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수요일 오후, 리움미술관을 찾았다.
서울 남산 자락, 멀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태원 주택가에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을 문화 랜드마크가 생겼다. 국내 최고, 최대의 미술 컬렉션을 자랑하는 ‘삼성미술관 리움(Leeum)’이 착공한지 8년 만에 드디어 문을 열고 관객을 맞은게 지난 9월 13일이다.
그 전주에 사전 전화예약을 했다. 안내직원이 친절하게 어느날 몇시에 오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하루전날 전화가 왔다. 다음 날이 예약일이라는 것과 방문계획에 변경사항은 없는지를 확인했다. 이런 배려가 예사롭지 않았다.
지하철을 탔다. 시간에 맞춰가려면 전철이상 좋은 교통수단이 없다.
한강진 역에서 내렸다. 출구를 나오면서 기차역사를 개조한 파리의 '오르세'미술관이 센느강 북안에 자리잡고 있다는것과 '리움'이 지하철 한강진 역사와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이태원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웬지 '오르세' 만큼의 명소일 것이라는 예감에 마음이 설레였다.
전화 예약 할 때 " 1번출구로 나오시면 이태원 길인데 그 길로 곧장 올라오시면 미술관 안내판이 보입니다." 라던 안내 여직원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했다. 처음 가는 길은 가까운 거리도 멀게만 느껴진다. 한참을 걷는데 큰 길을 가로 질러 세운 이태원을 알리는 대형 철제 조형물이 보이고 그 조형물 아래 인도쪽 골목길 입구에 리움미술관을 알리는 작은 안내판이 눈에 띈다.
우리 어려서는 차가 두대 다니는 길을 행길이라고 했다. 요즘 말로는 2차선 길인데 그게 큰길이었다. 리움으로 들어서는 길이 2차선 큰길이었지만 그게 골목길로만 보였다. 워낙 큰길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의 사물분별력이 어른이 된 후 트인 탓일까? 약간 오르막에 구불퉁한 길을 따라 오른다. 좌측으로는 이태원풍의 고급 저택들이 자리하고 바른편 전면 으로는 새로 지은 아름다운 건물들이 사열하듯 서있고 그 배후에는 또다시 저택들이 들어 앉아 있다.
난 새로 지어놓은 길가의 그 건물이 미술관인줄 알았다. 건물 디자인도 예쁜데다 건물 외곽으로 청청한 대나무가 질서있게 서있고 대나무 하나 하나마다 정성스럽게 짚을 싸 묶어 전체 조경과 어울려 여간 아름답고 포근하지 않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상하다 싶어 마주친 사람에게 미술관 입구가 어디냐고 했더니 길에서 더 올라 가다가 세번째 골목에 있는게 미술관이라고 했다. 다시 길을 오르면서 그 건물에 붙어있는 삼성그룹사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일련의 건물들이 미술관 분위기에 맞춰서 특별히 설계된 것으로 느껴졌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곳은 이른바 삼성타운이었다.
삼성미술관은 건물부터 작품이다. 마리오 보타(스위스)·장 누벨(프랑스)·렘 쿨하스(네덜란드) 등 세계 건축계 ‘빅 스리’라고 꼽아도 무방할 최고 스타들이 한 채씩 설계, 현대 감각이 빼어난 건물 세 채가 빙 둘러섰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으로 눈길을 모았던 마리오 보타는 서울 강남 교보빌딩에 이어 고미술을 전시하는 ‘뮤지움 1’로 서울 거리에 또 하나의 흔적을 만들었다. 파리 아랍문화원으로 유명한 장 누벨은 현대미술관인 ‘뮤지움 2’를 맡았고, 2000년 건축계의 노벨상 격인 프리츠커상을 받은 렘 쿨하스가 삼성어린이교육문화센터를 설계했다.
세사람의 건축가가 각자 설계한 세개의 건축물이 하나의 로비에 연결되어 있다는게 신선하다 ‘전통의 뿌리와 힘을 상징하는 고고한 기하학’이라는 설명이 붙은 고미술관은 핑크빛이 살짝 도는 연갈색 외관이 ‘보타 스타일’을 그대로 담았다. ‘한국 전통 그릇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후문인데 맨 위층에서 자연광을 끌어들인 나선형 계단 벽면에 네모 공간들을 규칙적으로 배열해 놓은게 마치 가야 토기의 병목에 뚫어놓은 네모꼴 이미지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나선형 계단은 뉴욕에서 본 '구겐하임'의 나선형을 연상케 했지만 리움에서는 우리 도자기의 냄새가 물씬풍겨 나는게 구겐하임과는 다르다.
대지 700평·연면적 3000평으로 1층 불교미술·금속공예 2층 고서화 3층 분청사기 4층 청자로 꾸며졌다. ‘대지에서 솟아 올라온 현대 미술의 시공간’이라고 소개된 ‘현대미술관’은 대지 500평·연면적 1500평에, 지하 1층과 지상 1층에서는 외국 근현대 미술을, 지상 2층에서는 한국 근현대미술을 선보인다. 파이프 등 내부시설이 유리창을 통해 훤히 비치는 독특한 외관과 널찍한 앞마당까지 갖춘 삼성어린이교육문화센터는 대지 1200평·연면적 3900평 규모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건물과 건물 사이 빈공간에 심어놓은 자작나무 기둥의 흰 살결이 감미롭게 아름답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리움’은 ‘리’(Lee·李)와 미술관(Museum)의 ‘움’이 만난 합성어다.
‘리’는 미술 컬렉션을 시작한 고 이병철 회장과 이를 이어나간 이건희 회장, 또 후대에 이르기까지 ‘이씨 패밀리’를 통칭한다. 이건희 회장 부인인 홍라희 삼성미술관장이 지휘하는 ‘리움’은 경기도 용인의 호암미술관과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각각 나눠 선보이던 미술 소장품을 한데로 모은, 말 그대로 미술의 보고(寶庫)다.
길에서 미술관 중앙 로비로 들어가는 footpath는 특별했다. 좌측으로는 어린이교육문회센터가, 우측으로는 뮤지움2의 사잇길에 서면 두 건물의 속살이 내비치면서 미술관을 찾는이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사잇길은 말하자면 지상에서 지하 중앙로비로 연결되는 통로를 계단이 아닌 평면의 경사로로 처리하면서 바닥은 전체를 나무페널로 깔아 놓아 타박타박 걷는 기분이 여간 상쾌하지 않다. 로비로 들어서면 자연광선과 인공광선이 조합된 조명이 은은하다.
안내 데스크에서 예약확인을 하고 전시관에 들어갈 수 있는 두장의 티켓을 받았다. 한장은 뮤지엄 1과 2에 입장할 수 있고 남어지 한장으로는 어린이교육센터에 입장할 수 있다. 그리고 신분증을 맏긴다음 작품자동해설을 들을수 있는 목걸이용 소형 단말기(pda)를 받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작품앞에 서면 목에 건 단말기 카메라가 작품을 자동인식해서 작품을 해설해 준다. 그리고 pda 액정화면에는 작품 사진이 뜨고 작가와 작품명이 나타난다. 이런 시스템은 구겐하임에서도, 오르세에서도 , 또 루불에서도 없었던 최첨단 장비다.
고미술의 경우, 가야시대 금관, 고려시대 ‘청자진사 연화문 표형주전자’와 ‘금동대탑’, 조선시대 ‘청화백자 매죽문호’, 정선의 ‘금강전도’와 김홍도의 ‘군선도’ 등 국보 36점, 보물 96점이 포함돼 있다. 고려시대의 목조건축물 양식을 보여주는 '금동대탑'을 보았고 '수월관세음보살상'과 제작한지 1200년이 지난 '신라백지묵서 대광광불화엄경'이 방금 쓰기를 마치고 붓을 놓은듯 선명했다. 근현대미술은 김환기·이상범·변관식·백남준·이우환부터 젊은 작가 이불·서도호의 작품까지 고루 갖추었다. 특히 서도호의 "Some/One"은 전장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병사들의 군표인양 각기 다른 군번이 새겨진 수천개는 됨직한 많은 군표들을 모아 거대한 갑옷을 구성해 놓은 착상이 놀랍다.
외국 작품도 마크 로스코·앤디 워홀·요셉 보이스·윌렘 드 쿠닝·프랭크 스텔라·도널드 저드·댄 플래빈·루이스 브루주아·게르하르트 리히터·데미언 허스트·매튜 바니·샘 테일러 우드 등 대가와 스타들의 명품을 모았다. 앙드레아 구르스키의 사진작품 '파리, 몽파르나스'가 인상적이고 데미안 허스트의 '죽음의 춤(Dance of Death)'은 스테인리스 스틸과 유리로 만든 대형 케비넷액자 속에 석고, 금속, 합성수지로 만든 갖가지 모양의 작은 알약들이 질서정연하게 진열되어 있는 작품으로 '파리 몽파르나스'의 아파트 모습에서 엿볼수있는 닭장속 인간 군상들의 삶의 모습과 함께 "알약' 또는 '캎셀'이라는 화학약품의 홍수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실체를 드러내는 작품으로 가슴에 진한 감동을 준다.
개관식 전일 개관 만찬에는 건축가인 보타·누벨·쿨하스가 함께 참석했다고 한다. 세계 건축계의 거물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라, 세계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개관 기념전은 ‘뮤즈-움?: 다원성의 교류’. 삼성미술관 리움의 설계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는 전시다. 금년 말까지는무료 관람이고 내년부터는 유료관람으로 바뀔 예정이다.
분청사기 귀얄문 편병
분청사기 철화 모란문장군
분청사기철화 어문호
진양군 영인정씨 묘에서 출토된 유물
겸재의 인왕제색도를
루이스 부르조아
샘 테일러 우드
요셉 보이스
< 후 기 >
좋은 미술관이 생겼다는 건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우리 문화수준의 키가 부쩍 자랐다는 증좌일 것이다.
기업이 훌륭한 문화사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에 대해 고맙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정도 미술관을 지을만한 우리 건축가는 없는가
하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별로 알려지지 아니한 일본의 건축가 '다니구찌 요시오'가 최근
개관하여 뉴욕을 들끓게 하고 있는 "뉴모마'를 설계했다는 말을 들으면
웬지 허전하기 까지 하다.