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함께 하고 함께 하지 않는 문을 밝힘
次第三 明共不共門者
통틀어 말하면 국토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내토(內土)요, 둘째는 외토(外土)이다.
외토란 곧 공과(共果)요, 내토란 곧 불공과(不共果)이다.
通相而言 土有二種
一者內土 二者外土
言外土者 是共果 言內土者 是不共果
내토에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생들의 5음(陰)을 정보토(正報土)로 삼는데 사람이 거기에 의지해 살기 때문에 국토라 한다.
둘째는 세상을 뛰어난 성인의 지혜로서 이름을 실지토(實智土)라 하는데, 후득지(後得智)로 거기에 머무르기 때문이며, 또 근본지(根本智)에 의하여 전도(顚倒)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 “본업경”에 “국토란 일체 성현이 사는 곳이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과 성현의 각자가 사는 과보의 국토로서, 만일 범부 중생이 5음 가운데 머무르면 그것을 정보의 국토라 하고, 산림(山林)과 대지를 공유(共有)하면 그것을 의보(依報)의 국토라 한다” 한 것과 같다.
內土之中 亦有二種
一者衆生五陰 爲正報土 人所依住 故名爲土
二者出世聖智 名實智土 以能住持後得智故 依根本智 離顚倒故
如本業經云 土名一切賢聖所居之處 是故一切衆生賢聖 各自居果報之土 若凡夫衆生住五陰中 爲正報之土 山林大地共有 爲依報之土
초지(初地)의 성인에게도 두 가지 국토가 있다.
첫째는 실지토(實智土)이니 전지(前智)가 후지(後智)에 머무름으로써 국토를 삼는 것이며, 둘째는 변화하는 정예(淨穢)가 겁의 수량을 지나 응현(應現)하는 국토이며 마침내 무구지토(無垢地土)에 까지도 또한 그와 같다.
모든 중생과 나아가서는 무구지까지가 모두 정토가 아니니 과보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初地聖人 亦有二土
一實智土 前智住後智爲土 二變化淨穢 逕劫數量 應現之土 乃至無垢地土 亦復如是
一切衆生 乃至無垢地 盡非淨土 住果報故
통틀어 말하면 비록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을 분별하면 정보의 국토는 불공과(不共果)의 뜻으로서 거기는 아무 이설(異說)이 없거니와, 의보의 국토를 공과(共果)라 하는 데에는 여러 학설이 같지 않다.
總說雖然 於中分別者 正報之土 不共果義 更無異說依報之土 爲共果者 諸說不同
즉 어떤 이는 말하기를, “저 산이나 물 등은 극미(極徵)가 합해서 된 것이 아니고 실지로는 한 본체가 있으며, 많은 인(因)의 공감(共感)으로서 그것은 중생들이 따로 이루어지고 각기 변한 것이므로, 함께 있어도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은 여러 개의 등불과 같다.
또 많은 원인으로 꿈이 될 때 원인의 종류가 다 같으면 결과의 모양도 같으며 처소도 다름이 없는데, 가정해서 공(共)이라 하지만 실지로는 각기 다른 것처럼 부처님의 정토도 또한 그런 줄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그것이 별식(別識)이 변해 된 것으로서 모두 법계에 두루한 것이라면, 있는 처소가 같다고 해서 공(共)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공이 아닌 것이며, 만일 어떤 한 국토라도 식(識)을 따라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마음 밖에서 이루어진 것이요 유식(惟識)의 이치가 아니다”고 한다.
이것은 저 “해심밀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식(識)의 반연할 것이라고 나는 말하나니, 그것은 유식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 “유식론”에서, “업이 식 안에 훈습(熏習)하여 과(果)에 집착하여 밖으로 나온다. 무엇 때문에 훈습하는 곳에서는 과를 말하지 않는가?”라고 한 것과 같다.
或有說者 如山河等 非是極微合成 實有一體 多因共感 直是有情異成各變 同處相似 不相障礙 如衆燈明
如多因所夢 因類是同 果相相似 處所無別 假名爲共 實各有異 諸佛淨土 當知亦爾
若別識變 皆遍法界 同處相似 說名爲共 實非共也 若有一土 非隨識別者 卽成心外 非唯識理
如解深密經云
我說識所緣 唯識所現故
唯識論云 業熏習識內 執果生於外 何因熏習處 於中不說果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정토의 의과(依果)가 식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식은 다른 것이며 국토의 하나이니, 그것은 별식(別識)이 함께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4진(塵)을 모아 한 기둥을 이루는 것과 같나니 한 기둥의 모양은 4미(微)를 떠나지 않지만 4미를 따라 4주(柱)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이치도 그런 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만일 자수용토(自受用土)에 대해서 말한다면, 부처님이 모든 부처님과 함께 한 국토를 공유(共有)했나니 그것은 마치 부처님이 법신을 함께 의지한 것과 같기 때문이며, 만일 타수용토(他受用土)에 대해서 말한다면, 부처님이 모든 보살들과 공유했나니 그것은 마치 왕이 신하들과 한 나라를 공유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 두 개의 수용토도 별체(別體)가 아니니, 그것은 마치 관행(觀行)하는 사람은 돌을 옥으로 보지만 지혜가 열리지 않은 사람은 오직 돌로만 보는데, 돌과 옥은 다르지만 체가 다른 것이 아닌 것처럼, 그토가 같은 것도 그런 줄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저 “해심밀경”에서 “여래의 행과 여래의 경계는 어떻게 다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부처님은 “여래의 행은 이른바 일체종(一切種)으로서 여래는 무량한 공덕을 공유하는 청정한 불토를 장엄하는 것이며, 여래의 경계도 일체종이지만 거기는 5계(界)의 차별이 있으니, 이른바 유정계(有情界), 세계, 법계, 조복계(調伏界), 조복방편계(調伏方便界)이니라”라고 하신 것과 같다.
그 해석에 “여기서 말한 자수용토는 모든 부처님이 공유한 것으로서 각기 다른 것이 아니다” 하였다.
或有說者 淨土依果 雖不離識 而識是別 土相是一 由彼別識共所成故
如攬四塵以成一柱 一柱之相 不離四微 非隨四微成四柱故 當知此中道理亦爾
於中若就自受用土 佛與諸佛共有一土 猶如法身 諸佛共依故 若論他受用土相者 佛與諸菩薩等共有 如王與臣共有一國故
又二受用土 亦非別體 如觀行者 觀石爲玉 無通慧者 猶見是石 石玉相異 而非別體 二土同處 當知亦爾
如解深密經云 如來所行如來境界 此何差別 佛言 如來所行謂一切種 如來共有無量功德衆 莊嚴淸淨佛土 如來境界 謂一切種 五界差別 所謂有情界 世界 法界 調伏界 調伏方便界
解云 此說自受用土 諸佛共有 非各別也
“유가론”에는 “서로 평등한 모든 물건을 혹은 불공분별(不共分別)로 인(因)을 삼고, 혹은 공분별(共分別)로 인을 삼는다. 만일 공분별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면 분별은 없다 하더라도 남의 분별로 주지(住持)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멸하지 않으며, 만일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남의 분별에는 과가 없을 것이다. 그가 비록 멸하지 않더라도 청정하게 되었으면 그 일에 대해 바른 견해가 청정한 것이다.
마치 관행을 닦는 많은 사람들이 그 한 일에 대해 정심(定心)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다른 견해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저도 또한 그럴 것이다”하셨다.
그 해석에는 “여기서 말한 의보는 식을 따라 다른 것이 아니다. 만일 공과(共果)가 식을 따라 달라진다고 고집한다면, 나의 과는 멸하더라도 남의 과는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의 분별과 같지 않을 것이니 그러므로 그는 이 글을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瑜伽論云 相等諸物 或由不共分別爲因 或復由共分別爲因 若共分別之所起者 分別雖無 由他分別所住持故 而不永滅 若不爾者 他之分別應無其果 彼雖不滅 得淸淨者 於彼事中 正見淸淨 譬如衆多修觀行者 於一事中 由定心故 種種異見可得 彼亦如是
解云 此說依報 不隨識別 若執共果隨識異者 我果雖滅他果猶存 卽他分別 不應無異 故彼不能通此文也
“섭대승론”에는 “다시 이와 같은 정토는 한결같이 청정하고 한결같이 즐거우며 한결같이 잃음이 없고 한결같이 자재함을 수용한다” 하고,
그 해석에는 ‘항상 더러움이 없기 때문에 한결같이 청정하다 하고, 다만 묘한 즐거움을 받으면서 괴로움도 없고 버림도 없기 때문에 한결같이 즐겁다 하며, 오직 진실한 선으로서 악도 없고 기억도 없기 때문에 한결같이 잃음이 없다 하고, 일체의 일에서 다 다른 인연을 보지 않고 모두 자신의 마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결같이 자재하다”고 한다.
“다시 큰 청정함에 의하여 한결같은 청정함을 말하고, 큰 즐거움에 의하여 한결같은 즐거움을 말하며, 큰 항상됨에 의하여 한결같이 잃음이 없음을 말하고, 큰 나[大我]에 의하여 한결같은 자재함을 말한다” 하였으며,
그 해석에는 “이 가운데 처음의 ‘다시’은 타수용의 뜻을 나타낸 것이며, 뒤의 ‘다시’은 지수용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 뜻은 같지 않더라도 다른 국토가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본론(本論)에 대한 주장만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그 두 국토도 별체(別體)가 아닌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攝大乘論云 復次 受用如是淨土 一向淨 一向樂 一向無失 一向自在
釋曰 恒無雜穢 故言一向淨 但受妙樂 無苦無捨 故言一向樂 唯是實善 無惡無記 故言一向無失 一切事悉不觀餘緣 皆由自心成 故言一向自在
復次 依大淨說一向淨 依大樂說一向樂 依大常說一向無失 依大我說一向自在
解云 此中初復次 顯他受用義 後復次 顯自受用義 義雖不同 而無別土 所以本論 唯作一說 故知二土 亦非別體也
(문) 그 두 주장에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問如是二說 何得何失
(답) 만일 그 말로써 취한다면 다만 성립하지 않을 뿐이지만 그 뜻으로 이해하면 거기에 다 이치가 있는 것이다.
答曰 如若言取 但不成立 以義會之 皆有道理
이상은 제3의 함께 하고 함께 하지 않는 문이다.
此是第三共不共門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