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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상의 왕이요, 왕의 보석상이라." 영국의 역대 왕들로부터 까르띠에(Cartier)가 듣는 찬사다. 1847년 아돌프 피카드(Adolphe Picard)의 견습생이었던 루이-프랑수아 까르띠에가 한 보석 작업장의 책임을 맡으면서 시작된 까르띠에의 역사. 그때부터 1백5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 찬사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나폴레옹 시기가 끝나고 혼란기를 거쳐 활기를 되찾은 파리에는 파티와 무도회가 끊이질 않았다. 이와 맞물려 황제의 첫 번째 사촌이었던 마틸드 공주, 유지니 황후 등 왕가의 주목을 받으면서 까르띠에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기 시작한다. 루이-프랑수아 까르띠에는 이를 계기로 보석상 가문의 전통을 세우기 위해 자신의 아들 루이 프랑수아-알프레드에게 기술을 가르쳤고 회사 경영을 인수받게 한다. 그 후 1898년 알프레드는 다시 그의 장남과 동업을 시작하고, 세 명의 아들 모두에게 까르띠에를 맡김으로써 국제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사업 감각과 천재적인 창조력을 지닌 아들은 루이였다. 그는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의 중심부였던 뤼 드라 페(rue de la Paix)의 사업장을 맡았고, 형제인 자크(Jacques)와 피에르(Pierre)에겐 런던×뉴욕 지사를 세워 관리하도록 한다. 이때, 두 줄로 된 흑진주 목걸이와 바꾼 뉴욕 5번가의 모튼 플랜트 빌딩이 훗날 까르띠에 인터내셔널사의 본사가 되기도 했다. 이것으로 까르띠에는 단 두세대 만에 세계적인 보석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플래티넘과 다양한 색채를 보석에 도입해 혁신을 일으키고, 독특한 기교와 예술적인 감각으로 시계를 만들어 내고…. 전통적인 디자인이나 희귀한 발견물,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보석에 연결시킨 노력은 그들 고유의 까르띠에 스타일로 완성되었다. 형제들이 세상을 떠난 후, 까르띠에는 라이터 제조 업체를 가지고 있던 로버트 오크(Robert Hocq)의 손에 맡겨진다. 이로인해 전세계로 분할되어 있던 까르띠에의 사업권이 하나로 통합되어 "까르띠에 몽드(Cartier Monde)"라는 인터내셔널사로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4년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 장 누벨(Jean Nouvel)이 디자인한 건물에 새로운 본사를 개관, 1997년에는 1백50주년을 기념하는 전세계적인 행사를 갖기도 하였다. 그 시작은 작은 보석상이었지만 현재는 시계, 가죽, 펜, 향수에 이르는 명품브랜드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