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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진 하늘, 새들의 군무 ‘탄성 절로’ |
들판에 가을이 찾아와 갈대숲을 이루고, 그 갈대숲이 바람에 고갯짓을 시작하면 하늘에는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까마득히 하늘 높은 곳을 점점이 메우는 기러기 떼다. 기러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가는 철새다. 기러기처럼 한철 지내고 가는 새도 있지만 잠깐 들렀다 가는 나그네새도 있다. 우리는 가을철새와 나그네새가 한곳에 모여 지내는 새들의 낙원으로 갔다. 우리나라의 유명 철새 도래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천수만 들판이다. 천수만은 태안반도와 서산 땅의 오목한 테두리다. 물이 얕아 ‘천수만(淺水灣)’이라고 불렸던 이곳을 1984년 제방을 막아 만든 곳이 그 이름도 유명한 서산간척지다. 4700만평에 이르는 이 간척지는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한 평씩 소유할 수 있을 만큼 넓다. 현대에서 경작을 주관할 때는 비행기로 볍씨 뿌리고 농약을 쳤고, 도정은 아예 논밭 한가운데 있는 도정공장에서 했다. 자연히 농약오염이 심하지 않은 낙곡(落穀)이 많고,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적요한 곳이었다. 철새들에게는 말 그대로 낙원이었다. 과연 천수만은 새들에게 평안한 휴양지였다. 찾아오는 새의 종류만 해도 290여종이 된다고 하니 말이다. 금잔디 같은 들판 너머로 수백 마리의 새 떼가 은하수처럼 하늘을 쓸고 지나기도 하고, 잔잔한 수면 위에 새 떼가 도도하게 앉아 있기도 한다. 이곳 간척지는 아직 개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새들을 위한 배려다. 이곳에서 10월25일부터 11월 말까지 철새기행전이 열렸다.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많다 보니, 서산시와 환경운동연합, 간척지 농민들이 합심하여 철새기행전을 연 것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투어버스를 운행했다. 투어버스에는 개인용 망원경이 비치되어 있고, 버스가 달리는 동안 구수한 서산 사투리로 새에 대해 설명해주는 도우미도 동승한다. 우리는 간월도 입구에서 떠나는 투어버스에 동승해보았다. 먼 들판에서 야유회를 벌이고 있는 새 떼를 망원경으로 끌어당겨 보려 하지만 시야가 흔들려 쉽지는 않다. 하지만 물가를 지날 때는 숨을 죽여야 할 정도로 새 떼 가까이를 지나가기도 한다. 버스가 일정한 속도로 지나가는 것에는 새들도 면역이 된 모양이다. 그러나 가끔은 강 건너에 앉은 새 떼를 망원경으로 건너다 볼 기회도 있다. 지정된 탐조구역에는 갈대로 만들어진 위장벽이 설치돼 있다. 멈춰 선 버스와 사람들을 가려주는 장치다. 사람들은 이 갈대 위장벽의 구멍에 개인 망원경을 설치하거나, 혹은 탐조지점에 비치된 80배율 망원경을 통해 새를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어린 가창오리 떼 사이에 사람 같기도 하고 산양 같기도 한 시커먼 것이 앉아서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다. 도우미의 설명을 들으니 매가 기러기 한 마리를 잡아먹는 중이란다. 물위에는 가창오리와 기러기가 가장 흔하다. 재갈매기가 간간이 섞여 있고, 붉은부리갈매기들이 물위에 하얗게 떠 있기도 한다. 천연기념물인 큰고니, 멸종 위기종인 노랑부리저어새, 날씬하고 눈부시게 흰 백로,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 등도 보인다. 새들은 사람을 천적으로 알고 두려워한다지만, 우리는 1시간 반이 걸리는 이 투어를 통해 새들의 아름다움과 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새들의 낙원인 서산간척지에서 나는 쌀은 저공해 곡식으로 서산의 대표상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새옹지마라 했던가, 새들에게 좋은 모이가 돼주었던 이 쌀로 인해 이제 새들의 휴식처가 훼손될지도 모른다. 간척지가 개인에게 분양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 영농인들이 자기 땅에 들어가겠다고 번다히 출입한다면 새들은 그곳에서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새가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가, 천수만 하늘 위를 까맣게 뒤덮은 새 떼를 보며 잠깐 생각에 잠긴다. 천수만 일대의 대표음식은 이곳에서 나는 쌀과 굴로 지은 굴밥이다. 유명한 간월도 어리굴젓이 미리 밥 위에 올려진 것이다. 쉽게 생굴을 얹은 돌솥밥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이것에 야채와 양념장을 넣고 비벼 먹는다. 쌀과 굴이 좋은 이곳만의 매력적인 음식이다. 대개 충청도 특유의 청국장과 함께 굴밥을 내는 집들이 많은데, 이런 집들은 주말이면 자리가 없어서 한참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소문이 났다. |
천수만에서 서쪽으로 더 나아가면 안면도가 나온다. 굴밥으로 배를 불렸으면 안면도의 소나무숲을 거닐며 산소와 솔향을 흠뻑 들이마시며 소화시킬 만하다. 소나무만으로 이루어진 흔하지 않은 숲에는 들어서는 초입부터 상서로운 향이 가득하다. 산이 전체적으로 편안해서 한가롭게 걸을 만한 숲이다. 이리저리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도 한 시간 안팎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낙엽송 이파리가 떨어져 푹신하고 아늑한 길은 사진 한 방 박기에도 그만이다. 붉어진 해가 소나무 다리 언저리를 물들일 때쯤 서둘러 가야 할 곳이 있다. 이곳은 명색이 서해다. 바다에 떨어지는 해에게 작별인사를 하지 않고 떠날 수야 있나. 안면도의 꽃지해수욕장으로 달려간다. 바람이 비질을 해놓은 듯한 바다에는 해가 이미 붉게 익어 있고, 청한 바다에는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가 마주 서 있다. 운 좋게 날씨가 맑은 날이면 할미섬 뒤로 선명하게 붉어진 노을빛에 한참 취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소나무가 음영을 드러내는 할미섬 가장자리에 걸린 달도 더없이 서정적이다. 주변의 굴밥집서 별미도 만끽 서울 방향으로 향하는 이들이라면 서산 땅에 들러 나그네새처럼 잠시 지친 몸을 쉬며 배를 불려도 좋으리라. 서산의 토속음식인 ‘게국찌’를 하는 곳이다. 게국찌란 이곳에서 담근 ‘꽃게장 국물로 간을 한 김치찌개’다. 김치는 시고 게장은 국물만 남은 봄날, 버리기 아까운 게장 국물에 김치를 썰어 넣고 끓여낸 것이다. 게국찌를 먹기 위해 서산시내 ‘진국집’(041-665-7091)에 갔다. 간판도 쉬 눈에 띄지 않는 뒷골목의 허름한 단층건물인 식당은 그나마 주차장 담벼락에 허리께까지 가려져 있다. 아는 사람만 알고 찾아가는 유서 깊은 집답다. 유리가 끼워진 미세기(두 짝을 한편으로 밀어 겹쳐서 여닫는 문)를 밀고 들어서니 따뜻한 방이 불을 환히 밝히고 손을 맞는다. 이 집의 차림은 딱 한 가지다. 그저 몇 사람이 먹을 것인지만 말하면 그만이다. 이윽고 양은쟁반 가득 반찬이 담겨 나온다. 쟁반 한가운데 놓인 조치 그릇만 해도 네 가지다. 게국찌, 시래기된장찌개, 김치찌개, 계란찜. 거기에 빙 두른 느타리볶음, 각종 나물무침, 파래무침, 도라지오이무침, 콩나물무침, 새우볶음 등등이 푸짐하다. 언뜻 외갓집에 온 듯한 착각이 드는 밥상이다. 게국찌는 짜디짜면서도 웅숭깊은 맛이 난다. 시래기를 가득 넣어 끓인 된장찌개의 구수함이라니, 배가 이미 다 찼는데도 입은 수저를 계속 불러들인다. 밥을 거의 다 먹을 무렵 “이것 좀 먹어봐” 하면서 주인 아주머니가 덤으로 내주는 음식이 돼지뼈를 넣고 끓인 되비지찌개다. 옛날 이야기 같은 맛이랄까. 그 맛에 홀려 밥공기가 이미 비었는데도 자꾸 찌개를 떠먹게 된다. 이쯤 되면 내 생의 한 끼를 이렇듯 따뜻이 먹여준 것에 대해 고마움까지 느끼게 된다. 사람도 철새도 배불려 떠나는 곳이 서산인가! 해 짧은 초겨울, 한나절을 들여 한 나들이로 추억 보따리가 ‘이따만해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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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