운 서독을 버리고 공산체제하로 들어간 것은 한 마리 양을 구하기 위한 목자의 심정이었습니다. 지금의 메르켈 총리가 그 사람입니다. 아버지 목사님이 동독이 공산화되자 고향인 함부르크를 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동독지역으로 이주합니다. 거기서 통일될 때까지 목회합니다. 메르켈이 훌륭한 총리가 된 것은 자신이 동독에서 가난해 봤고 공산당의 압제밑에 살아봐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압니다. 그래서 백성을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특히 동서독 교회 지도자들이 서로 자주 방문해서 형제의 관계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동독과 서독의 관계의 끈이 유지된 것은 우리와 달리 동독지역에서 서독의 라디오, 텔레비전 시청이 가능했고 우편, 소포 교환도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독일교회가 한 또 하나는 물질적 지원입니다. 분단시대 서독교회는 동독교회에 대해 총 51억 마르크를 지원했습니다. 그 돈을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7조 1400억입니다. 서독이라고 해서 전쟁이후에 어렵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서독교인들은 자기들 보다 더 어려운 동독교인들을 형제애로 도왔습니다. 심지어 동독 정부에 원유, 구리, 양모등 현물로 지원해서 그것을 동독정부가 돈으로 환산해서 주민들에게 나눠주도록 했습니다. 물론 동독정부도 이것을 떼어먹거나 다른 데로 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안하면 백성들이 굶어죽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엡2:14절 말씀을 아십니까?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이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평화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폐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평화가 있습니다. 로마식 평화와 성경적 평화입니다. 로마식 평화는 자기를 위하여 남을 죽이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천년동안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방식은 남을 위해 자기를 죽이는 방식입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죽이는 자기 희생없이는 예수님처럼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저는 이번도 좋은 독일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강의 하나를 맡은 베르너 크레첼 목사님입니다(사진8). 그는 28년간 동독에 머물면서 목회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지금의 동독지역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다가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었는 데 그때 그는 동생과 함께 스웨덴에 있었습니다. 스웨덴을 여행하다가 자기 조국 동독에 장벽이 생기고 모든 독일인은 서독이든 동독이든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날 동생은 서독으로 가고 싶다고 해서 서독으로 가고, 자신은 동독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그가 동독으로 가면 죽는다고 만류했지만 그는 동독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2차대전으로 인해 더 큰 피해를 본 곳은 서독이 아니라 동독이었고 동독은 목회자도 없이 고난과 절망속에 빠진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회자로서 그는 자기 동포는 어렵게 사는 데 자기만 편히 살겠다고 동독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독지역으로 들어가 통일될 때까지 28년을 살았습니다.
그 기간동안 그가 당한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자녀가 모두 4명이었는 데 자녀들이 공산당 청소년 연맹가입을 안해서 반에서 성적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인문계진학을 못하고 직업학교에 가야 했습니다. 공부 잘하는 자녀가 목사의 자녀라는 이유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할 때 부모로서 얼마나 마음이 아팟겠습니까? 1980년, 친척이 서독에서 죽어서 여행을 신청했는 데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불법으로 서독을 다녀왔는 데 돌아오자 마자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또 고생합니다. 그 많은 고생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한 가지 마음이 있었습니다. “독일은 하나다. 나는 내 동포와 함께 이곳에서 죽겠다”. “나는 예수님처럼 살다가 예수님처럼 죽겠다. 저들이 때리면 맞고 저들이 발로 차면 얻어 맞겠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랑하겠다”. “동독 공산당이 나를 죽일 수 있지만 한 가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행이 그 많은 고난을 이겨내고 통일을 맞았습니다.
그에게 제가 “북한은 동독과 다르다. 우리는 북한 동포와 자유롭게 왕래할 수도 없고 편지도 주고 받을 수도 없다. 북한 공산주의는 동독 공산주의와 다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잔학한 집단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당신이 만일 한국 목회자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물었더니 뜻밖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조금 더 젊고 한국인이라면 나는 반드시 북한에 들어가겠다. 거기서 예수님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다 죽겠다. 지금 예수님이 계신다면 예수님도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희생없이 어떻게 통일이 되겠는가? 최고의 희생은 사랑의 희생이 아닌가?“.
짧은 독일 방문을 통해 이 나라 평화와 통일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내린 결론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목회하면서 만난 두 분의 권사님이 주신 메시지 였습니다. 한 분 권사님은 몸이 매우 약한 데 며느리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공부도 많이 하고 흠잡을 데 없는 일등 며느리이고 둘째는 배운 것도 많치 안고 부모도 없는 데다 몸도 안 좋았습니다. 당연히 둘째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많이 보살펴야 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항상 골골하던 시어머니가 눈에 띄게 건강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둘째 며느리 때문입니다. 둘째는 어머니가 늘 도와줘야 합니다. 몸도 움직여 방문해야 하고 먹을 것도 만들어 줘야 합니다. 큰 며느리는 완벽해서 시어머니에게 걱정도 안드렸지만 일도 안 드렸습니다. 그러나 둘째는 걱정과 함께 일을 드렸습니다. 결국 둘째 며느리 때문에 시어머니가 살았습니다. 또 한분의 권사님도 몸이 안 좋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정신이 이상한 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불안합니다. 늘 같이 다녀야 합니다. 결국 몸이 아픈 어머니가 딸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두 사람의 권사님을 통해 북한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북한은 우리에게 못난 둘째 며느리같고 병든 딸과 같습니다. 우리가 도와줘야 하고 우리가 신경써야 하고 그래서 우리가 힘들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북한이 있어 우리가 힘들지만 북한이 있어 우리가 삽니다. 사랑할 사람이 있어서 건강하고, 도와줄 사람이 있어 우리가 더 오래 삽니다. 북한은 우리가 도와서 살고 우리는 북한을 도와야 하기 때문에 삽니다. 북한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의 아픔 때문에 삽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픔이고 아프기 때문에 우리는 삽니다. 미셸 쿠오스트라는 시인이 이런 시를 썻습니다. “아들아,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이 통하는 일이다. 마음이 통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위해 자기를 잊고 그 사람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죽여야 한다. 아들아, 알겠니. 사랑은 아픔이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아픔입니다. 아프기 때문에 사랑이고 아프다 보면 우리가 삽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이 사실을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 민족에게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사랑이 아픔이이지만 아픔을 통해 서로가 사는 신비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독일이 아픔을 통해 통일로 간 것처럼 우리에게도 서로의 아픔을 돌보다 통일을 맛보게 하소서. 우리에게 형제 때문에 아파할 은혜의 시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끝까지 인내하게 하소서. 끝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끝까지 희생하게 하소서. 평화의 주님이 매일 우리에게 통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삶
고후05장 14~17절 / 이정익목사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 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부활주일이 지났습니다. 부활주일을 맞이하기 위해서 그동안 40일간 기도회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일단 부활절이 지나니까 곧 잊어버립니다. 부활절이 하나의 행사로 여겨지는 기분도 들게 됩니다. 때로 망각의 은혜도 있기는 합니다. 빨리 잊는 것도 좋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이나 곧 잊어버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부활을 부활주일만 지나면 곧 잊어버린다면 부활의 소중함이 희석되기 쉽습니다. 부활은 그렇게 쉽게 행사로서 치루고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은 후 제자들에게 가장 크게 변화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책임 있는 신앙인들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전 제자들의 신앙상태는 아주 설익은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베드로는 말이 수제자였지 매사 실수 연발이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말이 제자였지 구실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구레네 시몬 같은 사람은 제자도 아니면서 예수님의 고난의 길에서 제자들 보다 훨씬 더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니까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던 시몬이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막무가내로 때리니까 십자가를 벗어 던지고 예수를 때리지 말라고 호통 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당당한 모습입니까. 도망가서 그 자리에 있지도 못한 제자들 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예수님을 보호하는 모습입니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자 빌라도에게 가서 시신을 처리하겠다고 허가를 받아 묘에 안장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다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끝까지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동행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잊어버리고 민망하리만치 도망이나 다니고 숨고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제자들은 참 용렬한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 후에 갑자기 아주 성숙한 자세를 보였습니다. 예수님 부활 후 제자들은 다시 후퇴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전도하는데 얼마나 확신 있게 전하는지 엊그제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이 베드로가 너무나 당당해졌습니다. 엊그제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나가서 전도하는데 3천명이나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제자들의 모습에 너무나 자신감에 차 있었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의 전도의 삶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 제자들은 비로소 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이 지점에 서게 되면 누구보다도 행복해집니다. 이 지점이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하고 자신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지점입니다. 사람이 일반인이든지 사업가든지 신앙이든지 이 지점에 이르게 되면 모두 그 삶이 행복해집니다. 자신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세상에 겁날 것이 없습니다. 두려움도 없습니다. 이 확신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이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깨달음에서 나옵니다. 발견에서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그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제자들이 비로소 이 지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모두 자신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많은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었고 그 확신 있는 전도와 태도는 사람들을 감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3천 명씩 회개하고 돌아오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제자들의 이 같은 변화의 분깃 점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기인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다시는 후퇴하고 숨고 도망 다니지 않았습니다. 아주 성숙한 제자들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이 부활신앙이 신앙의 분기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이 만남이 없으면 그 신앙인 여전히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목회자들 가운데 부활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신학자들 가운데에도 예수부활을 부인하는 글을 써 내는 신학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신앙풍토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들 중에는 이 부활신앙이 없는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신앙이 자꾸만 흔들리는 것은 이 부활신앙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이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앙인은 이 부활신앙의 삶을 살라고 강조합니다. 그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책임감 있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예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무슨 사랑인가 하면 예수님의 끔찍한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희생을 감수하시고 가진 것 다 내어 놓으시기 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입은 것입니다. 영화를 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그 과정을 보니까 말 그대로 있는 것 다 내주고 죽으셨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죽어 가시는 그 장면이 자꾸만 뇌리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죽음이 얼마나 처절한 죽음입니까. 그것은 순전히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힘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아픔을 인내하게 했습니다.
이 사랑을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극난한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넘치는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값을 알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랑은 아무나 입습니까. 더구나 십자가에서 죽으면서까지 대속하고 구속하는 사랑은 아무나 입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살되 책임 있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이 사랑을 비로소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부활 후 제자들의 모습이 그렇게 달라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
14절을 보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6:8절을 보면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었고 또 예수와 함께 살았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서 죽으실 때 예수님만 죽으신 것 이 아닙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다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우리도 함께 부활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옛날 나, 옛사람인 나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나도 예수로 다시 태어났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리가 내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이기었으니 너희도 이기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신분, 처지, 가치관이 모두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것입니다.우리는 책임인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이치를 알고 깨달은 사람은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알게 되면 무릎을 꿇게 데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세례를 형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것을 꼭 받아야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때로 사람은 무지할 때가 가장 용기가 있을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게 되면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무릎을 꿇고 엎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께서 죽으실 때 함께 죽었고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 함께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들
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을 힘입은 그리스도인은 그 격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부활을 욕되게 만들기 쉽습니다.
애벌레들이 애벌레의 삶을 다 살면 잠을 자게 됩니다. 애벌레가 잠을 자고 나면 껍데기를 벗고 마침내 나비가 됩니다. 그러면 이 나비는 더 이상 애벌레로 살면 안 됩니다. 트리나 폴리스의 “꽃들에 희망을“이라는 동화를 보면 두 마리의 애벌레가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잠을 자게 됩니다. 그 희망은 꽃들에게 희망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애벌레가 잠자는 기간동안 꼬치 속에서 암흑생활을 잘 견딥니다. 왜냐하면 그 애벌레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을 다 잔 후에 이 애벌레가 껍질을 벗고 나옵니다. 그리고 나비가 됩니다. 이 나비가 하늘을 날면서 꽃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부릅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이제 이 나비는 더 이상 애벌레가 아닙니다. 이제는 새로운 존재,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나비가 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애벌레가 변화하여 나비가 되듯 그렇게 엄청나게 변화 받은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이 그 변화의 모습에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옛날의 나는 애벌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때는 마음, 정신, 생각, 삶이 모두 애벌레와 똑같았었습니다. 그래서 술 취해 땅에 뒹굴고 별것도 아닌 것들을 쫓아다니느라 하늘이 푸른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대가 바로 애벌레와 같은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정신도 마음도 생각도 영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제는 나비가 애벌레 때를 생각하고 땅속으로 들어가면 안 되듯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 받은 그리스도인은 옛사람으로 돌아가 살면 안 됩니다. 이제는 세속적 생활방식이나 행동방식 그리고 이기적 욕망으로 살면 안 됩니다. 나비는 이제 다시 시궁창으로 들어가면 나비가 아닙니다. 나비는 나비의 수준을 지켜서 하늘을 날아야 나비입니다. 나비는 이슬을 먹고 꽃을 찾아가서 꿀을 따야 그래야 나비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생각, 삶, 모양, 추구점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야 그것이 부활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죽었다가 새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배지를 보면 사람이 어디에 속한 학생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크를 보면 어디에 속한 기관인지 알 수 있습니다. 로마 박해 때에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물고기 표를 달고 다녔습니다. 그 물고기 표시는 헬라말로 익투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다“라는 약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는 표시입니다. 외형적으로 나를 알리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다“라는 내면적인 자각이 더 중요합니다. 부활신앙 자에게는 이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신앙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7절을 보면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화목을 이루는 사명 자들
또 18절을 보면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나비는 꽃을 찾아다닙니다. 꽃을 찾아 꿀만 따러 다니는 것이 아니고 화목을 이루며 돌아다닙니다. 나비가 꽃을 찾아 열심히 돌아다니며 서로 교정을 시켜줍니다. 그래서 꽃들이 마지막에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는 화목을 이룰 때 열리는 결실입니다. 모든 꽃들이 열매를 맺는 것은 나비와 벌들이 돌아다니며 화목을 이루는 역할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식물들은 사람들이 일일이 이 역할을 해 주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그냥 놔두면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이 열매를 맺는 일에 나비나 벌이 가장 큰 역할을 합니다. 그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이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일이고 화목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세상을 살면서 이 화목하게 하는 삶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웃과 이웃을 화목하게 하고 이웃과 그리스도인을 화목하게 하고 불화와 갈등이 있는 곳에 조화와 화평을 만들어 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화평이 이루어지고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매 맺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화평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평화의 사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비와 벌을 만드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을 두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이 평화와 화목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평화와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못하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질책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평화를 이루고 화평을 이루는 사명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18절을 보면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손해나 인내 그리고 역할을 감수하기 위해서 수고를 마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배운 사람도 배운 사람으로 살려면 이 같은 수고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으로부터 한란을 당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면 인내하고 수고하고 역할을 감수하는 노력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어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감수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전 제자들은 실패하고 숨고 도망 다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내하지 못하고 손해 보지 않고 수고하기를 회피했습니다. 그러면 실패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난 후에는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용기가 주어졌습니다. 비로소 그들은 인내하고 수고하고 손해를 감수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부활신앙의 삶은 이 수고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실을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피조물에 가까운 삶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부활은 부활절 행사로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언제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표현되고 발휘되고 나타나고 증명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
고후05장 17절 / 김태복목사
이제 한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20일이 있으면 2002년 새해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새해를 맞으려면 새로운 준비가 필요합니다. 아무 준비 없이 새해를 맞는 사람들은 가치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 준비 없이 새해를 맞는 백성들도 가치 없는 백성들입니다. 특히 2000년 내년은 우리나라로서는 아주 중요한 해입니다. 4대 큰 행사인 월드컵 축구대회,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및 아태장애인 경기대회, 지방선거, 대통령선거를 치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 세계에 눈이 한국을 향해 집중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또 한번 도약하느냐, 퇴보하느냐 판가름 지을 수 있는 중요한 해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20일 동안을 우리 모두, 우리 백성 모두는 새해를 맞는 준비기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심판의 밤은 깊어졌고 우리의 구원의 새벽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이 때 우리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는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 육신이나 몸이 무슨 의복인가? 입기도 하고 벗기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성경은 분명히 의복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고, 골3:9-10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새사람을 입고 새 피조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것은 교회를 나오다가 때가 되니까 세례를 받거나 어떤 직분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열심히 충성하다 보면 세례도 받게되고 서리집사나 중직도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새사람을 입었거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새사람을 입을 수가 있습니까?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립니다.
1. 새사람을 입는 방법은 예수님을 구주로, 신랑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성도들을 여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여자 분들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남편에 따라 인생살이가 달라집니다. 선생님을 남편으로 만나면 사모님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도둑의 아내가 되면 도둑년 소리를 듭습니다. 아무리 인물이나 학벌이 뛰어나도 도박꾼이나 바람둥이, 주정뱅이나 적하면 주먹질하는 남편을 만나면 그 여자의 일생은 한숨이요, 눈물으로 가득찬 천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여인은 인물이나 학벌이나 보잘 것 없으나 신실한 남편을 만나서 왕녀처럼 대우를 받고 살다보니 귀부인처럼 품위가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남자는 머리요, 여자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무리 팔등미인일지라도 머리가 바보면 몸둥이도 바보짓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몸은 보잘 것 없어도 머리가 좋으면 최대한 아름답게 꾸미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신부가 되면 마귀짓 하게 되고 지옥의 자식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신랑을 만나면 그저 예수님 때문에 대우받고 살고 천국의 시민이 됩니다. 또한 우리 남자들도 자기의 지도자나, 보스, 주인을 잘 만나야 합니다.
요즈음 수지 김(金) 살해사건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는 중에 1987년도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씨가 다시 수사선상에 올라 잘못하면 감옥에 갈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사실 장세동 씨는 얼마나 똑똑하고 의리의 사나이입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쩍하면 감옥에 가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전두환 대통령을 끝까지 주인으로 섬기다 보니 그런 꼴을 당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과거에 서울대학교 법대나 상대를 나오고 육사의 우수한 졸업생들이 주인을 잘못 만남으로 패가망신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았습니까?
주인이나 신랑을 잘 만나야 합니다. 유럽은 일찍이 야만인의 사회였으나 예수님을 믿고 나서 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한 사회가 되었으나 아시아는 우상단지를 섬기므로 비극의 땅이 되었습니다. 아프카니스탄 같은 나라를 보십시오. 이스람이라는 종교를 신봉한 결과 너무나 비참한 나라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가 이 정도로 잘 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불리하기 짝이 없는 환경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지하자원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다가 인구는 왜 그렇게 많은지요, 남북한 합쳐서 7천만이나 되니 너무나 인구밀도 많습니다. 전적으로 수출을 하지 않고는 살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 불리한 형편에, 가장 침략성이 강한 일본이나 중국, 러시아 틈에 끼어 있는 나라인 데다가, 그나마 남북이 갈라진 채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상위권에 속하는 나라가 되어서 1988년에 세계 올림픽에 이어서, 내년에는 세계월드컵을 개최함으로 세계 이목을 받는 나라가 되고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나 신랑으로 모신 가정이나 사회, 국가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영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고백에 있습니다. 남녀가 결혼하기 전에 남자가 여자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할 때 여인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기도 사랑을 고백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도 우리에게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네 마음 문을 열어달라.'고 요구하십니다. 그 때 우리 할 일은 '오, 주여, 나도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합니다. 내 마음, 내 삶 속에 들어오셔서 나의 모든 삶을 주관하여 주옵소서'라고 고백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 친히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며 우리의 삶을 복된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아무리 인물이나 학벌이 뛰어나도 주인이나 신랑을 잘못 만나면 지옥의 자식이 되지만,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허물 투성이 일지라도 예수님이라는 신랑, 주인을 만나면 영생의 복을 받을 줄 믿으시고 이 해가 가기 전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신랑으로 고백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예수님을 영접하는 방법은 자기라는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고 부활과 함께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노처녀가 있었습니다. 그 처녀가 제일 듣기 싫은 말은 '노(老)'자입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심지어는 교회에서조차 노처녀라고 부르니 죽을 맛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노총각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큰 변화가 왔습니다. 그 때부터 새색시라고 부릅니다. 그 지긋지긋하게 듣기 싫던 '노'자가 떨어져 나가고 '새'자가 붙게 되었습니다. 결혼은 엄청난 신분의 변화가 옵니다.
결혼한 부부는 고백만으로 안됩니다. 친정 집에 살던 모든 것을 떠나서 이제는 시댁의 삶의 방식으로 완전히 바뀌어야 합니다. 한국 여자들은 시집을 갈 때 친정 호적에서 떼어서 시댁의 호적으로 옮깁니다. 다시 말하면 완전히 신분이 바뀝니다. 가난한 집에서 부잣집이 되기도 하고, 지체가 낮은 집에서 높은 집의 사람이 되기도 하고, 옛날에는 상놈의 집에서 양반집의 식구가 되기도 합니다. 사극(史劇)에 보면 어느 여인은 왕의 눈에 들어서 왕비가 됨으로 친정 식구들까지 하루아침에 세도가(家)의 집이 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지금까지는 마귀를 따르던 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이제는 예수님의 신부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의 호적에서 완전히 파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나의 과거, 나의 자존심, 나의 죄와 나쁜 습관을 다 못박아 버리십시오. 일전에 춘천에 갔을 때 어느 분이 말하기를 자기 부인은 밤에 철야 기도할 정도로 대단히 기도를 많이 하는데, 낮에는 세상 욕심에 너무 매여서 울근불근하는 모습을 볼 때면 어느 때는 기도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실망이 든다고 합니다
믿는 남편이 그런 소리를 한다면, 만약 믿지 않는 남편이 그런 말을 한다면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날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가지고는 속사람이 강건해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경건의 연습을 멈추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의 신부, 예수님의 종, 예수님의 가지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자, 그러면 그 때부터 강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내 영이 성령으로 변화됩니다. 영이 변화된 새사람을 입습니다.
제가 초년 목회자 때만 해도 '새사람을 입는다'라는 말을 상징적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이것이 당신이 가게될 죽음의 세계이다」라는 책을 읽고는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 책은 타임지가 화제거리로 삼을 정도였고 한 때 미국의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했는데, 저자는 '레이몬드 A. 무디' 박사입니다. 그 분은 철학박사임에도 다시 의학을 전공하여 정신과 의사가 된 분으로, 의학적으로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150명을 중심으로 조사한 죽음의 내용들을 중심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받은 큰 충격은, 사람이 죽으면 육체로부터 영이 분리된 후, 그 영이 얼마만큼 자기의 육체에 떠 있다가 다시 긴 터널을 통해서 어디엔가 가게된다는 것이 죽었다가 산 사람들의 공통적인 견해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여자 환자는 말하기를 '나는 의료진들이 내게 인공호흡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것은 참으로 이상하였지요. 나는 받침대 위 정도 높이에 떠 있었어요. 의료진들을 내려다 볼 수 있었어요. 나는 그들에게 말하였지만 아무도 내 말을 들을 수가 없었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식구들이나 누가 돌아가신 다음, 함부로 말하거나 웃는 것은 금물입니다. 이 책에는 이러한 죽은 후에 있었던 증언들의 내용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소개하고 싶은 것은, 죽었다가 산 사람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죽은 다음에 지금의 육신의 몸으로부터 영혼이 벗어나지만, 동시에 그들이 새몸을 입는다는 점입니다. 그 몸은 지금의 육신의 몸과는 차원이 다른데, 안개나 구름, 연기나 증기 같은 투명한 몸, 무색의 모습의 몸을 입게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지금의 몸과는 다르지만 어떤 손이나 발 같은 형체의 모습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몸은 벽을 통과할 수 있는 등, 시공을 초월하여 다닐 수 몸이요, 시력도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고 영적감각도 엄청나게 발달된 몸이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적인 신비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람을 느끼되 볼 수 없는 것처럼 영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에 우리의 새몸을 입게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육신의 눈으로 보면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입고 있는 새몸과 그렇지 않고 옛사람의 몸을 입고 있는,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벌거벗은 자의 모습은 엄연히 구별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에 새몸을 입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나오신 분 중에 아직도 옛사람의 옷을 입고 있는 자가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신랑 예수님을 향해 여러분들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시고 마음 문을 열고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안에서 나의 과거 모든 죄악된 삶, 마귀에게 속했던 삶을 다 못박아 버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것으로 다시 태어나십시오. 그 때부터 그리스도의 새 몸을 입고 하나님의 호적인 생명책에 올려질 것이요. 강한 능력을 체험하는 삶을 살게되실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 가장 감동적인 것은 1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라는 구절입니다. '누구든지', 이는 부자나 가난하나, 많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청년이나 노인이나,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상관이 없습니다. 어떠한 사람이든지 그리스도 안에만 들어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선언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제한이 없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주님은 부르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기를 기뻐하십니다.
1933년 시카고에서 해리 스펜서라는 유명한 살인범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악독한지 신문에서도 '가장 흉악하고 야비한 인간, 영혼이 없는 인간'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과연, 그 흉악범은 소문 그대로 누가 찾아오든지 욕하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 때 한 열심 있는 여자 성도가 그에게 전도하려고 할 때 그 흉악범은 갖은 모욕과 행패를 부렸으나 여인은 끝까지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탕자의 이야기와 십자가에 함께 달린 강도가 회개하고 구원받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당신은 온 마음을 그리스도께 맡기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마음 가운데 들어오셔서 당신의 모든 죄를 씻으시도록 하세요. 그렇게 하시겠어요?'라고 끝까지 설득을 시키자, 스펜서는 큰 감동을 받고 녹아졌고, 다음날 그 여성도가 찾아갔을 때 고백하기를 '안녕하세요. 부인, 전 이제 태어난 지 24시간 밖에 안 됩니다. 저는 이제 거듭났습니다. 나도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처럼 이 죄 많은 악인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동안 변화를 받았습니다. 나는 빨리 가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분을 뵙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형 전날에 어린 아기처럼 편한 모습으로 잠을 잤고 사형 당할 때도 찬송을 부르며 죽음을 맞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앞으로 남은 20일 동안 우리 모두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고 새해 새날을 맞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우리의 영인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므로 겉사람을 날마다 쳐서 복종시키시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본문 1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이 거듭나기는 했지만 아직도 영적인 어린 아이입니다. 이제 속사람인 영이 날로 강해지고 자라야 합니다. 그래야 겉사람인 육신을 능히 다스릴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은 거듭나기는 했지만 영적으로 아직 어린 상태이기 때문에 육신을 이기지 못함으로 주님이 요구하시는 기도로 깨어 있지 못하다가 시험에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날 성령충만으로 영적으로 강건해지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이 저들을 체포하다가 감옥에 던져 넣고 아무리 위협하고 고문할지라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외치기를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영이 어서 속히 강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 겉사람인 육신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영이 거듭나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주님의 눈에는 새사람, 새몸, 흰 예복 보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이 점점 자라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주님의 눈에는 영적인 소년, 영적인 청년, 영적인 장년의 차이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치든지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육신이 약해서 넘어졌습니다.'라는 변명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주님 앞에 가서도 그런 변명을 하겠습니까? 아니 됩니다. 올해보다 내년에 영적으로 더 강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속사람인 영이 강해질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겉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단계까지 나갈 수 있습니까? 다섯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잘 자라려면 음식을 잘 먹어야 합니다. 말씀은 영의 양식이니 말씀을 계속 듣고 연구하고 묵상할 때 영은 날로날로 강건해지고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2)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영의 호흡이라고 했습니다. 호흡이 신통치 않으면 병이 들고 호흡이 멈추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호흡을 하되 좋은 공기를 마셔야 됩니다. 기도를 하되 주안에서 하는 것이 맑은 공기가운데 호흡하는 것과 같습니다.
(3)충성해야 합니다.
충성은 영의 운동과 같습니다. 이처럼 한 해가 저물 때가 되면 모든 직책을 벗어놓고 쉬려고 하는 교인들이 많아집니다. 아니 됩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자원해서라도 무슨 직책이든지 맡으려고 해야하는 데, 반대로 맡겨주는 일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한 달란트 맡은 자의 태도입니다. 또한 충성을 멈추면 영이 약해져서 시험에 들고야 맙니다. 먹기만 하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에 이상이 오는 법입니다. 지금까지 쉬고 있던 성도들은 신년새해를 맞기 전에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무엇인가 충성하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4)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자녀를 출산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자들은 아기를 낳아 보아야 성숙한 여자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영혼을 전도하여 영적인 자식을 하나씩 만들어 갈 때 속사람이 점점 강건해 가는 것입니다. 정 전도할 자신이 없으면 자기 식구나 어린 영혼이라도 최선을 다해 전도하려고 해야 합니다. 어느 집이든지 누구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철저하게 살기로 결단만 하면 그 가정은 어느 날인가 반드시 구원받는 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믿음의 태도에 따라 식구들이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인도 여인인 카말라는 힌두교의 가정에서 아주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녀는 칭 랜디라는 중국인 청년과 결혼했습니다. 힌두교식의 결혼식이었기에 결혼한 지 3개월이 되었을 때 부모님께 돌아와 교훈을 받고, 또 부모님이 섬기는 신에게 헌신의 예를 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그녀의 남편은 생각지도 않던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장모를 찾아갔으나 장모는 달가워하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단을 내리게나. 예수를 택하든지 내 딸을 택하든지. 내 딸은 이미 신께 드려진 몸이니 그리스도인은 될 수 없네.'
그 젊은 신랑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아내를 버려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집에 돌아와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내가 아무쪼록 저를 따라 나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 다음날, 그는 장모를 비롯한 친지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그녀에겐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동안의 침묵이 지나자 그녀는 입을 열었습니다.
'남편을 따르겠습니다.' 그 즉시, 카말라와 남편 칭은 그들 가족에게서 쫓겨났습니다. 그 후 몇 달 동안, 카말라는 자신의 결단을 파멸적인 것처럼 생각했지만, 그 후 4년 안에 이 두 사람은 그들의 형제, 친지 등을 그리스도께 인도했습니다. 나중엔 그의 어머니까지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식구 중 누구 하나라도 예수님을 철저히 믿으면 마침내 온 식구가 구원 받는 날이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믿음의 태도가 대단히 중요한 줄 알아야 합니다.
(5)양육해야 합니다.
양육은 전도한 어린 신자를 키우는 것이나 제자를 키우는 것을 말합니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점점 깊어집니다. 자기가 전도한 어린 신자들을 제자로 양육할 때에 동시에 자기의 속사람인 영도 점점 자라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이여, 이제 한해가 20일 뿐이 남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새해를 맞기 전에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성령을 따라 속사람이 강건하여 짐으로 깨어 말씀과 기도생활, 깨어 충성과 전도생활, 양육생활 하심으로 언제라도 주님이 오실 때 칭찬과 상급을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
고후05장 18~21절 / 이종윤목사
아담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화해의 제안을 하나님께서 먼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화해를 위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고, 그 다음엔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18절)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19절)
Ⅰ.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이다
20절을 살펴보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리스도의 사신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증인으로 보냄을 받은 이들, 즉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지금 우리도 이 시대의 사도로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나라의 사신일까요? 우리는 천국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단지 유대인이나 한국인뿐 아니라 세상에게 보내진 사신인 것입니다.
Ⅱ.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의 메시지 내용은 무엇인가?
대사는 그 나라의 임금님이나 대통령이 보내는 메시지를 파송된 곳에 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신 또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메시지를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받은 백성이지만,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을 근거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 피를 믿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백성들로 옮길 수 있으며,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가 없는 것처럼 용서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 것'(19절)입니다.
Ⅲ. 어떻게 이 진리를 전할까?
20절을 보면 우리를 권면하신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간청은 의무적인 것이 아닌 진심입니다. 우리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간청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단지 설명을 하는 것도 아닌, 말을 한 번 건네 보는 것도 아닌,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청하여 이끌어야 합니다. 그 생명을 어떻게든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목을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초청할 때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다른 이에게 용서의 복음을, 사랑의 복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고,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당신 사이의 모든 전쟁은 끝이 나게 되고, 하나님은 당신에게 사랑의 키스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이 사랑을 증거 하는,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사역자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