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 첫날, 눈이 내린다. 향나무가 선 정원에도 내리고 널따란 운동장에도 내린다. 직선을 그으며 소록소록 내리기도 하고 율동을 하듯 바람결을 따라 내리기도 한다. 제법 송이 굵은 모습으로 점잖게 내리기도 하고, 자그마한 송이가 되어 앙증스럽게 내리기도 한다. 어떤 곳엔 조금씩 쌓이기도 하고, 지상에 내려 앉자말자 금새 사그라지기도 한다. 한겨울 차가운 눈보라 같지는 않다. 꽃을 피우는 듯한, 춤을 추는 듯한 사위를 그리며 내린다. 겨울을 전별하는 손짓 같기도 하도, 봄꽃의 개화를 안내하는 몸짓 같기도 한다.
한 해의 전의 오늘도 눈이 내렸다. 나는 그 때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나들목을 벗어났다. 눈은 꽃가루처럼 뿌려졌다. 동네를 지나 교문을 들어설 때 운동장 가의 우람한 설송(雪松)에도 눈은 소복이 얹혀 있었다. 성탄제의 트리 같았다. 문득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고 했던 안도현의 '우리가 눈발이라면'이라는 시를 생각했었다. 그 눈발이 되고 싶었다.
안도현의 '눈발'처럼 살자던 일 년이 지났다. 새로운 삶의 터, 마성에서의 이태 첫날을 맞는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이 봄의 벽두에서 일 년 전 그 날의 눈이 내리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과연 외로운 이를 달래 줄 수 있는 편지가 되었으며, 아픈 이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새살이 되었던가. 오히려 외로운 이를 더 쓸쓸하게 하고, 아픈 이를 더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았던가. 그러한 것을 돌아보라고 오늘 다시 그 눈이 내리는지도 모르겠다.
언제 보아도 꾸벅 머리를 숙이며 정답게 인사를 하는 아이들, 허구한 날을 두고 학교엘 다니면서도 결석 한 번 할 줄 모르는 아이들, 길이 멀어도 멀다하지 않고 동리 골목길을 걷고, 논둑 밭둑 길을 걸어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 빌딩의 숲이며 휘황한 네온사인 꽃은 많이 못 봐도 온갖 푸나무 우거진 숲이며 갖가지 산꽃 들꽃들은 실컷 보고 사는 아이들.
그 아이들이 바깥 나들이에 나섰다. 초여름 신록이 대지를 싱그럽게 덮을 즈음이었다. 교육부에서 교육혁신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수도권 나들이가 어려운 산골 아이들을 초청하는데,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 기회가 주어지기를 애썼다. 다행이 우리 아이들이 초청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전국의 수많은 산골 학교 중에 다섯 개 학교를 가려 뽑는데 우리가 선택된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팔십 명의 전교생은 부푼 꿈을 안고 사흘 간의 일정으로 서울을 거쳐 한국국제전시장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은 전시장에서 발전하고 있는 우리 나라 교육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민속촌과 박물관으로 가서 선인들의 삶을 체험하면서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도 하고, 놀이공원으로 가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마음껏 뛰어보기도 했다. 영어마을로 가서 하루 밤낮 영어 생활을 하며 이국의 언어와 풍물을 배우기도 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십여 명의 일본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우리 학교를 방문했다. 일본의 어느 학교와 맺은 교류 협약에 따라 지지난해에 우리 아이들이 일본을 다녀 온 데 이어 지난해는 일본에서 우리 학교를 찾아온 것이다. 일본 친구들은 사흘 밤낮을 우리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 정성을 다해 대접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기도 했지만, 나라와 나라 사이의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학교 생활을 함께 체험해 보기도 하고, 지역 사회의 여러 모습을 함께 둘러보기도 하고, 홈스테이를 통해 우리네 가정 생활을 함께 겪게도 했다. 일본 아이들이 떠날 때 아이들은 서로 손을 흔들며 눈물을 지었다.
가을, 과학전람회에 나갔던 아이들은 상을 안고 돌아왔다. 전국 특상이라고 했다. 도자기의 고장답게 계영배(戒盈盃)의 원리에 관한 연구를 했었다. 교문 앞에 경축 플래카드를 높이 걸었다. 그 플래카드를 오래도록 걸어두고 싶었다.
따스한 일은 그 뿐 아니었다. 궁벽한 생활 환경을 사는 아이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를 궁리했다. 자수성가한 졸업생 그리고 지역 출신의 명망 있는 기업가와 뜻이 닿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부하여 지금은 벤처 기업의 대표가 되어 있는 분들이었다. 고향과 후배를 위해 장학금을 쾌척해 주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재력이 있다 한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고마운 분들을 만난 덕에 많은 아이들의 면학을 지원하고 격려해 줄 수 있었다.
길을 찾아 나섰다. 이 삶의 터에 처음 발을 디딘 날부터의 일이었다. 퇴근 후에 산을 오르는 일은 오래된 나의 습성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산이지만, 저녁 답에 운동 삼아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산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녹슨 기찻길이며 골목길을 걷기도 하고, 논둑이며 밭둑을 걷기도 하고, 개울이며 시내를 걷기도 하고, 언덕이며 비탈을 걷기도 하고, 기슭이며 등성이를 걷기도 했다. 그렇게 서너 달을 헤매다가 체념에 이를 무렵 산길 하나를 찾아내었다. 그것도 내쳐 달려나간 자전거를 산자락 밑에 세우고서야 오를 수 있는 산길이었다. 주지봉, 그 봉우리의 발견은 그 누가 찾아냈다는 신대륙에 비길 만한 것이었다. 매일 땀 흘리며 오르는 주지봉은 내 삶의 터를 받쳐 주는 굳건한 기둥이요, 즐거움이 되었다.
어쩌면 내 지나온 한 해는 길 찾기의 연속이었던지도 모른다. 그 길속에 주지봉이 있고, 아이들의 수도권 나들이가 있고, 일본에서 온 친구들이 있고, 성공한 분들의 장학금이 있다. 그러나 지난 시간의 흐름 속에는 그렇게 따스한 일만 있지는 않았다. 인간사 모든 것이 다 그러하듯이 삶 속의 일들이 그린 대로, 기대한 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희열도 있지만 낙담도 있고, 화합도 있지만 갈등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호오(好惡)와 애증(愛憎)도 함께 해야 하는 삶의 시간들이 점철되어 갔다. 그렇게 지난 시간들 속에는 살포시 떠오르는 미소도 있지만, 얼굴 붉어지는 시행착오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얼마를 더 살아야 착오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지난 해 그 날의 오늘, 봄이 오고 있는 대지 위로 다시 눈이 날리고 있다. 다시 따뜻한 눈발이 되라는 말일 것이다. 또 새롭게 시작한다. 시업식을 하고 입학식을 한다. 새 출발을 잘하자고 훈화한다. 서로 도우며 건강하게 성실하게 생활해 나가자고 말한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말만은 아니었다. 진정 귀담아 들어두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한다.
눈이 내린다. 함박함박 내리다가 꽃잎처럼 흩날리기도 한다. 이 눈 그치고 나면 산에 들에 꽃이 필 것이다. 절로 피는 꽃과 더불어 꽃을 피워야 할 곳이 있다. 아이들 가슴이다. 삶의 자리를 함께 하는 사람들의 가슴이다. 다시 그 날을 맞는 오늘-.(20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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