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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루증을 앓는 여인과 회당장 딸의 죽음
1 혈루증을 앓는 여인
2019, 2, 17 주일설교 (서울새교회 담임목사)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 이러라.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 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열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눅 8:40-48)
사람이 힘과 지혜에 있어서
하나님이 전부이고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때,
또는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사람으로부터는 악 외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굴복한다.
사람이 그러한 것을 마음으로 인정할 때
그는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되고
그렇게 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올 때
자체로 악일뿐인 그의 자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계시록해설 77)
주님께서 갈릴리 호수 건너에 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반갑게 맞았습니다.
무리들이 주님을 맞이하는 모습을 본문 40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 이러라.”
“무리”의 영어 성경의 표현은 “people”인데,
그것은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무리”는
갈릴리 건너편 사람들과 같은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또 본문에는 “예수”께서 돌아오셨다고 했는데,
예수는 선으로써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무리들이 예수를 환영한다는 것은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진리 안에 선이신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 안에 선이 있을 때
악을 멀리할 수가 있고 이웃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무리들은 예수가 돌아오시자 그렇게 반가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 있다고 해서
누구나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로 오셔서 그들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 전적으로 의지해 병을 고친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중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 이고,
다른 하나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입니다.
이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어떻게 주님을 받아들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41절에는 주님과 회당장 야이로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더라.”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진리 앞에 지극히 겸손함을 나타냅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예수의 발”은 몸의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자연적인 진리 즉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의미하는데,
그 속에 내적 진리가 들어 있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내적이라고 할 때는 그 만큼 선에 가깝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발은
내적 진리로 가득한 자연적인 진리를 뜻하며,
다르게 표현하면 선이 있는 진리를 뜻합니다.
내적 진리로 충만한 자연적인 진리는
마치 주님의 인성 안에 여호와의 신성이 함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인성 (주님이 입으신 몸)이
말씀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자연적인 진리와 상응한다면
여호와의 신성은 가장 깊은 곳의 내적진리와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신 주님으로부터
무한한 능력이 나오는 것처럼,
내적진리를 품은 말씀의 자연적인 진리로 부터도
무한한 능력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당장 야이로나 혈루증을 앓는 여인 모두
말씀의 글자의 뜻에 담긴 내적진리의 능력으로
병고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이로가 주님의 발아래 엎드린 것은
그가 내적 진리를 담은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부터
무한한 능력이 나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야이로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린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 앞에 겸손한 사람입니다.
야이로가 주님께 자기 집으로 오실 것을 청했습니다.
집은 사람의 의지를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으로 주님을 청하는 것은
내적인 것이 들어 있는 말씀 또는 선이 있는 진리가
자신의 의지 가운데로 오는 것을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초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내적인 것이 들어있는 말씀이시며
그러므로 선이 있는 진리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야이로가 주님을 집으로 청한 이유를 42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는데 죽어감 이라”
말씀에서 “아들”은
보통 이성을 나타내거나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딸”은 의지 또는 선을 뜻합니다.
그리고 12살이라고 할 때
12는 인애와 믿음에 관한 모든 진리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12살 된 딸이 죽어가는 것”은
말 그대로 “회당장의 딸이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회당장의 영적인 상태가 죽어가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인애와 믿음에 관한 모든 진리들을
이해하고 그것을 믿지만 실천할 의지가 없음을 뜻합니다.
그것이 12살 된 딸이 죽어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들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에 따른 삶인지를 분명히 알지만
이해관계 때문에 또는 의지가 말을 듣지 않아서
그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될 때 점점 타성이 생겨
마치 강물에 떠내려가듯 진리의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회당장의 영적인 상태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주님이 자신의 의지가운데로 오셔서
죽어가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살려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죽어가는 딸을 위해 주님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는데
도중에 한 혈루증 앓는 여인을 만납니다.
여인에 대해 4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공교롭게도 이 여인 역시 병을 앓은 햇수가 12해라고 합니다.
여기서 12해는 회당장의 딸이 12살이 되었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즉 이 여인 역시 주님과 인애에 관한 모든 진리들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삼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혈루증을 앓고 있습니다.
혈루증이란 일종의 부인병인데, 하혈을 하기 시작하면
출혈이 멈추지 않는 병입니다.
말씀에서 피는 진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출혈을 계속하는 것은 진리를 계속 잃어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아이들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배우면 잊어버리고 배우고 나면 또 잊어버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학업이 공부가 늘지 않습니다.
언제나 제 자리 걸음을 하거나 오히려 퇴보를 합니다.
신앙인들도 그렇습니다.
진리를 배우기는 하는데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 사람입니다.
진리에 따라 어떤 일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거나,
오히려 진리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악한 영들이 와서 진리를 파괴합니다.
마치 농부가 뿌리면 새들이 날아와 먹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상태가 진리를 잃어버리는 것이며, 혈루증을 앓는 것입니다.
여인이 주님의 뒤로 와서 옷 가장자리를 가만히 만졌습니다.
그랬더니 혈루증이 즉시 나았습니다.
여인이 주님을 마주 보지 않고 뒤에 있는 것은
그가 아직 주님과 결합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계속해서 잃어버리기만 하는데 어떻게 주님과
결합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인들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시험에서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시험 중에 일어설 힘조차 없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인의 상태가 그랬습니다.
여인은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가 찾아다닌 의사는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고,
세상의 지식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여인을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의 뒤로 와서
옷섶을 붙잡았습니다.
여인은 왜 주님의 옷을 덥석 붙잡지 않고
가장자리를 붙잡았을까요?
옷의 가장자리는 가장 바깥쪽의 진리,
즉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이로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린 것이나
혈루증 앓는 여인이 주님의 옷섶을 붙잡는 것은
영적으로는 비슷한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말씀의 문자적인 뜻 안에 있는
내적 진리의 능력을 확고하게 믿는 모습입니다.
말씀의 글자의 뜻 안에 내적 진리가 담길 때
가장 힘이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 이유는 그때 말씀의 글자의 뜻 안에 주님이 계셔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말씀의 글자의 뜻 안에
내적인 진리를 충만하게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셨던 기간은
말씀을 온전하게 하는 것, 즉 말씀의 글자의 뜻 안에
내적인 진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완전한 말씀이 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것은
말씀을 다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인성과 신성을 하나로 만드심으로 해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고 인류를 구원하신 것처럼
말씀의 글자의 뜻 안에 내적 진리가 충만하게 될 때
우리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때 주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진리만 소중하게 여기고
문자의 뜻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릇 없이 내용물만 끌어안고 있는 것과 같아서
결국은 내용물마저(내적인 것 마저)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바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옷섶을 만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글자의 뜻 안에 있는 내적인 진리의 능력으로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때 주님의 능력이 여인에게로 흘러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병이 즉시 나았습니다.
왜냐하면 만지는 것은 소통이 일어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아간 줄을 앎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뒤에 숨어 있던 여인이 주님 앞으로 떨면서 나아왔습니다.
그 모습을 4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더라.”
주님께서 숨어있기를 원하는 여인을 사람들 앞으로 불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왜 여인을 그대로 두시지 않고 불러내셨을까요?
여인의 입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신 이가 주님이라는 것을
증언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병 고침의 기적이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고백을 주님께 늘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이룬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공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의 것을 훔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인을 불러내시어 믿음을 고백하게 하시고,
모든 공을 주님께 돌리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주님의 생명으로 온전히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인이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여인이 병을 고친 것이 그의 믿음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말씀에는
주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 이고,
하나는 혈루증을 오래 앓았던 여인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진리 앞에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린 것으로,
또 주님의 옷 가장자리를 만졌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겸손하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한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회 안에서
주님을 아버지와 아들로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과 진리를 분리시키는 일이며,
믿음과 인애의 삶을 분리시키는 일입니다.
말씀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각각 주님을 이루는 두 가지 본질인
선의 본질과 진리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아버지는 선으로서 본질을 나타내고,
아들은 선에서 비롯한 진리로서 본질을 나타냅니다.
주님에게 이렇게 두 가지 본질이 있는 것은,
사랑이나 선은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고,
진리로 표현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둘이 아니라 한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말로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을 구별하는 사람들이
믿음과 인애의 삶을 분리시켰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또한 주님 앞에 겸손하다는 것은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며
인간에게서는 악과 거짓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와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그것을 모두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과 소통하려고 했습니다.
야이로와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이와 같이 주님 앞에 겸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또 있습니다.
둘 다 말씀의 글자의 뜻에 담긴 내적진리의 능력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씀에서는 야이로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린 것으로,
그리고 혈루증 앓는 여인이
주님의 옷섶을 만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의 발이나 주님의 옷섶은
모두 내적 진리가 담긴 말씀의 글자의 뜻을 나타냅니다.
말씀의 글자의 뜻의 중요성에 대해서
새교회 가르침 “성경에 관한 교리 54항”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즉 “교회의 교리는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부터 이끌어내야 하고
글자의 뜻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내적 진리들은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 표상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진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진리이신 주님이라는 사실과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둘이 아니라
한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
주님은 “열매 맺는 사람에게 더 많은 진리를 주시고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가지고 있는 것마저
빼앗아버린다는 것” 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들이 모두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 표상된 내적 진리들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교리는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부터 이끌어내야 하고,
또한 글자의 뜻으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부터
내적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행할 때
말씀의 무한한 능력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나타납니다.
내적 진리를 중하게 여기고 상대적으로 자연적인 진리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내적 진리와의 관계를 무시하고
자연적인 진리에만 매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진리는 내적진리의 표상이며
내적진리는 자연적인 진리의 본질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야이로와 혈루증 앓은 여인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말씀의 자연적 진리 안에 담긴 내적진리의 능력에 의지해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매일같이 말씀을 읽으시고 그 안에 담긴 내적 진리를 깨달아
삶에 적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 우리들의 삶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여인이 예수의 뒤에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눅 8:44) 아멘
2 회당장의 딸이 살아나다
2019, 3, 3 주일예배설교 (서울새교회 담임목사)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붙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그 부모가 놀라는 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하시니라.”
(눅 8:49-56)
신앙은 주님에 대한 인식의 질에 따라
주님이 사람 안에 계시도록 만든다.
사람은 다른 것 즉 그가 믿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거부한다.
주님이 사람에게 있는 어떤 것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신앙에 의해 주님의 신성이 사람의 밖이 아니라
그의 안에 계셔야 하기 때문이다. (계시록해설 815:8)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병을 고치시고
회당장의 집을 향해 가시는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는 까닭은
죽어가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때 어떤 사람이 와서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합니다.
본문 49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 말씀하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계속해서 회당장을 가르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회당장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온전히 믿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골몰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영적인 문제가 있을 때, 또는 시험 중에 있을 때
주님은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이 옆에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주님께서 끊임없이 가르치심을 주시고자 하나,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자신의 생각에 몰두합니다.
지금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회당장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때 집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딸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딸이 죽었다는 것은
회당장 스스로 ‘진리에 대한 애정이 없구나’ 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것은
진리에 따라 살 의욕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진리를 포기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딸이 죽었다는 것은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집에서 온 사람은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시 마소서” 라고 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자포자기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진리를 알면서 진리에 따라 살지 않는 것은
진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자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회당장의 그런 마음을 읽으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당장은 그 정도로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옆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고
실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드디어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셨습니다.
그것을 5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주님이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회당장의 의지 안으로 임재하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집은 회당장의 의지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이외에는
아무도 집에 들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각각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믿음과 인애의 행위와 인애를 나타내며,
아이의 아버지는 교회의 선을 나타내고,
어머니는 교회의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만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시는 것은
주님이 우리의 의지 가운데 들어오실 때 선을 동반한 진리
또는 인애를 동반한 믿음으로만 오신다는 뜻입니다.
믿음만 있고 인애가 없거나 또는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그런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실 때 그러한 것들은
마치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집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의지가운데 그렇게 주님만 계실 때,
병 고침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52절에는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해 울었다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우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슬픔을 뜻합니다.
신앙인들은 어느 때 그런 슬픔을 느낍니까?
시험에서 넘어져서 다시 일어서지 못할 때, 영적인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때,
우리는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회당장이 바로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해 운다”고 표현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 중에 누군가가
진리에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을 슬퍼한다면
그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일 뿐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의미로 자는 것은
진리에 대한 분별력이 부족한 상태를 말합니다.
진리를 알기는 하는데 어설프게 아는 것이지요.
그 때는 어떤 것이 진리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
분명하게 판단하지를 못합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자기는 진리에 따라 행동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진리가 아니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밝은 내적진리의 빛 안에 있지 않고
어두운 빛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태가 진리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것이고 자는 상태입니다.
진리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지만 자신의 이익만 생각합니다.
영적인 것보다는 세상의 것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회당장이 그런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아이가 잔다.”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사람들이 비웃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자책할 때가 있습니다.
자책이란 필요한 일이지만
그러나 지나친 자책은 좋지 않습니다.
지나친 자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자책이 아니고
악한 영들이 주는 자책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들은 우리에게 죄를 짓게 만들고,
그것을 빌미로 다시 우리를 자책하게 만듭니다.
회당장의 경우처럼
자포자기(自暴自棄)할 정도로 자책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은 것이 아니니라. 자는 것일 뿐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순간 주님의 소리를 바로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동안 악한 영들의 방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아이가 잔다고 하자 사람들이 비웃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악한 영들이 방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손은 주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아이의 손을 잡으신 것은
주님으로부터 능력이 나와
회당장의 내면에 있는 진리에 대한 애정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때 진리에 대한 애정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55절에서는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났다”고 표현했습니다.
아이가 일어나자 주님께서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말씀에서 “먹을 것”은 선을 뜻하고
“마실 것”은 보통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는 것은
이제 생활 속에서 선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살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자포자기의 상태에 있을 때,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죽어가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살려주십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완전히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으로부터 먹을 것을 먹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에 대한 애정이 시키는 대로
작은 일이라도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선한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일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에서는 가정에서의 역할을,
직장에서는 직장에서의 책임을,
그리고 교회에서는 교회의 직분을 성실히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들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시는
먹을 것을 먹는 것이며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활 속에서 선을 행할 때
자녀가 자라듯 진리에 대한 애정이 커집니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애정이 커질수록
그만큼 많은 선을 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5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부모가 놀라는 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하시니라.”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47절에서 주님이 혈루증을 앓은 여인을 고치신
다음에 하신 말씀과는 다릅니다.
그 때는 여인을 불러내 주님을 만졌던 이유와 어떻게 병이 나았는지를
사람들 앞에서 소상하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둘 다 비슷한 상황인데 주님은 왜 이렇게 다르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47절과 56절의 말씀을
영어성경의 표현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47절 말씀의 영어성경의 번역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여인이 주님 앞에 엎드려 그가 주님께 손을 댄 이유와
어떻게 고침을 받았는지를 무리들 앞에서 주님께 밝혔다.”
무리들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주님께 밝혔다고 합니다.
또 56절에서는 “주님이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다고 합니다.
앞의 말씀과 뒤의 말씀의 차이는
앞에서는 “말하기는 하되 주님께 밝히라는 것”이고,
뒤에서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47절에 주님께 밝히라고 하는 것은,
병 고침의 기적의 공을 주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57절에서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은
주님의 공을 사람에게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용적으로 보면 같은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매일같이 병 고침의 기적을 경험합니다.
말투와 표정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인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기적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인에게
사람들 앞에서 말하되 주님께 말하라고 했습니다.
한글성경에는 “주님께 말하라”는 말이 없지만
영어성경에는 분명히 “주님께 말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56절에서는 “사람에게든 누구에게든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 주님께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자아가 강한 사람을 뜻한다면
회당장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키우는데 실패한 성직자를 말합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을
자아가 강한 사람이라고 말씀드리는 까닭은,
말씀에서 “여인”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그 중에 자아라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왜 같은 말씀에서 두 사람을 대비시켰을까요?
그 이유는 신앙인들은 누구나 자아를 잘 다스려야 하며,
특별히 성직자의 경우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잘 관리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새교회 가르침 “계시록 해설” 815항을 보면
영적인 병을 고치는데 필요한 것은
첫째는 주님에 대한 믿음이고
둘째는 믿음에서 비롯한 통찰력 또는 영적인 직관이라고 합니다.
믿음에서 비롯된 통찰력이란 어떤 것입니까?
통찰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주님과 천국을 더 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또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 또는 겸손의 상태를 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영적 통찰력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나 회당장은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부터 통찰력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통찰력을 통해 그들은 스스로 자아가 강하다는 것과
내면에서 진리에 대한 애정이 죽어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 앞에 엎드렸고
필사적으로 주님의 옷섶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병 고침의 기적을 이루어냈습니다.
주님의 전능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통찰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통찰력을 통해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매일같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병 고침의 기적이 매일같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눅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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