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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효행 사례와 新孝
1. 서 언
본 논문은 정조대왕이 할아버지 영조 대왕과 그 시대의 제물로 할아버지의 손에 희생된 아버지 사도 세자와의 관계에서 영조 대왕의 개혁정신을 이어 받고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심으로 세종대왕의 치적에 버금가는 임금으로서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 그의 치적중 아버지 장현 세자에 대한 사후의 효심과 효행이 오늘 우리가 처한 불효 의 현실을 예측이나 한것 처럼 본받아야 할 절실한 현실적 대안으로 다가 왔다 .이에 2012년 10월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의 문제들을 정조 대왕 이 생존 해 계시다면 어떻게 처결 하였을까를 고민 하면서 그리움의 일단을 본 논문으로 작성 하여 보고자 한다
2.
2-1. 정조대왕(正祖大王)
정조(正祖 1752년~ 1800년)는 조선의 제22대 임금이다.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10세에 요절한 백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통을 계승했다. 1775년부터 1776년까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1776년부터 180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776년부터 1780년까지 홍국영이 실권을 잡았으나 홍국영을 축출한 해인 1780년부터 1800년 붕어할 때까지 20여년간 친정(親政)을 하였다.
그는 즉위 후 정약용, 채제공, 안정복 등을 등용,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와 서얼(庶孼)출신인 박지원, 박제가 등을 대거 등용하여 조선 르네상스 시대의 문을 연다. 또한 재위기간 중 중앙집권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군주로 평가된다. 서예에도 능했고, 그림에도 능하여 필국화도, 매화도 등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정조는 호학(好學)의 군주로써 어제(御製·임금이 지은 글)를 모아 엮은 개인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홍재전서는 정조가 어린 시절부터 국왕 재위 기간까지 지었던 시문(詩文), 훈유(訓諭) 문서, 교지(敎旨) 등을 모아 규장각이 1787년(정조 11년) 60권 60책으로 편집한 문집이며 조선 국왕중에서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2-2. 영조대왕(英祖大王)
정조(正祖)의 할아버지인 제 21대왕 영조는 1724년부터 1776년까지 약 52년 동안 재위하면서 27명의 조선왕들 중 가장 오래 재위 하였고, 가장 장수한 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조의 휘(諱)는 금(昑)이고 자는 광숙(光叔) 으로 숙종 20년 9월 13일에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다.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재위 1724~1776)는 숙종의 2남으로 어머니는 화경숙빈 최씨이며 1699년(숙종 25) 6세 때 연잉군에 봉해지고, 172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그는 조선 왕조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선 재위기간이 52년으로 가장 길었으며 재위 기간중 커다란 반란을 겪는 등 순탄치 않았다. 당파간의 싸움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영조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했다. 출생과 등극의 컴플렉스를 극복했고 당파간의 불협화음을 지극한 노력으로 조정해 나갔으며, 민생 안정을 위해 균역법·하천정비·서적발간 등의 정책을 실행했다. 그 결과 안정된 왕권과 사회를 손자인 정조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솔선수범하는 서민대통령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2-3. 사도세자(思悼世子)
장조(莊祖, 1735년 음력 1월 ~ 1762년 윤 5월)는 조선의 왕세자이자 추존왕이다. 영조의 둘째 서자로, 효장세자의 이복 동생이며 정조의 생부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나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름은 선(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생후 1년만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749년 왕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으나 노론, 부왕과의 마찰과 정치적 갈등을 빚다가 1762년(영조 38년) 왕명으로 뒤주에 갇혀 아사하였다.
그는 소론을 제거하려는 노론의 요구를 거절했고, 노론과 다른 정견을 갖고 있었다. 사후 지위만 복권되었고, 양주 배봉산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수원 화성 근처 현륭원(융릉)에 안장되었다. 정조 즉위 후 장헌의 존호를 받았다.
2-4. 혜경궁 홍씨
1735(영조 11)∼1815(순조 15).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아들 장조(莊祖 : 思悼世子)의 비(妃). 본관은 풍산(豊山).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입니다.
그는 1744년 (영조 20) 세자빈에 책봉되고,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惠嬪)에 추서되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라 혜경궁 홍씨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899년 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에 추존되었습니다.
당시 왕후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홍인한(洪麟漢)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경의왕후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 1795년 남편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책이 유명한 〈한중록 恨中錄〉이며, 그것은 궁중문학의 효시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2-5. 정조의 가계도
3. 정조의 주변 중요인물
3-1. 홍국영
홍국영(洪國榮, 1748년 ~ 1781년 음력 4월 5일[1])은 조선 영조,정조대의 세도 정치가.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덕로(德老)이다. 세손궁의 궁료(宮僚)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얻고, 정조 즉위 후 부홍파(扶洪派)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세간에는 흔히 권력을 잡은 후 세도를 부리다 축출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축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3-2. 채제공
채제공(蔡濟恭, 1720년 ~ 1799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1] 남인의 영수로 정조의 최측근 인사 중의 한사람이며, 정약용, 이가환 등의 정치적 후견자였다. 본관은 평강, 자는 백규, 호는 번암,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3-3. 안정복
안정복(安鼎福, 1712년 ~ 1791년 7월 20일)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리학자, 작가, 역사가, 수필가이다.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이다. 작위는 광성군(廣成君)이다. 성호 이익(李瀷)의 문인이다.
3-4. 박지원
박지원(朴趾源, 1737년 음력 2월 5일 ~ 1805년 음력 10월 20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자 사상가, 외교관, 소설가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했으며,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3-5. 박제가
조선 말기의 실학자(1750~1805). 자는 차수(次修), 재선(在先), 수기(修其)이고 호는 위항도인(葦杭道人), 초정(楚亭), 정유(貞蕤) 등이다. 시문 사대가(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박지원에게 배웠으며, 이덕무, 유득공 등과 함께 북학파를 이루었다. 시, 그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북학의》, 《정유고략(貞蕤稿略)》 따위가 있다.
3-6. 정약용
조선 말기의 학자(1762~1836). 자는 미용(美鏞)이고 호는 다산(茶山), 사암(俟菴), 여유당(與猶堂), 자하도인(紫霞道人)이다.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신유사옥 때 유배되어 18년의 유배 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 체계를 완성했다. 저서에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이 있다.
4. 역사적 상황
4-1. 개인적 측면
1) 사도세자의 죽음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명에 의해 좁은 뒤주에 갇혀 8일만에 굶어 죽었다. 11살 세손 정조는 아비를 살려 달라 할아버지에게 애원했지만 현장에서 들려나오고 말았다. 사도세자는 답답함과 기갈과 모욕 속에 죽어갔다. 이른바 임오화변(壬午禍變)이다.
2) 아비의 죽음에 따른 개인적 정치 철학
정조는 졸지에 죄인의 아들이 되어버렸다. 영조는 세습 군주국에서 죄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에 정조를 이미 죽은 큰 아들 효장세자의 대를 잇게 한 것도 이를 염려해서였다. 종통(宗統)에 대한 문제제기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조는 즉위 후 사도세자 죽음 건이 꺼렸으며 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추궁을 회피한 다. 자칫 연산군처럼 왕의 사사로운 복수로 전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토역(討逆)과 추숭(追崇)을 분리하는 이중적·제한적 접근을 했으며 진상규명을 수반하는 책임자 처벌과 명예 회복 조치를 분리했다. 책임공방의 상황을 회피한 채, 관련자들이 줄어들고 진상에 대한 접근이 어려울 만큼 시간이 상당히 지난 후에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추숭을 통한 명예회복은 효심에서만이 아니라 정통성 시비, 즉 왕권에 대한 잠재적 도전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3) 미래지향적 정치 전략
정조는 재위 2년에는 경장대고(更張大誥)를 선포해 국정 방향을 제시했다. 민산(民産)·인재(人材)·융정(戎政, 국방)·재용(財用)의 네 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대고는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의 대강을 밝힌 것이었다.
통합지향적인 의제설정과 갈등전략을 16년이 지난 후 임오화변 관련자들이 다른 죄목으로 법망에 걸려들었을 때 가차 없이 처벌하였다. 한편, 사도세자의 추숭에 가장 비판적인 정파까지도 추숭의 단계적 진척에 일정한 역할을 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자칫 분열과 정치의 파탄을 불러올 이슈를 오히려 통합의 기회로 활용했던 것이다.
4-2. 시대적 측면
1) 사색 당파(四色 黨派)에서 양당(兩黨)세력으로 전환
당파의 발생은 조선 중기에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적 갈등이 마무리되고 사림의 중앙 정계 진출이 현저했던 16세기 선조대 이후였다. 사림(士林)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그들 사이에 신구 또는 학문적 차이에 따른 정치노선의 차이가 드러났으며, 이전의 척신정치의 잔재도 남아 있었다. 이런 가운데 사림이 영남학파인 동인과 기호학파인 서인으로 대립하게 된다.
그 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었고, 북인은 다시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의 옹립 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양분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고 재야세력이던 서인이 정권을 장악했는데, 서인도 개혁론과 타당파에 대한 대응책을 두고 숙종대에 이르러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는데 이를 사색당파(남인, 북인, 노론, 소론)라 부른다. 정조대에 이르러 남인, 노론으로 당파가 나누어진다.
2) 당쟁 국면 변화
정조가 즉위하던 당시에는 붕당정치가 소강 상태였다. 원래 소론과 노론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었으나 영조의 지나친 노론중심 정치로 노론의 일당독주체제의 빌미를 마련되었다.
정조는 규장각과 장용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데 노력을 기울였고 이렇게 왕권을 기반으로 노론의 벽파와 시파의 갈등을 잠재우고 탕평책을 시행하였다. 탕평책이란 당파에 구분하지않고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영조때부터 시행되어 온 대동법이 점차적으로 확대되면서 화폐유통이 활발해 졌으며 상업활동의 기회를 균등하게 하여 상업에도 소상인들의 이익을 보장해주었다.
3) 붕당정치 해소
영조대의 탕평책은 붕당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없애고 각기의 명분보다도 타협을 종용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였다. 그러나 정조대의 탕평책은 진정한 의리에 바탕을 두는 탕평책을 펼쳐 노론 가운데 온건파 계열과 정치집단에서 배제되었던 남인 계열을 등용하여 정치적 균형을 조율하였다.
4-3. 사회적 측면
1) 실학(實學)의 출현
조선시대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이론과 관념론에 치우치던 성리학과는 달리 정치, 경제,사회 등 분야에서 학자들은 관심을 가지고 유학, 역사학, 지리학, 자연과학, 농학 등 여러방면에 걸친 광범위한 연구를 하기 위한 실학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실학자들은 민생의 안정과 부강한 나라를 이룩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고 정조는 규장각이라는 학문연구소에 실학자들을 등용해서 현실에 맞는 유용한 서적이 편찬되었고, 정약용과 같은 큰 학자를 배출하게 된다.
2) 천주교의 전파
조선에 처음 천주교가 알려진 것은 광해군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이수광·유몽인 등이 북경에 와 있던 이탈리아 인 선교사 마테오 리치로부터 <천주실의>를 얻어 가지고 오면서부터 알려지게 되어다.
서학(西學)의 연구가 크게 유행하던 정조 초기에는 서학에 대한 배격파, 수용파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서학의 연구가 신앙 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정조 1년(1777년)에 남인 학자 정약용·이벽 등을 중심으로 '교리 연구회'가 발족하면서 부터라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천주교는 서양 학문 속에서 자생적으로 발전된 학문이라 할 수 있다.
3) 서학(西學)의 유입
서학이란 넓은 의미로 서양문물과 그 이론이다. 조선 후기 천주교를 일부 서교 천주학 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서양에서 발달한 종교이며 조선시대에 서양 문물의 유입도 천주교와 관련이 깊다.
과학의 발달과 종교개혁을 통하여 발전된 유럽 여러 나라의 근대적 자본주의 세력은 16세기 이후 상품거래, 식민지 개척, 가톨릭교의 전파 등으로 동양에 영향을 끼쳤다. 서양의 정치·경제·문화의 세력은 중국의 도덕적 고전문화(古典文化)를 압도하여 중국을 새롭게 각성시켰다. 서양문물이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학자들에게 알려져 그들의 학문적 탐구심의 대상이 되었고, 정조대에 이르러 실학자에 의하여 서학이 다방면으로 연구되었다.
5. 정조의 업적
5-1. 영,정조의 탕평책(蕩平策) 차이
1) 영조의 탕평첵
영조의 탕평책은 정통성이 부족한 영조가 노론의 지지로 등극한 이후 노론의 일당전제를 막기 위해 소론과 일부 남인을 등용시켜 노론을 견제하면서 정치 원칙에 대한 시비 논쟁을 종식시키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모든 시비의 논쟁은 거짓되고 개인적인 차원으로 규정하여 시비 논쟁 그 자체를 금지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이전까지의 사림정치에서는 아래서부터 형성된 사대부의 여론을 공론으로 받아들인 반면, 영조는 이를 당론으로 평가 절하했던 것이다.
먼저 사림정치의 산물인 청요직을 없애고 재상권을 강화하였으며, 붕당권력의 핵심인 사림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으며 인재를 등용할 때에는 각 붕당의 온건파인 "완론"을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당론이니 공론이니 하는 주장보다는 문제를 살피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각 당에서 등용했던 것이다..
2) 정조의 탕평책
한편 정조는 영조가 만들어 놓은 탕평의 바탕위에 학문적성격을 겸비하여 한층 발전시킨 임금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정조는 영조와 마찬가지로 시비론보다는 우열론에 입각하여, 탕평과 대동의 시대를 이끌어 가려고 정책에 있어서 비중을 크게 두었다.
정조의 탕평론 원칙과 특징은 먼저 철저하게 외척 및 궁중세력의 정치 참여를 배제했다는 점과 왕실의 외척이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점을 그 첫번째 정치원칙으로 강조하였고 정치 원칙을 재창조하여 나가기 위해서 실력주의 원칙이 통하는 학문정치를 표방함으로써. 학문의 실력없이 실제만을 내세우는 탕평의 허점을 배제하고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하고 초계문신, 성균관 제도 등을 강화하여 문풍(文風)을 진작시키는 학문 정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따라서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과는 달리 노론 가운데 실력있는 온건파 계열과 정치집단에서 배제되었던 남인 계열을 두루 포용하여 등용하였다.
5-2. 신분타파
서얼(서자. 첩의 자식), 노비에 대한 차별 완화하여 신분제를 개혁하였다. 신분과 관계없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국가에 공이 있는자는 신분을 상승시켜주었다. 정조가 등용한 실학파중에는 신분과 상관없이 등용된 인물들이 많다.
5-3. 실학의 등장
실학은 조선 후기의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사회개혁적이며 근대지향적인 사회사상이었다. 실학은 당시의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의 경직성과 관념성을 비판하고, 조선이 맞이하고 있었던 사회 문제들의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형식과 명분에서 벗어나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 비판적이고 실증적 논리로 개혁의 방안을 제시하려고 함으로써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학풍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서양의 과학 기술과 천주교에 대해서도 학문적인 관심을 기울여 인식의 폭을 넓혔다.
이러한 실학의 사상적 특성은 주자학에서 양명학을 거쳐 고증학으로 이어지는 중국 유학의 일반적인 발전 경향과도 일정한 연관성을 지닌다. 하지만 조선의 실학은 발전 과정에서 기일원론(氣一元論)에 기초한 독특한 철학적 사유의 발전을 이루기도 하였다.
특히 정약용, 최한기 등은 성리학의 성선설을 비판하며 윤리의 사회성을 강조하였고, 이(理)를 중심으로 한 성리학의 이선기후(理先氣後)의 논리에 맞서 기(氣)를 중심으로 한 이재기중(理在氣中)의 논리를 제시하였다.
<실학자들의 주장과 활동>
▼ 유형원 : '균전론' 신분에 따른 차등적인 토지 재분배 주장
▼ 이익 : '한전론' 영업전을 정해 영업전을 제외한 토지는 매매할 수 있게
하여 점진적인 토지 소유의 평등을 이루자고 주장하였고 양반
제도, 노비 제도, 과거 제도의 시정을 주장하였다.
▼정약용 : '여전론' 한 마을을 단위로한 공동농장제도를 시행하여 공동으
로 경작하여 그 수확량을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용후생학파(중상학파,북학파) : 노론층의 일부>
▼유수원 : '우서'에서 중국과 우리나라를 비교하면서 지나치게 농업에만
의존하지 말고 상공업을 진흥시켜 나라 살림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주장
▼홍대용 : '균전제'를 주장하며 농업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기술 문화
장려, 신분제도 철폐,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
주장.
▼박지원 : 수레와 선박의 이용이나 화폐 유통의 필요성 강조, 양반 제도
의 비생산성 비판
▼박제가 : '북학의', 청과의 통상 강화, 수레나 선박의 이용 주장. 절약
보다 소비를 권장하여 생산을 자극시킬 필요가 있음을 지적.
이러한 조선의 고유문화현상 경향은 18세기 전반에 문화의 제반 분야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를테면 그림에서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국화풍(國畫風)’, 글씨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국서풍(國書風)’이 그것이다.
이는 조선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바로 이러한 축적 위에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건륭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이른바 조선 후기의 도미적성관(掉尾的盛觀)으로 파악되는 황금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5-5. 규장각 설치
정조 때 건립한 규장각 건물은 지금 우리가 비원(秘苑)이라고 부르고 있는 곳, 즉 창덕궁 후원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금원(禁園)이라고 하여 임금과 가족들만 출입할 수 있는 왕실 전용공간이었는데, 임금의 휴식처인 그 자리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언덕에 규장각 건물이 서 있었다. 도서관을 넘어서 정조 개혁정치의 산실 역할을 했다.
정조는 과감한 탕평책을 펴면서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다. 당파별로 벼슬을 안배하는 방법이 아니라 당파를 묻지 않고 학문이 있는 자를 뽑아 쓰거나 당파에 속하지 않는 자도 등용했다. 결과적으로 규장각은 정조의 친위대 양성소 역할과 함께 최고의 권력기관이 되었다.
정조는 1782년 왕실 서적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강화도 행궁(行宮: 유사시 임금의 피난지 궁궐)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설치하여 의궤(儀軌)를 비롯해 총 1천여 권의 서적을 보관했다. 강화도에 행궁을 마련한 것은 드넓은 개펄과 조수간만의 차로 인해 선박의 접안과 군대의 상륙이 어려운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여 일부 서적은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태웠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과 프랑스의 외교 현안이 되고 있는 외규장각 의궤 반환 문제이다.
의궤란 의식과 궤범을 뜻하는데, 왕실과 국가의 중요 행사에 대해 발의와 준비과정, 의식, 절차, 진행, 사후처리 등을 정리한 기록이다. 내용은 물론 화공들이 그려 넣은 행사의 모습은 오늘날의 사진처럼 귀중한 자료로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6 수원 화성 축성
화성 축성에 정약용은 "기기도설"이라는 중국어로 번역된 서양 기계서적을 보고 거중기를 개발했다. 산업 현장에 있어 보면 거창한 기계보다 간단한 도구개량이 더욱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다음 도구들이 화성 축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5-7 장용원 설치
장용영(壯勇營)은 1785년 조선 정조가 만든 호위 군대이다. 대장의 칭호는 장용사(壯勇使)이다.
초기에는 장용위(壯勇衛)였으나 1788년 장용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500여명의 군사를 5대(隊)로 나눠 만들었다. 1793년에는 한양의 내영(內營)과 수원 화성의 외영(外營)으로 나눴다. 다른 군영보다 규모가 컸다. 1795년 다른 군영의 병사들을 편입하여 5사(司) 23초(哨)의 큰 규모로 군대를 편제하였다. 왕권 강화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왕권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에 의해 1802년 폐지되었다.
6. 정조의 효성
6-1. 화성 행차도
조선 22대 왕 정조가 어머니 경의왕후(敬懿王后(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가 묻힌 화성 현륭원(顯隆園)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정조대왕화성행행반차도(正祖大王華城幸行班次圖) 또는 화성행차도(華城行次圖)라고도 한다.
6-2. 부모의 추존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으로 올렸고 1899년(광무3)장조로 추존하였으며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헌경왕후(獻敬王后)(1735.~1815.)를 추존하였다.
6-3. 부모 산소 참배
정조는 사도세자를 건륭원(현재 융건릉)에 모시고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았다. 정조의 어가행렬이 능제를 위해 화성(수원)으로 가다 야트막한 고개를 만나 잠시 멈춰 섰다. 멀리 사도세자의 능이 손에 잡힐 듯 눈에 들어오자 정조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아버님께 가는 길이 왜 이리 더딘가(遲遲)?” 그때부터 이름 붙여진 것이 지지대(遲遲臺)고개. 오늘날 경기도 의왕시와 수원시의 경계가 되는 고개다.
정조는 또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할 때마다 주위의 나무들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다. 나무가 한창 자라날 초여름의 어느 날, 정조는 솔잎을 갉아먹는 송충이를 보고 “아버님이 잠드신 숲을 갉아먹느니 차라리 내 불효한 창자를 갉아먹어라” 하며 송충이들을 그대로 씹어 삼켜버렸다. 그 뒤 융릉에는 송충이가 사라졌다고 한다.
민주주의
우리는 그리스 역사를 이야기 할때 아테네의 시민 광장을 떠올리고는 한다 ,직접 민주주의의 효시라고 말할수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의 국체나 정체를 논할때 공화제냐 민주 제냐 를 두고 논란을 펴기도 하지만 현대적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란 링컨의 게티스 버그 연설 "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 즉 주체나 객체가 없는 자치를 말함이라고 할수 있다
효를 말함에 있어 민주주의 를 화두로 하여 그에 적합한 윤리란 전제에서 깔린 효사상의 기조란 무엇인가
효는 이념의 산물인가 제도의 산물인가 를 먼저 논해야 할것 같다, 민주주의 가 책임과 의무를 전제 로 한것 인즉 효 또한 같은 맥락에서 찾아야 할것 같다. .
인간이 세상에서 태어 나면서 직립을 향하여 걸음마를 택하고 혼자 서게 되면서 독립된 사고 의 개체가 된다. 의식주를 접하게 된다 .절대적 책임자는 낳아준 부모가 되고 책임자는 조건을 부치지 않고 일방적 희생의 제물이 된다
이를 두고 우리는 신의 존재를 인정 하건 하지 않하건 그 관계를 천륜이라고 표현 한다
천륜은 관계없는 무촌관계인 남과 여가 만나 생리적 욕구의 산물로 가장 소중한 생명체를 잉태 하게 된다
관계가 그렇게 만들어 지지만 여기에 이론적 근거나 철학적 의미를 부여 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 드려지는 셈이다.
서양의 효사상이란 ?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루 어진 관계에서 부모는 잉태한 자식에 관하여 합리적인 사고를 주입시킨다
합리적 사고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법에서는 부양의무에 관하여도 연령적 한계를 제시 한다
일종의 양육의 유한 책임 인 것이다 .
물론 부모는 이에 대하여 동의 를 하지만 법적 책임이란 그저 존재함으로 의 부분적 가치 일뿐 한평생 천륜의 관계가 쇠락 한다거나 시간의 의미에 따른 경 중 이 분류 되지 않는다 .
동양에서 의 효 사상 이란 ?
특히 한국에서 의 효라는 단어는 그간 무한책임이거나 풀리지 않는 족쇄 의 관계다 .부모는살아 생전 내내 자식을 위한 희생의 제물이 되고 이는 민족신앙처럼 전해 내려온 전통이다 . 여기에는 가부장적인 수직적 종속적 관계가 지배적이다.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생존해 있는 동안 절대적 지배력을 가질 뿐 아니라 사후에서도 유훈이거나 가훈으로 남긴 어록등이 상당한 지배력을 갖게 된다. 제사라는 전통의식이 이를 입증해주는 전례로서 존재 하게 된다.
동 ,서양의 효를
비교 한다면 서양의 가족 제도는 동양의 효보다 비교적 후리하다 .우리에게 의 효는 그들에게는 패밀리언 쉽으로 통한다 .
이해의 직접적 관계를 통하여 장자상속의 원칙이 지배 할 수 있었던 것이 동양의 효라면 서양의 패밀리언이라면 수평적 평등의 유산상속은 서양의 것으로 본다 .
동양에서 대가족 제도 의 붕괴는 전통적 가부장 제도의 붕괴를 동반 한다 .효의 개념은 천륜의 개념에서 벗어나기 시작 한다. 서양은 일찍 핵가족 제도가 시현 된것이니 지금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자체가 발생되지 않았다 .
동양이
부모의 은혜를 폄하하기시작 한다. "자기들 좋아서 나를 세상에 태어 나게 했으니 부양의 의무는 당연 한거야 . 나는 재수 없는 부모에게 태어났어 , 이럴바엔 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어 .....
요즈음 세태의 일환이다. 자식이 부모를 향하여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뱉어 내고 있다.
민족신앙에 버금가는 효사상은 설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
그러나 서양은 나이 17세 전후가 되면 부모는 양육의 의무를 벗어날 수 있고 부모라고 해서 교육적 목적이라손 자식 에게 매를 들 수 없다. 부모는 아동학대라는 이름으로 처벌의 대상이 된다. 우리가 서양의 합리적인 패밀리언십을 닮아가고 있는 것인가? 화자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닮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변질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은 이미 책임과 의무의 한계를 법이라는 선으로 획정 해 놓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우리는 준비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변화를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
그 이유 .
급변하는 물질문명 특히 신의 영역을 도전 하고 있는 컴퓨터 문화는 전통적 가족개념 특히 효개념의 급속한 변화를 가져 오고 있다,
전통적인 수직적 개념의 효 는 박물관으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함께사는 고양이나 개 는 가족으로 보지만, 일하는 식모 는 가족으로 보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가족으로 보지 않는 사회상을 다시 대가족 제도로 환원 시킬 수 는 없다 .
천륜이라고 해서 知恩 과 報恩 조차도 생물학적 차원으로 보기 시작 했다면 인간사회는 약육강식의 하등동물사회로 전락 한다는 이야기 가 된다. 법과 도덕의 차이가 무엇인가?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를 테두리화 하여 인간이기를 부정하지 못하도록 만든 율법이 아닌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비인간적 요소, 그에 따른 행위는 지속될수록 인간사회의 틀 즉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사회는 무너진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자율적인 행위가 구속이 전제되지 않치만 타율적인 행위는 구속 여건이다. 효가 자율적인 행위 임에도 타율적인 구속으로 강요 될 성격이냐? 는 지금 효학도 로서 우리의 공동 명제인 셈이다.
이런 이유가 지금 변화를 촉구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
주변의 모습
세간을 떠들썩 하게 했던 는 10억 뇌물의 김광춘 부장검사는 무엇이 부족하여 뇌물의 노예가 되어 세상으로 부터 지탄 받고 파멸의 길을 가야 하는가 ?
만삭의 아내를 목 졸라 죽이고 3년동안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외국의 저명한 법의학자까지 돈으로 사드렸던 유명한 의사 는 도대체 무엇이 부족하여 임신한 아내를 살해 해야 했나?
년간 15,900여명의 자살자들이 천수를 어기고 자살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나
늙은 부모를 유기하는 현대판 고려장이 년간 867건이라고 한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통계가 2011년 87건 이다 . 저출산의 왕국 이혼 왕국 성형왕국이다. 학교폭력은 17만건이다 . 우리 나라는 세계10위권의 경제 대국 .GNP가 2만불을 육박했다 .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북의 김일성 세습자인 손자 김정은 에게 놀아나야 하나? 우리가 돈을 달랬나 밥을 달라고 했나. 우리는 끝없이 퍼주기만 하고도 그의 핵무기 개발에 질질 끌려 다녀야 하고 그는 세계를 농단 하고 있으니 ....
역사 앞에 단죄 되어야 할 2차대전의 원흉국가인 일본의 아베 는 침략의 역사마저 부정하고 침략전쟁에 앞장섰던 죽은 군인들의 위패에 참배를 권유 하고 또 앞장 서는 이야기가 언론에 특필되고 있다. 힘을 비축 하여 3차 대전을 꿈꾼다는 이야기 인가?
인간 의 이기지심으로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게 善 의지는 실종 되어가고 아예 자리 잡을 수 없는 여건들은 계속 사회를 어지럽게 하고 세상을 힘들게 한다.
해결을 위한 대안 연구나 실적은 ?
어떻게 변화해야 하나
맹자의 성선설은 뚜껑 없는 우물가에서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걷는 모습을 본 순간 아무리 사악한 인간이아도 일순 저러면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데..“어서 아이를 우물가에서 떨어저 놀게 해야지” 라고 하는 생각이 머리에 든다. 그런 이유로 인간의 본성은 착한 것 이다 라고 설파하였다.
효는 인간의 착한 심성에서만 이루어 질수 있는 것이다.
착한 심성 ?
사람의 인성이다 . 인성이 바로 서지 않는다면 효는 의미를 상실한다 .
착한 심성으로 눈을 뜨고 돌리게 해야 하는 일 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인성이 눈앞의 욕심과 타협할 수 없도록 제도적 장치와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 하여야 한다 사상적 데아베이스를 구축 하여 전 세계에 공감 유도를 시현 해야 한다 .
대안은 교육이다 .
교실안의 변화 는 입시체제를 우선하여 인성이 먼저 한다는 철저한 체계를 잡아야 한다 중국의 100만명 효자 만들기 운동 효자우선 입학제도 등은 우리를 훨씬 앞서고 있고 그들이 추구 하는 세계는 과거 사람을 혁명의 도구로 밖에 이용할 줄 몰랐던 공산주의의 의 탈이념적인 것이다.
가정교육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
유대가정 에서의 가정교육은 구체적이고 효과적이다
엄마 일하고 올 시간에 6시부터 1시간 국어, 10분 쉬고 1시간 영어 공부 10분 쉬고 있다가 엄마가 돌아오는 시간 에는 엄마와 하루의 일과를 되집어 보고 10시에 자자 라는 유대 어머니와
우리아들 엄마 돌아올 동안 공부 열심 히 해 하고 술이 취해 돌아온 엄마 책상앞에 앉아 있는 아들 에게 우리아들 공부 열심히 했네 하고 먹을것 을 내준 어머니
그 어머니를 보고 웃는 아들 - 아들은 내내 컴퓨터 게임을 하고 놀고 있었다 .
유대인 가정의 아들과 우리가정의 아이들의 미래는 어짜피 똑 같을 수 는 없다.
가정교육은 부모가 몸으로 보이는 교육임에도 우리 부모는 가없는 과잉 애정으로 아이들의 미래를 망치고 나라까지도 망가지게 한다.
학교에서는 가정교육탓 부모의 할 일은 다하지 못하면서 가정에서는 학교교육탓을 하면서 보내는 세월에 세상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제는 학교도 가정도 자녀들의 인성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역할 을 고민 해야 하고 나라와 지자제는 이를 도와야 한 다 이것이 현행 효행장려법의 골자 이기도 하다
최모 할머니에 대한 선고공판
위에서 열거한 우리주변 모습의 한 단면이다.
1. 어머니유기를 위해서 어머니를 관광 시켜 드리겠다고 제주도 로 모시고 간 자식 능 어머니를 두고 부부가 몰래 서울로 돌아 왔다 .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버린 어머니였다 놀란 아들에게 파출소에 찾아가 길잃어 버렸고 했드니 얼른 데려다 주더라 ...낙망한 아들의 표정
2.버림받은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로 얼룩진 시간을 견디다 .파출소 에가서 실어증 환자가 된다 . 결국 기관으로 가서 자식없는 세월을 살다가 거기서 죽는다 .
3.아들놈에게 찾아가서 물려 준 유산 상속 반환 청구 소송을 한다
1심 2심에 서 패소 판결을 받는다
1은 소극적 대처다. 심리적 갈등이야 없을 수 없겠으나 그래도 갈곳없이 떠돌다 죽을수 없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접었지만 자식이란 없는것 보다는 있는것이 낳을것이란 생각으로 염치를 무시한다
2. 자존심과 의 사투 끝에 잊혀지지야 않겠지만 자식과의 인연을 인위적 으로 단절 하는 최악의 처방 을 포기 로 생각 하는 경우다
3.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대처다
물론 여기에자신의 처사에 후회는 따른다 . 차라리 사회에 환원이라도 하였으면 신문지상에 이름이라도 거론 되었을 법 한데,,,
서양에서 같은 종류의 사건으로 재판에 계류 되었다면 어떤 판결이 났을까
화자의 생각은 일부승소 판결이 나지 않았을까 .대학을 졸업시키는 데 까지 2억 7천 5백만원이 든다고 한다 거기에 남은 재산을 모땅 상속 해 주고 본인 은 생게가 어려워진 여건이다
자식은 거기에 더하여 불효의 극치를 간다
이이 야기가 남의 이야기 일까 아직 세상을 경험 하여 보지 못한 판사가 원고의 제소를 기각 한다
자식에게 대물림 해 준 상속 재산은 반환 받을 수 없는 관례라는 이유다 ,조금 세상경험이 많은 2심 재판부에서도 똑 같은 결과로 소를 기각 시켰다
만일 동일한 사안으로 재판을 한 판사가 소를 제기 하는 경우를 가상해 보자
패소 한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국가 부분 책임을 지기 시작 했다고는 하나 살아 있는 것이 죽는것 만도 못한 결과가 도출 될 것 이다 .
일반인 들이 동일한 사안을 두고 한마디씩 한다면
바보처럼 왜 재산은 다 물려 주고 ,,,
나는 자식을 그렇게 키우지는 않을 거야
변호사의 말처럼 재산을 상속 해 줄때 각서라도 한 장 받아 둘 것을
차라리 자살이라도 하지 자식한테 소를 제기한담
앞으로 수도 없이 발생할 여지가 있는 사안이다
자식과 부모가 천륜의 관계에서 인륜의 관계로 변화되는 조짐이기도 하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 준 것이 없으니 내 부모가 아니다 . 라는 논거는 지금 도 나타 나지 않을뿐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자기자식 귀여운 줄 알면서 부모에 대한 태도를 본다면 혀를 챌
일도 많다.
하물며 남남 간에 나눔을 이야기 하고 소통을 이야기 하며 효를 통하여 인류의 행복을 공유 하자는 이야기가 씨가 먹힐까
최모 할머니의 재판이야기와 그 결과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천륜의 관계를 법률적 관계로 재정립 한다면 예상되는 가족 관계의 변화 는 어떤 모습일까?
그에 따른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야 하는 사회보장 제도의 책임범위는 어디 까지 가야 하나숙제는 풀기 어려운 난제가 된다 .
이글을 쓴 話者 라면 감정적인 대처와 현실적인 대처로 분류 하여 답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미 자식에게 버려진 이상 자식에게 귀의는 불가 하다 그렇다고 자식이 아닌것은 아니다
남은여생 살아가는 방법을 연구 하여 그 길을 찾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력은 노후에 유일한 생존 방식임에도 남김없이 자식에게 상속 해주고 자식에게 버림받은 사람을 국가는 보험이라는 제도를 채택 하여 부분 구제를 해준다고 한다. 허나
여타의 고독과 무위와 질병과 가난이라는 4가지를 한꺼번에 해결 할 수 있겠나 ?
자식의 인생에서 자식의 선택이 결국 되물림 된다는 가정에서 너의 미래도 결국 내가 될 수밖에 없다 라고 자식을 회유 해 보는 것 과 법에 호소해 보는 것 등 외에는 생각의 여지가 없다. 어쩌면 무답이 정답일지 모른다 .
누군가 관계당국에서 살아생전의 재산 상속 제도를 없애는 방법 을 제시 할 수 도 있다 .
자식의 인성과 효심을 체크할 수 있다면 그에 비례하여 상속재산등급을 매겨 때로는 국가나 사회단체에 귀속을 명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
모두가 고육지책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둘 수도 없다 .이제는 한계를 그어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부모의 무한 책임과 자식의 불효행위에 관하여 재정립을 할 시기가 도래 하였다.
계속되는 상속 반환청구소송이 최모 할머니의 예처럼 부모의 일반적 패소가 판례가 되면 안된다는 생각이다 .구가가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다면 불효자식의 패륜 행위에 관한 특별법이라도 제정 하여 시행 하여야 한다 .
부모에게 잘못하는 불효자는 이세상 어디에도 설곳이 없어야 하거늘 잘못 키운 대가를 통하여 역으로 부모의 삶이 종지부를 찍어도 아랑곳 하지 않는 동키호테식 판결은 시대정신을 망각한 행위이다 .나는 최모 할머니의 승리를 만들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