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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도에 빠지다 외 4편 / 심인숙
하아, 깃털 몇 개 꽂은 고깔모자라니!
눈앞에서 파랑도가
마법사의 주문처럼 탁, 사라지고 없다
나에게 그 모자를 십 분만 빌려다오 아니면 오 분만 오- 오 분만
내게 모자를 씌워다오
목마처럼 겅중겅중 하늘로 날아오르겠다
허리띠는 저 혼자 훌훌 곤두박질치겠지만
아랫도리와 배꼽도 사라지고 모자만 살아남는 즐거움,
시간의 칸막이 속을 주유하며
공터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는 나를 불러볼까
파출소를 지나 개울을 건너
개성여관으로 아버지를 찾아나설까
그러나 오 분은 너무 촉박하므로
미안하다, 파랑도야
양떼구름 속으로 첨벙! 바로 달려들겠다
모자는 어디에 숨겼니?
코끼리바위에게 주었니 갯메꽃에게 씌워주었니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새 파랑도는 싯푸른 각을 세우며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저 멀리 붉은 산호초에 둘러싸인 고깔모자를 향해
손을 뻗는다
달의 角
허공에 걸린 달의 角,
아파트 위로 떠오른 저 초승달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들
판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가시덤불에서 홀로 시름만 뜯고 있었을 것이다
초저녁 하늘에서
우뚝 솟은 뿔을 보았다
너도 중심에서 벗어나고 싶었구나
달무리 주위로 어둠이 쏟아지고 불끈 솟아오른 달의 뿔만 버젓이 내어걸려
푸-푸우,
서서히 움직인다
돌진하는 네 뿔에 받혀 내 숨소리는 가빠진다
門 하나가 열린다
공놀이
햇볕 위로 집이 기우뚱 미끄러져요
어지럼증을 느낀 나는 그만 엉금엉금 침대로 기어들어요
오늘은 방 하나만 차지하기로 하죠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동안
당신은 전등갓처럼 입을 크게 벌려 웃고 있군요
벽들이 빠르게 자리를 바꿔치고 있어요
늦기 전에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수화기가 자꾸 달아나고 있어요
장롱이 거꾸로 뒤집어져요
달력 속의 시간들은 미래로 앞 다투어 나가고
걸어 논 옷가지는 바닥으로 떨어지지도 않고 둥둥 떠다니네요
지금 방은 거대한 공처럼 튕겨지고 있어요
문갑이 천정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서랍들이 의자 위에 걸터앉아요
너구리 인형이 꼬리를 흔들며 미끄러져가고
크고 작은 난 화분이 산발한 채 굴러다녀요
끓어오르는 열정을 싣고 다니며
침대가 또 한 번 신나게 솟아오르지만 뭐, 까딱없어요
문 앞에 앰뷸런스가 당도할 때까지
당신과 나,
온몸에 바람을 불어넣고 가속도를 붙여요
엘리베이터는 喪中입니다
흐린 눈빛을 가진 사람들이 내 몸속으로 들락거립니다. 지푸라기 같은
한숨이 묻어납니다. 누가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아도 나도 이젠 관상쟁이
가 다 됐나 봅니다.
아침이면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605호 여자가 진한 남자 냄새를 풍기며
들어옵니다. 501호 여자는 화요일에 만나는 남자와 팔짱을 끼고 쇼핑을
갑니다. 203호 할머니에겐 모자를 눌러쓴 장정들이 가끔 찾아와 그 때마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곤 합니다. 302호 할아버지는 자주 혈압이 올라
갑니다. 자식 자랑도 줄고 광대뼈가 부쩍 튀어나왔습니다. 나는 그들의
비밀을 실어 나르고 있습니다. 쑥덕쑥덕 하루가 그림자에 껴 있습니다.
지지난밤. 쿵쾅거리는 119구조대원 발자국에 선잠 깨었습니다. 둘둘 말린
모포는 말이 없고 구급차는 급히 원룸을 빠져나갔습니다. 어쩐지 요
즘, 302호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비원과 청소부 아줌마만이
쉬쉬, 다가와 한숨 섞인 소독약을 뿌려댔습니다. 매캐한 냄새에 눈이 아
파옵니다. 할아버지의 구부정한 허리가 눈앞을 서성거리다 사라집니다.
오늘은 喪中입니다. 옆집은 동당거리며 서너 계단씩 뛰어다니는데 점검
중 간판을 내걸고 있습니다. 머릿속에 조등만 환히 밝히고 있습니다.
달과 노래하는 중이에요
초저녁달이 도르래를 내리고 있어요
끊어진 수화기에선 아직도 당신의 말소리가 새어나와요
슬플 땐 노래하라고 밀림의 타잔이 말했던가요
샤우팅 창법으로 노래하고 싶었어요
나는 주춤거리다 이내 달이 끄는 도르래에 올라타요
담을 훌쩍 넘어
아아 새보다 빠르게 달음박질치는 건 내 몸의 긴 그림자예요
달빛 도르래에 매달려
난 정말 가뿐하게 네거리 빨간 신호등을 건너가고 있어요
밧줄을 잡고 나무와 나무의 등을 옮겨 타며 밀림을 지나가고 있어요
아 아 코끼리를 불러볼까요
구구구구 자그마한 구관조들이 몰려오네요
물소리가 들려요 폭포수가 보여요
공기방울처럼 흩어져 내리는 함성들
빈 둥지를 슬쩍 건드리면 하프를 켜는 천사들이 나올까요
당신의 말소리 이곳에선 들리지 않아요
나는 달빛 도르래를 타고 울퉁불퉁한 지평선을 넘어가고 있어요
악보를 삼킨 달이 연거푸 노랠 불러요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詩
<초식(草食)>
바람이 불고 부스럭거리며 책장이 넘어간다.
몇 시간째 같은 페이지만을 노려보던 눈동자가
터진다. 검은 눈물이 속눈썹을 적신다.
그는 빠르게 진행되는 바람의 독서를 막는다.
손가락 끝으로 겨우 책장 하나를 잡아 누르며
보이지 않는 종이의 피부를 더듬는다.
그곳은 활자들의 숲, 썩은 나무의 뼈가 만져진다.
짐승들의 배설물이 냄새를 피워 올린다.
책장을 찢어 그는 입 안에 구겨넣고 종이의 맛을 본다.
송곳니에 찍힌 씨앗들이 툭툭 터져나간다.
흐물흐물한 종이를 목젖너머로 넘기고 나서
그는 이빨 틈 속에 갇힌 활자들의 가시를 솎아낸다.
검은 눈물이 입가로 흘러든다. 재빨리
그는 다음 페이지를 찢어 눈물을 빨아들인 다음
다시 입 속에 넣고 느릿느릿 씹는다.
입술을 오므려 송곳니를 뱉어낸다.
그의 이빨은 초식동물처럼 평평해진다.
다음 페이지를 찢어 사내는 송곳니를 싸서 먹는다.
검은 눈물이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다.
텅 빈 눈동자 속에 활자들이 조금씩 채원진다.
<대왕 문어>
바위에 붙으면 바위 색으로
멍게들 틈에서는 멍게 색으로
별로 쓸 일도 없는 위장술로 핏줄로 전해진 이유를
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바다 바깥에는 산 채로 너를 토막내 먹는
족속이 산다는 것을.
어부들이 양식업 파산의 주범으로 너를 꼽고
삼 년간 네 종족을 뭍으로 끌어올렸다는구나.
광어가 있으면 광어를 먹고
오징어 알이 있으면 오징어 알을 먹는
너는 불한당도 무법자도 아니다.
너를 산채로 토막내 먹는 족속들이
대왕이라는 칭호를 네게 붙였다만
그들은 네 신하가 아니었다.
어부들은 바다 바닥까지 내려와
너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바위틈 속에 숨기라도 하면
산 물고기를 꿴 꼬챙이로 너를 유인한다.
물고기만 살짝 떼가는 너를 두고
영악하다고 어부들은 말하더라만
먹물까지 쏘며 도망가는 너를
어디 그들이 놓치기나 했다더냐.
보트 위로 잡아 올려진 너는
바다 속에서 볼 때보다 쭈그러들어
사진까지 한 방 찍히고 나면 장난감처럼 보인다.
진짜 대왕문어라면 보트 정도는 먹어치워야지
마지막 순간까지 고작 갑판 색으로 위장이나 하는 네가
바다 생물을 다 먹어치울 수나 있겠느냐.
* 조 영 석
- 1976년 출생
- 연세대 국문학과 졸업
-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재학 중
<최종심 심사평>
당선작으로 선정된 조영석씨의 시들은 우선 시의 문법적· 구조적 안정감이 돋보였다. 다양한 방식과 소재를 통해 시적 언어를 모색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정한 수준의 시 언어의 조형적 구축에 성공하고 있는 점이 신뢰를 주었다.
특히 ‘초식’을 포함한 몇 편의 작품들은 참신한 상상력이 가벼운 재치나 산만한 진술로 추락하지 않고 미적인 합리성을 가진 구조를 얻고 있다는 점에서 평가될 수 있었다.
문제는 이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개성적인 언어를 형성할 것인가 하는 점인데, 생의 고단함을 그리는 방향보다는 좀 더 자신의 개성적인 상상적 모험을 밀고 나가는 방향으로 재능이 집중되기를 바란다.
전자의 경우 삶의 페이소스에 관한 진술들은 오히려 시적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많은 시적 가능성을 장전한 한 시인의 탄생에 축하를 보낸다.
- 최종심 심사위원 : 남진우, 이광호, 이문재
<심사평> 문학과 사회(문지)
신인 문학상 공모를 정례화한 첫 회인 때문인지, 예상보다 많은 작품들이 투고되었다. 신인 공모가 마감된 직후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들은 세 장르의 투고작들을 나누어 읽으면서 심사에 들어갔다. 투고작 중에는 [문학과사회]가 그동안 유지해온 진보적인 문학 전통에 걸맞는 문제적인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세 장르 모두 신인 문학상 당선작을 낼 수 있었다. 이번 신인 공모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투고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의 문학적 정진을 빈다.
(중략)
시는 모두 144명의 투고자가 작품을 투고해주었다. 그 중에는 전통적인 범주에서의 `서정시`에 속하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새로운 서정성을 탐구하는 작품도 적지 않았다. 수십 편 이상의 많은 작품을 투고한 경우에는 오히려 자신의 습작을 선별할 줄 아는 안목이 아쉬웠다. [같다의 안과 밖]외 44편의 작품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이 몇 편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작품들의 편차가 심한 것이 문제였다. [가위와 나]외 12편의 작품은 재미있는 발상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있었지만,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소품이라는 아쉬움을 주었다. [밤의 테라스] 외 11편의 작품은 참신한 감각을 선보이는 작품들도 있었으나, 역시 작품들의 편차가 문제로 지적되었다. [콜라캔] 외 10편의 작품들은 과감하고 가벼운 착상이 흥미로웠으나, 시선의 예리함과 깊이가 부족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리운 세탁소] 외 작품들은 일정한 완성도를 얻고 있는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냉장고] 등의 작품은 주목할 만한 수준에 올라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작품 안에 스며들어 있는 감상적인 시선들과 간혹 발견되는 진술의 상투성이 아쉬웠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25시 슈퍼마켓] 외 4편 작품들은 사물과 현상을 묘사하는 시선의 날카로움이 신뢰를 주었다. 사물에 대한 내적 관찰력이 다른 투고작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예리했으며, 상투적인 감상성이 배제되어 있다는 점 역시 평가되었다. 시를 감상의 양식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질문의 방식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적이었다. 비교적 고른 수준의 작품들을 투고했다는 것도 장점으로 부각되었다.
[문학과사회]편집동인
<당선소감>
하재연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현재 동대학원 박사과정.
나는 내가 본 것을 믿지 않는다. 사물에 대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실은 믿지 않는다. 골목들은 많거나 비슷해서 우체국이나, 약국들을 찾다가 가끔 길을 잃는다. 골목과 골목은 모두 통하는 듯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대개 막혀 있다. 나는 내려오는 차단기 앞에서 기차 소리를 듣게 되고, 우체국 주변을 돌다가 포장마차에 서서 오뎅 꼬치를 빼 먹으며, 보도블록 위에서 두통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이 불확실한 기억과 시력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익숙하다고 느꼈던 시간과 곳들의 어긋남. 서로를 무수하게 가로지르고 있는 낯선 시선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기 위해 선택한 것이 말[言]이었다.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대들에 대해 내 시는 착란일뿐 아니라 미지[未知]이고 미상[未詳]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까지나 속편일지 모르지만 거기에 있는 너절함, 속편들이 지닌 너절함의 진실이 가끔은 내게도 곁을 주지 않겠는가?
내 글쓰기의 근원인 아버지와 어머니, 여러모로 격려해주신 최동호 선생님, poetika 사람들, 문학반과 야학에서 만난 사람들, 내 오랜 친구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나는 사랑과 노동을 빚지고 있다. 그들의 고통, 그 빛나는 광선에 나의 시도 `강력`해질 수 있기를, 맹목적으로.
<당선작품>
25시 슈퍼마켓 외 4편
25시 슈퍼마켓의 왼쪽 네번째 선반,
푸른색 정어리 통조림이 천사백 원이다
먼지가 소용돌이 모양으로 앉아 있다
나는 만 원을 내고 동전 두 개를 짤랑거리며 돌아온다
뼈째 담겨 있는 일곱 개의 죽음, 혹은 일곱 끼의 식탁
부엌 창 앞의 정어리들, 뾰족한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있다
정어리의 머리들은 전부 어디로 갔는가?
소나기와 고양이가 가끔 창문을 기웃거리다
그들의 지문을 남겨놓는다
그러나 정어리는 고양이에게 고양이는
소나기에게 소나기는 정어리에게 무관심하다
무관심한 그들의 지문을 며칠째 남겨놓는다
나의 식탁에 가끔 초대받는 것은
검은 구름이다 검은 구름은 고요히 턱을 괴고
나와 나의 저녁에 그늘을 드리운다
구름을 걷어내기란 힘이 들어서
나는 한옆에 그늘을 커튼처럼 늘어뜨리고 깡통을 딴다
내 부엌 창 앞의 정어리 깡통은 언제나 일곱 개다
일곱 가지의 죽음, 혹은 일곱 개의 행운
신세대오락실의 텀블링 세 대를 지나
현대부동산 앞 오래된 평상을 지나면
25시 슈퍼마켓,
나는 자정 이후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
다만 아침까지 주인에게 잊혀진 환한 간판을 상상할 뿐
그리고 25시 슈퍼마켓의 왼쪽 네번째 선반에는
푸르게 절여진 죽음과 움직이지 않는 소용돌이가
쌓여 있다 하나에 천사백 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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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
그는 確實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 그에게 한 말들이 텅,
하고 울려나왔을까? 거품에 대해서라면 나는 어린 시절, 그 어지러웠던
비눗방울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밖에 말할 수가 없다
비눗방울 속 많은 동그라미들 동그라미 안에 나는 여러 개가
되어 건너편으로 건너간다 그 비눗방울들이 어디까지 가는지 나는 볼
수가 없고 이쪽의 나는 계속해서 거품을 분다
이쪽의 나는 아직도 이쪽에 서서 그를 본다 그 사람의 몸 안에는 그
사람이 들어 있어 그는 끝나지 않는 그림이다 그 그림들 들여다보고 있
으면 주위는 순식간에 밀려난다
얇은 막 같은 것이 내 눈동자를 투명하게 만들었다 투명한 막을 넘어
그를 본다 나는 아마도 조금 전의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후에도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確實한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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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효과
지붕 위에 올라간 돼지들을 내가 보고 있던 어젯밤
당신은 술 취해 택시 기사와 멱살잡이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저 화면의 폭우는 미칠 듯이 계속되고
집의 주인들은 없다 지붕은 회색이거나 파란색이지만
돼지들은 어떤 지붕이건 가리지 않고
흙물은 붉다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은
호랑나비 한 종류를 본 적이 있다
그 무늬는 적을 겁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앞선 이와 보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의 등을 잘 보아야 한다
너무 다가서는 순간
등의 표정은 무너지고 만다
거리에서 나는 늘 추월당한다
내가 지나쳐온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의 나비와 보이지 않는 폭풍, 혹은 폭우
새가 아파트 103동과 105동 사이로
조용히 날아간다
하늘에는 새의 곡선이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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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
그 여자의 몸에서 어떤 이상한 기미를 느낀 적이 있는가? 떨림이나
울음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길을 걷다가 당신은 한순간 귀가
먹먹해져올 때가 있을 것이다. 비현실적인 자동차들이 소리없이 당신
곁을 미끄러져가며 주위를 흐르던 공기의 색깔이 아주 조금 엷어지고,
사람들이 종잇장처럼 서로를 스치고 사라져갈 때. 당신의 몸을 다른 여
기로 가져다 놓던 흔들림. 그 파장이 둥그렇게 그 여자에게서 퍼져나노
는 것을. 원들이 어지러운 무늬를 그리는 것을.
세상에는 자신의 호흡으로 숨을 불어넣는 종류의 사람과, 바람 빠진
자전거 바퀴처럼 잘 굴러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다만 그
여자의 보이지 않는 둘레 안에 누군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을, 둥그
런 무늬가 일그러지거나 또 다른 고리를 만드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매
우 힘이 들지만 둘레들은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선택하
는 자라면, 옆에 있거나 떠나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는가? 그 여자는 울거나 웃었거나가 아니라, 다른 쪽을 향해 조금씩 움직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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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간
어려운 건 決心의 문제다 저 구름은 5분 간 한자리에 머물러 있기로
한 모양이다 5분 후 구름은 쉬지않고 내내 자세를 바꿀 수도 있을 것이
다 중요한 것은 내가 보고 있는 5분 간이다 바람이 구름을 지나치는 순
간, 구름의 모양은 흐트러진다 그것이 바람의 힘이었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 逆도 마찬가지다 구름의 힘이
바람을 불러들인 것은 아니다 저기 있는 구름을 결정한 것은 구름의 형
태가 아니고, 내가 보는 구름은 5분 간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구름이다
우리는 5분 간, 아주 약간, 옮겨진 건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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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품 해설>
사물의 불확실성과 흔적의 상상력
하재연의 시적 자아는 사물에 대해 무관심한 듯이 보인다. 그의
시들은 사물에 `나`의 감정이나 관념을 부과하는 시가 아니다. 재래적인 서정시는 근본적으로 `관심`의 시이다. 나의 인간적 심사가 사물의 의미
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서정`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무가
슬프게 서 있다`라고 노래해야 하는 것이다. 하재연의 시는 사물에 대한
`나`의 인간적 관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주 담담하고 투명하게 그 사물의 존재성을 `본다`. 그런데 여기서 `본다`는 행위는 단순히 `발견`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확실성`에 관한 물음을 동반한다. 그의 시선 안
에서 사물은 `과연 있을까`라는 물음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나무가
거기에 있네`라고 노래하지 않고, `나무가 확실하게 있는 것일가` 혹
은 `나는 나무를 알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것을 `무관심한 관심의 시
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와 같은 시선의 중심 이동은 한국 서정시
의 주류 문법과는 변별되는 지점에서의 한 신인의 미학적 출발을 알리
고 있다.
가령, [거품]이라는 시에서 "얇은 막 같은 것이 내 눈동자를 투명
하게 만들었다. 투명한 막을 넘어 그를 본다 나는 아마도 조금 전의 그
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후에도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
는 確實한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라고 말할 때, 화자는 사물이 처한
공간적 불확실성은 바로 그 사물이 처해진 `시간성` 위에서 벌어지는 사
건이다. 이 시에서 왜 시인이 `확실(確實)`이라는 단어만을 한자로 표기
했는가라는 질문은 사소하지만, 중요하다. 왜냐하면 `확실(確實)`이라는
단어야말로 그 한자 표기처럼 이 시에서는 가장 딱딱하고, 가장 의문스러
운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는 確實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라는 진술로
시작되는 이 시는 그래서, `확실(確實)`과 `모른다` 사이의 자기 인식의
틈새를 파고든다. 그 틈에서 상상력은 비눗방울 거품 속의 존재, 혹은 거품으로서의 존재들의 세계로 우리를 빨아들인다. "이쪽의 나는 아직도
끝나지 않는 그림이다. 그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주위는 순식간에
밀려난다"라는 진술에서, `긑나지 않는 그림`이라는 명명은 거품의 존재
에 대한 적확한 표현이 되고 있다. `그`는 `끝나지 않은 그림`, 그러니까
`시간성 위의 그림`이기 때문에 확실하고, 그렇기 때문에 불확실하다.
이런 질문이 구체적인 일상적 이미지의 세계에서 미적 완성도를 성취하
고 있는 작품이 [25시 슈퍼마켓]이다.
나의 식탁에 가끔 초대받는 것은
검은 구름이다 검은 구름은 고요히 턱을 괴고
나와 나의 저녁에 그늘을 드리운다
그름을 걷어내기란 힘이 들어서
나는 한옆에 그늘을 커튼처럼 늘어뜨리고 강통을 딴다
내 부엌 창 앞의 정어리 깡통은 언제나 일곱 개다
일곱가지의 죽음, 혹은 일곱 개의 행운
신세대오락실의 텀블링 세 대를 지나
현대부동산 앞 오래된 평상을 지나면
25시 슈퍼마켓,
나는 자정 이후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
다만 아침까지 ㅈ인에게 잊혀진 환한 간판을 상상할 뿐
그리고 25시 슈퍼마켓의 왼쪽 네번째 선반에는
푸르게 절여진 죽음과 움직이지 않는 소용돌이가
쌓여 있다 하나에 천사백 원이다
이 시는 90년대에 산견 되던 도시적 일상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시
의 소재적인 양상은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시인은 그러나 여기에 흔적
의 상상력을 개입시킨다. `푸른색 정어리 통조림` 일곱 개는 `일곱 개의
죽음`이며 `일곱 끼의 식탁`이다. `통조림은 정어리의 흔적이며, 동시에
깡통은 그 자체로 흔적으로서 존재한다. `소용돌이 모양`의 먼지가 암시
하는 `시간성`은 2연의 정어리와 고양이와 소나기라는 서로에게 "무관심
한 그들의 지문"의 이미지와 대응한다. 통조림 깡통 역시 그 시간성이라
는 조건 위에 처해진 사물이다. 시간성의 층위에서 모든 사물은 조금 전의 사물의 `죽음`이면서 동시에 다음 순간에 올 사물의 `징후`이다. 왜
이 시의 제목이 `25시` 슈퍼마켓인지라는 사소한 의문 역시 중요하다.
`25시`는 하루의 물리적 시간대로서의 `24시`에서 비껴나 있는 잉여의 시
간대이다. 그 시간대는 `내` 상상 속에 자리 잡은, 자정 이후의 "주인에
게 잊혀진 환한 간판"의 시간대이다. 더욱이 그곳이 쾌적하고 환한 편의
점이 아니라, 상품에 먼지가 쌓여 있는 `슈퍼마켓`이라는 공간으로 설정
되어 있어야 하는 이유 역시 주목해야 한다. "푸르게 절여진 죽음과 움직
이지 않는 소용돌이"는 죽은 시간을 묘사하고 있지만, `쌓여 있다`는 형
용사는 그 안에 시간의 동사적 힘을 머금고 있다. 시의 전후에 천사백 원
이라는 자본주의적 교환가치를 상기시키는 것은 그 흔적-상품의 문화적 맥락을 환기시키는 장치이다.
흔적의 상상력은 그의 시의 일관된 미학적 장치이며, 동시에 문법적 구성
력이기도 하다. 가령 [나비 효과]에서 "내가 지나쳐온 것듥은 언제나 뒤
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한 마리의 나비와 보이지 않는 폭풍, 혹은 폭우"
라고 표현할 때, `나비 효과`란 사실상 `흔적`의 효과에 다름아니다. 폭
풍에는 한 마리 나비의 흔적이 숨어 있고, 작은 나비의 존재에는 이미 폭풍의 징후가 숨어 있다. [진동]에서 "둘에들은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다"
라고 묘사할 때의 존재의 `둘레`는 흔적의 육체성이다. [5분 간]이라는
작품에서 "저기 있는 구름을 결정한 것은 구름의 형태가 아니고, 내가 보
는 구름은 5분 간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구름이다 우리는 5분 간, 아주 약간, 옮겨진 건지도 모르지만"이라는 진술 역시, 흔적의 논리 위에 서
있다. 시간성 위에 처해진 사물들은, 이런 차원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
이미 `움직임` 속에 처해 있다.
하재연은 흔적으로서의 사물들에 불우의 정서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사물의 소멸조차도 투명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눅눅한 감정의 누설과 계
몽적인 화법이 시의 미덕이 되던 시대를 우리는 이미 통과했다. 시를 감상과 잠언의 양식이 아니라 존재성에 대한 질문의 방식으로 설정하고 있
다는 것은 충분히 문제적이다. 그의 시들의 일인칭 진술은 표현자가 아닌
관찰자로서의 내적 묘사를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시이며, 그 `견
자`는 사물에 대한 내적 관찰을 통해 그 존재감을 언어화하고자 한다. 그
의 시가 상투성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그 흔적에 대한 투시력의 힘 때문이다. 그의 시들이 우리 시단에서 `나비 효과`를 일을킬 수도 있
다는 예감을 갖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2008년[ 애지] 당선작
바늘비
이광구
하늘에서 바늘비 내릴 때가 있었다
따개비처럼 붙어사는 달동네사람들 모두가
쏟아지는 바늘을 피해 이리 저리 달아나던 때가 있었다
폭우 속 비닐우산이 허공의 꽃잎으로 날리고
거머리처럼 파고든 옷 속의 물 뚝뚝 떨구며
블록 몇 장 쌓아올린 집 안으로 뛰어들던,
이미 천장을 점령하고 뛰어다니는 쥐처럼 날카로운 바늘들
지붕 곳곳으로 내려와 구석에 웅크린 아이들 발꿈치 쪽
바가지나 주전자 속으로 뛰어들며 깨물곤 했었다
따갑다며 옆으로 비켜나는 아이들을 추스르며
찜통이나 고무다라로 받아내던 사람들
방안 가득 차올라 넘쳐나는 바늘을 빗자루로 쓸어 담으며
바가지로 퍼내며 차라리 웃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
넘칠 만큼 넘쳐야 그칠 것을 알았다
골목 가득 넘쳐나는 바늘들 빗물을 꿰며 지나간 뒤
집집마다 아이들 울음소리 넘쳐나고서야
아무 일 없었던 듯 시침 뗀 하늘은
얄미운 낯빛으로 다시 찾아온다는 것을
그때의 그 몸 아프게 찌르던 바늘비는
아이들의 氣穴을 자극하던 약침
가난아비의 지엄한 회초리 되었음을,
실천문학 신인상 시 당선작
기울어진 아이* 외 3편 / 최정진
기울어진 아이* / 최정진
세탁소가 딸린 방에 살았다 방에 들여놓은 다리미 틀에서 엄마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내 몸의 주름은 구김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다림질 밖에 몰랐다 엄마의 품에 안겨 다려지다 어느 날 삐끗 뒤틀렸는데, 세탁소 안에서 나는 구부정하게 다니는 아이라고 불렸다
다린다는 말은 주름을 지우는 게 아니라 더 굵은 주름을 새로 긋는 문제였다 수선된 옷들이 마지막 누운 곳은 다리미틀 위였다 뜨거운 것과 닿으면 닳은 곳부터 반짝거렸다 오래입은 옷일수록 심했다 엄마는 밤마다 어딜 가는지 브라더 미싱 앞에서 드르륵 어깨를 떨었지만 우는 게 아니었다 꿰맨다는 말은 상처를 없애는 게 아니라 얼마나 잘 가리냐의 문제였다 엄마, 엄마 가슴에 난 구멍은 얼마나 크길래 날 실통에 걸어야 했나요 나를 돌돌 풀어 가슴에 안아야 했나요
천장엔 옷가지가 우거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바닥에 흘려두면 주머니 속의 새들이 쪼아 먹었다 엄마, 주는 대로 먹지 않는 헨젤에 관한 동화를 읽고 싶어요 뼈다귀를 내밀기 전에 끝나는 동화 말이에요 밤의 세탁소 깜깜한 비닐의 숲을 헤치고 다가가면, 엄마는 내 바지의 밑단을 늘려 내밀었다 짧아지지 않는 바지 안에 갇혀 내 몸은 부풀고 부풀기만, 그러다 세탁소 밖으로 뻥 터져버렸는데, 그 후로는 얇은 바람에도 어깨를 떨어서 지금껏 너덜너덜한 등을 가진 아이라고 불린다
세탁소가 딸린 방에서 나는 밤마다 기울어졌다 엄마, 내 몸의 기울기에 맞춰 몸을 숙이지 마라 방에도 걸음걸이가 있는지 바지 단에 남은 얼굴처럼 곰팡이도 한쪽 벽에만 핀다 세제의 기울기가 달라서, 얼룩도 때로 빠지는 정도가 다르다 지구에서 잠드는 우리는 제 각기 다른 별의 중력을, 한 자루 가득 꿈 속에 담아온다
*베누아 페터즈
바람세탁소 / 최정진
수면의 바람이 강변의 벚나무에게 옮겨간다
나무에 장이 서는지, 잎들이 소란스럽다
새벽의 퉁퉁 부은 눈꺼풀 속에 지난밤의 꿈을 담아왔다 천막을 팽팽하게 끌어당기면 물건을 팔거나 사러 온 사람들은 장에 가기 전에 읍내 하나뿐인 세탁소부터 들렀다 두고 간 옷가지에 묻어있던 주변 마을의 흙들은 저마다 조금씩 빛깔이 달랐다 그새 얼마나 컸냐, 대빗자루로 마당을 쓸듯 기침소리 앞세워 안개를 걷어내는 할아버지 내 고추 그만 만져요 발갛게 익어 떨어질 것 같잖아요
바람이 벚나무의 가지를 손보고 있다
다음 장이 서면 바람은 벚꽃을 내놓을까
보따리를 풀어놓고 할머니들은 줄지어 앉았다 수다가 들풀로 피어난 그 밭둑 사이에서 나는 보폭을 잃고 둥둥 떠다녔다 자주 길을 잃었지만 실밥이 옷자락에 묻어 나풀댔으므로, 집을 잃지는 않았다 바싹 마른 노을이 걷히면 물건을 팔거나 산 사람들은 읍내 하나뿐인 세탁소부터 들러 집으로 갔다 장터에 남은 바람이 빨랫감을 더 달라고 외치는 목소리로 불어왔다
벚나무가지 바람이 수면으로 돌아온다
벚꽃잎 신발 한 켤레 사 신고 하류를 향해 걸어간다
히말라야 변기 / 최정진
히말라야에서 찍어 온 사진 한 장이 욕실에서 머무르던 밤이었지 꿈속에서 나는 거울을 보고 있었지 거울 속에서 눈 대신 변기를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 변기에 담긴 거울이 소용돌이치며 빨려들 때, 거울이 내 표정처럼 쩍 금가며 말했어 눈물은 안에서부터 차오르지 않아 한 무더기 말과 냄새처럼 피어나는 풍경들을 네 시선이 고이는 곳에 싸질러 두는 거지 거기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구멍 속으로 빨려들다 변기 밖으로 몇 방울 튀면, 그게 눈물이야 나를 보고 싶을 때면 변기를 열지 입을 대고 외친다 여보세요 메아리가 들려온다 변기에 입을 대고 외친다 나야 네 눈망울에 내 얼굴이 찰랑댄다 바람은 메아리를 두텁게 얼리고 어둠을 얼렸지 욕실의 창밖은 걸음을 내디딜 수 없는 벼랑이었어 정상에 다가갈수록 추워지는 기압골에서 별빛은 가려졌다 드러났다 했지 지상의 온기는 죄다 빨려 들어갔고, 언저리에 묻어 고드름처럼 반짝이는 햇살을 보며, 오-해가 떴다 외쳤지 구멍은 뭔가 빨려 들고 있는 중에는 보이지 않지 내 체온을 느끼고서야 따뜻하다고 말했어 아침이면 거울 속에서 나는 부은 몸을 떨며 언 채로 구조되었지
뒷모습 / 최정진
집 안에서 어렵지만 집 밖의
옥상에 가면 그의 굽은 등과 마주볼 수 있다
산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팔이나 다리 중에 하나가 사라지고 없는,
지난 산행에서 돌아오던 그의
왼쪽 다리는 간 데 없고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풍란 한 촉을 절뚝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말없이 가리키는 고갯짓을 따라 먼 산에 가보면
흰 양말을 벗어둔 그의 왼쪽다리가
등산로 구석 나무그늘 아래서
까맣게 여문 발톱들을 매달고
꼼지락거리며 쉬고 있었다
오래 전, 두 팔을 심어 둔 산의 날씨는 사나웠다
바람이 불면 그의 두 팔은 나부낀다
야! 똥 방위라고 놀리던 집주인의 목 언저리에서,
손님의 수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아내 대신
그릇이나 가구들을 집 앞에 생가지처럼 부러뜨려 놓으면서,
팔 대신 뿌리내린 가녀린 화초들은 나부낀다
그때마다 지난밤에 걷히지 못한 어둠들이
웅크린 어깨에 안개로 걸려
아침까지 펄럭인다
하나 남은 오른쪽 다리는 어디에 심을까
옥상 화단에 몇 안 남은 빈자리들을 살펴보는지, 그는 더 웅크린다
화단의 흙을 누군가 다져놓았다
누가 틔운 뒷모습인지 그 발자국에서도
그림자가 자라기 시작한다
최정진 시인
1980년 전남 순천 출생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4학년 재학중
2007년 실천문학 신인문학상 당선
[당선소감]
차에 치인 아이를 본 적이 있다 아이의 몸이었던 살점들은 해가 지는 쪽을 향해 발자국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사고 현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등을 떠밀려서 나는 그만 그 살점 하나를 밟고 말았다
살아서는 만져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석양이 두 눈 가득 번지던 순간이었다 무서웠다 나는 발을 잃고 눈마저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신발을 벗어 길가의 개울에 버렸다 내 눈에 들어온 석양을 눈물로 씻어내고 싶었던 것일까 집으로 달아나면서 한참을 울었다
그 시절의 나는 밖에만 나가면 소지품 하나씩을 흘리고 와서 어머니에게 혼나곤 했다 흙투성이가 된 한쪽 발에 대해 끝내 대답 못하던 그날처럼 당선 소식에 기뻐하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왜 스스로 혼나고 있다 생각한 걸까 내가 또 뭘 잃어버린 건지…
아직 따뜻해서 서늘하던 발 밑의 느낌이 귓가에 느껴졌다 여덟 살 무렵에는 길가의 개울에 신발을 벗어두고 달아났으니, 순간 귀를 잘라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기도 했다 그날 밤, 내 작은 몸이 한없이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꿈을 꾸었다
며칠 째 비가 온다 내가 개울에 버린 신발이 빗속에서 나를 따라 절름발로 오고 있다 신발 속의 웅덩이에는 아직도 차에 치인 아이의 살점들이 흩뿌려져 있을 것이다 이제 비가 오는 날을 '신발' 이라 불러야겠다 귀는 발자국 모양으로 자라기 때문이다 나는 백지에다 빗소리를 벗어두고 달아날 것이다
< 문학사상〉 2007년 하반기 신인상 시 당선작 / 장현숙
가을산 (외 4편)
태양이 초록색 비단 능선을 걷고 있다
금빛 치맛자락을 사그락 사그락 끌며
한 손엔 염료통을 들고
또 한 손엔 붓을 들고 능선을 넘어 가고 있다
푸른 잎사귀마다 붓끝이 스치며
붉은 꽃송이들이 얼굴을 들고 있다
심지어 산새들이 깃을 접어
어둠의 둥지 속으로 날개를 걸어놓고
푸른 잠 속으로 잠입중일 때에도
태양의 손은 쉴 새가 없다
초록의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있던
산 담벼락을 넘어 노란색 염료통을 들고
새벽이 올 때까지
국화꽃 같은 색깔의 꽃을 피워 놓았다
그러니 지상에서 꿈꾸던 달개비풀도
하늘로 날아올라 쪽빛으로 깊어졌겠지
산 주름이 깊어 자글자글하게
골짜기 사이로 하루가 늙어가더니
땀방울처럼 꽃들이 피어 환하다
이제 태양은 붓을 놓고
서쪽으로 금빛 보료를 깔더니
고단한 잠을 청하고 있나 보다
가을이 가기 전에
저 산 한가운데를 가위로 재단하여
붉은 꽃 그려진 비단을
거실 창 커튼으로 걸어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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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뜨개질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에 막 돋아난 잎사귀
보푸라기 일어난 실 같다
노을이 강물에 몸 던지는 시간
황금빛 실로 바람이 뜨개질을 시작한다
물결 화선지 위에 수묵화로 번지는 산 그림자
직선으로 곡선으로 짜 넣고 있다
물고기들이 강물 건반을 콩콩 뛰어다닌다
건반 위를 숨차게 뛰어
사분음표 이분음표를 그려 놓는다
바람은 한 점의 획도 놓칠세라
조심스럽게 무늬로 짜 넣고 있다
풀들이 수줍은 듯 몸을 흔들고 있는 건
조용히 발걸음 옮겼을 선율 때문
파닥거리며 흐르고 있는 음률 위로
마른 갈대가 흔들린다
마지막 붉은 노을이 사력을 다해
제 몸을 밀며 내게 왔다
남루한 붉은 색은
그대 뒷모습을 안은 채 왔으므로
가끔 파르르 떨기도 하는 것이다
이제 가만히 저녁 어스름이
빗방울처럼 내 속에서 뛰는 것을 바라본다
짧은 순간 스러져 가는 것들
코를 지어 짜고 있을 바람에게
바래가는 기억의 한 끝을 부탁해 본다
이 저녁 바람이 짜 놓은 버드나무 스웨터를
버들잎 우표를 붙여 그대에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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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뻐꾸기 소리가
파문을 일으키며 귀에 와 닿는다
소리가 제 몸을 밀어 내 귀까지 온 것
물결이 제 몸을 밀어 강가에 닿듯이
사막의 모래가 제 몸을 밀어 그 끝에 닿듯이
소리가 소리를 밀어 내 귀에 닿은 것
햇살을 온 몸으로 밀어내며 오느라
조금은 야윈 소리로
바람의 부력을 밀어내며 오느라
조금은 힘빠진 소리로 온 것
담벼락에 부딪히지 않으려고 어깨를 겯고 온 것
손을 맞잡고 안간힘으로 온 것
뒤뚱거리는 몸짓으로 팔랑거리며
젖은 날개로 온 것
온몸을 허공과 마주서며 날아온 그대
땀으로 얼룩진 날개엔 아직도 열기가 후끈하다
날개를 감싸 안으며
달팽이관 안으로 고이 접어 넣었다
기억의 회로를 지나 가슴 속까지 왔을 때
뜨겁게 데워둔 심장으로 깊이 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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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처럼
장미꽃 위를 떠도는 시간
나무들이 상두꾼처럼 서 있다
몇 마리 새들의 비명소리가 요령처럼 울렸을 뿐
아침마다 그렁하게 밀어 올리던 생도
한참을 버둥거렸는지
붉은 꽃잎 하나가 저승 문턱을 넘어 간다
―이제가면 언제 오나
에-야-에헤-야아-
상여소리 같은 바람이 꺼이꺼이 지나갔다
울렁거리는 세상을 막 더듬어 갈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놈이 천천히 눈독을 들인 것
탐욕스러운 눈빛도
발자국 소리도 없이 와서는
커다란 입을 벌리고 덥석 물고 늘어진다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놈의 습성으로
단단한 턱에 걸리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
발버둥치면 칠수록 늪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가끔 내 옆에도 그놈의 숨소리가 느껴질 때가 있다
거친 바람처럼 등을 스치고 지나갈 때
식은땀이 소름처럼 돋는 것이다
놈 앞에선 통통하게 살이 오른
허벅지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늙은 시간의 입가에는 붉은 핏자국이 낭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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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무늬
안산 갈대 습지는
아직도 바다 발자국을 품고 있다
물굽이 이랑마다 파종을 하던 갈대 발목에는
조개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물놀이 고랑마다 써레질하던 연잎 손끝에서
해초가 울렁거리던 손짓이 보인다
잠시 우수수 일어서던 물결도
펄럭이던 고등어 등푸른 빛깔
햇살 닿을 때마다 뜨겁게 반짝이는 것은
먹이를 쫓던 갈치 떼 비늘
지워지지 않을 바다 무늬가 새겨진 몸을
버석거리며 잠들지 못하고 뒤척인다
바람도 갈대 사이를 지나 시화호 둑을 지나
바다 쪽으로 불어가는 곳
물살도 갈기를 세워 달려가
제 몸을 바다 쪽으로
돌아 눕히고서야 잠잠해진다
바다보다 깊은 속은
갈매기 소리가 박혀 지워지지 않고
이 무렵 내 몸에도
어머니가 궁글려 온 시간이
무늬를 그리며 흐르고 있다
<현대시> 2008년 상반기 신인추천작품상 당선 _ 최형심, 조혜은
냉장고의 효능 / 최형심
잔소리쟁이 남편을 냉장고에 넣기로 했다. 1미터 70, 키에 맞는 S전자 냉장고를 주문했다. 딩동! 특제 냉장고가 도착했다.
맛이 간 입술은 아래 칸 신선실, 휘두르기 좋아하는 왼손은 야채실, 나머지는 냉동실에 밀어 넣었다. 집이 고요하다.
아침마다 16년 숙성된 남편을 해동시킨다. 먼저 그의 입을 넣고 15분짜리 해동에 타이머 눈금을 맞춘다. 땡! 해동된 입에서 술 냄새와 니코틴 냄새가 확 풍긴다. 밤새 토하다만 라면 발이 엉겨있다. 고춧가루 확 뿌려 볶음용으로 랩을 둘둘 싸놓는다. 부풀었던 집이 가라앉는다.
출근시간 20분전. 땡! 밥상을 엎던 발을 해동한다. 타임오버! 발길질하는 불안한 발. 간이 덜 배었군. 엎질러진 남편을 주워 담아 냉동실 깊숙이 넣는다.
전자레인지를 돌린다. 땡! 밤새 고스톱을 치던 손이 꾸물꾸물 화투장을 찾는다. 눈 깜짝할 사이 내 뺨을 갈긴다. 얼얼하다. 나는 설익은 남편을 랩으로 묶는다. 냉동고의 온도를 확 올린다. 으, 365일 지겨운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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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바이오그래피 / 최형심
5분 전의 내가 충전을 끝내는군요. 10분 후의 내가 자명종을 누르며 아침을 켜요. 이제 5분 전의 나는 전원이 들어오는군요. 10분 후의 내가 기지개를 켜고 커튼을 열어요. 밤새 까맣던 세상의 모니터가 켜지네요. 5분 전의 내 머리위로 푸른 바탕화면이 뜹니다. 오늘 바탕화면의 온도가 약간 내려갔습니다. 완연한 가을입니다.
오늘 가장 먼저 클릭해야 할 것은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죠. 10분 후의 내가 찾아가야 할 경로 : 영등포구→ 여의도동 → 사이버빌딩 → 4989호 →안쪽 두 번째 자리.
5분 전의 내가 10분 후의 나에게 보낸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10분 후의 내가 건성으로 메일을 읽습니다. 5분 전의 내가 커피를 뽑아들고 10분 후의 내가 주식 동향을 살핍니다. 종일토록 둘 중 어느 누구도 고개 들어 바탕화면을 쳐다보지 않았는데 하늘은 혼자 푸르렀습니다.
10분 후의 내가 5분전의 내가 지난달에 다운로드로 깔아놓은 새 애인 아이콘에 접근합니다. 5분 전의 내가 보낸 메시지에 그녀가 보낸 입맞춤이 10분 후의 내 뺨에 뜹니다. 5분 전의 나, 경고 메시지를 띄웁니다. 자판이 바쁘게 입을 놀립니다. 갑자기 창 하나가 둘 사이에 끼어듭니다. 10분 후의 내가 5분 전의 나를 덮쳐 5분 전의 나는 읽지 못하는 파일이 되었습니다.
10분 후의 나, 전원이 꺼집니다. 바탕화면에 어둠이 깔립니다. 오늘밤은 별도 뜨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복사하는 꿈속. 5분 전의 내가 10분 후의 나와,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리부팅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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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 최형심
누군가 골목을 깎고 있다
껍질처럼 벗겨지는, 물 젖은 좌판 여인들
일수를 찍으러 대머리가 지나가고
길가에 쪼그린 고추 배추 시금치 헐값에 베어져나간다
야반도주한 계주 때문에
부글부글 속이 끓어
소금을 치며 버틴다는 새우젓장수
등이 시린 고등어 장수
와르르, 고등어 상자에 얼음을 쏟아 붓는다
몇 년째 변비를 앓고 있는 순대장수
도마에 썩썩 순대를 써는 동안
과부의 전대를 입질한 제비 한 마리
휘파람 불며 지나간다
떨이수박 한 통을 내놓은 광주댁
쩍, 배 가른 수박을
한쪽씩 베어 문 아낙들
푸념처럼 퉤퉤 수박씨를 뱉는다
막다른 골목
껍질 벗겨진 해가 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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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박사 수료(국제법 전공). 현재 미국 MD Kirk School of Law(통신대학) 재학중. 현재 한국직업능력개발원 국제협력실 연구원. 주소 : 수원시 장안구 정자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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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페이지 / 조혜은
햇살에 팔 저린 창문 가에서, 나는
그대가 벗어놓은 중절모가 되었어요.
호수와 바다가 넘실대는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 속으로, 나는
이야기가 되어 던져졌어요.
<그림책 속에서>
물감에 갇힌 사내들이 관현악을 연주할 때, 그대의 이야기는 6페이지 옆에서 처음 시작되었어요. 그녀에게 전할 장미를 물고, 바다 가운데 매달려 돛이 되어버린 사내. 그가 남겨둔 빈 의자 옆에서 모든 건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검은 점이었지만, 나는 선이 되었어요. 그를 향해 지저분하게 그어진 검은 선이 곧 나였어요.
구슬 속에 갇힌 노인이 알록달록한 추억을 향해 접힌 두 손을 뻗을 때, 넘겨진 22페이지에 와서야 알았어요. 마주보고 있어도 그대는 늘 나와 다른 쪽에 있었죠. 무채색 고양이의 미끈한 검은 등 옆에서, 빗방울이 되어 백조의 한쪽 날개를 적시고, 나는 곡선이 되었어요. 그녀의 풍만한 스커트 자락과 틀어 올린 둥근 머리가 곧 나였어요.
그림 아래로 난 펭귄의 두 다리, 혹은 그림 위로 보이는 견고한 균열이 곧 나였어요. 나는 그대의 틈새가 되고, 하얀 평면 위에 구멍을 내고, 그대에게서 훔쳐 낸 주사위에 올라 44페이지 옆으로 굴러가 버리고
낯선 사내가 홀로 있는 갑판 위, 지저분한 얼룩이 되었어요. 한 조각의 햇살. 그 햇살은 누구의 팔도 저리게 할 수 있다고, 사뭇 진지하게 말하는 텅 빈 사내의 뒤에서, 속삭이는 52페이지를 뒤로하고 나는 유희하는 그림이 되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은빛 수도꼭지, 균열, 이미 멈춰버린 영사기 같은 것
거울 속으로 난 붉은 털실을 따라 그림 속으로, 혹은 그림 속으로. 그대와 내가 마법사의 모자에 갇힌 우주처럼 친밀하다는 착각과 어디에도 버려질 수 없다는 공상 속으로, 그림이 주인공이 되는 우울한 희극과 어느 때보다 나이든 아이들이 숨어 사는 아파트 속으로, 88페이지 옆에서야 알았어요. 내가 마차에 훔쳐 싣고 달아나는 지구 속에, 그대는 있지만 나는 없어요. 아무 페이지도 아닌 그게 나였어요.
<그림책 밖으로>
마침내 세상 모든 글자들이
나를 찾아왔어요.
89페이지를 넘어서면
그대도 한 편의 이야기처럼
비어버린 페이지 속에 나는 있지만 그대는 없어요.
* 그림책 : 크빈트 부흐홀츠, 「호수와 바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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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의 4박자 / 조혜은
<다장조인 1악장>
유두를 감싸고 사분음표가 생길 때마다
나는 연주하느라 애를 먹어요
출근하는 남편에게 나의 옆구리에서 나온 커피를 뽑아주고
유명한 반주자인 당신을 불러 나의 열 발가락에
사분쉼표를 하나씩 그려 넣었죠
하지만 당신들은 모두 오선지 속으로 사라져 가요
점점 여리게 혹은 아주 여리게
하루는 질 속에서 뾰족한 꼬리를 단 팔분음표들이 흘러나왔어요
가랑이 사이로, 바짓단 밑으로
나는 발걸음이 빨라졌어요
이모는 새 구두를 선물할 때마다 밑창을 열고
음표들이 없는지 확인했지만
오래된 신발장 안에서 늘어나는 발들
점점 빠르게 혹은 아주 빠르게
<2악장>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연주를 할 때
아내는 목을 늘어뜨리고 악보 끝에서 발가락을 잘랐다
나는 으뜸음 위에 올라 단조의 음계로 된 아내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허기를 달래고
아내의 온몸에 내가 아는 계이름을 적어 넣었다
도레미파솔라시
아내는 철로 위를 달리는 코끼리처럼
도레미파솔라시
살아 있다는 걸 무서워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연주를 할 때
아내는 위장을 열고 내가 아는 건반들을 모두 씹어 삼켰다
<사장조의 3악장>
유두를 감싸고 생긴 높은음자리표 옆에
남편만 모르는 악상기호가 여러 개 생겼어요
나는 여덟 개의 새로운 발도 가졌어요
마디마다 여덟 개의 새로운 십육분음표들을 연주하지요
내가 좋아하는 반주자인 당신이 내 골 속에 손을 넣고
메트로놈이 울릴 때마다 실을 당기면
나도 꽤 노련한 연주자인데
귓바퀴를 따라 낮은음자리표가 생겼어요
이제는 나도 꽤 노련한 연주자인데
당신들은 매일 한 옥타브씩 멀어져 가요
도레미파솔라시, 도레미파솔라시
<#이 있는 4악장>
아내가 괴상한 기호로 변해버렸다
두 개의 얼굴에 각각 두 개씩의 팔을 달고
여전히 두 개뿐인 발로는 열심히 페달을 밟는다
솔시레도미솔
아내의 흰 손은 건반 속으로
레#파라
아내의 눈동자도 건반 속으로
정말로 내가 필요한 사람은 여기 없어
꼭 감은 두 눈으로
아내는, 악보 끝에 되돌이표만 남긴 채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2악장>
침대 위에는
플랫(b)이
신발장 속에는 소리를 잃은 음표들이
피아노 선율에 감긴 시간들이 모두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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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를 가진 것들 / 조혜은
하루는 내 손등 위에
육각의 무늬를 그려 넣고,
바다거북이 되었다
그래도 헤어질 땐,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 끝에 맺힌 적갈색 상처를 찍어
발등에 바르고,
웅크려 앉은 정방형 바닥부터
봄에 내린 비가 차오르면, 나는
산란지를 잃고 떠도는 붉은 바다거북이 되고
그렇게 헤어져도, 눈꺼풀이 무거웠다
어제는 내 손바닥 안에
죽은 새끼 거북의 방패무늬 등껍질을 쥐고,
적송이 되었다
다시 만날 땐, 더 단단한 껍질을 가지려고 잇몸을 드러내고 웃었다
잇몸 끝에 드러난 송곳니로 팔뚝을 물어
붉은 가지를 만들고,
내 음부 아래로 손가락만한 당신의 노란 성기가
꽃무늬로 피어나면,
푸른 손톱으로 솔방울을 움켜쥐는 소나무가 곧 내가 되었고
당신을 다시 만날 때마다, 나는 갈라지고 갈라지고 갈라졌다
내일은 나의 볼록한 아랫배 위에
바늘로 소나무 무늬를 찔러 넣고,
호박 등이 되려 한다
눈을 뜨면, 나체로 묻고 나체로 말하고
나체로 된 슬픔을 배꼽 위로 흘려
온몸을 갈색으로 물들이고,
갈색 호박 등 안에 숨어 곡선의 춤을 추는
몸통뿐인,
여인의 무늬가 되려 한다
눈을 떴을 때
모든 건 꿈뿐인
나는, 무늬를 가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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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은 / 1982년 서울 출생. 강남대학교 특수교육학과 졸업. 주소 :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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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選 後 感 >
250여 분의 응모자들 가운데 두 차례의 예심을 거쳐 열 분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분들 가운데 세 분은 이미 저명 시 계간지나 현상응모, 기타 신춘문예 등에 당선된 이력이 있어 심사에서 제외하였다. 전체 응모자의 수나 작품의 수준은 예년의 평년 수준을 약간 웃도는 느낌이었다. 이번 심사에서 특이한 점은 대입 때문인지 고등학교 재학생들의 응모가 10여 명 있었는데, 수준은 기성시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아무튼 본심에 오른 일곱 분은 가나다순으로 권혁찬, 배문선, 이상학, 이언지, 조창규, 조혜은, 최형심 씨들이다. 우리는 이 가운데 최형심, 조혜은, 배문선 씨의 작품을 놓고 최종 논의하였다. 우리가 보기에 이 분들의 작품이 다른 분들의 작품보다 나아보였다. 이 분들은 모두 기성으로 소개해도 충분할 만큼 우리시의 평균적인 수준에 이른 분들이다. 오랜 논의 끝에 우리는 신인의 패기와 앞으로의 성장가능성을 보아 최형심 씨와 조혜은 씨를 새로운 시인으로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합의하였다. 우리는 배문선 씨는 물론 조창규 씨도 앞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재목이라고 생각하였다.
최형심 씨를 추천한다. 최형심 씨의 시는 한마디로 말해 오늘을 사는 캐리어 우먼의 디지털적인 도시서정이라 할 수 있다. 과거 한국시의 디지털적 상상력이 소재 차원에 머물렀다면, 최형심 씨의 시는 디지털적 상상력이 육화되어 자연스럽게 시 속에 드러난다. 새로운 도시문명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냉장고의 효능」에서 보듯이 잔소리쟁이 남편을 냉장고에 넣어버리고, 전자레인지로 해동시키고, 다시 랩으로 싸 냉동고에 넣어버리는 지겨운 일상(?)이 ‘땡’하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메뉴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요술쟁이 아내와 같이 한편의 시를 능숙하게 요리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능력은, 다소 거친 부문도 있지만, 최형심 씨 시 전반에 드러나는 좋은 덕목이자 재능이다. 어떻게든 한편의 시를 만들어내는 이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최형심 씨를 안심하고 시단에 소개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 솜씨는 전반적으로 보아 섬세하고 매끄러우며 새로운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다만 가능성이다. 새로운 도시서정을 온 몸으로 사는 이 젊은 여성 시인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선배 시인들이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즉물적인 오늘의 일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노래할 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최형심 씨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부탁하고 싶다. 최형심 씨의 시 속에는 비유가 없거나 빈약하다. 비유는 운율과 함께 시의 중심이 되는 두 축 중의 하나로 시에 입체감을 더해 줄 뿐 아니라 비유를 통해 시인은 이른바 자신의 철학적 사유와 시적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디지털적인 도시서정이 즉물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훌륭한 비유로 거듭난다면 최형심 씨의 시는 지금보다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질 것이며, 그를 시단에 소개한 우리는 매우 행복할 것이다. 정진을 바란다.
조혜은 씨를 추천한다. 조혜은 씨의 시는 한국시의 새로운 징후를 젊은 시인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서태지의 등장 이후 한국의 가요가 서태지 이전의 가요와 서태지 이후의 가요로 갈렸듯이, 한국시의 새로운 징후는 한국시를 미래파 이전의 시와 미래파 이후의 시로 나누어 놓았다. 세대가 다르니 소통이 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 새로운 징후를 한마디로 압축해 말한다면 우리 시단에 이른바 래퍼들이 등장한 것이다. 과거의 시가 노래였다면 새로운 시는 랩과 노래의 혼합인 것이다. 이것은 판소리가 아니리와 창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다. 노래만으로는 복잡다단한 오늘의 삶을 제대로 담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랩 속에는 새로운 세대의 서사와 진술이 환상적으로 혼합되어있다. 어떤 시인은 창을 모르는 삼류 아니리 광대처럼 죽어라 아니리만 불러대고, 어떤 시인은 훌륭한 광대처럼 창과 아니리를 모두 노래한다. 크게 보아 한국시는 지금 성장통을 앓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조혜은 씨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 시의 새로운 징후를 몸으로 체득하는 안테나와 새로운 환경을 개척해 나가는 시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미 익숙한 것이지만, 감각의 새로움을 느끼고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조혜은 씨에게 부탁하고 싶은 바가 있다면, 요설과 현란한 수사와 이미지 과잉이 넘치는 시단에 소통되지 않는 언어로 시를 쓰는 일군의 시인들 이후의 시를 써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설익고 거친 아니리 광대 이후의 시인을 기대해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무리한 부탁인가? 정진을 바란다.
늘 드리는 상투적인 말씀이지만, 본지에 응모해 주신 모든 응모자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당선자들에겐 축하의 말씀을 그렇지 못하신 분들껜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위원_ 강인한, 노향림, 원구식(글)
2007 세계의 문학 신인상 당선작
오르골 여인 외 5편 / 김지녀
오르골 여인 / 김지녀
태엽을 감아요 어떤 예감처럼 팽팽한 느낌이 나쁘지 않죠 누군가 벽을 타고 오르고 있어요 그리다 만 벽화 같아요 내 얼굴은 밟고 지나간 발자국 같아요
부풀어오르는 나무들 몸 속으로 수혈되는 그늘 조금씩 깊어지는 눈 그늘 그 속에 고여있는 떨림 울림 당신과 나는 바람이 가득한 상자랍니다
당신의 소리는 날마다 아름답군요 스스로 돌고 있는 지구에서 나는 중심을 잃어요 한 발로 디딘 세계는 어지러워도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 가며 땅의 흔들림을 짚어보고 일년이 지나도
나는 가벼운 뼈를 움직여 오래 걸었어요 밤 깊은 곳으로 달아나는 달과 숲의 함성을 기억해요 나는 당신과 밤의 태엽을 감고 있어요
큰 파란 바람의 저녁 / 김지녀
바람은 쉽게 땅에 발을 내려놓지 못하고 달아난다
강을 지나 일 년 내내 눈 쌓인 계곡을 지나
그러나 간단하게 뭉쳐지는 구름들 사이로
무섭게 직진하고 있는 태양의 기둥을 지나
벽을 뚫고
천년 전에 만났다 헤어진 사람의 눈동자를 핥으며
지구를 만년쯤 돌고 있는 바람이 이마에 와 닿을 때
국경을 넘어온 얼굴처럼 얼어있는 저녁을 바라볼 때
나는 기둥, 이라는 제목의 나무
활엽으로 침엽으로 옮아가는 숲의 그늘
절벽 위에 서 있으면 어느 고원을 떠돌다 사라진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맴돈다
입술 튼 바람은 서로를 끌어당기며 전진하거나 융기하는
대륙의 저 끝에서 잠시 날개를 접고
녹아 내리는 얼음을 밟으며 며칠 밤낮을 걸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함께 울었을 것이다
몇 달이 지나도 눈이나 비가 오는 숲에서
알을 품은 적 있는 둥지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나무 잎사귀가 다 떨어진 저녁
바닥에 누워 영원히 눈감는 자의 호흡은
처음 비행에 나서는 새의 눈빛처럼 새까만 것이어서
수없이 흔들리며 가라앉아 간다
입 벌린 채 마른 강을 건너가듯이
나는 갈증을 느끼며 파랗게 변해 가는 피부 속에
활공하는 바람의 말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바람이 데리고 온 먼 곳의 먼지들은 낮게 휘돌다 단단해진다
밤과 나의 리토르넬로 / 김지녀
어젯밤은 8월이었어요 날마다 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 사람들의 등 뒤로 여름이
가고 있지만 가을은 오고 있지만
나는 아직 한 장의 얼굴을 갖지 못한 흉상
여름과 가을 사이에 놓인 의자랍니다
나는 체스의 규칙을 모르지만
우리를 움직이는
밤과 낮의 형식은 좋아해요
눈을 감았다 뜨면
감쪽같이 비가 오거나 목소리가 변하거나
나무들이 푸르러졌어요
누군가 피를 토하면서 다리를 꼬고 있다면
그건 죽음에 대한 예의일 것이고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면
그건 나에 대한 의심일 테지만
나는 너무 조금밖에 죽지 못했다*고 말할 거예요
사소한 바람에도 땅을 움켜잡는 나무가
의자에 붉은 잎사귀 몇, 뱉어 놓는 밤에
나의 입안에선 썩은 모과 향이 꽃처럼 확, 피었다 지고 있어요
칙칙과 폭폭 그리고 망상 / 김지녀
나를 위해 노래해 줘 뱃속에서 잠자는 망상을 깨워 줘 기차는 또 달리지 같은 레일 위에서 칙칙, 사람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있지 칸과 칸 사이를 폭폭 질주하지 몽유병을 앓는 것처럼
달려야 해 용기가 필요해 칙칙한 노래는 듣기 싫어 나를 촉촉, 갉아먹는 망상은 희망이야 터널을 뚫는 힘이야 역마다 잘 가꿔진 꽃나무가 꽃을 버리기 위해 흔들려
한 병의 소주와 갈기갈기 찢어진 오징어 다리 사이에서, 내 이름은 너무 고유해서 고유할 뿐 그렇지만 칙칙,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네 내 노래는 오래 전부터 무감각해 여긴 어디야? 그 곳은……폭폭,
누구나 가슴 속에 새장은 있다네 밤마다 새장을 칙칙, 쪼아대는 새를 키우고 있다네 등에는 화살에 찔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지 살짝만 건드려도 비명이 폭폭, 나올지 모르지
아까부터 머리가 아파 나를 위해 노래해 줘 흘러 다니는 의자를 위해 소주를 따라 줘 난 오징어의 눈을 찾을게 사람들의 수다를 치표해 줘 그리고 달려 줘,
쓰다듬는 손 / 김지녀
그의 손은 검은 강을 지나 푸른 나뭇가지를 지나 내 얼굴을 지나 잔디를 쓸어 본다, 보이지 않는 손에 묻은 얼굴이 푸른 나뭇가지를 지나 검은 강으로 그를 따라간다 나를 보며 웃는
거대한 먹구름, 비명이 오래될수록 울음이 작아질수록 먹구름은 커진다 모든 것은 흡수된다 소용돌이치는 얼굴, 그의 등에 업힌 나는 울고 있다
몇 개의 이력이 검은 강을 건넜다 잔디 위에 남은 자리는 이미 식어 있다 그곳에 앉아 나는 잔디를 쓸어 본다, 손에 묻어나는 이력들 뭉그러지는 검은 잉크 자국들
먹구름은 모양을 바꾸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나의 손을 잡고 있다 조여지는 손목이 잘려 나가기를 그의 손에서 푸른 가지가 돋아나기를 나의 비명이 먹구름을 통과해 주기를
그는 등뒤에서 언제나 나를 훔쳐본다 어디선가 먹구름을 이끌고 잔디를 쓸어가며 보이지 않는 손이 나의 얼굴을 지나고 있다
A 그리고, a / 김지녀
에이, 라는 점에서 그들은 동일하다
낮에도 밤 같은 방에서
작은 여자 A는
밥 먹고 잠잔다 그리고 가끔, 웃는다
아직 오지 않은 애인을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
요리를 한다 매일
작은 여자 A와 무관하게
큰 여자 a는 계란을 삶는다
아직 떠나지 않은 애인을 위해
고개를 숙이고
흰자에서 노른자를 골라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러나 웃는다 가끔,
초인종이 울리기도 한다
작은 여자 A와 큰 여자a는
말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문을 열거나 열지 않는다
그들은 에이, 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작은 여자 A와 큰 여자a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덜컹거린다
서로를 알아채지 못한다
김지녀 시인
1978년 경기도 양평출생
성심여대 국문과 및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심사평]
당선작으로 결정한 최정진 씨(기울어진 아이외 19편)는 투고 작품 전편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든든했다 전체적으로 언어의 밀도가 높고, 오랜 숙고 끝에 얻었을 다채로운 이미지들이 시편마다 풍요롭게 내장되어 있다.
의도적인 여백의 창조가 필요하다 싶을 만큼 넘치는 이미지들이 다채로운 비유들 속에서 오히려 길을 잃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띄지만, 그 실족은 그대로 또 다른 매혹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미지의 결여보다는 이미지의 잉여가 시를 출발하는 시기에는 장점이 될 수 있음에 우리는 동의하였다 이는 시적 언어에 대한 충분한 자의식을 이 시인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실한 관찰과 습작의 내공, 상상의 기미를 포착하는 기민함, 이미지가 이미지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상처와 조우하는 진정성, 서정적 언어 속에서도 전복적 상상력의 가능성을 내장한 점 등을 골고루 평가하여 최정진씨를 신인 시인으로 모신다
여러모로 다채로운 가능성을 가진 젊은 시인의 출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시부문 심사평 : 최두석, 박수연,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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