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겨울 방학은 거의 극장에서 보냈을 만큼 영화를 많이 보러 다녔다. 이듬해 3월 고교 입학까지의 긴 방학은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한껏 자유를 만끽한 시절이랄까...
별로 시간 보내며 즐길 장소가 없던 그 시절의 학생(아이)들은 만화방이나 빵집 등이 있었지만 극장이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를 충족할 유일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부 시지역에서는 공공도서관이 하나씩 있어 공부한답시고 괜히 여학생들하고 장난을 치거나 "계룡산" 같은 야한 소설들이나 뒤적이곤 했지만 이용자는 소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지금 다시 방화(국산영화)가 관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지만 관객들을 극장으로 다시 끌어 모은 것은 몇 년 안되었다. 그전에는 TV의 보급과 방화의 천편일률적인 소재와 제작기술이 외화의 작품성이나 재미를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쉬리"를 전후로 해서 기술과 재미를 가미한 작품성이 한층 향상되었다는 평을 영화팬들로부터 얻기 시작하면서 방화도 흥행에 성공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끝내 상업성 할리우드 영화를 따라잡지 못할 것 같은 방화가 투자를 아끼지 않는 제작자들과 새롭고 신선한 감성을 바탕으로 우리 전통적인 정서에 부합되도록 작품성을 높인 젊은 감독자들이 나와 60년대 이전의 한국영화를 다시 한번 중흥한 것 같아 반갑다.
다시 돌아가 그 당시 우리 어렸을 때(내가 주로 얘기하고자 하는 시절은 60년대 중후반부터 70년대 초반)는 극장이 유일한 최고의 오락장소로서 인기가 높았으며 그때도 특히 헐리우드 영화등 외화의 인기가 좋았다.
춘천에는 7개의 극장이 있었다고 기억이 되는데, 지금도 남아있는 육림극장(1,2관으로 분리)과 소양극장(피카디리, 아카데미로 분리), 문화극장(브로드웨이)이 개봉관이었고, 중앙시장 끝에 건물만 남아있는 중앙극장과 중앙로 춘천경찰서 (현재 한국은행) 앞에 있던 제일극장, 소양로 1가 기와집골 입구에 있던 아세아극장과, 소양로 3가 캠페지 앞에 있던 신도극장이 있었다. 나중에 남부극장(남부시장 뒤)이 있었다.
육림극장 등 개봉관은 서울과 동시에 개봉하면서 입장료가 싸서 인기가 좋았는데 추석날이나 명절이면 가족끼리 영화 보러 온 사람들로 극장 앞이 발 디딜 틈이 없이 많은 인파로 붐볐던 것이다.
어쩌다 학교서 단체로 극장을 갈 때면 반장의 전달소식에 환호성을 울려대고 들떠서 공부가 안되었으니(그러면 오후 몇 수업은 빼 먹었으니...) 오죽하면 시시한 소풍 갈거면 비라도 와서 극장 안에 가서 김밥 까먹으며 영화를 보러 가자고도 했던 것이다.
벤허, 쿼바디스, 십계,메리포핀스,007시리즈,황야의 결투,외팔이,대장 부리바, 콰이강의 다리, 나바론, 로미오와 줄리엣, 로마 대제국의 멸망, 사운드 오브 뮤직, 러브스토리, 닥터 지바고, 등등 금방 헤아리수 없을 정도의 많은 영화(명화)들을 봤던 것이다.
중 삼 끝나고 긴 겨울방학에는 주머니 사정도 그렇고 시간도 많고 해서 우리들은 주로 제일극장과 신도극장, 아세아극장을 많이 갔는데 개봉관에서 한참 지난 영화를 2편씩 동시상영을 해 주었던 것이다. 그것도 조조할인으로 아침나절부터 컴컴한 극장을 몇 시간씩 있다가 나오면 나오면서 한동안은 눈이 부시고 아파서 근방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이류 삼류극장들의 공통점은 우선 의자가 낡고 협소하며 무엇보다 스크린에서 비가 자주 내리고 중간에 잘 끊어진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때 만해도 보기 어려운 키스 신이라도 나올라치면 어김없이 필름이 끊어져 여기저기에서 "에이!"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제일극장의 필름상태가 그 중 양호하고 그 다음은 신도극장이 좀 나았다, 그러나 아세아극장을 어쩌다 도청넘어 소양로 고개길을 구불구불 내려가서 볼라치면 톱밥난로인데도 잘 안 펴서 썰렁하고 복도에는 화장실 냄새가 풍기고 스크린에서는 비가 내리다 못해 소낙비라도 줄줄 내리는 것 같고 오분에 한번 꼴로 필름이 끊기고 해서 도저히 스토리는 물론 어떤 화면이 비쳐지는지 조차 모를 영화를 돌려 줬던 것이다.
그래도 그 해 겨울방학 무렵 우리는 뒤주에 팥방구리 드나들 듯 열심히 영화를 보러 다니며 일류던 삼류던지 간에 컴컴한 극장만큼이나 숨겨진 우리의 감성을 찾아내고 예술문화에 대한 욕구를 진정해 나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