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다녀와서
때는 1966년, 공주교대를 졸업하고 호기롭게 해병대에 지원하여 근무하던 나는 청룡부대로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군함은 컸지만 너른 태평양의 파도를 견디기는 너무 작았다. 아침 배식을 먹고 다시 뒤에 가서 줄을 서서 점심을 얻어먹고 다시 뒤로 가서 줄을 서서 저녁 배식을 얻어먹으면 하루가 다 갔다. 흔들거리는 배 위에서 멀미를 하는 친구도 숱하고 어지럼증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 만에 도착한 곳이 다낭항이었다.
다낭은 우리의 38선과 같은 위치로 남북 베트남으로 나뉘어지는 분기점이었다. 미 군함의 기착지요, 북베트남(베트콩)으로 향하는 전진기지였다.
다낭에 도착한 바로 그날 저녁에 미처 군장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모두가 잔뜩 겁에 질려서 참호에 엎드려 하늘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아댔다. 나만 맞지 안을려고 쏘고 또 쏘았다. 하늘에는 빨간 불빛만 날아다녔다.
두 시간여를 그렇게 쏘아댔으나 양측의 사상자는 없었다.
어이없게도 상대는 미군이었다.
서로의 정보 부족으로 상대를 오인한 것이었다.
이렇게 도착한 월남 땅에서 나트랑으로 투이호아로 전전하면서 각종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주말이나 휴가가 주어지면 사이공 남쪽 해변 휴장지 붕따우에서 맘껏 놀기도 했다.
그리고 67년에 제대를 하고 첫 부임지가 풍기중학교였다.
눈에는 살기가 일었고, 정글화를 신고 수업을 하였다. 아카시 나무를 목침처럼 굵고 짧게 잘라서 ‘월남 방맹이’라고 들고 다녔다. 꿇어앉히고 그걸로 한방 찍히면 걸음을 걸을 수가 없다. (실제로 우리 선배 하나는 좀 까불다가 집으로 엎혀가기도 했다). 수업 중에 오답을 말하면, ‘똥을 사라!’ ‘똥싸고 있네.’라고 핀찬을 주기가 십상이었다.
위의 이야기는 중학교 때 수학을 가르쳤던 박신기 선생님의 이야기다.
크게 유능한 선생으로 기억되진 않지만 나와는 특별한 인연으로 이어가고 있다. 올해 86세.
이제는 근력이 다하여 내 말소리를 알아듣기 어려워 하시고 나도 잘 알아듣기 어렵다. 작년에도 두어 번 통화를 했다.
월남에 대한 작은 쪼가리 지식은 옛날에 모두 그 선생님으로부터 듣고 또 들은 것이었다.
그런 월남땅에 지난주에 첨으로 여행을 떠났다.
양양에서 하노이로 가는 것이니, 뱅기도 하나 뿐이라 줄을 설 필요도 없고 기다릴 것도 없으니, 인천 공항 보다는 백 배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왕복 모두 밤에 떠나서 새벽에 도착하니 호텔비는 절약되지만, 잠이 부족하여 짧은 거리(4시간 비행, 시차는 2시간 늦음)임에도 시차가 심하게 느껴졌다.
베트남(Viet Nam)은 흔히 베트남(Vietnam)이라 쓰고 부르지만, 이는 바른 표기법이 아니다.
공식적으론 그렇게 하지만, 비엣(Viet) 남(nam)이 바른 표현법이다. 즉 비엣족이 사는 남쪽 땅이란 뜻이다. 남은 글짜 그대로 南쪽을 뜻하니, 중국 한자어와 같고 우리말과도 같다.
끙 깡 땃하는 비음은 태국이나 미안마등 동남아 쪽 보다는 심하지 않고 우리처럼 한자말을 거의 우리말처럼 사용한다.
예를 들어 하롱베이(Ha Long bay)라는 유명한 관광지의 하롱은 용이 내려와서 생겼다는 전설에 기인한 것데, 下龍을 중국식으로 부르면 ‘시아룽’이고 우리말은 하룡이고, 베트남어로는 하롱이라 부르는 식이다. 베트남의 국부라 할 수 있는 胡志明도 중국 원음은 ‘후쯔밍’이요 우리는 호지명이고 베트남에서는 호치밍으로 부른다. 집이나 건물도 Quan(콴)으로 부르는데, 한자어 館에서 유래하였고, 우리도 식당이나 공공 건물을 ,,,관이라 한다.
한자어와 한자어 사이에 베트남어가 들어가니 이는 우리와 꼭 같다.
천년을 중국의 지배하에 월(越)나라로 살아왔고, 인도지나 반도를 안남(安南)이라 했기에 월남(越南)이 되었고, 한자어의 영향은 크지만, 중국이나 한자어를 몹시 싫어하여, 글자는 알파벳에 액센트를 붙혀서 쓴다. 明나라가 무너지고 청의 세력이 닿지 않던 서구의 대항해시대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1945년 호지명이 하노이에서 독립을 선언할 때까지 백년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왔기에 불어처럼 알파벳 문자(로마자) 아래, 또는 위에 액센트(accent, 불어로는 악상)를 붙이니, ^나~, 점, ` , `의 반대, ?에서 점이 없는 부호, 작은 s자를 붙이고 성조(聲調)로 표시한다. 중국어의 성조는 4가지이나, 베트남어는 6가지나 되니, 외국인이 습득하기 어려운 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모여서 떠들 때 중국어만큼 시끄럽게 들리지는 않는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 동쪽에 위치하고 태국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나라다.
중국 광동어와 북경어처럼 남북 사람이 말이 잘 통하지 않을 정도다. 이제는 메스컴의 발달로 그 차이가 좁혀지긴 했지만.
그 나라의 길이는 칠레 다음이고, 한반도 길이의 3배이며, 면적도 두배나 된다. 중국에 접해있는 북베트남은 어렴풋하나마 몇 계절이 있으나 남베트남은 사철 아열대기후이며, 습도가 아주 높고 비가 잦다.
어디나 물이 풍부하고 기온이 높아서 2~3모작 벼 재배가 가능하며 나처럼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민물이나 바다에서 누구나 어느 때나 낚시를 할 수 있는 낚시천국이다.
그 기나긴 해변을 생각해보라!
쌀은 풍부하고, 안남미라 하여 장립종(長粒種)으로 기름기가 적어서 소화가 잘된다. 그래서 비만한 사람이 없고 위장병이 잘 생기지 않는다.
월남전 때, 몸집이 작은 그들은 작은 구멍을 뚫고 땅굴을 파서 들락거리면서 미군을 괴롭혔고, 땅굴위에 폭탄만 퍼부어댄 미군은 결국 아무 소득없이 퇴각하고 말았다. 체구가 큰 미군은 작은 땅굴 구멍을 들락거릴 수가 없었다. 결국 안남미와 작은 체구가 베트남을 살린 셈이다.
1973년 미군과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패전하고 철군을 하였고 그들은 통일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들은 공산치하에서 일치단결하여 부흥을 이루어나갔다.
자국민은 철저히 보호하며 어떠한 외국기업도 그들 기업과 합작하지 않으면 사업 허가를 받을 수 없게 하였고, 외국 물품에는 많은 관세를 물게하여 국부를 쌓고 나라 살림에 보탰다.
그리하여 동남아 국가 중에서 매년 경제 성장이 8%를 넘을 만큼 성장하고 있다.
통킹만에서는 석유도 생산한다.
그들의 부와 자원을 탐하여, 혹은 정치적인 이유로 침략한 중국이나 프랑스, 심지어는 가장 최근에 전쟁을 치뤘던 미국이나 한국에 대하여 어떤 보복이나 배상 또는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용서함으로써 나라가 대승(大乘)의 정치를 하고, 중국 프랑스 미국 한국을 물리친 정신으로 국민의 긍지는 높고 비루(鄙陋)하지 않다.
베트남에서 먹고 마시고 논 얘기는 쓰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 등에는 갈 기회가 많았으나, 이상하게도 베트남은 갈 기회가 없었다.
가서 본 경치 따위를 늘어놓으면 이미 가 본 사람에게는 싱거울 것이고, 아직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김을 빼는 것 밖에 되지 않으니, 내가 가서 느낀 소회를 적은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아는 대로 적어보았다.
모두에게 유익한 정보가 되기를 바라며!!
癸卯 春分이 지난 閏 이월에
강릉에서 豊 江
첫댓글 항상 우리에게 좋은 글로 영양을 공급하시는 후배님 고맙습니다.
큐티 누님 고맙고 반갑습니다. 형님도 잘 계시지요?
제 자랑이 아니라, 불과 3일의 체류기간 동안 많이 느끼고 배운 것 같습니다. 고맙다 (땡큐)를 뭐라하나 물어보니 '깜은'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생각해낸게
感恩에서 나온거라 생각해냈지요. 이렇게 알아가면서 여행하는 방법도 있지요. 술마시고 구경하는 거야 누구나 다 하는 일이지만.
4월 초에 풍기 갑니다만 뵐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저도 몇 년 전 막내딸이 생일 축하해준다고
둘이서 다낭을 다녀왔지요..
모든 걸 떠나서 막내딸과 둘이라는 것에
의미있는 행복한 여행이었습니다.
오실 때 반듯이 전화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한번도 반가운 마음 전하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에
죄송했습니다..
꼭 한번 다녀가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