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창세기 1장 1절과 요한복음 1장의 교차 분석
창세기 1장 1절을 “있음들의 말씀 머리께서 지평(地平)을 비로소 만드셨다”로 해석하는 부분( https://cafe.daum.net/vipassana/30sN/680 )에서 “말씀”이란 말이 낯설 수 있을 것이다. 왜 갑자기 말씀[로고스, 로고ㅅ]인가? 하지만 이런 해석은,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에 보다 가까이 있었던, 요한복음 1장의 첫 부분에서도 보인다( https://www.youtube.com/watch?v=wH3eXZc_7Wo , https://www.youtube.com/watch?v=lqlj1m4eRzM ).
엔 아르케에 에엔 호 로고ㅅ,
전여 명여여단 동직과능3단 관주남단 명주남단
에 태초 있었다 그 말씀이
카이 호 로고ㅅ 에엔
등위접속사 관주남단 명주남단 동직과능3단
그리고 그 말씀은 있었다
ㅍ로스 톤 쎄온,
전목 관목남단 명목남단
향하여 그 하나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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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접 명주남단 동직과능3단 관주남단 명주남단
그리고 하나님은 이셨다 그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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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대지주남단 동직과능3단 전 명여여단 전목 관목남단 명목남단
이것은[그가] 있었다 에 태초 향해 그 하나님을
판타 디 아우토우 에게네토,
형대주중복 전소 명대소남3단 동직아(중디)3단
모든 것들이 통해 그를 순간순간 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은 그 하나님을 향하여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말씀이셨다.
그가 태초에 그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 모든 것들은 그를 통해 (있는-것들로) 순간순간 된다,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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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집 머리께서 창조했다하나님들 을 그 하늘 과.을 그 땅
하나님들의 집 머리께서 그 하늘과 그 땅을 창조했다.
있음들의 말씀 머리께서 지평(地平)을 비로소 만드셨다.
많은 학자들이 요한복음 1장의 첫 부분은 창세기 1장 1절을 다시 말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태초에”는 창세기 1장 1절의 “베레쉬트”를 의역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 말씀[the Word, 로고ㅅ]”이란 말이 뜬금없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말에서는 잘 쓰지 않는 특이한 관사이니 그냥 “말씀”이라고 번역하면 되겠다.
엔 아르케에 에엔 호 로고ㅅ,
전여 명여여단 동직과능3단 관주남단 명주남단
에 태초 있었다 그 말씀이
여기서 말씀은 무엇인가?
말씀이 나오는 근거는, 창세기 1장 1절의 “엘로힘의 베레쉬트께서”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의 우선적인 직역은 “신들의 집 머리께서”로 볼 수 있다. “신들의 집”은, 야훼를 ‘있음,’ 또는 ‘있게 함’으로 이해한 맥락에서 볼 때, “있음들의 집” 또는 “있음의 집”으로 해석하여, “말씀”으로 본 것이 아닐까?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Frg. 1: »Wärend aber der λόγος ständig dieser bleibt, ge-bärden sich die Menschen als die Nichtbegreifenden (άξύνετοι), sowohl ehe sie gehört haben, als auch nachdem sie erst gehört haben. Zu Seiendem wird nämlich alles κατά τόν λόγον τόνδε, gemäß und zufolge diesem λόγος ...
Martin Heidegger, Einfürung in die Metaphysik(VITTORIO KLOSTERMANN): 136
단편 1, “그러나 말씀은 계속 말씀으로 있지만, 사람들은 말씀을 듣기 전에도 들은 후에도 말씀을 붙잡지 못한 자(axynetoi)인 것처럼 행동한다. 말하자면 모든 것은 이 말씀에 따라(kata ton logon tonde) 있는-것이 되는 것이다. ...
헤라클레이토스와 마르틴 하이데거, 요한은 말씀이 ‘있음의 집,’ ‘있음의 신전’이라는 사상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씀은 어떻게 계시는가? 있게 하시기 전의 있음 그 자체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다. 그 말씀은 그 하나님 쪽으로 있었다.
카이 호 로고ㅅ 에엔
등위접속사 관주남단 명주남단 동직과능3단
그리고 그 말씀은 있었다
ㅍ로스 톤 쎄온,
전목 관목남단 명목남단
향하여 그 하나님을
그리고 그 말씀은 그 하나님을 향하여 있었다.
ㅍ로ㅅ['프로스'에서 'ㅡ'음을 뺀 발음으로 영어의 'to,'나 'toward'의 뜻이 있음]는 King James Version[KJV]에서 “with”로, 우리말 성경에서 “과”로 잘못 번역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qlj1m4eRzM ). 말씀이 말씀 이전(以前)이신 말씀 머리[Godhead] 쪽으로 귀를 귀울이는 상태가 삭제‧검열된 것이고, 삼위일체의 관념으로 가는 길이 가속화된 것이다.
그 하나님은 베레쉬트, 즉 말씀의 머리이시다. 말씀은, 늘 말씀의 머리[베레쉬트] 쪽을 향하여 말씀의 머리께서 창조하실 것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다. 말씀은, 어떤 있는 것도 아닌 있음 그 자체[베레쉬트] 속에서, 있음이 모든 있는 것의 나타나 있음으로 말씀하실 것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님[톤 쎄온]’은 창조 이전(以前)이신 베레쉬트이시고, 엘로힘은 말씀으로서 있는 것들의 있음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쎄오스]이시다. 둘은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황과 맥락에 따라 둘을 구별하기도 하고, 동질성을 강조하기도 해야 한다. 있음은 있는 것들의 있음들이고, 있는 것들은 있음의 있는 것들이다.
카이 쎄오스 에엔 호 로고ㅅ.
등접 명주남단 동직과능3단 관주남단 명주남단
그리고 하나님은 이셨다 그 말씀
베레쉬트와 엘로힘의 관계, 그 하나님[톤 쎄온]과 말씀[쎄오스]의 관계는 무척 중요하므로 요한복음에서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lqlj1m4eRzM 31분).
호우토스 에엔 엔 아르케에 ㅍ로ㅅ 톤 쎄온.
형대지주남단 동직과능3단 전 명여여단 전목 관목남단 명목남단
이것은[그가] 있었다 에 태초 향해 그 하나님을
그 말씀이[호우토스]에 태초에 그 하나님[말씀의 머리=베레쉬트]을 향해 있었다.
다시 한 번 ‘ㅍ로ㅅ[to, toward]’가 강조되며, 말씀이 말씀의 머리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으로 믿는 자들을 말씀의 머리로 이끌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을 믿는 자들을 그 하나님으로 이끄는 중계자이고 대제사장(大祭司長) 멜기세덱 같은 존재인 것이다.
있음의 말씀을 통해서, 있음이 모든 있는 것들의 있음으로 순간순간 찰나찰나 나타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qC4Qfd24mSw&t=29s ).
판타 디 아우토우 에게네토,
형대주중복 전소 명대소남3단 동직아(중디)3단
모든 것들이 통해 그를 순간순간 된다,
여기서 “디”가 “통해(through)”의 뜻으로 쓰였는데, KJV에서는 “by”로, 우리말 번역에서는 “말미암아”로 오역되었다. 모든 것들이 말씀을 통해 있는 것들이 된다. 말씀이 원인이 되어 말씀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이 있는 것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있는 것들의 있음의 원인이 되는 자는 말씀[엘로힘]이 아니라 말씀의 머리[베레쉬트]이시다. ‘말미암아[by]’는 역시 삼위일체에 끼어 맞추는 오역으로 보인다.
“에게네토”는 동사 직설법 아오리스트(aorist) 중간 디포태[deponentia] 3인칭 단수이다( https://dongtanms.kr/23469 ). 즉 에게네토는, 한 순간에, 한 찰나에 이루어져 우리 앞에 있는 동작이나 상태이다. 있는 것들이 나타나는 과정은 한 순간, 한 찰나에 이루어진다. 창조는 무엇을 시간이 걸려서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있는 것들의 있음으로 순간 순간 나타나는 과정인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요한복음은 성경에서 그리이스 철학의 로고스에 가장 가까이 가면서도 가장 멀어졌다고 본다. 멀어졌다고 하는 이유는, 요한복음이 전체적으로 은근히,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전유물(專有物)로 만드는 성향이 보이며, 이것이 그리이스 철학에 없을 뿐 아니라 유대교의 구약에도 없던, 원죄설( https://www.youtube.com/watch?v=Tq3gDNBEbPw 1분 20초), 대속설[代贖說=substitutional theory], 삼위일체설로 이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씀을 있음으로 보고 있음의 말씀을 듣는 사람을 철학자로 보았던 그리이스 철학의 여명기와도 멀어질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신”이라고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도 멀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출애굽기 7장 1절, 시편 82장 6절, 요한복음 10장 34~36장). 다시 말하면, 들을 귀 없는 자는 어쩔 수 없고 듣는 귀 있는 자는 있음의 말씀을 이미 듣고 있어 말해봤자 민폐이니, 지금 당장 들리지 않더라도 열렬히 들으려는 자가 있으면 들을 귀가 생기도록 듣는 귀가 이미 있는 자가 도와주는 것이 핵심이지, 반드시 예수를 통해서 십일조를 교회나 성당에 바치며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로 들릴 수 있다. 이 때문에,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거짓 메시아’로 보고,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를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는 보지만 가장 중요한 예언자는 마지막 예언자인 마호멧으로 보는지도 모른다.
출전: https://cafe.daum.net/vipassana/30sN/682
첫댓글 번지수가 아닌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