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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밀양문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머실
초가을의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우리는 하교 길의 어린 천사들 틈에 끼어 내일동을 향해 걸었다. 엄 이비인후과 앞 오르막을 올라서니 잠시 만에 아름다운 화강암 난간으로 곱게 단장한 밀양교에 다다랐다. 푸르고 싱그러운 바람이 호수처럼 아득히 펼쳐진 아름다운 오후 햇살이 번쩍이는 남천강 위를 미끄러져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강 건너 양지바른 언덕 위에 웅장하게 그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있는 영남루는 가슴이 징하도록 크고 아름답다. 그 동편 아래에 아랑의 전설이 서려있는 아랑각이 수백 년을 같이 지켜온 고목과 함께 명경같이 맑은 남천강물을 내려다보며 슬픔을 지키고 서 있고, 그 아랑각 뒤로 아동산은 붉고 샛노란 단풍이 불을 지른 듯 타오르고 있다.
“안녕하세요? 보건소에서 점검 나왔습니다.” 정옥은 인사와 동시에 신분증을 제시했다. 안에서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키는 작은데, 기다랗게 속눈썹을 붙인 간호사가 흰 가운을 입은 채로 나타났다. 그녀는 께름칙한 표정으로 우릴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하며 키가 멀쑥한 다른 간호사 한명이 쪼르르 원장실로 뛰어갔다. 병원이 건물은 새 건물인데 복도는 어두컴컴한 색깔에 조명도 별로 없어 묘지 안 같은 느낌이다. 부실한 청소로 호흡하는 공기 속에 먼지 냄새와 병원 소독약 냄새가 섞여 나왔다. 복도에 놓인 수족관 속의 열대어가 형광 불빛 속에서 낯선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굿삐라던가? 정확한지 모르지만 새끼손가락 한마디가 채 될동말동한 기럭지에 성냥개비 굵기 정도의 오색찬란한 앙증맞고 귀여운 녀석이다.
“어서 오세요!” 의사인 듯 원장님이란 키가 육척도 더 되는 늘거죽죽한 대머리가 나타났다. 그런데 원장님 얼굴이 안면이 많다. 어디서 보았던가? 기억을 굴렸다.
“예 안녕하세요? 보건소에서 정기점검 나왔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러세요! 요즘은 워낙 병원이 많아서.......” 그렇다! 이 자는 바로 그 김창경이다. 옛날 바로 그 의사, 바로 그 사람이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분명하고도 또렷이 기억해 냈다.
“향정하고 마약관리대장을 보여 주세요, 아가씨” 정옥이 먼저 약품을 보겠다며 주사실 겸 조제실로 들어갔다. 처음에 우릴 맞은 들창코에 속눈썹의 통통하고 키가 작은 간호사가 허둥대며 한 평도 채 안 되는 주사실 어디 구석에서 검은 표지의 대장을 찾아 내밀었다. 내미는 그 손가락은 일이라고는 해보지 않은 통통하고, 너무 통통해서 손가락 관절마다 오목하게 들어간 조막손 같이 작은 하얀 손이다. 연이어 보관하고 있는 마약이며 향정약도 모두 내어 놓으라고 매몰차게 정옥이 다그쳤다. 간호사 둘이 울상이고 의사는 복잡한 표정으로 지켜보는데, 큰 키에 작은 눈이 마치 북극곰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북극곰 중에 대머리는 없지 않은가 하는 우스운 생각이 연이어 뇌리를 스쳤다. 다시 정옥의 설교가 이어졌고 원장의 얼굴이 차츰 짜증스럽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간호사들이 유리 앰플 안에 들어있는 주사제를 껍데기는 몽땅 버리고 알맹이만 까서 상자에 무더기로 부어놓고 사용하다 들킨 것이었다.
“원장님, 약품은 원래 보관하던 용기와 포장에 그대로 보관해야 하구요, 이렇게 보관하면 유통기한을 알 수 없고 오염되거든요?” 그 말에 내가 나서서 카메라를 들이댔다.
“찰카닥!” 디카였지만 마치 필카처럼 소리도 경쾌하게 플래시가 터졌다. 그 순간, “여보세요! 이거 지금 뭐하는 겁니까!” 제 깐엔 참을성을 발휘하며 듣고 있던 늙은 의사가 대뜸 발끈 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는 갑자기 입에 물고 있던 이똥을 모두 토해 내려는 듯 이마에 핏줄을 불끈 세우고 고래고래 악을 쓰며 대들었다.
“당신들! 당신들 말이요! 이래도 되는 거요!” 나는 빙긋 웃으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둑한 복도를 배경으로 큰 키에 넓은 이마하며 벌렁거리는 콧궁기가 말을 연상시키며 보통사람보다 훨씬 더 크다고 느껴졌다. 그 궁게이에서 삐져나온 색 바랜 코털이 네 개나 보였다. 그런 그의 얼굴의 관자노리에 푸른 핏줄이 불끈 섰고, 추운 날씨인데도 흥분한 때문인지 개기름인지 땀인지 무엇인가가 번지르르하게 번졌다. 육척의 후리한 키에 환갑을 넘기고 고희는 아직 먼 것 같고, 라며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괴성에 가까운 소릴 내지르며 역정을 부렸다. “당신들 지금 하는 짓이! 이렇게 나오면 안돼요! 지도 위주로 해야지! 나도 공무원 생활 했어요! 나도 보건소장 했단 말이요!” 그의 흥분한 침과 입에서 탈출한 파편들이 내 얼굴에 입술에 마구 떨어졌다. 난 입을 꼭 다물었다. 이러니 키 큰 작자들과 말할 때는 멀리 사정거리 밖에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취가 나면서 몹시 불쾌했다. 그러면서 옛날 불쾌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1980년도 경산군 고산면에 근무할 때였다. 날씨는 춥고 겨울바람은 마른 나뭇가지를 울리며 윙윙 부는데, 퇴근시간이 다 되어서 도청에서 무슨 급한 조사를 하러 나왔다며 산업계장님이 전 직원을 모아서 마을에 출장을 내 보냈다. 나는 밀양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던 터라 열차시간을 놓칠까 걱정하며, 겨울 저녁이 가까워 오는 늦은 오후 비포장의 자갈이 패여 나간,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가 가끔 있고, 길가에는 앙상한 버드나무가 줄지어 선 그런 시골의 석양 길을, 녹이 슬어 하얀 페인트를 칠한 고물 자전거를 달려 담당마을에 도착했다. 가보니 이장님은 자기 집 대문 기둥을 뽑아놓고 다시 묻을 모양으로 구덩이를 파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십 후반 정도로 뵈는 이장님께 나는 자초지종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이야기를 듣고선 급해 죽겠는데 말도 없이 자기가 하던 일만 그냥 꾸역꾸역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시계를 보았다. 말을 한 지 정확히 이십 분이 지나면서 그만 나는 참을성을 잃고 말았다.
“아! 사람이 말을 했으면 가타부타 답이 있어야지! 벙어리도 아이고 이게 뭡니까?”
“으잉? 이 자석이!” 기다리다 그의 행동에 그만 흥분한 나는 해줄지 말지 말하라며 따졌는데, 목소리가 너무 커서 놀랐던지 일하던 그가 갑자기 일어서며 삽으로 내 머리를 겨냥하여 때리려고 번쩍 치켜들었다. 무술이라면 한 무술 하는 나는 순간적으로 태권도장에서 배운 품세대로 두 손가락을 세워 그의 목을 찔러 넘어뜨리고는, 비호같이 달려들어 넘어져 엎어진 그를 목덜미와 허리춤을 잡고 역기 들 듯 들어서 땅에다 패대기쳐 버렸다.
“쿵!” “아이고~! 면서기가 사람 잡네! 아이고! 아이고! 아버이요~!”집 안에서 그의 아내가 총알처럼 튀어 나와 찢어지는 목소리로 고함에다 손뼉을 마주 치며 펄펄 뛴다. 연이어 공격을 하려는데 그의 늙은 아버지와 아내가 날아와 기겁을 하며 나를 잡고 말리는 통에 분을 못 삭이고 붙잡혀 씩씩대는데, 이장님이 일어나더니 날 보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고함지르는 내용은 너무 흥분해서 기억할 수 없지만, 그 고함지르는 목구멍에서 노~오란 가래가 굳어 덩어리로 된 굵은 콩알 만 한 알갱이가 마치 공기총에서 나온 총알마냥 빠르고 정확하게 날아와 내 입속으로 쏙 들어와 꼴까닥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늙은 이장님의 기관지에 붙어있던 가래, 그것도 뭉쳐져서 돌같이 딴딴해진 가래덩어리를 삼켜버리고 나니 불쾌해서 미칠 듯 했다. 나는 화를 내다말고 갑자기 입덧하는 새댁마냥 두 눈을 부릅뜨고 구역질을 마구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구역질을 해도 그 노~오랗고 혀에 느껴지던 딴딴하고 미끄러운 감촉의 가래덩어리는 되돌아 올라오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화난 사람 앞에 서면 의식적으로 입을 꼭 다무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그의 흥분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원장님, 점검은 원래 이렇게 하는 겁니다.” “원래 이렇게 하다이?” “나도 공무원 했단 말이요!” 자꾸 같은 그 소리에 화가 나서 받아 주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원장님이 과거에 공무원을 했든 말든 지금 점검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래도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 “원장님! 우리가 점검하는 것을 수긍할 수 없으면 처분이 나가고 나서 이의신청하시고, 또 행정소송도 하시고 하면 되는 것이고, 저희는 점검을 하면 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말에 원장은 대머리에 핏줄이 불끈 서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소리로 벼락 치듯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더니 그만 꽁무니를 빼고 허둥대며 원장실로 도망가 버렸다. 간호사 둘이 어쩔 줄 몰라 당황해 했다.
봄이었다. 삼월 하순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머니께선 그 즈음에 부쩍 수심이 많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맹장염에 걸려 지금의 가곡동 농협 자리에 있던 제세의원에 갔는데, 제세의원 원장은 맹장 수술은 할 생각은 않고 배가 아파 가기만 하면 진통제인 모르핀을 놓아 주었다. 이 통에 그만 아버지는 마약 중독자가 되고 말았다. 결국 맹장염 수술은 수산에 있는 수산의원에서 했는데, 마약중독이 심하게 되어있어 척추에다 아무리 마취제를 넣어도 마취가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묶어놓고 아제들이 달려들어 누르고 생배를 째고 수술을 하였는데, 이 탓에 아버지는 수술이 끝나고 나서도 제세의원에서, 부산의 약품 도매점에서, 어머니를 시켜 집에다 모르핀을 야매로 상자떼기로 사다놓고 맞았다. 그리고는 약기운이 떨어지면 괜스레 가족들을, 그중에서도 어머니를 집중적으로 매질을 했는데, 패는 쪽이나 맞는 쪽이나 사람으로선 차마 두 눈 뜨고 못 볼 생지옥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나는 초등학교 육년을 내리 우등상을 탔다. 그런데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 몸이 꼬챙이같이 야위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당신의 생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나를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어서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을 쪼개어 검진을 생각했다.
가곡동에서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용두교를 지나, 강변에 가득한 키 큰 대국 밀이 강바닥을 푸릇푸릇하게 뒤덮을 즈음, 하늘 높이 지저귀는 종달이 소리는 귀에 쟁쟁하고 따뜻한 봄볕이 종남산 응달의 진달래를 흐느끼는 분홍으로 물들일 때에, 기구한 우리 두 모자는 내리쬐는 봄볕의 뿌옇게 흐린 먼지 피는 비포장 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팔을 비틀어 팔꿈치가 빠져 삐긋하게 휘어진 왼팔이 힘드신 듯 부자연스레 흔들며 앞서갔고, 말라비틀어진 가는 모가지에 내리 삼년을 입으려고 시커먼 무명교복을 병든 병아리 우장 덮어씌운 것 같은 꼴을 한 나는 그런 행색의 어머니가 부끄러워 일부러 더 천천히 걸어 뚝 떨어져서 누가 볼세라 거리를 두고 그 뒤를 따라 갔다. 용두교를 건너 혜성당 한약방 근처 삼문동에 이르니 그날따라 장날이라 소들이 아무데나 똥을 퍽퍽 싸 놓은, 신작로 길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인지 아지랑인지 모를 그 무었을 보면서 가는데, 저 멀리 공설운동장 입구에서부터 대가리에 말뚝을 세로로 매단 성난 황소 한 마리가 우리 쪽으로 미친 듯 콧김을 내뿜으며 달려오는데, 키가 작달막하고 차돌삐 같이 생긴 소 주인은 고삐를 쥐고 봄볕아래 새까만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뛰다시피 하며 질질 끌려왔다. 어머니는 내가 걱정이 되는지 자꾸 뒤 돌아 보는데 집에 소를 먹여본 적이 없는데다, 흥분한 황소가 사람을 밟아 죽이던 그 무서운 살인적인 발광을 여러 번 보았던 나는 너무 무서웠다.
“옴마예! 저 건너로 가입시더 고마!” “야야 괘안타!” “괘안키는? 저놈 대가리 뿔 좀 보이소!” 나는 어머니께 화를 살짝 내었다. 원래 뿔질을 잘해 사고치기 좋아하는 황소는 대가리에 서너 자가 넘는 팔뚝만한 굵은 말뚝을 매달았다. 얼굴 길이보다 더 긴 말뚝을 매단 황소들은 대가리를 숙일 수 없어 뿔질을 하지 못했다. 앞에 오는 녀석이 그런 놈인 것이다. 겁에 잔뜩 질려 길가의 남의 집 대문 안에 피해 서 있으니, 놈이 냄새를 풍기며 핏발선 그 큰 눈에 콧궁기며 아가리로 허연 침과 거품을 줄줄 흘리고 씩씩거리며 지나갔다.
“야야! 다 왔다! 빨리 안 오고 머 하노?” 나를 재촉하는 어머니의 이마에도 봄 햇살이 땀에 반짝거렸다. 다리를 건너자 간판만 백화점인 안경과 양품을 팔던 미도백화점 앞을 지나 마이크로버스를 타려고 사람들 여남은 명이 서 있는 곳을 비집고 지나니 중파가 있었다. 진 죄도 없는데 우리는 숨을 죽이고 조신하게 파출소 앞을 지나 병원 앞에 섰다. ‘창경외과’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 병원에 가 보까?” “예, 여 가 보입시더.”나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괜찮대도 한사코 병원에 종합 진찰 받자는 어머니에게 지치고 짜증도 좀 나 있었기에. 우리는 초라한 행색으로 어머니는 바짝 마른 새까만 얼굴에 철지난 미색 겨울 쉐타에 나무색 몸빼이 차림이었고, 나는 쭈글쭈글한 무명교복차림이라, 병원 입구 복도 속 거울에 비친 우리 모자는 거지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간호사에게 먼저 조심스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어~ 야아 우짠지 좀 볼라꼬 왔구만요.” 단발머리에 얼굴이 하얗고 납작하게 생긴 깡마른 간호사가 쳐다보지도 않고 눈을 내리깔고 냉정한 소리로 되받는다.
“누구 말이죠?” “우리 야아 말입니더.”어머니의 말꼬리가 처지면서 약하게 울려나왔다.
“이름을 묻는 겁니다! 이름!” 간호사가 어머니를 갑자기 똑바로 째려보며 짜증을 섞어 높은 톤으로 말했다. 그 짜증내는 입을 보니 왼쪽 위의 덧니가 약간 삐죽하게 보이는데, 그래도 루즈는 대담하게 짙은 커피색이다. “아~! 이름요! 강철입니더 강철이! 이강철이요.” 간호사가 잽싸게 볼펜을 달렸다.
원장은 창경외과란 병원이름과 같은 김창경이었다. 자기 이름을 상호에 쓴걸 보면 의사가 된 것이 크게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종합검진 받는다고?” 큰 키에 넓은 이마, 장방형 얼굴의 잘생긴 중년 의사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여전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 야가 하도 애비가꼬 숨은 빙이라도 있는강 시퍼서예” “흐음! 그래?” 의사는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어린애에게 하듯 하대하며 듣고 있는데, 어머니는 말하면서 실없는 웃음을 비굴하게 실실 흘렸고, 그래도 그 얼굴에 걱정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바싹 마르고 때가 꾀죄죄한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내 그에게 맡겼다. 그런 나는 어린 생각에도 ‘물 떠파가 모욕이나 하고 올 걸!’ 하고 후회하며 자존심이 상했다. 의사는 하얗고 큰 깨끗한 손으로 땟국이 졸졸 흐르는 내 배를 여기저기 눌러보다 청진기를 대고 소리도 들어 보고 등 뒤에도 “들이 쉬고! 내 쉬고!”하며 청진기를 대어보곤 했다.
“엑스레이 검사하고 피검사도 한번 해보자.” 의사가 크게 자비를 베푸는 듯이 어머니께 한 마디 했다. “아이구 예! 해봐야지유!” 어머님은 황송해 하듯 마치 나의 발병이 당신의 잘못이기라도 한양 반말을 해쌓는 의사에게 굽실거렸다. 간호사가 역시 때가 새까만 내 팔을 잡고 고무로 붙들어 매더니 피도 빼고 엑스레이도 찍었다. 그런 한참 뒤 우린 다시 원장실에 가서 훈시를 들었다.
“결핵이네?” 의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그 순간 멍하게 아무 걱정도 없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때부터 의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귀에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물속에 가라앉아서 물 밖 세상의 소리를 듣는 듯 귀가 멍멍한데, 의사는 계속 어머니께 무슨 말인가 하고 있었다. 어머님은 그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받았다. 병원을 나와선 자꾸 눈물을 훔치면서 걸었고 나도 그냥 눈물이 자꾸 나왔다. 여섯 살이나 되는 첫아들이 있었지만 찰떡을 잘못 먹여 잃어버리고, 그 뒤로 딸을 줄줄이 네 명이나 낳고 얻은 아들이 또 그 무서운 결핵에 걸렸다는 것이다. 결핵 때문에 둘째 누님이 자살을 했고 작은 누님도 태종대에서 뛰어내리려다 말고 투병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결핵에 대해 이미 우리 모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동 사거리 대은약국에서 약을 샀다. 유한양행에서 나온 ‘유 파스짓’, 체중 십 킬로에 한 알씩, 나는 삼십육 킬로니 매 식후 네 알씩 먹으라고 했다. 어머니께선 약을 사서 나와서는 길가에서 연신 눈물을 훔치셨다. 지나가는 밀양여고 학생 둘이 흘끔거리면서 슬슬 피했다. 길 건너 버스 정류장에 사람을 짐짝처럼 꽉 채운 작은 버스가 사람들을 꾸역꾸역 토해 내듯 내려놓고 검은 매연을 내뿜으며 지나간다. 가슴이 컥 막히는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울지 마이소 옴마! 괘안습니더” 나는 말은 담담히 했지만 속으로는 큰 걱정이었다. 봄 햇살이 서편으로 기울었고 오후 너덧 시가 된 모양으로 햇살이 훨씬 약해져 가고 있었다. 갑자기 허파가 아픈 듯 한 느낌도 들었다. 우리 모자는 다시 장을 보면서 이런 저런 것들을 샀고, 성당 뒷골목으로 가서 촌 할매들이 갖고 나온 고사리며 돌가지를 좀 사고, 마지막으로 읍사무소 앞의 골목 안에 있는 수수장국을 맛있게 끓이는 떡집에 갔다. 장꾼들도 대부분 집으로 가고 장터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남은 물건을 떠리미 하려는 초조한 사람들의 눈초리만 우릴 감시하고 있었다. 마침 방금 쪄낸 김이 솔솔 나는 시루떡이 떡판에서 우릴 유혹하고 있었다. 어머니께선 키가 작고 오십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스님마냥 머리를 짧게 막깍기 한 떡집 주인남자에게서 떡 세 넙디기를 샀다. 매번 장날마다 떡을 사 오시는데 내가 누구보다도 더 시루떡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야야! 인자 고만 집에 가자.” 어머니가 슬픔이 가득 밴 목소리로 힘없이 한마디 하셨다.
“예! 옴마, 고마 가입시더.” 어느덧 짧은 해는 종남산에 기울었고, 분주하고 와글거리던 장터도 한산해져 길가에 세워둔 소달구지며 말 구루마 같은 것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남천 강엔 붉은 낙조가 그 긴 그림자를 끌며 썩은 강물 위로 뉘엿대며 흐느끼고 있었고, 우리 모자는 마치 사형선고라도 받은 죄수처럼 풀이 죽어 영남루 다리 위를 풍기는 악취 섞인 봄바람 속에 함께 휘적휘적 걸었다.
“옴마! 괘안으이끼네 넘 걱정 마이소 예?” “야가! 내가 뭐라 카나? 약이나 잘 무라. 잘 묵고 나사야제?” 내가 걱정되어 위로하니 어머니는 내심 걱정을 하면서도 애써 괜찮은 척하셨다. 노을 진 붉은 남천강물 위로 바람이 달려오면서 수면 위에 무수히 반짝이는 파문이 금빛으로 찍어놓은 듯이 찬란하게 빛났다. “옴마! 저기 함 보이소!” “뭐!” “저~기 예, 물 우혜!” “어! 그래, 참 좋네.” 나는 어머니의 옆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요 몇 년간은 그래도 집에 평화가 있었는데 불쌍한 우리 오매. 집에 도착하니 해가 저물었다. 그런대로 행복한 저녁시간에 우리는 떡을 펼쳐놓고 병든 누님과 어린 동생과 함께 둘러앉아 맛있게 먹었다.
육 개월 후, 다시 병원에 갔다. 의사는 내 앞에 앉아서 새로 찍은 시커먼 필름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더 심해졌네?” 열심히 약을 먹었는데 왜 더 심해졌단 말인가 하고 나는 억울한 심정이 되었다. 누님과 어머닌 상심으로 얼굴이 노래졌다.
“애 학교를 휴학 시켜라.” “휴학 하라카먼 집에서 놀아란 말이지요?” 어머니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래. 병이 자꾸 심해지니 주사도 좀 써야겠어.” 그가 청진기를 만지작거리다가 콧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빙빙 돌렸다. 갑자기 참을 수 없이 콧구멍이 가려운 모양이었다.
“학교에 보내면 안 될까요?” 누님이 물었다. 그때는 누님도 보건소에서 그 약을 타 먹고 있었다. 창문틀에 얹어 놓은 조그만 화분의 춘란에 붙었던 파리가 한 마리 날아와 의사의 콧등에 앉았다. 그가 얼굴을 좌우로 흔들면서 손을 휘젓는데 손목에 찬 시계의 금장 테두리가 연녹색 철제 블라인드 사이로 비스듬히 비쳐진 가는 햇빛에 금색으로 번쩍였다. “학교에 다니더라도 공부는 하지 말고 졸업장이나 타도록 하든지.” 파리가 그 손짓을 피해 날아서 그의 머리 위를 반원을 그리며 돌더니 뒤쪽의 하얀 벽면에 대가리를 아래로 하고 사뿐히 앉았다. 그리곤 그 대가리를 좌우로 돌리며 의사를 내려다보고 두 손을 싹싹 비벼 댄다.
이렇게 해서 나는 중학교 일학년 때부터 공식적으로 공부하지 않고 놀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초등학교 육년을 내리 우등상을 타며 전 과목 백점, 전 과목 “수”를 받던 내가 그 초등학교 친구들 앞에서 중학교 3년 동안 내리 영어선생님이나 수학선생님 혹은 다른 과목의 선생님들에게서 단골로 도맡아 놓고 공포분위기 조성용 학습도구로 발탁되어 처절하도록 매질을 당해야했고, 이때마다 나의 찬란한 과거에 대한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는 병약한 어린 자식을 살려보겠다고 지성으로 냄비에 유리주사기와 바늘을 삶아서 나의 야윈 뼈만 남은 엉덩이에 하루 두 번씩 삼년동안 줄기차게 바늘구멍을 내어 주셨다. 먹는 치료제 유-파스짓도 끊임없이 먹었는데 학교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고는 무슨 약이냐고 묻는 짝지 몰래 약을 삼키는 것도 큰 고역이었다.
밀양중학교 3학년5반 그 시절, 그 지겹던 수업분위기 조성용 학습도구로써의 매 맞는 역할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날도 장기영 선생님께 볼따구니 살이 다 헤어지도록 급우들의 영어공부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나의 뺨을 제공하고 내 자존심을 짓뭉갰고, 수학 시간에는 석광종 선생님의 수업 효율을 위해 또 손바닥과 종아리를 한 시간에 두 번씩이나 급우들 앞에 나가 영웅적으로 제공했다. 나의 매 맞는 모습에 급우들은 떠들다가도 긴장하게 되었고, 그 의식이 끝나면 모두가 정신을 집중하여 공부에 거짓말같이 열중하는 것이었다. 그때 매번 내가 앞에 끌려 나가다 보니 나도 어지간히 조심을 했는데, 모든 애들이 다 떠들게 되면 자연히 나도 주의력이 흐트러져 같이 떠들게 되었고, 갑자기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며 조용해져서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교실은 쥐죽은 듯 한 가운데, 선생님은 다른 애들은 다 놓아두고 오로지 나만 사랑하사 주목하며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고 계셨다. 그 다음 순서는 이내 정해진 대로 불려 나가 귀를 비틀고 뺨을 때리고, 꼬집고 발로 차고, 손바닥과 종아리, 아이들이 많이 떠들거나 선생님의 기분이 나쁜 날은 무시무시하게 굵은 살인적인 몽둥이로 엉덩이까지 주의력 집중용 학습도구로 제공 되었다. 나는 아마 선생님의 의도대로 충실하게 두려움과 고통을 표현하며 반응했던 모양으로 그렇게 발탁되기 까지는 나의 성적이 거의 영점에 가까운 탓이 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된 나의 박살난 자존심과 매질로 인한 고통들이 지금 서울지법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박판사나, 국회에서 고급 공무원 하는 나와 친했던 권모, 부산이며 서울에서 교수생활을 하는 녀석들과, 미국유학 가서 눌러앉아 유명한 학자가 된 송박사 등이 있기까지, 얼마나 큰 디딤돌 역할을 했던 것인지 그들 모두는 나의 희생과 공을 결코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는 것과, 그런 성취에 대해 나름대로 일종의 자긍심까지 느끼기도 한다.
가을이 오고 여름내 익을 대로 익은 새빨간 빛의 고추잠자리 떼가 흰 뭉게구름 피우는 푸른 하늘을 어지러이 맴돌고 있을 때에, 어머니는 장날을 받아 나를 데리고 또 그 병원을 찾아갔다. 이젠 병이 나앗겠거니 하고 기대에 부풀어서, 주사도 약도 착실히 맞고 먹고, 공부도 포기했으니까. 의례처럼 엑스선 사진을 또 찍었다.
“흐음!” 의사는 한숨을 푹 쉬더니 말이 없었다. 나는 불안했다. 지난 삼년을 어떻게 보냈는데, 이번에야말로 완치 되었으리라 믿고 찾아왔고, 기계에 몸을 내맡기고 사진을 찍으면서도 얼마나 기대했는데.......
“더 심해졌네? 도대체 약을 먹이기는 먹이나?” 의사가 화를 내며 어머니께 불호령을 내렸다.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의사보다 나이가 열 너덧 살도 더 많아 보이는 어머니는 화도 낼 줄 모르고 넋이 빠져 가만히 듣기만 하셨다.
어머니와 나는 멍한 상태로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창경외과 문을 나섰다. 가을바람이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는데 먼지가 눈을 못 뜰 정도로 불어왔다. 잠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추석이 가까워 오는 탓에 장날 거리는 몹시 분주 했다. 이 지긋지긋한 병마를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지, 억울하기도 하고 막막한 느낌에 기가 막혔다. 누님이 그랬던 것처럼 농약 한 병으로?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터벅터벅 걸어 집에 돌아 왔다. 하지만 지옥 같은 이승을 기어코 떠나지 못했던 것은, 그 무서운 엄한 현실 속에서도 오로지 내 한 몸에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오신 나의 어머니와, 내 불쌍한 누님들, 그리고 아직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동생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어머니는 사촌형님을 불러 놓고 한탄조로 나의 문제를 의논 했다. 그 형님의 의견대로 추석을 며칠 앞둔 때에 날을 받아 부산의 중앙동에 있는 “이정용 엑스선과”라는 전문의를 찾아갔다. 가면서 그동안 밀양의 창경외과에서 찍은 필름도 모두 갖고 갔다. 어머니와 누님을 동행, 셋이서 흔들리는 완행열차에 콩나물처럼 실려 앉지도 못하고 한 시간 동안 고통 속에 기름 냄새에 멀미를 하여 어질어질한 상태로 부산역에 도착하여 중앙동까지 걸었다.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고 밀양에서 찍은 사진까지 맡기니 일주일 후에 결과 보러 오라고 했다.
추석을 보내고 부산에 내려갔다. 갸름하고 하얀 얼굴을 한 의사가 사각의 작은 금테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더니 고개를 들어 똑바로 보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콧잔등에 안경으로 눌린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런데 사진을 보니 병이 아니더군요?” “예엣?” 우리는 의사의 이 말을 얼른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라꼬예?” 누님이 되물었다. 여전히 의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병은 없었고, 밀양 사진을 보아도 판독을 잘 못한 것이지 병은 아닙니다.”
“아!”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토록 절망했고, 그렇게 3년이란 세월동안 고통을 당했던 그 병원의 진단이 오진이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도 누님도 울었다. 그리곤 기쁨에 들떠 어쩔 줄 모른 채로 돌아오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 안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지만 어머님의 기뻐하시는 모습만 눈에 들어 왔을 뿐 세상에 부러운 게 없었다. 그렇게 중학교 3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때로부터 36년이 지났다. 그 옛날 그때 그 자리에서 창경외과를 경영하던 그 김창경이 제 말대로 다른데 가서 공직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퇴직을 하고선 다시 바로 그 자리에 돌아와서 같은 이름으로 의원을 개설하고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를 기억하지만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 내게 자기가 불법을 저지른 부분에 대해 사진을 찍었다고 화를 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세대에서 의사는 환자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지만 지금은 흔해 빠진 게 의사인지라 대접이 예전만 못하기도 하고, 그에게서 못 믿을 게 의사란 사람들임을 삼십년도 더 이전에 배웠던 나였다. 지금 내가 그에게 굽실거리지 못하는 것은 전혀 나의 탓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원장실로 찾아 들어갔다.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원장님, 갑자기 언성을 높이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그런데 박사학위를 갖고 계시고 대학교 외래교수라고 해놓았군요? 그 학위하고 외래교수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서를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나는 원장실에 앉아있는 그의 앞에 서서 벽에 걸려 있는 그런저런 내용의 액자 비슷한 것들을 보면서 그에게 사실인지를 확인하자고 들었다. 그의 얼굴이 갑자기 난감해 하는 표정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만감이 교차하여 착잡한 심정으로 다시 수족관 안의 그 열대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자체만으로 작은 세계를 이루고 있는 파릇한 빛이 충만한 어항 속을 들여다보면서, 한 때는 내가 저 열대어들의 신세가 되어 이집 주인의 손아귀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헤멨던 게 정말로 있었던 일인가 하며 야릇한 감정에 휩싸였다. 기분 탓인지 형광등 불빛에 아름답게 빛나는 열대어들의 화려한 색상과 유영이 더 사랑스러웠다.
갑자기 원장실 문이 열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온화한 얼굴로 탈을 바꾸어 쓰고 변장을 한 그가 다가왔다. “미안합니다. 제가 성격이 급하다 보니 그만 본의 아니게 화를 내었던 부분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그는 무슨 생각인지 사람이 돌변하여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해져 굽실거렸고, 늙은 그의 약한 모습에 연민의 정이 솟구쳤다. 내가 그의 연극에 넘어가고 있단 생각을 하면서 대꾸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정옥씨! 그만 보고 대충 정리해서 갑시다.” 그는 약 보관 문제뿐만 아니라 하루 내원 환자 수가 규정인 60명을 넘기고 있었고, 박사도 교수도 아니면서 박사란 학위와 함께 서울의 무슨 대학의 외래교수란 엉터리 액자를 걸어 놓고 환자들을 유혹하고 있기도 하였다. 정옥이 서류를 챙겨 확인을 받아 대충 마무리하고 따라 나서 그곳을 빠져 나왔다. 어느새 해가 구름 속에 숨어 버리고 시원한 겨울바람이 불어대는 거리는 퇴근시간이 되었는지 바쁜 걸음으로 종종거리며 걸어 다니는 젊은이들로 넘쳐흘렀다.
다시 아름다운 밀양교 위를 걸었다. 호수처럼 맑은 강물은 잔잔하게 출렁이고, 분수대의 장쾌한 솟구치는 물보라는 절로 보는 이의 힘을 용솟음치게 하고 있었다. 우린 즐겁게 이야기 하며 웅장하고 날아갈 듯 아름다운 그 이름 그대로인 영남제일루와, 남천강변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황금빛 잔디밭, 그리고 한 때는 점필재 선생이 앉아 제자들과 시를 읊조렸을 것이 분명한 농암대에서 옮겨 온 멋진 너럭바위와 주변의 소나무들을 감상하면서 퇴근시간에 맞추려고 발길을 재촉했다. 끝.
첫댓글 주신 글 감사합니다..,,성필하시고 행복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잘 읽었습니다. 글 읽는 동안 입 안에 맛이 돌아요 ㅎㅎ 오랫만에 인사 드립니다. 잘 지내시죠?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좋게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작년 밀양문협 연간지에 발표한 것인데 부끄럼을 각오하고 올려보았습니다. 무주에서 뵙고 시간이 많이 흘렀군요. 부산행사 때 꼭 뵙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 건필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