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참마속'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삼국시대, 촉의 '제갈량'은 대의와 공평무사를 위해 아꼈던 부하 '마속'의 목을 벴다.
당시는 선왕이었던 '유비'가 죽고 그의 아들인 '유선'이 보위를 이은 후였으며 촉나라 내부의 3대 파벌인 '형주파', '동주파', '익주파'의 갈등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위기였다.
강력한 법치주의의 정착과 엄정한 군령을 위해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원칙을 어긴 '마속'의 목을 베면서 '제갈량'은 통한의 눈물을 쏟았다.
리더의 숙명이었다.
그래서 '곡참'이 아니라 '읍참'이 된 것이었다.
'곡'은 눈물 없이 소리만 요란한 울음이지만 '읍'은 소리 없이 뜨거운 눈물을 쏟는 애끓는 울음이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은 그렇게 유래되었다.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이 한마디는 너무나도 신선했다.
그리고 국민들은 그에게 엄청난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그의 결기와 기백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권좌에 앉은지 3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평생 동안 타인의 범죄를 재단하며 서슬퍼런 '검찰권력' 안에서 마음껏 종횡했던 사람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측근들의 비리엔 눈 감고 귀 닫는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국민들은 절망했다.
국격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AI 4차 산업혁명시대'에 시대를 관통하는 어젠다를 제시하지도 못한 채 정쟁으로 날이 새고 날이 졌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방향성 조차 잃은 듯했다.
리더는 자신에겐 한없이 엄격해야 한다.
그대신 타인에겐 상대적으로 너그러우며 포용적이고 타협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2년 몇 개월 동안 그를 지켜본 결과 그런 기대는 무참하게 깨졌다.
그는 반대로 갔다.
그 탓에 국민들은 좌절했다.
정치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위국헌신'이라는 리더의 본분과 자질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나는 '민주당'과 '국힘당'의 진영 논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바로 '좌정관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 각국은 새로운 시대를 향해 무섭게 질주하고 있는데 우리는 늘 정쟁과 밥그릇 싸움에 바쁘다.
이전투구다.
정말로 진절머리가 난다.
자고로 사람은 고쳐쓰지 못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자신의 가족과 측근들이 온갖 비리와 무책임의 온상이며 악취가 풍기는데도 그는 모른 체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은 다 알고 있는데 구중심처에 있는 그들만 모른단 말인가.
이젠 지쳤고 역겹다.
어젯밤, '국회청원'에 나와 내 아내도 동참했다.
어떤 법적 효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제발 정신 좀 똑바로 차리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리더라면 리더답게 '대도무문', '위국헌신', '읍참마속'의 자세로 혼신을 다해 국정에 임하라고 일갈고 싶었다.
어느 당을 지지하고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는 지는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닐 터였다.
민생은 어렵고 길은 짙은 안개속에 잠겼다.
위기다.
위기 앞에 지도자는 보이지 않고 약장수들의 나팔소리만 요란하다.
지금은 정치적 성향이나 현 정권에 대한 호,불호 따위를 따질 계제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사막에 강을 내고, 광야에 길을 뚫는 지도자의 혜안과 결단 그리고 용기를 요청하는 것 뿐이다.
2년 몇 개월이 흘렀는데 과연 무엇을 개혁했고, 무엇을 혁신하려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오리무중이다.
쓸데 없는 가십거리나 권좌유지에 천착해 천금 같은 세월을 허비하지 말고 새시대를 예비하는 지도자의 '선택과 집중'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의 임기 내에 준비된 리더로서의 결기를 우리 국민들이 단 한번이라도 체감할 수 있을까.
이 간절한 소망이 조금이라도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그나마 실낱 같은 희망의 불빛이 자꾸만 껴지려 한다.
슬프고 아리다.
과연 이 나라에 누가 있어, 그에게 대한민국의 내일을 물어 볼 수 있을까.
천금 같은 시간만 속절 없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