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를 권하노니(2)
고후 6:1-10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설 교 >
은혜받았습니다
이정익목사 / 고후 6:1-2
어떤 학생이 큰 아버지 회갑 날 “회갑잔치 축하드립니다” 하고 인사를 해야 하는데 회갑이라는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아 ”육갑잔치 축하드립니다” 하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구역식구가 아들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심방을 갔는데 “식물인간”이라는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아서 “아드님이 야채인간이 되어서 어떻게 하지요”하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언어나 단어의 사용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나 수준이나 삶의 내용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대화에서 그 사람의 직업이나 관심사항이 무엇인지 신앙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는 “은혜”라는 단어라고 합니다. “은혜받았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은혜”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생각으로는 알겠는데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곡해가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가 참 은혜로웠습니다”고 말합니다. “설교가 어땠는데?” 하고 물으면 “너무 웃겨서, 아주 짧아서 은혜로웠다”고 합니다. 모두 은혜라는 말을 잘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을 보면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합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도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오늘은 구원의 날이로다.”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여 신앙이 잘 정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이간하며 복음을 왜곡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의 신앙이 흔들리고 염려가 되었습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속상한 일이 이간자들이 와서 현혹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들이 신앙이 흔들립니다. 얼마나 속상한 일입니까. 바울이 그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십자가의 도가 주어졌는데 지금 현혹자들에 의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경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여기서 은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은혜”라는 말을 헬라어로 “카리스(charis)라는 말입니다. 이 카리스와 가까운 단어가 “카라”(chara)인데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유카리스테오”(eucharisteo) 라는 말도 “감사”라는 뜻입니다. 모두 “카리스”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받았다”라는 말 속에는 이 기쁨과 감사가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상
“은혜”라는 말은 “공짜, 무상, 조건 없는 증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조건 없는 증여이고 공짜라는 말입니다. 오늘 세상 모든 것에는 다 조건이 들어 있습니다. 뇌물도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불의한 재물로 다스립니다. 쉽게 말하면 공짜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이 은혜에 가장 가까운 단어는 부모의 은혜이고 스승의 은혜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여기에도 약간의 조건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배은망덕이라는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호의 즉 선물이란 뜻입니다. 예를 들면 마리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그 시대 비천계급이었고 빈천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녀가 선택되어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은혜를 입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찜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로 마리아는 졸지에 “은혜 받은 자”(누가복음2장30절)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보면 마리아 뿐 아니고 나 자신도 그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도 선택받아 구원받고 성별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왜 나를 선택하셨는가 하면 나도 모릅니다. 내가 주님을 알기도 전에 주님은 나를 알고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신앙입니다.
나눔
사도행전4장33~35절을 보면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으로 ... 나누어 줌이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결과는 변화입니다. 그 변화는 나눔으로 유무상통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독점이 아니고 나눔이고 증여이고 배품 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나누고 베풀고 너를 향한 철학을 발휘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나, 우리 집, 내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 사람이 많으면 그 공동체는 죽어갑니다. 그런데 은혜 받은 사람은 나눕니다. 그 나눔 중에서 가장 좋은 나눔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나누는 유무상통의 상징입니다.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독점하는 것입니다. 지식인의 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 그것이 독점이고 지식인이 짓는 죄입니다. 이미 먼저 믿은 사람이 전하지 않으면 그것도 직무유기이고 독점이고 그리스도인이 짓는 죄입니다. 복음은 가장 좋은 것이고 그래서 굿 뉴스라고 말합니다. 그 굿 뉴스를 전하지 않으면 직무를 유기하는 것입니다. 저 소말리아 해협에서 우리 해군이 해적선을 물리쳤습니다. 국민 모두가 빨리 알아야 할 고급정보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언론사중 하나가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러고도 살아남겠습니까. 그것은 직무유기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내가 받은 은혜를 나누고 전하는 생활입니다. 그것이 유무상통의 삶이고 그것이 은혜 받은 삶입니다.
감사
은혜라는 말은 사도바울이 많이 사용한 말입니다. 로마서에서 20회, 고린도전후서에서 223회, 다른 서신서에서 48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택함 받은 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부름 받은 것도, 믿음을 갖게 된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 것도, 고난 중에서 건짐 받은 것도, 풍부와 넉넉함과 성공만 은혜는 아니고 때로 결핍도 은혜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몸에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더니 “내 은혜가 족하니 그대로 살라(고린도후서12장9절)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풍부와 건강만 은혜가 아니고 결핍도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영광이나 성공이나 승리만 은혜가 아니고 때로 고난도 은혜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도 은혜이고 부족함도 은혜입니다. 오늘은 너무 풍성을 추구하고 성공과 현실만 지향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온갖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부작용이 비만으로 나타납니다. 정신의 비만으로, 생각의 비만으로, 마음의 비만으로, 육신의 비만으로 나타납니다. 오늘은 이 비만이 큰 문제입니다. 공원에 가 보면 걷기도 힘든 분들이 기우뚱거리며 걷느라고 애를 씁니다. 그런다고 비만이 사라집니까. 비만은 굶어야 빠집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굶지를 못합니다. 놓아야 하고 포기해야 하는데 놓치를 못합니다. 불가마에 가 보면 사람들이 반 죽어가면서도 나오지 않고 땀을 흘리고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나와서는 또 식혜를 한 그릇씩 마십니다. 못 말립니다. 오늘은 너무 많아서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제입니다. 어떤 부자는 너무 가진 것이 많아서 도적들이 집에 들어올까 봐 모든 패물을 은행 금고에 넣어 두고 일주일에 한번 씩 면회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반드시 많은 것만 은혜가 아닙니다. 때로 적음도 가난도 은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삶이고 환경이라면 모두가 은혜 일 뿐입니다. 역설이지만 그래서 약한 것이 강할 때가 있습니다. 혀와 이빨이 싸우면 반드시 혀가 이깁니다. 그것이 약함의 강함입니다. 여성들이 약한 것 같지만 결국에 가 보면 모든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이끌려 가게 됩니다. 여성들이 왜 약합니까. 유사시가 되어 보십시오. 여성들이 얼마나 강하고 질기고 모질깁니까.
생각을 좀 깊이 해 보면 반드시 많은 것만 은혜가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건강한 것만 은혜도 아닙니다. 때로 적은 것이 은혜일 때가 있습니다. 약한 것이 은혜일 때도 있습니다. 시력이 2.0인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피곤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성격이 완벽한 사람은 피곤해서 함께 살아가기가 힘듭니다. 너무 잘 익은 곡식은 거두기 전에 다 떨어져버립니다. 그래서 곡식을 추수할 때는 약간 덜 익었을 때 하는 것입니다. 완벽한 외모를 가진 분들은 교회에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미인들이 없습니다. 조금 약한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도 강한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눈물이 있고 무릎을 꿇고 금식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는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하여 주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눈물을 쏟으므로 다시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매일 밤 침상을 적시는 눈물을 흘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부름을 받았습니다.
축복
은혜라는 말은 축복의 언어입니다. 서신서를 보면 사도바울은 말미에서 “은혜와 평강이 있을찌어다”하고 이 은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편지를 쓸 때는 편지 말미에 인사를 하게 되는데 그 인사가 대부분 강녕, 평안, 건강기원이 대부분 입니다. 사도바울은 “은혜와 평강”입니다. 더 예민하게 서신서를 보면 상대가 헬라 사람들일 경우에는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헬라인은 이방인으로서 구원받은 것이 순전히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대가 유대인인 경우에는 “평강”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평강이라는 말은 살롬이라는 말인데 살롬은 유대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헬라인이 함께 혼재한 경우에는 “은혜와 평강”을 함께 구사했습니다. 그래서 은혜는 축복의 단어입니다. 미국인들은 마지막 헤어지며 인사할 때에는 "God bless you"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은혜는 축복의 언어입니다. 우리 입에서도 가능하면 많이 이 말이, 단어가,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선물
본문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귀한 하나님의 은혜의 값을 모르면 값싼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은혜에도 두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는 소위 내 기도가 중심이 되는 은혜를 구하는 일입니다. 지극히 나 개인 중심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중심이 된 은혜를 구하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복음전하는 자 됨을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값비싼 은혜입니다. 그런데 오늘 대부분은 값싼 은혜를 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자 본 훼퍼는 이런 은혜를 “값싼 은혜”(cheap grace)라고 말했습니다. 값싼 은혜라는 말은 본 훼퍼가 세속의 권력에 붙어있던 당시의 독일교회의 안일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사용한 말입니다. 권력에 붙어살면서 그때마다 평안을 누리려는 당시 독일교회의 태도가 값싼 은혜를 구하는 모습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것이 짝퉁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성장한 교회, 수단이 난무하는 오늘의 목회, 요행위주의 신앙들, 축복위주의 기도, 이모두가 짝퉁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나 생명을 주관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풍부도 적음도 불행도 성공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로 알고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가난도 적음도 실패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불행한 역사도 그 배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미국의 어느 부부가 뉴욕에 있는 무역센터에 가기 위해서 비행장으로 가던 도중에 타이어가 펑크 나서 교체하느라 시간이 늦어져 비행기를 놓쳤습니다. 그때 그 부부는 속이 상하였을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이 순간에 펑크가 나고 비행기를 놓치게 하는가 생각할수록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 부부는 몇 시간 후에 뉴욕 무역센터가 불타고 있다는 뉴스를 듣게 됩니다.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그만 911테러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을 알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뉴욕에 사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서 그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당시 소방관이었는데 그 소식을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사고현장에서 인명을 구조하다가 빌딩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또 웬일입니까. 이것이 은혜인가 불행한 일입니까. 아들 부부는 자신들이 구출되는 은혜에 감사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죽음으로 다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순간 이 부부는 자신들을 살려주신 하나님은 왜 또 아버지를 불러가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대 혼란이 왔습니다. 게다가 불행한 것은 아버지가 그때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의문으로 혼돈을 겪는 동안 3개월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갓난아이를 안은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임신 7개월 때 무역센터에 근무 중 이었는데 그만 911 사고가 발생하였고 급히 아래층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그때 사망한 그 소방관 아버지가 그 부인을 부축해서 아래층까지 내려오는 것을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또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다시 건물로 올라가다가 건물이 무너질 때 사고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또 말해 주었습니다. 그 여인이 함께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그 아버지에게 전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아십니까?” “아직 믿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러자 “그럼 자식들도 믿고 있으니 나도 예수를 믿겠다”고 해서 계단을 내려오던 중 서로 손을 잡고 영접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을 아래까지 무사히 내려다 주고 또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올라갔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있고 3개월 후에 이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 이름을 사고를 당한 그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었다면서 아이를 데리고 온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바람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때 예수도 영접하고 또 무사히 봉사하고 집으로 돌아와 오늘 그 사람들과 그 아이를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 편에서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의 드라마는 쓰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감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더 큰 감동을 주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때로는 십자가도 지우시는 것입니다. 해적들에게 피랍된 선장이 총에 맞아 오늘 사경을 헤매기 때문에 그의 헌신이 세상에 더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이 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이 시대에 십자가를 지신 분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으나 살고 죽으나 더 감사하고 그 죽음을 우리는 은혜로 받아들이고 은혜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카리스”라고 합니다. 이 카리스의 은혜는 감사이고 기쁨이고 무조건 주심이고 나눔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이고 이유입니다.
구원의 날, 은혜의 때
고후06장 1~2절 / 이규현목사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핵심적인 단어가 있다면 “은혜”와 “구원”일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기초이면서 동시에 중심 골격입니다. 구원과 은혜가 흔들리면 인생이 흔들려 신앙이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도 은혜와 구원이라는 바탕 위에 서 있습니다. 견고한 교회는 구원과 은혜가 가장 강력하게 역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 의해 세워진 고린도교회도 처음에는 복음의 기초 위에 세워졌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것들이 강조되고 혼란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안에 구원과 은혜의 역사가 희미해져 가고, 무엇보다 구원이나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고 뼈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는 믿음이 있는가를 스스로 확인해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지만 자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구원 받은 자인가, 진정한 신앙인인가, 핵심적인 진리가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흔들릴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내 안에 예수가 있는가?”라고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라고 고린도교회 안에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세기에만 해도 기독교의 교리가 완전히 정리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이단과 거짓된 가르침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안으로 들어오라고 안타까움과 애정 어린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본문 2절은 이사야서의 인용인데 눈에 띄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은혜’와 ‘구원’, 바로 신앙의 핵심 키워드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이 이 두 단어 안에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구원과 은혜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죄 사함, 영생, 천국 등을 포함하지만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총체적이고 광범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풍성한 것이 구원입니다. 그 구원을 우리에게 안겨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집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 편에서 노력하거나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원을 어떻게 얻는가는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구원의 근거를 우리 편에서 찾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편에서 할 일은 딱 하나, 그냥 기쁨으로 받으면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간단한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오랜 수고와 희생을 다하신 일들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에 반응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바울은 “보라, 보라”하고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보라, 지금 은혜를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 구원의 날이로다.” 이것은 마치 팡파레를 울리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선포입니다. 구약 시대만 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사건들과 성전제도, 제사제도 등은 상징적이고, 실체보다는 그림자입니다.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는 사건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예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구원이 일부의 사람이나 민족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열방의 모든 사람에게 드러난 것이 되었습니다. 모호한 것이 아니라 확연하게 드러났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은 무제한적으로 부어졌습니다. 너무도 풍성합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전에는 가랑비처럼 살짝 뿌려지는 것이었다면 신약시대는 태풍을 동반한 장맛비처럼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조금만 마음 문을 열면 은혜가 스며들어 폭포수 같이 밀려드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강력하고 풍성하기 때문에 거절하거나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태를 말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를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그분이 오셔서 은혜가 도래했고 구원의 날이 임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고 했습니다. 남녀노소 모든 사람,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심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의 때, 구원의 날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제한이 없습니다. 구원과 은혜를 받는 일이 전혀 까다롭거나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진리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은혜의 때, 구원의 날이라는 말은 고기가 물속에서 물을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때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상태입니다. 어떻게 보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 더 어려운 때이고,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고 말씀했던 실체가 나타난 것입니다. 메시아가 실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독생자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약이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약속이 성취되었고 오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약을 바라보니 구약이 훤히 이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말씀만 들을 때는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것처럼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옛 삶은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구원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쳐 구원의 진리가 명료하게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만 열면 하나님의 은혜가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오게 됩니다. 지금도 한 사람이 구원을 얻고자 마음을 열기만 하면 말씀을 들을 기회가 너무 많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가 닫혀 있어 듣기 어려운 시대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주옥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먼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전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조금의 관심만 가지면 됩니다. 내가 조금만 마음을 열면 하나님의 폭포수 같은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구원이나 은혜에 관한 한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이미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구원과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냉담함, 무관심입니다. 영적 세계에 대한 닫힌 마음보다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닫힌 마음, 영적 세계에 대한 무덤덤함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기회가 주어졌다는 말은 다른 편에서는 기회가 곧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나 은혜의 시혜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때’라는 말 안에는 위급함, 긴박성, 시급함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에는 늘 이런 긴박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종말 사상에 근거합니다. 기회가 늘 주어지는 것이라면 기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끝도 없이 주어지는 기회란 없습니다. ‘때’란 한시성이 있습니다. 그 ‘때’를 놓치면 끝입니다. “때”라는 말 안에는 사랑과 경고가 같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좋은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이런 시간들이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은 역사적, 개인적, 환경적으로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지금 행복한 순간이든 고통스러운 순간이든 중요한 것은 지나가고 있는 한 때입니다. 인간의 생명이란 한순간입니다. “때”와 “날”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끝”하시면 끝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베풀 때 받아야 합니다. 내가 시간을 조정을 할 수 없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나의 결심이 중요하고 나의 의지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결심이나 의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정확히 맞추지 않으면 모든 것은 허사로 돌아갑니다. 구원에 대한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기회는 주시고 또 주시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거두실 때가 있습니다. 은혜의 때가 끝나는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열 가지 재앙을 내리던 날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 일은 구원의 순간에 주어진 명령입니다. 그러나 흑암이 깊어지고 재앙이 덮칠 바로 그때는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때는 영원히 그 시간이 지속될 것처럼 보이지만 그 “때”가 지나면 “황급히, 몰아치듯”, “아무도 저항할 수 없이”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물의 심판에 대한 예고는 120년 동안이나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120년 동안 방주를 짓게 하신 것은 방주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너무도 인내하셔서 아무 일도 안 하시고 동작이 느린 분처럼 여겨지지만, 하나님은 결코 느린 분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맹렬하게 급하게 모든 것을 종료하십니다. 문이 열려있을 때는 영원히 열려있을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닫히는 순간이 옵니다. 한번 닫히면 누구도 그 문을 열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나 은혜는 주실 때 받아야 합니다. 내가 구원의 시간을 임의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일로 미루는 것처럼 미련한 일은 없습니다. ‘언젠가, 다음에’ 그 내일은 나의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도 “은혜는 다음에”는 없습니다. 어떤 젊은 학생이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용건을 마치고 나가는 학생에게 교수가 전도를 했습니다. “학생, 예수 믿기 바라네.” 그러자 학생은 “교수님, 저는 아직 젊은데 나중에 죽기 전에나 믿고 구원을 얻을까 하는데요?” 하자, 교수는 “그것 참 좋은 생각이네. 그런데 학생이 언제 죽을지 아는가?” 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나의 삶에 다가오는 때에 대한 반응입니다. 지혜와 통찰력이 무엇입니까? 때를 아는 것입니다. 성공이 무엇입니까? 때를 맞추는 것입니다. 누가 은혜를 받습니까? “때”를 알고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삶이란 선택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선택은 “때”에 대한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때를 알고 반응해야 합니다. 주님은 늘 때를 의식하셨습니다.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 “때가 차매” 모두 때와 관련해서 움직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무지는 때에 대한 분별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말로는 철이 안 들었다고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서 마리아가 주님의 발치에 앉아있었던 것과 마르다가 주님에게 대접하기 위해 일한 것 중에 어떤 것이 좋은 일입니까? 마리아가 주님의 칭찬을 받은 것은 지금 이 순간, 가장 좋은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열 처녀의 비유를 보면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차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때를 놓친 것입니다. 누가 은혜를 받습니까?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림입니다. 후회하는 지점에 가보면 틀림없이 대부분 “때”와 연관이 있습니다. 때가 지나도 괜찮은 것도 있습니다. 열차가 지나가면 다음 열차가 옵니다. 백화점에 세일이 끝나도 또 세일하는 날이 옵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이 말하는 것은 지금 내게 주어진 기회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태도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지금 주어진 기회, 오늘 이 시기, 이 시대, 나에게, 오늘 이 시점과 순간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을 가지고 믿음의 태도를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때는 항상 있지 않습니다. 가장 미련한 일은 주어진 절호의 기회를 붙잡지 않고 내일로 미루는 것입니다.
때를 놓치지 않으려면 은혜에 대해 열려진 태도가 필요합니다. 은혜가 있는 곳을 적극적으로 찾고 사모해야 합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거리와 시간이 신앙생활의 기준이 아닙니다. 은혜가 넘치는 곳이라면 아무리 멀어도 다닙니다. 아니면 집을 옮깁니다. 영적인 일을 위해 남다른 관심과 적극성을 가져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어진 때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고 했습니다. 때를 놓치면 헛되이 받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시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아야 할 때 받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엄청난 낭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사건과 은혜의 사건을 날마다 경험하십시오. 물 없이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성도는 은혜로 삽니다. 은혜는 우리의 실력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베푸셔서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과거나 제자로 살 때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아도 소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로 사도행전의 주역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한마디로 “모든 은혜의 하나님(벧전5:10)”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어떤 인물이든 하나님은 고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아니면 야곱이 어떻게 이스라엘이 되었겠습니까.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의 역사들이 그들의 삶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은혜의 힘입니다. 은혜란 내가 예상하지 않았던 일들을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독특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힘들 때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면 힘이 듭니다. 봉사를 어떻게 내 힘으로 하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순교를 한다 해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순교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주시고, 하늘의 소망을 붙들어 주실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힘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목회도 성도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은혜를 줄 수 없습니다. 설교도 설교준비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하고, 전할 때도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성도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의 위력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모든 것은 내 실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종결됩니다. 우리는 지금 그야말로 은혜의 때, 구원의 날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반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와 중국, 인도에서 강력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도무지 믿을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부적을 태우고 신주단지를 깨뜨리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지금도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반응하기만 하면 은혜는 제한 없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은혜의 때, 구원의 날입니다.
구원이라는 단어처럼 흥분되는 단어가 없습니다. 구원 안에 숨겨진 의미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구원 안에 우리의 진짜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광대하고 풍성해서 우리가 다 받아들일 수 없지만 우리의 갈증, 궁핍, 절망적 상태를 더 걷어내기에 충분한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일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모습이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자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나의 상태와 형편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조금만 열고 주어진 이 기회에 반응하기만 하면, 폭포수 같은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너무도 강력해서 저항할 수 없고, 주체할 수 없는 구원의 황홀함 속에 빠져있는 성도들을 볼 때 은혜의 날, 구원의 날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사탄은 활짝 열려진 하나님의 은혜보다 다른 거짓된 진리, 다른 복음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 바울은 “구원에는 조건이 없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이미 이루어놓으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기만 하십시오.”라고 외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를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저는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 가운데 한 분도 은혜의 사각지대에 있는 분이 없고, 모두가 구원의 경험을 얻기 바랍니다. 이미 드러난 진리, 내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진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 있는 이 시대에 구원과 은혜를 못 받는다면 그것처럼 억울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더듬거리거나 헷갈리거나 다른 것을 바라볼 이유도 없다. 너무도 분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와 진리가 있는데 무엇을 주저하고 있느냐” 이제 새로운 대로가 열렸습니다. 어쩌면 은혜를 받지 않는 것이 어려운 때입니다. 다른 것을 놓친다 해도 이것만은 놓치지 않는 은혜가 있기 바랍니다. 은혜의 시대, 마음껏 구원의 복을 누리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항상 기뻐하며 모든 것을 가진 자
고후06장 1~10절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 첫 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합니다. 이 말의 뜻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그 바로 앞에 쓴 5:19-21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과 함께 볼 때 본문 1절 상반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한 말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권면하라고 부탁하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1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죄인 삼으시며 우리는 그로 인하여 의인으로 인정받게 하실 뿐 아니라 이 놀라운 화목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도록 사도를 통해서 권면하시고 간청하시는 그 엄청난 은혜를 베푸시는데 그 은혜가 헛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자체는 받아들이기만 하면 헛될 수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받는다는 말은 아마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으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를 전하는 복음을 배척하거나 귀로만 듣고 응답하지 않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내세우셔서 부탁하신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권면과 간청을 외면하거나 불순종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이 화목의 복음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간절한 생각을 한 사도 바울은 그 당위성과 시급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49:8에서의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사도 바울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될 때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이르렀다고 쓰며 이 은혜의 때, 구원의 날을 헛되이 지나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들을 때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듣는 것 자체도 은혜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만 그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듣고 이에 응답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자신의 직분으로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구원의 복음을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에게 전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자신의 직분이며, 그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이고, 하나님께서 친히 부탁하신 일이며,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는 일이라는 확신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 직분을 수행하기 위한 비범한 자세를 취하게 하였다고 봅니다. 그가 그의 직분을 어떻게 대하며 수행했는지를 보여주는 글이 본문 3-8절입니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첫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의 직분이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지 않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본문 3절 상반절). 그리고 비방을 받지 않기 위해서 무슨 일에 있어서나 그 누구에게도 거리낌이 되지 않으려 했습니다(본문 3절 하반절). 또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했습니다(본문 4절 상반절). 억지로 마지못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숱한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 어려움들이란 어떤 것이었는지를 본문 4절 하반절과 5절이 보여주는데 곧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이었습니다. 이런 고난은 아무나 다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감격하며 변화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스스로를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을 받은 자로 여기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의 직분이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지 않고 무슨 일에 있어서나 그 누구에게도 거리낌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온갖 고난을 견딜 뿐 아니라 그 직분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 또는 힘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본문 6-8절 상반절이 보여줍니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이러한 도구 또는 힘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직분을 바르게 수행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신 무기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구원의 복음을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에게 전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자신에게 주신 직분으로 여기고, 그 직분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는 일로 확신하는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은 항상 기뻐하며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8절 하반절부터 봅니다: “...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사도 바울은 거짓말쟁이라는 비방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사도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또 무명한 자 즉 사도의 자격이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자라는 헐뜯는 소리도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15:9)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으며, 둘째는 성도들로부터 열두 사도들을 능가하는 사도, 전도자, 신학자, 교회개척자, 교회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후세에 길이 남는 하나님나라의 일꾼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는 여러 모로 죽은 자 같았습니다. 실제로 돌에 맞는 등 죽을 뻔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며 세상적인 욕망이나 소유가 전혀 없는 삶을 살았고 끊임없는 비방과 모략과 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에 살았으나 죽은 자같이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죽은 자 같았으나 그 누구보다도 살아있었습니다. 하나님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의 소망과 확신 가운데 살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수많은 이들을 구원에로 인도하며 영생의 소망을 갖게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뿐 아니라 늘 온갖 위험에 놓이곤 했기 때문에 많은 근심에 싸여있는 자 같았으나 항상 기뻐할 수 있었고 자기 자신은 가난한 자 같았으나 많은 사람을 영적으로 부요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뜻에서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였던 것입니다. 실로 오직 하나님의 일만 하며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맡기고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현세에서는 박해를 받더라도 내세에 영생을 받을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은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사람일 뿐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사도 바울의 말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 온갖 비방과 고난을 당하며 죽은 자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 앞에서 자랑할 것을 다 버리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실로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지만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온갖 근심으로 가득 찰 것 같았지만 그는 항상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에게는 본문 1절에서 보듯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의 확고한 소명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본문 3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또한 그 무슨 일에서든 그 누구에게든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는 단호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원하여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힘든 일을 감당하면서고 세상의 꾀를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본문 6-7절에서 보는 대로 하나님의 일을 오직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했습니다. 본문 8절에서는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주의 일을 하며 “영광과 욕됨으로” 하고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주의 일을 하며 때로는 영광을 얻을 때도 있고 욕을 먹을 때도 있지만 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 나쁜 소문을 들을 수도 있고 좋은 소문을 들을 수도 있지만 그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그만을 의지하며 행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일꾼들이라면 우리 또한 사도 바울의 그러한 삶의 자세를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에게도 항상 기뻐하며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살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
은혜를 받자!
고후06장 1~10절 / 최낙중목사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1-10>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일반적 은혜이니, 우리 예수님께서 마 5:45절에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게 하심이라. 이런 일반적 은혜는 신자나 불신자나,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모두에게 다 허락한 은혜를 일반적 은혜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특별한 은혜를 허락하시는데 이것은 사람이 죄사함 받고 영생 천국에 들어가는 은혜인데 이것은 아무나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은 사람은 심판과 정죄에 빠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 베푸심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었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하심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죄와 우리가 지은 자범죄를 예수님의 피가 다 사해 주신 줄 믿습니다.
그 흘린 피가 우리 죄를 사했으니 그 은혜를 인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 은혜와 구원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라는 말, 희랍어 원어에 카리스라는 말은 법이 정한 것 이상으로 베푸는 호의와 친절을 말합니다. 사람이 법을 지켜 살아가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법만 갖고 살면 사람이 딱딱합니다. 그러나 그 법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은혜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산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은혜는 따뜻함이고 후덕한 것이고 인애라고 말할 수 있고, 넘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아름다운 것이고, 매력적인 것이고 은혜는 더없이 좋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좋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사람이 있다고 주님은 가르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바울이 다른 지방에 있을 때, 바울에 의해서 세워진 고린도 교회 안에 거짓 교사, 이단 사상을 가지고 들어온 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울을 일컬어 속이는 자요, 사기꾼이요, 미친 사람이니 그 사람 말 듣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 적지 않은 분파가 생겨서, 바울이 진짜라고 하는 사람, 바울보다는 바나바가 낫다고 하는 사람, 바나바나 바울보다는 게바 즉 베드로가 훨씬 낫다고 하는 사람, 누가 뭐라 해도 예수님이 최고라고 우기는 사람 등 교회 안에 네 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가 되어야 할 교회가 네 파로 갈라졌으니 은혜를 헛되이 받은 사람들로 인해서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방언을 말합니다. 예언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붙들고 기도하니 병자가 고쳐졌습니다. 능력 행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보면 열매는 좋지 못했습니다. 은혜를 헛되게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 바르게 받아서 바르게 살고, 하나님 약속을 받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사람을 일컬어 은혜를 바로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누구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입니다.
여기서 거리낌이라는 말은 거슬려 부딪히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사람들 앞에 걸림돌로 나타나서 남을 넘어지게 합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은 사람은 마귀에게 쓰임을 받되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실족합니다. 그 사람 보기 싫어서 교회 나오고 싶지 않습니다. 그 사람만 보면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헛되이 받은 사람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은혜를 바르게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우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바로 세우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불손한 언행으로 다른 사람 마음에 상처 주는 일입니다. 은혜 되지 못하고 걸림돌이 되는, 교회 부흥에 걸림돌이 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한다고 하는데 결국은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아니고, 자기 잇속 채우는 일이고, 그래서 결국은 사람들 마음에 상처주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이런 일이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고린도교회에만 있는 일이 아니고 오늘날 교회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은혜를 바르게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됩니다. 그 사람 때문에 힘을 얻고, 그 사람 때문에 위로 받고, 그 사람 때문에 용기 얻으며, 그 사람 때문에 신바람 난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디딤돌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의심은 사라지고 믿음이 생기고, 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용기가 나고 새 힘을 얻는다. 거리낌이 없고 오히려 넘어지는 사람을 붙잡아 일으켜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은혜를 바르게 받은 사람입니다.
두번째, 은혜를 바르게 받은 사람은 오래 참습니다.
바울은 4-5절에서,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참았다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난 당합니까? 누구 때문에 이렇게 매맞아야 합니까?
누구 때문에 감옥에 끌려갑니까? 전도를 위해서, 복음을 통해서, 안 믿는 영혼 구원해 보려고 하다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고난 가운데는 죄때문에 하나님의 채찍, 형벌로 오는 고난이 있고, 선한 일을 위해서 당하는 가치 있는 고난이 있는데, 은혜 제대로 받은 사람은 죄짓고 고난 당하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과 수치는 기쁨으로 감수합니다. 그것이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의 모습인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수치와 고난을 받을 때 참을 수 있는 힘도 은혜입니다. 그 참을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소망 때문입니다. 소망이 무엇입니까? 희망입니다. 희망이 무엇입니까? 지금은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좋은 일이 있다, 그것이 소망입니다.
성을 지키는 파수꾼이 졸리고 피곤해도 아침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근무교대시간을 기다리는 파수꾼은 깨어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앙상한 가지만 가지고 서 있는 나무들을 보셨습니까? 그들은 기다립니다. 이 혹독한 겨울의 찬바람이 지나가면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 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우리 몸에 새 움이 돋겠지, 혹독한 추위를 견딜 수 있는 것은 봄을 기다리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그 많은 시련과 연단을 당하는데도 불구하고 참을 수 있었던 힘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이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이 소망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고난 당하는 일인데도 고난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쁨으로 십자가 질 수 있었던 힘, 그것은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2:2절 말씀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서 그냥 자기 혼자 편안한 쪽으로 선택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은 길거리로 전도하러 나갑니다. 전도하다가 뺨도 맞고, 욕도 얻어먹고, 발로 채이기도 합니다. 그때 즐거워 할 수 있는 사람이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 마지막 말씀이 무엇이니까? 천국에 들어갈 자격자, 의를 위해서 핍박받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십시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은혜 받아 방언하고 예언하고 병고치는 일도 다 좋은 일입니다. 그것이 전도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을 복된 고난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기를 원하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히 10:36절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그리고 약 1: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은혜를 제대로 받은 바울의 간증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내용은, 내가 은혜 받기 전에는 이 고난 당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로마의 시민권자라는 것을 자랑하고 다닐 때, 내가 유대교 대제사장들에게 신임받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을 때, 나에겐 고난이 없고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 성령 받고 난 이후, 전도를 시작할 때부터 나에게는 매맞음이 있었고, 배고픔이 있었고, 추위를 견뎌야 했고, 자지 못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닮고 싶은 생각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안 믿는 영혼을 구원해 보려고 전도하다 보니까 나에 대해서 오해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비방도 당했고, 사기꾼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참고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러면 복된 고난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난이 올 때 남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예수님 생각하고 참으십시오. 주님께서 보상해 줄 날이 반드시 옵니다.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했으니, 우리가 고난 가운데 참을 수 있는 것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참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은 인내력이 대단합니다.
세번째로, 은혜 받은 사람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 받은 사람을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능력없이 참고 견디는 사람은 병이 납니다. 정신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을 때는 승리자가 되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기쁨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 핍박을 이겨내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겠습니까?
첫째는 성결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 속에 하나님의 성령의 새 술이 임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십시오. 하나님 앞에나, 양심 앞에, 교인들 앞에서 한번 부끄러움 없이 살아 보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의 속에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적은 아무에게나 나타나지 않습니다. 요단강물이 그치고 강이 마른 땅처럼 되어서 건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 3:4절 이하 말씀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기사와 이적은 한계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지만, 그러나 기사와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깨끗한 사람인줄로 믿습니다.
두번째 기도하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역대하 16:9절 말씀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120여명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심으로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9:13절 이후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눅 11:13절 이하에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기도하십시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위로부터 내려와야 되는데 그 능력은 지난 날 바르게 살지 못한 죄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런 능력, 그런 지혜가 임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얻은 것은 하나님께 일천번제 드리고 지혜를 구하니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구하면 주십니다. 찾으면 만나지게 하겠다,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열리게 하리라. 주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많이 저장하십시오.
눅 1:37절 말씀 보면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마귀와 대적하여 이기기 위해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라. 복있는 사람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로다.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여 고기를 잡았던 베드로를 기억하십시오. 성결한 자, 기도 많이 하는 자, 말씀을 많이 가진 사람 속에는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있고, 유혹을 단호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고, 환난과 핍박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은혜 받은 사람의 모습인줄로 믿습니다.
네 번째로,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은 자비를 베풉니다.
자비라는 말은 죄인이나, 약한 자, 병든 자나 가난한 사람, 즉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그를 구원해 주는 행위를 자비라고 말합니다. 이 자비는 예수님이 베푸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서 있던 것 다 빼앗기고 거반 죽게 되었는데 그를 구원해 준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가 베푼 행위를 자비를 베푼 자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비가 무엇입니까?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자기가 갖고 있던 포도주와 기름을 붓고 싸매고 자기는 걸어가고 그는 짐승에 태워서 자기가 수고하고 주막으로 데려가서 있던 데나리온 다 털어주며 부탁하고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을테니 이 사람 꼭 살려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사람을 자비를 베푼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은혜는 거저 받았습니다. 은사도 거저 받았습니다. 직분도 그냥 받은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여러분, 가슴속에 인간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면 사랑을 주게 되어있습니다. 용서해 주고,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고, 붙잡아 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주는 것입니다.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 4:32절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남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나님은 제사보다 예배드리는 것보다 자비 베푸는 것을 더 원하신다고 하였으니 바울의 생애는 오직 자비 베푸는 일로 마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시니 그가 전도할 때 사람의 지혜로운 말로 전도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나타남으로 큰 확신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하였습니다. 살전 1:5절 말씀에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에게도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권세가 따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난의 언덕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비를 베푸십시오.
은과 금이 없어 불쌍한 사람에게 돈으로 구제는 못할 지라도 예수 없는 사람 가슴속에 마귀 운동장으로 내어놓는 그 마음이 너무 안타까워 예수를 전해주는 그것만이 가장 큰 자비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의 모습들을 보면, 거짓없이 형제를 사랑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 은혜 제대로 받은 사람은 거짓이 없습니다. 진실합니다. 거짓이 없는 사람은 주님의 사람입니다. 제한적이지 않고 이기적이지도 않고 무한한 것입니다. 자기 이익 챙기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거짓없이 사랑합니다. 얘가 아프면 그냥 자기가 대신 아파주고 싶습니다. 울면 젖을 먹여주고 추우면 옷을 입혀 줍니다. 우리 예수님이 가르쳐준 제일 큰 사랑,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그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랑은 주님이 날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달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얼마만큼 우리를 사랑했습니까?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놓고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되 죽기까지 사랑하면,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가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롬 8:37절 이하에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고전 15:57절에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이에게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주 안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은 줄을 우리가 앎이니라.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그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당대에 받지 못하면 자손대에 만대까지 복을 주시고 영세 천국에 가서 상급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일곱번째로, 은혜로 제대로 받은 사람의 모습은 이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됩니다.
본문 8-10절 말씀에,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속이는 자로 근심하는 자로, 가난한 자로, 아무것도 없는 자로 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불신자의 눈에는 바울이 속이는 자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형편없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 믿는 성도들과 하나님의 눈에는 더없이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은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서로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다는 대로 하면 신앙생활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술 마시자고 할 때 그렇게 하면 핍박받을 일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대로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제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자는 대로 안 하니까 미쳤다며 비판하는 것입니다.
상반된 평가를 받는 것이 바로 은혜 제대로 받은 모습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이유를 아느냐?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내게 속한 너희도 미워한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내게 속한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마귀가 싫어하고 미워한 만큼 하나님은 더 좋아하고 더 사랑합니다.
바울을 놓고 어떤 사람은 속이는 자, 사기꾼,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바울을 위해서라면 눈이라도 빼어주고 싶었습니다.
바울이 꼭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보였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받으면 그분이 너무나 좋습니다. 사랑스럽고 가까이하고 싶고, 얼굴만 봐도 신바람이 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 때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얼굴만 보면 딴 데로 눈길을 돌리고 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참 비참한 인생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은 시간과 목적을 제대로 압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목적이 돈 많이 벌고 명예 지위 얻고 1등 되는 것이 목표인데,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목표는 거기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대상이 될까 거기에 목적이 있고, 돈 많이 벌고 명예 지위 얻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렇게 정리가 됩니다. 그러다 보니 누구를 시기하거나 질투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성악가 조수미가 이탈리아 산타 세칠리아라는 음악원에서 유학할 때의 일입니다.
그는 유학 온지 1년반만에 핀란드콩쿠르에 참가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언론은 그녀가 최연소자이긴 하지만 가장 뛰어난 가창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승할 것이라고 기대했고, 그를 가르치는 선생님도 너는 꼭 우승할 거야 하고 용기를 주었는데 막상 그 대회에 출전했지만 그는 우승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너무나 실망이 되어 노래를 부르고 싶지가 않아서 4개월이나 노래를 쉬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시 노래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준 교훈 때문이었습니다.
수미야, 내가 너더러 언제 우승하라고 하더냐, 일등이 목표가 아니다. 너는 노래를 좀 사랑해라. 노래는 아름다운 것이잖니. 그 한마디에 알았어요. 나는 일등을 목표로 하지 않고 노래를 사랑할래요. 즐겁게 부를게요. 그래서 열심히 노래를 즐기면서 불렀더니 전세계적인 성악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목적을 두어야지, 1등하는데 목적을 두면 안됩니다.
1등하면 좋지만 1등상을 안 줘도 좋아야 합니다. 그게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이 1등했기 때문에 교만해서 신앙생활 할 수 없다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꼴등해서 예수 믿었다면 그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은 가치체계가 정리됩니다. 유명한 사람, 똑똑한 사람, 잘 난 사람, 소위 난 사람이 되는 것이 여러분의 목표입니까? 안됩니다. 그것은 목표일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꼬, 그것만이 목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은혜 제대로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아홉번째,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의 모습은 하나님 말씀 앞에 네 하고 순종합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와서 세상이 너무 죄악으로 관영하다.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감히 세상 불신자 딸들을 자기 눈에 좋은대로 아내를 삼고 있으니 내가 인생 지음을 후회하고 한탄하노라.
120년후에 내가 이 땅을 홍수로 쓸어버리겠다. 그러니 너는 산에 올라가 잣나무로 방주를 짓되 삼층으로 지어라. 그랬을 때 창세기 6장 말씀에 보면 노아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시킨 대로 다 준행하였다고 했습니다.
방주가 완성되었다고 했더니 홍수로 모든 것이 다 죽고 난 이후에 다시 이 땅에 짐승들이 번성할 수 있도록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내가 정한대로 짝을 지어 방주 안으로 들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노아는 다시 네 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은 일곱쌍을 들이라고 했을 때 일곱쌍을 들였고, 어떤 짐승은 두쌍만 들이라 했을 때 두쌍만 들였지, 두쌍 들이라고 한 것을 일곱쌍 들이거나 일곱쌍 들이라고 한 것을 귀찮다고 다섯쌍만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도 다 준행하였더라.
은혜 받은 사람들은 자기 생각대로 교회 생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다 지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 다 그에게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게 매우 중요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자기 멋대로 신앙생활을 합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무슨 일꾼이 되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은혜를 받았느냐, 제대로 받았느냐, 그 가슴속에 예수의 사상이 있느냐 그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믿음도 자라야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긴 했는데 이제 갓 태어난 어린아이같은 사람이 있고, 은혜를 받고 난 이후에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믿음이 어른처럼 된 사람도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수준까지 자라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나무라도 큰 나무에게 맺힌 열매의 숫자와 작은 나무에서 맺힌 열매의 숫자가 다릅니다.
지난 가을에 우리 교회 관리집사님이 옆 교육관 앞마당에 세워진 모과나무에서 모과를 한 80개 정도 땄습니다. 나무가 크니 열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막 심어놓은 모과나무가 열매를 맺습니까? 그것은 기대하기 어렵고, 한 5년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나무에서 10개-20개이상 못 맺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자라고 나니까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전도 열매를 맺고, 성령 열매를 맺고, 입술의 열매를 맺고, 빛의 열매를 맺고,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믿음이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은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게 마지막 단계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처녀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가 깜짝 놀라서 나는 남자를 가까이 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임신한다는 말입니까? 성령이 네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을 것이니 그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게 될 것이라. 하나님의 뜻이 분명함을 알았던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고 수용합니다.
그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일 자기가 임신해서 배가 불러온 것을 요셉이 알았다면 당장 파혼하게 될 것이고 동네 사람들은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임신했다 그러면 돌로 칠 위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큰 일을 이루신다면 그 수치와 고난도 나는 감수할테니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순종을 위한 자기 포기가 마지막 단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부자 되고 잘 살고 편안하기를 구하는 사람은 많은데 주님을 위해서 수치와 고난을 감수하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은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다면 내가 죽겠습니다.
순종을 위한 포기, 그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을 일컬어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 주시고, 높여 주시고, 모든 이름 위에 그의 이름을 높이도록 했으니, 은혜를 받아야 영광도 있고 복도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거리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지 않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오래 참습니다. 참을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습니다. 거짓없이 형제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합니다. 순종을 위하여 자기를 포기합니다. 그런 은혜를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바로 지금 받아야 합니다.
오늘 받아야 합니다. 내일은 내 날이 아닙니다. 내일도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지만 내일 나는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이것을 깨달을 대로 실천에 옮긴다면 오늘부터 우리가 가는 길에 새 길이 열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는 자
고후 6:1~10 / 김광일목사
무적 군함이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에서 불빛이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군함은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이 무적함대를 몰라보고 정면도전하는 상대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무전을 칩니다. ‘만일 계속 돌진하면 받아버리겠다’ 상대편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당신들이 피하라’ 군함은 ‘너는 어디 소속이며 무슨 배냐?’ 상대편에서 ‘나는 등대다 그러니 네가 피하라’ 하는 수 없이 군함은 등대를 피해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정면돌파가 항상 능사만은 아닙니다. 상대를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바뀌면 됩니다. 환경을 변화 시키려하지 말고 나를 변화 시켜야 합니다.
위대한 실천신학자 투루나이젠은 젊은 시절에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세계를 바꾸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랬더니 세계가 전혀 변화되지 않더랍니다. 그는 나이 마흔이 넘어서 ‘하나님 저를 바꿔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자신을 바꾸었더니 세상이 달라지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후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세계를 바꾸려하지 말고 나를 바꾸려고 했다면 나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꾸려고 합니다. 내 목표를 먼저 세우고 하나님보고 따라오라고 합니다. 나를 바꾸려하지 않고 말씀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잘 안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말씀을 부인합니다. 마치 군함이 등대를 향해 비키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 아무에게도 거리끼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되는 비결을 은혜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서신에서 은혜라는 말을 93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빼어 놓고는 성서를 기록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역사를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말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자기가 남보다 더 수고하고 괴롬도 많이 당했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성도가 되어질 때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는 자가 되려면,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히틀러 정권 당시 독일 고백교회의 젊은 목사인 디트리히 본훼퍼는 ‘제자의 대가’란 저서에서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값싼 은혜란 싸구려 물건들처럼 아무 데서나 마구 남용되는 은혜를 말한다. 현대 교회의 값싼 은혜는 회개가 없는 용서의 설교요, 교회의 교육이 없는 세례요, 참회가 없는 성찬식이요, 개인적인 고백이 없는 신앙과도 같다. 값싼 은혜는 십자가 없는 은혜요,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이다. "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공로 없이 값없이 받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겐세일처럼 값싸게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의 대가를 예수께서 대신 지불해 주셨음을 깨닫고 그 은혜를 간직하기 위하여 비싼 대가를 치루어야만 합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받는 은혜는 헛된 은혜가 되기 쉽습니다.
회교도들은 일년 중에 라마단이라는 특별한 금식 기간을 갖습니다. 해 뜨고부터 해질 때까지 일체 금식하는데 해가 지면 밤새도록 먹고 마시기 때문에 이 기간에 가장 살이 많이 찐다고 합니다. 낮과 밤만 바꾼 것뿐이지 실제로 금식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주일날 한 시간 예배드리면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서는 언제 은혜 받았느냐는 식으로 여전히 옛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간다면 헛된 라마단 금식을 하는 회교도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 했습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도무지 은혜를 받은 사람들처럼 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들 사이에 파당과 분쟁이 있었습니다. 성도들 사이에 음행이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포르투갈은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인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주산물이 포도였기에 포도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큰 산맥에 큰 산불이 일어났던 일이 있었습니다. 포도원 농사를 짓던 농부들에게는 큰 재앙을 만난 셈이었습니다. 타 들어가는 불길을 바라보면서 농부들은 실망과 한숨을 쉬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렇게 우리가 땀흘려 노력하여 일구어낸 포도원을 저렇게 망쳐놓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보호하시는 걸까하며 심히 불평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심한 불길로 인하여 산의 바윗돌이 깨지면서 그 틈새로 이상한 빛이 나오는 것입니다. 빛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확인해 본 결과 그것은 바위 속에 함유되어 있었던 은이었습니다. 농부들은 그렇게 값비싼 은이 자기들 주변에 많이 깔려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포도원이 불타는 것을 보며 낙심했던 농부들은 자신들의 불신앙을 회개하고 도리어 더 큰 감사를 하나님께 돌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하나님 은혜로 받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고 살아야 합니다
R. A. 토레이 목사님에게 어떤 여인이 찾아와서 안타까운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뜨겁게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부흥회에도 참석해보고 은혜를 받아 보려고 애를 썼는데 은혜가 오지를 않습니다.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해도 은혜가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목사님께서 묻습니다.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기도제목이야 많지요." "그렇게 하지말고 딱 한가지 제목으로만 기도하십시오" "무슨 기도요?"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을 알게 해주세요. 자신을 똑바로 알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그녀는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나 자신을 알게 해주세요. 나 자신을 바로 보게 해주세요."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그녀의 모습을 보도록 하셨습니다.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더러움, 시기, 질투, 명예, 욕심, 게다가 거짓, 너무너무 더럽고 추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목사님께 와서 “목사님, 너무 창피해서 살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다음 기도를 하세요. 십자가를 알게 해주세요.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세요. 십자가를 생각하세요."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대신하여 피 흘리시는 모습을 보여 주시며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실 때 너무 감격했습니다. 기뻐하는 그녀에게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이제 비로소 당신은 충만한 은혜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난 후에 은혜를 은혜되게 하기 위해서 다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아야 됩니다. 나의 나됨을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누구를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를 비방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감사할 뿐입니다. 참으로 은혜를 알 때는 나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됩니다. 내 공로도 아니고 내 의도 아니고 내 노력도 아니고 내 지혜도 아니고 오직 은혜인 것을 고백하고 됩니다. 누구에게나 거리낌이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찌르는 가시 때문에 하나님께 세 번 기도하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살아도 죽어도, 잘되어도 못되어도. 범사에 그를 높이고 감사하며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거치는 자가 아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의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 넘어지면 3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3년 고개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이 고개를 넘다가 잘못해서 그만 넘어졌습니다. 이 사람은 이 일로 인해 좌절하고 낙심되어 죽을 날을 하루하루 손꼽아 세워보며 지냅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죽을 날만 헤아립니다. 그때 한 지혜로운 노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 걱정할 것 없네. 한번 넘어지면 3년이니, 백 번 넘어지면 3백년을 살 걸세.' 이 말을 들은 청년은 너무도 기뻐서 뛰어가서 하루종일 그 고개에서 뒹굴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용기를 얻었고, 3년이 지나도 죽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은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운명을 아름답게 창조해 나가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조건으로 보면 비참한 사람이요, 고난의 연속 속에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행복하게 산 사람입니다. 그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부요한 자로 살았습니다. 그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인정해 주시고, 나를 통해서 하늘의 일을 이루신다’ 는 믿음 안에 살 때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부요하게 살았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에게 있습니다.
병을 치료하는 병원에도 영안실이 있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병원이라도 사람들이 죽어 나갑니다. 우리가 부정적인 면만 보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합니다. 죽는 사람을 보지말고 건강을 회복해서 퇴원하는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다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교인 가운데도 온전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교인이 더 많습니다. 만일 교인의 나쁜 점만을 지적하면서 교회를 비판하고 신앙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만 손해보게 되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거리낌이라는 말은 거슬려 부딪히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사람들 앞에 걸림돌로 나타나서 남을 넘어지게 합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은 사람은 마귀에게 쓰임을 받되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실족합니다. 그 사람 보기 싫어서 교회 나오고 싶지 않습니다. 그 사람만 보면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헛되이 받은 사람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은혜를 바르게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우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바로 세우는 줄 믿습니다. 은혜를 바르게 받은 사람은 아무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사람입니다.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됩니다.
이제 여러분이 아무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당신 때문에 힘을 얻고, 당신 때문에 위로 받고, 당신 때문에 용기 얻으며, 당신 때문에 신바람 난다면 당신은 분명히 디딤돌입니다. 거리낌이 없고 오히려 넘어지는 사람을 붙잡아 일으켜 주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평가
고후 6장 1~10절 / 이필재목사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교과서 내용이 기억납니다. 교양 과목 가운데 자기 주관을 훌륭하게 가지고 살라는 교훈으로 제목이“팔러가는 당나귀”라는 이야기를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내용이냐 하면 어느 부잣집의 영감이 어린 아들과 함께 당나귀를 시장에 팔려고 끌고 가는 겁니다.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앞에서 걸어가고 당나귀는 뒤에서 끌려오게 되는데, 동네 사람들이 보고 껄껄 웃으며 말합니다. “아니, 당나귀는 타고 다니는 짐승인데 둘씩이나 당나귀를 모시고 다니네!”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들어보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얘야! 안되겠다! 너 당나귀 위에 올라타거라!” 어린 아들을 태우고 아버지가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어디쯤 가니까 또 다른 사람이 말을 합니다. “저런 버릇없는 놈 봤다! 저희 아버지를 태워야지 아들놈이 타고 아버지가 모시고 가는구나!” 이런 말을 한단 말입니다. 들어보니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얘! 내려와라! 내가 타야 하겠다.” 그래서 아버지가 타고 아들이 끌고 갔습니다. 어디쯤 가니까 또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아니! 저 사람은 어린 아들을 태울 것이지 아버지가 타고 어린 아이는 끌고 가는구나! 저런, 저런!” 이러는 겁니다. “얘야! 할 수 없다. 우리 둘이 다 타자!” 그래서 둘이 다 올라타고 가니까 “아니!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멀쩡한 사람이 둘이나 올라타고 가니, 여보쇼 짐승이지만 너무 부려먹지 마쇼!” 이런 말을 합니다. 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둘이 모두 내려서 당나귀를 묶어서 작대기를 끼워 둘이 양쪽에서 메고 갑니다. 마침 다리를 건너가는데, 동네 아이들이 보고 막 깔깔대고 웃으면서 “얘들아! 사람이 당나귀를 업고 간다.” 그러니까 당나귀가 놀라서 요동을 쳐 결국 물에 빠져 떠내려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마 이 이야기의 목적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판단보다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너무나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교육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가 교과서에 나왔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인들은 이런 경우에 더욱 민감합니다. 내가 좋아서 아주 비싼 옷을 샀는데 입고 나가보니까 별로 좋지 않은 평가를 합니다. 그러면 다음부터는 그 옷을 안 입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옷을 사게 되고 제 생각에는 어느 집이나 여인들의 옷이 가득가득합니다. 자꾸만 사게 되니 그럴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인기를 얻어야 되는 직업이 있습니다.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들이라든가 무대에 서야 되는 사람들은 365일 다른 사람 평가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거나 행동 하나 잘못했다가는 치명적 손해를 입게 됩니다. 저는 내 마음대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면 대통령은 절대 안할 것 같습니다. 그 자리는 언제나 역사에 평가를 받아야 되는 자리로 후손들까지 어려워집니다. 당시에는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잘한다고 했는데 역사 이해는 시대에 따라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 가면 정반대의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철학에 따라서 사람이 행복하게 살고 불행하게 삽니다. 저는 철학이 하나 있는데 이 세상은 소시민으로 사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고 늘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왔고 우리 아들, 딸에게도 “절대 유명한 직업은 가지지 마라! 평범하게 소시민으로 사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고 늘 강조했습니다. 사람이 유명해 질수록 힘들어집니다. 농사짓는 농부가 배를 째고 수술을 했어도 누구에게도 얘기꺼리가 되지 않습니다. 유명해지면 쌍꺼풀 수술만 해도 야단들입니다. 길을 가다가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마음 놓고 떠들며 먹고 노래방 가서 마음 놓고 노래를 불러도 괜찮습니다. 이게 얼마나 좋습니까? 제가 가끔은 은행에 돈 찾으러 가는 일이 있습니다. 저도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목사님도 은행에 오시느냐고 묻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그 이후로 저는 은행 갈 때마다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신경이 써진단 말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없어진 문화가 있습니다. 사랑방 문화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어느 동네든지 저녁이 되면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사랑방이 있었습니다. 그 장소는 온 동네 하루의 뉴스가 방송되는 곳이라서 집집마다 동네마다 가득가득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좋은 곳만은 아닙니다. 심판 장소입니다. 사랑방 재판에서 비판받은 사람은 그 동네에서 왕따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였다가 누구도 도중에 나가지 못합니다. 내가 나간 다음에 나에 대한 평가를 나쁘게 얘기할까봐 끝까지 있다가 다같이 헤어지는 곳이 사랑방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교회도 어떤 때 이런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정하고 살아야 행복하게 살고 자유로이 살 수 있는 것인가를 우리가 복음적으로 생각함으로 모두가 풍성한 크리스천의 삶의 소유자가 되려는데 오늘 제 설교의 목적이 있습니다.
먼저 오늘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들의 평가로 사도 바울이 제일 불쌍하다는 결론을 본인 스스로 내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밝힌 주변이 그것을 잘 대변해 주는데, 비참하고 불행한 대표적인 사람이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헐벗음 이것이 자기 주변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양심 고백이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90퍼센트 이상이 내게서 고난이 물러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예수를 제일 잘 믿는 사람이면서 그 모든 고난을 혼자 다 가지고 있는 대표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이 단어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먼저 ‘환난’이라고 하면, 사도바울은 환난의 끝없는 주인공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정말 조용하고 편안한 순간이 있었다면 감옥에 있었을 때입니다. 그 외에는 주변 상황으로 인해 언제나 환난을 겪었습니다. 환난 속에 빠지는 사람은 세상을 그만 살고 싶습니다. 그것이 환난입니다. 그 다음에 ‘궁핍’이라고 그랬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목적과 이유는 궁핍에서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나라마다 경제 성장이 국책 사업의 제일 으뜸입니다. 가정마다 목표가 있는데 보다 나은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도 변함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궁핍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매 맞음’이라고 했습니다. 죄도 없는데 한번 얻어터지고 나면 절망감이 옵니다. 요즘에는 학교 폭력 사건 때문에 학생들이 자살을 합니다. 가정 문제 연구소의 발표를 보면 제일 큰 문제가 가정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매를 맞고 나면 사람이 살기 싫어집니다. 그 다음에 ‘갇힘’을 말했습니다. 우리교회 오네시모선교회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안양 교도소, 청송 교도소에 갑니다. 매달 경비를 들여서 위로 잔치를 하고 옵니다. 갇힌 자의 소원은 바깥세상 출입입니다. 신체 활동의 제한은 가장 무서운 형벌이기 때문에 죄 지은 사람을 가두어버리는 겁니다. 그 다음에 ‘자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왜 잠이 오지 않는가? 마음에 평화가 없어졌기 때문에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며칠 동안만 잠을 자지 못하면 정신적 신체적 건강이 절대적으로 나빠집니다. 그 다음에 ‘먹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인간 최대의 슬픔은 굶주림입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쌀이 남아돌아간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만 참으로 행복한 소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고난을 다 차지하고 있는 사람인데 그것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고 평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보입니다. 불쌍하고 미련한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장 열심히 가고 있는 모습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핑계할 수 없이 이기주의적 삶을 살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유익을 만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상적 평가에 대해서 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바울이 전도한 많은 지역 가운데 가장 지식적이고 지혜 추구의 도시는 고린도였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이 십자가의 도라는 진리를 듣고 나서 “저런 미련한 소리!”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는 말을 그래서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많이 요구했습니다. 우리 눈에 하나님의 표적을 보여주면 믿겠노라 하였고, 헬라인들이 십자가의 진리는 지혜가 아니라고 배척하였을 때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는 역설적 설교를 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말은 “세상적 평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너무 많이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평가에 마음을 쓰라. 이것이 자유함이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9절을 보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진정한 삶의 자유함을 누리고 사십시오.” 이것이 크리스천 삶의 가치관의 정의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과 하나님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많은 관심을 두고 살면 그 사람은 자유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평가에 관심을 둘 때 인간은 가장 자유스럽고 고귀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8~9절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사람이 성령 충만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삶의 가치관이 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갖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이것은 선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노력의 아름다운 열매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삶의 가치관이 바로 정리된 사람에게 그런 노력이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그렇게 많이 노력해서 얻은 것들이 나에게 고통과 짐을 줄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다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왕손으로 태어나 가문의 혜택을 받는 문화에서 베냐민 지파라는 인격 대우를 받던 사람이요, 중간 할례자가 아닌 출생 8일의 할례자요, 이민자가 아닌 정통 유대인 아브라함의 혈통이요, 율법의 전공자로 가말리엘 문하생이요,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권을 가장 젊은 나이에 소유한 출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지금 나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당신은 이제부터 그렇게 좋은 것들을 다 버리고 무엇을 위해서 살겠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에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러면 당신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어찌 그렇게 살겠습니까?” “네, 맞습니다. 당신들이 보기에, 그리고 당신들의 평가에 나같이 미련한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기준에 미련하고 바보스러운 나의 모습이 하나님의 평가에는 가장 아름답고 칭찬할 만한 삶의 모습입니다.” 세상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는 능력, 사람들의 그릇된 평가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담대함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세상 사람들은 누구든지 상대적 행복과 불행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노동을 해서, 계를 들어서, 적금을 부어서, 청약을 해 32평짜리 아파트를 하나 샀을 때 그 기쁨과 감격이란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런데 내 옆에 있는 친구가 70평짜리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아파트를 샀다는 말을 들을 때 나의 감격은 별안간 간 곳이 없어지고 그렇게 고맙던 아파트가 원망스러워지고 내 모습이 별안간 초라해 보입니다. 요즈음 학교 입학 시즌이 되는데 중학생 아이들의 교복 문제가 사회 문제화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언제 이렇게까지 되어버렸는가? 중학생들마저 명품 교복이 아니면 안 입고 학교 안가겠다는 것은 나라 망하는 소리같이 들립니다. 다른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본능적 욕구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이 세상 기준을 너무 지나치게 민감하게 따르다 보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없어지고 남을 살아주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자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어느 날 이스라엘 민족에 국가적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호전 민족 블레셋이 전쟁 영웅 골리앗을 앞장세워 침략해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울왕가는 몰락 당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치명적 식민지 백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골리앗을 보세요. 그는 전쟁 승리에 대한 모든 조건과 장비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예리한 칼을 번쩍이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 가장 훈련이 잘된 정예부대를 가지고 있으며 전쟁을 오락으로 삼고 즐기는 막강한 군사들이 그 주변에 즐비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다윗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소년으로서 그를 따르는 병사도 없고 칼도 말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누가 보아도 객관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때 사울왕은 다윗에게 몇 가지 준비를 시켜줍니다. 사무엘상 17장 38절에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다윗의 주변을 튼튼하게 마련해 주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런 정도는 전쟁하기 위해 주변에 있어야 되느니라”한 것입니다. 그러나 39절에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아무것도 준비 안 된 자가 맨손으로 돌멩이 몇 개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마치 장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의 결말에 대해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 행복하게 하지도 못할 불필요한 것들을 너무 많이 장식하고자 무겁고 힘들게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소유나 명예나 인기나 학벌이나 지식 이런 것들은 우리 생활에 어느 정도 필요하기 때문에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불필요한 세상 기준에 너무 맞추다 보니까 오히려 지쳐서 쓰러지는 불행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은 자유함을 누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평가에 더 관심을 두고 나의 삶을 자유롭게 가볍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비참하고 미련하고 보잘것없고 불쌍한 것 같이 보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아름다운 삶,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그런 삶을 사시오.” 이렇게 바울이 권고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2000년이 지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데 우리 크리스천들이 어떤 평가를 합니까? 바로 그 사람,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헐벗고 갇히고 매 맞고 굶주렸던 그 바울이 기독교 2000년 역사에 가장 주님을 위해서 훌륭하게 살았던 사람이라고 평가를 하지 않습니까?
제가 LA에서 갈보리교회로 간다는 소문을 듣고 나를 아끼는 친구 목회자 여러 명이 찾아왔습니다. 나를 걱정해주는 진실한 충고를 해주기 위해 찾아와서 무척 고맙게 들었습니다. 그 충고 내용은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소신껏 목회를 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자신이 교회를 창립하고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한민국 안에서나 해외에서 그런 교회들이 대형 교회가 되었고,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으로 지금까지 5번 교회를 창립하고 어디서나 소신껏 목회를 해서 교회들이 잘 성장한 행복한 목회를 해왔습니다. 그 열매가 생각보다 더 훌륭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이 목사! 그런데 더 좋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왜 불리한 환경을 선택하느냐? 지혜롭지 못한 결정이다. 우리는 친구를 사랑한다.” 그러면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내가 불리한 조건을, 내가 모르는 분야를 객관적으로 나한테 이야기를 좀 해보시오.” 그랬더니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째, 그 동네가 이 목사 고향이라고 들었다. 맞느냐?” “맞다.” “아니, 성경에 고향에서는 예수님도 안 되었다고 이야기하셨는데 왜 거기를 찾아가느냐?” 사실 여기 고향에서 옛날 친구를 어쩌다 만나면 반가워합니다. 내 동기들입니다. 그런데 저한테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고스톱 치러 와라! 응?” 그 다음으로 “너무 큰 나무가 계시던 목회지다. 박조준 목사님은 대한민국이 인정하던 설교자다. 그런데 그분이 설교하셨던 그 강단에 가서 이 목사가 설교하면 며칠이나 가겠냐? 안 된다.” 그러니까 점점 심각해지는 겁니다. 그 다음에 “한국 문화는 50세만 되면 물러나는 문화가 되어서 사오정이란다. 60이 다 된 사람이 가서 환영을 받겠느냐? 40대가 아니지 않냐? 이제 그만 둘 나이가 다가오는데….” 그것도 또 맞는 말이지 않습니까? 또, “이럭저럭 외국 문화에서 수십 년 살아서 외국 문화에 젖었다. 한국가면 교인들이 이질감을 많이 느껴서 하모니가 안 이루어질 것이다. 비판만 받을 것이다.” 그것도 또 맞습니다. 제일 걱정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 목사 한국을 오래 전에 떠나서 모르지? 강남과 분당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사람들이다. 그 쟁쟁한 사람들의 비위를 다 어떻게 맞추겠느냐? 못한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형화된 교회의 창립 목사가 아닌 후임 목사는 날마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잘 된 사람이 없다. 박조준 목사님도 그래서 영락 교회 계시다가 갈보리교회 창립하신 것 아니냐? 그 역사가 뻔한데 그곳에 왜 가려고 하느냐?” 여러분, 다 객관성이 있고 진실이고 옳은 말입니다. 이 몇 가지를 다 듣고 나니까 ‘이게 사실인데 나는 벌써 그때 박 목사님과 약속 했는데 이걸 어떡하나? 큰일 났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한분의 비위만 맞추겠다. 하나님이다.” 저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거 하나면 된다. 그 수천 명의 교인의 비위를 내가 어떻게 다 맞추겠냐? 나는 하나님이 좋아하실 하나님의 일만 열심히 하겠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 이상은 나는 생각하지 않겠다.’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신경을 쓰면 자유함이 없어집니다. 일의 방향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어떤 평가를 하실 것인가? 그 기준으로 크리스천은 삶의 담대함과 자유함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다소 안 좋은 평가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좀 고난이 와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미국도 남북 전쟁이라는 내전을 겪었습니다. 남쪽의 군인들도 열심히 예배드리고 전쟁을 했고, 북쪽의 군인들도 누구의 배낭이든지 다 성경이 들어있었습니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사람들이 수없이 쓰러져 죽을 때 병사들은 신앙적 갈등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편에 계신가?’ 그때 링컨 대통령이 연설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편에 계신가를 생각하지 말라. 내가 하나님의 편에 있는가 생각하라.” 결국 링컨 군대의 승리로 끝이 나서 오늘의 미국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오늘 바울의 목소리!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얼마나 담대하고 자유함이 넘치는 모습을 보느냐 말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가운데 막내인 다윗을 선택하셨는가? 성경에 이르기를 “그는 내 마음에 합하나 자라. 그래서 내가 선택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러분,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세상 평가 기준에 그렇게 너무 바삐 맞추려고 애쓸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평가 기준에, 하나님의 음성에 맞추어서 자유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울 선생의 삶의 자유로운 모습에서 우리의 삶의 방향을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귀를 기울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관심과 마음과 두고 노력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 모두의 삶을 지켜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은혜를 진정 은혜로 받자
고후06장 1~10절 / 성홍모목사
오늘날에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예수쟁이나 예수꾼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예전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별세계의 사람들도 아닌데, 그들의 신앙을 보면 우리보다는 훨씬 잘 믿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러면 그분들이 지금보다 잘 살았는가 하면 우리 시대보다 잘 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야만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느냐고 하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경제적인 부요함이 신앙생활의 방해꾼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요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은 변함없으신데, 우리들에게 사모하는 마음이 없고, 신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시대적인 풍조가 문제라고 보여 집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두신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넓고 깊은 바다와 같습니다. 옛날 애굽에 풍년이 들었을 때에 요셉이 만든 곳간보다도 더 풍성한 곡식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많은 성도들의 신앙상태를 들여다보면 정말 허약한 신앙생활에 머물고 있습니다. 영적인 양식을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 상태에 들어갔으며, 영원토록 갈증을 느끼지 아니하는 생수를 옆에 두고도 마시지 못하여 헐떡거리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영적상태를 진단하여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계3:17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모두다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상태는 빈사상태였습니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전이나 오늘이나 같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를 예비하고 있으며 우리를 먹이시려고 기름진 것으로 준비하셨습니다. 그냥 사모하는 마음으로, 갈급한 심령으로 은혜의 강물에 뛰어들기만 하면 은혜의 생수를 마음껏 마실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칭찬은 없고 책망만 받은 교회가 라오디게아교회와 사데교회가 있는데, 우리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책망하시면서 계3:1에서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 말씀은 정말 심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다고 하지만, 실상은 죽은 자였습니다. 치욕스런 말입니다.
오늘은 “은혜를 진정 은혜로 받자.”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으려고 합니다.
저는 요즈음에 저녁이면 일찍 저녁 식사를 하고 남산 북측 순환로에 나가 한 10Km 정도 걷고 있습니다. 2시간 정도 부지런히 걸어서 국립극장 이에 있는 장충체육공원까지 다녀옵니다. 요즘 남산에는 나무들이 얼마나 잘 자라서 길 양쪽의 나무들이 맞다 있고, 신록이 우거져 멋들어지는지 정말 좋은 산책로입니다. 그곳에 가면 시각장애인들이 많이 나오는데, 차량이 없고, 길이 넓어서 다칠 염려가 없습니다. 그들만 보아도 저는 너무나 건강하고 시력이 좋아서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면 그것은 사실 유치한 감사라고 하지만, 언제나 그 분들만 보아도 나같이 건강한 사람이 무엇은 못할 것이 있겠느냐 하면서 은혜가 됩니다. 또한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저 남산의 수많은 나무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 그 능력의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내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하니, 좌충우돌이요, 실패하고 낙심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능력 있는 오른 손에 붙잡혀 일한다면 나의 생애는 분명히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일한 것보다, 지금까지 쓰임 받은 것보다 남은 생애가 더 아름답고, 보람도 있고, 의미가 있고, 알찬 열매를 거둘 것을 확신합니다.
남산에는 수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기에 참 좋은 산입니다. 한 종류의 나무만 계속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함께 자라나고 있습니다. 나무는 산과 들에 심겨져야지 화분에 심겨지는 것은 불행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희 집에는 동백나무와 회양목분재, 동양란과 산세베리아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정성껏 물주고 거름을 주어도 화분의 나무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화분에 심겨진 나무와 산과 들에 심겨진 나무는 전혀 다릅니다. 나무의 색이 다릅니다. 꽃이 다릅니다. 나뭇잎이 다릅니다. 줄기도 다릅니다. 화분에서는 겨우 죽지 못해 연명하는 꼴이지만, 산과 들에서는 하나님이 기르시기에 얼마나 탐스럽고, 보기에도 좋습니다. 좋은 땅에 심겨지면 나무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화분에 심겨진 나무는 잘 자라지 못합니다. 집에 들여놓아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자라지 않게 분재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산과 들에 심겨진 나무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대로 하늘을 찌를 듯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은혜의 동산, 물댄 동산에 심겨진 나무는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잎이 시들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은혜의 동산에, 물댄 동산에 심겨만 지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은혜의 동산, 말씀의 동산에 심겨지기만 하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전망이 보입니다. 미래가 열려집니다. 주 안에 예비된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은혜의 동산이며, 물댄 동산입니까? 무엇이 화분이라고 생각됩니까? 저는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 인간의 의지, 인간의 물질만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이들은 겨우 화분에서 연명하는 것이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 하면서 사람을 의지하고 세상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슨 힘이 되는 줄 알고,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화분 안에서 죽지 못하고 연명하면서 버티는 것에 불과합니다. 화분의 흙이란 지력이 고갈됩니다. 그러나 들과 산에는 무궁무진합니다. 화분에서는 꿈이 없습니다. 그러나 들과 산에서는 무한하게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나무는 화분을 떠날 수 없고, 일생 그 자리에서 고사하여도 벗어날 길이 없지만, 우리는 지금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부정적인 환경을 박차고 일어나 성령의 충만한 동산으로, 말씀의 강이 흐르는 들판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사랑과 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품에 심겨져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품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나는 은혜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 “저를 품어 주시옵소서.”라고 매어달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이 강같이 흘러가는 하나님의 교회에 깊이 들어와야 합니다.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동산에 들어가 그 물댄 동산에 심겨지고 보니, 하나님은 저의 생애를 통하여 참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사58:11에서는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동산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겠다고 전적으로 위임하고 위탁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로 메마른 땅에서도 그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며, 물댄 동산,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곁에 두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은혜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받았습니다. 은혜 받으세요.”라고 하는데, 도대체 은혜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은혜란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입니다. 하나님의 친절과 호의라고 하는데,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하시려고 무조건적으로 돌보시는 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은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골1:6입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고 했습니다. 이 복음이 이르니,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엡2:5에서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은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복음을 통한 은혜입니다. 거듭남의 은혜, 새로운 피조물의 확신을 가지게 하시는 은혜, 하나님의 자녀로서 계속하여 누리게 하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님을 모신다고 하는 것은 은혜 중에도 은혜입니다. 딤후2:1에서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가장 중심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은혜를 받으며, 받은 은혜를 다 사장시키지 않고, 계속하여 유지할 수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만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 안에서 살겠다고 다짐하고 살아갑니다.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세상 명예도 다 지나갈 것이며,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도 지나갈 것이며, 내가 붙들어야 하는 분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시며, 성령 충만을 소원합니다. 다 지나갈 것인데, 그것이 나에게 영원히 함께 하지 않으며, 힘이 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며, 힘이 되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영원히 함께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싶어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알찬 내용의 말씀, 진정한 양식이 되는 말씀, 영원히 힘이 되어주는 말씀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시시하게 쓰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은혜가 되어야, 다른 사람도 은혜가 되지, 내가 은혜가 되지 않는데, 누가 은혜를 받을 것입니까? 내가 잘 먹어야 잘 먹일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영을 잘 분별해야 우리 교회에 들어오는 영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요약하여 세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어 받지 말아야 합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씀은 아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화해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는 구속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되는 이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헛되어 받지 말라”는 말씀은 “헛된 것으로”, “허사로 돌리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고, 그 은혜를 소중하게 간직하지 않고, 가장 값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예사롭게, 흔하게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2. 오늘 이 자리에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2절의 말씀에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49:8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사49:8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인 이 곳, 이 자리에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해야 됩니다. 우리는 오늘의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예비하신 은혜, 지금 주시고, 오늘에 주시는 은혜를 사모해야지, 은혜 받는 것은 좋으나 다음에 받아도 좋으며, 아주 늙어서 힘을 없을 때에, 다음 번 부흥회에 가서 은혜 받겠다고 말하면 그런 사람에게는 영원히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다시 “지금은”이라고 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라고 하십니다. 바로 지금이 은혜 받을 때입니다.
“지금”이란 말은 광의적으로, 예수님이 초림하신 이후로 다시 오시는 날까지를 말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작게는 우리 각 사람이 살아있는 생애의 날을 말합니다. 더 작게 말하면 오늘과 같이 이런 권면의 말씀을 듣는 이 시간을 말합니다. 은혜 받을 시간을 놓쳐버리면 오늘에 임하시는 그런 은혜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은혜의 때가 다 지나가면 그 때는 심판의 날이요, 책임을 묻는 날이 될 것입니다.
제가 동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목사님”, “아저씨”, “선생님” 이렇게 부르는데, 어쩌다가 “할아버지”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누가 저에게 “할아버지”라고 하면 아니, 많고 많은 말 중에 “할아버지”라는 말을 붙이느냐고 기분이 매우 상합니다. 한 5년 전에 상도동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유치원생들이 저의 집 계단의 문 앞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제가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니, 아이들 중에서 한 아이가 “할아버지 들어가, 비켜”라고 하는데, 아무리 두리번거려 사람을 찾아보아도 어른은 나뿐인데, 그 때 정말로 기분 나빴습니다. 이제는 좀 익숙해졌습니다. ‘할아버지’라는 말이 있으니 사용하는 것이지, 할아버지라는 말은 듣기 거북합니다. 아직도 할아버지가 아니라는 느낌인데, 손자들이 찾아오면 할아버지라는 말 외에 붙일 수 있는 말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제 입에서 “할아버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저의 집에 가끔 외손자가 찾아옵니다. 두 내외만 지내다가 두 딸의 아이들이 오면 우리 집에는 가장 큰 손님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 애들이 와서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아주 어렸을 때에는 밥을 떠먹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컸는데도 손자가 귀엽다고 밥에다 반찬을 올려놓아 떠서 먹여 줍니다. 저는 “흘리건 말건 자기가 먹게 내버려두라.”고 합니다. 숟갈을 가운데쯤 잡아주고 떠먹는 훈련을 시킵니다. 자꾸만 숟가락의 끝을 잡고 먹으니 흘리게 되고 혼자 먹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옛날 같으면 멀리 시집가려고 그런다고 야단했을 것입니다. 며칠간 소식이 없다가 놀러오면 이제는 숟가락과 포크로 제법 먹는 것을 봅니다. 아이들이 말을 베우고 커가는 모습이 좋아서, 오면 참으로 반갑습니다. 아직은 어려서 그런지, 가면 더 반가운 것이 아니라, 가면 또 보고 싶습니다.
우리 교우님들은 각자가 스스로 영적인 음식을 먹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먼저 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말씀을 읽고 그것을 가지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나의 삶에 적용시키기 위하여 오늘의 할 일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것을 매일 같이 훈련하듯이 해야 신앙이 자라납니다. 좋은 신앙생활하기를 원하십니까? 좋은 생각과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원로장로님 중의 한 분은 연초부터 성경을 읽어서 한번 읽으시고, 다시 한번 읽은 분이 계십니다. 두 달 반 정도면 일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좋은 습관이 좋은 인격을 만들게 됩니다. 성경 백독하십시오. 자기 나이 수만큼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백독하시고 천수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정상적으로 자라나는데, 악한 음식, 먹어서는 안 되는 이단 사설, 동양철학을 가장한 사주팔자, 운명철학 이런 것을 먹으면 잘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영이 악한 영으로 인하여 미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음담패설 같은 것은 몰라도 됩니다. 어느 모임에 가서 음담패설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으려고 그런 것을 메모해 가지고 다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고 복음 성가를 암송해야지, 쓸데없는 시시한 이야기를 가지고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모여 설교를 듣는 것은 음식의 맛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에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자기 성경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자신만의 기도 시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봉사의 현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모여서 말씀을 듣고 함께 예배하는 것은 은혜의 문에 들어가는 것이요, 정말 은혜 생활하는 것은 여러분, 각자가 열심을 내어야 하고, 열정을 가지고 영성을 예민하게 해야 됩니다.
3. 이제 마지막으로 받은 은혜를 소중히 여겨야 진정 은혜가 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시시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세상에 없는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은혜로 믿음을 지켰습니다. 계3:8에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교회가 아주 큰 능력이나 큰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우리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교회와 성도들을 원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큰 건물을 가지고 있어서 신앙생활 잘 하는 것입니까? 예산이 많아서 신앙생활 잘 하는 것입니까? 목사님이 유명세를 타는 목사여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까? 우리는 아주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적은 은혜를 받고도 아주 큰 은혜를 받은 사람 못지않게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은혜 받을 날은 오늘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결단해야 됩니다. 내일이 있다고 다음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날이요, 구원받을 때입니다.
사55:1에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돈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과 같은 말씀과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 받는 것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식을 앞에 두고 구경만 하고 돌아간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요, 굶어죽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운 말씀을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에게, 이 자리에서 오늘 주시는 말씀으로 우리 마음 육비에 새겨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의미 없이 들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말씀을 증거하는 성목사가 결코 사도바울에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처럼 처신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3절 말씀에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목사라는 직분, 하나님의 종이라는 신분, 성직자라는 사람으로 비방 받지 않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처신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이것도 제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도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저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의식을 기억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잘 참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처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 들어가지는 못하였어도, 깨끗한 마음, 자비한 마음, 성령의 감화, 거짓이 없는 사랑,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름 없는 사람 같지만, 이름 있는 사람이요, 죽은 자 같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요,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은혜 생활 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받는 것만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유지하고, 주님을 닮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어 받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받은 은혜를 소중히 여겨야 진정 은혜가 됩니다. 은혜의 강물이 여러분, 심령 속에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 6장 1~2절 / 곽선희목사
'아더 베리(Arthur Barry)'라고 하는 분은 명문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유족하게 자라난 그런 남부러울 것이 없는 그런 행복한 유족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천부적 재능을 고루 갖추고 태어나 아주 이러한,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지능지수도 탁월하고 또한 학벌도 특출했습니다. 용모도 뛰어나고 키도 훨씬 크고 늠름한 그런 청년이었습니다. 운동신경도 좋아서 못하는 운동이 없고 또 음악적으로도 재질이 있어서 피아노 독주회를 할만큼 피아노도 천재적으로도 잘치는 그런 재능이 있는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춤은 또 얼마나 잘 추는지 많은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춤을 즐기는 사람이었고요 말재주 또한 특별히 좋아서 사교계의 영웅처럼, 혜성처럼 높이 떠있었습니다. 뭇 여인들이 그를 부러워했고 한 번 만나는 것을 큰 영광처럼 생각을 했더랍니다. 이렇듯 부러워할만한 모든 여건을 고루 갖춘 이 사람, 여러분 무엇에 전념했을 것 같습니까? 그리고 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았을 것 같습니까? 그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보십니까? 어이없게도 이 사람은 보석 도둑이었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 명성이 높은 유명인사가 뒤에서 그런 일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그는 보석 도둑질을 하면서 유족하게 사교계에서 살아왔습니다. 마침내 꼬리가 길어서 그는 잡혔고 체포되어가지고 너무나도 지능적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큰 벌을 내렸습니다. 20년 징역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출옥할 때에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보석을 훔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훔치고 산 죄인이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아일랜드 출신 작가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라는 분을 여러분이 들어 아실 것입니다. 그에게 우화적인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그는 특별한 소재에 착안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은혜 베푸신 사람들이 많고 예수님께로부터 은혜받은 사람이 많잖아요. 많은 문둥병자들을 고치셨으니 고침 받은 사람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셨으니 그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뭐 장례 하러 가다가 살아난 청년도 있잖아요? 이 많은 은혜받은 사람들, 성경에는 그 사람들이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았다하는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특징입니다. 은혜 베풀고는 그 다음에 어떻게 됐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는 그것을 나름대로 추리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과거에 은혜를 베푼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만나본 일이 있다는 것으로 소설은 설명합니다. 어떤 곳에서 예수님은 알코올 중독자를 만났습니다.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어디서 본 일이 없습니까?" 그분이 대답합니다. "아, 있었지요. 나는 본래 절름발이 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셔서 제가 이렇게 걷게 되었습니다. 절름발이였을 때에는 이렇게 저렇게 얻어먹고 살았는데 건강해지고 나니 할 일이 없어요. 또 누가 나를 환영하지도 않고. 그래 이럭저럭 하다보니 타락하고 타락해서 이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 또 한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창녀였습니다. "아니 내가 네가 창녀일 때에 용서하고 구원했는데 아직도 창녀인 것이냐?"하고 꾸중하듯이 물었더니 이 창녀가 대답하는 말이 "물론이지요. 제가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고 새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딸이 되고 감사해서 창녀생활을 청산했었지요.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고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워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다시 옛날 직업으로 돌아와서 삽니다." 또 다시 창녀가 되었답니다. 또 한 곳에 가서 예수님이 만난 사람은 싸움질을 하고 있는, 아주 혈기와 주먹이 있는 조폭을 하나 만났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니 옛날에 본 사람이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폭력배가 되었나?" "예수님 죄송하지만 저는 원래 시각장애자였는데 예수님께서 저의 눈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만은 눈 감았을 때는 몰랐는데 눈뜨고 보니까 아니꼬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더럽고 치사하고 모순되고 부조리하고 부정부패 사치와 타락, 여기에 울분이 터져서 주먹을 쓰다 보니 조폭이 되었습니다." 말 되는 이야기죠? 정말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았다 하는 사실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에 그가 어떻게 살았을까? 은혜를 지켜가며 은혜 안에 살았나, 그것이 문제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 같으나 알고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 왜? 다 죄인이니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죄인 아닌 사람은 없다. 그러나 두 가지 죄인이 있다. 하나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죄인됨을 알고 사는 죄인, 또 하나는 죄인이면서도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혹은 내 잘못까지도 남에게 떠맡기고 내가 왜 죄인이냐고 죄인이 아니라고 굳이 고집부리면서 사는 교만한 죄인,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글쎄입니다. 저는 이 시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안 입은 사람은 없습니다. 은혜 속에 태어나서 은혜 속에 삽니다. 모두가 은혜 속에서 사나 은혜를 아는 사람이 있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있고 은혜를 배반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은혜로 은혜 되게 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은혜가 은혜 되려면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이란 참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인식론에 있어서 감정을 앞세웁니다. 그래서 생각 이전에 감정이 있다고. 그러나 한가지 잊지 마십시오. 생각이 없는 감정은 감정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잠재의식에까지도 지식이 있어서 감정이 더 많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뱀을 만져도 뱀인 줄 모르면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내가 사자를 만나도, 사자라는 것을 모르는 동안은 내가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십시오. 어쩌다가 남편이 결혼 10년만에 집에 돌아오면서 그래도 큰 맘 먹고 장미꽃 한 송이를 사왔다고 생각합시다. 이 의미를 아는 사람은 감격을 합니다. 그러나 의미를 모르고 보면, 그까짓 장미꽃 한 송이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뭐 그렇게 감격을 주겠습니까? 아무 것도 아니죠. 결국은 내가 과거에 얼마나 은혜 가운데 있는지, 내가 은혜를 얼마나 헤아릴 수 있는지, 은혜를 은혜로 아는 지식이 있어야 비로소 감격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은혜를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은혜에 대한 감각지능은 역경 속에 있습니다. 결코 유족한 가운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의 코가 예민하다'고. 배부른 사람의 코는 둔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배고파보면 몇백 미터 앞에서 나오는 불고기 냄새도 코를 찌릅니다. 여러분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에 대한 것도, 이 고마운 마음도 알고 보면 유족한 사람에게는 감각이 둔합니다. 그 감각지수가 낮습니다. 그까짓 것 그까짓 것 그래요.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운 역경 중에 있는 사람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 가끔 그럴 때 좀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전에 어떤 분이 제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금 수술을 받습니다. 목사님 기도해주세요." 제가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에도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로 기도합니다.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전화로 잠깐 기도를 하는데도 얼마나 울면서 감사해 하고 은혜를 받는지. 그런데 이 건강한 사람들은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고마운 줄 모르더라고요? 안 그래요? 어렵고 어려울 때 '정말 전화로 한 통의 기도를 받으면서도 이렇게 감사를 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하나님 내가 무엇입니까? 이 기도가 그에게 꼭 응답되도록 해주세요" 한참동안을 계속해서 기도할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R. A. 토레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목사님에게 어느 날 어떤 여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안타까운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좀 화끈하게 믿고 싶습니다. 좀 더 뜨겁게 믿고싶고요 충만한 가운데 살고 싶은데 이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부흥회에도 참석해보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도 여러번 따라다니면서 은혜를 받아 보려고 애를 썼는데 이 은혜가 오지를 않습니다. 좀 화끈하게 은혜 속에서 살아야겠는데 이렇게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해도 은혜가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목사님께서 참 지혜로운 말씀을 가르쳐 주셨어요.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기도제목이 많지요 뭐. 뭐 뭐 뭐." "그러지 말고 늘 기도하는 것 하나님이 다 들으셨을 테니까 미루어 놓고 딱 한가지 제목으로만 기도하십시다." "무엇인대요?"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을 알게 해주세요.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을 알게 해주세요. 자신을 똑바로 알게 해주세요. 정직하게 알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정말 그대로, 착한 그 아주머니께서 그대로 순종을 하였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나 자신을 알게 해주세요. 나 자신을 바로 알게 해주세요. 바로 보게 해주세요." 간절히 며칠 기도를 했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 속에서 자기 모습이 나타났어요.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어요. 더럽고 시기, 질투, 명예, 욕심, 게다가 거짓, 너무너무 더럽고 추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그러고 나니 남편을 볼 수도 없어요. 부끄러워서. 아이들을 대할 수도 없어요. 이렇게 추해졌어요. 또 다시 목사님께 와서 "목사님, 이제는 너무 창피해서 살수가 없는데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다음 기도를 하세요. '십자가를 알게 해주세요.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세요. 십자가를 생각하세요."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보여주었어요. 그를 위하여 대신 피를 흘리시는 모습을 보여 주었어요.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너무 감격했어요. 이제 비로소 충만한 은혜의 사람이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나의 나됨을 똑바로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나면 누구를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를 비방할 자신이 없어요. 섭섭하고 억울하고 분하고… 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감사할 뿐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입게되면 은혜를 알 때는 나 자신의 의가 부정됩니다. 그래서 내 공로도 아니고 내 진실도 아니고 내 의도 아니고 내 노력도 아니고 내 지혜도 아니고 다 없어져요. 오직 은혜. 그것도 현실적인 은혜. 그 속에서 자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은혜만 남습니다. 여러분, 요새 우리는 월드컵 행사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만은 여러분 월드컵 시작하기 전에 몇 달 전부터, 심지어는 어떤 분들은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소원이 뭡니까? 16강입니다. 꿈에도 소원은 16강입니다. 오로지 소원은 16강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8강으로 바뀌었습니다. 아, 그 다음에 4강으로 바뀌고 아, 그 다음에 요코하마 간다나? 사람이 이렇게 둔갑을 잘해요. 어제 저녁에 축구 보다가 그거 참 어이없게 두골 먹었습니다. 그래서 분해가지고 분해가지고 잠을 못잔다구. 16강 어디에 갔습니까? 여러분, 제 정신 차리세요. 모든 것은 은혜요. 그 은혜의 현장을 잊어버리지 마세요.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 은혜 속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 속에 말씀이 있습니다. 그 은혜 속에 목적성이 있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십시오. 은혜를 쏟아버리지 마십시오. 기적이에요. 이건 다 기적이에요. 그리고 은혜를 부르신 이의 깊은 뜻을 헤아려야 되요. 그리고 여러분 이제 감격해야 합니다. 은혜에 대한 보답은 기쁨입니다. 은혜로 주셨으니 감사해야지요. 용서받았으니 감격해야지요. 만족함이 중요합니다. 만족함. 그리할 때에 그 만족과 충만함이 사람을 내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성품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세계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얼굴도 변할 것입니다. 어떤 여집사님이 아주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열심히 찬송도 부르고 열심히 기도도 하고 그런데 자기 남편은 가자고 자꾸 조르면 한 달에 한 번 교회에 따라갑니다. 따라가서는 그냥 졸다가 오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니까 가자면 그저 '아니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주는데' 그래가지고 따라올 뿐이지 은혜를 못 받아요. 이게 마음이 아픈 거예요. 어떻게 남편이 좀 은혜를 받아야겠는데, 이래가지고 애를 쓰다가 유명한 목사님이 부흥회를 한다고 해서 잘 달래가지고 남편을 모시고 가서 뒷전에 앉았는데, 여집사님은 은혜를 받고 기뻐하는데 남편은 여기서 졸기만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속상해서 다음날 또 데리고 갔습니다. "여보, 오늘은 뒷전에 앉지 말고 앞에 앉아서 아랫목에 가서 뜨끈뜨끈한데서 은혜 받읍시다." 여기가 아랫목이예요. 앞자리에 가야 은혜가 크지. 그래서 같이 제일 앞자리에 가서 은혜를 받으려고 했는데 역시 집사님은 은혜가 충만한데 남편은 여전히 졸고 있어요. 이게 속이 상해서 나오면서 '당신 어떻게 이럴 수 있소.' 어찌 이럴 수 있냐고 왜 은혜를 받지 못하느냐고 그러니까 남편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은혜받으면 어떻게 되는데?" 이제 부인이 할 말이 없어요. "은혜 받은 당신, 그것이 은혜요? 나 은혜 별로 바라지 않아" 그렇게 말했답니다. 여러분, 그 부인의 마음속에 감격이 있고 생활이 변화가 왔어야 되는데 그것 없이 잔소리꾼이에요. 은혜는 말에만 있고 성품에 없었어요. 그러므로 이 남편은 그런 은혜라면 나 받고 싶지 않다고 그랬어요. 여러분, 이것을 알고 계셔야 합니다. 참 은혜는 삶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새사람 되게 하고 얼굴까지 달라지고 마음도 달라지고 말이 변합니다. 오로지 덕스러운 말만, 은혜로운 말만, 그래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십시다. 은혜를 지켜가려면 겸손해야 됩니다. 저는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은혜의 극치는 겸손입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겸손합니까? 그만큼 은혜에 살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은혜를 모릅니다. 은혜 받았다가도 쏟아버립니다. 얼마만큼, 얼마만큼 겸손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겸손은 은혜의 극치입니다. 클라이맥스입니다. 은혜는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더 겸손해집니다. 점점 더 자신은 낮아집니다. 모든 사람이 나보다 훌륭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보다 의롭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질 때 아무도 원망할 마음도 없고 주어진 현실 그대로 감사 감지덕지 할 밖예요. 겸손,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겸손하게 하는 은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실 뿐 아니라 겸손하게 하는 은혜를 주어서 나로 하여금 은혜를 지속하도록 은혜를 보존하도록 하셨다, 그렇게 고린도후서 12장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처럼 은혜 받았다가 교만해지면 다 쏟아버립니다. 더구나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교만한 것처럼 구제불능한 일은 없습니다. 신앙적으로 교만해진 순간 벌써 마귀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은혜의 사람이 아닙니다. 아주 겸손해 집니다. 어쩌면 점점 더 겸손해집니다. 그것이 은혜의 극치입니다.
나아가서는 사도바울 같은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를 주어서 꼼짝 못하게 만들었어요. 교만하려고해도 교만할 것이 없어요. 교만할 거리가 없습니다. 싹 제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은혜에서 은혜로 계속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나의 나됨은 오직 은혜요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오늘 내가 있다고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그 뿐입니까? 바울에게 주신 은혜는 이렇습니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저는 이 요절을 사랑합니다. 신조처럼 생각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sufficient, 만족은 아니요 충분이요.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어져있는 은혜를 충분하게 생각하십니까? 더 바랄 것이 없어야 합니다. 더 다른 것을 원치 않아야 합니다. 이대로 만족해야 합니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네게 있는 내 은혜가 충분하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거기에 은혜의 지속성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자유를 반납해 버립니다. 은혜의 말씀께 부탁해 버립니다. 은혜에게 자신의 생명을 위탁해 버리고 그대로 감사하며 삽니다. 살아도 죽어도, 잘되어도 못되어도. 범사에 그를 높이고 감사하며 은혜의 종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말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 그랬습니다. 지금은, 현실을 은혜로 은혜의 극치로 수용하는 그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은혜를 간증하면 커집니다. 은혜를 기뻐하면 증폭됩니다. 은혜를 함께 나누면 극대화됩니다. 여러분, 은혜를 감추지 마시고요 은혜를 나누세요. 함께 나누세요. 내가 결혼주례를 한 다음에 신랑 신부가 와서 "신혼여행 갑니다" 하고 인사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제가 꼭 한마디합니다. "몇 일 다녀올 건가?" "사흘동안 다녀올 겁니다." "그러면 앞으로도 싸울 일이 많을 테니까 이 사흘동안 싸우지 말게. 제발 싸우지 말게. 그저 좋게 축제로 그렇게 지내주게. 그러기 위해서 좀 낭비성이 있어야 되네. 택시를 사서 만원이 나왔으면 그까짓 거 이 만원 줘라. 운전기사가 '왜 이 만원 줍니까?' 하거든 '신혼입니다' 그러면 '행복하게 사세요' 그럴 것이라고요. 복을 빌어줄텐데 적어도 사흘만은 좀 베풀며 살아다오." 은혜를 나누자. 나 좋으면 저도 좋아야지. 그것이 은혜요. 여러분,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라. 은혜를 저버리는 자가 되지 맙시다. 모처럼 받은 은혜를 쏟아버리는 자가 되지 맙시다. 나의 나됨의 은혜가 점점 더 깊어지고 점점 더 높아지고 더 많은 열매를 맺으며 충만한 은혜 가운데 사는 그런 귀한 생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