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5: 21.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22. 가나안 여자 23.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2. 가나안 여자의 믿음 ( 15: 21-28. 막 7: 24-30 )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 21.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
두로와 시돈 지방은 이스라엘 북서쪽 국경 지역으로 원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땅이었다.
* 수 13: 6 – 또 레바논에서부터 미스르봇마임까지 산지의 모든 주민. 곧 모든 시돈 사람의 땅이라.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내가 명령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
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여기서 '거기'란 지금껏 영적 부정과 물질적 부정에 관해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였던 가버나움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고조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긴장을 직감하시고 유대인의 거주지와 헤롯의 관할권에서 벗어난 안전한 처소로 피하셨다.
예수의 활발했던 갈릴리 전도사역이(4: 12 – 15: 20) 끝나고 은거(retirement) 및 베레아 사역이 20: 34까지 계속된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수로부터 5, 60km 정도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나가셨다.
막 7: 24에 나타나 있는 '두로 지경'이라는 말 때문에 예수께서 실제 그 지역 내에 들어가셨느냐(Chrysostom) 아니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땅을 더럽게 생각하고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경계선 지역에만 가셨느냐? (Bengel) 하는 이론이 있다.
그러나 21절과 막 7: 31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이방지역으로 돌아가셨음이 분명하다.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신 예수께서는 복음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셨다.
마 15: 22. 가나안 여자 -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
주께 나아와 귀신 들린 자기 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친 가나안 여자는, 마가복음 7: 26에 보면, 헬라인이었고 수로보니게 족속이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신적 메시아로 믿었다고 보인다. 그는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고 두 번 더 그를 ‘주여’라고 불렀다(25, 27절).
‘주여’라는 말은 신적 호칭이며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라는 뜻이다. 그의 딸은 귀신으로 인한 정신적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부족한 자로 여기며 예수께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명령형 '이두'(*, '보라'는 뜻)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이어지는 사건의 독특함과 돌발적인 성격을 강조하려 했기 때문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1] 가나안 여자 하나가
막 7: 26에는 '수로보니게'(syrian phoenicia)라는 고유 명사를 사용해서 이 여인의 혈통이 시리아에 거주하는 페니키아인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본문에서는 그녀를 페니키아에 복속(服屬)되기 전의 고대 이름인 가나안족으로 언급하였다. 이는 마태가 그녀의 옛 조상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스라엘의 옛 원수의 자손이 축복을 받기 위해 유대인의 메시야에게로 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 막 7: 26 -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 민 13: 29 – 아말렉 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 인과 여부스 인과 아모리 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 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 삿 1: 30-33 – 30 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 31 아셀이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 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33 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
한편 2세기 말 콜레멘트(clement) 설교에 의하면 가나안 여인의 이름은 '유스타'(Justa)요, 그의 딸은 '베레니케'(Berenice)였다고 전한다.
2]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나오다'라고 하는 의미의 헬라어 '여셀두사'(*)는 가나안 여인이 자기가 살던 이방 땅에서 나와서 주님을 만나러 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집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나 혹은 그녀가 고향을 잠시 등지고 예수가 계신 곳으로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한다(Lohmeyer, Bonnard).
3] 주 다윗의 자손이여.
여인이 '주'란 말을 다윗의 자손이란 말과 결합시킨 것을 보면 이 여인은 '주'를 보다 고차적 의미 즉 메시야적 칭호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 마 12: 23 -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이 여인은 이스라엘의 메시아적 소망(所望)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 말들이 다윗 왕의 약속된 후손으로서의 예수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소문이 벌써 이곳까지 전파되어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부하였으나 그들이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들로 경멸하던 육체적인 불구자들(9: 27)과 이방인들이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알아보고 순종하였다.
그러나 그 여인이 유대교의 개종자였다고 할 만한 근거는 없다.
4]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나안 여인은 고통당하는 딸과 자신을 동일시(identity)하여 애끊는 심정으로 예수의 '자비의 심정'에 호소하고 있다.
그녀는 이방인으로서, 민족적 특권이나 공로를 내세울 수 없었다.
예수의 자비한 성품에만 기대했다.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절박한 사정을 호소한 것은 더욱 놀라운 사건이다. 실로 참된 구원을 소망하는 자는 이러한 인위적 장벽을 넘는 용기와 열심이 요구된다.
5]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여기서 '흉악하게'에 해당하는 원어 '카코스'(*)는 '위험할 만큼 해로운'이라는 뜻으로 딸의 치명적 병세를 나타내 준다.
그녀는 주위로부터 질병과 귀신과의 관계에 대하여 들은 바 있었던 것 같다.
마 15: 23.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
예수께서는 여자의 부르짖는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예수의 침묵은 거절이나 냉담의 감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
예수의 침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본문의 경우와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견해를 요구했을 때의 경우이다.
* 요 8: 6 -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본문의 경우에 예수의 침묵은 다음의 네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1) 뒤따르는 말씀(24절)으로 보아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불신과 이 이방 여인의 환영을 비교하시면서 생각에 잠기셨을 것이다.
(2) 이 여인이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자신을 부른 것과 비교하여
그것이 다만 예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아첨(阿諂)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참으로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는지 시험하시고 싶었을 것이다.
(3) 구속사의 전개는 유대인 중심이다.
구약은 유대인에게 주어졌다. (요 4: 22-26) 예수께서도 유대인으로 나셨다. 천국 복음도 유대인에게 먼저 전파되었다(10: 5-40).
* 요 4: 22-26 –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굴레를 벗어나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문제에 직면하시게 됨으로써 잠시 침묵이 필요하시게 된 것이다.
(4) 이방 여인의 인내와 믿음을 더욱 깊게 하시기 위해서다.
예수의 침묵을 통해서 우리는 귀중한 영적 교훈을 깨달을 수 있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 속에는
우리의 복음과 열성을 시험하시려는 의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우리의 간구가 쉽게 응답되지 않는다고 해서 곧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② 우리의 소망에 대한 주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잘못된 간구야 당연히 거부되는 것이지만 올바로 구한 간구는 하나님이 계획하심에 따라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
2]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제자들의 이 말이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말고 그냥 보내소서.'라든가 아니면 '그녀의 요구를 빨리 들어주고 보내소서.'(Meyer, Benoit)였든지 간에 이 말은 귀찮은 그 여자를 빨리 쫓아버리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이다.
침묵하는 예수 앞에 그들이 중재자로 나선 것은 그 여자에 대한 진정한 동정심(同情心)에서가 아니라 단순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