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라단조 Op.40
1932년 쇼스타코비치는 오페라 "A Lady Mabeth of Mtsenk"를 완성, 1934년 1월22일에 초연하여 대다한 성공을 거두어 다음 해 1934 년에는 소련 뿐만아니라 서방 세계에도 널리 알려지게 된다. 또 그 해에 소련의 스탈린은 보다 많은 자유를 요구함에 대하여 억압정치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작곡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풍자와 즐거움의 세계이었다. 그 것은 주어진 정치적 상황에서 탈피를 위한 시도이었으며, 소비엩 독트린에 반하는 보다 덜 진보적인 의식적인 작곡 경향이기도 했다.이 작품은 소련에서 한 때 쇼스타코비치의 최고의 실내악으로 받아드려지기도했다.
1936년 스탈린의 횡포가 극에 달할 즈음, 오페라 "A Lady Macbeth of Mtsenk"는 폐기 처분되고 그 때까지 최고의 찬사를 받던 작품들은 작곡가 인민동맹에서 추방을 받게 된다. 모든 사람들은 쇼스타코비치가 체포될 것으로 여겼으며 자신도 짐을 꾸려 투옥에 대비하였다.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h, Dmitrii Dmitrievich, 1906~1975)
소련의 작곡가. 페테르부르크 출생. 어려서부터 페테르부르크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우고, 11세 때 글랴세르의 음악학교에 들어가 정규의 작곡공부를 시작하였다. 러시아혁명 후인 1919년에는 페트로그라드음악원에 입학, L.니콜라이에프에게 피아노를, M.시타인베르크와 A.K.글라주노프에게 작곡을 배우고 25년에 졸업하였다. 졸업작품인 《제1교향곡》은 소련뿐 아니라 세계 악단에 그의 이름을 떨치게 하였다.
당시 페테르부르크에는 유럽의 새로운 경향의 음악, 즉 I.F.스 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 A.베르크의 표현주의 작품들이 한창 연주되었으므로, 그도 그들의 작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한편 이 무렵부터 예술에서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가 34년에 발표한 《므첸스크의 맥베스부인》이 공산당의 예술운동에 역행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창작에 대한 이러한 간섭은 당연히 문제가 되었으나, 그는 이 비판을 견디어 내고 작풍을 전환하여 37년의 《제5교향곡》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40년 《피아노5중주곡》으로 제1회 스탈린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방공감시원으로 종군하였고, 42년 《제7교향곡》으로 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그러나 대전 후인 45년에 발표한 《제9교향곡》은 그 경묘한 내용과 신고전적 작 풍 때문에 “타락한 유럽 부르주아지의 형식주의에의 추종”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즉 ‘지다노프 비 판’이다.
그러나 49년의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와 51년의 합창모음곡 《10의 시(詩)》로 인기를 회복하고 또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여 27년 쇼팽 국제콩쿠르에서 2 위를 차지하였다. 37∼41년에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43∼48년에는 모스크바음악원의 작곡교수를 지냈다. 작품에 15곡의 교향곡 외에 현악4중주곡을 비롯, 기악곡·오페라·오라토리오·발레음악·영 화음악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Mstislav Rostropovich, 1927.3.27 ~)
로스트로포비치라는 이름은 첼리스트의 이름을 뒤지다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한다. 므스티슬라브와 레오폴드(1892∼1942) 부자가 그들이다. 아버지 레오폴드는 20세기 초의 전설적인 첼리스트로 남은 파블로 카잘스의 제자였다. 그리고 므스티슬라브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핏줄 탓인지 환경 탓인지, 므스티슬라브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4세 때 폴카를 작곡해 스스로 연주할 정도였다 한다. 5세 때는 집안이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아버지 레오폴드는 모스크바 방송 교향악단에서 연주하며 그네신 음악원에서 가르쳤다. 므스티슬라브도 그곳에서 코졸루포프에게 배우기 시작했다. 10세 때인 37년, 레오폴드와 오케스트라 연주여행에 동행했던 그는 최초로 협연의 기회를 잡았다.
1941년, 14세의 나이로 첼로와 피아노과를 동시에 졸업한 그는 이듬해 아버지 레오폴드를 잃었다. 당시 레오폴드의 나이 50세에 불과했다. 므스티슬라브는 15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첼로 클래스를 물려받았다. 그는 10대 후반에 이미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 등을 스승이자 동료로 두었다. 모스크바 필과 연주여행을 다녔고, 10년 이상 연상인 리히테르를 독주회 반주자로 두었으며, 길렐스·코간과 피아노 트리오 활동도 했다. 1945년 모스크바 콩쿨을 시작으로 프라하, 바르샤바, 부다페스트에서 콩쿨을 석권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로스트로포비치라 하면 사람들은 모두 레오폴드를 떠올리기보다 므스티슬라브를 떠올렸다. 카잘스에 비한다면 로스트로포비치의 젊은, 아니 어린 시절은 '화려한 인생' 그 자체였다.
그가 어린 시절 피아노를 병행해 공부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그는 훗날 부인인 소프라노 가수 갈리나 비슈네프스카야의 독창회 반주를 암보로 연주할 정도로 전문 피아니스트 수준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는 지휘자로서도 큰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처음 첼로의 길을 걸을 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협주곡에서 독주악기로 오케스트라와 대적할 때, 그의 연주는 특히 빛을 발한다. 이는 첼로로 피아노가 내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의도했기 때문이다. 유리처럼 딱딱하고 금속적인 소리에서 돌변해 꿈꾸듯 부드러운 소리를 내고, 어떠한 어려운 기교도 악상에 맞게 소화해 내는 연주. 아버지 레오폴드를 통해 내려온 카잘스의 주법이 므스티슬라브에 이르러, 약 50년만에 다시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그의 연주는 초인적이다' '그는 첼리스트가 아니다. 자연현상이다'라는 찬사를 받았고, 그를 아는 거의 모든 작곡가는 그에게 앞다투어 곡을 헌정했다. 그의 레퍼토리가 현대 곡에 폭넓게 포진해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거꾸로 그의 폭넓은 표현력과 강렬한 연주효과는 작곡가들에게 첼로 협주곡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다고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가 현대 곡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초인적인 연주만큼 그의 레퍼토리도 초인적으로 넓다.
1956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가 된 그는 구 소련에서 인권운동을 펼치던 노벨상 수상작가 솔제니친을 옹호한 죄로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했다. 이 또한 정치와는 무관한 인류애의 발로였다. 따라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그 앞에서 연주하던 그의 모습이 전혀 쇼나 이벤트로 비치지 않은 것이다.
이후 그는 미국을 근거지로 활동하며 지휘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떠나기 전, 쇼스타코비치와 한 약속을 잊지 않았다. 위대한 작곡가의 교향곡이 서방세계에서 영원히 울려 퍼지게 하겠다는 약속이 그것이었다. 이전에도 그의 연주 모습을 보면 협연석에 앉아 오케스트라를 향해 몸으로 얘기하는 듯한 동작을 자주 취하곤 했다. 몸 속에 정열이 끓어오르던 그는 지휘자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안탈 도라티의 후임으로 1977년부터 워싱턴 내셔널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된 그는 이후로도 첼로와 지휘를 병행하며 양쪽 어느 하나 허술함이 없었다. 그가 지휘한 텔덱 레이블의 음반 중에는 이미 수작으로 거론되는 음반들이 상당수 있다. 특히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이나 바이올리니스트들과의 협연 음반들이 좋다. 하지만 그가 어린 시절부터 연주활동을 펼치며 첼리스트로 남긴 구 소련시절의 연주들은 그가 아직 타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전설중의 하나로서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