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를 먼저 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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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떤 년이야?"
학교 한 가운데에서 비명과 절규가 섞인 날카로운 샤우팅
창법을 구사한 난 주위를 열심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조금의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어제부터 계속되는 물풍선 세례에 정말 정신병이라도 걸
릴 것만 같다. 이게 바로 왕따가 느끼는 고통인가? 어이없게
도 그 일이 있은 후 난 왕따아닌 왕따가 되어버렸다.
손 맛이 무서워서 인지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것들이
어디선가 숨어서 나를 노리고 있다.
정말 걸리기만 해봐라! 그냥.
주먹을 꽈악, 더욱 꽉 쥐면서 복수를 다짐했다.
저격수가 나타난 건 이틀 전에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이틀 전 수업이 끝나고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며 교문을
나오고 있었다. 구름같이 몰려든 인파. 뭔가 처음부터 심상
치 않음을 느꼈는데 홍해가 쩍 갈라지듯 인파가 쩍 갈라졌
다.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난 류이서.
처음에는 그가 누군지 몰랐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건드
려서는 안되는 거물을 건드렸었나 보다.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애가 나를 향해 걸어갔다. 홍조를 띤
볼에 수줍음 가득한 표정. 얼굴은 정말 거짓말 아니라 연예
인 뺨 후려칠 만큼 아름다웠다.
점점 다가오자 가슴이 쿵쾅 거리기 시작했다. 가슴아 제
발! 천하의 지희진이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생각
했다.
그 애는 떨었다. 분명 떨었다.
"저, 저기, 저, 그러니까……."
"무슨 일이야?"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장 밝은 표정을 지으
며 말했다. 그러자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살며시 슬라이
드를 올리고 확인하자 슬기의 문자였다.
-가식의 극치!
짧지만 강한 한 마디! 나와 이애, 슬기가 한 자리에서 만
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애 겠다.
"그, 그러니까 사랑해요. 저랑 사귀어 주세요, 희진누나!"
갑자기 용기가 샘솟았는지, 거침없이 말하는 고백에 잠시
동안 멍을 때렸다. 다시 핸드폰이 진동했다.
-우리 친구 맞지? 아까말은 취소. 니가 얼마나 상냥한 여
자인데. 나 부탁하나만 들어줘, 제발!
안슬기, 도대체 뭘 바라는 거냐?
다행히 정신을 차렸다.
"사귀자고?"
"네? 네!"
"좋아."
좋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 품은 다른 사람을 허
락하고 말았다. 아니, 침범당했다.
"고마워요, 누나! 아참, 제 소개가 늦었죠. 저는 류이서에
요."
차, 창피하게 왜 이래?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런 기분도
은근히 괜찮은……데?
남자애들은 환호성이란 환호성은 다 지르고 있었지만, 여
자애들은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왜 이런 말이 있지 않
은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드디어 나에게도 가뭄에 단비가 내리듯, 순수한 사랑의 비
가 내리는 것인가? 그땐 이 사랑이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힘
들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류이서란 존재는 실로 대단했다.
우리 지역에는 고등학교가 다섯 개 있는데, 이름도 이상하
게 일성고, 이성고, 삼성고, 사성고, 오성고였다. 뒷 배경을
알아보니, 일성고가 잘나가니까, 이성고가 일성고보다 별이
하나 더 많아야 성공한다고 해서 이름을 지었고, 실제로 명
문고로 거듭났다. 그 뒤로 삼성고, 사성고, 오성고가 차례대
로 생긴 것.
이 중 이성고에는 아주 우수한 엘리트가 한 명 존재했다.
내신 전과목 1등에 전국 모의고사 1등이라는 놀라운 성적!
그리고 연예인급의 귀티나는 외모! 실제로 집안도 부자! 성
격도 좋다!
그리고 그런 엘리트가 내게 프로포즈를 한 것! 류이서의
팬클럽은 가문보다 더 넘기어려운 장벽이었다.
가련한 운명……이 아니라 비겁하고 치사한 여자애들! 내
가 꼭 잡아낸다.
홀딱 젖은 채로 두 번째 건물안으로 들어왔다. 3학년은 첫
번째 건물, 2학년은 두 번째, 1학년은 세 번째였다.
건물정면으로 보았을 때, 왼쪽에서부터 1반이 시작된다.
그리고 건물 내부는 정면쪽은 교실, 그리고 복도, 그 옆은
화장실과 넓은 공간이 있다.
오른쪽으로 들어온 난 한 없이 긴 복도를 걸으면서 남자
애들의 의미심장한 눈길을 받았다. 그런데 그 눈길들이 얼굴
이 아닌 가슴을 향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먼저 얼굴이 달
아올라 고개를 돌리고 바쁘게 자리를 떴다.
이것들 도대체 무슨 상상의 나래를 펼친 거야?
교실로 들어오자마자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젖은 머리카
락을 대충 닦아냈다.
걸리기만 해 봐라, 정말!
다시 한 번 주먹을 꽉 쥐었다.
***
"희진이 걔가 아직도 이서를 만난다고?"
"그래. 어제 그렇게 당했으면 정신을 차릴만도 한데, 정은
이가 둘이 공원에서 데이트 하는 거 봤데."
두 번째 건물 1층 화장실에서 두 여자 A, B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좀 더 강도를 올리라고 해!"
"그거 말이야? 알았어! 내가 소현이에게 연락할 게!"
B는 분홍색 핸드폰을 꺼내, 문자메시지를 써 내려가기 시
작했다.
-내일부터는 페인트야! 준비해 둬.
문자메시지가 정상적으로 발송되었다.
"소현이에게 페인트 준비하라고 보냈어! 페인트 뒤짚어 쓰
고 막 우는 거 아냐, 하하하하!"
"교실로 가자, 누가 듣겠다."
"그래!"
A, B는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이 대화가 고스란히 누군가에게 도
청되고 있었다는 걸!
변기에 앉아서 그녀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의 이름표에는 '지희진'이라고 쓰여있었다.
***
학교가 생각했던 거 보다 꽤나 큰데?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교무실로 찾아갔다. 그리고 담임이라
는 여선생과 함께 2-1반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전
학을 왔다고 소개한 담임은 내게 약간의 PR시간을 주었다.
"아, 안녕? 앞으로 잘 지내자!"
어수룩한 인사를 남기고 담임이 정해준 한 여자애 옆자리
에 앉았다. 그러자 남자애들의 눈빛이 모두 날카롭게 변해
나를 향했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일까? 이유를 알 수 없……
헉!
내 옆에 앉아있는 여자애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자 경악
할 수 밖에 없었다. 민서현, 그 애가 내 옆자리에 번 듯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를 죽이기 위해 이정식 놈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사악한 여자!
먼저 입을 뗀 건 서현이였다.
"오, 오랜만이지?"
"아주 오랜만이네. 사실 다시는 안 만났으면 했는데."
왠지모를 한숨이 나왔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내 머릿속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정식이 민서현을 만나러 일성고로 찾아온다. 그리고 우
연히 나를 발견한다. 물론 나는 이정식 그놈을 발견하지 못
한다. 그놈은 복수를 꿈꾼다. 그리고 내 등에 칼을 꽂는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일까?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학생
들이 많은 곳에서 그놈이 뒤치기를 하면 꼼짝 없이 당해야
하는 것. 괜시리 걱정이 된다.
아침 자습시간이 끝이났다. 그리고 주어진 쉬는 시간 20
분. 순간,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아악!"
뒤쪽이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짧은 바람머리를 한 장신의
여자애가 외소한 여자애 머리카락을 잡고 교실 뒤쪽 텅빈
땅바닥에 거침없이 던져버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
녀는 삼디다스를 이용한 쉬지 않는 밟기를 선보였다.
"씨발년, 평생 안걸릴 줄 알았어?"
그렇게 한 차례 밟기가 끝나자, 쓰러져 있던 여자애가 흐
느끼며 울고 있었지만 장신의 여자는 아직 끝난 게 아니라
는 듯 미소를 지으며 빈 책상에 걸려있던 가방을 책상위로
올려 가방속을 뒤졌다. 그리고 파란 물풍선 하나를 꺼내 쓰
러져 있는 여자애에게 던졌다. 그러자 푸른 페인트가 여자애
의 몸을 뒤덮었다.
"기분이 어때? 씨발, 엿같지? 한 번으로 끝날거라 생각하
지마!"
장신의 여자는 독한 말을 하고 뒤로 돌았다. 그 순간 그녀
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한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녀는 물풍선을 꺼냈던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갔다.
멍하니 있던 나는 그녀가 교실을 나간 후 몇초 뒤 깨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