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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잠에서 깨어나 급속하게 변모 발전하고 있는 지역이다.2002년 월드컵경기장 유치를 놓고 상암동과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던 삼골 마곡(麻谷)이다.상암동에 무릎을 꿇고 긴 잠을 자던 삼골 마곡지구는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조성되고 국내 굴지의
첨단과학도시로 탈바꿈을 하고 있다.그 옛날 하북위례성 동남쪽에 삼밭 패션단지가 있었다.서남쪽 이 양천에도 삼골 마곡(麻谷)
패션단지가 있었다.여기에 양천향교(陽川鄕校)가 있다.향교는 지방공립중학교다.1960년대 경기도 고양 땅이었다.그 후 이 고장이
서울로 편입되면서 양천향교도 자연 '서울에 있는 지방공립중학교'가 된 것이다.양천향교역 1번 출구 앞에서 만나 겸재정선길
역사탐방을 시작한다.
양천현의 입구인 지금의 가양사거리에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있다. 양천현과 양천향교의 격을 말해주었다.
하마비가 세워져 있었던 곳에서 좌측에 위치한 마을(구 가양동파출소 주변)을 지금도 하마비 마을이라 불렀으며 그 마을에는 가축을 도살하는 도살장이었다. 하마비의 우측마을 끝자락(제일제당 건너편) 공동묘지가 있었으며 은행나무주변 야산에는 전주이씨의 묘가 산재하여
있었다.전주이씨 족보에는 그 곳을 고개현자를 쓴
정승현이라 기재되어있다.
하마비(下馬碑)는 조선조 태종 13년(1413)에
처음 등장한다.
大小人員皆下馬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말을 비롯한 탈것에서
모두 내리라'
원래 하마비는 궁궐, 종묘, 서원 등의 입구 앞 일정한 위치에 세웠다.양천향교 앞에서도 하마비를 세웠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강서구는 1997년 하마비를 복원해 놓았다.덕수궁 대한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기 전 왼편을 보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다. 덕수궁 하마비는 잔존하는 궁궐의 하마비로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양천(陽川)이라는 고을의 명칭은 1310년(고려 충선왕2년)으로부터 시작된다.
가양동 239번지에 있었던 양천현아는 중앙에 현청(동헌)인 종해현, 그 동쪽에 객사(파릉관), 북쪽에 향교가 있었다.
이를 일컬어 읍치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읍치 중 양천현 읍치가 50m 반경내에서 이루어진 유일한 곳으로 연구대상이다.
종해헌 남쪽에는 아전들이 있는 길청, 향청의 동쪽에는 장교청, 그 앞의 좌우에 창고가 있었다.
지금은 양천현 읍치 중 현청자리는 아파트와 주택지로, 객사 자리는 종교부지로 사용되어 그 원형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양천현령으로 겸재 정선이 66세에 부임한다.
영조가 그림을 가르쳐 준 스승 겸재 정선이 인생 마련에 안정적으로
예술을 완성시켜달라고 배려한 것이다. 겸재 정선은 성리학을 진경산수화로 조선 성리학으로 완성시킨 조선후기 최고의 예술가로 꼽히는
인물이다.한양의 주산 북악산 자락 현재 경복고 일대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 난곡에서 태여난다. 그는 이 난곡에서 호조참판에 추증된 정시익(鄭時翊)과 밀양박씨(33세) 사이에서 1676년 정월 3일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가세가 몰락한 한미한 양반출신으로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게 살게 되었다.
아들 겸재 정선의 14세 생일날(1월 3일)에 부친 정시익이 52세로
세상을 떠난다. 46세 밀양박씨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살게 된다.
50대에 인왕산 아래 인곡정사(인왕유거, 현재의 옥인동 20)로 이사해서 84살로 죽을 때까지 그림의 완숙기를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
스승인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과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그리고 노가재 김창업(老稼齋 金昌業)등 당시 영의정 김창집의
동생들인 문인, 화가형제의 문하에 드나들며 학예수련에 열중하였다. 그림 솜씨를 인정받아 노론의 거두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 형제의
천거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위수(衛率: 왕세자를 따라 호위하는 직책)라는 벼슬로 시작하여 1729년에 한성부주부, 1734년 청하현감을 지냈다.
또 자연·하양의 현감을 거쳐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낭청(訓練都監郎廳), 1740년 12월부터 1745년 1월까지는 양천현령을 지냈다. 그 뒤 약 10년 동안은 활동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754년에 사도시첨정(司寺僉正), 1755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1756년에는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가선대부 지중추부사(嘉善大夫知中樞府事라는 종2품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그에게는 벗 사천 이병연이 있다.
겸재 정선이 조선후기 진경산수의 거장 이였다면 사천 이병연은 일만 삼천수가 넘는 시를 지은 대문장가이자 진경시인이었다.
겸재와 사천은 10대부터 스승인 김창흡 아래 동문수학한 벗이였다. 각각 81세, 84세까지 장수하면서 한동네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하며 자란 형제 같은 사이였다. 두 사람의 사이가 얼마나 애틋했던지 겸재가 양천(지금의 서울 가양동) 현령으로 부임할 때
이병연의 전별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자네와 나를 합쳐놔야 왕망천이 될 터인데
그림 날고 시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진 보이누나
강서에 지는 저 노을을 원망스레 바라보네"
여기서 왕망천은 당나라 문인이자 서화가 왕유를 말한다.
한양에서 멀지도 않는 코앞에 있는 양천으로 떠나는 벗 겸재 정선에게 애절한 시를 남긴 것이다.
그들은 전별시와 더불어 둘은 시와 그림을 주고받길 굳게 약속했다.
겸재와 더불어 시가 가면 그림이 온다는 약속이 있어서 기약대로 가고옴을 시작항다.
이렇게 주고받은 시와 그림을 묶어 놓은 서화첩이 바로 그 유명한 <경교명승첩>이다.
<경교명승첩>은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님을 보여주는 조선 최고의 서화첩이다.
그 곳에 서로 시와 그림을 주고받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 한 점 있는데 바로 <시와상간도(詩畵相看圖)>이다.
양천현아 동쪽에 객사(客舍)인 파릉관(巴陵館)을 두었다.
양천현아의 뒷산은 주산(主山) 궁산(宮山) 빗장산 관산(關山) 파릉(巴陵) 등으로 불렀다.
서강과 안양천이 만나서 염창 쥐산과 난지도를 지나는 강을 파강(巴江)이라고 했다.
그 꼬리 칠 파강(巴江)가에 있는 언덕 파릉(巴陵)이다.
파릉관은 양천현의 객사이다.
파릉관은 객사 고유의 목적이외에 외국사신이나 퇴임후의 원로 중신들이 머물렀다.
중국 사신들이 주로 숙소로 사용한 파릉관이다.
중국 사신들은 파강가의 아름다운 양천현을 꼭 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들은 경관이 수려하고 너무 아름다워서 조선에 가면 양천현의 경치를 보고
중국에 돌아가서 자랑을 하였다 한다.지금은 조계종 홍원사가 둘어섰다.
양천향교는 서울에 있는 유일한 '지방공립중학교' 향교(鄕校)다.향교의 구조는 일정하게 통일되어 있다.
궁궐이나 사찰과 함께 향교는 남향으로 자리를 하고 있다.세 개의 문(門)을 통과해야 왕과 부처,공자 등을 만날 수 있다.
향교는 세 개의 문을 두고 있다.홍살문과 외삼문 내삼문,이 세 개의 문을 통과하면 학문을 크게 이룬(大成) 공자와 같은
성현을 만나도록 하고 있다.그 성현을 모시고 있는 대성전(大成殿)이다.
궁궐 사찰 향교의 건물은 일자로 배치한다.홍살문 외삼문 명륜당 대성전 이렇게 일자 배치의 원칙을 지킨다.
향교 앞에서 '지킴이' 기능을 하는 홍살문이다. 나쁜 것을 막아주는 지킴이다.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
동짓날의 팥죽은 시절식(時節食)의 하나이면서 신앙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팥죽에는 축귀(逐鬼-잡귀를 쫓음)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팥은 색이 붉어 양색(陽色)이기 때문에
음귀(陰鬼)를 쫓는 데에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는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했다. 사람이 죽으면 팥죽을 쑤어 상가에 보내는 관습이 있었다. 이는 상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한 것이었다.
엣날 중국 진나라의 공공이라는 사람에게는 늘 말썽을 부려 속을 썩이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 아들 때문에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다. 어느 동짓날 그 아들이 그만 죽고 말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죽은 아들은 그만 역질 귀신이 되고 만 것이다. 역질이란 천연두라는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그 당시에는 역질이 마을에 돌면 마을 사람들 대부분 꼼짝없이 앓다가 죽어 버리니 공공은 자신의 아들이었다 해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공공은 생전에 아들이 팥을 무서워 했다는 기억을 떠올리고는 팥죽을 쑤어 대문간과 마당 구석구석에 뿌렸다. 효과가 있었던지 그 날 이후로 역질은 사라졌다. 이를 본받아 사람들은 역질 귀신을 물리치기 위해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쑤었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붉은 색은 귀신들이 싫어하는 색이라고 생각했기에 곡식들 중에서도 유난히 붉은 색을 지닌 팥을 그런 용도로
사용했다 한다.
신라왕조 헌강왕 때 처용이라는 천하의 한량이 살았다. 처용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워서 나쁜 귀신들도 탐을 내었다.
하루는 서라벌 도깨비가 꾀를 내어 처용이 집에 없을 때 처용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처용의 아내에게 갔다.
아내는 처용인 줄만 알았다. 처용이 밤 늦게 집에 들어와보니 이불에 다리가 네 개가 있는 것이다.
처용은 힘만 센게 아니라 아주 현명했다. 그는 화를 내지 않고 방에서 나와 달을 보고 시를 지어 읊었다.
처용은 얼굴색이 붉은 아라비아 상인이었다. 밤새 술까지 마셨고 성질까지 꾹꾹 참고 있었으니
그 붉은 얼굴이 훨씬 더 붉게 되었다. 그 도깨비는 붉디붉은 처용의 얼굴을 보자 그만 질겁을 하고
처용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사죄하며 다시는 처용 근처에 오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줄행랑첬다고 한다.
이후 신라세시 풍속은 동짓날 자기 집 대문입구에 처용 얼굴을 상징하는 붉은 팥죽을 칠하였다.
"붉은 색깔만 얼씬 거려도 이유 불문하고 도망부터 쳐라!"
그 날 혼줄난 도깨비 대장이 전국 도깨비들에게 긴급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런 설화를 바탕으로 홍살문에도 붉은 색을 칠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홍살문의 붉은 색은 신성한 공간으로 침입하려는 잡귀를 막기 위함이다.
홍살문이라는 단어에서 살이라는 글자는 화살 전(箭) 자의 음이 아닌 살이라는 뜻을 딴 글자이다.
홍살문은 붉은 화살이 꽂혀있는 문이다.
문의 위쪽을 보면 화살들뿐만 아니라 삼지창도 꽂혀있고 삼지창에는 삼 태극이 붙어있다.
청색 적색 황색의 삼색이 바람개비 모양을 이루고 있는 삼 태극은 천+지+인 3 요소가 어우러지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를 상징화한 것이다.
양천향교를 들어가려면 오른쪽을 밟고 올라가 외삼문(外三門)을 통과해야 한다.
그 누구도 가운데 계단을 밟을 수 없다.그 계단은 신계(神階)라고 한다.신만이 밟을 수 있다.
향교를 들어갈 때는 오른쪽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향교에서 나올 때는 왼쪽 계단으로 내려온다.
삼문 중 가운데 문은 어칸(御間)으로 신만이 통과할 수 있다.좌우의 공간은 협칸(狹間)이다.
들어갈 때는 오른쪽 협간으로,나올 때는 왼쪽 협칸으로 들어가고 나온다.일종의 우측통행이다.
어칸 가운데는 노랑 파랑 빨강 삼색의 삼태극이 자리한다.
하늘(天) 땅(地) 사람(人)이 하나로 어울리는 삼재일체의 사상을 상징하는 삼태극이다.
외삼문 왼쪽에는 양천현을 거쳐 간 수령들의 송덕비(頌德碑)가 있고 오른쪽에는 양천향교를 알리는
알림판이 서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명륜당(明倫堂)이 마주 보인다.'인간의 도리를 밝혀주는 집'향교의 강당이다.
명륜당은 가운데는 마루로 되어 있고 양쪽에는 온돌방을 들였다.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문이 있는게 특징이다.
이 문을 앞뒤로 열어 두고 공부하면 뒷산 궁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자연바람으로 쾌적하게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명륜당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다.명륜당 쪽에서 보면 왼쪽 동쪽에 동재가 있다.
해가 뜨는 동쪽이다.나이가 많은 유생이나 양반자재를 위한 기숙사 동재를 동쪽 왼쪽에 두었다.서재는 오른쪽 서쪽에 둔다.
양천향교에서 가장 높은 곳에 대성전(大成殿)이 자리 잡고 있다.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은 외삼문보다는
격이 높은 솟을대문이다.제향공간인 대성전으로 통하는 내삼문이다.내삼문으로 가는 계단은 외삼문과는 다르게 단순화시켰다.
내삼문도 세개의 공간으로 구성하였다. 어칸문짝에 삼태극문양이 있다.
제향공간에는 대성전이 남향하여 서 있다. 그 서쪽에 전사청이 동향하여 서있다.
대성전은 외벌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서있는 겹처마, 이익공,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대성전 마당에는 보통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둔다.
그러나 이곳은 제사용품을 보관하고 제사를 드릴 때 음식을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 건물만 남아 있다.
대성전의 문은 명륜당의 문과는 다르다.초록색 판문으로 되어 있다.마당에 크고 무성한 잎을 가진 나무가
양천향교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대성전 내부에는 공자(孔子)를 비롯한 안자(顔子)·자사(子思)·증자(曾子)·맹자(孟子) 등 5성(五聖), 주돈이(周敦 )
정이(程 ) 정호(程顥) 주희(朱熹) 등 송조 4현(宋朝四賢), 그리고 우리나라의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유(安裕)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조헌(趙憲)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 등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였다.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고 있다.
양천향교(陽川鄕校)는 1963년 김포군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서울에 있는 유일한 향교가 되었다.
궁산 아래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이 일대는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양천현감(陽川縣監)으로 있으면서
진경산수(眞景山水)를 그린 풍경이 빼어난 곳이다.언덕 위에 건립한 양천향교는 공부하는 공간과 제사를 위한
공간을 각각 담으로 둘어싸인 별도의 영역 안에 두고 있다.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이다.
이 향교는 태종 11년(1411) 창건되어 문묘(文廟)의 기능과 함께 지방 교육기관의 기능을 하여왔다.
융희 3년(1909) 7월 5일 소학교령 대신 보통학교령을 반포하고 고등학교령이 신설되는 등 학제(學制)가 크게
개편됨에 따라 조선말 전국의 모든 향교와 마찬가지로 교육기능은 상실되고 문묘의 기능과 교화사업만 담당하게 되었다.
1914년 3월 1일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양주(楊州)·통진(通津) 2개 군이 김포군에 합군(合郡)되면서 모든 재산과 교궁(校宮)이
김포향교에 이관, 통합되었다. 현재의 향교 자리는 본래 위치 그대로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이 향교는 다시 김포향교에서 분리되면서 원래의 재산을 환수하여 독립 운영하면서 건물들이 복구되기 시작하였다.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의 변경으로 이 향교가 위치한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가양동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됨에 따라 1965년 12월 재단법인 서울특별시 향교재단이 설립되었다.
양천(陽川)은 궁산(宮山)이 주산으로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궁산(宮山)은 파산(巴山) 성산(城山) 관산(關山) 진산(鎭山)으로도 불린다.
산이 담당한 다양한 역할 때문에 여러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궁산은 공자(孔子)를 배향하는 양천향교가 있는 곳으로 공자를 숭배하는 의미로 궁산이라 했다.
파산(巴山)은 삼국시대 이곳의 지명이 제차파의(齋次巴衣)라서 파산이라 했다.
성산(城山)은 산 위에 삼국시대에 쌓은 옛 성터가 남아 있어 성산이라 했다.
이 산성은 강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과 파주의 오두산성(烏頭山城)과 함께 삼국시대에 한강 하구를
지키는 요새의 역할을 하였다. 강 건너 고구려의 행주산성과 마주보며 대치하였던 한성백제의 산성이다.
임진왜란 때는 권율 장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있다가 행주산성으로 옮겨서 행주대첩의 위업을 이루었다.
안타깝게도 일제 때 김포비행장 개설공사로 일본군이 주둔하고 한국전쟁 때는 미군이 주둔하고 한국전쟁 이후에도
한동안 한국군이 주둔하여 궁산은 원형이 철저하게 훼손되었다.
옛 성터의 흔적인 적심석(積心石)과 그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약간의 석재만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관산(關山)은 한강을 지키는 빗장의 역할을 했다고 ‘빗장 관(關)’자를 써서 관산이라 했다.
진산(鎭山)은 양천고을의 모든 관방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진산이라 했다.
다양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표준 명칭은 궁산이라고 하고 있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 양천향교 뒤 궁산에 있는 누정(樓亭) 소악루(小岳樓)이다.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건립된 누정이다.처음에는 가양동 산4번지 궁산 동쪽 기슭에 있었다고 한다.
1994년 6월 25일 새로 복원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소악루 앞으로는 삼각산을 배경 삼아 가까이
남산이 보이고 한강의 시원한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바로 이같은 자연조건 때문에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를
완성시킨 '자연 속의 화실'로 기능하는 등 문학과 예술 활돌의근거지로 역할을 하지않았나 한다.
소악루의 주인은 이유(李楡 1675~1753)였다.
이유는 본관이 전주로 정종의 4남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의 9세손이다.
<양천군읍지>에는 그가 동복현감을 버리고 양천으로 돌아온 뒤에 소악루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기준으로 한다면 소악루는 영조 14년(1738) 이후에 건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영조 8년(1732) 장릉참봉을 제수 받고 임지로 가면서 느낀 감회를 기록한 글이 있다.바로 <사군별곡>이다.
이 글에는 장릉참봉으로 가기 전에 양천에 소악루를 짓고 거주했으며 자신의 호도 이때부터 소악루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기행가사가 1732년경 창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적어도 소악루는 1732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자는 중구(仲久)이고 호는 소와(笑窩) 혹은 소악루라고 하였다.이유는 이곳에서 조선 후기 성리학자 한원진(韓元震)과
더불어 인간과 사물의 심성에 대하여 논하였다.중국의 악양루를 본떠 소악루라고 짓고 시와 술과 거문고와 노래를 즐겼다.
<여지도서>에는 소악루 앞 한강 행호(杏湖)를 동정호(洞庭湖)라 하였으니 중국의 동정호만큼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이유는 소악루에서 많은 가사 작품을 남겼다.그는 소악루에 대해 이렇게 노래하였다.
흉중에 감춘 말을 뉘더러 이를 쏘냐
악양루 끼친 터에 소악루 새로 지어
지세도 높거니와 풍경도 좋을시고
삼산반락청천외(三山半落淸天外)라
이수중분백로주(二水中分白鷺洲)를
옛 글귀 들었더니 절경인줄 뉘 알쏘냐.
-이유,<옥경몽유가(玉京夢遊歌)>
영조 16년(1740)에는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이 양천현감으로 부임한다.
정선은 소악루에 올라 이 일대의 풍광을 진경산수에 담았다.그의 친구 사천 이병연은 겸재의 그림에
시를 읊어 그 진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겸재의 그림 <소악후월(小岳候月)>에 붙인 이병연의 시이다.
파릉에 밝은 달뜨면
먼저 이 난간을 비춘다네
두보가 쓴 시가 없으니
끝내 소악양루기 때문이겠지.
巴陵明月出 先照此欄頭
杜甫無題句 終爲小岳陽
-이병연 <소악후월(小岳候月)>-
이 시는 파릉,곧 양천의 달밤 풍경을 노래한 것이다.
이병연은 영조 때 뛰어난 시문을 많이 지은 사람으로
그가 지은 시만도 수만 점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고 영조실록은 밝힌다.
소악루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모두 6칸 건물이다.
아래 쪽에는 화강석을 주초석으로 민흘림 형태의 원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곁처마 구조로 단층 팔각지붕이며 주위에 난간을 둘러 한강을 조망하도록 하였다.
궁산과 덕양산(행주산성) 사이의 강을 행호(杏湖)라고 했다.절경을 자랑하는 행호에는 웅어가 유명했다.
그 웅어는 임금님에게 올리는 진상품이었다.겸재 정선은 행호에서 고기를 잡는 모습을 그린 <행호관어도)를 남겼다.
행호는 봄이면 북어가 잘 잡히고 여름이면 웅어가 잘 잡혔다.정선의 그림에도 여러 배들이 힘을 합쳐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는 풍경이 보인다.녹음이 짙지만 꽃은 보이지 않으니 여름날 웅어를 잡는 풍경을 그린 듯하다.
“가을 전어가 상놈이면 봄철 웅어는 양반이지”
행주나루의 명물 ‘웅어’는 회유성 어종으로 먼 바다로 나갔다 봄만 되면
강으로 거슬러 올라온다. 웅어는 조선시대 왕만 먹을 수 있었던 귀한 생선이란다.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 고양의 행주나루터 앞에 갈대가 자라는 아름다운 섬이 있었다.
그 섬에 있는 돌빵구지라는 마을에 금원이라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금원은 부모님을 여의어 혼자 힘으로 한강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갔다.
어릴 적 몸을 다쳐 등이 굽었지만 한강을 벗 삼아 살아가는 심신이 강인한 소년이었다.
행주나루 부근 한강에는 팔도에서 희귀하기로 유명한 웅어가 잡혔다.
어찌나 희귀하였는지 임금님만 드실 수 있도록 국법으로 정해져 있을 정도였다.
이 법을 어기는 자는 돌빵구지 동굴에 있는 석빙고에 갇혀 죽는 끔찍한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따뜻한 봄날,
한양에 사는 정판서라는 사람이 셋째 딸 란사를 요양시키기 위해
행주나루로 오게 되었다. 란사는 창백한얼굴에 몸이 가녀린 소녀였다.
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란사는 늘 잔병치레를 하였다.
한양의 어느 의원이 이르는 대로 행주나루로 요양을 오게 된 것이다.
나무를 하러 산에 오르던 금원은 진달래꽃을 안은 채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란사와 마주치게 되었다.마치 살아있는 선녀의 모습으로 보였다.
그날 이후 금원은 란사를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란사의 병세는 악화돼 외출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다.
소식을 들은 금원도 식음을 전폐하고 앓기 시작했다.
란사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으로 병든 것이다.
하루는 금원을 가엾이 여긴 주지스님이 그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란사의 병을 낫게 하려거든 한강에 사는 웅어를 먹게 해주어라.”
란사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기운을 차린 금원은 한강으로 가 웅어를 잡기 시작했다.
오직 란사의 건강이 회복되기만을 기원했다. 한강의 중심을 향해 노를 젓던 중 갑자기 파도가 치더니
웅어 한 마리가 금원의 앞으로 툭 떨어졌다. 기쁜 마음으로 웅어를 정 판서에게 전달한 금원은 다음 날
스스로 석빙고로 들어가 얼어 죽는다. 란사는 웅어를 먹고 기적처럼 몸이 회복되어 금원을 찾아가
감사의 말을 전하려 했다. 돌빵구지 마을로 찾아갔지만 금원이는 없었다.
그러다 웅어를 잡은 죄로 석빙고에 갇혀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고 충격에 빠진다.
얼마나 흘렀는지 돌빵구지 마을에서는 더 이상 란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석빙고 속에 또 하나의 얼음사람이 생겼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돌고 있었다.
또 누군가는 해질 무렵 두 마리의 웅어가 힘차게 한강에서 노닐다 무지개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고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용감한 소년 금원과 그의 깊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같은 길을 따른 란사의 사랑이야기는 오래도록 돌빵구지 마을 사람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출처:한강사>
궁산과 행주산성 사이를 흐르는 강 왕봉하(王逢河)다.본래 백제의 땅 계백현이었다.
이를 신라 문주왕 원년에 고구려가 취하게 되어 왕봉현으로 그 이름이 고쳐졌다. 뒤에 신라로 돌아가 경덕왕 16년에
이름이 고쳐져 한양군 영현이 되었다. 이렇게 명칭의 변화를 겪은 경기도 고양시 행주 앞, 한강 하류를 `왕봉하`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행주에 한씨 성을 가진 어여쁜 처녀가 살고 있었다.
한씨 처녀는 얼굴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재주도 뛰어나서 마을 청년이나 한씨 처녀와 비슷한 나이를 가진 아들을 둔 부모들은
모두 한씨 처녀를 탐내었다.때는 바야흐로 봄이었다.마침 한씨 처녀의 외가에 큰 잔치가 있어 처녀는 어머니와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다. 한씨 처녀가 먼저 배에 타고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고 배에 타려는 순간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 배가 흔들렸다.
한씨 처녀는 그만 어머니의 손을 놓치게 되었다. 그 순간 어머니는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강물의 깊이는 깊지 않았다.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한씨 처녀는 물론 나루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한씨 처녀의 어머니는 물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어푸푸푸…."
"어머니, 아… 어쩌지! 누가 좀 도와주세요! 저희 어머니를…."
그 때 마침 `풍덩`하는 소리가 나면서 어떤 청년이 강물로 뛰어들었다.
청년은 무사히 어머니를 구해내어 땅으로 올라왔다.
"어머니! 어머니, 괜찮으세요?"
"음…. 그래… 난 괜찮다."
"어머니…. 흑흑…….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가 무사한 것을 보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한씨 처녀는 청년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청년의 의관이 온통 물에 젖은 것을 보자 놀라며,
"어머, 옷이 다 젖어서…."
"전 괜찮습니다. 댁이 어디십니까?
어머니께서 이대로는 집에 못 가실 듯 하니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청년은 한씨 처녀의 어머니를 업고 집까지 갔다. 처녀는 너무도 고마워 청년을 붙잡으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입었던 옷을 꺼내주었다.
"아닙니다.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몸이라도 말리고 가셔야 제 마음이 편합니다."
"이보게 몸이라도 말리고 가게나.
여기까지 나를 업어다 주었는데,
그냥 간다면 나와 내 딸이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네."
이렇게 처녀와 어머니가 간곡히 붙잡자 청년도 더 이상 뿌리치지 못하고 그 집에 머물게 되었다.
첫 날은 몸을 말리다 날이 저물고 두 번째 날에는 남자가 없는 집이라 장작이라도 패주겠다는 것이
하루가 다 지나가고 세 번째 날에는 동네에 봄 농사가 시작되어 그것을 도와주겠다고 나섰다가 하루가 다 가버렸다.
어머니도 몸져눕고 혼자 농사를 지어야 하는 한씨 처녀가 너무도 가여워,
청년은 차마 농사가 시작된 이후에는 그 집을 떠나가지 못했다.
그렇게 결국 계절이 바뀌어 여름이 되었다.
한씨 처녀와 어머니는 몇 해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농사일과 생활고 때문에
너무도 힘든 생활을 하다가, 이름 모를 청년이었지만 집에 머물며 집안의 모든 일을 도와주니 마음이 든든했다.
하루는 어머니가 청년을 불렀다.
"이보게, 자네 우리 딸을 어찌 생각하나?"
"네? 무슨 말씀이신지…."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동네에서 우리 딸을 탐내는 집이 많네. 혼담도 많이 들어오고. 하지만, 저 아이는 나 때문에
아무데도 시집을 가지 않으니 걱정이야. 마침 자네가 우연한 기회에 나를 구해주고 우리집 일을 돌보아 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네."
"예,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전 곧 떠나야할 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비록 자네가 어느 곳에 사는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나는 이미 자네를 내 자식처럼 생각하고 있고 내 딸도 자네를 마음에 두고 있네.
혹 내 딸이 자네 마음에 부족한 것인가?"
"아닙니다! 당치 않습니다. 전 다만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는 몸이라,
때가 되면 떠나야 하니 아무런 약속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와 청년의 이러한 대화를 들은 처녀는 청년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괴로워했다.
자신과 혼례를 올리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지만, 이제 곧 청년이 떠난다 하니 너무도 슬퍼 마음을 어찌해야할지 몰랐다.
그 날 밤은 달이 매우 밝고 유난히 더웠다. 청년은 하루 종일 일을 해서 고단했을 텐데도 낮의 일 때문에 잠이 오질 않아
방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달빛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옆 방 문이 열리면서 한씨 처녀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한밤중에 서로를 보게 된 한씨 처녀와 청년은 당황스러워 했고
처녀는 다시 방문을 닫으려 하였다. 그 때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처녀를 불렀다.
"이보시오…!"
"…… 밤이 야심한데, 어찌 깨어 계십니까?"
"유난히 더워 잠이 오질 않는구려. 달빛도 밝고."
"하루 종일 고단하셨을텐데, 잠이라도 편히 주무셔야 할 터인데…."
"… 난 곧 떠나오. 이번 달 말일에는 떠나야 할 것 같소.
일꾼을 구하시오. 내가 떠나면 농사일을 혼자 어떻게…."
청년의 걱정 섞인 말이 말을 끝나기도 전에 처녀가 말했다.
"낮에 저희 어머니가 하신 말씀 때문이십니까?"
"아, 아니오. 그게 아니라…."
"부담 갖지 마십시오.
저희 어머니께서 데릴사위를 얻고 싶으신 마음에 그만….
달리 가실 곳이 없으시다면 이 곳에 계속 계셔도 됩니다.
다시는 어머니께서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실 겁니다."
달빛 속에 청년의 얼굴이 흔들렸다.
"…… 아니오. 난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사람이오."
"……."
한씨 처녀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도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는 몇 분이 지나고 나서 한씨 처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등목을 쳐 드리겠습니다. 그럼 잠이 잘 오실 것입니다."
"아, 아니오. 내가 어찌….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겠소."
"이 깊은 밤에 누가 보겠습니다. 보더라도 상관없습니다만….
저는 그저 저희 어머니를 구해주시고 저희를 이렇게까지 보살펴 주신 분께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하여…….
이대로 보낸다면 평생 마음의 병이 될 것 같습니다."
"……."
청년은 한씨 처녀의 호의를 뿌리치지 못했다.
두 사람은 뒤꼍에 있는 우물가로 갔다.
호젓하게 비치는 달빛을 받으며 처녀는 청년의 등에 시원한 우물물을 부어 주었다.
그렇게 몇 번인가 물을 부어주다가 갑자기 처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청년은 놀라 벌떡 일어나며 처녀를 붙잡았다.
"왜 그러시오? 내가 무언가를 잘못하였소?"
"아닙니다… 전 다만… 이제 당신이 떠나신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결국 청년은 흐느끼는 처녀를 꼭 안아 주었다.
한씨 처녀는 청년을 품에 안고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
처녀의 울음이 잦아들자 청년은 입을 열었다.
"나는 사실 고구려 왕자요.
조국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이 곳 백제 땅에 숨어 살게 된 것이오."
"네? 정말이세요?"
"그렇소. 사실은 얼마 전 고국으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받았소.
하지만, 당신과 당신 어머니를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미루고 있었던 것이오.
난 사실 처음 나룻터에서 당신을 보았을 때부터 당신을 좋아했었소.
그래서 한 곳에 머무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집에 있었던 것이오.
나는 고구려로 돌아가오. 하지만 이번에 돌아가 내가 왕의 자리에 오르면 당신을 데리러 오겠소."
"네…. 흑흑."
한씨 처녀와 고구려 왕자인 청년은 이렇게 혼인까지 약속한 사이가 되었다.
사실 이 청년은 고구려 왕자로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고국을 탈출, 백제 땅에서 유랑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 고국으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부왕이 위독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청년은 한씨 처녀에게 돌아가서 왕위에 오르면 처녀를 데리러 오기로 약속하고 고구려로 떠났다.
그가 떠난 뒤, 마을에 새로 고을 태수가 부임했다.
태수는 마을에 한씨 처녀가 매우 아릅답다는 얘길 듣고 처녀에게 자신과 결혼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한씨 처녀는 고구려에서 왕자가 돌아올 것임으로 한사코 이를 거절하였다. 태수는 처녀가 적국인 고구려의 사내와
정을 통했다는 죄명으로 그녀를 옥에 가두었다. 시간이 지나도 한시 처녀의 절개를 꺾을 수 없음을 알게 된 태수는 그녀를
처형하려고 하였다. 형장에 끌려 나가서 막 처형하려고 할 때 굿쟁이로 변한 고구려군의 결사대가 태수를 죽이고 한씨 처녀를
구출했다. 한씨 처녀는 마침내 안장왕이 된 고구려의 왕자와 극적으로 상봉하게 되었으므로 이곳을 왕봉현이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