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편 데뷔작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로 2005년 SICAF 장편경쟁 부문 우수상을 차지한 신카이 마코토가 올해 SICAF 개막작으로 따끈따끈한 신작 <초속 5cm>를 들고 왔다. 이번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을 탐구하는 신카이 특유의 서정적 감수성이 짙게 묻어난다.
아무리 쿨함이 대세인 시대라 하지만 신카이 마카토에게 쿨함은 관심 밖의 일이다. 세상이 휙휙 돌변해도 <별의 목소리>의 노보루처럼 8년 7개월 만에 우주에서 날아오는 문자메시지를 기다리면서 가슴 저밈을 견딜 줄 아는 사람이 신카이 마카토다.
자신의 "감수성의 원천은 동안"이라고 수줍게 웃음 짓는 그는 한밤의 편의점 풍경처럼 일상의 정지된 순간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삼을 듯한 문학소녀, 아니 소년 같다.
그가 2002년 게임회사를 다니면서 모은 돈 2천만 원으로 연출, 각본, 편집, 사운드 등 모든 것을 도맡아 만든 중편 <별의 목소리>는 전세계 애니메이션계에 혜성 같은 신인, 신카이의 존재를 알렸다.
SF적인 시공간을 배경삼아 떨어져 있는 두 연인의 애틋함을 담아낸 이 문제적 데뷔작은 그만의 감수성과 혁신적인 1인 제작방식의 완성으로 인해 수많은 애니메이터들의 추종을 받았다. 그 후로도 신카이 마코토는 장편 데뷔작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이하 <구름의 저편>)를 통해 고통스럽게 성장하는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이어왔다.
<초속 5cm> 역시 두 사람만의 특별한 마음을 간직한 소년, 소녀가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헤어지고 난 후의 이야기를 담는 애니메이션이다. 쌉쌀한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모티브 삼아서 벚꽃비가 내리는 어느 봄날, 기차 소리와 함께 헤어진 그들의 과거를 조심스레 들춰본다.
이처럼 신카이가 <별의 목소리>부터 지금까지 소년과 소녀가 성장하는 테마에 꾸준히 관심을 갖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10대 중, 초반부터 40대까지의 모든 사람들이 사실상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즉, 성장이라는 테마는 감독 자신의 테마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그는 현재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지만 무엇이 진정한 성장인지 고민하며 살고 있다. 작품 안에서도 진짜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 성장의 터널을 걷는 소년의 마음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한 편 한 편 쌓이는 필모그래피와 함께 그도 성장해온 셈이다.
하지만 신카이는 자신의 두 번째 장편영화 <초속 5cm>를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장 가벼운 마음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 중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만을 담으려 애쓰면서 한 편으로는 <별의 목소리> <구름의 저편> 같은 전작들의 SF적 요소들을 덜어낸 것이다. 감독은 “애니메이션의 소재로 로켓을 쓸까 전철을 쓸까 고르는 것처럼 SF도 소재로 선택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데뷔작인 <별의 목소리>도 애초의 버전엔 SF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다.
많은 이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주변 의견을 모으다가 SF적인 요소를 첨가했을 뿐이다.
<초속 5cm>는 확실히 '신카이 월드'의 정수다. 그러나 단편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에 이어 중편 <별의 목소리>와 첫 장편 <구름의 저편>까지 만든 신카이가, 네 번째 영화이자 두 번째 장편 <초속 5cm>를 세 편짜리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분명하다. 1인 제작방식을 고수해온 신카이 마코토에겐 "아직 단편이 더 호흡하기 편하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1시간 반에서 2시간이나 되는 영화보다는 마음 편하게 아이팟에 넣어서 짬날 때 꺼내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종종 자신의 경험과 살아온 배경을 영화 속 추억의 장소들로 되살려낸 방식은 이번에도 여전하다.
<초속 5cm>의 1부 ‘벚꽃초’에는 주인공 다카키처럼 눈 때문에 전철에서 꼼짝 못했던 신카이의 개인적인 기억이 반영됐다. 사실적인 배경은 한 달 보름 정도 카메라를 매고 직접 헌팅을 다니며 2만여 장이 넘는 사진을 찍어와 밑그림을 그려 만든 것이다. 다카키와 아키라가 함께 벚꽃비를 맞으며 거니는 길은 현재 감독이 살고 있는 동네의 골목이기도 하다. 스쳐가는 공간을 마법 같은 풍경으로 화면에 담는 그의 솜씨가 그 어느 때보다 돋보이는 장면이다.
이렇듯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이미지를 가장 편한 방식으로 조합한 <초속 5cm>는 그의 전작들이 보여주는 빛의 미학을 한층 업그레이드시켰다. “빛의 강약을 중요시 여기는 데엔 이유가 있다. 아름다운 장면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데 큰 격려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표면적으로 화사한 그림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신카이 월드에선 슬픔과 고독의 떨리는 감정들조차 행복했던 순간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추억의 이미지들을 정교하게 빚어낸다.
2부의 여주인공인 카나에가 겪는 힘겨운 짝사랑의 순간들이 그 어떤 이미지보다 반짝이게 느껴지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신카이 역시 그렇게 매일매일 성장의 터널을 통과해 간다. 그와 똑 닮은 애니메이션도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어른이 돼서 무엇을 할지 정한 것이 없는 다카키처럼 나 자신도 아직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한 작품 한 작품을 만들어 가면 결국 내가 되고 싶은 그 무엇이 보이지 않을까. 그걸 기대하면서 한 편 한 편 열심히 만들 것이다.”
알 수 없는 내일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년의 마음으로 그는 종종 추억을 뒤돌아본다.
[필름 2.0 2007-06-1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