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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는 있음의 노래인가?
구약의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글자도 낯설다-.-;;. 그냥 한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보겠다. 창세기 1장 1절을 히브리어로 보자. 창세기는 대부분 운문으로 쓰여 있다. 즉 시(詩)요, 노래다(낭송 https://bible.ort.org/books/torahd5.asp ).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전.명여단of 동칼완남3단 명남복 격 관.명남쌍 접.격 관.명여단
집의 머리께서 창조했다 하나님이신 을 그 하늘 과.을 그 땅
하나님이신 집의 머리께서 그 하늘과 그 땅을 창조했다.
그 어떤 있는 것도 아니시어 있음 그 자체이신
말씀의 머리 그 분[베레쉬트]께서 비로소 만드신 바 있으니,
그 분은 있는 것들의 있음들[엘로힘]로 나타나시는 분이시며,
그 만드신 것은 그 하늘과 그 땅이니,
바로 우리가 보고 살아갈 수 있는 지평(地平)을 만드심이로다!
“태초에(In the beginning)”으로 흔히 번역했던, 베레쉬트(레쉬는 명사 여성 단수)의 ‘베’가 논란의 핵심이다. 이것은 ‘집, 내부,’라는 명사와 ‘~에서’라는 전치사로 볼 수 있다는 두 견해가 있다(이 ‘베’는 ‘베들레헴’에도 나온다). 즉,
1. ‘베’가 비분리 전철로서 명사를 만들어준다는 견해( https://www.youtube.com/watch?v=nf5JZqllrTs )에서는, 베레쉬트를 ‘의 집 머리’라고 보고 엘로힘(명사 남성 복수, 하나님들)과 소유격/동격으로 보아 ‘하나님들 집 머리께서’로 해석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_hTDueLPEMY ).
2. ‘베’를 그냥 ‘In’이라는 전치사로 보는 견해( https://www.youtube.com/watch?v=jblBGnZSyN8 )에선 베레쉬트는 ‘태초에, 머리에서’로, ‘베’는 ‘에, 에서’ 정도로 본다.
‘머리[레쉬(명사 여성 단수)]’는 창조 이전의 자리를 뜻하며 있음이 있는 것들로 나타나기 이전(以前)이므로, 마이스터 엑크하르트의 용어론 있음 그 자체인 ‘하나님 머리(Godhead, Gottheit)’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트’는 ‘의(of)’의 뜻으로 소유격이나 동격으로 만들며, 뒤에 나온 엘로힘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즉 베레쉬트는 엘로힘의 집[집, 성전(聖殿)] 머리이다. 집[베]은 무엇인가? 당연히 있음의 집인 말씀, 즉 로고스(logos, λόγος)가 아닌가?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Frg. 1: »Wärend aber der λόγος ständig dieser bleibt, ge-bärden sich die Menschen als die Nichtbegreifenden (άξύνετοι), sowohl ehe sie gehört haben, als auch nachdem sie erst gehört haben. Zu Seiendem wird nämlich alles κατά τόν λόγον τόνδε, gemäß und zufolge diesem λόγος ...
Fragment 1: "But while logos constantly remains itself, human beings behave as those who do not comprehend (axunetoi), both before they have heard and after they have first heard. For everything becomes a being kata ton logon tonde, in accordance with and in consequence of this logos ...
Martin Heidegger, Einfürung in die Metaphysik(VITTORIO KLOSTERMANN): 136
Martin Heidegger, Introduction to Metaphysics(Yale University Press, 2000): 134
『형이상학입문』(문예출판사, 1997)
단편 1, “그러나 말씀은 계속 말씀으로 있지만, 사람들은 말씀을 듣기 전에도 들은 후에도 말씀을 붙잡지 못한 자(axynetoi)인 것처럼 행동한다. 말하자면 모든 것은 이 말씀에 따라(kata ton logon tonde) 있는-것이 되는 것이다. ...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말씀] 철학을 철저히 사유한 하이데거는 “말씀은 있음의 집”이란 말을 남겼다.
Das Sein durchmißt als es selbst seinen Bezirk, der dadurch bezirkt wird (τἐμνειν, tempus), daß es im Wort west. Die Sprache ist der Bezirk (templum), d. h. das Haus des Seins. .. Weil die Sprache das Haus des Seins ist, deshalb gelangen wir so zu Seiendem, daß wir ständig durch dieses Haus gehen. Wenn wir zum Brunnen, wenn wir durch den Wald gehen, gehen wir schon immer durch das Wort “Brunnen”, durch das Wort “Wald” hindurch, auch wenn wir diese Wort nicht aussprechen und nicht an Sprachliches denken.
있음은 그 자체로서 자기 구역을 남김없이 답사하고, 이 구역은 있음이 말씀 속에 나타나 있음으로써 나눠지는 것이다(구획한다, 간격을 낸다, 시간, 상황). 말씀은 구역(templum=성역, 신전), 즉 있음의 집이다. ...
말씀은 있음의 집이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이 집을 지나감으로써 있는-것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샘에 가고 숲을 지나갈 때, 우리는 이미 언제나 ‘샘’이라는 말씀, ‘숲’이라는 말씀을 통과하게 된다─설사 우리가 이 말씀을 입으로 하는 말로 표현하거나 속으로 하는 말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Wozu Dichter?”, Holzwege(Vittorio Klosterman Frankfurt Am Main): 286
즉 말씀은 히브리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니다. 말씀은 각 언어로 나눠지기 이전(以前)에, 말하기 이전에, 또는 속으로 말하거나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나타나 있는 ‘있는 것들의 일어남[사건들의 일어남]’ 그 자체이다. 있는 것들의 일어남 그 자체가 바로 창조요, 말씀인 것이다.
있는 것들이 현재 우리 눈앞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이 있는 것들의 있음 그 자체는 무엇인가?
있음은 어떤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즉, ‘아무 것도 아닌 것(nothing)’이다. 하이데거에겐 어떤 존재자도 아닌 것(Nichts)이고, 마이스터 엑크하르트에겐 어떤 피조물도 아닌 것(Nichts, Deitas, Gottheit)이다─엑크하르트에게 창조란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지속적인 현재 진행형임을 잊지 말라. 레쉬 즉 하나님 머리는 명사 여성 단수이다. 있는 것들의 있음 자체는 있는 것들의 있음으로 나타나기 전에 어떤 있는-것도 아닌 상태(Nichts, nothing)로 단수이며 하나인 님, 즉 하나님이다.
이에 비해 엘로힘은 명사, 남성, 복수로서 창조하고 있는 하나님이다. 즉 있는 것들의 있음들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이니 하나님들, 즉 ‘있음들’로 보아야 한다. 모든 있는-것이 자신의 순수한 있음에 있을 때 엘로힘이 된다(출애굽기 3장). 그래서 엘로힘은 성경에 천사, 선지자들, 하나님의 자녀, 말씀을 받는 자들로도 나타나는 보통 명사다(시편 82장 6절).
그러므로 1의 견해로서는 ‘있음들의 집 머리께서 그 하늘과 그 땅을 창조했다.’로 된다.
2의 견해로는 ‘있음 그 자체에서, 있음들께서 그 하늘들과 그 땅을 창조했다.’가 된다. 즉, 창조 전이어서 어떤 것도 없는 집[성전(聖殿)]에서, 있는 것들의 있음들로 나타나시는 하나님께서, 그 하늘들과 그 땅을 비로소 만들었다.
2의 견해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베레쉬트(레쉬는 명사 여성 단수)와 엘로힘(명사 남성 복수)을 가르는 바라(창조했다. 동사 칼형 완료형 남성 3인칭단수)가 3인칭 단수 주격 뒤에 나오는 동사이기 때문이다. 레쉬가 명사 여성 단수이므로 베레쉬트도 단수일 걸로 보인다. 즉 문법적으로 바라(동사 칼형 완료형 남성 3인칭단수)는 명백히 베레쉬트를 주어로 받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어에선 보통 동사가 제일 앞에 나오고 주어가 뒤에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예외적으로 주어가 동사 앞으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주어 베레쉬트를 가장 앞세우고 동사를 바로 뒤에 배치한 시적(詩的)인 강조가 아닐까?
베레쉬트께서 만드심을 강조하고, 베레쉬트란 분은 엘로힘임을 설명하고, 만드신 것을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서 엩(격조사 ~을)을 만드신 것인 그 하늘(핫솨마임)과[접속사 '웨'] 그 땅(하아레츠)앞에 두 번이나 명시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엘로힘이신 베레쉬트께서”가 적절해보인다. 따라서 완료형 창조인 바라의 주어는 베레쉬트이며 창세기의 시작은 이러하다.
있는 것들의 있음들로 나타나시지만[엘로힘이시지만] 어떤 있는 것도 아니신 있음 그 자체이신 말씀의 머리[베레쉬트]께서 그 하늘과 그 땅을 비로소 만드셨다.
그 하늘(핫솨마임, 관사+명사 남성 복수)은 왜 복수인가? 물질적인 하늘들과 정신적인 하늘을 말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https://www.youtube.com/watch?v=_hTDueLPEMY ). 어쨌든 창조되어 나타난 우리의 시야에서 정신적 하늘이든 물질적 하늘이든 보통 그 하늘은 horizon[지평선, 수평선]의 위쪽을 담당한다. 그리고 하아레츠(the earth 그 땅, 관사+명사 여성 단수)는 보통 horizon의 아래에서 몸을 지탱하는 부분을 담당한다. 있는 것들이 나타나 있는 우리의 시야(horizon)는 뭍에서는 지평(地平)을 이루고 물에서는 수평선(水平線)을 이룬다. 그럼 지구 밖의 우주 공간에서는? 결국 horizon은, 발이나 몸을 고정시키는 곳(the earth)와 위로 쳐다보는 곳(the heaven)으로 이루어지므로, 하늘이나 우주 공간을 공통으로 보기 마련이다. 따라서 하늘을 쳐다보는 면(面) 즉, ‘대공면(對空面)’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물 위에서 허우적거릴 때조차 순간적으로 몸이 있는 곳은 있기 마련이며, 몸을 순간적으로 고정되어 있게 하는 기반을 그 땅(the earth)라고 볼 때, 상징적으로 지평(地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의미와 시적 운율에 충실할 때 창세기 1장 1절은 창세의 전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창세기 1장 1절:
그 어떤 있는 것도 아니시어 있음 그 자체이신
말씀의 머리 그 분[베레쉬트]께서 비로소 만드신 바 있으니,
그 분은 있는 것들의 있음들[엘로힘]로 나타나시는 분이시며,
그 만드신 것은 그 하늘과 그 땅이니,
바로 우리가 보고 살아갈 수 있는 지평(地平)을 만드심이로다!
그렇다면 이것은 존재론(存在論)이자 인식론(認識論)이 아닌가? 지금 여기 우리의 시야에, 있는 것들이 어떠하게 나타나 있는지에 대한 말씀으로 들린다. Nisargadatta Maharaj는 보다 더 인식론적으로 이렇게 표현한다.
Noumenon, the only subject, objectifies itself and perceives the universe, manifesting phenomenally within itself, but apparently outside, in order to be a perceivable object.
Pointers from Nisargadatta Maharaj by Ramesh S. Balsekar: 48
http://sri-nisargadatta-maharaj.blogspot.com/2015/02/noumenon-and-phenomena-summary-of.html
유일한 주체인 본체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만들어 그 대상이 된 우주를 감각으로 아는데, 자신 안에서 현상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감각의 대상이 되기 위해 분명히 바깥쪽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 우주를 감각으로 아는 것이다.
철학 용어를 많이 아는 사람들은 이런 표현이 쌈박하다고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철학 용어들 자체가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간단히 이 글에서 나온 차례대로 용어 해설을 달고자 한다.
지평(地平. horizon): 우리의 감각과 마음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보이는 시야(視野)를 말한다. 물질적으로 우리가 감각하는 모든 것은 사실상 하늘과 땅 사이에 있다. 우리의 몸을 고정시키는 것이 땅 대신에 (수영할 때) 물이나 (낙하산을 타고 낙하할 때) 공기나 (우주 유영을 할 때) 우주 공간이 될 때도 있으므로, 땅을 우리의 시야 아래를 지속적으로나 순간적으로 고정시키는 것으로 확장하여 볼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보는 모든 것은 시야 안에 있다. 즉 지평 안에 있는 것이다. 감각적 시야를 뜻하는 말이던 지평의 뜻을 확장하여, 우리가 의식으로 아는 모든 것이 나타나는 시야를 지평이라고 하기도 한다.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y): 우리가 감각이나 생각 즉, 의식으로 아는 모든 작용을 인식이라 한다. 이 인식의 관점에서 어떻게 인식이 일어나는지를 파악하고자 하는 철학 분야을 인식론이라 한다. 인식론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은 인식의 주체(主體, subject)와 인식의 대상(對象, object)으로 나눠진다. 인식과 관련하여 주체는 주관(主觀)이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주체/주관, 대상에 대해서는 몇 줄 밑에서 해설하겠다.
존재론(存在論, ontology): 있는-것들과 있음의 관점에서 모든 있는 것이 어떻게 있는지를 설명하는 철학 분야이다. 인식론에서 모든 것은 주체/주관, 대상으로 나눠질 수 있는데, 주체/주관, 대상도 다 있는 것[존재자]들 안에 들어간다. 따라서 인식론의 모든 문제들은 존재론으로도 바꾸어서 물어볼 수 있다.
대상(對象, object): 인식되는 것(the known)을 말한다. 또는 행동이 행해짐을 당하는 자(the done thing)를 말한다. 따라서 대상을 객체(客體) 또는 객관(客觀)이라 하기도 한다. 인식 작용에서 대상은 인식의 대상이다. 예를 들어 ‘내가 철수를 안다’고 할 때, 내가 인식의 주관 내지 주체가 되는 것이고, 철수가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때 아는 자는 주관이 되고, 알려지는 것은 대상이 되는 것이다. 좀 더 넓은 의미로 행동의 주체와 대상이라는 관점에서도 대상이란 용어가 쓰인다. 예를 들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할 때 ‘나’는 주체, ‘너’는 대상이 된다. 이때 행동하는 자는 주체가 되고, 행동의 목적어는 대상이 된다.
대상으로 만들다=대상화(對象化)하다=objectify: 우리의 인식이나 행동은 결국 끊임없이 대상을 만들어서 그 대상을 알거나 그 대상에 행동을 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끊임없이 순간순간 대상을 만드는 작용을 대상화라고 한다.
본체(本體, noumenon): 현상(現象)으로 나타나기 이전(以前)에 있는 것을 본체라고 한다. 현상에 대해서는 몇 줄 뒤에 설명한다. 칸트 철학에서 말하는 물자체나 신학에서 말하는 영혼, 하나님도 바로 이 본체이다. 즉, 본체는 물질 현상이나 정신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의 나타나기 이전 상태다.
여기서 개체와 전체의 문제가 나온다. 즉 본체는 개체이기도 하고 전체이기도 한 것이고 개체와 전체로 나눠져 나타나기 이전의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얼마만큼 본체인가? 나는 내가 있는 만큼만 본체다(I am noumenon only as much as I am). 신학적으로는 “나는 내가 있는 만큼만 하나님이다(I am God only as much as I am).”
A master says that being is so pure and so lofty that all that God is, is being. God knows nothing but being, He is conscious of nothing but being: being is His circumference. God loves nothing but His being, He thinks of nothing but His being. ...
So far as our life is one being, so far it is in God. So far as our life is enclosed in being, so far it is akin to God.
THE COMPLETE MYSTICAL WORKS OF MEISTER ECKHART
(The Crossroad Publishing Company, 2009): 404
한 스승은 있음이 그토록 순수하고 고상한 것이므로 하나님이신 모든 것이 있음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있음만 아신다. 그분은 있음만 의식(意識)하시고 있으시다. 있음이 그분의 원둘레[테두리]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있음만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있음만 생각하신다. ...
우리의 삶은 하나의 있음인 만큼만 하나님 속에 있다. 우리의 삶이 있음 속에 둘러싸여 있는 만큼만 하나님과 닮아 있다.
의식(意識)과 무의식(無意識)이란 말로 개체와 전체의 관계를 말해보자면 “나는 나의 개체적인 부분을 의식으로 알고, 나머지 부분을 무의식으로 안다”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으로 안다’는 것은 나의 개체가 의식할 수 있는 부분을 뺀 전체의 나머지 부분이 나의 무의식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소통하고 있지만, 현재 의식인 나는 그것을 감각이나 생각으로 알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주체(主體, subject): 행하는 자를 말한다. ‘아는 자’ 또는 ‘보는 자’를 뜻하기도 하므로 주관(主觀)이라고도 한다. 구체적인 예는 ‘대상’에서 들어서 설명했다.
현상(現象, phenomenon): 감각이나 생각이나 의식(意識)하는 내용으로 나타나는 것을 현상이라고 한다. 즉, 마음에 나타나는 것은 현상이다. 현상은 항상 개인의 마음에만 직접 나타난다─인류 전체에 나타나는 현상이란, 관념적인 추론에서 나오는 것으로, 개인에게 직접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관념적인 지도(地圖)이다. 현상은 개인에게 나타나는 것이고, 본체는 개체와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다. 그래서 개체와 전체의 관계를 다시 철학하게 한다.
존재(存在, being): 존재라는 말은 한자의 어감(語感)으로 말미암아 ‘있음’이나 ‘있는-것’을 직접 느끼게 하는 데 부족하다. 영어와 우리말에서 존재는 존재 상태, 즉 있음[being]을 뜻하기도 하고, 존재자[있는-것=a being]란 뜻으로 쓰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애매함과 있음이란 뜻으로 말할 때, 나는 ‘존재’라는 말보다 ‘있음’이나 ‘있는-것[존재자]’, ‘있는 자,’ ‘있는 것들[존재자들]’이란 말을 더 즐겨 쓴다. 하지만 있는-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고 있음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을 말할 때는 ‘존재’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러므로 길이에 상관 없이 최대한 쉬운 말로 해석하자면 이렇게 된다(어려운 말은 말이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하나 보다 하고 지나갈 수 있지만, 쉬운 말은, 이해하지 못하면 독해력 부족임을 드러내므로, 더 어렵게 들릴 수도 있다-.-;;).
Noumenon, the only subject,
objectifies itself and perceives the universe,
manifesting phenomenally within itself,
but apparently outside,
in order to be a perceivable object.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둘이 아니며
모든 보는 자는 전체로서 한 몸이며 하나뿐이다.
하나뿐인 보는 자이자, 감각이나 생각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있는 존재가,
자기 자신을 감각에서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그 보이는 것인 우주를 본다.
즉, 그 존재는 자신의 겉모습인 우주를,
그 존재 안에 있는 감각이나 의식(意識)으로 아는 것으로 만들어,
그 존재 안에 나타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는,
감각으로 아는 것이므로,
겉으로 보기에 분명하게(apparently) 그 존재의 바깥쪽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 존재의 겉모습이다.
첫댓글 다음을 끝에 첨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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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sargadatta Maharaj는 보다 더 인식론적으로 이렇게 표현한다.
Noumenon, the only subject, objectifies itself and perceives the universe, manifesting phenomenally within itself, but apparently outside, in order to be a perceivable object.
유일한 주체인 본체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만들어 그 대상이 된 우주를 감각으로 아는데, 자신 안에서 현상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감각의 대상이 되기 위해 분명히 바깥쪽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 우주를 감각으로 아는 것이다.
Pointers from Nisargadatta Maharaj by Ramesh S. Balsekar: 48
http://sri-nisargadatta-maharaj.blogspot.com/2015/02/noumenon-and-phenomena-summary-of.html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중간에, Maharaj의 철학적 표현의 해설을 끝에 덧붙였습니다.
제일 앞에 창세기 낭송( https://bible.ort.org/books/torahd5.asp )을 추가했습니다.
베레쉬트의 트[of]가 엘로힘과 연결됨을 명확히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hTDueLPEM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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