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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鏡虛)스님(1849~1912)
억불정책을 실시하던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지던 선맥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완전히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고려시대에는 엘리트 계층이던 스님들은 조선시대에 와서는 도성 출입도 금지될 정도로 하찮은 대접을 받아야 했다. 스님들은 사찰에서 스스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야 했기 때문에, 직접 농사를 짓고 집을 짓는 기술을 익혀 품을 팔면서 생계를 이었다.
1856 년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한양 인근 청계사(淸溪寺)의 주지 계허스님에게 맡겨진 동욱(東旭)의 나이는 겨우 여덟살이었다. 어머니는 형 동석을 마곡사에서 출가시킨 후 막내마저 출가시키려고 청계사로 온 것이다. 스승 계허스님만이 살고 있는 청계사에서 어린 동욱은 밥값을 하기 위해 물을 긷고 나무를 하고 채마밭을 가꾸면서 5년을 보냈다. 스승 계허는 문자를 전혀 모르는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 경이나 외고 복이나 빌어주면서 겨우 연명을 했다. 그러던 중 박처사라는 선비가 청계사에 머물면서 동욱은 훗날의 '대선사 경허'가 되는 인연의 끈을 잡게 된 것이다. 박처사로부터 글을 배우게 된 동욱은 환속하려는 스승 계허의 소개로 당대의 강백인 동학사 만화화상의 제자가 된다. 그 밑에서 정진하던 경허는 10년 뒤 다른 제자들을 물리치고 동학사 강원을 물려받는다. 훗날 근세 선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경허스님이 강백, 즉 교학(敎學)으로 일찍이 일가를 이루었던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대강백으로 이름을 떨치던 경허스님은 17년 만에 스승 계허의 소식을 듣는다. 인편으로 온 소식은 '목수일을 하다가 지붕에서 떨어져 크게 다쳐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가던 중 경허스님은 전염병이 돌아 아수라장이 된 어느 마을에서 하루를 묵는다. 연신 사람이 죽어나가는 그 생지옥에서 경허스님은 문자공부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크게 느끼고 그 길로 다시 동학사로 돌아와 강원을 철폐하고 깨달음을 구하기에 이른다.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사미승의 말에 확철대오한 후 오도송을 읊는 순간 한국의 선불교는 재 속에서 다시 불씨가 되어 살아난다. '문득 사람들이 콧구멍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듣고/즉시 삼천세계가 나의 집임을 알았네/6월 연암산 아래 길에서/야인이 한가로이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스님은 춤을 추며 오도송을 읊었다.
이듬해 형과 어머니가 머물고 있는 서산 연암사 천장암에서 보림(깨우친 후 그 깨우침을 연마함)에 들어간다. 앞은 바다이고 뒤는 산인 천장암은 보림지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먹고 용변을 보는 일 외에는 하루 온종일 잠도 자지 않고 천장암 쪽방에 앉아서 깨우침을 연마하던 경허스님의 몸에는 이가 들끓었지만 스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 경허스님은 일체의 걸림이 없는 선기 어린 행동과 법문으로 전국의 선방에 선풍을 일으킨다. 술과 고기를 즐기고 이해하기 힘든 기행을 종종 보인 경허스님은 1882년 이후 20여년간 개심사·문수사·부석사(서산)·수덕사·정혜사를 비롯한 숱한 호서지방의 사찰을 돌며 선풍을 일으켰고, 1899년에는 해인사 조실로 추대되어 영남지방의 사찰에도 선기를 불어넣는다.
2003 년 눈이 소복이 쌓인 서산 도비산 부석사에는 100여년전 경허스님이 쓴 현판 '목룡장(牧龍莊)' '심검당(尋劍堂)'과 함께 훗날 칠십이 된 만공스님이 썼다는 '부석사(浮石寺)' 현판이 걸려 있었다. 수덕사의 말사인 부석사 주지 주경(宙耕)스님은 "만공스님이 경허스님의 시봉을 한 때가 그리 길지 않았는데, 부석사 시절은 젊은 만공스님이 산에서 나무를 하고 밥을 지으며 가장 엄격한 시봉을 들었던 기간일 것"이라고 말했다. 부석사에서 5분 거리의 도비산 중턱에는 경허와 만공이 수행을 했다는 굴이 아직도 남아있어 두 스님의 치열했던 수행과정을 엿보게 한다.
어머니와 형이 있는 천장암에서 보림을 끝내고 어머니를 위한 법문을 하던 날의 일화는 경허스님의 그릇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깨우친 아들을 자랑스러워한 어머니 박씨를 비롯해 구름처럼 몰려든 불자들 앞에서 경허스님은 법상에 올랐다. 좌중을 둘러본 스님은 갑자기 승복을 훌훌 벗어버렸다. 질색을 하는 어머니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경허스님은 "자 보십시오"라고 한 뒤 주장자를 세번 내리치고 법상을 내려왔다. 즉 부모로부터 받은 육신 뒤에 가려진 법신(法身)을 보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스님의 걸림없는 무애행(無碍行) 중에는 천장암에 머물던 30대 후반, 속가의 김씨 처자와 사랑에 빠져 1년여간 결혼한 김씨처자를 찾아 그녀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던 일이 전해져온다. 중생의 어리석은 집착 중 하나인 애욕에 스스로 뛰어들어 그 무간지옥의 고통을 몸소 느껴 보았던 것으로 후세인들은 짐작할 뿐이다.
<출처; 현대불교미디어센터>
경허(鏡虛)스님(1849∼1912)은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했다고 일컬어지는 대표중에 대표인 대선사이다. 1849년 전주에서 태어났고, 9세때, 경기도 과천 청계산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하였다. 속가의 이름은 송동욱(東旭)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송두옥(斗玉)이다.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1879년 11월15일,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진사인, 이처사(李處士)의 말한마디,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이 한마디를 전해듣고는, 바로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1대 조사인 인도의 마하가섭존자 이래 75대 조사이다.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 우무비공처)는 중국 법안종의 종주 법안(法眼) 선사의 어록에 실려 있는 선어다. 당시 경허의 시봉을 받들던 사미승 원규는 경허의 사제인 학명의 제자였고, 이처사는 사미승 원규의 속가 아버지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保任)을 마치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한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돌연 환속하여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하였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함경도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
경허선사의 수제자로 흔히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1861~1937), 수월水月(1855-1928)ㆍ월면月面 (만공滿空)(1871~1946) 선사가 있다. 경허 선사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삼월인 제자들도 모두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이들 역시 근현대 한국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현재, "북송담 남진제"의 두 큰스님의 경우에, 송담스님은 경허(75대)-만공(76대)-전강(77대)-송담(78대)의 계보이고, 진제스님은 경허(75대)-혜월(76대)-운봉(77대)-향곡(78대)-진제(79대)의 계보이다
<출처; 위키백과 > | ||
첫댓글 근대 한국의 선불교의 맥을 살려놓으신 경허스님에 관해서는 많이 들었으나 좀더 확실하게하기 위해 자료를 조사해 올려 봤습니다...참고가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