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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권하노니(1)
고후 6:1-10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1-10 /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ㄱ) `너희를 불쌍히 여기는 때가 오면 너희가 부르짖는 소리를 내가 들어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 지금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환영하고 계시는 때이며 오늘이 바로 여러분을 구원하시려는 날입니다. (ㄱ. 사49:8) 3) 우리는 잘못하여 누구를 넘어지게 하거나 주님 찾는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족하여 사람들이 주님을 비난할까봐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4) 우리 스스로 참된 하나님의 일꾼임을 다짐하며 온갖 고난과 궁핍과 어려움을 참고 견디고 있습니다. 5) 우리는 매를 맞고 투옥을 당하고 살기 등등한 폭도들을 만난 일도 있습니다. 심한 노동을 했고 한잠 못 자고 밤을 지샌 일도 있었으며, 굶어야 했던 날도 많았습니다. 6) 그러나 우리는 건전한 생활과 복음에 대한 지식과 인내로 우리가 선포한 것을 증명해 왔습니다. 우리는 친절하고 참으로 사랑에 넘쳐 있었으며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7) 우리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모든 일을 진실하게 해왔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정의의 무기를 언제나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8) 다른 사람이 우리를 존경하든 경멸하든 비난하든 칭찬하든 주님에 대한 충성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우리를 거짓말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정직합니다. 9) 이 세상은 우리를 무시하더라도 하나님께는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으나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부상은 당했지만 죽음은 면하였습니다. 10) 우리의 마음은 상처를 받았으나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풍성한 선물을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겪은 많은 어려움을 인내와 사랑으로 극복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1-2)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인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 것을 당부합니다. 인간이 쉽게 망각하는 것 중에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하나님께 받은 복이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이라는 단어를 반복 사용하여 시간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동시에 현재의 시간을 귀하게 여기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기회는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잘 활용하는 사람은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바로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이며, 바로 지금이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을 기회를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의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3-8a) 바울은 비방을 받지 않고 자기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누구에게든지 비방 거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를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견디었습니다. 또한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영광과 모욕, 비난과 칭찬을 동시에 겪으며 일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 신실했으며, 어려움도 잘 견디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은 자로서 바울처럼 스스로 절제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8b-10) 하나님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에게 놀라운 역설의 삶을 사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속이는 자 같지만 실제로 진실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 같지만 실제로 인정을 받고, 죽은 자 같지만 실제로 살아 있고, 슬퍼하는 자 같지만 실제로 기뻐하며, 가난한 자 같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와 같으나 실제로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게 하십니다.
적용: 바울은 많은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지녔습니다. 당신도 복음의 합당한 성품과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별빛이 고운 것은 그 빛이 오래전 출발해 지금 우리 눈에 닿았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지척에서 별의 표면을 본다면 그것은 한낱 울퉁불퉁하고 거친 광야 같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거리감'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요?
< 설 교 >
신앙의 역설, 인생의 역설
고후06장 08~10절 / 인명진목사
기독교 신앙을 가리켜 역설의 종교, 역설의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인생 역시 역설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역설은 인간의 상식과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해될 수 없는 걸림돌입니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고, 버리는 것이 얻는 것이며, 죽는 것이 곧 살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와는 정반대입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 같습니다. 지는데 어찌 이길 수 있습니까? 버리는 데 어찌 얻을 수 있습니까? 한번 죽으면 끝인데 어찌 살 수 있습니까? 보편적인 지식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관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이 역설에 바탕을 두고 있고, 우리네 인생 역시 역설이 없으면 인생이 해석이 되질 않는다는 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역설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세상의 보편적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지혜입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역설입니다. 사람의 지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힌 패배의 상징 십자가가 우리를 죽음과 죄에서 해방시키기는 승리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상황을 리얼하게 상상해 보십시오. 참 우스꽝스럽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모든 상황은 온통 패배 투성이입니다. 예수도 패배자고, 예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도들도 패배자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승리자라고 믿고 말한다는 게 참 웃기지 않습니까? 마치 이런 것하고 비슷합니다. 날마다 빌어먹는 거지가 자기 아버지는 재벌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은 자신을 못 박는 유대의 종교 권력과 로마의 정치권력을 짓밟음으로써가 아니라 십자가의 패배를 통해서였습니다. 원수를 희생제물 삼아서가 아니라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힘과 승리를 숭배하고 찬양하는 세상에서 약함과 고난을 통해 보여준 최고의 역설입니다. 세상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기막힌 역설이고, 역전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순과 역설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진수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샅샅이 살펴보십시오. 모순과 역설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인생도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자세히 관찰해 보면 역설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가졌던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여섯 가지 역설의 진리를 말씀합니다. 이름이 기름보다 낫고, 재산보다 명예를 지키라.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 가는 것보다 낫고, 떠들썩한 분위기보다 초상집에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삼으라! 슬픔이 웃음보다 낫고, 인생의 참된 의미는 웃음보다는 눈물 속에 있으니 눈물을 흘리며 씨앗을 뿌려라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유행가를 듣는 것보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을 때에 영혼의 기쁨이 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시작이 아무리 좋아도 끝이 좋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고, 분노를 참고 이겨서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 이처럼 우리 인생의 지혜도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의 팔복 역시 역설입니다. 부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 복 있다. 웃는 사람이 복 있다 말하는 세상에서 애통하는 사람이 복 있다. 약삭빠르고 거머쥐는 사람이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에서 온유한 사람이 복 있다. 힘 있는 사람이 정의마저 쥐락펴락 세상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 있다.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만 가는 사람이 출세하는 세상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 있다. 술수가 능한 사람이 성공하는 세상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 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연루되지 않는 것이 지혜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복 있다. 어려운 일 겪지 않는 사람을 곱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사람이 복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을 절대로 복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산다는 것은 복 없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실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복 중에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엄청난 모순이고 역설입니다. 여기에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말씀의 충돌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의 인생 속에서가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인삼고 살아가려는 내 인생 한복판에서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 모순과 역설에 걸려 넘어집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가 무능력한 것이라고 넘어졌습니다. 헬라인들은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이라고 넘어졌습니다.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가 인생살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넘어집니다.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현실의 눈으로 보면 그게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고 무능력한 것이니까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으니 당연히 걸려 넘어집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늘의 그리스도인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 말고 우리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가 지신 십자가는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내가 져야하는 십자가는 부담스러워하지 않습니까? 모순과 역설로 가득한 십자가를 삶으로 살아내는 일을 피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교회도 예수의 십자가는 말하지만 자신이 져야하는 십자가는 말하지 않고 축복만 말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 세상의 지혜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의 지혜로, 역설의 지혜로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 역설을 포기하고 세상 지혜를 따라서 산다면 믿음의 역사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지혜를 말하지만 십자가의 역설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세상보다 더 큰 힘을 휘두르고, 세상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제물이 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은 자기 존재를 과시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숨김으로써, 강함으로써가 아니라 약함으로써, 부유함으로써가 아니라 가난함으로써, 이김으로써가 아니라 짐으로써 증거 됩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짊어져야 할 역설이고 모순입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는 힘을 사랑하는 권력 의지가 있습니다.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과시하고자 하는 자아 욕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나의 약함이 곧 주님의 약함이요, 나의 승리가 곧 주님의 승리라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라도 나는 강해야 하고 승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너의 약함이 나의 강함을 드러내고, 너의 아픔이 나의 승리를 드러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모순이고 역설입니다. 그때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인의 신비와 역설을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신비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역설의 신비를 아는 사람들이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다는 것을 압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라는 것을 압니다.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압니다. 이 신비, 이 역설을 알기 때문에 현실의 고난과 가난과 약함에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이 걸어갔던 것처럼 역설의 진리를 믿고 역설적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이성과 합리적인 법칙으로만 굴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일상은 우리의 논리처럼 척척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논리적인데, 우리네 인생은 결코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1+1=2, 2*2=4라는 수학의 공식처럼 세상의 모든 일이 딱딱 맞아 떨어져야 하는데 10 나누기 3이라는 난제가 등장했습니다. 답이 3하고 0.3333이 계속됩니다. 문제는 풀려지지 않는 0.333어떻게 하겠습니까?
역설이란 이렇게 이성의 논리가 도저히 적용되지 않는 사건을 풀 수 있는 열쇠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 안에서 인생의 역설을 푸는 열쇠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역설은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는 하늘의 지혜입니다. 역설은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통하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논리로 풀 수 없는 0.333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만취 음주운전자 모는 차가 길가 식당으로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음주운전을 한 사람은 즉사를 했고, 식당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이 많이 다쳤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던 사람 중에 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고를 낸 사람은 자신이 음주운전을 했기 때문에 사고를 냈고, 죽거나 다치는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다친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은 왜 다쳐야 합니까? 이성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사람들은 이해되질 않는 일을 당할 때, 이성과 합리의 논리가 작동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재수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냥 재수가 없어서 당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논리로 이해되지 않는 일을 자꾸만 생각하니 머리가 아프니 운이나 재수에 맡겨서 잊으려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모든 것이 다 설명이 되고, 이해가 된다면 종교가 필요 없고 신의 도움 없이 인간들끼리 잘 먹고 잘 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은 이성의 논리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에 있는 질병 때문에 주님께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은 이 질병이 자신에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절박하게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새기고 또 새겼을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무슨 뜻인가? 그 결과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주님을 더욱 붙잡고 의지하게 되고, 그때 자신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머물러 온전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강하고 잘났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뭔가를 하려고 할 때에는 예수님을 찾지 않고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난다는 것을 깨닫고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개입, 예수님의 역사, 예수님의 은혜를 통한 역설적 경험, 역설적 체험입니다. 이렇게 그가 깨달은 '약한 그때가 곧 강한 때다'라는 역설의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들, 능욕 받는 것, 궁핍, 박해, 곤고를 기뻐하였습니다. 그런 때에 자신은 약하고 무능력하지만 예수님은 더욱 드러나고 예수님의 능력은 더욱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은 자신의 역설적 경험들을 서술함으로써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신앙생활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주석학자들은 이 본문 말씀을 감동적인 역설, 아름다운 역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설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얼핏 보기에는 속이는 사람 같지만, 복음의 진리, 영생의 진리,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참되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무명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때로는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예수님으로 인해 살아있습니다. 징계를 받아 고난 속에서 고생하면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 안에서 죽지 않고 하나님의 평강을 누립니다. 근심하며 살 것 같지만,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며 삽니다. 가난한 사람 같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모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영혼과 삶을 부요하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기에 가장 가치 있는 것, 영원한 것,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가난해 보이지만 절대로 가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스워 보이는 사람이지만 결코 우습게봐서는 안 될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그런 사람입니까?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당당하고 멋있는 사람입니다. 역설의 진리는 이 세상에서 경험되기도 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와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기존 질서가 뒤집히는 날이 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세상에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고 세상의 질서를 대체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는 단지 저 멀리 높이 있는 하늘에 있는 나라만을 생각하지 말고, 세상의 질서와 반대되고 세상의 질서를 넘어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질서를 생각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이 말씀이 이 세상에서는 앞뒤가 안 맞고 논리적이지 않은 것 같은 역설의 진리이지만, 마침내 새로운 세상, 다가오는 세상,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에서는 그대로 이루어질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역설의 신앙을 소중히 갖고 역설의 진리가 완성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겉으로의 기준과 평가와 안으로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보이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와 보이지 않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물질세계의 기준과 평가와 영적인 세계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현세의 기준과 평가와 내세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와 영원한 세상의 기준과 평가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시느냐,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가치가 무엇이냐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에서 역설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역설적인 진리따라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역설의 신앙을 가지고 삽니다. 역설의 신앙을 소중히 여깁니다. 역설의 신앙으로 성숙해집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영웅들, 신앙의 선배들은 역설의 신앙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세계 교회사와 우리나라 교회사에 기록된 위대한 신앙인들은 역설의 신앙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1866년 8월 27일에 대동강 평양의 한 포구에 큰 배 한척이 정박했습니다. 이 배 이름은 제너널 셔먼호입니다. 이 배는 조선의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며 총과 포를 쏘아대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배는 9월 2일에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되었는데, 이 배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도 스물일곱 살의 꽃다운 나이에 재대로 복음 한번 전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순교를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에 내한했던 첫 번째 선교사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죽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병사 박춘권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들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대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토마스를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은 한문으로 된 성경을 영문주사였던 박영식에게 건넸습니다. 박영식은 종이가 귀하던 시절 한문 성경 종이를 떼어서 도배를 했습니다. 나중에 최치량이라는 사람에게 이 집을 팔았습니다. 최치량은 이집을 개조하여 여관으로 영업을 했습니다. 이후 사무엘 마펫, 마포삼열 선교사가 평양에 첫날밤을 보냈는데 공교롭게도 토마스 선교사가 던져준 성경으로 도배한 방에서 숙박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예사 벽지가 아니라 성경이었습니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이집을 매입하여 널다리골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교회는 나중에 이름을 바꾸어 장대현교회가 되었습니다. 1907년 길선주 목사님이 대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그 유명한 교회입니다. 또한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과 여관집 주인 최치량은 장대현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 짜맞춘 드라마라도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드라마입니다. 이 하나님의 드라마를 우리는 역설의 신앙이요, 역설의 인생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역설의 신앙이고,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의 역설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은 역설의 진리를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바보가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적 관점으로는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역설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의 지혜로 살아가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온전해 지고,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속이는 자 같지만 참된 사람들입니다. 무명한자 같지만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죽은 자 같지만 살아 있고, 징계 받는 자 같지만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근심하는 사람 같지만 항상 예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가난한 사람 같지만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눈에 보이는 가치관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토록 행복하게 하는 역설의 신앙으로 역설의 인생을 살아가십니다. 그리하여 세상 감당할 수 없는 당당함으로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고후06장 4~10절 / 김광일목사
하루는 어떤 세무서원이 목사님 가정에 방문을 했습니다. 세금을 매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세무서원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가정에는 가지고 있는 재산이 얼마나 됩니까?" 목사님이 선뜻 대답하셨습니다. "예, 우리는 엄청 부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잔뜩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되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계십니까?"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예, 저는 우선 하늘 나라에 영원토록 살아갈 좋은 스카이 맨션 한 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자상한 아내가 있고, 의좋게 살아가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거기다 오늘밤에 아무 걱정 없이 두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는 장소도 있습니다." 세무세원은 더 안 들어도 알겠다는 듯이 목사님의 말씀을 가로막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군요. 정말 엄청난 부자네요. 그러나 세금은 매길 것이 없겠습니다."
삶의 만족과 행복은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많이 가졌는지 적게 가졌는지 거기에 좌우되지 않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비록 내가 적게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는 사람은 마음에 감격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진정한 삶의 만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해서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바울의 생애는 부요함이 넘쳤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니 "나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굶으면 배가 고팠고, 병들면 아팠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마음이 심히 답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마음 속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 있는 나'를 알아야 합니다. 주 안에서 내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비록 나는 연약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이지만, 세상을 이길 엄청난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주 안에서 부요의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안에서 부족함이 없으며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삶은,
첫째로, 어떠한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작고한 미국의 유명한 흑인 여가수 마리안 앤더슨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한 세기에 날까 말까할 정도로 유명한 성악가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안 앤더슨이 처음으로 독창회를 열었을 때입니다. 그녀의 독창회가 끝났을 때 온갖 신문들이 앞뒤를 다투어서 혹독한 평가를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노래이냐? 도대체 소프라노냐? 앨토냐? 베이스냐?" 이렇게 조롱했습니다. 마리안 앤더슨은 그 혹독한 평가를 읽고서 통곡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에게 두 번 다시 노래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딸을 달래었습니다. "얘야, 너는 어찌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인정을 받으려고 하느냐? 도대체 너를 나쁘게 평가한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된다고 그러느냐?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면서 너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느냐? 모든 사람들에게서 똑같이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교만한 생각이란다." 마리안 앤더슨은 어머니의 말에 다시금 용기를 얻어서 더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리함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일하다보면 우리를 이해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소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모략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려니 하면서 믿음으로 이기시기 바랍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으면 그 외양간이 더럽혀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깨끗합니다. 그러나 소가 있으면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무슨 비난을 받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르게 믿으려 하고 열심히 충성하다 보니까 비난도 생기고 또 오해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서 똑같이 칭찬 받으려고 생각한다면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사는 자들은 어떠한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사람들 앞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후 4세기 중엽 크리소스톰이라는 유명한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설교를 무척이나 잘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몰려왔습니다. 크리소스톰도 핍박자들의 손에 붙들렸습니다. 그런데 핍박자들은 크리소스톰을 붙들어 놓고 어떻게 처리해야 될 줄을 몰라서 매우 고심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두 번 다시 입을 열어서 설교하지 못하도록 매우 때려서 내보냅시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안됩니다. 기독교인들은 매를 맞으면 자기가 예수 때문에 핍박받는 것이라고 더 좋아합니다. 그러니 매로 때리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면 깊은 감옥 속에 종신토록 가두어 놓읍시다." 그랬더니 또 다른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안됩니다. 그러면 기도에만 전념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생겼다고 오히려 좋아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멀리 유배를 보내어 버리십시다." 그랬더니 또 다른 사람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다고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또 그곳에 가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으니 그는 더 좋아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저렇게 따지지 말고 굶겨 죽이든지 불태워 죽이든지 빨리 처단해 버리십시다." 그 의견마저도 사람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안됩니다. 그러면 그것이야말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예수 때문에 순교했다고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크리소스톰 한 사람을 처리하지 못해 엄청 고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일군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 어떠한 핍박과 시련도 하나님의 일군을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환난이 있습니까? 시련이 있습니까? 겁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련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사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맡겨주신 거룩한 사명에 끝까지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 답게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쳔의 모습입니다.
셋째로, 남들이 알지 못하는 감격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영국 대부호 캐리씨에게는 죠지와 윌리암이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두 아들 모두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수재였으며 장래가 크게 촉망되어 가문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예상한 대로 형 '죠지'는 돈도 많이 벌었고 국회의원까지 되어 부자로서 정치가로도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윌리엄은 출세할 수 있는 좋은 조건들을 모두 마다하고 난데없이 인도의 선교사로 지망하였습니다. 온 가족이 놀라서 강력하게 만류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친구들은 '굴러 들어온 행운과 명예를 저버린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비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대영 백과사전에 두 사람을 나란히 소개하고 있는데 '윌리엄 캐리'에 대해서는 무려 1페이지 반을 할애하여 그의 생애와 업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나 죠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윌리엄 케리의 형'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윌리엄 케리는 자신의 명예를 얻기 위해 선교사로 간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부와 명성이 예약되어 있는 길보다 그리스도인으로 가치 있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영적 감격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순간 부와 명성을 떨치며 사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만날 수 있지만 영원히 빛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은혜와 감격을 가진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그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샘솟듯 넘쳐 오르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바울을 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바울은 무명한 자 같았습니다. 죽는 자 같았습니다. 또 근심하는 자 같았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적인 평가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울은 참된 사람이었습니다.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기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감격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감격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고 헌신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의 일군이다"라는 자부심과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한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 감격 때문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의 얼굴이 천사처럼 환하게 빛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감격 때문에 삭개오는 자기의 재산을 다 처분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감격 때문에 마리아는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옥합을 아낌없이 예수님을 위해 깨뜨려 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이 감격이 우리의 감격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안에서만이 누릴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만이 맛볼 수 있는 놀라운 감격 때문에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들입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지 마시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다윗의 신앙고백을 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바울 의식을 가짐으로 언제나 승리하며 살아가는 멋진 신앙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일꾼
고후06장 04~10절 / 이규왕목사
신 불신을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사랑은 그 대상이 자기와 친하고 좋은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이지 만일 자기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과는 사랑이 아니라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마땅히 사랑해야 할 가족이나 친구만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물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마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물론 그러한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 각자가 다 잘 알고 있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와 같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꾼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일꾼은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실천하여야 하며,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지금이 어느 때인가?
아담의 자손인 우리는 너 나를 막론하고 본래 하나님과의 원수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적대적인 관계가 변하여 사랑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처럼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가 청산되고 화해가 이루어진 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날부터 새 역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치 일본군이 패망을 한 줄을 모르고 일본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깊은 정글 속에 숨어서 투항을 거부하던 어느 일본 병사의 이야기를 TV를 통해서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복음의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죽음을 행진을 계속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단의 권세는 이미 패배했고, 오랫동안 우리를 억누르던 죄는 깨끗이 사함을 받았으며,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생으로 변했음을 전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졌음을 믿는 사람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에게 반드시 부활의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하나님의 일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꾼 된 우리는 언제 그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까?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태어나고 있으며,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복음의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맞기 전에 복음을 전해 주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 독감 예방 주사를 맞았습니다. 만일 독감에 걸린 사람에게 독감 예방주사를 놓는 것은 병을 더 가중시키는 것입니다. 예방주사는 독감에 걸리기 전에 맞는 주사입니다. 복음이 바로 사망의 죽음의 예방 주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반드시 전해주어야만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를 찾고 있으며 복음을 전하는 그 사람이 바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 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실까요?
그것은 아무나가 아니라 반드시 복음을 듣고 믿어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만이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의 자격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자가 가난한 사람을 배부르게 할 수 없고, 무식한 자가 무식한 자를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전해준 복음을 듣고 믿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얻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람일 뿐 아니라 복음의 빚진 자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의롭고 선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선을 행한 적이 없는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그와 같은 은혜를 값없이 주셨을까요? 그것이 과거의 나와 같이 복음을 듣지 못해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가 받은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혼자 구원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사는 목적이나 교회를 다니는 목적이 오로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먹고, 잘살고자 하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사람입니다.
(고후 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에는 복음을 듣지 못한 아이가 태어나고 있으며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죽어가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를 내일로 미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고후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나님은 공평하게 이 지구상에 태어난 사람이 모두 다 한 번 이상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 기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그러한 사람이 있음을 깨닫고 구원을 얻은 우리가 화해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피스 메이커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마치 방파제 끝에 세워진 등대와도 같이 어두운 세상에 복음의 빛을 발해야만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에게 주어진 선교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 전도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중단하지 말고 계속되어져야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한국 경제가 어렵고 환율이 고공 행진을 할지라도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 맬지언정 세계 선교를 중단하지 말고 더욱 확대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앞서 우리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을 파송한 나라와 교회와 성도들이 오늘 우리들보다 더 어렵게 살면서 선교사를 보내 주었기 때문에 그 빚을 우리가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습니까? 조상 대대로 우상과 미신을 믿었으며 누군가 내게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으면 나도 여전히 그 대물림을 받았을 것인데 누군가 내게 화해와 구원의 복음을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 큰 구원을 얻게 된 것이 빚을 진 것이라면 이제 나도 살아있는 동안 그 빚을 하나님이 내게 붙여준 사람에게 반드시 복음을 전함으로 반드시 갚아야만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영적으로 무지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던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라면 점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또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구원의 복음을 전할 하나님의 일꾼을 찾고 계시며, 세우시며, 그 일꾼과 더불어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이제 나도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열심히 일을 해야 하겠다는 소명감이 마음에서 불처럼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의지가 하나님이 나를 일꾼으로 부르시는 증거입니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2. 하나님의 일꾼의 자세
사람이 자고 깨면 자기를 위해서,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 나름대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누구를 위해서 일을 하든지 나의 일, 남의 일, 큰 일 작은 일을 막론하고 어떤 일이든지 일에는 반드시 시간과 물질과 수고가 따라야만 합니다.
물론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하지만 설령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이윤을 많이 남기고, 명예를 얻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차라리 일하지 않은 것만도 못할 정도로 큰 손해를 보거나 아니면 칭찬은커녕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비난을 들을 수 도 있고, 많은 수고와 투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손해만 보고 빚만 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 일에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오해를 받고 손해를 받고 고난을 받을 때가 있을까요? 아니면 늘 만사형통과 성공만 있을까요?
오늘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일꾼이 된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 곧 파트너라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는 영적인 파트너라는 영광스러운 일꾼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는 영광스러운 일꾼이라지만 그 영광은 매우 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는 일꾼이 된 후에 많은 고난을 겪었을지라도 그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인 것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추천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환난과 궁핍과 많은 고난을 겪어야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고후 6: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이는 사도 바울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여러 가지 고난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인심을 가지고 모든 고난을 견디고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초지 일관하게 주님께 충성하였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매를 맞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종교 깡패들에게 난동을 당하기도 하고, 갖가지 수고를 겪는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고 마치 파도가 휩쓸고 간 모래 사장은 어지럽혔던 발자국들을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것처럼 바울 사도를 더욱 더 순결하게 만들었습니다.
(고후 6: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여기서 깨끗함은 도덕적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동기가 일관성있고 청렴한 상태로 사도 바울은 고난을 통해서 그의 생각과 행동이 더 순결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마음에서 비로소 거짓이 없는 진실된 사랑이 우러나오게 됩니다.
왜 동일한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데 바울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가 생명을 걸고 전하는 진리의 말씀이 힘이요, 그를 강하게 붙잡고 계시는 성령의 감화가 능력이요, 그의 의로운 삶이 강력한 무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후 6:6,7)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삶을 사는 사도 바울에게 영광만이 따랐을까요? 아름다운 이름이 붙여졌을까요? 유명해졌을까요? 부자가 되었을까요? 존귀해졌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때로는 욕을 먹고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붙고 억울한 소리를 듣고 그 때문에 슬퍼하고 근심하고 손해를 보고 가난해지고 패배자처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일을 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는 것이 저처럼 비참한 것일까? 의구심이 들 만큼 비참하게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견디고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었는가를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배우고, 본받고, 적용해야 할 대목인 것입니다.
그것은 체험한 자만이 알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 하나님께서 고난 받는 하나님의 일꾼인 당신의 동역자들에게 특별히 쏟아 부어주시는 남다른 은혜와 놀라운 위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후 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오늘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주의 일을 하다가 바울 사도처럼 원치 않는 고난이 따를지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바울이 경험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야만 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에 대한 좋은 믿음만 아니라 내가 만나야 하는 사람과 좋은 인간관계가 너무나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가서 좋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좋은 성품과, 좋은 인격을 가지고 마음을 굳게 닫은 상대방의 마음을 열 수 있는 힘이 무엇보다 절실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꾼이 무엇보다 먼저 지녀야 할 넓은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고후 6: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여기서 ‘넓힌다’는 말은 마음을 열라 또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관대하고 넓은 사랑으로 대하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그 모델을 찾는다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대신 긍휼히 여기시고, 무지한 자를 비난하는 대신 이해심을 가지고 가르치시고, 죄인들을 정죄하는 대신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신 것은 태평양보다 더 넓은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하는 일은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시간과 재료와 도구가 필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맡아 일을 해야 할 일꾼 곧 사람입니다.
물론 현대 사회는 자동화가 갈수록 첨단화 되어가기 때문에 옛날에 비해 적은 인력과 단시간으로도 생산성이 높이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동화시대라고 할지라도 그 기계를 운영하는 주체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소중한 것은 자본이나 기계가 아니라 역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누구의 도움이나, 재료나, 도구가 없이 오로지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독 사역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일도 하나님이 얼마든지 단독으로 하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꾼들과 더불어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힘이 드시기 때문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는 무슨 일을 하는가에 따라 좌우되는 것처럼 누가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많이 받을 사람인가를 평가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일을 고난 중에서도 어려운 중에서도 얼마나 충성스럽게 감당하였는가의 여부에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로 인해 원치 않는 고난이 파도처럼 밀려들지라도 묵묵히 참고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위로와 축복으로 말미암아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또한 부르심을 받은 일꾼이라면, 자녀라는 특권의식만 갖지 말고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는 일꾼으로 책임감을 느끼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택함을 받고 세움을 받은 것이 축복이며, 하나님의 일에 충성할 수 있는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건강과 능력을 주신 것이 기회이며,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할지라도 마치 하나님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것처럼 생색을 내거나 교만하거나 인색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과 내게 붙여주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해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성도들에게는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는 날에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시들지 않는 영광스러운 상급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모든 것을 가진 자
고후 6:4-10 / 이대성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모든 것을 가진 자” 여러분? 미국의 어느 돈 많은 갑부가 신문에 이런 광고를 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삶에 대해서 진정으로 만족한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나에게 입증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나의 돈 일백만 달러를 현찰로 드리겠습니다."
정해진 날짜와 장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자기는 정말로 만족한 삶을 살고 있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직업이 너무 좋아서 행복하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족들이 너무 잘해주기 때문에 만족한 삶을 누린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부자의 돈 일백만불을 받아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자가 묻는 단 한 가지 질문에 아무도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은 이러했습니다.
"아니, 당신이 정말로 당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을 한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 돈 일백만불이 필요합니까?" 여러분, 만족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찰 만(滿)자 입니다. 꽉 찼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예컨대 컵에 물이 꽉 차면 만족입니다. 그러나 물을 조금 마시면 빈 공간이 생기겠지요? 그러면 아니 불(不)자를 써서 불만(不滿)입니다. 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돈 일백만불이 필요하다면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진정으로 만족한 삶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진정으로 만족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십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대인의 명언을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누구에게든지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여러분? 삶의 만족과 행복은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많이 가졌는지 적게 가졌는지 거기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비록 내가 적게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는 사람은 마음에 감격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진정한 삶의 만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해서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참으로 곤고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 시련이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 4∼5절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변함없이 신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6∼7절 말씀입니다. 바울의 마음속에는 큰 감격이 있었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제일 마지막 절에 보면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삶에 대해서 100% 만족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늘 주님이 주시는 행복 속에서 살았습니다. 8∼10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바울의 감격이 우리의 감격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수많은 시련 속에서 살았습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수많은 시련 속에서 살았습니다.” 다같이 4∼5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이런저런 많은 시련과 환난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여러분, 왜 바울이 이런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까?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그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딤후 3: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서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를 핍박합니까? 사람의 부패한 심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악하면 다른 사람도 악하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잘못되면 다른 사람도 같은 잘못을 범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악은 언제나 선을 질투하고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예배 시간에 조금 늦게 나오신 분들이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만, 그 분들의 심리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배 시간에 다른 분들은 다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늦게 들어왔습니다.
마음속에 죄송한 생각이 들것입니다. "내가 다음부터는 조금 일찍 와야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옆에 자기보다 늦게 오는 사람이 있으면 왠지 모르게 반갑고 안심이 됩니다.
그러다가 잘 아는 집사님이 늦게 들어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죄송한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래도 내 지각은 괜찮구나!"라는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내가 게으르면 다른 사람도 게으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악하면 다른 사람도 악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적게 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헌금을 적게 내기를 바라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부패한 심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언제나 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질투하고 핍박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핍박을 받는다고 해서 너무 낙심하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핍박을 받는 자는 오히려 기뻐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늘에서의 상이 크다고 했습니다.
잠14: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여러분, 외양간에 소가 없으면 그 외양간이 더럽혀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깨끗합니다.
그러나 소가 있으면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무슨 비난을 받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르게 살려고 하고 열심히 충성하다 보니까 이런저런 비난도 생기고 또 오해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서 똑같이 칭찬 받으려고 생각한다면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일을 하지 말아야지요.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십 여 년 전에 작고한 미국의 유명한 흑인 여가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 세기에 한 사람 날까 말까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안 앤더슨이 처음으로 독창회를 열었을 때입니다. 그의 독창회가 끝났을 때 온갖 신문들이 앞뒤를 다투어서 혹독한 평가를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노래냐? 도대체 소프라노냐? 메조 스프라노냐? 앨토냐?"
이렇게 조롱했습니다. 마리안 앤더슨은 그 혹독한 평가를 읽고서 통곡했습니다. 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두 번 다시 노래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딸을 달래었습니다. "얘야, 너는 어찌 모든 사람들에게서 똑같이 인정을 받으려고 하느냐? 도대체 너를 나쁘게 평가한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된다고 그러느냐?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면서 너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느냐? 모든 사람들에게서 똑같이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교만한 생각이란다!" 마리안 앤더슨은 어머니의 말에 다시금 용기를 얻어서 더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일하다보면 우리를 이해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소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내가 100% 완전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 주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교만한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를 모략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시련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 보다 더하셨는데.... 주님에 비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던 예수님 그 분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환난 중에도 오히려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6∼7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그는 시련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꿋꿋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늘 변함없이 신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히11:38절에 말씀한 그대로 바울이야말로 세상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떤 핍박과 환난도 바울을 결단코 넘어뜨리지 못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다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후 4세기 중엽 안디옥에 크리소스톰이라는 유명한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설교를 무척이나 잘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 당시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몰려왔습니다. 크리소스톰도 핍박자들의 손에 붙들렸습니다.
그런데 핍박자들은 크리소스톰을 붙들어 놓고 어떻게 처리해야 될 줄을 몰라서 매우 고심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두 번 다시 입을 열어서 설교하지 못하도록 매우 때려서 내보냅시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안됩니다. 기독교인들은 매를 맞으면 자기가 예수 때문에 핍박받는 것이라고 더 좋아합니다. 그러니 매로 때리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면 깊은 감옥 속에 종신토록 가두어 놓읍시다." 그랬더니 또 다른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안됩니다. 그러면 기도에만 전념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생겼다고 오히려 좋아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멀리 유배를 보내어 버리십시다." 그랬더니 또 다른 사람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다고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또 그곳에 가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으니 그는 더 좋아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저렇게 따지지 말고 굶겨 죽이든지 불태워 죽이든지 빨리 처단해 버리십시다." 그 의견마저도 사람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안됩니다. 그러면 그것이야말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예수 때문에 순교했다고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그래서 크리소스톰 한 사람을 처리하지 못해 엄청 고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군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입니다. 그 어떠한 핍박과 시련도 하나님의 일군을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환난이 있습니까? 시련이 있습니까? 겁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련은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인내하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시다가 감옥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에게도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80세가 넘은 노모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가족들을 홀로 남겨놓고서 자기 혼자 죽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심경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고난의 명상"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 앞에서 주님이 가시 못 자욱과 가시관을 보이시면 나는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할까? 주님을 위하여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주는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주를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주는 유일의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하시면 나는 무엇이라고 답할까?“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 특별히 80세가 넘은 노모님을 주님의 손에 의탁했습니다. "하나님, 불효한 이 자식은 어머님을 봉양치 못하옵니다. 내 어머님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불효한 자식의 봉양보다 자비하신 주님의 보호하심이 나을 줄 믿고서, 내 어머님을 주님께 부탁하옵고, 이 몸은 주님의 자취 따라 가겠나이다. 주여, 나를 받아 주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교자의 이 신앙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일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핍박이 있습니다. 환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시련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다시금 일어설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주님주신 힘과 능력으로 끝까지 주의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놀라운 감격을 맛보며 살았습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놀라운 감격을 맛보며 살았습니다.” 바울은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샘솟듯 넘쳐 오르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다같이 8∼10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아멘. 여러분? 물론 사람들 가운데는 바울을 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이렇게 저렇게 많은 수모를 겪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속이는 자 같았습니다.
무명한 자 같았습니다. 죽은 자 같았습니다. 또 근심하는 자 같았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 같은 인간적인 평가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영화롭게 하셨고, 그의 이름을 아름답게 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울은 참된 사람이었습니다.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산 사람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기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이와 같은 기쁨, 즐거움, 남이 알지 못하는 감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감격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아낌없이 희생하고 헌신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기 바로 직전의 이야기입니다. 함경북도 청진시 바로 밑에 나남이라는 조그만 도시가 있습니다. 그곳에 여자 거지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젊은 여자였습니다. 몸도 건강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남루한 옷을 입고서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며 빌어먹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자를 보면서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아니, 젊은것이 무엇이 할 일이 없다고 빌어먹고 다니나?" 그래도 그 여자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늘 모든 사람들에게 싱글벙글 웃으면서 대했습니다. 사람들이 미친 여자 취급하며 상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우리나라가 8ㆍ15 해방을 맞이해서 소련군이 나남시에 진출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뜻밖에도 미친 여자라고 생각했던 그 거지 여인이 소련군 복장을 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도 중위 계급장을 하고 장교로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의 실상은 미친 여자가 아니라 소련군 첩자였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여인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태연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소련군 장교로서 내게 귀한 사명이 있다!" 그녀에게 이와 같은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너희가 아무리 나를 멸시해도 그럴 자격이 없어!" 라는 남모르는 즐거움, 기쁨, 사명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나를 천시 여기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장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사들입니다.
그러므로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에 "나는 하나님의 대사로서 하나님의 사명자다!"라는 깨달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과 감격 속에 넉넉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눈이고, 또 하나는 마음의 눈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육신의 눈은 밝았습니다. 세상적인 것은 환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어두웠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얼마나 핍박했습니까? 그러다가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아주 강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 때부터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나니아 라는 사람이 바울에게 안수 기도를 해주어서 비로소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습니다. 그는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눈 뿐 만 아니라, 영안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가 육신의 눈으로 볼 때 잘 보이고 자랑했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분토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그는 영안의 눈으로 현실 저편에 있는 영원의 세계를 밝히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도 영안의 눈이 뜨여 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비록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영안의 눈을 열어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격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에게 이와 같은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꺼이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감격 때문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의 얼굴이 천사처럼 환하게 빛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감격 때문에 삭개오는 자기의 재산을 다 처분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감격 때문에 베다니 마리아는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옥합을 아낌없이 예수님을 위해 깨뜨려 버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여러분? 이 감격이 저와 여러분의 모두의 진실된 감격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가진 자답게 우리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격을 날마다의 삶 속에서 충만하게 누리고 전하는 자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의 도리
고후06장 03~10절 / 지용수목사
기차는 기차의 길, 레일이 있습니다. 기차는 그 길로 달려가야 됩니다. 기찻길로만 가면 기차는 잘 갈 수 있습니다.
비행기는 비행기의 길, 항로가 있습니다. 아무리 비바람이 쳐도 비행기는 항로를 따라가야 됩니다. 오래 전에 소련 전투기가 우리 KAL기 한 대를 격추시켰습니다. 그것은 소련의 악이지만, 우리에게도 항로를 벗어난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배도 배의 길이 있습니다. 바다가 아무리 넓어도 마음대로 가면 안 됩니다. 출렁이는 바다에도 해로가 있습니다. 해로로 가야 배가 충돌하지도 않고 암초에 부딪치지도 않습니다.
사람도 사람의 길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도리를 해야 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리를, 어머니는 어머니의 도리를 해야 됩니다. 남편은 남편의 길을 가야 됩니다.
한 미국인 아버지의 아픈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딸이 신부전증으로 인해 신장 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죽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의 몸을 체크하니 아버지의 신장이 딸에게 가장 잘 맞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신장 하나를 딸에게 떼어 주었습니다. 수술을 받고 딸이 잘 살았는데 몇 년 후 또 신장에 문제가 생겨 다시 이식 수술을 받아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아버지는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도리가 무언가? 딸의 행복이 중한가? 나의 행복이 중한가?’
그러다 이 아버지는 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버지의 도리라 생각하고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나머지 신장을 딸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신장을 떼어 내면 당신이 죽습니다. 당신 딸을 살리기 위해 당신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는 의사 윤리위원회를 찾아가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은 인간의 윤리를 초월합니다. 윤리는 사람이 만들었지만 딸에 대한 저의 사랑은 윤리를 초월하는 것이니 수술을 허락해 주세요. 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버지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투석하며, 사는 데까지 살다가 죽겠습니다.”
결국 의사회에서 그 수술을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딸은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 아버지는 투석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도리를 감당하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건강한 것에 감사하고 또 자녀들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장육부의 세포 하나까지 다 건강하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형제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미국에 있는 동생과 여동생들을 위해서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기도합니다. 동생들이 건강해야 저도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결국 자기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도리를 다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형제간의 도리를 다하려면 형제들을 잘 도와주어야 되는데, 목사로서의 도리를 지키다 보면 그것이 어렵습니다. 그래도 교회를 위해 먼저 목사의 도리를 지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먼저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또 자식은 자식의 도리를 지켜 나가야 합니다. 저는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싶어 하루에도 네댓 번씩 어머니께 전화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어머니라고 부르지만 다른 사람이 없을 때는 엄마라고 부릅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그렇게 부르는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엄마, 엄마”하고 부르면 어머니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자식의 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의 도리를 다 해야 됩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해야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국민의 도리, 직장인의 도리도 다해야 됩니다. 내가 회사 부장이면 부장의 도리, 사장이면 사장의 도리, 사원이면 사원의 도리를 다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도리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도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 길을 잘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의 종의 도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바울, 디모데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들의 사역과 직책에 훼방을 받지 않도록 애쓰는 모습을 여기에 담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종의 도리이기도 합니다.
좁은 의미로 볼 때 하나님의 종은 목사님, 전도사님 같은 목회자들이지만, 넓은 의미로 보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성도의 길을 잘 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이 “우리가 우리의 직책이 훼방 받지 않도록 늘 마음을 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도인 것을 남들이 압니다. 나도 알고 천사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의 도리를 언제나 잘 감당해야 됩니다.
저는 언제나 제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등에는 양곡교회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하며 걷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 보면,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명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이 있고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잘못 살면 하나님께서 욕을 먹게 됩니다. 내 등에 양곡교회의 이름이 있으니 내가 잘못 살면 양곡교회가 욕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역이 훼방 받지 않도록 우리가, 내가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 장로님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양곡교회가 욕을 먹습니다. 양곡교회 찬양대원이 잘못하면, 지휘자가 잘못하면 양곡교회가 욕을 먹고 하나님께서 욕을 먹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되지만, 특별히 하나님 자녀의 도리, 성도의 도리를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먼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무 일에든지, 무엇에든지, 아무 사람에게든지, 모든 길에서 거리낌이 없게 하라고 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거리낌이 없게 하라.”
이 말을 현대어로 번역하면 ‘예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조심해서 예의를 지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성도의 직책이, 교회의 이름이 훼방 받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예의를 잘 지키고 품위를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조심했습니다. 디모데도 언제나 조심했습니다. 교회의 한 사람 한 사람에게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에게도 조심하고 모든 사람에게 조심해서 하나님의 종의 직책이 훼방 받지 않도록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천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추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천해야 됩니다. ‘나는 양곡교회의 장로(권사, 집사, 교인)이다.' 하고 자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맞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저의 어머니께서는 가게에 가셔서 에누리를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예수쟁이는 깍쟁이다.” 라고 욕을 할까 봐, 예수님 욕을 할까 봐 에누리하지 않고 달라는 대로 다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머니께서 권사님의 직책, 교회의 직분이 훼방 받지 않게 하시기 위해 조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사람을 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믿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를 봅니다. 우리가 잘 살고 바로 살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좋구나.’ 하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동네 회관에 자주 커피를 끓여 가지고 가십니다. 요리도 해 가지고 가십니다. 과일도 사 가십니다. 계속해서 동네 어른들을 대접하십니다. 그러니 성탄절이나 부활절,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에는 어머니께 대접을 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갚는다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교회에 오셔서 부조를 하신답니다. 헌금을 모르니 헌금은 하지 않고 부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식사를 하고 가신답니다. 저희 동네 사람들이 다 저의 어머니를 부를 때 ‘권사님’이라고 합니다. 다른 어른들을 부를 때는 ‘모친’이라고 하는데 저의 어머니를 부를 때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권사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권사의 직분을 자천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권사인데…….’ 하며 사니 그렇게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예의를 지켜야 됩니다.
저는 집회하러 나가면 호텔에 묵을 때나 어디에서나 늘 조심합니다. 청소부 아주머니에게도 조심합니다. 제게 예수님의 이름이 있으니 제가 잘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부산 동래중앙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의 일입니다. 아침 식사를 호텔에서 간단히 했는데, 호텔 종업원 아가씨가 전망이 제일 좋은 자리로 안내해 주고 얼마나 친절히 잘 대해주는지 참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팁을 좀 많이 놓고 나왔더니 따라오면서 “목사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니, 내가 목사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지용수 목사님을 왜 모르겠습니까? 제가 가장 존경하는 목사님이신데요. 그래서 제가 기쁨으로 목사님을 섬기고 있는데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제 제가 식당에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겠습니다. 나는 상대방을 모르는데 상대방은 나를 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조심스러워집니까?
전남 어느 지역의 교사 연합회에 강의를 하러 갈 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톨게이트에서 요금을 지불하는데 요금을 받는 분이 “아이고, 지용수 목사님!”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사람들이 압니다. 여러분이 양곡교회 교인이고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사람들이 다 아는데 여러분이 잘못 살면 그들이 ‘교인이 왜 저러지?’라고 합니다.
매사에 예의를 지키고 귀하게 조심해서 살아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교회가 빛이 나고 그들도 구원을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모든 사람에게 거리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크게 인내를 해야 됩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으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환난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또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사업을 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해서 가난하게 사는 일이 많았습니다. 주의 종들은 그 어려움이 더했습니다. 그러니 바울과 디모데의 어려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이 그것을 잘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직책이 훼방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 당하지 않도록 잘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잘 하다가도 어떤 일이 생겼을 때 화를 내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화낼 일에도 인내하고, 아파도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다보면 힘들 때가 있는데, 그 때에도 잘 인내해야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어려울 때가 많았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교인들에게 일일이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냥 끙끙 앓으면서 참고 나갑니다.
바울도 참았고 디모데도 참았고 베드로도 참았습니다. 그들이 감옥에도 가고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무슨 죄를 지어서가 아닙니다. 의로운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도 갇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길입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서 18절에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할렐루야!
우리도 환난과 핍박과 여러 가지 고난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두 상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고 인내해야 됩니다. 상을 생각하지 않아도 인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다가 가정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남편이나 시어른들에게 욕을 먹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내하며 잘 견뎌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제가 전국교사연합회 말씀을 전하고 내려오는데 한 분이 “목사님!” 하고 저를 반갑게 불렀습니다. 보니 제가 교회학교 교사를 할 때 제게 배웠던 아이였는데 권사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중 고등학생 시절 교회에 다니는 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공무원이신 아버지가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주일이면 그를 기둥에 묶어 놓았습니다. 아버지가 나가시고 나면 그가 “동네 사람들, 나 좀 풀어 주세요.”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풀어 주면 교회에 오곤 했습니다. 그 어려움과 핍박을 다 이기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집안을 구원하고 장로님의 부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어려움을 당해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제가 심방을 다닐 때의 일입니다. 창곡동에서 심방을 하고 나오니 한 새댁이 저를 보고 “목사님!” 하며 엉엉 울었습니다.
“왜 그러세요?”
“저는 교인이에요. 처녀 때 성가대에서 찬양도 했고 교사도 했는데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서 교회에 다니지 못하고 있어요. 시어머니가 너무 무서워 3년째 교회에 다니지 못하고 있어요. 저는 어떻게 해요?”
“자매님, 힘내시고 교회에 나오세요.”
“시어머니가 무서워서…….”
그 새댁이 울며 갔습니다.
여러분, 시어머니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됩니다. 시어머니가 핍박할수록 오히려 더 담대하게 교회에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시어머니가 꺾여서 예수님을 믿게 될 줄로 믿습니다. 누가 반대한다고 교회에 나오지 않고 누가 반대한다고 믿음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핍박을 받아도 목숨을 걸고 믿음 생활을 잘 해야 됩니다.
로마의 카타콤, 그 지하에 사람들이 들어가 숨어서 산 것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였습니다.
터키의 갑바도기아에 가보면, 바위 도시가 서른 개나 있는데 한 도시에 삼, 사만 명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핍박을 피해 바위에 굴을 파 놓고 거기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양가죽을 덮어쓰고 다니면서 먹이를 구하다가 군대가 쳐들어오면 거기에 들어가 숨었습니다. 그들만 그 바위굴을 알았지 군인들은 거기에 굴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혹 그 바위굴에 들어간 군인이 있어도 살아나오지 못했습니다.
또 프랑스의 성지에 가보면, 성도들이 얼마나 핍박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톱에 썰려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갖고 다니다 잡히면 죽임을 당하니 피난 갈 때는 성경을 아주 작은 글씨로 써서 부인들의 긴 머리 장식 안에 숨겨 가지고 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경을 읽고 믿음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핍박을 이긴 것은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사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 있는 우리가 게으르면 하나님께서 핍박을 주실지도 모릅니다. 주일 밤에 예배 드리지 않는 것을 정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참 슬픈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삽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이 예배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8장, 9장을 죽 보십시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예배할 것이니라(Let my people go, so that they may worship me).”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신 목적 중의 하나가 예배를 받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그 외 다른 목적이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배를 잘 드리려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충성해야 됩니다.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나라를 사랑해야 됩니다. 그러나 나라가 예수님을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하면 목숨 걸고 도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의 나라보다 더 큰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니 핍박을 이겨 나가야 됩니다.
그 다음에 깨끗함과 순결함이 있어야 됩니다.
사랑을 해도 거짓 없는 사랑을 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됩니다. 어떤 욕심 때문에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 바울을 보면, 바울은 교인들을 만나면 남자든 여자든 아가씨든 어머니 같은 여자든 다 안아 줍니다.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끓어올랐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깨끗하고 순수한 사랑입니다. 사랑을 해도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을 해야 됩니다.
물질에 깨끗하고 이성 관계에 깨끗하고 명예에 깨끗하면 그 사람은 깨끗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나 성도는 깨끗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빛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서울 명지고등학교의 한 교장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깨달은 후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기도하는데 어릴 때 남의 밭에 가서 참외를 따먹은 것이 생각나고 자꾸 마음에 걸리더랍니다. 그래서 그때 따먹은 참외 가격을 계산해서 이자를 붙여 ‘……대단히 죄송합니다. 제가 어릴 때 참외를 도둑질해서 따먹었습니다. 참외 값을 드리니 받으십시오.’라는 편지와 함께 참외밭 주인에게 보냈답니다.
며칠 후, 참외밭 주인이 교장선생님을 찾아왔더랍니다.
“세상 살다가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은 처음입니다. 어릴 때 장난삼아 따먹은 참외 값을 주는 사람이 다 있다니요?”하며 돈을 돌려주더랍니다.
교장선생님이 “아닙니다. 제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그것을 받아 주세요.”하며 그 돈을 받지 않았답니다.
참외밭 주인은 그날 자기 집에 가서 식구들을 불러놓고 말했답니다.
“우리 모두 예수를 믿자. 예수라는 분은 참으로 대단한 분이다.”
그래서 그 가족이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깨끗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한 유명한 백화점이 고객의 백화점 이용 현황을 조사하던 중 고객들 중 몇 천 명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백화점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왜 우리 고객이었던 사람들이 우리 백화점을 이용하지 않을까?’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백화점을 이용하지 않는 고객 중에서 1%는 죽었습니다. 3%는 이사를 갔습니다. 5%는 다른 사람들의 권고로 다른 백화점의 고객이 되었습니다. 9%는 물건값이 비싸다고 옮겼습니다. 14%는 그 백화점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옮겼습니다. 68%는 점원들이 친절하지 않아서 옮겼습니다.
그래서 백화점이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68%의 사람들에게 점원들이 상처를 준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결단하고 예수님을 믿기로 하고 교회에 왔는데, 우리가 바로 하지 못하여 우리 때문에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영원히 천국을 떠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깨끗함과 순결함을 잘 유지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령을 좇아 살면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옥스퍼드 출신의 지성인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아들이고 자신도 목사가 되었는데도 죄를 자꾸 짓게 되어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밤, 월드 스트릿의 작은 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목사님이 계시지 않아 설교를 못하니 한 평신도가 나와서 마틴 루터의 주석을 읽었습니다. 그것을 듣는데 갑자기 가슴이 불같이 뜨거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능력을 받아 죄를 이기고 경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전 세계가 나의 교구다.”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세계적인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노력하다가도 상황이 아주 나빠지면 주저앉아 버립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언제나 상황을 이기며 승리하게 하십니다.
또 말씀을 좇아 살면 깨끗하고 순결하게 살 수 있습니다.
시편 119편 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은 이것을 하고 싶어도 말씀이 저렇게 하라고 하면 저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으로는 저것을 취하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취하지 말라고 하면 취하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선악과를 먹고 싶은데,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니 먹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먹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살고 말씀을 좇아 살면 여러분도 저도 거룩하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완벽히 거룩하게는 되지 않아도 주님을 닮는 정도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보여줄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서 주님의 향기가 나타나야 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첫 목회지에서 목회할 때는 교인들에게 설문지를 주어서 조사를 했습니다. ‘언제부터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성경은 하루에 몇 장 읽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기쁩니까? 그저 그렇습니까? 피곤합니까?’ 등등 여러 가지 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목회자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쓰세요.’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장로님이 되신 강석규 집사님이 그때 이렇게 적어 내셨습니다.
‘전도사님, 우리는 목회자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그것을 읽는 순간 제 피가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주님의 모습을 어떻게 보여 주나?’
그 때부터 제 목회가 달라졌습니다.
‘주님, 제 얼굴에 주님의 얼굴이 어른거리게 해 주세요. 저랑 전화하는 사람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저보다 주님을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길가다 저를 스치는 사람이 저보다 주님을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 기도가 응답이 되나 봅니다.
하루는 제가 목욕탕에 갔더니 어떤 아저씨가 “좀 봅시다.”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세요?”
“이야기 좀 합시다. 이리로 좀 오세요.”
제가 머뭇거리고 있으니, 그 아저씨가 “목사님 맞지요?”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많은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를 아세요?”하고 제가 물으니 “이마에 목사님이라고 써 있네요. 저도 목사예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생활을 잘 가꾸어서 우리에게서 주님의 얼굴이 나타나고 주님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간단합니다. 우리가 주님 말씀대로 살면 그렇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말씀하십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Whoever has my commands and obeys them,) 나를 사랑하는 자니(he is the one who loves me.)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He who loves me will be loved by my Father, and I too will love him and show myself to him.)』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얼굴에 주님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본문에, 의의 병기를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전투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사람을 섬기지만 보이지 않는 악한 마귀, 악한 영과 싸우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언제나 왼손에는 방패, 오른손에는 공격용 칼이나 창을 갖고 있었습니다. 악한 마귀와 싸우는 우리는 이처럼 언제나 의의 병기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를 막고 마귀를 공격하는 무기를 갖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 전쟁은 계속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우리 손에서 검을 놓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네 손에 든 검을 놓지 말아라」
항상 깨어서 전쟁하는 마음으로 살아 마귀를 꺾으며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를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끝까지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 됩니다.
독일의 뮌헨에 외롭게 사는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가 닭 한 마리를 길렀는데, 그 닭이 새벽 5시만 되면 “꼬끼오! 꼬끼오!”하고 울었습니다. 이웃에 사는 사람이 새벽마다 잠을 자지 못하니 고발을 했습니다. 법원에서 판사가 “닭아, 앞으로 오전 8시부터 9시까지만 울어라.”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판결을 받고도 닭은 계속해서 5시에 울었습니다. 닭 울음소리를 견디지 못한 이웃 사람이 다시 고발했습니다. 판사가 다시 판결을 내렸습니다.
“닭이 판결을 받지 못하니 닭장 바로 앞에 이 판결문을 세우라. ‘아침 8시부터 9시까지만 울어라.’”
그런데도 닭은 여전히 5시만 되면 울었습니다. 이웃 사람이 또 고발했습니다. 판사가 또 판결을 내렸습니다.
“닭이 글을 몰라서 계속해서 우니 닭에게 글을 가르쳐라.”
그러나 닭에게 글을 가르친들 닭이 울음을 그치겠습니까? 계속해서 5시가 되면 울 것입니다. 닭은 누가 뭐라 해도 5시에 우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서는 죽을 때까지 ‘예수’가 나와야 됩니다. 우리를 건드리면 ‘예수’가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스치면 ‘예수’가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성도의 도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이 하나님 말씀을 쏟아내고 예수님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복음 전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 대신 우리를 대사로 파송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라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것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복음,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 됩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로마서 10:14)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겠습니까? 전하는 자가 없는데 어찌 듣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면 그 사람이 듣고 구원받고, 내가 입을 닫으면 그가 죽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살고 죽는 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이 도리를 잘 감당해서 우리도 살고 세상도 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영혼을 구원하려는 마음이 불타서 어떻게 하든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분이 많은 목회자에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영혼을 구원하시는 그 헌신이 어떠한 것인지 아십니까? 캠프 파이어를 하는데 성냥개비는 하나뿐입니다. 그 하나로 조심스럽게 불을 켜서 꺼뜨리지 않고 큰 불이 되게 하려고 애쓰는, 정성을 다 기울이는 것과 같습니다.”
성냥개비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 불이 꺼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거기에 불을 붙이고 꺼뜨리지 않기 위해 정성을 다 쏟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 한 영혼에게 구원의 불을 붙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성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의 전도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위해 살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늘 임마누엘로 함께 하셔서 우리를 복되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하고 아내는 남편을 위하고, 자녀는 부모를 위하고 부모는 자녀를 위해 살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고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사는, 아름다운 삶이 꽃피고 열매 맺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행복
고후06장 03~10절 / 인명진목사
현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관심은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얼마 전까지 많은 사 람들의 관심은 출세였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출세를 해서 가문을 빛내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꿈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출세의 지름길인 각종 고시에 매달렸습니다. 신림동에 가면 고시촌이 있어서 고시 를 준비하는 젊은이들이 몇 년씩 고시촌에 틀어박혀서 각종 고시를 준비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이 오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이와 같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아직도 출세지향적인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 지만 자기 적성과 특기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고 거기에서 행복을 찾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 풍조는 무작정 출세가 제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면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 급격히 생각이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 우리들의 최대관심사로 떠올랐습니 다. 저는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며칠 전에 어느 신문사에서 기자가 나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기자가 “목사님께서는 과거 사 회정의 민주주의 인권을 위해서 목회를 해오셨는데 지금의 목회의 최대관심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 니다. 제가 서슴없이 제 목회의 최대의 관심과 기도의 제목은 어떻게 하면 우리 교인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기록한 책이 성경입니다. 실제로 인생을 행복하게 살 았던 사람들의 삶이 기록된 책이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사도바울의 인생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세상적인 평가로 생각할 때 바울은 행복한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고 최후에는 목이 베어져 죽임을 당했던 세상적으로 보면 불행한 인생을 살았 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본인 자신이 행복하게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4 장 7-8절을 보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 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 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후회없는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 다. 주위에 있는 사람 중 아무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본인 스스로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 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참으로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몰라 서 그렇지 참으로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행 복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보통 세상에는 세 가지의 행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소유지향적인 행복입니다. 무엇인가를 가짐으로 오는 행복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가질 때 즐거 움과 행복을 느낍니다. 돈을 벌었을 때 원하던 것을 가졌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우리가 기억하듯이 한 달 내내 일한 월급 봉투에 받았을 때 행복을 느꼈는데 지금은 온라인으로 월급을 받게 되니 그때의 행복 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저도 때때로 강사료를 받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총회에 참석하고 나면 차비로 25000원을 받는데 이것을 받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자동차를 처음 가졌을 때, 처음 장만한 집에 누웠을 때의 행복을 기억하십니까? 소유를 통해서 무엇 인가 가졌을 때 우리가 얻는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이 바로 이런 소유지향적 인 행복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이런 행복은 없었습니다. 만일 행복이 무엇인가를 소유해서 얻 는 것이라면 사도 바울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 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복이 소유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사도 바울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 다.
두 번째 행복은 체험지향적 행복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함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행복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등산을 하면서, 노래하며 그림을 그리며 운동을 하면서 느끼는 행복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음식 을 먹으며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몸을 움직이면서 무엇을 함으로 느끼는 행복이 체험지향적 행복입니 다. 무엇을 가짐으로 말미암은 소유지향적 행복보다는 한 차원 높은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는 이러한 행복도 없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사도 바울이 이런 행복을 누렸다는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세 번째 행복은 가장 차원높은 가장 본질 적인 값진 행복으로 의미지향적인 행복입니다. 첫 번째 두 번 째 행복은 한계가 있는 행복입니다. 일시적인 행복입니다. 물건을 소유하고 취미생활로 얻는 행복은 한 계가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 가면서 처음 버스를 타보았습니다. 제가 그 버스를 탔 을 때 느꼈던 그 행복을 지금 까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지 한참 지나면 시들해집니다. 체험을 통한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깨달을 때 느끼는 행복이 진정한 행복입니 다. 우리가 하는 일에 의미를 깨달을 때 느끼는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고 이것이 가장 값진 행복이고 진짜 이고 일급행복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비록 세상적 평가로 볼 때 실패요 불행한 일이라도 그 삶속에 들 어있는 의미를 깨닫게 될 때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행복하게 했던 행복이 바로 이러한 행복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듯 바울은 고난의 삶을 살았습 니다. 핍박받고 매맞고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감옥에도 오래 살았던 사람입니다. 세상적으로 말 하면 한숨을 쉬고 원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행복을 느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에 4장 4절을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바 울이 그런 힘든 상황 속에서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바울은 자신의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깊이 깨달 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좋고 즐거운 것이라도 의미가 없으면 겉핥기의 기쁨이요 행복이요 아무리 힘들 고 어려운 고난의 상황속에서도 그 의미를 깨달으면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겉도는 행복이요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 달으면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제 인생 중에 가장 행복했던 때는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했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지하 셋방에서 살았으 며 세끼 밥도 못 먹었고 양복한 번 제대로 입지 못했지만 그때 행복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불행한 삶이었 지만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감옥 에도 갔지만 내가 고생함으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을 때도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라고 그 의미를 깨달으니 그것이 고통이 아니 라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의미가 있을 때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져서가 아니 라 어떤 일을 해서가 아니라 어떤 일이든지 거기서 의미를 찾을 때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시련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의미를 찾지 못하면 그것이 우리의 시련 이고 고통이지만 그것이 주는 하나님의 뜻과 의미를 찾을 때 세상적으로는 고통이지만 행복이 될 수 있 습니다. 병들어 아플 때 건강을 빼앗겨 실의에 빠졌을 때 세상적으로는 고통이지만 그것이 주는 의미를 찾을 때 오히려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은 의미와 즐거움의 교차로에 있습니다. 의미가 있어야 기쁨이 있고 거기에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 다. 바울이 많은 시련과 핍박과 고통속에서도 의미를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 고 행복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었지만 그리스 도를 위해서 다 버렸습니다. 무명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란 것을 깨닫고 바울은 기쁘 고 행복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울을 기 쁘고 행복하게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높은 차원의 행복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무엇을 소유해서 얻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한계가 있는 행복입니다. 있다가 없어질 행복입 니다. 체험지향 적인 행복도 잠시 기쁨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거기에서 느끼는 행복입 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바울과 같은 행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소유에서 얻는 행복을 바라는 유치한 마음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체험을 통해서 행복을 얻으려는 어리석은 마음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그런 행복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과거의 무 의미한 행복을 다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누렸던 행복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행복이 었습니다. 행복한 인생을 얻기 위해 무의미한 삶을 버린 것입니다. 행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 로 만들어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살면서 행복해지기를 바라서는 안됩니다. 진정 행복한 인 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행복해질 수 있는 의미있는 일을 찾아서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의 무의미 한 삶을 버리고 소유지향적인 체험지향적인 삶을 다 버리고 의미있는 삶을 살 때 기쁨이 있고 진정한 행 복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의미있는 삶을 선택하여 살 때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 사도바울과 같은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복이 여러분 가운데 함께 하시를 바랍니다.
영광과 욕됨이 교차할 때
단 3:13-18, 고후 6:3-10, 마 5:10-12 / 인명진목사
역사가 오래 된 교회는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욕됨의 세월을 믿음으로 잘 이겨내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100년의 역사가 넘는 3개 교회에서 부목사, 담임목사를 지냈습니다. 특히 제가 부목사로 5년을 섬겼던 부산진교회는 한강이남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한국교회 역사에 최초로 당회록을 남긴 교회입니다.
그리고 담임목회를 했던 문경 교회는 올해로 116년 되었고, 설립하신 성도가 순교를 했습니다. 100년 넘는 세월을 견디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 시절도 있었고, 하나님 앞에 욕됨을 드러낸 시절도 있었습니다. 자신을 순교의 제물로 드려서 교회의 얼이 살아있게 한 이야기도 있고, 교회가 일제 탄압에 의해 강제로 패쇄 되었던 이야기도 있고, 교회 앞에서 함부로 행하다가 심판받았던 이야기도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 시기도 있었는가 하면, 교회가 박해로 인해 욕됨을 겪은 역사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한 교회의 역사만이 아니라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입니다. 한마디로 영광과 욕됨이 교차하는 역사입니다.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제국 아래에서 초대교회는 모진 박해로 욕됨을 경험했습니다. 이 욕됨의 역사를 믿음으로 이겨내어 마침내 기독교가 공인되었습니다.
또한 세속적인 영광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과 야합하여 타락의 길로 걸었던 욕됨의 역사도 있습니다. 교회가 힘과 권력이 생기자 성지를 탈환한다는 목적으로 10여 차례 넘게 십자군 전쟁에 성도응 동원한 부끄러운 역사도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영광과 욕됨이 교차하는 역사입니다.
어디 교회만 그렇습니까? 우리네 인생 이야기도 영광과 욕됨이 교차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꽃피고 새우는 잘 나가던 영광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또한 영광의 시절에 가려진 눈물의 욕됨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내가 누리는 기쁨과 영광이 다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욕됨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으로 인해, 오래 동안 쌓아놓았던 영광이 무너집니다. 우리는 이 욕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영어 성경은 영광과 욕됨을 glory and dishonor, 영광과 불명예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명예가 가려질 때, 내 명예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명예를 짓밟습니다. 나의 욕됨을 가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욕되게 해서 내 영광을 지키려 합니다. 우리는 영광과 불명예 가운데서 받는 유혹을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영광과 욕됨이 교차하는 인생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영광과 욕됨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누구보다 영광과 욕됨이 교차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속에서 역설적인 신비를 경험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정반대되는 역설. 사람의 뜻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가 그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영광과 존귀를 누리는 것이 나중에는 오히려 욕됨이 되고, 욕됨을 겪는 것이 오히려 영광이 되는 역설을 말입니다.
그가 겪었던 욕됨이 무엇입니까? 먼저, 많이 견디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한 순간에 찾아온 어려움도 아니고, 특정한 원인이 있어서 찾아온 어려움도 아닙니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많이 견뎌야 했습니다. 환난과 외부로부터 어려움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궁핍과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굶기도 했습니다. 사도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고난이었습니다.
매 맞음으로 바울은 40에 하나 감하는 태장을 세 번 맞았습니다. 그가 제 1차 전도여행 때 가장 먼저 방문한 구브로 섬에서 태장을 맞았습니다. 바울이 기둥에 묶여 채찍을 맞았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구브로 섬 살라미에 바울채찍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바울은 이때의 심정을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표현을 점잖게 해서 그렇지 너무 힘들어서 자살의 충동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갇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 만신창이가 되도록 맞았습니다. 생애 마지막에는 로마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4권의 옥중서신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빌립보에서, 에베소에서 난동이 있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난동을 부린 정도가 아니라 돌로 쳐서 죽은 줄로 여기고 성 밖으로 끌어내었습니다. 여기에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이 더해졌습니다. 평생 삶으로 지는 십자가를 지고 살았습니다.
이런 바울을 교인들이 알아주었습니까? 설교가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다고 “글은 뛰어난데 말은 졸하다.” 했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해야 한다고 하니 바울이 돈 밝힌다고 했습니다. 누가 바울에 대해 비난할 수 있습니까? 바울처럼 산 사람, 아니 바울의 반만큼이라도 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도 사람 아닙니까? 이렇게 욕됨을 당하면 사람이 거칠어지기 쉽고 악만 남기 쉽습니다. 되로 받으면 말로 갚아주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처럼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깨끗함으로. 자리 연연하거나 추하게 기웃거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진정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발에 먼지까지 털고 갔습니다. 지식으로. 사람들 귀에 듣기 좋은 말씀 전한 것이 아니라 묵상과 기도로 깊은 진리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래 참음으로. 사람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농부처럼 오래 참았습니다. 자비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성도들을 돌보았습니다.
성령의 감화로. 자기 혈기와 욕심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서 행했습니다. 여기에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누구나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이라는 말 속에 자기 이기심을 감추고 다른 사람을 속이고 마음을 도둑질 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평생을 섬겼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일은 자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욕됨을 믿음의 방법으로 다 견뎌내었고,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되었습니다.
더 깊이 생각해 볼 점은 바울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단순한 의무감 때문에 수많은 욕됨을 견뎌내었을까요? 바울은 의무감으로 억지로 일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많은 욕됨을 당하면서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하루 이틀 같으면 이를 악물고 오기로 버틸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의 일생이 끝나는 날까지 욕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고백하기를 밖으로는 두려움이요, 속으로는 근심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괴로운 삶이 계속되었는데도 바울은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영광과 욕됨의 여정 속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경험했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죽어서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드린 삶 속에서 경험했습니다. 바울에게 다가온 영광과 욕됨은 신비요 역설이었습니다. 죽지 않고 부활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위해 욕됨을 겪지 않고 영광을 누린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바울은 삶 속에서 영광과 욕됨의 신비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욕됨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고난 받는 자와 약자와 함께하신다고 그토록 교훈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강자를 통해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으로 선포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래서 반대논리로 약자를 버림받은 사람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원뜻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것은 교회마저 경쟁주의로 몰아넣는 무서운 왜곡입니다. 욕됨과 십자가를 잃어버린 교회의 모습입니다.
영광이 계속되면 영혼이 타락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 부귀영화가 계속되자 타락했습니다. 그가 죽자마자 나라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은 욕됨과 눈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인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보십시오. 왕이 살려주고 싶어서 금 신상에 절 한번만 하라고 하는데도 욕됨을 선택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잘못된 영광보다는 욕됨을 택하여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 때문에 포기하는 것 없이 영광만 구한다면 거짓 신자입니다. 영광을 지속하고 싶어서 욕됨을 포기한다면 우리 또한 부자 청년입니다. 이 욕됨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눈물 흘려야 합니다. 바울은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율법으로 흠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보니 너무나 죄 많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눈물 흘리게 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자신의 인간성 때문에, 자신의 한계성 때문에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자기 절망에 빠져서, 스스로 죄 가운데서 해어 나올 수 없어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해보지 않은 사람은 눈물의 가치를 모릅니다. 바울은 자기 죄 때문에 울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 믿는다면 자신의 인간성의 한계 때문에, 자신의 죄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가능성에 대해 절대적으로 절망해야 예수께서 주시는 새사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자신에 대해 절망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예수를 주인으로 삼지 않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참회의 눈물을 흘려 본 사람이 겸손합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우리는 무지해서 죄 짓고, 지식이 있으면 교만해서 죄짓습니다. 가난하면 가난해서 죄짓고, 부하면 잘 먹어서 죄짓는 것이 인간 아닙니까? 죄 지으면 낙심하여 포기해서 죄짓고, 무엇을 이루었다 하면 자만심에 빠져서 죄짓는 것이 인간의 실상 아닙니까? 죄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문제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내랴!” 이 절망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자신의 사명 때문에 울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선교할 원대한 사명, 예수의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사명 때문에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명 감당하느라 동족들에게 멸시받고, 사명 감당하느라 태장을 맞고, 사명 감당하느라 감옥에 갇히고, 사명 감당하기 위해 평생을 울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목회자에 대해 말을 많이 합니다. 이렇게 수고하는 바울에 대해 오해를 하고 서슴지 않고 비난하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억울했습니다. 그것 견디려고 하니까 너무 힘이 들어 하나님 앞에 펑펑 우는 겁니다. 자신의 마음의 그릇은 작은데 성도들은 마음이 푸근한 바다와 같은 그릇을 요구합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울어야 합니다. 울면 마음의 그릇이 커집니다. 사람의 마음의 그릇은 그냥 커지지 않습니다. 울면 커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욕됨이요, 눈물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욕됨이 영광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눈으로 그리스도인의 역설적인 삶을 증거 합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보는 관점이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보는 방식입니다. 바울은 일곱 가지 신비를 발견했습니다.
먼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속이는 자로 취급을 하였습니다. 반대자들이 중상모략을 하고 바울을 거짓말쟁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거짓 사도라고 악한 소문을 냈습니다. 세상은 늘 복음이 들어가면 거부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반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욕 얻어먹어야 제대로 된 설교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가진 하나님의 참된 일꾼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무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본래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동족들에게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가 스데반에게 돌을 던질 때 내민 이력서는 세상에서 정말로 유명한 자였습니다. 그때 바울의 이력서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왕을 배출한 베냐민 지파 사람이요,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당대 최고의 스승 가말리엘 문하에서 히브리 학문을 관통했고, 다소 대학에서 헬라 철학을 공부했고,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였습니다. 여기에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최고의 스펙을 갖춘 유명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내민 이력서는 어떠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 이외에는 배설물로 여김.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모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그를 무명한 자로 여겼습니다. 세상이 멸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그도 이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알아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유명한 자로 알려졌습니다. 신약 성경 13권을 기록하고 2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는 유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때마다 위험을 무릎 썼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심한 고생으로 살 소망까지 끊어진 때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가능성과 환경의 가능성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억눌리고 죽임 당하는 현실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네 번째로,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징계’는 하나님께서 자녀를 자녀답게 만들기 위해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귀하게 사용하시기 위해 혹독하게 징계했습니다. 오히려 그 징계를 통해 더 빛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작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작품 만들기였습니다.
다섯 번째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때로는 근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를 보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가운데 평생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였습니다. 감옥 속에서도 찬송을 하였습니다. 빌립보서에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감옥에서도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로,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세상 재물의 관점에서 볼 때 빈곤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인 보화를 주었습니다. 복음은 가장 큰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큰 부요함입니다. 이 분을 소개시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부요한 삶을 살도록 하였습니다.
제가 부산에서 목회할 때 권순연 집사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자기 집도 없고, 가난하게 사시는 분이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부모와 조카를 뒷바라지 한 천사 같은 분이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식당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예순이 넘어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분은 여름이 되면 꼭 보약을 지어왔습니다. 정말로 받기가 민망했습니다. “집사님 형편도 넉넉지 않은데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면 이분은 어김없이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부자여서 저도 부자입니다.” 했습니다. 단순히 보약만 먹은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사랑을 먹었습니다. 때로는 보약 먹다가 감사해서 울었습니다. 저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이 말씀을 읽을 때면 그 집사님이 생각나곤 합니다. 여러분, 돈 있다고 부자 아닙니다.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바울이 바로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일곱 번째로,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바울은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집이나 돈, 재물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입니다. 이 세상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은 하나님의 상속자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바울만 이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욕됨을 장차 다가올 영광으로 여기고 걸어갔습니다. 세상이 이런 사람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믿음이 로마제국을 무너뜨렸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런 사람들은 세상도, 권력도, 폭력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죽이면 죽는 자리에 기꺼이 들어가는데 그런 사람을 무엇으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십자가요 또한 무덤에 장사 됨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죽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살아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욕됨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그것은 영광이 되었고, 부활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 팔복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 계신너희 상이 큼이라.” 영광과 욕됨은 우리 삶 속에서 경험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입니다. 주님을 위한 욕됨은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변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영광과 욕됨이 교차하는 인생에서 지속적인 영광을 요구하지 말고, 욕됨을 거부하지도 마십시오. 오히려 욕됨의 신비, 삶의 십자가를 통해 진정한 영광을 누리는 법을 배우십시오. 주님을 위한 욕됨은 우리의 눈을 변화시켜 하나님나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욕됨을 영광으로 변화시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기로 소원하는 갈릴리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가득 하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교회
고린도후서 6:3~7:1 / 김형익 목사
사람이 자기 삶의 이야기를 할 때는 뭔가 심정을 나누고 싶을 때일 것입니다. 머릿속의 이야기들, 논리의 나열들이야 그저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겠지만, 사람이 자기 속 이야기,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마음을 여는 것이고, 마음을 열기를 기대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어느 서신서에서보다도 더 많이 틈틈이 자기의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이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자기 삶의 이야기를 나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 사도를 향했던 의문과 적개심의 마음을 풀고 돌아왔지만, 아직도 고린도교회에는 거짓 교사들(거짓 사도들)에게 이끌려서 바울 사도에게 의문과 적대감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그들을 얻고자, 그래서 그 영혼들이 하나님께 화목하게 하고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권면하는 것입니다.
1. 바울 사도의 자천(6:3~10)
일찌기 고린도교회는 바울 사도에게 다른 사도들처럼(사실, 이들은 거짓 사도들이었습니다) 추천서를 왜 가지고 다니지 않느냐고 도전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 자신이 바로 추천장이며, 그리스도의 추천장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 사도는 그답지 않게 자신을 스스로 추천하고 있습니다. 나는 진실한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스스로를 추천한다고 말합니다(6:4). 여기서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참 일군이라고 추천하는 근거는 그들 앞에 드러난 그의 삶 자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삶과 유리된, 삶과 분리된 신앙이 아닙니다.
A. 삶과 신앙, 삶과 교리는 같이 갑니다.
언제나 이 진리를 놓친 시대, 놓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삶과 신앙, 삶과 교리는 언제나 같이 갑니다. 제가 왜 삶과 신앙이라고만 하지 않고 삶과 교리라고 언급하는지 아십니까? 신앙과 교리 역시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큰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내용이 깊어져야 하고 분명해져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이 우리 안에 믿음의 내용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교리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심지어 교리는 기독교의 영혼이라고 까지 표현됩니다. 교리가 없는 기독교는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은 것이란 말입니다. 제가 주일 예배 전 성경공부 시간에 교리 공부를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 입니다. 그러나 이 공부가 그저 공부로 끝난다면 그것은 역시 몸이 없는 영혼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앙과 교리는 언제나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자신의 삶으로 말해주려고 합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은 단지 말로만 전달된 것이 아니고 그의 삶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며, 그 자신이 어떻게 자기가 전한 복음을 살아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B.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6:3): 복음 사역자의 태도
바울 사도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에서 말하기를,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에 의해서 전체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 자체의 문제보다도 바울 사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받은 직책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직분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는 사역이요, 직분이었습니다. 그는 이 직책이 그 무엇으로도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저 자신이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여러 차례 이 본문을 읽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저 자신을 보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다짐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 제가 이렇게 복음의 직분을 감당하기를 원합니다’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관찰하여 얻게 된 한 가지 사실은 ‘목사가 싫으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리지는 않습니다마는, 심히 어렵습니다. 아마 바울 사도도 그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목사도 아닌, 사도 자신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에 대한 용납이 없이는 고린도교인들이 자기가 전한 복음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목사인 저 자신으로 인하여 복음의 사역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너무나 부족한 것을 알기에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살아갈 수 있도록 주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의 열망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복음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직분이 놀랍게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나로 인하여 가리워지지 않도록 살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는 일터에서 우리로 인하여 복음이 막히지 않도록 살아가야 하는 것은 바울 사도가 가진 삶의 자세와 동일해야 할 것입니다.
C. ‘많이 견딤’의 목록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삶을 자기가 ‘많이 견딘 것’들의 목록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견뎌야 했던 삶의 목록들입니다. 복음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이 목록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네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목록들의 주제는 4절에 소개된 ‘많이 견디는 것’(great endurance)입니다.
1. 많은 어려움들(6:4b~5): 복수(plural).
첫째는 많은 어려움들의 목록입니다. 4절 하반절과 5절에 있는데 모두 복수 형태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환난, 궁핍, 곤란, 매 맞음, 갇힘, 요란한 것, 수고로움, 자지 못함, 그리고 먹지 못함입니다. 1)환난, 궁핍, 곤란은 일반적인 어려움들을 기술하는 것이고, 2)매 맞음과 갇힘 그리고 요란한 것은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박해가 그에게 가해진 것들을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3)수고로움과 자지 못함 그리고 먹지 못함은 누가 부과한 어려움이라기 보다는 그가 복음을 위해서 수고한 자발적 헌신의 증거들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것들을 견딘 것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2. 은혜의 목록들(6:6~7a): 단수(singular)
이어 바울 사도가 나열하는 것은 은혜의 목록으로 6절과 7절 상반절입니다. 이것들은 앞의 단어들이 복수로 사용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모두 단수로 사용되었습니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 그리고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함?동기의 순수함?을 지켰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행동했으며 오래 참았고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 거짓이 없는 사랑을 견지했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자기를 붙들어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변하는 상황들(7b~8a): ‘말미암으며’(with, through)
이제 세번째 목록으로 바울 사도는 변하는 상황들을 열거합니다.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란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 나오는 목록은 모두 헬라어 전치사 ‘dia’로 시작하는 말들인데 ‘말미암으며’(through)로 번역되어있습니다. 영광과 욕됨,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 입니다.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란 말은 의의 병기를 양 손에 잡고서 라는 말인데, 의를 자기의 무기로 사용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 무기로 변화하는 상황에 그는 대처했습니다. 영광과 욕됨은 바울 사도 자신을 향해서 직접적으로 고린도교회가 취했던 태도를 말합니다. 그는 사역을 통해서 영광과 모욕을 다 고린도교회에서 경험하였습니다.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이란 바울 사도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신에 대한 좋은 소문과 나쁜 소문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많은 변화를 경험하면서 거기에 따라서 일희일비하지 않았습니다. 의의 병기를 좌우에 가지고 섰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우리의 상황이 주변에서 우리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소문들에 따라서 변하기가 쉽습니까? 바울 사도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의가 그 앞에 있었습니다. 자기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과 평가에 매달리지 않고 하나님의 평가에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4. 하나님의 역전시키시는 능력(8b~10): ‘같으나’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가 제시하는 목록은 상황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1)‘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2)‘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3)‘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4)‘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5)‘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6)‘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7)‘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 사도는 외면적으로 자기를 판단하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러나 자기의 실재를 아시고 자신의 상황을 변화,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자기의 실재를 보여줍니다. 이것을 복음의 역설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이것을 삶 속에서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아도 사실 그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항상 누리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은 상황이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야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는 어떤 경제적 상황에 처하든지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비단 바울 사도와 같이 대단한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지는 경험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경험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D.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놀랍게 나타나는 것은 고난이 없고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라 역경을 믿음으로 견딜 때이다.
바울 사도가 이 삶의 고백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놀랍게 나타나는 것이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자기가 당하고 있는 모든 환난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거되고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는 기적을 간증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통 기대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의 삶은 외면적으로 보기에는 그대로 였습니다. 여전히 그는 고생을 하고 있었고, 일부 고린도교인들에 의해서는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너희들이 보기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은 나의 삶 속에서 놀랍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역경 속에서 믿음으로 견디는데서 가장 놀랍게 나타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난 속에서 빛나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가 여기서 강조한다는 것은 ‘많이 견디는 것’(great endurance)이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바로 믿음으로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 엄청난 기적 같은 일이 있어야 간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견뎌내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잘 간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나눔이 우리 안에 풍성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구했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 절대로 당황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나를 용납하라(6:11~13):
여전히 바울 사도를 용납하지 못하는 나머지 사람들을 얻고자 하는 사도의 마음이 여기에 표현됩니다. 아직도 그들은 바울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내 마음에서 너희가 배척을 당하거나 거절을 당한 것이 아니라, 너희의 좁은 마음이 나를 배척하고 거절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아비의 심정으로 자식에게 하듯이 내가 마음을 넓혔으니 너희도 마음을 넓혀서 나를 용납하라고 권합니다. 어쩌면 이 편지 고린도후서는 바울 사도가 아직도 사도를 배척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남아있는 사람들을 향한 마지막 권면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잃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자기 삶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거룩한 교회가 되라(6:14~7:1)
그런데 화제가 갑자기 바뀌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 14절에서 입니다. 바울 사도는 갑자기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이 단락이 7:1까지 이어지는데, 이 갑작스런 화제의 전환 때문에 성경 학자들은 이 부분이 나중에 다른 사람에 의해서 삽입되었거나, 바울 사도의 편지의 원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추측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야할 충분한 근거 역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최근의 연구는(Scott Hafemann)은 이 본문을 문맥에 비추어서 분명하게 해석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A. 구별과 분리(6:14b~16a): 의와 불법 / 빛과 어두움 / 그리스도와 벨리알 /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 /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
여기 본문에는 5개의 구별과 분리의 개념이 소개됩니다. 의와 불법,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벨리알,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입니다. 이것들은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는 개념들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바울 사도가 말하는 여기 ‘믿지 않는 자’(14절)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불신자와의 결혼, 불신자와의 동업을 금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불신자가 누구를 가리키느냐에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결혼이나 동업 문제를 금하는 것이라면 그런 문제가 이 문맥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의미하는 ‘믿지 않는 자’는 여전히 바울 사도 자신을 배척하고 거짓 사도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들이 자신을 용납하기를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이미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하고 복음을 바르게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과 멍에를 같이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바울 사도가 말하는 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메시지(고후 5:20)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또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권면(고후 6:2)을 거절한다면 그들은 결국에는 불신자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형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여기 바울 사도가 소개하는 다섯 가지 대립과 불일치의 개념과 동일한 것입니다. 절대로 양자는 양립할 수 없으며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들과 함께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 사도가 심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바울 사도는 사도로서의 위임받은 직책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수많은 교회의 가장 큰 위험은 언제나 교회 밖으로부터가 아니라 교회 안으로부터 일어난 문제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거짓 가르침이었고, 다른 복음의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지 않는 목사, 믿지 않는 장로, 믿지 않는 신학자, 믿지 않는 교인(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몰아붙이고 분리를 정당화하는 실수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깊고도 신중한 영적 분별력을 요구합니다. 오용을 조심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를 생각하면서 유념하는 것은 바로 교회의 순결과 거룩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이어서 인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구절들로부터 명백해집니다. 이 16절에서 18절에 있는 구약의 인용들은 사실 16절 상반절에서 언급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을 확증해주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5개의 대립 개념들의 절정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인 교회는 절대로 우상과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B. 구약 인용
바울 사도는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여러 구절을 한데 섞어서 인용할만큼 능히 구약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16절 하반절에서 18절은 모두 구약의 인용입니다.
1. ‘내가 저희 가운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16절; 레 26:11~12; 겔 37:27).
첫째로 16절 하반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저희 가운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 말씀은 레 26:11~12 과 겔 37:27을 합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이 구약 인용은 출애굽과 관련된 그 직후에 주어진 약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고린도교인들은 새언약의 백성이 된 자들이며 참으로 하나님은 저희 안에 계시고 저희 하나님이 되시며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2.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17~18절; 겔 20:34; 삼하 7:14; 사 43:6)
또 17절과 18절은 겔 20:34와 삼하 7:14 그리고 사 43:6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일부는 제사장들에게 해당되는 정결규례와 관련된 말씀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부정한 것과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앞의 인용이 출애굽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이 인용은 구약의 또 한 번의 중요한 구원 사건인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과 관련된 약속이었습니다.
왜 바울 사도가 여기 장황하게 구약 성경을 인용하는 것일까요? 자신이 말하고 있는 논지, 즉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씀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실상 이 두 구약 예언의 중심에는 17절의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가 있는 것입니다. 분리와 구별의 명령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강조점입니다.
C. 명령과 권면
1. 너희는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6:14a).
그러면 다시 한 번 14절의 명령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명령은 불신자와의 결혼이나 동업을 금하는 명령으로 쓰인 것이 본래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하는 명령으로 볼 수는 있겠으나, 불신자와의 동업 자체를 금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게토를 형성하여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살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도시를 떠나서 산으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멍에를 같이 한다’는 말은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게 될 수 있는 어떤 연합이나 그룹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판단과 분별력을 요구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그룹에 들어간다고 하거나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한다고 할 때 그것이 여러분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바울 사도를 대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을 불신자로 규정하면서 그들과 함께 교회, 곧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흔드는 문제임을 바울 사도는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을 거룩함에서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함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자신을 깨끗케 하자(7:1).
바울 사도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하면서 권면을 시작합니다. 바울 서신을 많이 읽어본 분들은 아실텐데,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은 바울 사도가 흔히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에게 이런 표현은 너무나 낯익은 표현이지만, 바울 사도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 사도가 자기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향한 마지막 권면을 얼마나 애타는 마음으로 하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게다가 바울 사도는 ‘우리가’라고 하며 ‘깨끗케 하자’고 말합니다. 명령이 아니라 권유입니다. 고린도교회와 바울 사도 자신이 가지는 연대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도 고린도 교회의 지체인 것처럼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관심은 고린도 교회가 깨끗한 교회, 순결한 교회, 거룩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르침과 삶의 영역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근거와 동기를 두 가지로 바울 사도는 제시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약속을 가진 자들이란 사실입니다. 구약의 말씀들을 인용한 것이 바로 그 약속들의 내용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예언된 약속을 받은 자들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자답게 그들은 정결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에 대한 약속과 그에 대한 소망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삶의 순종에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의 거룩함을 이루어가는데 제시하는 첫번째 동기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바울 사도가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조건입니다. 우리가 다 그 분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은 마땅히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야 할 거룩한 감각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감각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어가도록 만들어주는 요소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물질 축복, 예수님과 사역의 성공, 예수님과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지 못한 어떤 것을 함께 얻어야 내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여기는 한, 예수 믿는 것을 그 어떤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만드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서의 쾌락을 얻는데 초점을 맞추는 세상의 삶의 방식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늘날 온갖 더러운 우상들로 둘러쌓여있으며, 이미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에 우상들이 다양한 모습들로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은 일치될 수 없는데 말입니다.
탐욕이 우상숭배의 핵심입니다. 이것들이 모든 비진리와 관계있는 것들입니다. 교회가 우상으로부터의 자유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자체로 세상을 향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서 선교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가장 창조적이고 공동체적인 전략은 바로 교회 자체입니다. 세상에는 가득한 우상으로부터 자유한 교회의 존재야말로 세상을 향한 최고의 복음적 증거가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은 고립을 위한 분리나 순결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선교를 위한, 이 세상을 향한 복음 증거를 위한 분리이며 순결함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 세상 속에서 ‘타문화권 선교사’와 같이 여겨야만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문화에는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과 나그네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거룩함을 이루는 길은 우상을 이겨보려는 우리의 의지력을 키워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의 만족이 되시며, 우리의 가장 깊은 욕구를 채워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심을 경험하며 그런 고백을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도록 만들어주는 유일한 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자
고후06장 01절 / 김양인목사(목양교회)
사도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그들의 생애를 송두리째 바친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주님의 특별한 택하심을 받은 이래로 숱한 핍박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오직 사명을 위해 살았으며 사명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사도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게 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 자기의 목숨을 바쳐 충성했습니다.
그는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에게 편지하기를 “1)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자신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고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일군 또는 대리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간곡하게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설교를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마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고 선포되는 말씀을 경청하십시오. 그리할 때 그 말씀이 은혜가 되고 영의 양식이 됩니다.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도 저수지의 둑이 무너진 상태라면 물을 가둘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셔도 마음 그릇이 준비되지 못했다면 아무 은혜도 받을 수 없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종교행위는 단지 성전 마당만 밟는 무익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받고 싶을 때 언제든지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이천년 교회사를 보면,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서 수리아와 소아시아 전역과 그 후에 비로소 유럽으로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을 비롯하여 한반도에는 근세에 와서야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돌 십자가라든가 아기를 안고 있는 성모상과 같은 유물이 출토된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도 매우 이른 시기에 어떤 식으로든 기독교가 전래된 것 같으나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는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한말에 이르러 복음이 들어오자 우리 민족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갈급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고 130여년 만에 오늘날과 같은 큰 부흥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민족 차원이 아닌 개인 차원에서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전도를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교회가 얼마나 많고,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 번도 전도를 받지 못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저를 만난 그때가 은혜 받을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셔서 불신 이웃에게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각 사람에게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포도원 비유를 보면, 포도원 품군들이 주인에게 고용된 시간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들어왔고, 또 어떤 사람은 아침 9시에, 또 어떤 사람은 정오에, 또 어떤 사람은 오후 3시에, 또 어떤 사람은 오후 5시 해질녘에,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은 때에, 주인을 만나 포도원에 들어왔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가운데도 어려서부터 믿게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청소년기에, 또는 청년기에, 또는 장년기에, 또는 노년기에 믿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른 시기에 믿을 수 있다면 그 편이 가장 좋지만, 그것을 우리의 뜻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은 그 때가 그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때 부르심을 받더라도 믿기만 하면 동일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실 때 기회를 붙잡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부르심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데는 몇 가지 단계가 있는데 그 첫째는 부르심의 단계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믿은 성도들을 통해서 불신 영혼들을 구원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초청장을 불신 이웃들에게 전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부르심의 은혜는 사람차별 없이 두루 주어집니다. 구원의 초청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아는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잔치 시간이 되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대었습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으니 거기 가봐야 하겠소. 미안하오.' 하였고 둘째 사람은 '나는 소를 다섯 겨리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러 가는 길이오. 미안하오.' 하였으며 또 한 사람은 '내가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 어떻게 갈 수가 있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정중하게 초대받은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도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가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들은 맨 먼저 구원의 초대를 받았으나 거부했습니다.
심부름 갔던 종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초대 받은 자들이 오기를 거절했다고 전하자, 집주인은 대단히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기를 '어서 동네로 가서 한길과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하고 지시했습니다.
얼마 뒤에 종이 돌아와서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고 말하니 주인은 다시 종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 잘 들어라.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중에는 내 잔치에 참여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유대사회에서 무시당하는 백성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유대인이시고 사도들도 유대인이고 초대교회 당시에 복음 사역자들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나 거절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였을 때, 그 기회가 이방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신앙의 자유가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감옥에 가지 않고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열심히 전도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천국 잔치를 준비해 두시고 불신 이웃들을 초대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순히 초대에 응하기만 하면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다 주님께로 나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를 받고서 믿을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는 각자의 자유입니다. 그 누구도 강제로 믿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 주고 권면할 수는 있지만 억지로 믿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간청에 못 이겨 교회에 나올 수는 있지만 결국은 그 자신이 마음에 감동을 받고 의지적인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해 주고 교회로 이끌어야 하는 이유는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듣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할 일은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책임 질 수 없습니다. 주님을 믿을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선용하느냐 허비하느냐는 전도 받은 그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결과는 천양지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복음을 전하지만, 누구에게나 구원 받을 기회가 무한정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회의 문이 닫힐 때가 있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습니다(전 3:1).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더라도 호응하지 않는다면 구원 받을 때를 놓치게 됩니다.
부르심을 거절하는 큰 이유는 바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바빠서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인생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구원 받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 세상 즐거움 때문에 부르심을 거절합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세상 즐거움을 누릴 수 없게 되므로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천국 잔치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므로 그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흔쾌히 응합니다. 이들은 은혜 받을 만한 때를 놓치지 않고 붙잡은 사람들로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회개하게 하시는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죄인인 사실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시기를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하셨습니다. 회개는 믿음으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으면 형식적인 기독교인이 될 수는 있어도 성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죄 사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그렇게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오순절에 사도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더니 많은 유대인들이 듣고 찔림을 받아 사도들에게 묻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였을 때, 사도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죄의 종류가 많지만 가장 큰 죄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그 동안 불신앙으로 살아온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회개하게 하시는 은혜를 주서야 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온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죄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을 알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난날의 삶이 얼마나 추한가를 알게 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내가 어찌할꼬?”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나 죄를 지적받고 회개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실지라도 사람은 그 같은 하나님의 감동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무효로 만들어 버립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네 종류의 밭이 나옵니다. 길가와 같은 밭, 돌밭, 가시떨기가 자라는 밭, 좋은 밭이 그것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은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마귀가 와서 그 사람의 마음에 전해진 복음을 빼앗아가므로 복음을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신앙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넘어집니다. 가시떨기가 자라는 밭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좋은 밭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으로서 구원에 이릅니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가 자라는 밭은 말씀을 통해 죄를 지적받고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좋은 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죄를 회개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가하면, 회개는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필요합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매일의 삶속에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아야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1장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8)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신앙인도 말하기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고 했다면 부족한 우리가 회개생활에 힘써야 할 것은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지적하시고 깨닫게 하실 때 즉시 회개함으로 긍휼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우리는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회개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세상을 좇아서 살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14장 23절에 이르기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량한 행동을 했을지라도 그것이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고 하신 대로, 성도들의 심령 속에 성령께서 임재해 계시면서 우리가 행할 바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믿음생활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말씀이 곧 성령의 음성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을 말씀해 줍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 이르기를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주일을 지키고 예배생활을 힘쓰는 것은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수준은 예배에 참여하는 것과 정비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예배생활을 힘쓰라고 하시는 음성을 들려주실 때 거부하지 마시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 이르기를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은 성령의 감화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잘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럴 때 자녀가 부모의 충고를 받고 순종하면 유익이 되고 부모와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의 충고를 거부하면 서운해 할 것입니다. 더구나 충고를 거듭해서 거부하면 부모 편에서도 충고를 멈춥니다. 바로 이런 것을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 가운데도 믿음의 차원이 다양합니다. 초보단계의 믿음으로 만족하는 성도가 있는가하면, 꾸준히 믿음의 성장을 보이는 성도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믿음의 길에서 퇴보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어디에 원인이 있는 것일까요? 은혜를 얼마나 사모하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힘쓰는 사람은 더 큰 은혜를 받아 믿음이 성장하지만, 믿음으로 사는데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나마 갖고 있던 작은 믿음마저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는 믿음으로 살려는 욕구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감화를 주신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지시를 순종하여 범사에 믿음으로 살아감으로 은혜로운 삶을 영위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천국을 위해 일하게 하시는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은 성도들은 비록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영적 소속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가장 힘써야 할 일은 천국 곧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이르기를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단지 생계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 학생들은 공부를 하되 세상 학생들처럼 일신의 성공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원칙은 성도들의 모든 삶에 적용 되어야 합니다.
이제 구원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군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첫째로, 천국 복음을 전하는 일군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는 성도들은 누구든지 전도의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고전 9:16)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도들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다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전하되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 12장 3절에 이르기를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했습니다. 장차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전도상이 가장 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딤전 2:4).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므로 전도 상이 가장 클 것이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먼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할지라도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전도한다면 그 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귀한 일을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도의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해외선교사들을 후원함으로써 선교에도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고 선교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 선교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선교사들은 일선에 나가 싸우는 군인들이고, 선교를 후원하는 우리는 후방에서 병참지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양식을 비롯하여 군수물자가 원활하게 공급되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듯이, 우리는 선교사들을 힘써 후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를 위해 지체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 몸에 많은 지체가 있으나 어느 것 하나 필요치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어느 것 하나 무시해도 좋은 지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이 저마다 지체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우리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로서 서게 될 것입니다. 장성한 신자는 믿음이 어린 신자들을 위해 수고할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요 하나님의 집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식들을 위해 일하고, 형이나 언니가 동생들을 보살핍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신앙연조가 오랜 성도들이 어린 신자들을 보살피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에서 받은 직분을 소중히 여기시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직분을 주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고 하신 대로, 때가 되면 주님께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내일로 미루지 말고 열심히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고 하셨습니다. 지금 건강할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십시오. 지금 물질에 여유가 있을 때 하늘에 보물을 쌓으십시오. 인생의 밤이 오면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므로 아직 낮일 때에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사도의 간절한 권면을 살펴보았습니다. “1)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 권면을 마음에 새기고 받은바 구원의 은혜를 소중히 알 뿐 아니라 지금 은혜 받을 때에 부지런히 은혜를 받아서 이웃에게 나누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받은 자가 조심해야 할 것
고후 6:1-2 / 오세원 목사
우리가 갖고 싶고 받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특히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복이요, 은혜입니다. 하지만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고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유지하며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살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받은 은혜를 금방 쏟아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오랫동안 제대로 누리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은혜, 받고 싶은 좋은 은혜를 받고 복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 은혜와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면 오히려 받지 않는 것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부자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부요함이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의 과학자들이 음식을 어느 정도 섭취하는 것이 생명에 도움이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실험을 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쥐를 두 그룹으로 나눈 뒤, 한 그룹에는 죽지 않을 만큼의 최소한의 식량만을 주었고, 다른 한 그룹은 먹고 남을만한 풍족한 식량을 주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두 그룹의 평균 수명이 비슷하거나 풍족한 쪽이 더 오래살 것이라는 예상을 하였습니다. 과식은 안 좋지만 쥐는 필요이상으로 폭식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여유분의 에너지가 건강에 도움을 줄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정 반대였습니다. 식량이 부족한 그룹은 평균 쥐 수명의 2배를 살았습니다. 식량이 남은 쪽은 비슷하게 살거나 조금 더 단명을 하지만 행동이 좀 이상했습니다. 부족한 식량을 먹는 쥐들은 서로 싸우지도 않고 사이좋게 지냈지만 풍족하게 먹은 쥐들은 서로 싸우고 물어뜯었습니다. 그리고 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실험에서 영감을 받아 건간이 안 좋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절식’을 시켜보았습니다. 환자들은 공복감에 괴로워했지만 대부분 더 맑은 정신과 건강한 신체를 회복했습니다. 검사결과 실제로 각 장기들의 백혈구수치가 올라가고 기능이 회복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풍요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필요이상의 낭비는 삶의 질을 낮추고 영혼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풍족한 삶만이 행복은 아니며 그것이 곧 축복인것만도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캐나다 위니펙에 거주하는 제럴드 머스 웨이건씨는 1998년 ‘수퍼7’ 복권 추첨에서 단돈 2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2200원으로 1,000만 달러, 약 110억원의 복권에 당첨되어 당첨금을 받았습니다. 갑작스럽게 거액을 손에 쥐었지만 무분별한 소비생활과 잇단 사업 실패, 술과 마약으로 인해 범죄의 길로 접어든 후, 당첨금을 모두 탕진하고 농장에서 일을 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2005년 10월 2일 자신의 부모 집 차고에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2002년도 영국에서는 당시 19세였던 청년 마이클 캐롤이 우리나라 돈으로 165억원의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그중 약 절반은 가족들과 친구 등 주변인들에게 인심 쓰고 나머지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가운데 온갖 추악한 짓은 다하고 살다가 결국 거지가 되어 10년이 지난 현재는 정부로부터 실업수당을 받다가 이제는 작은 공장에 취직을 하여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 리서치 센터에서 2008년도에 그동안 복권 1등에 당첨된 자들을 추적을 했는데, 그 돈을 제대로 누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보고된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권력이나 명예를 얻고자 하다가 얻은 후에 오히려 더 불명예스러운 인생이 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생긴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호사다마”입니다. 좋은 일 다음에는 안 좋은 일이 많이 발생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토록 받기를 원하는 복과 은혜를 받았던 성도들이 그 은혜와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고도 그 은혜와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 받을 때 은혜 받은 자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은혜가 무엇이며 은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받은 은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은혜를 받았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없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것을 조심해야 할까요?
우선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면 안됩니다. 이 말씀은 은혜를 받았으면 가치 있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헛되이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원어적으로 보면 “에이스 케논”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빈’ ‘공허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모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감사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란 단순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다양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씀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라고 했는데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란 일꾼을 말합니다. 사역자, 즉 복음전하는 사도로서의 일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성도들에게 권한다고 하면서 한 말이 ‘은혜를 헛되지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만 가지고는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뒤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지금이야 말로 은혜를 받을만한 때라고 하셨고 구원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은혜를 받았다면 은혜 받은 자 답게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은혜 받은 자답게 살기 위해서는 환란과 궁핍과 곤란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온갖 고난을 겪더라도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직분을 받았거나 사역을 감당하기로 서원해놓고 조그마한 어려움이 오면 극복하지 못하고 쉽게 신앙생활이 허물어지는 것은 은혜를 헛되지 받은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직분과 사역을 주셨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정과 직장을 주셨고,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을 주셨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 은혜를 제대로 가치 있게 여겨서 어떤 핍박과 곤란한 일과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신앙생활을 등한시 하거나 직분자 답게 살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를 보면 조금만 어려우면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받을 때만 잠깐 은혜를 생각하며 살다가 얼마 안되어 곧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대로 살지 않거나, 조금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곧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징계가 임하면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하나님을 뒤로하고 우상을 섬기는 등 불신앙의 요소로 변질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면 또 두손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다시 은혜를 베푸셔서 용서하시고 복을 주시면 한동안은 하나님을 경외하다가 다시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우상을 섬기는 일을 자행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받죄게 헛되게 사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 조심해야 할 것은,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갈 5:4절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은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은혜에서 멀어지고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지나치게 행위를 강조하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성도 여러분의 삶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복받을 일을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을 받고 있음을 느낄 때는 없습니까? 다른 성도들을 두고 볼 때에 우리가 생각해 보면 직분을 받고 있으나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하는 일도 잘되고 심지어 자녀들도 잘되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을 보면 은근히 부럽기도 하고 시기심이 발동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것을 은혜로 깨달아서 그 은혜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시기심이 생길정도로 보고 있는 사람들도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복 받을 일을 해야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복받을 행위를 해서 받았다는 생각을 하면 그렇게 해서 받은 것을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이 형통하다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십시오. 그 은혜를 생각하여 은혜 갚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실수와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감히 누가 하나님께 따지겠습니까?
‘하나님, 왜 저런 사람에게 저런 큰 복을 주십니까?’ ‘왜 나는 그래도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하려고 애를 쓰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나름대로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데도 이것밖에 안됩니까?’ 라고 항의할 수 있습니다. 불평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이미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포도원과 품꾼들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포도원 주인이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주기로 약속하고 일꾼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요즘 시간으로 환산하면 오전 9시에 정시에 출근한 사람과 낮12시에 출근한 사람과 오후 세시에 출근한 사람과 그리고 퇴근시간 한 시간 남겨놓고 오후5시에 출근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제 6시가 되어 일을 마치고 품삯을 받는 시간이 되었는데 농장 주인이 청지기에게 시켜서 품삯을 주었습니다. 제일 먼저 일한 사람부터 주지 않고 제일 늦게 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부터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일했는데도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에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각기 자기들이 일한 시간이 있으니까 한 시간 일한 사람보다는 많이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오후 세시에 온 사람도 한 데나리온 줍니다. 낮 12시에 온 사람도 한 데나리온, 오전9시에 온 사람도 여전히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다 받고서 몇 사람이 주인에게 원망하면서 항의를 했습니다. 12절 말씀,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이때 포도원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3-15절).
구차하게 따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주님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우리가 율법주의가 되면 안됩니다. 다만 하나님은 나에게 베푸신 은혜로만 만족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는 은혜를 비교하거나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시간 일하고 받은 사람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본인이 그것을 깨달으면 다행이고, 하루 종일 일하고 한데리온 받은 사람도 이미 처음부터 약속을 하고 들어가서 정당하게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만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일을 전혀 시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신 은혜를 보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다보면 내가 받은 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 은혜에서 멀어지거나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고 계속 은혜에 머무는 삶이 되십시오.
둘째로 받은 은혜가 헛되지 않으려면 방탕한 것으로 바꾸면 안됩니다. 은혜받은 자로서 조심해야 할 것은 방탕함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유다서1: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여기서 주된 방탕한 삶을 지적한 내용을 보면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이 경건하게 살지 않는 것을 지적하면서,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직분과 치유와 삶의 형통의 은혜를 받아놓고는 언제 그런 것을 받았는가 하는 의심을 할 정도로 하나님을 저버리거나 신앙생활을 나타하게 하거나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처음부터 예수를 안믿었던 사람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받은 경험을 갖고 천국소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방탕한 삶을 산다면 이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디모데후서4:10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셋째,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면 안됩니다.
히브리서10:29절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돈벌이 수단으로 바꾸려고 하면 안됩니다.
사도행전8장에 보면 스데반집사가 순교한 후에 큰 박해가 시작되자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등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이때 흩어진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때 빌립이 사마리아성에 내려가 복음을 전파하면서 더러운 귀신이 쫓겨나고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는 등 여러 가지 이적과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 중에 마술로 먹고 살던 시몬이라는 사람도 같이 믿고 세례까지 받고 함께 다녔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확인차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와서 보니까 물세례는 받았지만 성령은 받은 적이 없음을 알고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임할 때 여러 가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시몬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을 주면서 이 권능을 자신에게도 달라고 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시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돈주고 살줄로 생각하였느냐? 이제 네가 돈과 함께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를 돈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분명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 됩니다. 이것도 일종의 헛되이 사용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마가복음3:29절 말씀,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성령을 통한 은혜를 모독하는 것은 영원히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다른 것은 다 용서가 되어서, 즉 살인죄를 지어도 용서가 되지만 성령님을 모독하는 죄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어떤 것인가? 30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성령충만한 모습을 보고는 영분별이 안되니까 귀신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곧 성령을 모독한 것이라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혜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실 요한복음10장에 보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귀신 들려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벨릭스 총독 시절에 바울이 더둘로라는 사람에 의해 고발을 당해 결국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다가 총독이 바뀌어 베스도가 부임을 했습니다. 이때 다시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다시 고소했습니다. 그때 26장에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앞에 서게 되었고 그 앞에서 변명의 기회를 얻어 변론을 합니다. 일종의 설교를 했습니다. 이때 곁에서 함께 듣고 있던 베스도 총독이 바울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26:24)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은혜를 받았으면 받은 성령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은 결단코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들 가운데서 성령의 은혜를 받아 행동하는 것을 보고 함부로 하여 성령을 모독하면 우리가 용서받지 못할 수도 있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헛되이 여겨도 안되고, 은혜에서 떨어져 안되며,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만들어도 안되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면 안됩니다. 이런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든든히 서가야 합니다.
베드로전서5:12절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우리가 은혜에 굳게 서 있다 보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아세요?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가 되고, 죽은 자 같으나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할렐루야!
지금은 은혜 받을 때입니다
이기복목사(하늘문교회) / 고후 6:1-2
오늘은 교회 절기로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강림절은 교회 절기로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오순절이란 예수님이 부활하신 부활절로부터 50일이 되는 날입니다. 금년은 부활절이 4월 1일이었음으로 5월 20일인 오늘이 구약시대로 말하면 오순절이고 이 날에 성령이 강림하였다 하여 성령강림절로 지키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절을 시작으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모든 교회의 생일이라고도 합니다. 초대교회가 오순절 즉 성령강림절로부터 시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을 하시면서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행 1:4-5절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에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하나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이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모인 자리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주님의 교회가 탄생하고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강림절에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한결같이 복음을 전하는 전사가 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은혜 받고 성령 체험한 성도들이 예루살렘과 유다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어 전 세계가 복음화가 된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33년 전인 1885년은 조선이라는 국호를 가진 대한민국에 복음 이 들어오기가 가장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지금 전 세계를 향하여 선교사를 보내고 세계 선교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은혜는 식고 이름만 가진 명목상(名目上)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졌습니다. 왜 우리는 해마다 성령강림절을 맞아야 할까요? 왜 우리는 해마다 감사절을 가져야 할까요? 잃어버린 은혜를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힘들고 핍박이 있으면 다 두 손들고 도망갈 사람들입니다. 지금이야 말로 은혜 받고 성령충만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1. 보라(behold)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 전체에 “보라”는 말씀이 수없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때 하신 말씀이고 백성들을 깨닫게 하시려고 기적을 행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예언하실 때 “보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우치고 경고하실 때에도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라”라는 말씀 영어로 Behold라는 말은 무엇을 “바라보다” “주시하다” “주의 하다”라는 뜻입니다. 명령형으로 지금 있는 자리에서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씀입니다. 깨달으라는 말씀이요 똑바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하였을 때 하나님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최초의 경고하는 말씀을 했습니다. 출애굽을 할 때 홍해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외치십니다. “보라 오늘 너희가 본 애굽 사람들은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고 말씀했고, 광야에서 먹을 양식이 없어 아우성을 칠 때 하나님께서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라고 말씀하시고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적을 만나 두려워하고 있을 때 “보라 내가 네 앞에서 대적들을 쫓아내리니”라고 말씀하시고 적군들을 물리쳐 주셨습니다(출 34:11). 신 30:15절에는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사야 7:14절에는 이 땅에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실 때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우치고 경고하실 때 “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특히 예언서인 이사야서에 이 말씀을 많이 하였습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사 43:19절에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 60:2절에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요 캄캄함이 만민을 기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사야 65:17절에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에서 십자가 죽으심까지 중요한 역사를 이루실 때마다 “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 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마 12:18).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눅 22:21). 마 7:4절에는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길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게하라 하겠느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마지막 한 말이 행 7:56절에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선 것을 보노라”고 외쳤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재림의 비밀을 전할 때에도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전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계 16:15절에는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성경 마지막 장인 계시록 22장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계 22:7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22:12절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2. 바로 지금이 중요합니다.
본문에 “지금은”이라는 시간과 때를 말씀하였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사람들은 지금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에 사로 잡혀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미래만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미래 학자라는 모든 것을 아주 부정적이고 절망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이 없고 인간의 계산과 눈으로만 볼 때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미래에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맞는 말도 많지만 세상은 그렇게 인간의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지금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으로 볼 때 지금은 어떤 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보면 지금은 가장 중요한 때인데 우리가 사는 지금은 어떤 때입니까? 저는 흔히 말하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볼 때 지금이나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차원에서 지금은 어떤 때인지 말씀을 전합니다.
1)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는 때입니다.
자연 세계에도 그렇지만 인간 세계도 그렇고 특히 신앙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알곡이 있고 쭉정이가 있습니다. 믿는 성도들 가운데에도 알곡 신자가 있고 쭉정이 신자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쭉정이가 더 화려하고 요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추수할 때에는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우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과연 알곡 신자인지 쭉정이 신자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2)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때입니다.
양과 염소는 비슷한 같은 과의 동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양은 하나님의 택한 자녀이고 염소는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도 마지막 날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날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교회 안에도 반드시 양이 있고 염소가 있습니다. 염소가 없을 수는 없지만 교회 안에 염소가 많으면 교회가 시끄럽고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3) 인침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과 마귀의 자녀로 마귀의 표를 받은 사람이 구분되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받은 사람이요 말씀으로 무장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못하고 마귀의 표인 666표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요즈음은 적그리스도의 표를 받은 이단들이 날뛰는 시대입니다.
3. 은혜를 받아야 할 때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은혜라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교회에 왜 나오느냐? 한 마디로 은혜 받으러 나옵니다. 은혜란 아무런 대가 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히브리어로 은혜를 “헷세드”라고 하는 데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은혜란 값없이 주시는 사랑입니다. 쉽게 말하면 부모님의 은혜란 부모님께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풀어 주신 사랑을 뜻합니다. 선생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의 은혜도 그렇습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혜택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어느 때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아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도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은혜”와 “구원”입니다.
성경은 과거도 중요시하고 미래도 중요시 하지만 바로 지금을 가장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지금이 은혜 받을 때요 구원의 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또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지금이 은혜 받기에 가장 좋은 때라는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주시길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은혜를 받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 중의 은혜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은혜 받는 첫째 비결입니다. 은혜란 대가없이 베풀어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은총을 하나님의 축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은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성경에 약속하신 모든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2) 깨닫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을 하면 부모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부모님의 그 큰 은혜를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선생님의 은혜를 받았다 하는 것은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어려서는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장성할수록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라는 말씀은 “깨달음의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의 타락한 백성들을 책망하면서 사 1:3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예수님도 당시의 백성들이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시면서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라고 외치셨습니다. 또한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을 만나 은혜를 받고 깨닫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닫지를 못함에 대하여 한탄을 하시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3)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 번 받으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새롭게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은혜 위에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 사람은 언제나 은혜를 또 받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한 번 받은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는 과거에 은혜 받은 것만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에 방언을 받았다고 자랑하나 지금은 다 소멸한 사람이 많습니다. 과거에 전도 많이 한 것만 자랑합니다. 지금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요 1:16절에도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더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약 에스겔 47장에 생수의 은혜를 말씀하시면서 갈수록 물이 차 올라왔습니다. 처음에는 발바닥에서 시작하여 무릎 위로, 나중에는 허리 위로 그리고 수영하지 않으면 건널 수 없을 정도로 충만하게 임하였습니다.
4. 은혜 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믿음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은혜는 믿는 자이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일반적으로 햇빛과 비와 공기는 생존을 위한 3대 요소로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만 받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성경에 약속한 모든 축복을 주십니다. 믿는 사람에게 갈수록 더 큰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믿음만 있으면 기적의 주인공이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인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를 귀하게 여기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는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사모(思慕)한다는 말은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교회의 부흥을 사모합니다. 자녀들이 잘 되길 사모합니다. 그 중에도 자신이 은혜 받기를 사모합니다, 성령충만하길 사모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사모하였던지 마치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사모한다고 시편에서 고백하였습니다. 찬송가 95장 가사를 보면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뿐일세” “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님 음성조차도 반갑고 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은 오직 주 예수뿐일세”
우리도 은혜를 받으려면 사모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도 은혜를 받으려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사모하는 사람은 눈빛이 다릅니다.
셋째는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기독교의 은혜는 모이는 곳에 임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은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뿐만 아니라 각 가정에서도 오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 교제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의 각종 기적이 일어난 사건을 보면 모이는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이 점점 모이기를 싫어하고 나태하며 형식적이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어가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도대체 예배도 안 나오는 직분이 무슨 임원입니까? 참된 성도입니까? 우리교회에는 세상에 일주일에 5대 예배를 한 번도 안 빠지는 성도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런가 하면 주일 낮 성도가 너무나 많습니다.
5. 은혜를 받으면 변화가 옵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 특징이 무엇일까요? 은혜라는 말을 신악성경에서 헬라어로 “카리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카리스라는 말에는 몇 가지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그 어원의 뜻을 통하여 우리도 자신의 은혜생활을 점검해 보길 바랍니다.
1) 기쁨이 넘칩니다. 기쁨을 헬라어로 “카라”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이 은혜라는 말 카리스에서 온 말입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으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기쁨이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기쁨이 없는 것은 참된 은혜가 아닙니다.
2) 감사가 넘칩니다. 은혜를 받으면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됩니다. 범사에 감사합니다. 감사라는 말이 헬라어로 “유카리스트”입니다. 이 말도 은혜라는 말 카리스에서 온 말입니다. 은혜를 충만히 받으면 역경 중에도 감사하고 병중에도 감사하고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가 충만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잘 될 때만 감사하는 조건적인 감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합니다. 손해를 보았는데도 감사를 합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감사를 합니다.
3) 은혜를 받으면 능력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위로부터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권능이 임합니다. 새 힘을 받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소멸되어 보십시오. 능력은커녕 모든 힘이 소진되어 신앙생활을 몹시 힘들어 합니다. 예수 믿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들을 보십시오. 날마다 독수리의 날개치고 올라가는 것처럼 비상을 합니다.
4) 은혜를 받으면 겸손하고 순종을 잘합니다.
은혜 받으면 하나님 앞에 언제나 예와 아멘으로 순종합니다. 그러나 은혜 받지 못해 보십시오. 교만하고 불순종을 사명처럼 합니다. 아직도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 고집대로 예수를 믿으려고 하고 자기 생각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또 자기 뜻에 맞지 아니하면 일하지 않습니다. 모임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믿음은 밑바닥으로 추락한 믿음입니다. 아마도 병든 믿음입니다.
5) 은혜를 받으면 성도의 매력이 있습니다.
은혜라는 말 “카리스”는 멋, 매력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은혜를 받아야 매력이 있고 멋이 있습니다. 은혜 받지 못한 성도들을 보면 성도의 매력이 없습니다. 모든 일에 부정적이고 불평불만이 많고 근심걱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심히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모든 일에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있으니 남이 볼 때에도 매력적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는 연세가 많으셔도 멋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 받지 못한 얼굴을 보십시오. 표가 납니다. 은혜를 받으면 건강의 복도 받고 삶이 윤택해 집니다. 우리 모두 은혜 충만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 6:1-2 / 김양인목사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회를 잘 붙들어 활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농부가 봄철에 씨 뿌릴 때 기회를 놓치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듯이, 우리 인생도 자기에게 주어지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잘 활용해야 보람 있게 살 수 있지, 기회를 놓치면 후회 막급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장발장 이야기로 유명한 소설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는 말하기를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자원은 기회라는 자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구원 받을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를 선용하는 것은 사회생활 뿐 아니라 구원을 받는데도 필요합니다. 구원은 누구나 받고 싶다고 아무 때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때가 있는데, 그 때를 놓치지 말고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죄 값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두 강도가 다 예수님을 욕하고 비웃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해 내라.”고 야유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편 강도가 마음에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대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자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 분이야말로 무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려 있는 시간은 두 강도에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강도를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 받을 은혜로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강도 중에 한 사람은 구원을 받았으나 다른 한 사람은 구원의 기회를 붙들지 못했습니다.
두 강도에게 똑같이 여섯 시간의 구원 받을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지 여섯 시간 만에 운명하셨으니까요. 마치, 불타는 건물 속에서 건물이 무너지기 직전에 구출 받은 것과 같이 아슬아슬한 순간에 한 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얼굴을 예수님께로 향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즉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구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그 마지막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곁에는 구원 받을 기회를 붙드는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젊은이들은 말하기를 “지금은 예수님을 믿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인생을 좀 더 즐기고 나중에 나이가 들면 믿을 깨요.”라고 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금은 사업이 바빠서 믿을 시간이 없습니다. 모임도 많고, 이것저것 할 일이 너무 많아 신앙생활을 위해 시간을 내지 못하겠습니다. 나중에 한가해 지면 믿지요.” 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믿겠다.’는 말처럼 자기 영혼에게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말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구원의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믿을 기회가 항상 있을 것처럼 생각되더라도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13)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고 했습니다. 또한 잠언 27장 1절에 이르기를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어느 부인이 교회로 전화를 해서 상담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습니다. “무슨 일인지 마음을 진정하시고 차분하게 말씀해 보세요” 그러자 그 부인이 묻기를 “교회에 나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라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그 부인의 집에 매주 교회소식지를 넣어 주는데, 거기 병을 고침 받았다는 간증이 실려 있는데 사실이냐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부인의 남편이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평소에 건강했는데 하루는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하면서 일찍 귀가를 했습니다. 감기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어서 큰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았더니 간암 말기라고 했습니다. 그 부인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남편을 살리기 위해 교회로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 부인과 남편이 교회에 등록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 남편은 몇 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록 고침 받지는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에 갔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저는 성령께서 그 부부에게 구원 받을 기회를 주셨다고 믿습니다. 물론, 성령님께서 구원 받을 기회를 주셨더라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성령의 감화에 순종하였기에 자기와 남편이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그것도 지금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전도할 때에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전해야 합니다.
어느 집사님이 자기 친구를 전도하려고 하나 정작 만나면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안부 차 전화를 했더니 그 친구가 외국 출장을 간다고 했습니다. 이 집사님은 공항에 환송하러 나가면서 오늘은 꼭 전도를 해야지 하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공항에 나가 보니 그 친구의 가족과 직장 동료들이 여러 명 나와 있어서 전도할 기회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지금은 전도하기에 적합하지가 않아. 나중에 귀국하거든 전도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그 친구를 본 마지막 기회가 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가 외국 출장 중에 심장마비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어진 기회를 붙들지 못한 것이 영영 기회를 놓친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믿지 않는 가족, 친지가 있거든 내일로 미루지 말고 담대하게 주님을 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른에게만 전도할 것이 아니라, 아동들과 청소년들도 전도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전하지 않으면 저 영혼이 멸망할 것이라고 하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였던 챨스 피니는 길거리를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영혼이 너무나 불쌍하게 생각되어 통곡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우리도 가져야 하겠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전도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부지런히 주님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일 받을 것이 아니라 오늘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은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다닌 지 삼년이 되고, 오년이 되고, 십년이 되었어도 은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습관적으로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하게 낮아진 마음이 되어서 주님 앞에 나아와야 은혜를 받습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설교를 들어도 은혜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은혜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이 원인일까요? 그것은 말씀을 듣는 각 사람의 마음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몸은 교회에 나와서 앉아 있지만 생각은 딴 곳에 가 있으면 설교가 귀에 들릴 리 만무합니다. 예배 시간에 은혜 받지 못하면 시간 낭비요,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제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도중에 아시아의 드로아에 잠시 머문 적이 있습니다. 주일날, 사도 바울은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성만찬을 나누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튿날 배로 떠나야 했으므로 가급적이면 한 말씀이라도 더 복음을 전해 주기 위해 밤중까지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성도들 역시 밤을 새워서라도 사도 바울의 강론을 듣고자 했습니다. 모든 성도가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데, 유두고라는 한 청년은 창에 걸터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의 강론이 길어지자 그만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내려가 보니 죽었습니다. 그 때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였더니 과연 그 청년이 소생했습니다. 유두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가 잘못되었습니다. 방안이 더워서 그랬다고 할지 몰라도 다락 난간에 걸터앉아서 설교를 듣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더구나 설교 시간에 졸은 것이 잘못입니다. 사도 바울이 설교를 오래 하기도 했지만 유두고에게는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을 은혜 받을 기회로 아는 성도들은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듣습니다.
♪“이 말씀 들은 사람 또 듣기 원하고
목말라 사모하니 그 말씀 진리라
주 예수 복된 말씀 생명과 진리라
내 맘의 갈급함을 다 채워주시네“
이 찬송 가사가 우리 모두의 간증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께 나와 은혜 받은 사람들에 대한 증언이 많이 나옵니다.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붙잡았다는 사실입니다. 거지 바디매오는 나면서부터 소경으로서 여리고에서 구걸로 연명했습니다. 때는 유월절이 한 주간 정도 남은지라 많은 사람이 여리고 거리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곁에 섰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나사렛 예수께서 이 길로 지나가신다.”고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평소에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들은 바가 있었습니다. 특히,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이야기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님께서 자기 앞을 지나신다는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시끄럽다. 잠잠하라.”고 꾸짖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그 기회를 두 번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어 서셔서 “저를 부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날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 평생소원이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은혜 받을 때를 놓치지 않은 바디매오의 적극적인 자세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55장 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였고, 시편 40편 1절에는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받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구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은혜를 사모하지도 않는데 은혜를 받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양식이 넉넉하다 보니 식량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북한 주민들은 양식이 부족해서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데 남한 주민들은 음식 귀한 줄을 모르고 낭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고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아끼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나라는 전국 어디를 가나 교회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라디오나 티비를 틀면 설교가 나오고 찬송가가 흘러나옵니다. 책방에 가면 얼마든지 성경, 찬송가를 비롯하여 기독교 서적을 살 수 있습니다. 은혜 받을 기회가 풍부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북에는 교회도 없고, 예배를 드릴 수도 없고, 성경책도 찾아 볼 수 없고, 찬송가도 부를 수 없습니다.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북한 지하 교회의 신자들이 얼마나 은혜를 사모하는지 말로 다할 수 없다고 합니다. 성경책이 귀해서 성경 구절을 수첩에 써 가지고 틈틈이 암기하는 방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한에는 은혜 받을 기회가 너무 흔하다 보니 기독교인들이 은혜의 소중함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가나안 교인이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한 때 교회 생활을 하였으나 무슨 이유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 그런 것은 이미 다 알고 있으며, 성경 말씀도 알만큼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알고는 있지만 그 심령에 은혜의 불이 꺼진 상태입니다. 비유하자면 불이 꺼진 난로와 같고, 타다 만 나무토막과 같아서 다시 은혜의 불을 붙이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6장에 이 같은 사람들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4)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7)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영적으로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건강한 성도는 항상 은혜에 대한 갈급함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의 양식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매끼마다 밥을 반깁니다. 그러나 병들면 입맛을 잃기 때문에 밥 냄새조차 맡기 싫어합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 들어도 새롭게 들리고 은혜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다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감격합니다. 이제 우리는 은혜 받을 기회가 많다고 해서 경홀히 여기지 말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다시없는 기회로 생각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은혜를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주님을 위해 일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일할 기회가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졌을 때 놓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합니다. 병원 심방을 가보면 새삼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성도 여러분, 건강하실 때 열심히 예배 생활에 힘쓰시고 주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몸이 아프면 주의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 가서 후회하면 늦습니다.
교회에서 맡은 직분이 있으십니까? 장로, 권사, 집사, 구역장, 성가대원, 교사 등등, 각자가 받은 직분을 소중히 알고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 교회는 화목하고 은혜로운 교회가 되고, 주님으로부터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큰 집에는 크고 작은 많은 그릇이 있듯이,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는 다양한 직분자들이 있습니다. 직분자들이 저마다 맡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해 나갈 때 교회가 든든하게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것에 감사하시고, 각자에게 주신 직분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일할 기회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고 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밤이 다가옵니다. 인생에 황혼이 다가오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습니다. 건강에 밤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병석에 누워 있으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밤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 바치고 싶어도 바칠 수가 없게 됩니다.
♪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즉시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이 찬송가처럼 우리는 지금 젊음이 있을 때, 지금 건강할 때, 지금 시간을 낼 수 있을 때, 지금 경제력이 있을 때, 주님의 일을 위해 충성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옥합채로 깨뜨려서 예수님께 부어드린 마리아의 헌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마리아의 헌신이 고귀한 것은 단순히 비싼 향유를 부어 드렸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렸을 뿐 아니라, 가장 적절한 기회를 포착하여 주님께 사랑을 나타냈다는 사실이 귀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 드린 다음 날 밤에,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붙잡혀 심문을 받으시고 날이 밝자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만약에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릴 마음이 생겼을 때 주저하고 망설였더라면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릴 기회를 영영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마리아를 보고 화를 내면서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마리아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마귀가 부하들과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마귀가 부하들에게 “인간들을 사로잡을 계략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한 악령이 말하기를 “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의심을 불어넣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우리는 그 전략을 오랫동안 써 왔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찾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악령이 말하기를 “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옥이 없다는 생각을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인간들을 안심시켜 놓고 지옥으로 끌고 오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마귀가 말하기를 “그 전략도 효과가 없어. 왜냐하면 인간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 자체를 무서운 지옥처럼 생각하므로 지옥이 없다는 말을 믿게 만들기가 어려울걸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악령이 말하기를 “나는 기독교인들에게 고난을 가해서 예수 믿으면 환난을 받는다는 인식을 심어주겠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마귀가 만류하기를 “그것은 우리가 완전히 실패했던 전략으로서 전혀 효과를 거둘 수 없네. 지난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여 보았지만 그 때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기꺼이 죽었지 않은가. 또 많은 사람이 그들을 본받아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를 결심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까지 한 구석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악령이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는 사람들에게 ‘서두를 것 없다. 천천히 믿자.’고 생각하게 만드는 전략을 사용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에 마귀는 손뼉을 치면서 외치기를 “그래. 바로 그거야! 우리가 바로 그 전략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멸망시켰다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마귀는 지금도 불신자들의 귀에다 “예수님을 믿더라도 지금 당장 믿을 것이 무어냐? 내일 믿으면 되지”라고 속삭여서 구원받을 기회를 놓치게 만듭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귀에다 “은혜 받을 날은 오늘 말고도 얼마든지 있으니 적당히 믿으라. 주님을 위해 헌신할 기회도 이번 말고 얼마든지 있으니 너무 서두를 것 없다.”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하시며,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13)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날은 오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주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면 어제 열심히 주님을 섬긴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데마는 어제까지 사도 바울을 도와 힘써 복음을 전하였지만 오늘 세상을 사랑하여 사명을 저버리고 사도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데마는 성경에 실패자로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제까지 교회를 잔해하던 포행자요 핍박자였으나 오늘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함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성경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항상 오늘을 중요시 여겨야 합니다. 오늘 구원받고, 오늘 전도하고, 오늘 은혜 받고, 오늘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그리고 지금, 주님께서 주신 은혜로운 기회를 포착하여 선용하는 성도님들에게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 받을만한 때
고후서 6:1-10 / 배의신목사
어느 젊은 그리스도인이 자선 기관에서 일하다가 사직서를 제출하고 나왔습니다. 동료들이 그에게 갑자기 사직한 사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내 자신이 염려되어 나왔을 뿐입니다. 더 있다가는 뼈에 때가 묻겠기에, 피부에 때가 묻었을 때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되어 사직한 것입니다.”
때, 기회라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내가 원하는 때나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전도서 11:1-2절에서 기회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현대어 성경입니다. “네 음식을 물 위로 띄워 보내라.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는 그것에 네게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네 재물을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네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무슨 재난이 닥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음식이 필요한 사람이 있거든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넉넉히 나누어 주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를 최대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미국 격언에도 ‘햇볕이 쨍쨍 났을 때 건초더미를 만들라.(Make hay while the sun shin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일이든지 그 일을 할 기회가 있다.’라는 뜻입니다. 좋은 기회가 찾아 왔을 때, 그 기회를 잘 선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세상일에서도 그러하지만, 영의 생명에 관한 일에는 더욱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일을 실속 없이 허송세월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본문 1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도 때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때와 기회를 어떻게 알고 잡을 수 있겠습니까?
※ 본문 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봅시다.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가르치며, 그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에는 각 지역의 실정에 맞는 복음을 강론하면서 ‘세속의 삶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라’라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특히, 고린도 교회가 있는 고린도 시는 잡다한 인종과 민족인 모여 사는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적 도시였습니다. 약 20만 명의 자유민이 있었고, 40만 명이 넘는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상업 도시였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향락이 극에 달했습니다. 예를 들면, 희랍에서는 최초로 로마의 검투사 경기를 수입했고, 아프로디테(비너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로 미와 사랑의 여신) 신전에는 수천 명의 매춘부가 있어서 음란의 도시였습니다. 이런 고린도 시를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때 방문하여, 1년 6개월을 체류하면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환경에 있는 고린도 교회는 당연히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너무도 강력한 향락과 부를 추구하는 환경을 벗어나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기도 하며, 위로도 하고, 하나님 나라에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지어야 한다는 상급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열정을 가지라고 가르칩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받을만한 때를 알고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총을 알고, 그 안에서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당면한 환경과 상황도 고린도 교회가 당면했던 것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 은혜 받을만한 때란, 무엇을 말합니까?
울산 동구의 현대자동차 공장이 들어서 있는 땅이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뻘밭이었고, 평당 몇백 원 정도였습니다. 만일 그곳에 그런 공장지대가 생길 줄 알았다면, 사람들이 그 땅을 사두지 않았겠습니까? 미국의 알래스카주는 1867년까지는 러시아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가치가 없는 땅으로 여겨 72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 팔았습니다. 처음에는 미국 의회도 ‘그 쓸모없는 땅을 720불이나 주고 살 필요가 없다.’라고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알래스카를 산 지 13년 만에, 무려 3억 달러가 넘는 황금이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욱이 오늘에는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엄청난 가치가 땅속에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알지 못하여,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720만 달러에 유혹되어 소중한 것을 스스로 버렸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앞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때와 기회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옛말에 “기회는 뒷머리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즉 기회는 지나가고 나면 잡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읽었던 전도서 11:1-2절의 말씀도 이처럼 소리 없이 지나가는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받을만한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 55:6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현대어 성경으로 봅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만나러 오셨을 때에 너희도 주님을 만나러 나오너라. 주께서 가까이 와 계실 때에 너희도 주님을 부르며 찾아라.” 그리고 본문 2절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 두 말씀에서 전하는 내용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를 말씀합니다. 즉 기회가 왔을 때 잡으라는 것입니다. 이로 보아 때 즉 기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말씀합니다. 전도서 3:1절에서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께서도 요한복음 2:4절에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셨으며, 마태복음 8:29절에서는 가다라 지방의 귀신들린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도 역시 예수님도 그리고 마귀도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말씀합니다.
이러한 모든 기한과 때 중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중요한 때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본문 2절의 말씀처럼 내게 주어지는 ‘은혜의 때’와 ‘구원의 때’가 있습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무 때나 낚시를 하지 않습니다. 날씨를 살피고, 날짜와 시간을 계산해서 물때를 찾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조류와 장소까지 세심하게 살핍니다. 이는 아무 곳이나 아무 때에나 물고기가 잡히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가 먹이 활동을 하는 시간이나 장소, 환경을 잘 알아야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이사하는 날을 정하거나 결혼과 큰일을 치르는 때를 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일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때를 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영원한 생명을 위한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때’입니다.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도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때’입니다. 본문 2절이 인용했던 이사야 49: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그리고 갈라디아서 4:4절에서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정하신 때에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때를 연구하고 찾아야 하며,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망설이지 말고 잡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3:44-45절에서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와 ‘진주를 구하는 장사 비유’를 통하여 이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고 자신의 때를 알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4: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처럼 은혜의 보좌가 있습니다. 이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의 관대함과 긍휼하심의 사랑이 작용하는 보좌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로 인정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기도로, 예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3-10절까지는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실질적인 신앙의 삶을 보여줍니다. 즉,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당한 많은 고난의 현장은, 생활 속에서 순종의 삶으로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로 향하는 예배와 기도는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받을만한 때는, 기도와 예배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때입니다.
지금, 세계의 정세를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십시오. 이렇게 환난과 어려운 환경이 닥칠 때는,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도 함께 주어집니다.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깨닫게 하시는 것은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나아가십시오. 순종하는 삶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가 부어집니다. 격변하는 시대를 사는 때에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여,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삶에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고후06장 1~2절 / 최성규목사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의 행위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수련도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고행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 위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위에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복을 받습니다.
많은 사람이 십자가, 방언, 신유 같이 특별한 것만 은혜로 생각합니다. 일상의 삶을 너무 당연하게만 여깁니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신 것, 아침에 해가 뜨고 밤에 해가 지는 것, 스승에게 배울 수 있는 것, 일터에서 일할 수 있는 것, 건강한 것, 성전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는 것 등, 많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만 여깁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서해 기름 유출 사고를 생각해봅시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복구되려면 10년도 넘게 걸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실은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귀한 은혜임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알아봄으로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에 감사하고 은혜 위에 은혜를 누리며 삽시다.
첫째, 은혜로 구원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이런 인간이 어찌 감히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복락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내 힘, 내 노력, 내 의지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한 부자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율법도 잘 지켰고, 영생에 대한 소망도 있었고, 예수님을 찾아 올 정도로 열정과 의지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주어진 은혜입니다(엡 2:8). 인간의 힘으로나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어떤 것으로도 구원에 관한한 절대절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로 인정하므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3절은 인간이 원수 마귀의 지배 아래 있다고 전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이미 죽은 자라고 전합니다. 죽을 존재가 아니라,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2:17). 그런데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와처럼 착각하면 안 됩니다. 눈이 있어도 시신경이 죽으면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살았다 하나 죽은 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위해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롬 3:23,24).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다시 삽니다. 영원히 살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왕노릇하게 됩니다(엡 2:5,6).
둘째, 은혜로 변화
구원받은 성도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가 변화되면 가족이 행복하고, 사회가 건강해지고, 나라가 발전합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은혜 받았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이는 ‘설교 말씀이 좋았다’, ‘가슴이 후련해졌다’, ‘능력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신분이 바뀌는 것처럼, 은혜를 받으면 인격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말과 생각과 인생의 목적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알기 전에 사울은 살기가 등등한 사람이었습니다(행 9:1).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났고,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었고, 예수 핍박자가 예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중요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을 분토와 같이 버렸습니다(빌 3:8).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습니다(행 20:24).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변화됩니다(고후 5:17).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내 힘으로 사람을 바꾸려고 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바꿔보려고 합니다. 부모가 자식의 버릇을 좀 고쳐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오직 예수 믿고 성령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 은혜가 임하면 옛 사람, 옛 습관이 다 물러가고 새 사람, 새 습관으로 변화됩니다(겔 11:19,20).
셋째, 은혜로 능력
사람들은 능력을 갖기 원합니다. 그래서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권력도 가지려고 합니다. 우리는 능력에 대해 바로 알아야 합니다. 능력의 원천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 있습니다(대하 20:6).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신 인간에게만 능력을 주셨습니다. 본능에 따라 사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능력으로 말미암아 발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성도에게 더 큰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 이름의 권능을 주셨습니다(막 16:17,18). 성령의 은사와 믿음의 힘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특권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능력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베드로는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부함과 가난함에 얽매이지 않고 사역을 했습니다(빌 4:12,13). 스데반은 말씀의 능력으로 순교의 면류관을 썼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종교 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구두 수선공이었던 무디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폐병 3기로 불과 3개월도 더 살 수 없다고 했을 때 예수를 믿고, 성령 받고, 병고침 받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순복음인천교회도 25년 전에 지하실에서 시작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의지함으로 교회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많은 영혼이 구원받게 되었고, 성경적 효 운동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약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크게 나타납니다(고후 12:10). 우리 모두 성령의 능력과 말씀의 권세로 충만한 삶을 삽시다.
넷째, 은혜로 축복
우리는 복 받아야 합니다. 복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저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신 28:13). 하나님은 때를 따라 복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돕기 원하십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은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은혜의 보좌를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감사하기만 하면, 구하기만 하면, 차고 넘치게 부어 주십니다. 우리는 주저할 이유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 부끄러워 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담대히 나아와 구하기를 원하십니다(히 4:16).
우리 모두 복 받읍시다. 복 달라고 구합시다. 좋으신 아버지는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십니다(잠 10:22). 우리는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재물 얻을 능력까지도 주셨습니다(신 8:18).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모두 복을 받고, 받은 복을 나누고, 받은 복으로 섬기며 살아갑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전 6:1)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합시다.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로 채우십니다(약 4:6).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사람
고후06장 1~2절 / 피종진목사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또 누가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화점에 가전제품, 주방기구, 의류 등 값비싼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어도 어떤 사람은 눈으로만 쇼핑하고 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돈을 주고 자기가 직접 사서 가져오기도 합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은혜 받은 것을 아무리 보고 들어도 자기가 은혜 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은혜’란 원어에 보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카리스),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또레아)이라는 뜻입니다. 값없이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많은 일 중에 하나님에 관한 일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도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역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일은 자기 혼자 일하고 자기 혼자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것도 되고, 어려운 일도 쉽게 풀립니다. 생각밖에 나타나는 사건이나 하나님만이 역사하시는 사건을 가리켜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기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일을 할 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반드시 감당할 수 있도록 역사해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요즘 내비게이션을 통해서 참 교훈을 많이 받습니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노선으로 운전하고 가다가 다른 길로 가게 되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된 지점에서 목표지점까지 찾아갈 수 있는 바른 길을 안내해줍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혹시 잘못하고 있으면 올바르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은혜로 역사해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둘째, 촉박한 세월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월의 촉박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와 은혜 받을 기회를 등한이 여기면 안됩니다. 은혜를 주시는 기회를 귀중히 여기고, 받은 은혜를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촉박한 세월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활용하여 하나님의 일에 충성할 때 더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요즘 우리는 베이징올림픽 경기를 통해서 불과 몇 초 사이에 승패가 좌우되어 희비가 엇갈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불안하고 부정적인 마음보다 기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이 대부분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은 성령이 충만할 때, 웃을 때, 먹을 때 생깁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항상 성령이 충만하고, 기쁨이 충만했으며, 성찬의 떡을 나누며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촉박한 세월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명에 충성하여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에 승리하면 모든 것에 자신감이 생기고,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충만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약 4:6). 사도 바울은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다고 했습니다(행 20:19). 그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써 겸손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항상 강조했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에게 친구가 많고, 항상 낮은데 있는 사람에게 은혜가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겸손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톨스토이는 “겸손하라, 진실로 겸손하라. 왜냐하면 인간인 그대는 위대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완성의 토대이다. 겸손한 사람보다 더 힘이 강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떠나서 신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무능하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추구하게 되고, 자기가 어리석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게 되며, 자기가 위험하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존재가 위대하게 보이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지혜가 있게 해주시고(잠 11:2), 소원을 들어주시며(시 10:17), 붙잡아주시고(시 147:6), 기쁨을 더해주시며(사 29:19), 영예를 얻게 해주신다(잠 29:23)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촉박한 세월과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고 사는 사람, 겸손한 사람이 되어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때
고후06장 1~2절 / 정필도목사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다만, 이것을 깨닫고 사는 사람이 있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신자이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불신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는 것,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것도 보통 은혜가 아닙니다. 비가 안 오면 농사를 다 망칩니다. 이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수천억, 수조 원이 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이것을 내려 주고 계십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일반 은혜라고 합니다. 그리고 특별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백성들에게만 주시는 은혜이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믿게 되는 은혜'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을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다 믿더라」고 하였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사람은 예수 믿는 은혜를 입어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국 시민이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복을 받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절대주권을 가진 하나님, 만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면 모든 복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이 복은 보통 복이 아닙니다. 참으로 귀한 복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이삭도 하나님이 함께 해주셔서 흉년 들었던 해에 백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해주시니까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할 때 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 요셉과 함께 해주시니까 범사에 형통한 자가 되고, 감옥에 들어갔지만,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에게 이런 복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함께 해주시니까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이길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하시니까 다윗은 항상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늘 믿고, 항상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깨닫든지 못 깨닫든지 주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언제나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로울 때도, 근심이 될 때도, 문제가 있을 때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앞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의논하고, 주님이 도우시도록 항상 그렇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어도 잘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은혜를 받고, 이 예배당을 떠날 때에도 세상으로 나가면 금방 은혜를 쏟아버리게 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유지하기도, 은혜 가운데 살기도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은혜를 받았다가도 세상에 나가면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라고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이 말씀은 은혜를 받았지만, 열매가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열매가 나타나야 하는 데 열매가 없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지만 행함이 없고, 감사가 없고, 변화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입니다. 자기는 은혜를 받아서 좋아하지만, 가족 안에서의 모습을 보면 자기 혼자만 좋고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말도 함부로 하고, 성질도 그대로 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무언가 달라져야 합니다. 소위 은혜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남편이나 아내를 전도하지 못하고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변화’가 없어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가만히 보면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성품, 마음, 생각, 가치관, 말, 얼굴모습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동을 줄 수가 없습니다.
'깨닫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간증을 하는데 불을 받았다고 하기도 하고, 주의 음성을 들었다고도 하고, 방언을 하게 되었다고도 하고,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도 합니다. 이것은 전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깨닫는 은혜’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자기 모습이 어떤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를 내가 받았음을 깨닫는 것, 이것을 깨달을 때 감사와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부러워하고, 행복해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생활, 가정생활, 직장생활을 이렇게 해야겠다,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선 안 된다고 하며, 자기 사명을 깨닫고 모든 일에 충성하는 일꾼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교회가 힘이 있고, 부흥이 되고, 천국과 같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깨닫는 은혜'보다 더 귀한 은혜는 '변화되는 은혜'입니다. 한국교회의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 믿은 지 오래되었는데,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강퍅하고, 교만하고, 큰소리치는지, 교회가 시끄럽고 교회에 암적인 존재가 되어 교회가 평안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얼마나 변화가 되었는지 악한 성품이 없어지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성품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 시간에 은혜를 많이 받고 나갔는데 주차장에 있던 자기 차에 문제가 생겼다고 주차 안내 봉사자의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질을 내는 사람이 "수고하십니다. 많이 힘드시죠?"라고 인사한다면, 사람들이 감동하고, 하나님이 감동하시고, 봉사자들의 마음이 기쁘고, 감동할 것입니다. 이 성품의 변화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마음의 변화로 마음 씀씀이가 달라지고, 생각의 변화가 있고, 말이 변하여 격려하는 말, 칭찬과 축복의 말을 해줍니다. 또, 얼굴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좋아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술이 좋고, 놀음하는 것이 좋고, 놀러다니는 것이 좋았는데 이제는 교회에 가는 것이 좋고, 예배드리는 것이 좋고, 기도하는 것이 좋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좋아집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아름다운 열매'인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은혜'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산 믿음인데, 이 '행함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만한 능력, 곧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행 1:8)」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귀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환난 시험을 이깁니다. 자기 자신을 이겨서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고 절제를 잘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을 돌리면서 삽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 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런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출애굽기 33장 19절에 하나님께서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반은혜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주시는 것이지만, 이 특별은혜는 아무에게나 베푸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부흥회 때 큰 은혜를 받으려면
첫째, 은혜 받겠다는 마음부터 가져야 합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편 107편 9절에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사모하면, 그 사모하는 자에게 만족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굶주린 자가 음식을 바라듯이 사모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 은혜를 받으려면 간구해야 합니다. 욥기 33장 26절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말미암아 기뻐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공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했습니다.
셋째, 결단을 해야 합니다. 어떤 희생을 해서라도 이번에는 꼭 은혜 받겠다는 결단, 이번 기회는 절대로 놓치지 않고 은혜를 받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뉴욕을 떠나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던 여객선 센트럴 아메리카호가 바다 한가운데서 고장이 나 배 안으로 물이 새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마침 부근을 지나던 배가 구조요청 신호를 보고 달려와서 사람들과 짐을 모두 자기 배에 옮겨 실으라고 연락을 했습니다. 그러자 여객선에서는 지금은 캄캄한 밤이라 사람들을 옮기려면 큰 혼란이 올 것이니, 우리가 고장을 고쳐보도록 하고 안 되면 아침이 밝으면 옮겨 싣겠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 배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그 여객선은 바다 밑으로 침몰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잠깐 기다려달라는 핑계를 하지 마십시오. 사정이 복잡하여 어두운 밤 같을수록 그리스도가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기회를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 받을 기회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은혜 받을 기회가 다시 오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기회가 올 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꼭 붙잡아야지, 머뭇머뭇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큰 성공을 거둔 로스차일드가 미국으로 사업을 확장하려고 했을 때, 어느 날 한 명의 부하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미국에 지점을 낼 생각인데 자네가 떠나려면 준비 기간이 얼마면 되겠나?"라고 물으니 그는 심각한 얼굴로 한 10일 정도 걸릴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정이 되면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고 또 다른 부하를 불렀습니다. 그는 한 3일 정도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 온 사람은 '지금 곧' 떠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는 그에게 "자네는 이제 샌프란시스코의 지점장일세."라고 임명하였습니다. 그 부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최고의 부자인 줄리어스 메이였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꼭 붙잡아야지 머뭇머뭇하고, 한 눈 팔고, 다른 생각을 하면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은혜를 받기 위해서 어떤 희생이라도 할 각오를 하시고 꼭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택시비가 들어도 새벽에 전부 참석하시고, 어떤 희생을 해서라도 참석해서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부흥회기간에 병원에 입원했다고 생각하시고, 만사를 제쳐놓고 은혜 받는 것에 주력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넷째, 겸손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다섯째,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한 번 기도해서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고 물러서면 안 됩니다. 시간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말씀에 은혜 받기 위해 노력해보십시오. 반드시 은혜 받을 줄 믿습니다.
여섯째, 깨닫는 대로 회개해야 합니다. 죄가 깨달아지는 데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회개하면 반드시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잠언 14장 9절에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가 깨달아지는 데로 회개하면 반드시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깨달아지는 대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깨달아지는 데로 순종하면 더 큰 은혜를 받습니다. 깨달아지는 대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가 깨달아지면 즉각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은혜받는 통로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고, 열매가 좋습니다. 둘째는 기도를 통하여 은혜를 받습니다. 셋째는 은혜를 받은 사람을 통하여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 받으신 분들이 간증을 할 때, 얼마나 은혜가 되고, 말씀에 은혜 받으신 분들이 은혜로운 메시지를 전할 때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번 부흥회는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큰 은혜를 받으신 한기홍 목사님을 통하여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참석만 잘하면 틀림없이 은혜 받을 줄 믿습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이번 기회에 큰 은혜를 받으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