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송파구 송파동 송파초등학교 부근 송파근린공원에 '을축대홍수기념'비가 있다.
그 비의 앞에 1925년 7월 사상 최악의 홍수로 기록한 '을축대홍수기념'비를 세우게 된 경위 등을
밝히는 파란색 판을 설치해 경각심을 일으키고 있다. 먼저 그 전문을 여기에 그대로 옮긴다.

을축년대홍수기념비
1925년 7월 중부·강원지방에 내린 큰 비로 인하여 한강이 범람하여 당시 서울인 한성일대가
모두 물에 잠기는 등 큰 참사를 빚었으며, 심지어 지금의 서울역 일대까지 물이 찼다.
특히 당시 송파나루터(지금의 석촌호수 주변)일대는 그 피해가 더욱 극심하여 성시를 이루었던 송파장터 마을이
몽땅 떠내려가고 물난리를 당한 주민들은 가락동 410번지(현 송파1동 한양 아파트) 일대로 이주하게 되었다.
일찌기 없었던 물난리를 당하여 수마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체험한 주민들은 다시는 이러한 재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후세에 경각심을 주고자 송파리에 소재하였던 광주군 중대면사무소에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민족의 비극인 6.25를 겪으면서 옆부분 일부가 탄혼에 떨어져 나가는 또다른 아픔을 간직한 채
오늘도 묵묵히 후손들에게 수마의 무서움을 일깨워주고 있다.

비뒷면에는 '增水 四十八尺 流失 二七三戶'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위가 48척이나 불었고 가옥 273호가 유실됐다고 밝히고 있다.

비석 왼쪽면에는 大正 十五年 六月 建立 中垈面이라고 쓰여있다.

비석 오른쪽에는 총탄 흔적이 뚜렷하다. 6.25 한국전 때의 탄흔이다.
'大正 十五年 六月 二十日 復興' 글자를 어렵게 확인할 수 있다.

1925년 7월 18일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해 당시 참사를 알리고 있다. 을축년 대홍수의 개요이다.
1925년은 을축년(乙丑年)이다.
이 해에 모두 네 차례의 홍수가 일어났다.
이 홍수를 ‘을축년장마’ ‘을축년대홍수’라고도 한다.
1차 홍수는 7월 7일 대만부근에서 발생한 태풍(열대저기압)이
11일과 12일에 중부지방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빠져나갔다.
이 때문에 황해도 이남지방에 300~500㎜의 호우가 내려 한강·금강·만경강·낙동강 등이 범람하였다.
1차 홍수의 물이 채 충분히 빠져나가기도 전인 7월 14일에 다시 대만부근에서 열대성저기압(태풍)이 발생하여
중국을 거쳐 한국의 황해 북부 근해를 지나가게 되어, 그 오른쪽 반지름에 들어간 임진강과 한강유역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16~18일까지 계속 내린 비의 양은 한강과 임진강 분수령부근에서 650㎜에 이르렀고, 이로 말미암아 임진강과 한강이
대범람을 일으켰다.
18일 한강의 수위는 뚝섬 13.59m, 인도교 11.66m, 구용산 12.74m로서 사상 최고기록을 남겼다.
영등포·용산의 제방이 넘쳐 강변 일대 3만여 정보의 땅이 침수되어 망망한 진흙바다를 이루었다.
가장 피해가 심했던 곳은 동부이촌동·뚝섬·송파·잠실리·신천리·풍납리 등이었다.
3차 홍수는 8월 들어 중국 양쯔강 유역에서 발생한 저기압이 황해로 나와 한만 국경을 지나
간도(間島)지방으로 나갔기 때문에 관서지방에 호우를 뿌리어 대동강·청천강·압록강이 범람하여 숱한 피해를 냈다.
4차 홍수는 8월말 마리아나(Mariana)제도 부근에서 발생한 열대성저기압이 9월 6일에 제주도 남방에서 목포·대구를 거쳐
동해로 빠져나갔는데, 이때문에 남부지방에 많은 비가 내려서 낙동강·영산강·섬진강이 범람하였다.
이와 같이 4차례에 걸친 열대성 저기압에 의한 홍수로 전국에서 사망자 647명, 가옥유실 6,363호, 가옥붕괴 17,045호,
가옥침수 46,813호에 이르렀다. 그리고 유실된 논이 32,183단보, 밭이 67,554단보 등으로 그 피해액은 무려 1억 300만원이었다.
이 금액은 당시의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해당하였으니까, 실로 엄청난 피해를 겪은 사상최대의 대홍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