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중국 침략과 관련해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종이호랑이였던 중국은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국토를 유린당했을 것이다.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 홍군(팔로군)이 항일전쟁에서 주로 공을 세웠을 것이다. 일본군은 천황(일왕)을 향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부대로 상명하복이 확실했을 것이다….
중일전쟁에 대한 이런 잘못된 편견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자료를 모아 재정리해 본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상하이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중국은 가만히 있었던 것으로 우리는 착각한다. 반면 대장정으로 대표되는 중국 공산당 홍군의 역할에 대해서는 과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중국 국민정부군이 사실상 항일전쟁의 주체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소련의 전쟁만큼 큰 전쟁을 치러냈다는 사실을 모른다. 중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중국의 국가주의가 완성되었고 현대 중국의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분석된다.
중국 드라마와 영화의 상당수는 중일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중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사극과 멜로물은 물론 SF물까지 나오고 있다. 중ㆍ일 관계가 악화되자 중국 정부는 난징 대학살의 트라우마를 되새기며 반일감정을 부추기고 있기도 하다. 중일전쟁은 중국의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이기도 한 것이다.
중일전쟁은 임진왜란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개전 초기 중국 국민정부군은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일방적으로 밀렸다. 전투 사상자 수는 일본군의 5배에서 10배에 달했다. 상하이와 난징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렸고 난징에서는 중국인 수십만명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교착상태를 버텨내지 못하는 쪽은 일본이었다.
1937년 7월7일 루거우차우 사건부터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8년1개월 동안 지속된 중일전쟁에서 중국 국민정부군의 사상자는 공식적으로만 321만명(더 많을 것으로 예상한다)에 달한다. 사망자 중 장성급만 200명이 넘는다.
중국 국민정부군의 기본적인 군사전략은 '내선작전'이었다. 적을 광대한 영토 깊숙이 끌어들여 끊임없이 괴롭히는 지구전과 지연전술, 유격전을 펼치는 전략이었다. 막대한 희생이 따르는 전략이었지만 일본 역시 버거워했다.
반면 중일전쟁의 90%를 수행했다는 중국 공산당의 선전과 달리 대규모 전투였던 '백단 대전' 외에 팔로군이 수행한 큰 전투는 많지 않았다. 간부 피해 규모를 봐도 팔로군은 부참모장 쭤취안(左權) 외에 연대장급 5명이 사망한 게 전부였다. 파벌로 쪼개졌던 '콩가루' 일본 제국군대는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이다. 관동군을 비롯한 일본 제국군대의 분열이다. "일본 제국군대는 파벌로 쪼개진 군대였다. 육군과 해군도 갈등했다. 일선 사령관들은 합동참모본부 격인 대본영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파벌이 다르면 쿠데타를 일삼기도 했다"라는 증언도 있다
지금의 중국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중일전쟁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역사의 승자인 마오쩌둥 위주로 중일전쟁을 평가하면서 장제스의 역할을 축소한다. 일본에서는 중일전쟁이 잊힌 전쟁이다. '일본은 미국에게 졌지 중국에게 진 것이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중일전쟁은 장제스가 중국 전체의 역량을 모아 일본 제국군대를 막아낸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실체를 제대로 보아야 대국굴기(대국이 일어나다)하는 현대 중국의 모습도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